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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촌기(陽村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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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촌(陽村)은 나의 문생(門生)인 영가(永嘉 안동(安東)의 옛 이름) 권근(權近)의 자호(自號)이다. 이 호와 관련해서 그가 말하기를,
“저 는 선생의 문하 가운데에서 나이가 제일 적은 데다가 학식도 가장 낮습니다. 그렇긴 하지만 항상 사모하면서 애써 지향하는 것은, 즉 비근(卑近)한 곳에서부터 출발하여 고원(高遠)한 경지에까지 도달해 보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의 자(字)를 또한 가원(可遠)이라고 하였습니다.
천하에서 비근하면서도 고원한 것을 찾아본다면, 안으로는 성(誠)이 바로 그것이요, 밖으로는 양(陽)이 바로 그것이라고 할 것입니다. 그런데 저 성으로 말하면 오직 군자(君子)의 덕이 갖추어진 뒤에야 실천할 수 있는 반면에, 이 양으로 말하면 아무리 어리석은 사람들이라도 모두 알고 있는 바라고 하겠습니다. 말하자면 태양이 봄날에는 따뜻하게 해 주고 여름에는 겁이 나게 했다가 가을에는 바짝 말려 주고 겨울에는 다시 온기(溫氣)를 느끼게 해 주는 것이 바로 그것인데, 이렇게 해서 한 해의 모든 일이 제대로 이루어져서 백성들이 삶을 영위할 수 있게 된다고 하겠습니다.
제가 나름대로 생각해 보건대, 성인(聖人)이 인재를 교화시켜 이루어 주려고 했던 것도 이와 같지 않았나 여겨집니다. 성인이 제자들을 교화시킨 시서 예악(詩書禮樂)의 가르침을 보아도 모두가 하늘의 때에 순응하라는 내용으로 채워져 있음을 알 수가 있는데, 중니(仲尼) 자신도 일찍이 ‘내가 너희들에게 숨기는 것이 있다고 생각하느냐? 나는 너희들에게 숨기는 것이 하나도 없다.[以我爲隱乎 吾無隱乎爾]’고 하였습니다. 그러고 보면 대개 중니야말로 천지(天地)와 같은 분이요, 일월(日月)과 같은 분이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천지는 광대하여 포용해 주지 않는 것이 없고, 일월은 교대로 밝게 빛나 비춰 주지 않는 것이 없습니다. 그리하여 그 사이에 각양각색의 형태로 존재하는 만물 모두가 빠짐없이 자신의 자태를 드러내 보여 주기 때문에, ‘솔개가 하늘에서 날고 물고기가 연못에서 뛰논다고 한 시는, 바로 위와 아래에서 모든 만물이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고 있는 것을 말한 것이다.’라 고 한 것입니다. 그러니 어찌 깊이 숨는다고 해서 드러나 보이지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 비록 음험한 사류(邪類)라고 할지라도 모두 자신의 실상을 숨길 도리가 없습니다. 그런 까닭에 부자(夫子)가 자연히 살펴보지 못하는 것이 없게 되고, 따라서 교화의 대상이 되지 않는 것이 없게 되어, 일월처럼 밝게 빛나고 천지처럼 광대하게 된 것입니다.
기수(沂水)에서 몸을 씻고 바람 쐬며 노래하고 싶다는 이야기를 통해서도, 화기(和氣)가 넘쳐흘러 요순(堯舜) 시대의 기상과 다를 바가 없다는 사실을 충분히 알 수가 있으니, 제때에 내리는 비가 만물을 적셔 변화시켜 주는 것처럼 그 당시에 얼마나 성장시키고 발전시켜 주었을지 더 말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하기에, 내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아, 중니가 자신을 따라 노니는 3000명의 제자와 서둘러 닮아 가려고 하는 70인의 사이에서 천지의 역할을 하고 일월의 역할을 한 것 모두가 양(陽)의 도를 발현(發現)하여 분명히 드러내 밝혀 준 것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를 보고서도 제대로 아는 자는 매우 적기만 하였다. 그런 가운데에서도 증자(曾子)와 자사(子思)가 다행히 저서를 남겨 오늘에 이르렀지만, 그것도 염락(濂洛 송대(宋代)의 성리학자)의 학설이 행해진 뒤에 학자들이 그 책을 읽고 나서야 비로소 중니의 천지에서 노닐고 중니의 일월을 보는 것처럼 되었다. 그리하여 진(秦)ㆍ한(漢) 시대 이래로 그늘져 가리어지고 막혀서 통하지 않은 나머지 흐릿하게 잘 보이지 않아 거의 귀신이나 물여우처럼 되어 있던 것들이, 이제 와서는 마치 맑은 바람이 홀연히 일어나 흔적 하나 남기지 않고 휩쓸어 버린 것처럼 명쾌하게 되었으니, 이 얼마나 통쾌한 일인가.
그리고 10월에는 양(陽)이 없지만 그달을 양월(陽月)이라고 말하는 것도 성인의 뜻이라고 할 것이니, 석과불식(碩果不食)의 교훈을 살펴보면 양(陽)을 일으켜 세우려는 성인의 뜻이 얼마나 지극한지를 알 수 있다. 또 《춘추(春秋)》는 성인이 기록해 놓은 글이다. 기린(麒麟)이 양물(陽物)인데도 붙잡히자 성인이 너무나도 상심했기 때문에 《춘추》를 지은 것인데, ‘춘왕정월(春王正月)’이라고 쓴 것에 대해서도 해설하는 이는 ‘대일통(大一統)’의 뜻이 그 속에 담겨 있다고 하였다. 아, 선비가 이 세상에 태어나서 때를 만나지 못한다면 그만이지만, 만약 때를 얻어 뜻을 펼 수만 있다면 천자의 대일통을 도와서 사해(四海)에 양춘(陽春)을 펼치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
아, 나 같은 사람이야 이제 다 늙었으니, 다시 더 무엇을 바라겠는가. 가원(可遠)은 자신의 호를 그렇게 짓게 된 까닭을 잘 생각해서 더욱 힘써 나가야 할 것이다. 힘써 나가려면 마땅히 어떻게 해야 하겠는가? 반드시 성(誠)으로부터 시작해야 할 것이다.
기미년(1379, 우왕5) 봄 3월 계유일에 짓다.
[주D-001]여름에는 …… 했다가 : ‘겨울 햇빛은 사랑할 만한 데 반해서, 여름 햇빛은 두려움을 느끼게 한다.[冬日可愛 夏日可畏]’는 말에서 나온 것으로, 한여름의 뜨거운 태양빛을 뜻하는 말로 쓴 것이다. 《春秋左氏傳 文公7年 註》
[주D-002]성인이 …… 가르침 : 《사 기(史記)》 공자세가(孔子世家)에 “공자는 시서 예악을 가지고 가르쳤는데, 그 제자가 대개 3000명에 이르렀고, 그중에서도 육예(六藝)를 몸에 통한 자는 72인이었다.[孔子以詩書禮樂敎 弟子蓋三千焉身通六藝者七十有二人]”라는 말이 나온다.
[주D-003]내가 …… 없다 : 《논어(論語)》 술이(述而)에 나오는 말인데, 이와 관련하여 “성인의 도는 마치 하늘과 같다.[聖人之道猶天然]”라는 정자(程子)의 주석이 붙어 있다.
[주D-004]천지는 …… 없습니다 : 《중 용장구(中庸章句)》 제30장에, 공자의 덕을 비유하면서 “천지가 잡아 주고 실어 주지 않음이 없고, 덮어 주고 감싸 주지 않음이 없는 것과 같으며,……일월이 교대로 밝게 비춰 주지 않음이 없는 것과 같다.[辟如天地之無不持載無不覆幬……如日月之代明]”는 말이 보인다.
[주D-005]솔개가 …… 것이다 : 《중용장구》 제12장에 나오는 말이다. 시는 《시경(詩經)》 대아(大雅) 한록(旱麓)에 보인다.
[주D-006]기수(沂水)에서 …… 이야기 : 《논 어》 선진(先進)에 나오는 공자와 제자 증점(曾點)의 대화를 말한다. 공자가 증점의 소원을 묻자, 증점이 “늦은 봄에 봄옷이 만들어지면……기수(沂水)에서 몸을 씻고 무우(舞雩)에서 바람을 쐰 뒤에 노래하면서 돌아오겠다.”고 하니, 공자가 탄식하면서 증점을 허여(許與)하였다.
[주D-007]제때에 …… 것 : 《맹자(孟子)》 진심 상(盡心上)에, 군자가 가르치는 다섯 가지 방식[君子之所以敎者五] 중의 하나로 소개되어 있는 말이다.
[주D-008]그 책 : 증자가 지었다는 《대학장구(大學章句)》와 자사가 지었다는 《중용장구(中庸章句)》를 말한다.
[주D-009]귀신이나 …… 것들 : 성리학 이전의 여러 잡다한 주장들을 폄하하여 비평한 말이다. 《시경》 소아(小雅) 하인사(何人斯)에 “귀신이 되고 물여우가 되면 사람들이 눈으로 분명히 볼 수가 없다.[爲鬼爲蜮 則不可得]”는 말이 있다.
[주D-010]10월에는 …… 있다 : 《주 역(周易)》 박괘(剝卦) 상구(上九)에 “큰 과일은 먹히지 않는다.[碩果不食]”고 하였는데, 이는 다섯 개의 효(爻)가 모두 음(陰)인 상태에서 맨 위의 효 하나만 양(陽)인 것을 석과(碩果)로 비유한 것으로서, 하나 남은 양의 기운이 외로운 것처럼 보이지만 결코 끊어지지 않고 계속 이어진다는 뜻을 보인 것이다. 그리고 그 효사(爻辭)의 정전(程傳)에 “10월은 여섯 개의 효가 모두 음(陰)인데도 그달을 양월(陽月)이라고 말하는 것은, 그 속에 양(陽)이 없다고 의심할까 두려워해서이다. 반면에 4월의 경우에는 여섯 개의 효가 모두 양(陽)이지만, 그것에 대해서는 성인이 음월(陰月)이라고 하지 않는다.”는 해설이 나와 있다.
[주D-011]기린(麒麟)이 …… 것인데 : 《춘 추좌전(春秋左傳)》 애공(哀公) 14년 조에 “서쪽 들판으로 사냥을 나가서 기린을 붙잡았다.[西狩獲麟]”는 경문(經文)이 나오는데, 두예(杜預)의 주(註)에 “기린은 인자한 동물로서, 성왕(聖王)의 아름다운 상서(祥瑞)이다. 그런데 당시에 밝은 임금이 없는데도 괜히 나왔다가 붙잡혔으므로, 중니(仲尼)가 주(周)나라의 도가 쇠한 것을 상심하고 아름다운 상서에 감응이 없는 것을 개탄하였다. 그래서 바로 이 때문에 노(魯)나라 역사를 기초로 해서 중흥의 가르침을 기록해 나가기 시작하다가, 획린(獲麟)의 한 구절에서 붓을 멈추었다. 기린이 잡힌 것을 보고 느껴서 붓을 잡았고 보면, 바로 그 사실에서 붓을 멈추는 것도 당연한 일이라고 하겠다.”라고 하였다. 두예가 지은 〈춘추좌씨전 서문〉에도 끝 부분에 비슷한 내용이 실려 있다.
[주D-012]춘왕정월(春王正月)이라고 …… 하였다 : 춘 왕정월은 ‘어느 해 봄 주(周)나라 왕이 쓰는 달력으로 정월’이라는 뜻으로, 《춘추》에 통용된 연대 표기 방식인데, 이와 관련해서 《춘추공양전(春秋公羊傳)》 은공(隱公) 원년 조에 “왜 왕정월(王正月)이라고 하였는가? 대일통(大一統)을 하기 위해서이다.”라고 하였다. 대일통은 천하의 제후(諸侯)가 모두 주나라 왕에게 귀의하여 이를 중심으로 통일되어야 한다는 의미이다.
규헌기(葵軒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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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가(永嘉)의 권희안(權希顔 권주(權鑄))은 내가 경애하는 사람이다. 그는 청렴하면서도 굳이 자신을 특이하게 내세우려 하지 않았고, 남들과 화합하면서도 구차하게 부화뇌동하려 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조정에 몸담은 지가 이미 오래되었는데도 자신의 뜻을 펼칠 기회를 얻지 못하였는데, 이번에 해바라기는 해를 향한다는 말을 취하여 자기 거처를 규헌(葵軒)이라고 명명하고는, 나에게 기문을 요청해 왔다.
이에 내가 의리상 사양할 수가 없기에 그의 요청을 승낙하고는, 내가 들은 바에 의거하여 다음과 같이 말해 주었다.
대저 이(理)는 어떤 일정한 형체가 없이 모든 사물에 깃들어 있다. 그리하여 만물이 표상(表象)하는 바에 따라 그 이(理)가 현현(顯現)되고 있는 것이다. 그런 까닭에 용도(龍圖)와 귀서(龜書)를 성인이 법도로 삼은 것인데, 여기에 시초(蓍草 점치는 풀)가 나오자 이것을 가지고 음양(陰陽)의 기우(奇耦)의 변화를 끝까지 살펴봄으로써, 만세토록 개물성무(開物成務)의 근본이 되게끔 하였으니, 그러고 보면 아무리 하찮은 물건이라 할지라도 어떻게 소홀히 취급할 수가 있겠는가. 가령 근세에 나온 관매(觀梅)의 학술 같은 것도 여기에 기초한 것이라고 할 것이니, 이를 계속 유추하여 확대시켜 나간다면 어찌 끝간 데가 있을 수 있겠는가.
그 런 까닭에 희안(希顔)의 증조부인 문정공(文正公 권부(權溥))이 도덕(道德)과 문장(文章)으로 백관의 으뜸을 차지하면서 자신의 거처를 국재(菊齋)라고 하자, 이를 이어서 조부인 창화공(昌和公 권준(權準))이 공명(功名)과 부귀(富貴)로 으뜸을 차지하면서 자신의 거처를 송재(松齋)라고 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존공(尊公)은 만호(萬戶)의 부신(符信)을 허리에 차고 외척(外戚)의 세력에 기대면서 숭교리(崇敎里) 연지(蓮池)의 옆에다 누대를 세우고 운금(雲錦)이라는 편액(扁額)을 내건 뒤에 자신의 가족은 물론이요 종족(宗族)과 함께 즐기곤 하였는데, 익재(益齋 이제현(李齊賢)) 문충공(文忠公)이 그를 위해서 기문(記文)을 써 주기까지 하였으니, 아, 정말 성대하였다. 그러고 보면 지금 희안이 해바라기에서 그 이름을 취한 것도 대개는 가법(家法)에 따른 것이다.
해바라기로 말하면, 《춘추(春秋)》에 실려서 전해지고 있을 뿐만이 아니라, 속수(涑水) 선생이 또 그것을 가져다가 시에 드러내 주기까지 하였으니, 해바라기로서는 대단한 대우를 받았다고 해야 할 것이다. 물과 뭍에서 피어나는 초목의 꽃들이 매우 많지만, 그중에서도 유독 해바라기만이 자기의 발을 제대로 보호할 줄 아니 지(知)의 표상이라 할 것이요, 또 해를 향할 줄 아니 충(忠)의 표상이라고 할 것이다. 그러니 군자가 해바라기에서 배울 점을 취하는 것이 어찌 이유가 없는 일이겠는가.
찬 서리가 내리는 가운데 국화는 누렇게 피고, 얼음과 눈이 뒤덮인 속에서도 소나무는 푸르른 자태를 드러내며, 비바람이 흔들어 댈수록 연꽃의 향기는 더욱더 맑아지고, 태양이 강렬하게 내리쬐면 해바라기는 자신의 마음을 그쪽으로 향하게 마련이다. 이렇듯 보통의 초목들과는 전혀 다른 면모를 보여 주고 있으니, 그 누가 이들을 경애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국화는 은일(隱逸)을, 소나무는 절의(節義)를, 연꽃은 군자(君子)를, 해바라기는 지(智)와 충(忠)을 각각 표상한다. 그런데 이들이 어떻게 해서 한집안에 모두 모여 있게 되었단 말인가. 할아버지와 아들 손자가 서로 잇따라 세상을 빛내면서 각각 이들을 취해 이처럼 자신을 표상하였으니, 권씨(權氏) 집안이 보통의 초목들과 한데 뒤섞여서 썩지 않을 것 또한 분명하다고 할 것이요, 따라서 앞으로 사림(士林)에 빛을 드리우고 왕국(王國)에 꽃을 피울 날을 기다려도 되리라고 여겨진다. 이렇게 기문을 지어 넣으면 어떨까 싶다.
정사년(1377, 우왕3) 섣달에 짓다.
[주D-001]남들과 …… 않았다 : 《논어》 자로(子路)에 “군자는 화합하면서도 부화뇌동하지 않는 반면에, 소인은 부화뇌동만 할 뿐 화합하지는 못한다.[君子和而不同 小人同而不和]”는 말이 나온다.
[주D-002]해바라기는 …… 취하여 : 송(宋)나라 사마광(司馬光)의 〈초하(初夏)〉 시(詩)에 나오는 “바람에 날리는 버들개지는 더 이상 없고, 해를 향해 기우는 해바라기만 있을 뿐.[更無柳絮因風起 惟有葵花向日傾]”이라는 유명한 구절에서 취한 것이다.
[주D-003]용도(龍圖)와 귀서(龜書) : 팔 괘(八卦)의 근거가 된 하도(河圖)와 홍범구주(洪範九疇)의 근거가 된 낙서(洛書)를 말한다. 하도는 복희씨(伏羲氏) 때에 황하(黃河)에서 용마(龍馬)가 등에 지고 나왔다는 그림이고, 낙서는 하우씨(夏禹氏) 때에 낙수(洛水)에서 나온 신귀(神龜)의 등에 새겨져 있었다는 글씨인데, 《주역》 계사전 상(繫辭傳上)에 “하도와 낙서가 나오자, 성인이 이를 법도로 삼았다.[河出圖 洛出書 聖人則之]”는 말이 나온다.
[주D-004]음양(陰陽)의 기우(奇耦)의 변화 : 양은 1ㆍ3ㆍ5ㆍ7ㆍ9의 기수(奇數)이고, 음은 2ㆍ4ㆍ6ㆍ8ㆍ10의 우수(耦數)인데, 바로 이 하늘의 생수(生數)와 땅의 성수(成數)가 서로 어우러져서 일어나는 만물의 온갖 변화를 말한다.
[주D-005]개물성무(開物成務) : 만물의 속성을 드러내 밝혀 천하의 일을 성취시킨다는 뜻으로, 《주역》 계사전 상(繫辭傳上)에 나온다.
[주D-006]관매(觀梅)의 학술 : 송 (宋)나라 소옹(邵雍)이 창안한 점치는 법을 말한다. 임의로 한 글자의 획수(劃數)를 취하여 8을 뺀 뒤에 남는 수로 괘(卦)를 얻고, 다시 한 글자의 획수를 취하여 6으로 감해 나간 뒤에 남는 수로 효(爻)를 얻고 나서, 역리(易理)에 의거하여 길흉을 판단하는 방법이다. 매화수(梅花數), 심역(心易), 매화심역(梅花心易)이라고도 한다.
[주D-007]이를 …… 나간다면 : 《주 역》 계사전 상(繫辭傳上)에 ‘촉류이장(觸類而長)’이라는 말이 나오는데, 이에 대해 주희(朱熹)는 본의(本義)에서 “일단 6효(爻)를 이룬 뒤에 그 효의 변(變)과 불변(不變)을 살펴 동정(動靜)의 기준으로 삼는다면, 하나의 괘(卦)마다 각각 64괘로 변하는 가운데 그 길흉을 정할 수가 있을 것이니, 이렇게 하면 모두 64의 제곱인 4096괘를 얻게 된다.”라고 해설하였다.
[주D-008]존공(尊公)은 …… 기대하면서 : 존공은 타인의 부친에 대한 경칭으로, 권렴(權廉)을 가리킨다. 그는 원(元)나라 진종(晉宗)으로부터 만호(萬戶)의 관직을 제수받았으며, 또 자신의 딸이 충숙왕의 비(妃)가 되면서 현복군(玄福君)에 봉해졌다.
[주D-009]익재(益齋) …… 하였으니 : 《익재난고(益齋亂藁)》 권6에 〈운금루기(雲錦樓記)〉가 전한다.
[주D-010]해바라기로 …… 전해지고 : 《춘 추좌전》 성공(成公) 17년 조에 “포장자(鮑莊子)의 지식 수준은 해바라기보다도 못하다. 해바라기는 그래도 자신의 발을 보호할 줄 아는데.[葵猶能衛其足]”라고 한 공자의 말이 전하는데, 두예(杜預)의 주(註)에 “잎과 꽃이 해를 향하게 하여 햇빛이 뿌리에 닿지 않게 함을 말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주D-011]속수(涑水) 선생이 …… 하였으니 : 속 수(涑水)는 송(宋)나라 사마광(司馬光)의 호이다. 그가 지은 〈초하(初夏)〉 시(詩)에 나오는데, “바람에 날리는 버들개지는 더 이상 없고, 해를 향해 기우는 해바라기만 있을 뿐.[更無柳絮因風起 惟有葵花向日傾]”이라는 구절은 유명하다.
[주D-012]국화는 …… 표상한다 : 송 나라 주돈이(周敦頤)의 〈애련설(愛蓮說)〉에, “국화는 꽃 중의 은자요, 모란은 꽃 중의 부귀한 자이며, 연꽃은 꽃 중의 군자이다.[菊 花之隱逸者也牡丹 花之富貴者也 蓮 花之君子也]”라는 말이 나오고, 《논어》 자한(子罕)에, “날씨가 추워진 뒤에야 송백(松柏)의 절조를 알 수 있다.”는 말이 나온다.
국간기(菊澗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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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년(同年)인 병부(兵部) 박재중(朴在中 박진록(朴晉錄))이 자기 거처에다 국간(菊澗)이라는 편액을 내걸고는 나에게 기문을 부탁하기에, 내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국화가 꽃 중의 은자(隱者)라고 한다면, 산골 물[澗]은 물 중의 유자(幽者)라고 할 것이다. 은자는 유자를 찾게 마련이고 유자는 또 은자를 불러들이게 마련이니, 이는 대개 그 기운이 서로 비슷하기 때문이다.
그 런데 재중과 나는 일단 포의(布衣)를 벗고 옥당(玉堂)에 들어선 뒤에 화려한 관직을 두루 역임하였으며, 사대부들이 선망의 대상으로 삼는 것들을 모두 받아들이기만 하였을 뿐 조금도 사양하는 바가 없었으니, 은자(隱者)를 사모하는 마음이 어디에 있다고 하겠는가. 그리고 재중은 기운이 수려하고 밝음은 물론 자질이 아름답고 맑은 관계로, 그 뜻이 고상(高爽)하고 그 자태가 한아(閑雅)하기만 하여, 마치 양금(良金)과 미옥(美玉)이 산을 빛나게 하고 바다를 윤택하게 해 주는 것과 같으니, 유자(幽者)와 가까운 점이 어디에 있다고 하겠는가.
그러나 재중이 특별히 취한 점이 또 이와 같고 보면, 그가 분명히 이러한 요소를 좋아한다는 것 역시 의심할 여지가 없다. 대체로 인자(仁者)는 산을 좋아하고 지자(知者)는 바다를 좋아한다고 하는데, 이는 바로 그들 속에 내재한 덕성(德性)이 그렇게 만드는 것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재중의 경우도 마음속으로 터득한 점이 분명히 있기 때문에, 자기 거처를 표상하려고 할 때 이와 같이 하지 않을 수가 없었을 것이다.
재중은 어버이에게 효성을 바치면서 어버이의 뜻에 따라 봉양하는 것을 가장 급선무로 여기고 있다. 따라서 그가 벼슬길에 나선 것은 어버이를 영광스럽게 해 드리기 위함이요, 자기 한 몸의 영달을 도모하려 해서가 아니었다. 재중이 자기 몸을 닦는 것 역시 오직 밝은 덕을 밝히는 데에 그 목적을 두고 있다. 따라서 그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문장으로 표현해 내는 것도 그 도를 현현(顯現)하려 함일 뿐이요, 자기 한 몸을 드러내어 과시하려고 해서가 아니었다. 그러고 보면 그가 벼슬을 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어버이에 대한 효성 때문일 뿐, 정작 자기 자신은 은일(隱逸)에 뜻을 두고 있다 할 것이요, 문장으로 표현해 내는 것도 어디까지나 밝은 덕을 밝히려 함일 뿐, 정작 자기 자신은 유한(幽閑)한 데에 뜻을 두고 있다 할 것이니, 공명(功名)과 부귀(富貴) 때문에 자신을 더럽히지 않을 것이 분명하다.
지금 재중은 하루아침에 임금의 지우(知遇)를 얻어 후설(喉舌 승지(承旨))의 지위로 뛰어올랐다가 다시 용맹스러운 군사들을 관장하는 자리로 옮기게 되었으니, 이만하면 어버이의 뜻에 따라 봉양하는 일을 이루었다고 할 수 있으니, 이 어찌 한갓 자기 몸뚱이만을 영화롭게 하려는 자들에게 견줄 수 있는 일이겠는가. 더군다나 재중이 산 위에 올라서고 물가에 임하노라면 눈에 닿는 것마다 감흥이 일어나서 구학(丘壑)과 연하(煙霞)에 대한 그리움을 도저히 감출 수가 없었을 것이니, 그가 자기 거처에다 이러한 편액을 내걸게 된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고 하겠다.
나는 모란(牡丹)과 가깝고 황료(潢潦)와 비슷한 사람이라고나 해야 할 것이다. 지금 모란과 같은 부귀도 부끄럽게 여기기에 충분한데, 더군다나 황료를 신명(神明)에게 어떻게 올릴 수가 있겠는가. 국화와 산골물을 우러러보노라니 내가 저절로 부끄러운 생각이 든다. 비록 그렇긴 하지만 천지(天地)도 본래 하나의 기운이요, 산하(山河)와 초목(草木)도 본래 하나의 기운이니, 어찌 그 사이에서 경중을 따질 수야 있겠는가. 아, 이런 차원의 이야기는 재중 정도의 인물을 만나야만 거론할 수가 있을 것이다.
경신년(1380, 우왕6) 여름 4월에 짓다.
[주D-001]그 기운이 …… 때문이다 : 의 기투합(意氣投合)을 뜻하는 말로, 《주역》 건괘(乾卦) 문언(文言) 구오(九五)의 “같은 소리끼리는 서로 응하고, 같은 기운끼리는 서로 찾게 마련이니,……이는 각자 자기와 비슷한 것끼리 어울리기 때문이다.[同聲相應 同氣相求……則各從其類也]”라는 말에서 나온 것이다.
[주D-002]인자(仁者)는 …… 하는데 : 《논어》 옹야(雍也)에, 공자의 말로 설명이 되어 있다.
[주D-003]어버이의 …… 것 : 입과 몸뚱이만을 봉양하는 저급한 효도에 상대되는 말로써, 《맹자》 이루 상(離婁上)에서 증자(曾子)의 예를 들어 양지(養志)를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
[주D-004]밝은 덕을 밝히는 데 : 《대학장구(大學章句)》의 이른바 ‘삼강령(三綱領)’ 중 첫째 조목으로 명명덕(明明德)이 나온다.
[주D-005]지금 …… 부귀 : 송 유(宋儒) 주돈이(周敦頤)의 〈애련설(愛蓮說)〉에 “국화는 꽃 중의 은자요, 모란은 꽃 중의 부귀한 자이다.……국화를 사랑하는 이에 대해서는 도연명(陶淵明) 이후로 듣기가 힘든데, 모란을 좋아하는 사람들이야 많을 것이 또한 당연하다.”는 말이 나온다.
[주D-006]황료(潢潦)를 …… 있겠는가 : 《춘 추좌전》 은공(隱公) 3년 조에 “진실로 분명한 믿음만 있다면,……길바닥에 고인 빗물 같은 것이라도 귀신에게 음식으로 올릴 수가 있고, 왕공에게도 바칠 수가 있을 것이다.[潢汙行潦之水 可薦於鬼神 可羞於王公]”라는 말이 나오기 때문에, 목은이 이렇게 말한 것이다.
양주(梁州) 통도사(通度寺)의 석가여래(釋迦如來) 사리(舍利)에 대한 기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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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 무(洪武) 12년(1379, 우왕5)인 기미년 가을 8월 24일에, 남산종(南山宗 계율종(戒律宗)) 통도사 주지(住持)인 원통무애변지 대사(圓通無礙辯智大師) 사문(沙門) 신(臣) 월송(月松)이, 그 사찰에서 대대로 소장해 온 바, 자장 율사(慈藏律師)가 중국에 들어가서 얻어 온 석가여래의 정골(頂骨) 하나와 사리(舍利) 넷, 비라 석굴(毘羅石窟)의 금박이 가사(袈裟) 하나와 보리수(菩提樹) 잎사귀에 쓴 약간의 불경(佛經) 등을 받들어 모시고 서울에 왔다. 그러고는 문하평리(門下評理) 이득분(李得芬)을 찾아가서 말하기를, “제가 을묘년(1375, 우왕1)부터 상의 은혜를 입고 이 절의 주지로 있었습니다. 그런데 정사년(1375, 우왕3) 4월에 왜적이 이곳에 쳐들어왔는데, 그 목적이 사리를 얻는 데 있었으므로, 깊이 움을 파고 숨겼다가 또 파내지나 않을까 겁이 나서 등에 지고 도망쳤습니다. 금년 윤5월 15일에 왜적이 또 쳐들어왔으므로 다시 등에 지고 절 뒷산으로 올라가 피신하였는데, 덤불 사이에 몸을 숨기고서 왜적의 말을 들어 보니 ‘주지는 어디에 있으며, 사리는 어디에 있느냐?’고 급하게 다그쳐 물으면서 사노(寺奴)를 매질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때 마침 날이 깜깜한 데다 비가 또 멈추지 않아 뒤쫓아오는 자가 없었으므로 산을 넘어 언양(彦陽)에 이르렀는데, 이튿날 내 말을 끌고 온 사노를 만나서는 서로 부둥켜안고 울었습니다. 그러나 막상 돌아가려고 하니 왜적이 아직 물러가지 않았고, 또 마침 신임 주지가 오게 되었는데도 봉안(奉安)할 곳이 없기에, 마침내 받들어 모시고 이렇게 오게 되었습니다.” 하였다.
그러자 이공(李公)이 그때 몸이 조금 좋지 않아서 손님을 사절하고 있다가, 사리가 이르렀다는 말을 듣게 되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사리가 우리 집에 왔단 말인가.” 하고는, 너무도 반갑고 기쁜 나머지 아프던 몸도 완전히 나아버렸다. 그리하여 장차 대궐 안으로 들어가서 상에게 아뢰려 하였는데, 마침 장씨(張氏)의 난이 일어나는 바람에 한 달 동안이나 그렇게 하지 못하다가, 찬성사(贊成事) 신(臣) 목인길(睦仁吉)이 신 홍영통(洪永通)과 상의하여 상 앞에서 아뢰게 되었다.
이 에 태후(太后)와 근비(謹妃 우왕(禑王)의 비(妃) 이씨(李氏))가 모두 공경하는 마음을 바치며 예물을 넉넉하게 내렸는데. 그중에서도 태후는 또 은그릇과 보주(寶珠)를 희사하는 한편, 내시(內侍)인 참관(參官) 박을생(朴乙生)에게 명하여 송림사(松林寺)에 봉안하도록 하였으니, 이는 그 사찰을 이공이 중수(重修)하여 낙성 법회(落成法會)를 열었기 때문이었다.
그 러자 나라 안의 단월(檀越 불교 신도)들이 귀천(貴賤)과 지우(智愚)를 막론하고 모두 물밀듯이 몰려와서 사리에 예배하고는 나누어 쪼개 가졌으니, 이공은 3매(枚)를 얻었고, 영창군(永昌君) 유(瑜)는 3매를 얻었고, 시중 윤환(尹桓)은 15매를 얻었고, 회성군(檜城君) 황상(黃裳)의 부인 조씨(趙氏)는 30여 매를 얻었고, 천마산(天磨山)의 납자(衲子 선승(禪僧))들은 3매를 얻었고, 성거산(聖居山)의 납자들은 4매를 얻었고, 회성군 황상의 부모는 1매를 얻었다. 이때 월송은 마침 밖에 나가 있었는데, 단월들이 몰려와서 사리를 구걸하고는 떠나갔기 때문에, 월송은 이런 사실을 전혀 알지 못하였다.
이듬해 6월 19일에 이공이 신(臣) 이색(李穡)을 찾아와서 말하기를, “과거 강남(江南)에 있을 적에 감옥에서 매질이 난무하던 그 시기에 생환(生還)을 기원할 목적으로 내가 직접 본국의 명산(名山)을 예배하고 다닌 적이 있었는데, 그때 통도사도 실로 나의 안중(眼中)에 들어 있었다. 그러다가 돌아오고 나니 현릉(玄陵)께서 특별히 향(香)을 내리면서 나에게 직접 각처를 찾아다니며 예배를 행하라고 명하셨다. 그래서 다시 통도사를 찾아가서 요청한 결과 사리 6매를 얻었으니, 나와 사리 사이에는 뭔가 인연이 없다고는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사리가 통도사에 있게 된 것은 신라(新羅) 선덕대왕(善德大王)의 조정 때부터인데, 우리 국가가 세워진 이래로 오백 년이 되어 가는 지금에 이르도록 사리가 송경(松京)에 이른 적은 일찍이 한 번도 없었다. 그런데 주상 전하께서 이제 새로이 임어(臨御)하시고 우리 신하들이 관직에 몸을 담게 된 이 시기에, 월송 스님이 사리를 받들어 모시고 이르렀으니, 이 또한 분명히 우연이 아니다. 그래서 내가 상께 보고를 드렸더니, 상께서 ‘예문(藝文)을 담당한 신하인 이색에게 갖추어 쓰도록 하라.’고 하셨으므로, 내가 이렇게 찾아오게 되었다.” 하였다.
이에 신 이색이 월송 스님으로부터 그 일을 확인하고 나서 이공의 말을 잇따라 적어 넣은 뒤에, 그 제목을 ‘통도사석가여래사리지기(通度寺釋迦如來舍利之記)’라고 하고는, 이달 21일에 기록하였다.
[주D-001]장씨(張氏)의 난 : 고려 우왕 5년 9월에 왕의 유모인 장씨가 조정의 신하들을 제거하려고 모의하다가 최영(崔瑩)에 의해 유배된 뒤 죽음을 당한 사건을 말한다.
조씨 임정기(趙氏林亭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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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 양 조씨(平壤趙氏)는 정숙공(貞肅公 조인규(趙仁規))이 충렬왕(忠烈王)을 보좌하며 원 세조(元世祖)를 섬겨 성대하게 원(元)나라의 관원이 되면서부터 여러 자제들이 모두 대관(大官)의 반열에 오르기 시작하였는데, 그중에서도 둘째 아들인 충숙공(忠肅公 조연(趙璉))이 특히 중후(重厚)한 군자의 면모를 갖추었으므로, 지금까지도 칭송해 마지않고 있다. 그의 아들인 판서공(判書公)이 병으로 사직을 청한 뒤에 평주(平州 평산(平山)의 옛 이름) 남쪽 철봉(鐵峯)의 동쪽에서 안식을 취하며 휴양하자, 그의 아들 형제가 옆에서 모시면서 아침저녁으로 봉양하였으니, 이것이 바로 조씨의 임정(林亭)이 세워지게 된 연유이다.
조 씨의 둘째 아들로서 통례문 판관(通禮門判官)으로 있는 완(琬)이라는 자가 나를 찾아와서 말하기를, “우리 부모님이 여기에다 터를 잡고 사신 뒤로 대개 몇 년이 지나는 동안, 거처하실 곳도 그런대로 구비되었고 드실 음식도 그런대로 갖추어 올리게 되었습니다. 대개 우리 구씨(舅氏)인 사암공(思菴公 유숙(柳淑))이 세상을 떠난 뒤로는, 생활을 담박하게 하는 가운데 더 이상 맛보고 싶은 일도 없게 되었습니다만, 형체를 잊음으로써 세상의 일도 자연히 잊게 되고 몸을 즐겁게 함으로써 마음도 자연히 즐겁게 되기에 이르렀으니, 우리 부모님이 여생을 보내면서 후손을 보호해 주는 그 도리가 조금은 이루어지게 되었다고 하겠습니다. 여기에 또 우리 형제가 화목하고 평화스러운 분위기를 유지하는 가운데 그 속에서 선침(扇枕)을 하고 있으니, 그 즐거움이 또 어떻겠습니까. 바야흐로 여름날의 경치가 본격적으로 펼쳐지게 되면, 산 빛과 물 기운이 위아래에서 스며들어 촉촉이 적셔 주는 가운데, 비가 오려고 할 때의 풍경이라든가 갖가지 모양의 구름들이 아침저녁으로 바뀌어 가면서 우리 어버이의 마음을 즐겁게 해 드리고 있으니, 이것은 또 하늘이 우리 조씨의 임정(林亭)을 완전무결하게 만들어 주려는 것이라고도 하겠습니다. 그래서 우리 형제가 마음속으로는 실로 유쾌하게 여기고 있습니다만, 그렇다고 해서 우리 자신의 입으로 떠벌릴 수도 없는 형편입니다. 하지만 또 이에 대해서 또 글로 남겨 두지 않는다면, 어버이에 대한 우리의 마음을 널리 드러낼 수가 없게 되어, 임정을 지은 것 역시 부역(賦役)을 피하기 위해 깊은 산속으로 들어간 사람이나 명예를 구하기 위하여 승경(勝景)을 표방한 사람들과 하등 다를 바가 없게 되고 말 것입니다. 그러니 선생께서 기문을 지어 주셨으면 합니다.” 하기에, 내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무릇 군자가 자기 어버이를 모실 적에는 심지(心志)와 구체(口體)의 봉양을 분간할 줄 알아야 한다고 하였는데, 조씨 형제와 같은 경우는 이 두 가지를 모두 조화시켰다고 할 수 있겠다.
그 리고 평주(平州) 고을로 말하면, 경읍(京邑)과 거리가 가까운 관계로 사대부의 별장이 많기도 한데, 벼슬을 하고 있거나 그만두었거나 간에 왔다 갔다 하기가 그렇게 편할 수가 없다. 따라서 조씨 형제들도 관청의 일이 조금 한가하거나 휴가를 얻을 틈이 생기면 필마(匹馬)로 드나들곤 할 테니, 어찌 유독 임정에서 어버이를 즐겁게 해 드리는 일만 서술할 수가 있겠는가. 그 도로 상에서 아름다운 풍경을 노래하는 흥치 역시 형제들 스스로 터득한 점이 또 깊으리라고 여겨진다.
나는 병이 들어서 문밖으로 나가 보지 못한 지가 벌써 몇 년이나 되었다. 그래서 조씨 형제에 대해서 더욱 부러운 마음이 들기에, 끝에다 이 점을 조금 언급하게 되었다. 백씨(伯氏)는 이름이 호(瑚)로, 나의 문생(門生)이다.
[주D-001]선침(扇枕) : 어 버이를 극진하게 봉양하는 것을 말한다. 후한(後漢)의 황향(黃香)이 무더운 여름철에는 어버이를 위해 침상에서 부채를 부쳐 시원하게 해 드리고[扇床枕], 추운 겨울철에는 자신의 체온으로 이부자리를 따뜻하게 해 드렸던[身溫席] 고사가 전한다. 《東觀漢記 黃香》
[주D-002]심지(心志)와 구체(口體)의 봉양 : 심지의 봉양은 어버이의 뜻에 맞추어 드리는 것을 말하고, 구체의 봉양은 의식(衣食)을 풍족하게 해 드리는 것을 말하는데, 《맹자》 이루 상(離婁上)에 이에 대한 내용이 나온다.
양진재기(養眞齋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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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진재(養眞齋)는 전(前) 안동 대도호부사(安東大都護府使) 강공(姜公)이 거처하는 곳이다. 공이 병석에 오래도록 누워 있다가 그의 외제(外弟)인 장원(壯元) 김순중(金純仲)에게 부탁해서 나에게 기문을 요청해 왔다.
나 로 말하면 대개 공보다도 먼저 병자의 신세가 된 몸이다. 지금 비록 일어나 있다고는 하더라도 힘이 없는 것은 계속 마찬가지이고, 간혹 이따금씩 산통(酸痛)이 몰려올 때면 도저히 일어날 수도 없는 형편이다. 하지만 다시 조정의 직책에 복귀하게 되면 의기양양하게 도당(都堂)에 들어갔다가 몇 달 뒤에 또 그만두곤 하는데, 그러고 보면 병이 일어났다 멎었다 하는 것에 대해서 나만큼 그 맛을 제대로 알고 있는 사람도 없다고 할 것이다. 그러니 공이 이 시대의 문장가에게 글을 부탁하지 않고 나에게 요청해 온 것도 어쩌면 당연한 일이라고 하겠다.
대 저 사람은 이 기운[氣]이라고 하는 것을 받아서 생명을 영위하는데, 그것은 바로 강건(剛健)한 건(乾) 즉 양(陽)의 기운과 유순(柔順)한 곤(坤) 즉 음(陰)의 기운이요, 이것을 다시 구체적으로 나누어서 말한다면 수(水)ㆍ화(火)ㆍ목(木)ㆍ금(金)ㆍ토(土) 즉 오행(五行)의 기운이 바로 그것이다. 그리고 양기 음우(陽奇陰耦)와 양변 음화(陽變陰化)의 근원을 찾아본다면 무극(無極)의 진(眞)으로 귀결된다고 하겠는데, 이 무극의 진에 대해서는 언어와 문자를 가지고 표현하기가 어려우나, 《시경(詩經)》에서 ‘상천의 일은 소리도 없고 냄새도 없다.[上天之載 無聲無臭]’라 고 한 것이 바로 무극의 소재(所在)를 암시한 것이 아닌가 싶다. 그래서 주자(周子)가 태극도(太極圖)를 지을 때에도 ‘무극이태극(無極而太極)’이라고 하였으니, 이는 대개 태극이 하나의 무극이라는 것을 찬양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하겠다.
그것이 하늘에 있어서는 혼연(渾然)할 따름이니, 이는 바람이 불거나 우레가 치기 전의 그것이요, 사람에 있어서는 적연(寂然)할 따름이니, 이는 사물을 응접하기 이전의 그것이라고 할 것이다. 그런데 비록 바람이 불고 우레가 치더라도 혼연한 그것은 조금도 변함이 없다고 한다면, 비록 사물을 응접한다 할지라도 적연한 그것이야 또 어떻다고 하겠는가. 이를 거울에 비유하자면, 거울에 비치는 대상 자신이 아름답거나 추하게 보일 따름이지 정작 거울 자체는 아무 자취도 남기지 않는 것과 같다 하겠다. 그러니 거울이 어떤 대상을 비춰 준다 해서 그 대상에 영향을 받는 일이 어찌 한 번이라도 있을 수가 있겠는가.
이를 통해서 사람이란 존재도 태어나면서부터 이미 무극의 진을 구비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그런데 오직 대인(大人)의 자격을 갖춘 자만이 그것을 내부에서 잃지 않기 때문에 대인이 될 수가 있는 것이니, 외부로부터 그것을 얻어서 대인이 될 수 있는 것은 아니라고 하겠다. 옛날에 예를 극진히 해서 임금을 섬긴 것은 아첨이 아니요 진(眞)의 발로였으며, 병을 이유로 거절했다가 다시 나가서 조문했던 것도 속임수가 아니요 진의 발로였다. 그런데 지금은 사욕(私欲)만 앞세워 끝없이 치달리고 있는 까닭에, 술수(術數)를 써서 서로 배척하는가 하면 간교한 꾀를 써서 자신의 세력을 확장하고 있는데, 그런 와중에서 완전함을 구하려다가 거꾸로 비난을 초래하는 경우도 비일비재한 실정이다. 이것이야말로 거짓을 행하는 것이니, 날로 졸렬해지는 일이라고 해야 하지 않겠는가.
강공이 비록 병이 들기는 하였지만, 그래도 자신의 거처에 양진(養眞)이라는 현판을 내걸었고 보면, 그가 외물의 유혹에 넘어가지 않으리라는 것을 분명히 알 수가 있다. 나는 그저 귀로 듣고는 바로 입으로 내놓는 공부 정도일 뿐이라서 마음을 기르는 방법에 대해 모르지는 않으면서도 정작 실천은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다. 《맹자(孟子)》에 “마음을 기르는 방법으로는 욕심을 적게 하는 것보다 좋은 것이 없다.[養心莫善於寡欲]”는 내용이 들어 있는데, 이 과욕(寡欲)이라는 말을 가지고 진(眞)을 기르는 제일의(第一義)로 삼는 것이 어떨까 싶다.
경신년(1380, 우왕6) 7월 초하루에 짓다.
[주D-001]대저 …… 하겠는데 : 송 유(宋儒) 주돈이(周敦頤)의 〈태극도설(太極圖說)〉에 나오는 앞 부분의 내용을 간추려서 정리한 것인데, 이를 압축해서 소개하면, “무극(無極)이 곧 태극(太極)인데, 태극에서 음양이 생기고, 음양에서 오행이 생긴다. 그러고 보면 오행은 하나의 음양이요, 음양은 하나의 태극이요, 태극은 본래 무극이다. 그리하여 무극의 진(眞)과 음양오행의 정(精)이 묘하게 합하고 엉겨서 건도(乾道)는 남자를 이루고 곤도는 여자를 이루는데, 이렇게 해서 만물의 변화가 끝없이 이루어지게 되는 것이다.”라고 되어 있다. 그리고 《주역》 건괘(乾卦) 상사(象辭)에 “하늘의 운행이 강건하다.[天行健]”는 말이 나오고, 곤괘(坤卦) 문언(文言)에 “땅의 도는 유순하다.[坤道 其順乎]”는 말이 나온다. 양은 1ㆍ3ㆍ5ㆍ7ㆍ9의 기수(奇數)이고, 음은 2ㆍ4ㆍ6ㆍ8ㆍ10의 우수(耦數)인데, 바로 이 하늘의 생수(生數)와 땅의 성수(成數)가 서로 어우러져서 일어나는 만물의 온갖 변화를 말한다.
[주D-002]상천(上天)의 …… 없다 : 《시경》 대아(大雅) 문왕(文王)에 나오는데, 형이상(形而上)의 도(道)를 비유할 때 곧잘 인용되는 구절이다.
[주D-003]대인(大人)의 …… 것이니 : 《맹자》 이루 하(離婁下)에 “대인이란 어린아이의 마음을 잃지 않는 자이다.[大人者 不失其赤子之心者也]”라는 말이 있다.
[주D-004]예를 …… 것 : 《논어》 팔일(八佾)에 “내가 예를 극진히 해서 임금을 섬기는 것에 대해서 사람들은 아첨한다고 여긴다.[事君盡禮人以爲諂也]”고 공자가 말한 대목이 나온다.
[주D-005]병을 …… 것 : 맹자가 자신을 대하는 제(齊)나라 왕의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자 병을 이유로 면회를 거절하고는 다음날에 다른 사람의 조문을 간 데 대해서 사람들이 미심쩍게 여겼던 것과 관련된 이야기가 《맹자》 공손추 하(公孫丑下)에 나온다.
[주D-006]완전함을 …… 경우 : 비방을 면하려다가 오히려 비방을 받는 것을 말한다. 《맹자》 이루 상(離婁上)에 “예상치 못한 칭찬도 있고, 완전함을 구하려다가 받는 비방도 있다.[有不虞之譽有求全之毁]”는 말이 나온다.
[주D-007]거짓을 …… 않겠는가 : 《서경(書經)》 주관(周官)의 “덕을 행하면 마음이 편안한 가운데 날로 아름다워지겠지만, 그 반면에 거짓을 행하면 마음이 수고로운 가운데 날로 졸렬해지게 될 것이다.[作德 心逸日休 作僞 心勞日拙]”라는 말을 인용한 것이다.
[주D-008]귀로 …… 공부 : 자 신의 학문이 천박하여 실학(實學)이 못 된다는 뜻의 겸사(謙辭)인데, 《순자(荀子)》 권학(勸學)의 “소인이 공부하는 것을 보면, 귀로 듣고는 곧바로 입으로 내놓는다. 입과 귀의 거리는 불과 네 치일 따름이니, 일곱 자나 되는 이 몸을 어떻게 아름답게 할 수가 있겠는가.[小人之學也 入乎耳出乎口 口耳之間則四寸耳 曷足以美七尺之軀哉]”라는 말에서 유래한 것이다.
[주D-009]마음을 …… 없다 : 《맹자》 진심 하(盡心下)에 나오는 말이다.
육우당기(六友堂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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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가(永嘉) 김경지(金敬之) 씨가 자기 집의 이름을 사우(四友)라고 하였으니, 이는 대개 강절(康節) 선생의 눈과 달과 바람과 꽃을 취한 것이었다. 그가 나에게 그 뜻을 해설하여 기문을 지어 달라고 요청하였는데, 나는 굳이 강절의 그러한 뜻을 본받고 싶지 않았을뿐더러 한가한 틈을 낼 수도 없었기 때문에, 오래도록 그의 요구에 부응하지 못하였다.
그 런데 그가 여흥(驪興 여주(驪州)의 옛 이름)에 있으면서 나에게 글을 보내오기를, “지금 우리 모친의 집에 와서 보니, 강과 산의 경치가 너무나도 좋기만 합니다. 그래서 아침저녁으로 나를 위로해 주는 것이 꼭 눈과 달과 바람과 꽃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기에, 강과 산을 보태어서 육우(六友)라고 하였으니, 선생께서 이에 대해 가르침을 내려 주셨으면 합니다.” 하기에, 내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나는 몸이 쇠해서 병든 지가 오래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천시(天時)가 위에서 끝없이 변화해도 나는 그저 멍청하게 바라다보고 있을 따름이요, 지리(地理)가 밑에서 조용히 순응해도 나는 그저 아무 생각 없이 대하고 있을 따름이다. 하지만 강절의 학문을 보면 상수(象數)에 깊은 조예가 있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지금 그대가 비록 강과 산을 맨 윗자리에 올려놓고서 강절과는 같지 않다는 점을 보여 주려 하고 있지만, 《주역(周易)》의 육룡(六龍)과 육허(六虛)에 서 바로 강절의 학문이 나왔고 보면, 육우(六友)라는 것도 결국은 강절에게로 귀속되는 것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비록 그렇긴 하지만, 내가 일단 강절의 그러한 뜻을 본받고 싶지 않다고 말했고 보면 그와 같은 설명은 그만두어야 할 텐데, 그렇다고 하더라도 어찌 할 말이 없기야 하겠는가.
산은 우리 인자(仁者)가 좋아하는 바이니 산을 보면 우리의 인(仁)을 보존할 수가 있을 것이요, 물은 우리 지자(智者)가 좋아하는 바이니 강을 보면 우리의 지(智)를 보존할 수가 있을 것이다. 그리고 눈은 겨울에 온기(溫氣)를 덮어서 감싸 주니 겨울에도 우리 기운이 중화(中和)를 잃지 않도록 보존할 수가 있을 것이요, 달은 밤에 밝음을 내어 비춰 주니 밤에도 우리 몸이 다치지 않도록 보존할 수가 있을 것이다. 또 바람은 팔방(八方)으로부터 각각 때에 맞게 불어 주니 이를 통해서 우리가 함부로 행동하지 않을 수 있을 것이요, 꽃은 사시(四時)에 따라 각자 같은 종류끼리 모여서 피는 모습을 보여 주니 이를 통해서 우리가 질서를 잃지 않을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런데 더군다나 경지(敬之) 씨로 말하면 가슴속이 쇄락(洒落)해서 한 점 티끌도 남아 있지 않은 데다가, 거처하는 곳의 산과 물 역시 밝고 푸르기만 해서 밝은 거울이요 비단 병풍이라고 해도 손색이 없을 것인데야 더 말해 무엇하겠는가.
눈은 외로운 배를 타고서 도롱이를 쓰고 있을 적에 더욱 멋이 있을 것이요, 달은 높은 다락 위에 앉아서 술잔을 기울일 적에 더욱 흥치가 날 것이며, 바람은 낚싯줄을 드리우고 있을 적에 그 맑음을 한층 더 느끼게 될 것이요, 꽃은 책상머리 앞에서 바라볼 적에 그 그윽함을 한결 더 실감하게 될 것인데, 여기에 또 사시(四時)의 승경(勝景)이 한데 어우러져 각자 분위기를 한껏 돋우면서 강과 산 사이에 가로세로로 걸쳐 있게 될 것이다. 그리하여 경지 씨가 어버이를 옆에서 모시는 여가에, 강에 배를 띄우든가 산에 올라가 본다거나, 떨어지는 꽃잎을 세어 보든가 맑은 바람을 맞으면서 서 있어 본다거나, 눈길을 밟고 승려를 찾아가든가 달을 마주하고서 객을 불러 보노라면 사시의 즐거움이 또한 그 흥치를 한껏 돋우어 주리니, 이쯤 되면 경지 씨야말로 한세상의 독보적인 존재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그리고 벗[友]이란 자기와 뜻을 같이하는 사람을 말한다. 따라서 옛날 세상으로 거슬러 올라가서 벗을 찾아본다면, 자신과 뜻을 같이하는 사람들이 한두 명 정도일 뿐만이 아닐 것이다. 그리고 지금 세상에서 당장 벗을 찾아본다 하더라도, 우리와 같은 사람들이 또한 어찌 적다고 하겠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경지 씨가 벗을 취하는 점이 이와 같으니, 이런 점에서도 경지 씨야말로 한세상의 독보적인 존재라고 해야 할 것이다. 비록 그렇긴 하지만, 천지는 우리의 부모요 만물은 우리의 벗이니, 이렇게 본다면 어디를 간들 벗을 구하지 못할 리가 있겠는가. 그런데 또 더군다나 대축(大畜)의 산과 습감(習坎)의 물로 말하면, 우리로 하여금 강습(講習)하게 해 주고 우리로 하여금 많이 알게 해 주니, 진정 우리의 유익한 벗[益友]이라고 해야 하지 않겠는가. 그래서 이런 내용으로 육우당기를 지어 주는 바이다.
[주D-001]강절(康節) 선생의 …… 꽃 : 강 절은 송(宋)나라 상수학(象數學)의 대가인 소옹(邵雍)의 시호(諡號)이다. 눈과 달과 바람과 꽃은 사람이 각자의 주관적 인식을 완전히 배제하고 이(理)에 입각하여 객관적으로 사물을 관찰하는, 그의 이른바 ‘관물(觀物)’의 세계를 시적으로 표현한 말인데, 그의 시문집인 《이천격양집(伊川擊壤集)》의 자서(自序)에 “관물의 즐거움으로 말하면 또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다. 비록 사생(死生)과 영욕(榮辱)이 눈앞에 전개되면서 싸움을 벌인다 할지라도, 우리의 주관적인 마음이 그 속에 개입되지만 않는다면, 사시에 따라 바람과 꽃과 눈과 달이 우리의 눈앞에 한 번 스쳐 지나가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는가.[何異四時風花雪月一過乎眼也]”라는 말이 나온다.
[주D-002]육룡(六龍)과 육허(六虛) : 육룡은 건괘(乾卦)의 6효(爻), 육허는 64괘 모두의 6효를 뜻하는 말인데, 요컨대 괘를 형성하는 효(爻) 여섯 개라는 의미이다.
[주D-003]산은 …… 것이다 : 《논어》 옹야(雍也)에 “인자는 산을 좋아하고 지자는 물을 좋아한다.[仁者樂山 知者樂水]”라는 공자의 유명한 말이 나온다.
[주D-004]눈은 …… 감싸 주니 : 소식(蘇軾)의 시에 “눈이 겨울의 온기를 조금 덮어 주었으니 그런대로 탈은 없겠지만, 가을 가뭄을 해소해 주지는 못했으니 밭갈이를 어떻게 할꼬.[稍壓冬溫聊得健未濡秋旱若爲耕]”라는 구절이 있다. 《蘇東坡詩集 卷14 雪夜獨宿柏仙菴》
[주D-005]천지는 …… 벗이니 : 송유(宋儒) 장재(張載)의 〈서명(西銘)〉 첫머리에 “하늘을 아버지라 부르고 땅을 어머니라 부른다.[乾稱父 坤稱母]”는 말과, “모든 사람들은 우리의 형제요, 만물은 우리의 벗이다.[民吾同胞物吾與也]”라는 말이 있다.
[주D-006]대축(大畜)의 …… 주니 : 《주 역》 대축괘 상(象)에 “하늘이 산속에 있는 것이 대축괘이다. 군자는 이로써 옛 성인들의 언행을 많이 알아 자신의 덕을 키운다.[君子以 多識前言往行 以畜其德]” 하였고, 습감괘 상에 “물이 거듭 흘러오는 것이 습감괘이다. 군자는 이로써 덕행을 항상 행하고 가르치는 일을 강습한다.[君子 以 常德行 習敎事]”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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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 불산(四佛山)은 일명 공덕산(功德山)이라고도 하는데, 서천(西天 인도(印度))의 지공 화상(指空和尙)이 붙인 이름이다. 승려 각관(覺寬)과 김 찬성(金贊成) 휘(諱) 득배(得培)의 부인 김씨(金氏)가 윤필암(潤筆菴)을 짓고는 급히 글을 보내 기문(記文)을 요청하면서 말하기를, “산속에 묘적암(妙寂菴)이 있는데, 이곳은 요연 선사(了然禪師)가 머물고 있을 적에 나옹(懶翁)이 출가(出家)했던 곳입니다. 지금 나옹이 입적(入寂)한 뒤에, 그의 사리(舍利)가 온 나라 안에 두루 퍼져 있음은 물론 진영(眞影)을 걸어 놓고서 공양(供養)하고 있는 곳이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습니다. 그러나 이런 곳들은 모두 나옹이 생전에 유력(遊歷)한 곳이긴 하지만, 나옹이 이 모두에 대해서 평소에 꼭 유의(留意)했다고는 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그 이유는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바로 뽕나무 아래에서 사흘 밤을 계속 묵지 않는다는 본연의 자세 때문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러나 가령 맨 처음에 출가했던 이 묘적암으로 말하면, 머리를 깎아 번뇌를 제거하고 계(戒)를 지키기 위하여 비니(毘尼 율(律))를 받았던 곳이니, 이른바 ‘천성이 전하지 못한 향상의 한 가닥 길[千聖不傳 向上一路]’을 바로 여기에서부터 시작하고 여기로부터 진입하게 되었다고 할 것입니다. 따라서 회암사(檜巖寺)에서 도를 깨닫고 평산(平山)에 게서 인가를 받게 된 것도 모두 여기에서 나왔고, 대도(大都 연경(燕京))에서 법문을 설파하고 선왕(先王 공민왕)의 스승이 된 것도 여기에서 나왔다고 할 것이니, 공덕산이야말로 나옹의 본고향이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나옹이 일단 입적하고 나자, 그의 사리를 소장하고 그의 진영을 내걸어 공양하는 것이 지금 공덕(功德)을 구하려는 사람들의 일반적인 일이 되었고 보면, 이를 통해서 우리는 또 이른바 참공덕을 나옹이 얼마나 끼쳐 주었는지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공덕산 역시 나옹 때문에 그 이름이 더욱 알려져서, 세상에서 나옹을 부러워하며 공덕을 닦으려 하는 자들이 또 이처럼 많이 나오게까지 되었습니다. 그렇긴 하지만 과연 공덕이라는 것이 이 산에 있는 것인지, 나옹에게 있는 것인지, 아니면 분주히 다니며 예배하는 사람들 자신에게 있는 것인지 모르겠으니, 선생께서 한 말씀을 적어 주셨으면 합니다.” 하기에, 내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내가 듣건대, 공덕산이 대원사(大院寺) 동쪽에 하나의 봉우리로 우뚝 솟아 있는데, 그곳의 큰 바위에 모두 넉 자 남짓한 크기의 여래상(如來像) 네 개를 사방에다 새겨 놓았기 때문에, 복을 구하려는 자들이 떼를 지어 몰려온다고 하였으니, 이것이 바로 이 산의 이름이 붙여진 까닭이라고 하겠다. 그리고 성지(聖智)는 묘원(妙圓)한 것이고 체성(體性)은 본래 공적(空寂)한 것이라는 점을 감안한다면, 묘적(妙寂)이라는 이 암자의 이름도 어찌 그냥 붙여진 것이라고 하겠는가. 모두 나옹이 했던 것처럼 이 묘적을 통해서 공덕을 구한다면 충분할 것 같기에, 이 점도 아울러 밝혀 두는 바이다.
경신년(1380, 우왕6) 가을 8월 초하룻날에 짓다.
[주C-001]윤필암기(潤筆菴記) : 윤 필(潤筆)은 원래 글을 지어 주는 대가로 받는 일종의 사례금으로써 집필료(執筆料)를 말한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권8 지평현(砥平縣) 불우(佛宇) 조에, “이색이 왕명을 받들고 나옹의 부도명을 지어 주자, 문도들이 윤필의 재물을 마련하여 사례하였는데, 이색이 그것을 받지 않고 허물어진 절을 수리하도록 하였기 때문에 윤필암이라는 이름이 붙게 되었다.[李穡以王旨撰懶翁浮屠銘 其徒致潤筆物 穡不受使修廢寺 因名之]”라고 하여 윤필암의 유래를 설명하고 있다. 이렇게 해서 원래 나옹의 사리탑이 있던 신륵사(神勒寺)와 회암사(檜巖寺) 외에도, 나옹의 문도들이 다시 나옹과 관련이 있는 묘향산(妙香山)ㆍ금강산(金剛山)ㆍ소백산(小白山)ㆍ사불산(四佛山)ㆍ치악산(雉岳山)ㆍ용문산(龍門山)ㆍ구룡산(九龍山) 등 일곱 곳에 진당(眞堂)을 세우고 사리를 나누어 모셨는데, 이 일곱 곳에 모두 목은이 기문을 써 주었다.
[주D-001]뽕나무 …… 않는다 : 불 법을 닦는 승려가 세속에 대한 애착을 끊기 위해 행하는 일종의 두타행(頭陀行)을 말한다. 《후한서(後漢書)》 권30 하 양해열전(襄楷列傳)에 “승려가 뽕나무 아래에서 사흘을 머물지 않는 것은, 시간이 흐름에 따라 은애가 생길까 두려워함이니, 그야말로 정진(精進)의 극치라고 하겠다.[浮屠不三宿桑下不欲久生恩愛 精之至]”는 말이 나온다.
[주D-002]천성(千聖)이 …… 길 : 어떤 스승도 언어와 문자로 가르쳐 줄 수 없는 불교의 절대적인 경지를 독자적으로 철저하게 깨닫는 것을 말하는데, 《벽암록(碧巖錄)》 12칙(則)에 그 내용이 나온다.
[주D-003]평산(平山) : 중 국 선종(禪宗)의 오가 칠종(五家七宗) 가운데 임제종(臨濟宗)에 속하는 급암(及菴) 종신(宗信)의 제자요 석옥(石屋) 청공(淸珙)의 동문이었던 평산(平山) 처림(處林)을 가리킨다. 나옹의 경지를 인정하고 법의(法衣)와 불자(拂子)를 내주었으며, 헤어질 때에도 게송(偈頌)을 지어 주면서 아쉬움을 표하였는데, 처음 만나서 문답한 내용이 《목은문고》 제14권의 〈보제존자시선각탑명(普濟尊者諡禪覺塔銘)〉에 보인다.
자비령(慈悲嶺) 나한당기(羅漢堂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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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 해도(西海道 황해도)와 평양부(平壤府)의 경계가 교차하는 지점에 커다란 준령(峻嶺)이 높이 솟아 있는데, 여행하는 이들이 험준한 이 길을 매우 괴로워했기 때문에 그 이름을 자비령이라고 했다 한다. 자비령의 북쪽은 평양부에 속하고 그 남쪽은 서해도에 속하는데, 나한당(羅漢堂)은 바로 자비령 북쪽을 차지하고서 동선참(洞仙站 봉산(鳳山)의 속역(屬驛))을 아래로 굽어보는 위치에 있다. 이 나한당이 어느 시대에 창건되었는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신령스러운 이적(異蹟)을 보여 주는 곳으로 자못 알려져 있다.
내 가 소싯적에 역마(驛馬)를 치달려 연경(燕京)으로 가면서 이 나한당 아래를 두 차례 지나간 적이 있었다. 그러다가 한 번은 직접 문 안으로 들어가서 예배를 드리기도 하였는데, 그때 무척이나 성대한 당번(幢幡)을 보니 모두 여행객들의 앞길을 축원(祝願)하는 내용으로 되어 있었다. 또 주방(廚房)이나 마구간을 보아도 여행객의 편의를 위해서 빠짐없이 시설을 갖추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가 있었다. 그래서 마음속으로 흐뭇하게 생각했었는데, 자세한 내용은 틈이 없어서 물어보질 못하였다.
지금 좌가 부승록(左街副僧錄)인 계명사(啓明寺) 주지(住持) 중덕(中德) 정해(定海)라는 자가 이 나한당을 또 중건하고는, 그의 문도(門徒)인 성주(省珠)를 통해서 나에게 기문을 요청해 왔다. 그런데 이 불당의 시말(始末)과 관련한 자료를 제시하지 않았으므로 내가 이에 대해서 물어보려고 하니, 성주가 또 말하기를, “계명(啓明) 스님이 행하려는 일이 매우 급하니, 선생께서 그 사실은 생략해 주셨으면 합니다. 지금 할 일은 나한(羅漢)을 섬기면서 복을 구하고 여행객의 편의를 도모하면서 우리의 은혜를 베푸는 것으로, 그렇게 하여 마침내 계속 그 공덕을 쌓아서 성인을 축복하고 백성을 편안하게 하려는 데 있을 뿐입니다. 불당의 시말 같은 것이야 지엽적인 것이니, 굳이 쓸 것이 뭐가 있겠습니까.” 하기에, 내가 말하기를, “그렇기도 하다. 지금 부도씨(浮屠氏 승려)가 천하에 가득하지만, 그 원류(源流)를 찾아보면 서역(西域)에서 나왔다고 할 것이니, 글 쓰는 법으로 볼 때 그런 것은 생략하는 것이 옳다고 하겠다. 자비령이 높다랗게 우뚝 서 있는 가운데, 나한당이 그 사이에서 아름답게 빛을 발하고 있으니, 숨을 몰아쉬면서 험한 산길을 오르다가 나한당을 한 번 눈으로 접하게 되면, 마음이 어찌 시원해지지 않겠는가. 더군다나 말에서 안장을 내리고 마음껏 조망해 보거나 향을 피워 올리면서 예배하노라면, 기식(氣息)도 평온해지고 신심(身心)도 고요해질 것이니, 비록 잠깐 동안이라 할지라도 사람에게 유익함을 안겨 주는 것이 많을 것이다. 그러니 글 쓰는 법으로 볼 때에 이런 것들은 마땅히 적어 넣어야 할 것이다.” 하였다.
그러고는 내가 이 때문에 더 이상 자세한 내용을 묻지 않고 성주(省珠)가 말한 대로 곧장 쓴 다음에, 이것을 가지고 돌아가서 불당의 벽에 걸어 두게 하였다. 우리 계명 스님의 자비(慈悲)로 말하면 자비령의 높이만큼이나 넉넉하다고 할 것인데, 나한당의 신통(神通)이라는 것도 어쩌면 계명 스님의 신통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런데 이 자비와 신통으로 말하면, 또 어찌 국가의 큰 쓰임이 되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래서 내가 이렇게 적어 주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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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 중대광(三重大匡) 복리군(福利君) 운암(雲菴) 징공 청수(徵公淸叟)가 절간(絶磵) 윤공(尹公)을 통하여 누대의 이름을 지어 달라고 청하였다. 이와 함께 삼봉(三峯 정도전(鄭道傳)) 정씨(鄭氏)가 지은 사찰의 기문을 자료로 보여 주었는데, 사찰의 내력은 상세히 기술하고 있었으나 시내[溪]는 어떠하며 누각[樓]은 어떠한지에 대해서는 모두 생략하고 써넣지 않았으므로, 대개 누각의 이름을 짓기가 어려웠다.
이에 절간(絶磵)을 통해서 알아보았더니, ‘사찰이 두 개의 시냇물 사이에 위치하고 있는데, 그 물은 바로 사찰의 남쪽에서 합류하고 있다. 그 물의 근원을 살펴보건대, 하나는 동쪽으로 가까이 있고 하나는 서쪽으로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에 형세상으로는 크고 작은 흐름의 차이를 보이고 있었으나, 각자 한군데로 합쳐져서 못을 이룬 다음에 똑같이 산을 나와 흘러가고 있었다. 그런데 사찰의 사면을 에워싼 산들이 모두 높고 가파르기만 해서, 찌는 듯이 더운 여름철에도 더위를 피해 시원한 바람을 쐴 곳이 없었기 때문에, 두 물이 합류하는 곳에다 터를 정하고 누각을 세우게 되었는데, 왼쪽 시냇물 위에 걸터앉아서 오른쪽 시냇물을 아래로 굽어보고 있노라면, 누각의 그림자와 물빛이 위아래에서 서로 비춰 주는 등, 실로 보기 드문 승경(勝景)을 이루고 있다.’고 하였다.
그러다가 경술년(1370, 공민왕19) 여름에 큰물이 져서 돌로 쌓은 제방이 허물어지는 바람에 누각도 함께 무너지게 되었는데, 이와 관련해서 청수(淸叟)가 말하기를, “누각은 우리 스님이 일으켜 세운 것인데, 이대로 놔두어서야 되겠는가. 우리 스님인 각엄 존자(覺儼尊者)로부터 스승과 제자 사이에 전해 온 것이 모두 5대(代)에 이르렀으니, 산문(山門)에 각별히 주의를 기울인 것이 지극하다고 할 것인데, 지금 누각을 망치고 만다면 그 책임이 장차 누구에게 돌아오겠는가. 그래서 내가 기일을 약정하고 공사를 시작해서 옛날의 모습을 복구한 결과, 썩은 것은 다시 견고해지고 빛이 바랜 것은 다시 선명해지게 되었으니, 이쯤 되면 나 자신을 위로하기에는 충분하다 하겠다. 그러나 내가 마음속으로 털끝만큼이라도 우리 스님의 마음을 어기지나 않을까 하고 두려워했던 그 심정을 우리 문도들이 꼭 안다고는 할 수 없을 것이요, 또 우리 문도로서 내 뒤를 이어 이 절에 머무르는 자가 혹시라도 내 마음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산문의 일을 장차 보장할 수 없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된다면 어찌 유독 누각뿐이겠는가. 불상(佛像)이 먼지로 뒤덮이고 불당(佛堂)이 비바람에 퇴락하여 사람들의 웃음거리가 될 것도 뻔한 이치이다. 이렇게 본다면 누각 하나를 다시 일으켜 세운 것쯤이야 글로 남길 가치가 없다 하더라도, 이에 대해서 굳이 글 잘하는 이에게 부탁해서 기문을 지어 달라고 하는 것은, 바로 불후(不朽)하게 전해지도록 도모하는 한편 우리 문도를 경계시키려 함이라고 하겠다. 그러니 이 부탁을 거절하지 않으면 다행이겠다.” 하였다.
나는 일찍이 행촌(杏村 이암(李嵒)) 시중공(侍中公)을 스승으로 모시면서 자질(子姪)들과 어울려 노닐었는데, 스님은 바로 그 계씨(季氏)이다. 그래서 내가 그 부탁을 거절하기가 어렵기에, 절간(絶磵)의 말에 따라서 쌍계루(雙溪樓)라고 명명하고 기문을 짓게 되었다. 나는 지금 늙어서 누각에 밝은 달빛이 가득할 때 그 속에서 한 번이라도 묵을 길이 없으니, 소년 시절에 그곳의 객이 되지 못한 것이 한스럽기만 하다. 사제간에 서로 계승한 기록은 사찰의 문서에 기재되어 있으므로 여기에서는 쓰지 않는다.
[주C-001]장성현(長城縣) …… 기문 : 《목은문고》 원문에 누락된 글자가 많이 눈에 띄는데, 이 부분들은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권36 장성현(長城縣) 불우(佛宇) 정토사(淨土寺) 조에 나오는 이색의 기문을 참고하여 보완해서 국역하였다.
향산(香山) 안심사(安心寺)의 사리석종(舍利石鍾)에 대한 기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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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 공(指空)은 서천(西天 인도) 사람이다. 그리고 고려의 보제 왕사(普濟王師 나옹(懶翁))는 바로 그의 제자이다. 이들이 입적(入寂)하여 다비(茶毘 불교의 화장법(火葬法))를 행했을 때 모두 사리(舍利)가 나왔으므로, 믿는 사람이나 의심하는 사람이나 이에 모두 의견이 합치되어 하나로 귀결되었다.
향산은 압록강(鴨綠江) 연안에 위치하여 그 땅이 가장 외진 데다 여진족(女眞族)과 접경하고 있는 지역이다. 하지만 그쪽 사람들은 대부분이 충성스럽고 신실해서 봉강(封疆)을 지키는 신하의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고 있으며, 그런 만큼 불교에 대해서도 마음속 깊은 곳으로부터 열복(悅服)하고 있는데, 이 점에 있어서는 경중(京中)의 사서(士庶)와 비교해도 하등 차이를 보이지 않고 있다. 그러니 ‘위에서 무엇을 좋아하면 아래에서는 더 좋아하는 경향이 있게 마련이다.[上有好者 下必有甚焉者]’라는 말이 어찌 사실이 아니겠는가.
승 려 각지(覺持)가 나를 찾아와서 말하기를, “내가 각오(覺悟)와 함께 안심사(安心寺)에 석종(石鐘 종 모양의 사리탑)을 만든 다음, 지공의 사리 9매(枚)와 보제의 두골(頭骨) 1편(片)ㆍ사리 5매를 거기에 안치하였습니다. 시주(施主)는 의주(義州) 상만호(上萬戶) 봉익대부(奉翊大夫) 예의판서(禮儀判書) 장려(張侶)의 부인인 용만군부인(龍灣郡夫人) 강씨(康氏)입니다. 그리고 보제의 가사(袈裟) 하나와 직철(直綴 승복의 일종) 하나와 육환장(六環杖) 하나를 보현사(普賢寺)에 보관하였는데, 그 향로전(香爐殿)은 지정(志程)이 세운 것입니다. 이렇게 한 것은 대개 스승의 은혜에 보답하고 이 세상을 교화시키려 함이요, 스승의 도를 높여서 후대에 길이 전하고자 함이니, 그렇게 함으로써 필부필부(匹夫匹婦)로 하여금 모두 우리의 도(道)에 들어오게 하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도에 들어오기 위해서는 다른 길이 있는 게 아니라, 바로 우리의 마음을 편안하게 하는 그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우리의 마음을 편안하게 하는 것은 편안하지 못한 마음을 찾는 것에서부터 시작해서 그 마음을 찾을 수 없는 것에서 끝나는데, 옛사람의 자취가 워낙 멀어서 혼매(昏昧)한 자들이 혹시 잊어버릴 수도 있기 때문에, 반드시 안심사에다 사리를 봉안하려고 한 것입니다. 그리하여 안심사에서 사리를 보게 되면 반드시 마음이 편안해질 도리를 생각하게 될 것이요, 마음을 일단 편안하게 할 수 있으면 사리가 또한 우리의 뼛속에서도 나오게 될 것입니다.” 하였다.
시험 삼아 내가 한마디 할까 한다.
마음은 하나이니, 중생(衆生)이나 제불(諸佛)이나 그 마음은 본래 다른 것이 아니다. 그러니 더군다나 지공이나 보제의 마음과 우리의 마음이 다를 수가 있겠는가. 뒷날 석종(石鐘)을 대하고 예배를 드리는 사람들은 자신을 돌이켜 각자의 마음속에서 찾아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주D-001]위에서 …… 마련이다 : 《맹자》 등문공 상(滕文公上)에 나오는 말이다.
[주D-002]우리의 …… 끝나는데 : 불 교 선종(禪宗)의 이른바 ‘안심법문(安心法門)’을 말한다. 중국 선종의 2조(祖) 혜가(慧可)가 초조(初祖)인 달마(達磨)에게 “내 마음이 편안하지 못하니 스승께서 마음을 편안하게 해 주셨으면 합니다.[我心未安 請師安心]” 하자, 달마가 “그 마음을 가지고 와라. 너에게 편안함을 주겠다.[將心來 與汝安]” 하였는데, 혜가가 한참 뒤에 “그 마음을 찾아보았으나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覓心了不可得]” 하니, 달마가 “내가 너에게 이미 안심의 경지를 주었다.[吾與汝安心竟]”고 한 고사가 전한다. 《景德傳燈錄 卷3》
징천헌기(澄泉軒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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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 수좌(澈首座)가 보제 존자(普濟尊者) 나옹(懶翁)의 회상(會上)에 참여하여 함께 모시고 거처한 지가 오래되었다. 이에 나옹이 그에게 징천(澄泉)이라는 호를 붙여 주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서 나옹이 입적하자, 슬퍼하고 사모하는 마음이 날이 갈수록 더해지기만 하였다. 그리하여 그가 나를 찾아와서는 말하기를, “나옹 선사께서 이제 멀리 떠나셨으니 다시는 뵐 수 없게 되었습니다. 내가 귀로 접한 스승의 음성 가운데, 나의 마음속에 가장 깊이 들어오고 나의 몸에 가장 뚜렷하게 드러난 것으로, 나의 명칭과 함께 늘 따라다니며 없어지지 않을 것은 바로 징천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래서 지금 또 내가 거처하는 집의 편액(扁額)을 징천이라고 내걸게 되었으니, 이는 그렇게 함으로써 항상 눈으로 응시하고 마음속으로 사색하려 함이요, 그리하여 잠시라도 나옹을 잊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나의 마음을 알아주는 자라면야 물론 내가 징천이라는 것을 알겠습니다만, 나를 모르는 자라 할지라도 나의 마루에 걸린 편액을 본다면 내가 징천이라는 것을 또한 알게 될 것이니, 선생께서 이에 대해 한마디 말씀을 내려 기문을 써 주셨으면 합니다.” 하기에, 내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나는 아직 불가(佛家)의 학술을 공부하지 못했으니, 우선 유가(儒家)의 말을 인용해서 이야기해 볼까 한다. 《맹자(孟子)》에 ‘근 원이 있는 샘물은 퐁퐁 솟아 흐르면서 밤이고 낮이고 멈추는 법이 없다. 그리고 구덩이가 패인 곳 모두를 채우고 난 뒤에야 앞으로 나아가서 드디어 사방의 바다에 이르게 되는데, 학문에 근본이 있는 자도 바로 이와 같다.[源泉混混 不舍晝夜 盈科而後進 放乎四海 有本者如是]’는 내용이 보이는데, 이것은 대개 부자(夫子)께서 ‘물이여, 물이여.[水哉水哉]’라고 찬탄한 이유를 설명해 주기 위해서 맹자가 한 말이다.
우리 유가에서 격물치지(格物致知)와 성의 정심(誠意正心)을 통하여 수신제가 치국평천하(修身齊家治國平天下)를 이룬다고 한다면, 불가에서는 징념(澄念)과 지관(止觀)을 통하여 우리의 본원(本源)인 자성(自性)이 천진불(天眞佛 법신불(法身佛))임을 깨달아 생사(生死)의 고해(苦海)에서 사람들을 제도(濟度)하여 적멸(寂滅)에 돌아가게끔 하니, 둘 사이에 과연 무슨 차이가 있겠는가.
우리 수좌(首座)는 원래 속된 차원을 멀리 벗어난 데다 선지식(善知識)의 회상(會上)에서 노닐며 직접 친절한 가르침을 받기까지 하였다. 그리하여 자신의 몸과 마음에 적용한 것이 또 이와 같았으니, 스승을 사모하는 마음이 참으로 깊다고 하겠다. 그리고 사모하는 그 마음이 깊기 때문에 그 가르침을 취하는 것이 이토록 절실하기만 하니, 나옹의 뜻을 저버리지 않을 것이 또한 분명하다.
세상에서 나옹으로부터 한마디 말을 얻어서 자신의 호로 삼은 자가 많지만, 수좌처럼 사모하는 이를 찾는다면 과연 몇 사람이나 되겠는가. 그래서 내가 너무도 기쁜 나머지 수좌의 요청을 받고는 다시 사양하지를 못하였다. 다만 내가 병으로 시달리는 중이라서 징천에 대한 설을 끝까지 다 밝히지 못하였는데, 뒷날 산중(山中)에서 바윗돌에 걸터앉아 맑은 물을 톰방거리면서 마음의 열기(熱氣)를 깨끗이 씻어 낼 그때에 다시 수좌를 위해서 이야기해 볼까 한다.
[주D-001]근원이 …… 말이다 : 공자가 물의 덕을 칭찬한 까닭에 대해서 맹자의 제자 서자(徐子)가 물어보자 맹자가 대답해 준 내용의 일부인데, 《맹자》 이루 하(離婁下)에 나온다.
곡주(谷州) 공관(公館)의 새 누각에 대한 기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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곡 산(谷山) 고을은 서해도(西海道)의 궁벽한 지역으로, 동쪽으로는 교주도(交州道 강원도)와 연결되고 북쪽으로는 평양부(平壤府)와 경계를 접하고 있다. 산이 높고 물이 좋은 가운데 평평하게 펼쳐진 한 구역이 바로 고을의 소재지이다. 공관은 그곳의 북쪽 가까이에 위치하여 여염(閭閻)으로 둘러싸여 있는데, 빈객이 찾아와도 어디에 올라가서 관람할 곳이 없기 때문에 마치 우물 속에 들어앉아 있는 것처럼 답답하기만 하였다.
고을을 맡아 다스리던 윤상발(尹商發)이 이러한 점을 개탄하고는, 나무를 베고 띠풀을 잘라 조그마한 정자를 세우려다가 임기가 차는 바람에 떠나가게 되었다. 그러자 김공(金公)이 그 뒤를 이어서 부임하여 또 말하기를, “윤공(尹公)이 이 일을 할 수 없어서 못한 것이 아니라 내가 올 때까지 기다린 것일 뿐이다.” 하고는, 관리들과 함께 그 땅을 더 넓히는 한편 산에서 재목을 구해 오고 들판에서 기와를 구워 내어, 두 달 만에 깎고 다듬어 세우는 공사를 완료하였다. 그러고는 그의 문객(門客)인 통문(通門) 시위(侍衛) 소속의 호군(護軍) 서윤명(徐允明)을 급히 보내 나에게 글로 기문을 부탁하였다.
이에 내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우리나라의 국토는 삼면(三面)이 모두 바다로 둘러싸인 가운데 북쪽으로 장백산(長白山)과 연결되어 있다. 그런데 바다에 붙어 있는 주현(州縣)들마다 예외 없이 누대가 휘황하게 서 있기 때문에, 관원들의 행차가 끝없이 이어지면서 이곳에서 유람하고 춤추며 노래하는 일이 행해지곤 하였다. 그리하여 사계절 내내 이들 누대 위에서 즐겁게 노니는 일이 끊이지 않은 채 마치 하루처럼 수백 년의 세월이 그렇게 흘러갔다.
그러다가 바다에 도적 떼가 일어나 한 달이 지나고 한 해가 갈수록 더욱 극성을 부리기 시작하면서부터는, 밤낮으로 봉수(烽燧)가 이어지고 추운 때나 더운 때를 가릴 것 없이 군대가 출동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바다를 끼고 있는 곳은 온통 해골로 뒤덮인 채 황폐해지고 말았으니, 더군다나 누대(樓臺)라고 하는 곳이야 더 말할 것이 있겠는가. 그저 황량한 폐허 속에 여우와 토끼만 뛰노는 곳이 되고 말았으므로, 지나가는 이들이 눈물을 훔칠 따름이었다.
그런데 곡산 고을로 말하면, 경도(京都)에서 북쪽으로 300리쯤 되는 거리에 위치하여 바다와는 아주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에, 백성들이 봉수(烽燧)라는 것을 알지 못함은 물론이요, 그저 아침저녁으로 꼬박꼬박 끼니를 거르지 않으면서 봄과 가을로 밭 갈고 거두는 이외에는 따로 할 일이 하나도 없었으니, 이곳의 수령된 자들이야말로 정사를 번거롭게 행할 것도 없이 공을 손쉽게 이룰 수 있으리라는 것을 충분히 알 수 있다고 하겠다. 그러니 우리 김공(金公)처럼 인(仁)으로써 어루만져 주고 의(義)로써 법을 시행하여, 백성이 쉽게 안정을 찾게 하고 일이 용이하게 이루어지도록 하는 경우야 더 말해 무엇하겠는가. 어떤 공사를 일으키든 간에 반드시 이루어 낼 것 또한 분명한 사실이다.
수령의 직분은 백성을 친근하게 대하는 데에 있으니, 백성이 안정되도록 다스리면 그 직분을 완수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백성이 안정되도록 다스리는 도리는 수령이 자기보다 윗사람을 공경하는 데에 있다고 할 것이요, 윗사람을 공경하는 도리는 삼가 법도를 준수하면서 사신(使臣)을 예우하는 데에 있다고 할 것이다. 그러고 보면 김공이야말로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을 알았다고도 하겠다.
김 공은 이름이 승귀(承貴)요, 관직은 3품(品)에 이르렀는데, 이번의 일만 보더라도 그 사람됨이 어떠한지 알 수가 있다 하겠다. 그리고 윤 지주(尹知州)로 말하면 또 나의 문생(門生)이요, 서 호군(徐護軍) 역시 나의 친구인 송씨(宋氏)의 생질이다. 그래서 내가 글이 졸렬하다는 이유로 사양하지 못하고서 이렇게 대략 적어 놓는 바이다.
[주D-001]그런데 …… 것이요 : 《중 용장구》 제20장에 “아랫자리에 있으면서 윗사람에게 인정을 받지 못하면 백성을 편안하게 다스릴 수가 없다.[在下位不獲乎上 民不可得而治矣]”는 말과 같은 논리의 표현이다. 《맹자》 이루 상(離婁上)에도 똑같은 내용의 말이 나온다.
2010-0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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