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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은문고(牧隱文藁) 제5권 번역

천하한량 2010. 1. 8. 20:23

목은문고(牧隱文藁)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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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풍헌기(松風軒記)

 


조계(曹溪)의 윤절간(倫絶磵)이 자신의 거처를 송풍헌(松風軒)이라고 이름 짓고는 나에게 기문(記文)을 청하였다. 이에 내가 다음과 같이 말해 주었다.
솔은 안으로 변치 않는 자신의 마음을 지니고 있다. 그리하여 사계절 어느 때를 막론하고 천년의 세월이 지나도록 곧은 나뭇가지와 푸르른 잎사귀가 바뀌는 법이 없으니,
여기에는 그렇게 되게끔 하는 이유가 그 속에 반드시 들어 있다. 바람은 밖으로 만물을 위하는 속성을 지니고 있다. 그리하여 어느 곳이든지 따라가서 만물에 기운을 불어넣어 줄 뿐, 한 자리에 머물러 있거나 위축되는 점이 없으니, 여기에도 그렇게 되게끔 하는 이유가 그 속에 반드시 들어 있다.
이에 대해 한번 살펴보기로 하자. 만학천봉(萬壑千峯) 사이에 한 자리를 깔고 앉아서 좌우로 솔을 보고 바람소리를 듣노라면, 고요함 속에 얽혀 있던 객진번뇌(客塵煩惱)가 마치 눈 녹듯 사라져 없어질 것이니, 우리 절간(絶磵) 스님이 그때에 할 것이 또 뭐가 있겠는가. 그저 외물(外物)을 대할 때에도 눈으로 보기만 하고 귀로 듣기만 하면 될 것이니, 무엇을 듣는다 한들 마음이 동요될 것이 있겠으며, 무엇을 본다 한들 마음이 움직일 까닭이 있겠는가. 따라서 보고 듣는 감각 기관을 떨어버린 가운데 그 사이에서 소란스럽게 되는 점이 하나도 없을 것이 또한 분명하다
.
그렇다면 다른 초목들과 달리 늘 푸른 솔의 자태와 다른 소리들과 달리 만물을 길러 주는 맑은 바람소리를 일상생활 속에서 청정(淸淨)하게 받아쓰기만 하면 될 것인데, 솔과 바람을 굳이 거론하여 숭상할 것이 또 뭐가 있다고 하겠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절간 스님이 바야흐로 자기 거처에 그 이름을 편액(扁額)으로 내걸고는, 사람들에게 또나는 송풍헌에 살고 있는 하나의
한가한 도인(道人)이 다.’고 소문을 내려고 하는데, 그러면 방내(方內 속인(俗人))나 방외(方外 승려)를 막론하고 모두 따라다니면서송풍헌은 윤절간 스님이 계신 곳이다.’고 일컬을 것이니, 이 또한 혹에다 혹을 하나 더 붙이는 꼴이 되지 않겠는가.
비록 그렇긴 하지만, 높고 둥근 것이 위에 있으면 사람들이 가리켜서 하늘이라 말하고, 넓게 실어 주는 것이 아래에 있으면 사람들이 가리켜서 땅이라고 말한다. 그러니 기거하는 몸이 있고 출입하는 집이 있는데도 내걸 편액이 없고 드러낼 이름이 없다고 한다면, 뭇 금수(禽獸)와 비슷하게 되지 않겠는가. 그리고 스승을 찾아다니며 도를 묻는 이들은 어느 시대에도 없는 법이 없으니, 지금 스님의 이름을 아는 이들도 반드시 짚신 끈을 단단히 매고서 깎아지른 이 벼랑 위의 미끄러운 길을 마다하지 않고 찾아와서는, 모두들내가 장차 송풍헌의 가르침을 받으려 한다고 말할 것이다. 이에 의심의 그물을 걷어 내 주고 진리의 관문을 열어 보여 주면서, 그들의 몸과 마음 사이에 시원스럽게 솔과 바람의 은택을 입게끔 해 준다면, 몇 겁()의 기나긴 시간 동안 어둠 속에 드러나지 않고 맺혀 있던 응어리들이 한 점도 남김없이 해소될 것이니, 그들에게 혜택을 베풀어 주는 것이 어떠할지 또 말할 것이 있겠는가
.
나 는 병석에 누워 있은 지가 오래되었는데, 다행히 스님을 만나서 여러 가지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내가 비록 잘 이해하지 못해 아직 의심되는 점이 있다고는 하더라도, 어찌 조금이나마 터득한 점이 없기야 하겠는가. 따라서 나에게 요청을 하지 않더라도 내가 장차 글을 지어 주려고 하였는데, 더군다나 먼저 자진해서 요청을 해 왔는데야 더 말해 무엇 하겠는가. 이 때문에 나의 글솜씨가 졸렬하다는 것도 잊고서 이렇게 송풍헌기를 짓게 된 것이다. 그리고 또 하나 일러 둘 말이 있다. 송풍헌을 확대해서 말한다면, 이 땅덩어리 전체가 모두 그것이라고 할 것이다. 따라서 천리만리 밖에 떨어져 있다 할지라도, 나에게 일진(一陣)의 맑고 시원한 기운을 불어넣어 주어야 마땅하리라고 여겨진다. 만약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나의 이 뜨거운 번뇌를 어느 날에 씻어 볼 수 있겠는가. 부디 잊지 말기를 바라면서 이로써 기문을 마감한다.

 

[주D-001]솔은 …… 없으니 : 《예 기(禮記)》 예기(禮器) 첫머리에 나오는 말을 인용한 것인데, 이로써 생멸(生滅)이 없는 불성(佛性)을 비유한 듯하고, 아래의 바람은 무애자재(無碍自在)한 보살행(菩薩行)을 암시하고 있는 듯하다. 원래 《예기》의 원문에서는, 대나무의 곧은 나뭇가지와 솔의 푸르른 잎사귀 등 두 가지를 말하고 있는데, 목은은 여기에서 모두 솔의 속성으로 돌려 인용하고 있다.
[주D-002]한가한 도인(道人) :
()나라 선승(禪僧) 영가(永嘉) 현각(玄覺)이 지은 〈증도가(證道歌)〉 첫머리에그대는 보지 못했는가. 배움도 끊어지고 아무 할 일 없이 한가한 도인은, 굳이 망상을 없애려 하지도 않고 참된 진리를 찾으려 하지도 않는다는 것을. 이름 없는 실제 성품이 바로 불성이요, 허깨비 같은 허망한 몸이 바로 법신인 것을.[君不見絶學無爲閑道人 不除妄想不求眞 無名實性卽佛性 幻化空身卽法身]”이라는 말이 나온다.

청향정기(淸香亭記)

 


나 의 구씨(舅氏 목은의 외숙인 김요(金饒))인 중추(中樞) 치정공(致政公)이 자그마한 못에다 연꽃을 심어 놓고는 장차 그 옆에 정자를 지으려고 하면서, 나에게 급히 글을 보내 정자의 이름과 기문을 부탁하였다. 그런데 내가 요즈음 병으로 시달리는 가운데에서도 오직 용릉(舂陵) 광풍제월(光風霽月)을 생각하며 그리워하고 있었으므로, 마침내 향기가 멀수록 더욱 맑다.[香遠益淸]’는 말을 취하여, 그 뜻을 대략 서술해 보기로 하였다.
하늘과 땅이 개벽될 때에 가볍고 맑은 기운이 위에 있게 되었는데, 인물이 태어날 적에 이 기운을 품부(稟賦)받아 온전하게 된 이가 바로 성인(聖人)이요 현인(賢人)이다. 따라서
그분들이 다스리는 도에 있어서도 맑은 향기가 풍기는 것처럼 신명(神明) 감응시키게 되니, 이는 삼대(三代 하()ㆍ은()ㆍ주())의 성대했던 시절을 상고해 보면 충분히 알 수 있는 일이다.
용 릉이 송()나라의 문명 시대에 태어나서는, 암흑과 혼란 속에 꽉 막혀 통하지 않던 오계(五季 오대(五代))의 화란(禍亂)을 슬퍼한 나머지, 성경(聖經)에 나오는 태극(太極)의 뜻을 드러내 밝힘으로써 공맹(孔孟)의 통서(統緖)를 계승하기에 이르렀다. 그런데 그가 좋아하는 것이 바로 이 연꽃 속에 있었으므로애련설(愛蓮說)’을 지어서 설명하기까지 하였는데, 그래도 그 뜻이 미진하다고 여기고는 특별히 결론지어 말하기를연꽃을 나처럼 사랑하는 이가 몇이나 될까.[蓮之愛同予者 何人]’라고 하였으니, 그러고 보면 적막하기만 했던 천년의 세월 속에서 후학을 깨우치고 격려한 것이 심대(深大)하다고 하겠다
.
그래서 내가 백발이 되도록 성경(聖經)을 궁구하면서 날이 갈수록 우러러 사모하는 마음이 깊어지기만 하였는데, 다행히도 구씨(舅氏)가 용릉처럼 연꽃을 사랑하고 있으니, 나의 뛸 듯이 기쁜 마음이 평소와 또 다른 점이 있다고 하겠다. 내가 생각건대, 향선생(鄕先生 귀향한 퇴직 관원에 대한 존칭)이나 빈객이 찾아와서 술잔을 들고 연구(聯句)를 짓노라면, 맑게 갠 물결이나 비 오는 못가에서 바람에 흔들리는 연잎이나 안개 속에 드러나는 연꽃의 자태가 그야말로 그림인 듯 그림이 아니고 시()인 듯 시가 아닌 기막힌 경지를 보여 주리라고 여겨진다
.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백발의 노안(老顔)으로 술에 취해 노래를 부른다면, 이것이 바로
갈천씨(葛天氏) 백성이 되고 희황씨(羲皇氏) 세상에서 사는 이 될 것이니, 마음이 편안해지는 가운데 몸도 활짝 펴지고 기운이 충만한 가운데 고요한 경지를 즐길 수도 있게 될 것이다. 그리하여 마침내 맑은 연꽃 향기뿐만이 아니라, 우리 구씨의 맑은 덕의 향기가 더욱 멀리 퍼져 나가서 자손에게도 은택을 끼쳐 줄 수 있게 될 것이다. 내가 뒷날 노인이 되어 벼슬을 그만두고 돌아와서, 인근의 빈 땅에다 터를 잡아 집을 짓고는 구씨를 모시고서 살고 싶은데, 그때 가서 다시 구씨를 위해 노래를 지어 불러 볼까 한다.

무오년(1378, 우왕4) 동지(冬至) 9일 전에 짓다.

 

[주D-001]용릉(舂陵) 광풍제월(光風霽月) : 송 유(宋儒)인 주돈이(周敦)가 도주(道州)의 용릉 출신이기 때문에, 보통 용릉을 그의 별칭으로 사용한다. 송나라 황정견(黃庭堅)의 〈염계시서(濂溪詩序)〉에용릉의 주무숙(周茂叔)은 인품이 너무도 고매해서, 흉중이 쇄락하기가 마치 맑은 바람 갠 달과 같다.[胸中灑落如光風霽月]”고 하였다. 염계는 주돈이의 호요, 무숙은 그의 자()이다.
[주D-002]향기가 …… 맑다 :
주돈이가 〈애련설(愛蓮說)〉을 지어 연꽃을 찬탄한 말 중의 하나이다.
[주D-003]그분들이 …… 되니 :
《서 경(書經)》 군진(君陳)지극한 정치를 행하게 되면 마치 맑은 향기가 풍기는 것처럼 신명을 감응시킨다. 따라서 기장이 향기로운 것이 아니요, 밝은 덕이 오직 향기로운 것이다.[至治馨香 感于神明 黍稷非香 明德惟馨]”라는 말이 나온다.
[주D-004]갈천씨(葛天氏)의 …… :
평 화스러운 태고 시대처럼 아무런 욕심 없이 한가롭게 생활하는 것을 말한다. 갈천씨는 전설에 나오는 상고 시대의 제왕 이름인데, 도연명(陶淵明)의 〈오류선생전(五柳先生傳)〉에술에 흠뻑 취하여 시를 읊으면서 자신의 뜻을 즐겼으니 갈천씨의 백성이던가.[酣觴賦詩 以樂其志 葛天氏之民歟]”라는 말이 나온다. 희황씨는 복희씨(伏羲氏)의 별칭인데, 역시 도연명의 〈여자엄등소(與子儼等疏)〉에오뉴월 중에 북창 아래에 누워 있다가 서늘한 바람이 잠깐 지나가기라도 하면, 스스로 희황 시대의 사람이 아닌가 하고 생각했다.[北窓下臥遇涼風暫至 自謂是羲皇上人]”는 말이 나온다.

저정기(樗亭記)

 


기유년의 과거에 장원급제한 문생(門生) 유백유(柳伯濡)가 자신의 거처에 저정(樗亭)이라는 이름을 붙이고는 나에게 기문을 청하였다. 내가 그 뜻을 물어봤더니, 백유가 말하기를, “가죽나무[樗] 상수리나무[櫟] 쓸모없는 재목이기 때문에 자연의 수명을 다한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우리 동방의 학자들이 태산북두(泰山北斗)처럼 우러러보는 분은 바로 익재(益齋 이제현(李齊賢)) 시중(侍中)인데, 익재 스스로 역옹(櫟翁)이라고 일컬었고 보면 그 이름을 선택한 이유가 반드시 있었을 것입니다. 저는 선생의 문하에 있으면서 익재를 마치 할아버지처럼 여겨 왔습니다. 옛날에 자사(子思)가 《중용(中庸)》을 저술하면서 중니(仲尼)에 대해서 극구 찬탄하였는데, 이는 자신의 도()가 할아버지에게서 나왔고 자신의 몸이 할아버지에게서 나왔기 때문이었습니다. 지금 저의 경우로 말하더라도, 조정에 편히 거하면서 남달리 영달하여 행인들이 길을 비켜 주는 대접을 받는 가운데, 집에 들어가서는 어버이에게 효성을 바치고 나와서는 벗들과 우의를 나누며 지금까지 의기양양하게 지내 오고 있습니다만, 이 모두가 사실은 익재 시중이 이끌어 준 덕택이기 때문에 저도 저()라는 글자를 선택해서 정자의 이름을 붙이게 된 것입니다. 물론 저의 이러한 행동이 너무도 참람되어 죄를 피할 길이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만, 그분을 사모하는 마음이 너무도 깊었기 때문에 그분과 가까워지려는 심정이 절실해질 수밖에 없었고, 가까워지려는 심정이 절실했기 때문에 더욱 비슷하게 모방해 보려는 행동을 그만둘 줄 모르게 된 것입니다. 그러니 선생께서 이러한 뜻을 덧붙여서 알기 쉽게 설명해 주시면 다행이겠습니다.” 하기에, 내가 다음과 같이 말해 주었다.
나는 소싯적에
시(詩) 읽지 않았기 때문에 초목에 대해서 알지 못하였다. 그런데 익재의 말씀을 들어 보니, “()이라는 글자가 나무 목()에 즐거울 락()으로 되어 있으니, 이것은 쓸모없는 것을 즐긴다는 뜻이다.”라고 하셨다. 하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짐짓 겸손한 자세로 말씀하신 것이라고 해야 할 것인데, 지금 그대가 일단 쓸모없는 나무라고 단정하였고 보면 이것은 또한 쓸모없는 나무로 될 수밖에 없게 되었다고 하겠다.
이 세상의 물건 가운데 쓸모없는 것이 하나도 없지만, 그중에서도 나무는 가장 쓸모 있는 것이라고 하겠다. 우리가 거처하는 집이나 생활 도구들로 말하면 아침저녁으로 없어서는 안 되는 것들이요 창과 방패 같은 병장기나 수레와 가마 같은 탈것들로 말하면 급히 써야 할 때 없어서는 안 되는 것들이니, 그러고 보면 거기에 들어가 쓰이는 재목들이 얼마나 귀중한지 모두 알 수 있는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백유는 이런 재목들은 취하지 않고서 오직 가죽나무만을 구하고 있으니, 쓸모없게 되는 것을 실제로 즐기려 한다고 볼 수도 있겠다
.
그러나 익재는 자신의 호에 역()이라는 글자를 붙이기는 하였지만, 종신토록 묘당(廟堂)에 몸담고서 5()의 조정을 차례로 섬기며 헌신하였다. 그리고 이와 함께 도덕(道德)과 문장(文章)으로 천하에 이름을 날렸으니, 백유는 사모해야 할 대상을 제대로 알았다고 말할 만하다. 익재야말로 불세출의 인물인 만큼 사람들이 그처럼 되기 어렵다는 자신의 한계를 물론 느끼지 않을 수는 없겠지만, 그렇다 해도
순은 어떤 사람이며 나는 어떤 사람인가.[舜何人也 予何人也]”라는 말도 있고 보면, 여기에 목표를 두고 위에서 모범을 취하기만 하면 될 뿐이요 결코 자포자기해서는 안 될 것이니, 백유는 더욱 힘써 노력해야 할 것이다.
도덕이든 문장이든 간에 하늘이 사람에게 내려 주는 것을 어찌 아까워할 리가 있겠는가. 그래서
하늘이 명한 것을 성이라 하고, 성을 따르는 것을 도라고 한다.[天命之謂性 率性之謂道]”고 말한 것이니, 백유는 명(明) 성(誠) 가르침에 대해서 소홀히 하지 말기를 바란다. 그렇게 하면 만물의 본체가 되어 결코 빠뜨릴 없는 경지가 자연히 드러나서 감출 수 없는 점이 있게 될 것이니, 쓸모가 없느니 쓸모가 있느니 하는 말을 거론하고 말 것이 뭐가 있겠는가.

 

[주D-001]가죽나무[樗]나 … 하였습니다 : 《장 자(莊子)》 소요유(逍遙遊)와 인간세(人間世), “가죽나무가 크기는 하지만 쓸모가 없기 때문에 목수도 거들떠보지 않고[匠者不顧], 역사(櫟社)의 상수리나무는 쓸모가 없기 때문에 이처럼 오래 살 수 있었다[無所可用 故能若是之壽]”는 말이 나온다.
[주D-002]시(詩)를 …… 못하였다 :
공자가 제자들에게 시의 효용(效用)을 강조한 말 가운데시를 배우면 새와 짐승 그리고 풀과 나무의 이름을 많이 알 수 있다.[多識於鳥獸草木之名]”고 한 내용이 나온다. 《論語 陽貨》
[주D-003]순은 …… 사람인가 :
《맹자(孟子)》 등문공 상(滕文公上)에 나오는 말이다.
[주D-004]하늘이 …… 한다 :
《중용장구(中庸章句)》 맨 처음에 나오는 말인데, 바로 그 뒤에그 도를 닦는 것을 교라고 한다.[修道之謂敎]”는 말이 잇따라 나온다.
[주D-005]명(明) 성(誠) 가르침 :
《중 용장구》 첫머리의 성()과 교(), 다시 하늘과 인간의 관계를 통해 규명하면서 부연 설명한 내용을 말한다. 《중용장구》 제21장에하늘의 참됨으로 말미암아 인간이 밝아지는 것을 성이라 하고, 인간이 밝아짐으로 말미암아 하늘의 참됨을 회복하는 것을 교라고 하니, 참되면 밝아지고 밝아지면 참되게 되는 것이다.[自誠明謂之性 自明誠謂之敎 誠則明矣 明則誠矣]”라는 내용이 나온다.
[주D-006]만물의 …… 경지 :
《중 용장구》 제16장에중용의 효능이 마치 귀신의 덕과 같으니, 성대하도다. 눈에 보이지 않고 귀에 들리지도 않지만, 만물의 본체를 이루는 요소로 엄연히 존재하기 때문에 결코 빠뜨려질 수 없도다.[鬼神之爲德 其盛矣 視之而不見 聽之而不聞 體物而不可遺]”라는 내용이 나온다.

석서정기(石犀亭記)

 


광 주(光州)의 지세(地勢)를 보면, 삼면이 모두 큰 산으로 둘러싸인 가운데 오직 북쪽만이 평탄하게 멀리 터져 있다. 그리고 남산(南山)의 계곡에서 두 개의 물줄기가 흘러나오는데, 그 물의 근원이 또 멀기만 하다. 따라서 이 두 개의 물줄기가 합류하면 그 형세가 더욱 커질 것 또한 충분히 알 수 있는 일이다. 그리하여 매년 한여름철이 되어 일단 장마가 들기만 하면 그 급류가 미친 듯이 질주하며 맹렬하게 쏟아져 내리는 바람에 가옥을 무너뜨리고 전답을 할퀴는 등 백성에게 피해를 끼치는 점이 적지 않았다. 그러니 이 고을을 다스리는 자가 어찌 이 점을 크게 걱정하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
남산 아래에 예전부터 분수원(分水院)이 있어 왔는데, 이는 옛사람들이 물의 형세를 완화시킬 목적으로 설치해 놓은 것이었다. 하지만 끝내 물의 흐름을 양분(兩分)하는 효과를 보지 못하였으므로, 두 개의 물이 세차게 흘러 내려와 마주치는 지점에다 돌을 쌓아 성을 만들고는 물의 흐름을 조금 서쪽으로 돌렸다가 북쪽 방향으로 흘러가게 하였다. 그러자 물이 자연히 지세를 따라 북쪽의 평탄한 지역으로 천천히 흘러가게 되면서 백성이 피해를 받는 일도 없어지게 되었다
.
이에 예전에 물이 흐르던 길목에 정자를 세우고 그 중앙을 거점으로 하여 보()의 물을 양분해서 끌어들이니, 물이 정자의 사면을 에워싼 것이 흡사 벽수(辟水 벽옹(辟雍))의 체제처럼 되었다. 이와 함께 정자의 앞뒤에다 흙을 쌓아서 자그마한 섬을 조성한 뒤에, 그 두 곳에 나무와 꽃을 심어 놓고는 부교(浮橋)를 설치하여 드나들도록 하였다. 그래서 그 안에 들어앉아서 노래라도 읊조리노라면 마치 바다에 배를 타고 나가서 운무(雲霧) 자욱한 파도 속에 뭇 섬들이 출몰하는 것을 보는 것과 같았으니, 그 즐거움이 참으로 어떠하였겠는가
.
회홀(回鶻)의 설천용(偰天用)이 남쪽을 유람할 적에 그 정자 위에까지 올라갔다가 서울로 돌아와서는 목사(牧使)인 김후(金侯)의 글을 보여 주며 정자의 이름과 기문을 부탁하기에, 내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
위대한 우() 임금이 치수(治水)를 했던 자취가 《서경(書經)》 우공(禹貢) 한 편()에 수록되어 있는데, 요컨대 물의 형세를 따라서 물길을 인도한 것이라고 하겠다. 그 뒤에
진(秦)나라 효문왕(孝文王) 이빙(李氷) 촉(蜀) 땅의 태수(太守) 임명하자, 이빙이 석서(石犀 돌로 각한 물소) 만들어서 수재(水災) 진정시킨 일이 있었다. 그런데 후위(後魏)의 역도원(酈道元)이 지은 《수경주(水經注)》를 보면, “석서가 이미 이빙의 옛것이 아니었는데도 불구하고 후대에 물의 이해(利害)를 말하는 사람들은 반드시 이빙을 일컫고 있다.”고 하였으니, 이를 통해서 이빙과 같은 사람을 바라는 사람들의 마음을 알 수 있다고 하겠다.
이 때문에 두 공부(杜工部 두보(杜甫))가 이에 대한 노래를 지어 부르기를
기가 항상 조화되게 만들 수만 있다면, 홍수가 멋대로 병들게 하는 일을 절로 면할 있으리라. 어떡하면 장사에게 하늘의 벼리를 잡게 하여 토를 다시 평정하고 물소를 사라지게 할까.[但見元氣常調和 自免洪濤恣凋 安得壯士提天綱 再平水土犀奔茫]”라 고 하였던 것이다. 대개 원기(元氣)를 조화시키고 수토(水土)를 평정하는 일은 이제 삼왕(二帝三王)과 같은 분들의 사업이라고 해야 하겠지만, 이제 삼왕의 그러한 마음가짐으로 정사를 행하려고 하는 노력은 후세에도 원래 있었던 바로서 잠시라도 없어지지 않았다는 것을 우리는 이 시를 통해서 알 수 있다. 하지만 사람들이 이치에 닿지도 않는 황당한 설을 찾아서 경국제민(經國濟民) 원대한 계책으로 삼으려 한다고 했고 보면, 두 공부의 마음이 어떠했는지를 또한 알 수 있다는 것이다.
비록 그렇긴 하지만, 공자(孔子)는 일찍이 이르기를
작은 기예(技藝) 하더라도 반드시 점이 있게 마련이다.[雖小道 必有可觀]”고 하였다. 돌을 가지고 물을 막아 낼 수 있다는 것은 아무리 어리석은 남자나 여자라도 다 알고 있는 사실이거니와, 거기에다 물소의 형상을 새겨 넣는 것은 필시 나름대로의 이치가 들어 있기 때문에 그렇게 하였을 것이다. 그런데 《포박자(抱朴子)》라는 책에 물소뿔에다 고기 모양을 새겨서 입에 물고 물속에 들어가면 물길이 자쯤 열린다.”고 했고 보면, 물소라는 물건으로 수재(水災)를 막을 수 있다는 것이 또한 분명하게 드러났다고 하겠다.
그 러니 또 더군다나 산의 뼈라고 할 암석에다 물을 물리치는 물소의 모양을 새겨 놓는다면, 물이 이를 피해 갈 것은 필연적인 일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이렇듯 물이 이미 피할 줄을 알고 있는 데다가 다시 그 물을 아래로 유도한다면, 조금도 막힘없이 시원스럽게 쏟아져 내리게 될 것이다. 그리하여 날마다 텅 빈 광활한 지역으로 흘러 내려가 넘실거리면서 바다에 이른 뒤에야 그치게 한다면, 다시 또 물 걱정을 할 것이 뭐가 있겠으며 주민들이 안정을 찾지 못할 이유가 어디에 있겠는가
. 그러고 보면 《춘추(春秋)》에서 정자에 대해 마디로 평하더라도 당연히 폄례(貶例) 따르지는 않으리라고 여겨진다.
내 가 그래서 이 정자의 이름을 석서(石犀)로 정한 다음에 두 공부(杜工部)석서행(石犀行)’을 취하여 그 근본적인 의미를 밝혔고, 다시 《포박자》의 설을 가져다가 증거로 삼은 뒤에 《춘추》의 필법으로 단안(斷案)을 내렸다. 그리하여 이 정자를 지은 목적이 수재를 예방하여 백성들의 생활을 안정시키려는 데에 있지 한갓 노닐면서 관람하는 장소를 제공하려는 데에 있지 않다는 것을 사람들에게 알려 주려고 하였다. 그러니 이 정자에 오른 사람이 정자의 이름을 고찰하고 그 의미를 생각한다면, 김후(金侯)에 대한 존경심이 반드시 일어나게 될 것이다. 김후의 이름은 상()이다. 재부(宰府)의 지인(知印)과 헌사(憲司)의 장령(掌令)을 지냈으며, 정사를 행함에 있어 청렴하고 유능하다는 이름을 얻었다.

 

[주D-001]진(秦)나라 …… 있었다 : 《사 기(史記)》 권29 하거서(河渠書)() 땅의 태수 이빙(李氷)이 이퇴(離堆)를 굴착하여 말수(沫水)의 피해를 제거했다.”는 기록이 있고, ()나라 상거()가 지은 《화양국지(華陽國志)》 촉지(蜀志)() 효문왕(孝文王)이 이빙을 촉 땅의 태수로 임명하자, 이빙이 석서(石犀) 다섯 마리를 만들어서 물귀신을 제압하였다.”는 내용이 나온다.
[주D-002]원기가 …… 할까 :
《두소릉시집(杜少陵詩集)》 권10 〈석서행(石犀行)〉 끝 부분에 나오는 내용이다.
[주D-003]사람들이 …… 했고 보면 :
위 에 인용한 시의 바로 앞부분에선왕께서 만드신 법도야말로 모두 바른길인 걸, 이치에 닿지도 않는 황당한 설을 어찌 꾀할 수 있으리오. 아 너 다섯 마리 물소 따위는 경국제민의 길이 못 되니, 깨어져 단지 저 강물에 떠내려가도 좋으리라.[先王作法皆正道 詭怪何得參人謀嗟爾五犀不經濟 缺訛只與長川逝]”라는 내용이 나온다.
[주D-004]작은 …… 마련이다 :
《논어(論語)》 자장(子張)에 나오는 공자의 제자 자하(子夏)의 말인데, 목은이 공자의 말로 착간한 듯하다.
[주D-005]물소뿔에다 …… 열린다 :
《연 감유함(淵鑑類函)》 권430 ()물소뿔 한 자 이상짜리를 구해서 거기에 물고기 모양을 새긴 다음 입에다 물고 물속에 들어가면, 항상 사방 석 자 정도로 물길이 트이기 때문에 숨을 쉴 수가 있다.[得其角一尺以上刻爲魚 而銜以入水 水上爲開方三尺 可得息氣]”는 《포박자》의 글이 인용되어 있다.
[주D-006]그러고 보면 …… 여겨진다 :
일자포폄(一字褒貶)의 춘추필법(春秋筆法)으로 논한다 하더라도, 토목공사 일반에 대해서 부정적인 평[貶例]을 가한 것과는 달리, 이 정자를 세운 것에 대해서는 긍정적인 평가[褒例]를 내릴 것이라는 말이다.

축은재기(築隱齋記)

 


문생(門生)인 송문귀(宋文貴)가 자기 이름의 귀() 자를 중() 자로 바꾸었는데, 그의 자()는 일창(日彰)이다. 그가 판축(版築)의 축() 자를 취하여 자신의 거처를 축은(築隱)이라고 이름짓고는, 나에게 기문을 요청하며 말하기를,

제 가 어렸을 적에 부모님이 저를 무척이나 사랑하셨습니다. 그런데 저를 무척이나 사랑하셨고 보면, 부모님께서 제가 세상에서 현달하기를 얼마나 바라셨을지, 그 마음을 또한 충분히 알 수 있습니다. 대체로 세상에서 현달하는 방법으로는 세 가지 길을 생각할 수 있는데, 유자(儒者)가 되는 것과 관원(官員)이 되는 것과 무인(武人)이 되는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그런데 저의 기질이 유자와 가까운 점이 있기 때문에 저의 이름을 문귀(文貴)라고 지으신 것이었습니다. , 부모님이 저를 사랑하신 그 마음이 이와 같았으니, 제가 어찌 이에 대한 생각을 깊이 하지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
그런데 저 자신이 나름대로 생각해 보건대, 사람들마다 자기 몸 안에
양귀(良貴)를 지니고 있으니, 그것은 바로 천작(天爵)이 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천작을 닦음에 따라 인작(人爵)이 자연히 따라오게 되는 것은 사군자(士君子)가 크게 바라는 바라고 하겠습니다만, 곧바로 인작만을 추구하려고 하면서 천작을 거들떠보려 하지 않는 것은 우리 유자(儒者)의 일이 아니라고 여겨졌습니다. 그런데 천작이라고 하는 것은 인의충신(仁義忠信)과 낙선불권(樂善不倦)이 바로 그것인데, 인의충신과 낙선불권은 하나의 중()일 뿐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에 제 이름을 문중(文中)으로 고친 것입니다.
()으로 말하면, 하늘과 땅과 사람이 이것을 통해야만 비로소 설 수가 있는 것인 만큼, 이보다 더 귀한 것은 이 세상에 없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이렇게 본다면 부모님께서 이름을 지어 주신 그 뜻에 비추어 보아도 어긋나는 점이 조금도 없을 뿐만이 아니라, 저 자신이 힘을 쓰는 데 있어서도 의거할 바가 있게 되었다고 할 것입니다. 따라서 제가
하분(河汾) 사모해서 이렇게 것이 결코 아니니, 부디 이런 뜻을 함께 아울러서 글을 써 주셨으면 합니다.”

하기에, 내가 다음과 같이 말해 주었다.
()의 교훈에 대해서는 《중용(中庸)》에 빠짐없이 나와 있으니, 내가 군더더기 말을 할 것이 뭐가 있겠는가. 그러나 일창(日彰)이 이미 중이라는 글자로 자신을 명명하고 나서, 자기의 거처를 또 축은이라고 이름했고 보면, 나는 이를 통해서도 일창이 뜻을 지닌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고 하겠다. ()은 그 용()을 어묵(語默)과 행장(行藏 행동거지) 사이에서 드러내 보일 수 있겠지만, 그 체()로 말하면 워낙 차원이 높아서 무엇으로도 비유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런데 이번에 집을 짓고 거처하면서도 사방에 벽만 서 있을 뿐 마냥 적막하게 하고 있으니, 여기에서 일창의 중()이 무엇인지를 볼 수 있다고 하겠다
. 띠풀로 지붕을 얹고 섬돌을 쌓은 은 성인께서 그 중()을 적용하신 것이요, 누대를 화려하게 하고 궁실을 사치스럽게 한 것은 후세에서 그 중을 잃어버린 것이라고 할 것이니, 내가 이를 통해서도 일창의 그 중을 더욱 아끼고 싶은 마음이 드는 것이다.
지 금 사대부들이 일단 자기들의 소원을 이루고 나서 행동하는 것을 보면, 사는 집을 화려하게 꾸미고 먹는 음식을 풍성하게 하고 있을 따름이다. 그리하여 안으로는 자기들의 욕심을 채우기에 급급하고, 밖으로는 자기들의 영예를 과시하기만 하면서, 오직 그렇게 할 수 있는 날이 부족할까 걱정만 하고 있는 형편이다. 이렇게 하고서도 그러한 생활이 요행히 자식에게 전해지고 손자에게 전해지기를 바라는 것은 대개 무모한 일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극단적으로 말한다면, 앉은 자리가 따뜻해지기도 전에 거처가 옮겨질 수도 있고, 벽에 바른 흙이 마르기도 전에 주인이 바뀔 수도 있는 법인데, 우리 축은의 집으로 말하면 이런 것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분명히 차원이 다른 것이라고 하겠다
.
그런데 다만 내가 그 집에 대해서 아직 모르는 것이 있으니, 그것은 즉
옹유(瓮牖)인지 규두(圭竇)인지, 승추(繩樞)인지 필문(蓽門)인지, 도복(陶復)처럼 되었는지 구탈(區脫)처 럼 되었는지, 지붕 위로 비가 새는지 벽 틈으로 바람이 들어오는지 하는 것 등이다. 그렇지만 내가 또 확신할 수 있는 것이 있으니, 그것은 즉 함께 어울려 웃고 이야기하는 사람들은 모두가 석학(碩學)일 뿐이요, 왕래하는 사람 중에 무식한 평민은 없으리라고 하는 점이다.
그런데 일창이 그 안에 물러나서 기대어 쉬고 있노라면, 필시 속으로 그리워지는 대상이 있기도 할 것인데, 그것이 어쩌면 부암(傅巖)의 들판이 아니겠는가. 하지만
고종(高宗) 꿈을 꾸어 줄지의 여부는 또 하늘에 달려 있는 일이라고 하겠다. 그러니 일창은 오직 중(中)만을 붙잡고 있도록 하라. 그러면 종신토록 판축을 하더라도 싫어하지 않게 될 것이요, 초상화를 그려서 널리 찾는다 하더라도 마음에 그다지 내키지 않게 될 것이다. () 그것이 사람이 알아줄 성격의 것이겠는가, 아니면 하늘이 알아줄 성격의 것이겠는가. 선을 하는 이에게 복을 내리고 악을 행하는 자에게 화를 내려 각자 드러나게 주는 하늘의 도리야말로 원래 어긋남이 없다고 할 것이니, 일창은 더욱 노력하도록 하라.

 

[주D-001]판축(版築) : 흙을 다져서 성벽이나 제방을 쌓는 일을 말하는데, 부열(傅說)이 은()나라 고종(高宗)에게 재상으로 발탁되기 전에 부암(傅巖)의 들판에 몸을 숨기고 판축의 일을 했던 유명한 고사가 전한다. 《書經 說命下》 《孟子 告子下》
[주D-002]양귀(良貴) :
내 속에 본래 가지고 있는 것으로서, 남이 결코 줄 수 없는 가장 고귀한 것을 말한다. 《맹자》 고자 상에남이 귀하게 해 주는 것은 양귀가 될 수 없다. 조맹(趙孟)이 귀하게 해 준 것은 조맹이 아무 때나 천하게 할 수가 있는 것이다.”라는 말이 나온다.
[주D-003]천작(天爵) :
사 람이 주는 작위(爵位)라는 뜻의 인작(人爵)과 상대되는 말로, 아름다운 덕행과 같은 천연(天然)의 작위라는 뜻인데, 《맹자》 고자 상(告子上)인의충신과 선을 좋아하여 게을리하지 않는 이것이 바로 천작이요, 공경대부 이것은 인작일 뿐이다.[仁義忠信樂善不倦 此天爵也 公卿大夫此人爵也]”라는 말이 나온다.
[주D-004]하분(河汾)을 …… 아니니 :
하 분은 수()나라의 대유(大儒)인 왕통(王通)의 별칭인데, 그의 시호(諡號)가 자기의 이름과 같은 문중자(文中子)이기 때문에 그렇게 말한 것이다. 왕통이 수 문제(隋文帝)에게 태평십이책(太平十二策)을 건의했다가 받아들여지지 않자 황하(黃河)와 분수(汾水) 사이로 돌아와 1000여 명의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이른바 하분(河汾)의 학파를 형성하였는데, ()나라 초기의 명신인 방현령(房玄齡), 위징(魏徵), 이정(李靖) 등이 모두 그의 문하였다.
[주D-005]띠풀로 …… :
《사 기》 권130 태사공자서(太史公自序)에서 묵가(墨家)를 비평하는 대목에() 임금과 순() 임금은 흙으로 섬돌을 세 칸 올렸고[土階三等], 띠풀로 지붕을 얹으면서 가지런하게 자르지도 않았다.[茅茨不翦]”라는 내용이 나온다.
[주D-006]옹유(瓮牖) :
깨진 항아리를 벽 사이에 넣어 창문을 냈다는 말인데, 이하 모두 빈한(貧寒)한 집안의 모습을 형용한 표현들이다.
[주D-007]규두(圭竇) :
벽에 옥규(玉圭)의 형태로 구멍을 뚫어서 창문을 대신한 것을 말한다.
[주D-008]승추(繩樞) :
노끈으로 허술하게 문지도리를 묶은 것을 말한다.
[주D-009]필문(蓽門) :
쑥대나 잡목의 가지를 엮어서 만든 사립문을 말한다.
[주D-010]도복(陶復) :
땅 을 파고 움집처럼 만들었다는 말이다. ()나라 태왕(太王) 즉 고공단보(古公亶父)가 기산(岐山) 아래로 옮겨 와 나라를 세우고서 처음으로 국호(國號)를 주()라고 하였는데, 《시경》 대아(大雅) (綿)고공단보께서는 땅을 파고 혈거(穴居) 생활을 하였을 뿐, 아직 번듯한 집이라는 것이 있지 않았다.[古公亶父 陶復陶穴 未有家室] ”도복도혈(陶復陶穴)’의 고사가 실려 있다.
[주D-011]구탈(區脫) :
흉노(匈奴)의 말로, 흙으로 만든 변방의 보루나 초소를 말한다.
[주D-012]고종(高宗)이 …… 여부 :
《서경(書經)》 열명 하(說命下), ()나라 고종(高宗)이 자신을 도와줄 어진 신하의 모습을 꿈속에서 보고는, 초상화를 그려서 널리 찾은 결과 부암(傅巖)의 들판에서 부열(傅說)을 얻어 재상으로 삼았던 일이 나온다.
[주D-013]중(中)만을 …… 하라 :
여 기서 중()은 지나치거나 모자람이 없는 중용(中庸)의 도()를 가리키는데, 《서경》 대우모(大禹謨)인심은 위태롭고 도심은 미세하니, 오직 정밀하고 순일하게 살펴 참으로 중을 잡아야만 할 것이다.[人心惟危 道心惟微 惟精惟一 允執厥中]”라는 유명한 말이 나온다.
[주D-014]선을 …… 도리 :
《서경》 탕고(湯誥)하늘의 도는 선인에게 복을 내리고 악인에게 화를 내린다. 그래서 하나라에 재앙을 내려 그 죄를 드러나게 한 것이다.[天道 福善禍淫 降災于夏 以彰厥罪]”라는 말이 나온다.

포은재기(圃隱齋記)

 


내가 《논어(論語)》를 읽던 중에 번지(樊遲) 채마밭 가꾸는 법을 배우고 싶다고 하자, 공자가 나는 채마밭의 늙은 농사꾼만 못하다고 대답하였다.”는 대목에 이르러서, 의아하게 생각되는 점이 있었다. 그것은 즉번지가 성인을 따라다닌 지 오래되었는데, 인의 예악(仁義禮樂)과 같은 것은 묻지 않고, 이런 농사일에만 급급했던 것은 과연 무슨 뜻에서였을까. 성인은 한 번도 천하에 대한 뜻을 잊은 적이 없다는 사실을 번지는 미처 모르고 있었던 것일까.’ 하는 것이었다.
성인 자신이 물론
내가 소싯적에 미천했기 때문에 자질구레한 일에 능한 것이 많다.”고 말한 적이 있기는 하다. 그렇지만 위리(委吏) 승전(乘田) 같은 경우는 모두가 관직(官職)이었는데, 일단 관직에 몸담은 이상 그 직분에 충실할 수밖에 없는 것이니, 관직에 충실해야 하는 것은 비단 성인뿐만이 아니라 군자라면 누구나 똑같이 그렇게 해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장저(長沮) 걸닉(桀溺) 지어 밭을 갈면서 대답한 말이 공손하지 못하자, 공자가 이를 꾸짖으면서 “새나 짐승과는 함께 무리 지어 없는 법이다.” 하였고 보면, 성인이 천하에 뜻을 둔 것이 참으로 지극했다고 말할 만하다. 또 늙어서까지 뜻을 얻지 못하게 되자 이제는 옛글을 고치고 다듬어서 만세(萬世)에 가르침을 전하려고 하였는데, 그 당시에는 채마밭의 농사일을 할 수도 있었으련만 그런 일을 했다는 말은 아직 듣지 못하였다. 그러고 보면 번지가 그런 일을 물었던 것은 스스로 비루해서였을 뿐만이 아니라, 성인을 제대로 알아볼 수 없어서였던 것이 분명하다.
비록 그렇긴 하지만, 성인은 자신의 목표를 하늘에 둔 분이기 때문에, 천하의 일을 대함에 있어 스스로 할 수 없다고 생각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그런 까닭에
공산(公山) 불렀을 때에도 자리에서 배척하지 았고, 양화(陽貨) 예물을 보냈을 때에도 무턱대고 거절하지 않았던 것이었다. 이런 일을 살펴본다면, 천 년이 지난 오늘날에 와서도 성인이 얼마나 고심하였을지 상상할 수가 있으니, 번지의 물음을 성인이 비루하게 여겼던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고 하겠다.
그러나 번지의 입장에서 살펴본다면, 자신의 수준으로 볼 때 안자(顔子 안회(顔回))와 같은 경지를 감히 넘볼 수는 없다고 생각했을 것이 분명하다. 그런데 그런
안자도 오히려 누항(陋巷) 거하였고 보면, 자기 역시 벼슬길에 나아가는 공부를 하는 대신 채마밭 농사꾼의 일을 배운다고 해서 무슨 잘못이 있겠느냐는 생각을 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중유(仲由)와 염구(冉求)에 대해서도 공자가 꾸지람을 가하였고, 심지어
북을 쳐서 성토하게 하려 적도 있었는데, 이때 번지가 공자의 노한 안색을 직접 바라보고는 마음속으로중유와 염구로 말하면 우리 동료 중에서도 뛰어난 자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처럼 질책을 당하는데, 하물며 나와 같은 무리야 더 말해 무엇하겠는가. 벼슬을 하지 않는다면 숨어 살 수밖에 없고 숨어 살지 않는다면 벼슬을 할 수밖에 없는데, 만약 물러나서 내가 종신토록 살아갈 길을 찾는다면 채마밭을 가꾸는 것만한 것도 없겠다.’라고 생각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이런 까닭으로 마침내 채마밭 가꾸는 법을 배우고 싶다고 공자에게 물어본 것일 테니, 이는 이른바
마음속에 품은 생각이 있으면 겉으로 드러나게 마련이다.’는 말에 해당되는 경우라고 할 것이다. 그리하여 옷깃을 추스르고 스승에게 말씀을 올렸다가 슬피 탄식하며 고개를 수그리고서 돌아설 수밖에 없었던 그 어쩔 수 없는 정상을 또한 상상해 볼 수가 있는 것이다.
《시경》에 이르기를
훌륭한 선비들이 많이 있음이여, 문왕이 때문에 편안하시도다.[濟濟多士 文王以寧]”라 고 하였으니, 이것이 바로 주()나라의 정치를 후세에서 따라가지 못하는 이유라고 하겠다. 성인의 문하에도 학업의 성취 속도가 빨랐던 70인과 종유(從遊)하던 3000인의 제자가 있었는데, 채마밭의 일을 배우고 싶다고 묻는 자가 이 속에서 나오고 말았으니, 이 어찌 더욱 슬퍼해야 할 일이 아니겠는가.
오천(烏川 영일(迎日)의 옛 이름)의 정달가(鄭達可 정몽주(鄭夢周))
녹명(鹿鳴) 불러 향리(鄕里) 뒷동산을 묶음 비단 필로 조촐하 꾸미고 나서, 잇따라 대과(大科)에서 장원(壯元)으로 뛰어올라 이 나라 문원(文苑)의 영화(榮華)를 독차지하였다. 그리고 염락(濂洛 송대 성리학(性理學))의 근원을 찾아 도통(道統)을 이어받고서 제생(諸生)을 시서(詩書)의 울타리 안으로 이끌어들였다. 그는 특히 시()의 뜻을 잘 해설하는 것으로 당세(當世)에 일컬어지기도 하였는데, 금릉(金陵 중국 남경(南京))에 폐백(幣帛)을 받들고 가거나 일본에 배를 타고 건너가서 발휘한 전대(專對)의 재질을 보면, 평소에 시 외운 것을 저버리지 않았다고 할 만하다.
그가 언젠가 나에게 말하기를
, 버드나무 가지를 꺾어 채마밭에 울타리를 치면, 아침과 저녁이 구분되는 것을 통해서 하늘의 도에 일정한 법칙이 있다는 것을 수가 고, 시월에 채마밭에다 타작마당을 닦고 수확을 하면, 춥고 더운 계절의 운행을 통해서 백성의 일에 순서가 있다는 것을 수가 있다. 아래로 민사(民事)를 다스리고 위로 천도(天道)를 따른다면, 이것이야말로 학문이 지향하는 궁극의 목표요 성인이 할 수 있는 모든 일이 끝나는 것이라고 하겠다. 그러니 내가 이것을 놔두고서 또 무엇을 따르겠는가.” 하였다. 그러고는 이번에 자신의 거처에다 포은(圃隱)이라는 이름을 붙이고 나서 나에게 기문을 청해 왔기에, 내가 다음과 같이 말해 주었다.
정전법(井田法) 의하면 2묘(畝) 반(半) 밭에 있다고 하였으니,
채마밭이라는 것도 바로 여기에서 나왔다고 볼 수 있다. 다만 모를 것은 그 당시에도 은자(隱者)가 있었을까 하는 점인데, 가령 소부(巢父)나 허유(許由)처럼 숨어 산다 할지라도 먹고 사는 데에 하루라도 채소가 없어서는 안 되었을 것이니, 그들도 채소 농사를 지었으리라는 것은 충분히 알 수가 있는 일이다.
그런데 지금 달가(達可)는 채마밭에 숨어 살겠다고 하면서도, 조정에 서서 사도(斯道 유도(儒道))를 자임하고 있는가 하면
낯빛을 엄하게 하고서 배우는 이들의 사표(師表) 되고 있으니, 진짜 은자가 아닌 것만은 분명하다고 하겠다. 그렇다면 달가는 장차 목은(牧隱)입네 도은(陶隱)입네 하는 사람들과 함께 한번 어울려 보고 싶어서 포은이라고 이름을 붙인 것일까.

기미년(1379, 우왕5) 2월 경신일에 짓다.

 

[주D-001]번지(樊遲)가 …… 대답하였다 : 《논어》 자로(子路)에 나오는 말로, 번지가 대답을 듣고 나간 뒤에 공자가 그를 소인(小人)이라고 탄식하면서 다시 이를 부연 설명하는 내용이 나온다.
[주D-002]내가 …… 많다 :
《논어》 자한(子罕)에 나오는 말이다.
[주D-003]위리(委吏)나 …… 경우 :
위리는 곡식 창고의 출납을 맡은 관리이고, 승전(乘田)은 목축을 주관하는 관리인데, 공자가 가난해서 이런 천한 벼슬에 몸을 담은 적이 있다는 내용이 《맹자》 만장 하(萬章下)에 나온다.
[주D-004]장저(長沮)와 …… 하였고 보면 :
《논어》 미자(微子)에 이에 대한 자세한 내용이 나온다.
[주D-005]공산(公山)이 …… 않았고 :
공 산불요(公山弗擾)가 노()나라의 실력자인 계씨(季氏)의 가신(家臣)으로서 같은 가신인 양화(陽貨)와 함께 계씨를 잡아 가두고 반란을 일으킨 뒤에 공자의 도움을 요청하였는데, 공자가 이에 응하려 하면서누구든지 나를 써 주기만 하면 동주(東周)처럼 만들 수 있다.”고 자신감을 보인 내용이 《논어》 양화(陽貨)에 나온다.
[주D-006]양화(陽貨)가 …… 것이었다 :
양화 즉 양호(陽虎)가 공자가 없는 틈을 타서 삶은 돼지를 선물로 보내자, 공자 역시 그가 없는 틈을 타서 사례하러 가다가 길에서 만나 문답을 주고받은 내용이 《논어》 양화에 함께 나온다.
[주D-007]안자도 …… 거하였고 보면 :
《논어》 옹야(雍也)누항(陋巷)에 사는 것을 사람들은 견디지 못하는데 안회는 그 즐거움을 바꾸지 않으니, 우리 안회는 정말 훌륭하다.”고 공자가 칭찬한 말이 나온다.
[주D-008]북을 …… 있었는데 :
《논어》 선진(先進), 염구(冉求)가 계씨(季氏)를 위해 세금을 더 거두려 하자, 공자가염구는 우리의 무리가 아니니, 제자들이여 북을 쳐서 성토하라.”고 한 말이 나온다.
[주D-009]마음속에 …… 마련이다 :
《대학장구(大學章句)》 성의장(誠意章)에 나오는 말이다.
[주D-010]훌륭한 …… 편안하시도다 :
《시경》 대아(大雅) 문왕(文王)에 나온다.
[주D-011]녹명(鹿鳴)을 …… 꾸미고 나서 :
정 몽주가 향시(鄕試)에 입격(入格)한 것을 표현한 말이다. ()나라의 공사(貢士) 제도를 보면, 11월에 각 군현(郡縣)에서 과거 시험을 보이고 나서, 여기에 급제한 사람에게 향음주례(鄕飮酒禮)를 베풀어 주며 《시경》 소아(小雅)의 녹명(鹿鳴)을 노래하게 하는 관례가 있었는데, 한유(韓愈)의 〈송양소윤서(送楊少尹序)〉에양후(楊侯)가 이제 막 관례(冠禮)를 마치고는, 향리에서 과거에 급제한 뒤에 녹명을 부르면서 왔다.[擧於其鄕歌鹿鳴而來]”는 대목이 나온다. 그리고 《주역》 비괘(賁卦) 육오(六五)향리의 뒷동산을 아름답게 꾸몄으나 한 묶음 비단 필이 조촐하기만 하니, 인색한 느낌이 들기는 하지만 끝내는 길하리라.[賁于丘園束帛戔戔 吝終吉]”라는 말이 나온다.
[주D-012]전대(專對) :
외 국에 사신으로 나가서 독자적으로 임기응변을 잘하는 것을 말하는데, 《논어》 자로(子路)시 삼백 편을 잘 외운다 하더라도,……사방에 사신으로 나가서 제대로 전대하지 못한다면, 비록 많이 외우고 있다 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誦詩三百……使於四方 不能專對 雖多亦奚以爲]”라는 공자의 말이 있다.
[주D-013]버드나무 …… 있고 :
《시 경》 제풍(齊風) 동방미명(東方未明)은 아무 때나 명령을 내리는 임금을 풍자하며 제발 하늘처럼 절도 있게 행동해 주었으면 하는 바람을 담고 있는 시인데, 그 마지막 부분에버드나무 가지를 꺾어 채마밭에 울타리를 치면, 그냥 날뛰는 바보도 조심할 줄 아는데, 우리 임금님은 아침과 저녁도 구분하지 못하여, 너무 일찍 부르지 않으면 너무 늦게만 부르누나.[折柳樊圃 狂夫瞿瞿 不能辰夜 不夙則莫]”라고 하였다.
[주D-014]시월에 …… 있다 :
《시 경》 빈풍(豳風) 칠월(七月)은 계절의 변화에 따른 농민의 생활과 농촌의 정경을 노래하고 있는데, 그 시 가운데에구월에는 채마밭에다 타작마당을 닦고, 시월에는 온갖 곡식을 거둬들인다.[九月築場圃 十月納禾稼]”는 말이 나온다. 원문의 10월은 9월의 착오인 듯하다.
[주D-015]정전법(井田法)에 …… 하였으니 :
고 대에 정전(井田) 900묘 가운데 8()가 각각 100묘씩을 사전(私田)으로 소유하고, 중앙의 공전(公田) 100묘 중 80묘는 공동 경작하되, 나머지 20묘는 8가에서 2묘 반씩 나눠 가져 여사(廬舍)를 지었던 것을 말한다. 《春秋穀梁傳 宣公15年 范寧 註》
[주D-016]낯빛을 …… 있으니 :
()나라 유종원(柳宗元)의 〈답위중립논사도서(答韋中立論師道書)〉에한유(韓愈)가 사설(師說)을 짓고 나서는, 낯빛을 엄하게 하고 배우는 이들의 사표가 되었다.[作師說因抗顔而爲師]”는 말이 나온다.

보개산(寶蓋山) 석대암(石臺菴) 지장전(地藏殿)의 기문

 


보개산 석대암의 비구(比丘)인 지순(智純)이 화소(化疏)를 써 달라고 나에게 간청하였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또 나를 찾아와서는 말하기를,

내 가 화소를 가지고 공경(公卿)들을 열심히 찾아다니면서 미포(米布)를 얻으면 내가 쓸 것을 충당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내가 지금 너무 늙은 만큼, 어느 날 갑자기 아침 이슬보다도 빨리 이 몸이 없어져서 공사가 다 끝나는 것을 보지 못하게 될까 걱정되기도 한다. 그러나 내가 뜻한 것만은 불가불 뒷사람들에게 알려서 나의 뜻을 이어받게 하고 싶은데, 이것을 또 말로 전할 수는 없겠기에 감히 선생의 한마디 말씀을 청하게 되었다.”

하기에, 내가 말하기를,

승려들은 요술을 부리는 데다가 여러 가지 기능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무슨 공사를 일으키든 간에 땅에서 지푸라기를 줍는 것보다도 쉽게 이루어 내곤 한다. 그리하여 사찰을 서로 바라다보일 정도로 세워 놓고 신령스러운 유적지를 잘 정비해 놓은 것들이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은데, 보개산에 있는 지장보살(地藏菩薩)의 석상(石像)도 그중의 하나이다.
지장보살과 관련된 영험(靈驗)으로 말하면 세상 사람들 모두가 알고 있는 바이다. 따라서 이에 대해서는 내가 여기에서 굳이 거론하여 기록하지 않더라도 괜찮겠지만, 지순 스님이 여기에 쏟고 있는 간절한 그 마음만큼은 결코 없어지게 해서는 안 될 것이다. 그래서 내가 그의 말을 써서 전하는 한편, 뒷날 지순 스님의 뜻을 잇는 자들에게 격려의 말 한마디를 하려는 것이다. 지순 스님의 말이 얼마나 의미가 깊은가. 생사(生死)는 참으로 무상(無常)한 것이기 때문에, 오늘은 비록 살아 있다 하더라도 내일은 어떻게 될지 보장하기가 어렵다고 한 것이니, 사람이 죽고 사는 문제야말로 정말 중대한 일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
전하는 말에 의하면, 지장보살은 마치 거울처럼 빠짐없이 비춰 보기 때문에, 자신에게 귀의하여 도움을 요청하는 사람에 대해서는 그의 무지와 미혹을 몰아내고 총명과 지혜를 내려 준다고 하는데, 고금에 걸쳐 그런 영험을 보인 자취가 수두룩하다고 일컬어져 오고 있다. 그런데 지금 지순 스님의 경우를 보건대, 지장보살을 이미 독실하게 믿으면서 받들어 모시고 있는데도 지장보살이 그에게 지혜를 얼마나 더 내려 주었는지 내가 감히 알 수 없는 형편이고 보면, 뒷날 정성껏 근실하게 바라며 구한다 하더라도 총명과 지혜를 얻게 될 수 있을지는 내가 또 감히 알 수 없는 바이다
.
비록 그렇긴 하지만, 어떤 사람이든 간에 그 마음만은 부처나 보살의 마음과 근본적으로 똑같은 것인 만큼, 제불(諸佛)이라고 해서 그 마음이 불어나는 것도 아니요, 중생(衆生)이라고 해서 그 마음이 줄어드는 것도 아니라고 할 것이다. 따라서 지극히 어리석은 사람이라 할지라도 어느 날 홀연히 자신의 죄를 뉘우치고 슬피 호소하면서 잠깐 동안이라도 본래 지니고 있는 자기의 선한 마음을 들추어 보게 되면, 본심(本心)의 전체(全體)와 대용(大用)이 뚜렷이 현현(顯現)하는 법열(法悅)을 맛볼 수도 있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일생 동안 좌선(坐禪)을 하면서
단제(單提)를 본래 그대로 남김없이 드러내어 체득한 이와 아무 차이가 없게 될 것이니, 이 어찌 조그마한 총명이나 지혜 정도에 그치겠는가.”

하였다.
이 런 내용으로 지순 스님에게 말해 주고는, 그 규모에 대해서 물어보았더니, 지장보살의 석상은 3() 남짓 되고, 석실(石室)은 높이가 6, 깊이가 4, 넓이가 4척이라고 하였다. 지금 지순 스님이 짓는 지장전을 보면, 북쪽 처마로 석실의 위를 덮어 주어 비가 올 때마다 처마에서 떨어지는 물이 석실 북쪽으로 흘러가게 하였는데, 대개 이렇게 함으로써 석상을 보호하는 동시에 정근(精勤)하는 데에도 편리하게 하기 위함이라고 하였다.

 

[주D-001]승려들은 …… 때문에 : 한유(韓愈)의 〈송고한상인서(送高閑上人序)〉 끝 부분에 나오는 말이다.
[주D-002]단제(單提) :
단전(單傳)과 같은 뜻의 선종(禪宗)의 용어로, 불조(佛祖)끼리만 서로 전해 온 교외별전(敎外別傳), 불립문자(不立文字), 단전심인(單傳心印)의 경지를 가리킨다.

거제현(巨濟縣) 우두산(牛頭山) 견암선사(見菴禪寺)의 중수기(重修記)

 


나 옹(懶翁)의 스승은 지공(指空)이다. 그런데 달순(達順)이라고 하는 이가 먼저 지공의 문하로 들어와 있었는데, 계행(戒行)이 근실하고 고결하여 동료가 모두 심복(心服)하였다. 그리고 나옹 역시 그를 비범한 인물로 여기고 있었기 때문에, 왕사(王師)의 신분으로 승려들의 영수가 되어 더할 나위 없는 존경과 영광을 누리고 있을 때에도, 유독 달순 스님이 올 적에는 그와 대등하게 맞절을 하곤 하였다. 그럴 때면 달순 스님이 이를 피해서 달아나곤 하였지만, 나옹이 끝까지 감히 자존(自尊)하는 마음을 보이려 하지 않았으므로, 나옹의 문하에 있는 자들 모두가 달순 스님을 공경하며 깍듯이 예우하였다. 하지만 이것은 모두 마음속으로 열복(悅服)하여 나온 행동이었을 뿐, 우리 나옹 스님이 존대하니까 우리도 마지못해 따라서 그를 존대한다는 식의 행동이 아니었으니, 달순 스님의 사람 됨됨이가 대개 이와 같았다.
그가 거제현 우두산의 견암(見菴)을 중수하여 깊은 골짜기를 장엄하게 꾸며 놓고는, 공역(工役)의 시말(始末)을 기록한 자료와 함께 신륵사(神勒寺)의 주 상인(珠上人)을 나에게 급히 보내 기문을 요청하였다. 내가 기록을 검토해 보건대, 신라(新羅) 애장왕(哀莊王) 때에 순응(順應)과 이정(理定)이라는 승려가 중국에 들어가서
, 보지공(寶志公)의 유교(遺敎)라는 것을 들어 보니내가 죽은 뒤 300년이 지나면 동국(東國)에서 두 명의 승려가 와서 나의 도를 동쪽으로 전할 것이다.”라고 하였으므로, 지공(志公)의 진신(眞身)에 예배하고 그 법()을 얻은 다음, 나무로 노새를 만들어 그 위에다 《화엄경(華嚴經)》을 싣고 돌아왔는데, 이것이 바로 우두산의 견암이 세워지게 된 유래라고 하였다. 이 밖에도 산속에는 또 원효(元曉)와 의상(義相)과 자명(慈明) 3대사(大士)의 유적(遺跡)이 있는데, 지금의 도정암(道正菴)과 자명암(慈明菴)이 그것이라고 하였다.
견암이 폐허로 변했는데도 그동안 복구하는 사람이 나오지 않다가, 지정(至正) 경자년(1360, 공민왕9)에 풍수(風水)에 조예가 있는 소산(小山)이라는 승려가 승지(勝地)인 그곳을 안타깝게 여기고는 순공(順公 달순)과 상의하기에 이르렀다. 이에 순공이 대시주(大施主)인 판사(判事) 김신좌(金臣佐) 및 그 문인인 모모(某某) 등과 함께 그 즉시 재목을 모으고 공사에 착수하여 5년이 지난 갑진년 모월에 낙성(落成)함으로써 성대하게 하나의 총림(叢林)을 이루게 되었다. 그러고는 사원의 동북쪽 모서리에 나옹의 영당(影堂)을 건립하여 추모하는 정성을 바쳤으니, 이렇게 해서 산문(山門)의 일이 모두 끝나게 되었다
.
이에 달순 스님이 흔연히 38개의 산봉우리를 마주 대하고 앉아서는, 좌객(坐客)에게
하늘이 내주고 땅이 갈무리하여 적임자에게 이처럼 물려주었다.[天作地藏 以遺其人]”고 자랑하기도 하였다. 그러고는 이 봉우리의 이름은 무엇이며 저 봉우리의 이름은 무엇이라는 등 38개의 봉우리를 하나하나 손꼽아 헤아리면서 오직 날이 부족할까 걱정하였으니, 달순 스님이야말로 산을 사랑하는 고질병에 걸렸다고도 말할 만하다. 주 상인이 이런 내용의 이야기를 나에게 해 주기에 내가 함께 적어 넣게 되었다.

기미년(1379, 우왕5) 6월에 짓다.

 

[주D-001]보지공(寶志公) : 중 국 남조(南朝) 때의 신승(神僧)으로, 보지(寶誌)ㆍ보지(保志)ㆍ보지(保誌) 등으로 불리우기도 하며, 세상에서 보공(寶公) 또는 지공화상(志公和尙)으로 일컬어지기도 한다. 제 무제(齊武帝)가 그를 옥에 가두어 꼼짝 못 하게 했을 때에도 술법을 부려서 마음대로 밖에 나가 돌아다녔다고 하며, 뒤에 양 무제(梁武帝)의 귀의를 받아 널리 교화를 폈다고 한다. 《梁高僧傳 卷10
[주D-002]하늘이 …… 물려주었다 :
한유(韓愈)의 〈연희정기(燕喜亭記)〉에 나오는 말이다.

소재기(疎齋記)

 


인산(仁山) 최언보(崔彦父)가 왕전동(王殿洞) 동쪽 봉우리에 새로 집을 지었는데, 벽에다 흙을 바르고 띠풀로 지붕을 덮어 장차 공사를 마치려 할 즈음에, 산길을 뚫고 골짜기 아래로 내려와 버드나무 한 그루가 서 있는 곳을 찾아와서는 자기 집의 이름에 대해서 목은자(牧隱子)에게 물어보며 말하기를,

나 는 재주가 없는 데다 또 병이 많기도 하다. 게다가 권세가의 집을 기웃거릴 줄도 몰라서 부여잡고 올라갈 만한 형세를 내 몸에 붙여 본 적이 없다. 하지만 정유년에 등과(登科)한 이래로 지금 22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장서기(掌書記)를 거쳐 삼관(三館)의 관원에 보임(補任)되었고, 그 뒤 누차 전전(轉轉)한 끝에 지금은 예의사 총랑(禮儀司摠郞)으로서 봉상대부(奉常大夫)의 품계에 올라 있다. 이처럼 하루도 관직을 떠난 일이 없이 매년 국록(國祿)을 축내어 왔고 보면, 유사(有司)의 알아줌을 받지 않았다고 말할 수도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래도록 벼슬길에 몸담고 있으면서 관직이 아직도 4품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으니, 이는 나의 운명이라고 하겠다. 내가 붙임성이 없는 것[]은 하늘로부터 운명적으로 부여받은 것인 만큼 원망할 것이 못 된다. 그리하여 사람들이 나를 소외(疎外)시키는 것이 아니라 내가 소외당하는 일을 자초하고 있으니, 어찌 또 사람들을 탓할 수가 있겠는가
.
그리고 요즈음 호걸스러운 인재와 유자(儒者)들이 허다히 화()를 당해 꺾이는 광경을 목도하노라면, 나의 데면데면한[] 성격이 고맙게 여겨지면서 안으로 뿌듯한 느낌을 갖게도 되니, 내가 어찌 잠시라도 불만스러운 생각을 감히 가질 수가 있겠는가. 그래서 내가 장차 나의 집에다 소()라는 글자로 편액을 걸어 두려고 하니, 그대가 이에 대해서 기문을 써 주면 좋겠다.”

하기에, 내가 다음과 같이 말해 주었다.
()라는 글자로 말하면, 내가 이미 시험해 본 바가 있다. 학문이 소략(疎略)해서 거칠고 조잡하게만 되었으니, 이제 와서 내가 후회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일을 소홀(疎忽)하게 처리해서 관직을 오래도록 비어 있게 하였으니, 이제 와서 내가 후회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교우 관계를 소원(疎遠)하게 해서 옛 친구들에게 버림을 받고 혹 만나더라도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게 하고 있으니, 이제 와서 내가 후회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 임금과 신하 사이에 기밀 사항이 새어 나가 해롭게 나머지 위급한 상황이 박두하게 한 일이 또 한두 번이 아니니, 이렇듯 상을 소활(疎闊)하게 섬긴 것을 이제 와서 내가 후회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무 릇 이 네 가지 중에서 한 가지만 내 몸에 있다 하더라도 세상의 버림을 받기에 충분하다 할 것인데, 더군다나 네 가지 모두를 지니고 있는 처지이고 보면 폐출(廢黜)되어야 마땅하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양부(兩府 문하성(門下省)과 중추원(中樞院))의 관직을 향유하고 문형(文衡)을 두 번이나 맡았는가 하면 병들어 있으면서도 봉작(封爵)을 받고 그 녹(祿)을 받아먹은 것이 또 5년이나 되어 가니, ()라는 글자가 사람에게 이익을 가져다 주는 것이 크다고도 하겠다
.
내가 시험해 본 것이 이 정도로 그치기는 하지만, 지금 그대가 다시 소()라는 편액을 내걸고 그렇게 살아간다면, 그대의 소()가 뒷날 나의 소()처럼 유익하게 되지 않을지 또 어찌 알겠는가. 그리고 학문에 더욱 열심히 매진하고 관직 생활을 더욱 충실히 하고 교유 관계를 더욱 미덥게 해 나가다 보면, 상의 지우(知遇)를 비록 늦게 받는다고 하더라도 평소 쌓은 경륜을 마음껏 펼쳐 보여 내가 세운 사공(事功)보다도 훨씬 뛰어난 업적을 이룰 것이 분명하니, ()에서 거두는 공이 필시 보잘것없이 되지는 않을 것이다
.
그리하여 하늘의 복을 받아 두 늙은이가 서로 손을 잡고
녹야당(綠野堂) 위에 올라가서 노래를 주고받으며 창안백발(蒼顔白髮)의 모습으로 천년(天年)을 마칠 수만 있다면, 세상에서 아교와 칠처럼 뗄 수가 없고 성지(城池)와 부고(府庫)처럼 깊숙한 관계를 맺고 있다가 끝내는 본모습이 드러나서 그 관계가 여지없이 깨어지는 사람들이 소재(疎齋)를 보고서 부러워하는 것이 또 어떠하다 하겠는가. , 그러고 보면 소()야말로 내가 장차 그대와 더불어 돌아갈 곳이 아니겠는가.

 

[주D-001]벽에다 …… 덮어 : 《서경》 재재(梓材)집을 지을 적에 애써 담을 세웠으면, 이제 벽에다 흙을 바르고 띠풀로 지붕을 덮어야 한다.[作室家 旣勤垣墉 惟其塗墍茨]”는 말이 나온다.
[주D-002]임금과 …… 나머지 :
《주 역》 계사전 상(繫辭傳上)임금이 비밀을 지키지 않으면 신하를 잃게 되고, 신하가 비밀을 지키지 않으면 몸을 잃게 되며, 기밀 사항이 새어 나가면 해를 당하게 된다.[君不密則失臣臣不密則失身 機事不密則害成]”는 말이 나온다.
[주D-003]녹야당(綠野堂) :
만 년(
)에 높은 벼슬자리에서 물러 나와 한가로이 노니는 장소를 뜻하는 말이다. ()나라의 재상(宰相) 배도(裴度)가 만년에 은퇴하여 낙양(洛陽)에 녹야당을 지어 놓고는, 백거이(白居易)ㆍ유우석(劉禹錫) 등과 함께 밤낮으로 시주(詩酒)를 즐기면서 인간의 일을 묻지 않았던 고사가 전한다. 《新唐書 卷173 裴度傳》

무은암기(無隱菴記)

 


천 태(天台) 숭산사(嵩山寺)의 장로(長老)는 전의 이씨(全義李氏) 가문의 우수한 인재로 태어났다. 그 집안에서는 대대로 벼슬을 하였는데도 이를 버리고서 불교를 공부하기 위해 조계(曹溪)에서 노닐며 사선(四選)에서 으뜸을 차지하였는데, 이것도 다시 버리고서 산속으로 깊이 들어가 부처의 정수(精髓) 곧장 자기의 마음자리에서 찾아보려고 하였다. 그러나 그 일을 마치기도 전에 부친이 강요하는 바람에 또 승과(僧科)에 응시하게 되었는데, 이번에는 천태(天台)의 선발에 뽑혀 상상품(上上品)에 발탁된 뒤에 무량의처(無量義處) 삼매(三昧) 증득(證得)하기에 이르렀다.
신 축년의 병란을 당해 산림(山林)이 거의 남김없이 소실되자 스님이 부모를 모시고 난을 피하였는데, 마치 집안에 있는 것처럼 편안하게 해 드렸으므로, 부모가 크게 기뻐하였을 뿐 아니라 이를 듣는 자들 역시 스님의 사람됨에 감복하였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부모가 서로 잇따라 세상을 떠나게 되자 스님이 영구(靈柩)를 부둥켜안고 울부짖으며 애통한 마음을 다했는가 하면, 묘소 옆에서 시묘(侍墓)하면서 삼년상을 제대로 마쳤다. 이는 비록 지행(志行)을 갖춘 우리 유자(儒者)라 할지라도 견줄 자가 드문 행동이라고 할 것이니, 스님이 마음속으로 지키고 있는 바가 보통 사람들과는 다르다는 것을 분명히 알 수 있다.
천녕현(川寧縣)은 모친의 가향(家鄕)으로서, 산수의 경치가 뛰어날 뿐만 아니라 벼농사도 잘 되는 곳이라서 한가히 세월을 보내기에는 적격이었다. 따라서 험준하고 깊은 산속에서 솔잎과 잣을 씹고 안개와 노을을 벗 삼으며 세상과 단절한 채 이웃도 없이 사는 것과는 달랐던 만큼 스님의 거처에 점잖은 진신 선생(搢紳先生)들이 왕래하도록 했어야 마땅했을 텐데, 조금 외진 곳에다 터를 잡는 바람에 사람들이 찾는 일이 또 드물기만 하였으니, 이를 통해서도 스님의 마음이 어떠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
그런데 동정(東亭 염흥방(廉興邦))이 남쪽을 유람하다가 요행히 스님을 만나 수창(酬唱)하면서 날이 가는 줄을 몰랐다. 스님이 사는 곳에는 무은암(無隱菴)이라는 편액이 걸려 있었는데, 동정이 스님의 인품을 사랑할 뿐만이 아니라 그곳의 매죽(梅竹)과 수석(水石)의 뛰어난 경치를 좋아하게 된 나머지, 지금까지도 마음속으로 잊지 못하고서 나에게 무은암의 기문을 부탁하여 사모하는 뜻을 붙이려고 하였다
.
이에 내가 다음과 같이 말해 주었다
.
암자의 이름을 왜 그렇게 붙였는지 나로서는 그 뜻을 잘 알지 못하겠다. 하지만 우리 부자(夫子)의 말씀 가운데에
자네들에게 나는 기는 것이 하나도 없다.”는 언급이 있는데, 내가 평생토록 힘을 쏟아 오면서도 그러한 경지는 아직도 보지를 못하였다. 지금 스님으로 말하면 이단(異端)에 속한 사람이니, 이것을 가지고 그에게 말해 줄 수는 없을 것이다. 비록 그렇긴 하지만, 스님의 마음이 보통 승려와는 같지 않아서 부모에게 효도하고 군자를 좋아하게 되었고 보면, 우리 유자(儒者)로서는 그런 말을 자꾸 들려주어 우리 쪽으로 나아오도록 해야지 이단이라고 해서 배척만 해서는 안 될 것이다.
, 세상에서 뻔뻔스럽게 얼굴을 치켜들고서 자기의 소행을 감추려고 하는 사람들은 모두가 숨기는[] 부류에 속한 자들이라고 할 것이다. 그런데 스님만은 가슴이 툭 트여서 어떤 상황에서든 털끝만큼도 가리는 것이 없으니, 무은(無隱)이라는 이름을 그냥 허황되게 붙인 것이 아니라고 하겠다. 내가 한번 헤아려 보건대, 암자 안에는
어떤 사람이 있어서 사람이 때마다 자기의 폐와 간을 그대로 들여다보게 하듯 하고, 암자 밖에는 산 빛이 밝게 비치고 흐르는 물이 맑기만 하여 티끌 하나 붙지 못할 경계를 이루고 있다고 한다면, 사람과 경계가 혼연일체가 되어 당당(堂堂)하고 낙락(落落)한 가운데 공간적으로는 시방(十方)에 두루 뻗쳐 있고 시간적으로는 삼제(三際 전생, 금생, 내생의 삼생(三生))의 끝까지 통할 것이니, 누가 다시 그 주인공(主人公)을 찾아낼 수가 있겠는가.
나는 병든 지가 오래되었다. 하지만 산수 사이에서 한 번 노닐면서 평소의 회포를 통쾌하게 풀어 보고도 싶은데
, 무은암에 가면 나를 하룻밤 자도록 허용해 줄지 모르겠다. 이상의 내용으로 기문을 삼으면 어떨까 싶다.

 

[주D-001]부처의 …… 하였다 : 직 지인심(直指人心)ㆍ견성성불(見性成佛)을 주장하는 선불교(禪佛敎)의 가르침에 심취하여 그 궁극의 경지를 터득하려고 노력했다는 말이다. 중국 선종(禪宗)의 초조(初祖)인 달마(達磨)가 제자 4인의 경지를 점검하면서, 3인에게는 각각 나의 가죽[]과 살[]과 뼈[]를 얻었다고 한 뒤에, 마지막 혜가(慧可)에 대해서는 나의 정수[]를 얻었다고 하며 의발(衣鉢)을 전수한 고사가 전한다. 《景德傳燈錄 卷3 菩提達磨》
[주D-002]무량의처(無量義處)의 …… 이르렀다 :
천 태종 최고의 경지를 체득했다는 말이다. 무량의처 삼매는 부처가 《법화경(法華經)》을 설할 때에 대중에게 먼저 보여 주었던 삼매의 이름인데, 천태종에서는 《법화경》을 소의경전(所依經典)으로 삼고 있기 때문에 그렇게 말한 것이다. 《法華經 序品》
[주D-003]자네들에게 …… 없다 :
《논 어》 술이(述而)자네들은 내가 무엇을 숨기고 있다고 생각하는가? 나는 자네들에게 숨기는 것이 하나도 없네.[二三子以我爲隱乎 吾無隱乎爾] 나는 무슨 일을 하든 간에 자네들과 함께하지 않는 일이 없으니, 나는 바로 그런 사람일세.”라는 말이 나온다.
[주D-004]어떤 사람이 …… 하고 :
숨기는 것 없이 자기의 속마음을 그대로 드러내 보인다는 말인데, 《대학장구》 성의장(誠意章)남들이 자기를 보기를 마치 폐와 간을 보듯 한다.[人之視己 如見其肺肝然]”는 말이 나온다.
[주D-005]무은암에 …… 모르겠다 :
()나라의 영가(永嘉) 현각 선사(玄覺禪師)가 육조(六祖) 혜능(慧能)을 찾아가서 문답을 나누며 서로 계합(契合)하고는 곧바로 떠나가려 하자 육조가 만류하여 하룻밤을 자고 가도록 하였으므로, 일숙각(一宿覺)이라고 일컬었다는 고사가 전한다. 《景德傳燈錄 卷5 溫州永嘉玄覺禪師》 여기서는 목은이 암주(菴主)를 혜능에 비유하고 자신은 영가에 견주어서 묘하게 말한 것이다.

육익정기(六益亭記)

 


상 락(上洛 상주(尙州)의 옛 이름)의 김직지(金直之)는 나와 같은 해에 함께 진사(進士)에 입격(入格)하였다. 나이는 나보다 네 살이 위인데, 매우 친하게 지내면서 날마다 상종을 했는데도 차마 떨어져 있지 못한 나머지 밤에도 함께 자면서 등불 심지를 돋우고 시를 읊곤 하였다. 그리고 직지의 부모 역시 그가 학문을 좋아하는 것을 기뻐하여, 우리에게 술이며 음식을 후하게 먹여 주곤 하였는데, 내가 지금까지도 그 일을 잊지 못하고 있다.
그 뒤에 내가 요행히 출세를 빨리하여 재부(宰府)에 오르고 나서 두 번이나 지공거(知貢擧)를 맡게 되었는데, 그때까지도 직지는 여전히 제생(諸生)의 신분으로 극위(棘闈 과거 시험장)를 출입하고 있었다. 그래서 고사(考査)가 끝날 때마다직지가 이번에는 또 어떻게 되었을까하고 마음속으로 궁금하게 여겼는데, 막상 방()이 붙고 보면 직지가 낙제를 하였으므로, 나 홀로 가슴 아프게 생각하였다. 직지 자신도 얼마나 상심했겠는가마는, 나보다 더 가슴이 아프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 일을 통해서 나는 내 마음속으로만 공정하게 되기를 기대하기보다는 기강을 바로잡아서 법대로 공정하게 되도록 하는 것이 낫다는 것을 절감하게 되었다. 한편 직지는 시율(詩律)에 특히 능한 면모를 보였는데, 이번에 다행히 시부(詩賦)로 시험을 보여 인재를 뽑게 되었지만, 직지가 또 부친상을 당하는 바람에 두 차례나 과거에 응시조차 하지 못하였으니, , 생각하면 슬픈 일이라 하겠다
.
그런데 직지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건대, 계속 그치지 않고 문을 두드렸는데도 세상에서 받아 주지 않았고 보면 필시 마음속으로 번민했을 것이요, 그리하여 마음을 즐겁게 할 방도를 모색한 결과 산야에서 자적하며 아침저녁으로 자신을 보양하는 것이 낫겠다는 생각을 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이렇게 해서 상주(尙州)의 속현(屬縣)인 청려(淸驢)라는 곳에 터를 잡고서 집을 짓고 살게 되었는데, ()나라 처사(處士)인 도 정절(陶靖節 도잠(陶潛))소나무와 대나무와 국화는 유익함을 안겨 주는 세 친구라는 말을 취한 위에 다시 뽕나무와 밤나무와 버드나무를 심어 자신의 정자에다 육익(六益)이라는 이름을 붙이고는, 나에게 기문을 청해 왔다. 이에 내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
()과 익()의 상()은 《주역(周易)》의 그 두 괘()에 드러나 있으니 굳이 이야기할 것이 없고
, 손해되고 이익되는 친구에 대해서는 《논어(論語)》에 상세히 언급되어 있으니 또 구태여 거론할 것이 없다고 하겠다. 그리고 직지는 시 읊기를 좋아하는 만큼 시의 비흥(比興)에 대해서도 깊이 터득하고 있을 텐데, 내가 또 어떻게 감히 군더더기 말을 덧붙일 수가 있겠는가. 하지만 빈객이 찾아와서 이 정자에 오를 경우, 그들 모두가 직지의 심경이라든가 정자를 그렇게 이름 지은 뜻에 대해서 꼭 안다고는 할 수 없겠기에, 직지가 이 여섯 가지 물건에 쏟는 각별한 관심을 대충 서술해서 그들에게 알려 줄까 한다.
소나무는 안으로 연륜을 지니고 있고 대나무는 밖으로 푸른 나뭇가지를 자랑하면서 사계절 어느 때나 가지와 잎들을 바꾸는 법이 없으므로
군자가 이를 중하게 여기는 것이요, 국화는 은일(隱逸) 표상하기 때문에 은자(隱者) 자신의 꽃으로 삼는 것이다. 그리고 뽕나무는 빈(豳) 땅의 노래에도 기록되어 있는바 의상(衣裳) 기본이 된다고 것이요, 밤나무는 초구(楚丘) 땅에도 드러나 있는바 제향(祭享) 올리는 물건이요, 버드나무는 속성상 시절에 따라 사람에게 감흥을 일으키며 사적인 일을 잊고 공적인 일에 봉사하게 하는 것으로서, 쓸 일이 생길 때마다 어디서든 쉽게 구할 수 있는 물건이라고 하겠다.
직 지가 그 안에 거처하면서 추위와 더위가 서로 교차하는 현상을 관찰하고 시절의 경물(景物)이 변화하는 모습을 즐기노라면, 느낀 대로 자연스럽게 반응하면서 시가(詩歌)로 옮겨 읊는 그 사이에 형체 없는 형체 속으로 빠져들어가고 맛없는 맛을 음미하게 될 것이니, 사시(四時)의 경치가 각기 같지 않은 만큼 스스로 느끼게 되는 즐거움도 끝이 없게 될 것이다. 직지가 비록 세상에서 자신의 뜻을 펴지는 못했다 하더라도, 자기 한 몸에 대해서는 자득(自得)한 것이 또한 이와 같다고 하겠다
.
, 송곳니를 주면 뿔은 없게 한다는 말이 있는 것처럼, 조물주는 참으로 사람에게 인색하게 군다는 느낌을 갖게도 한다. 나는 지금 무려 아홉 해 동안이나 우수(憂愁)와 병고(病苦)에 시달리며 곤고하고 군박한 생활을 해 오고 있으니, 그저 나의 목숨을 근근이 이어 가는 것에 불과하다고 하겠다. 하지만 직지는 그동안 불우하게 지내면서 노년에 이르렀으니, 이제는 마음을 즐겁게 하고 육신을 편히 하면서, 정신없이 뛰어다니다가 꺾이고 무너져 버린 동년(同年)의 부러움을 사게 하는 것 또한 당연한 일이라고도 하겠다. 직지는 앞으로 이 육익정(六益亭)에서 그 덕을 더욱 크게 하고 그 수명을 더욱 길게 할 것이니, 직지야말로 진정 나를 유익하게 해 주는 친구라고 해야 할 것이다.

기미년(1379, 우왕5) 4 22일에 짓다.

 

[주D-001]손해되고 …… 있으니 : 《논어》 계씨(季氏)에 이른바익자삼우(益者三友)’손자삼우(損者三友)’에 대한 설명이 나와 있다.
[주D-002]비흥(比興) :
()의 이른바육의(六義)’ 가운데 비()와 흥()의 병칭으로, 시를 창작할 때의 전통적인 표현 수법을 말한다.
[주D-003]소나무는 …… 없으므로 :
《예기(禮記)》 예기(禮器) 첫머리에 나오는 말이다.
[주D-004]국화는 …… 것이다 :
송유(宋儒) 주돈이(周敦
)의 〈애련설(愛蓮說)〉에국화는 꽃 중의 은자이다.[菊 花之隱逸者也]”라는 말이 나온다.
[주D-005]뽕나무는 …… 것이요 :
《시 경》 빈풍(豳風) 칠월(七月), “누에 치는 달에는 뽕나무 가지를 쳐야 하니, 도끼를 가져다가 멀리 뻗은 가지를 베고 여린 뽕잎을 따서, 우리 공자님 바지를 지어 드린다.[蠶月條桑 取彼斧
以伐遠揚 猗彼女桑 爲公子裳]”는 구절이 나온다.
[주D-006]밤나무는 …… 물건이요 :
《시 경》 용풍(
) 정지방중(定之方中)초구(楚丘)에 궁실을 짓고, 개암나무와 밤나무를 심는다.[作于楚室 樹之榛栗]”는 말이 나오는데, 그 주()문공(文公)이 도읍을 옮겨 초구에 거하면서 궁실을 지었다.”고 하였고, 개암과 밤은 모두 변두(籩豆) 즉 제사 음식으로 올릴 수 있다.”고 하였다.
[주D-007]버드나무는 …… 것으로서 :
《시경》 소아(小雅) 채미(采薇)는 수자리 사는 사람들을 떠나보낼 때 그들을 위로하며 부른 노래인데, 그중에옛날에 내가 길을 떠날 때에는, 푸른 버들가지가 휘휘 늘어졌지.[昔我往矣 楊柳依依]”라는 말이 나온다.
[주D-008]송곳니를 …… 한다 :
《한 서(漢書)》 권56 동중서전(董仲舒傳)하늘은 역시 골고루 나눠 주는 바가 있으니, 예컨대 송곳니를 준 자에게는 뿔이 없게끔 한다.[天亦有所分與 與之齒者去其角]”는 말이 나오는데, 하늘이 한 사람에게 완전무결한 행복을 내려 주지는 않는다는 뜻으로 곧잘 쓰인다.

송월당기(送月堂記)

 


이 소윤(李少尹)이 나를 찾아와서 말하기를,

가군(家君 부친)이 관직을 그만둔 뒤로 개령(開寧)에서 노년을 보내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거처하는 곳의 서쪽에다 집 한 채를 짓고는 평소 여기에 거하면서, 마음속으로 서방(西方) 사모하며 세계를 주재(主宰)하는 부처의 명호(名號) 입으로 외우곤 하였는데, 한참 지난 뒤에는 아예 복장을 바꿔 입고서 진짜 부도씨(浮屠氏)와 같은 생활을 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그 러면서도 가군이 술을 마시고 빈객을 좋아하는 것만큼은 예전과 전혀 다름이 없는데, 선생께서 물론 그곳까지 찾아와 주실 수야 없겠습니다마는, 가군은 선생에 대해서 그리워하는 마음을 잠시도 잊은 적이 없습니다. 만약 선생의 한마디 말씀을 얻어서 마루의 벽 위에다 걸어 놓는다면, 가군이 날마다 선생의 얼굴을 대하는 것처럼 여기면서 늘상 간절하게 생각하는 그 마음을 조금이나마 위로받게 될 것이니, 부디 당호(堂號)를 하나 지어 주시고 아울러 그 뜻을 부연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하기에, 내가 말하기를,

공 은 내가 함께 어울려서 노닐었던 분이다. 그런데 공은 세상을 우습게 보면서 자신의 뜻이 내키는 대로 자유롭게 살았으니, 이런 면에서는 옛날의 고사(高士)라 할지라도 능가할 사람이 없을 것이다. 대개 이런 까닭에 의관(衣冠)의 후예로 태어났으면서도 벼슬길에서 그다지 현달하지 못했으니, 이는 형세로 볼 때 필연적인 일이라고도 하겠다.”

하고는, 그곳의 지세(地勢)와 전망이 어떠한지 그에게 물어보았다.
그곳은 너른 들판 위에 큰물이 흘러가고 있는데, 금오산(金鼇山)이 남쪽에 우뚝 서 있고 직지산(直指山)이 서쪽에 버티고 서 있으며, 동쪽과 북쪽으로는 뭇 산봉우리들이 처마 바깥으로 몸을 낮춰 절을 하고 있는 형국이었다. 그러고는
앞에다 못을 파고서 연꽃을 피우고 버들을 심어 놓음으로써, 자신이 사모하는 환상적인 경계와 자신이 의탁하는 은자의 거처를 상징하였으니, 환상적인 경계는 이른바 서방(西方) 극락정토(極樂淨土) 그것이요, 은자의 거처는 진(晉)나라 처사(陶處士) 숨어 사는 생활이 그것이었다.
그리하여 아래로 강물을 내려다보고 위로 달을 쳐다보노라면 정취와 감흥이 물씬 일어날 것이니, 비록 우리 유자(儒者)라 할지라도 이씨(李氏) 부자간의 이 멋진 풍류를 어떻게 따라갈 수가 있겠는가. 그리고 그 뜻이 비록 이 세상을 버린 채 멀리 서방의 인물을 사모한다 할지라도, 우리의 삼강(三綱)과 오상(五常)을 붙들어 세우고 있는 만큼, 자애롭고 효성스러운 기풍을 불러일으켜 한 고을의 풍속을 아름답게 교화시킬 것을 알 수가 있으니, 송월당(送月堂)의 기문이 또한 없어서는 안 될 것이다.
내가 병든 지 오래되었으므로, 벼슬을 그만두고 장차 함창(咸昌)으로 돌아가 노년을 보내려고 하였으나 아직도 그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만약 하늘이 복을 내려서 나의 소원을 들어 준다면, 필마(匹馬)를 타고 왔다 갔다 하면서 백리(百里)의 산천(山川)과 술 한 통의 풍월(風月)을 가지고 옛날 어울려 노닐었던 그 즐거움을 다시 한 번 펼쳐 볼 것이요, 송월당의 시 한 편을 크게 지어서 공을 위해 노래해 볼 것인데
, 술잔을 멈추고서 물어보노니 섬아(纖阿)께서는 잠깐 수레를 멈춰 주지 않으시겠는가. 소윤(少尹)은 이름이 앙()인데, 나와는 인친(姻親) 관계를 맺고 있기에, 이렇게 기문을 지어 주었다.

경신년(1380, 우왕6) 정월 초하룻날에 짓다.

 

 

[주D-001]마음속으로 …… 하였는데 : 서방 정토(西方淨土)에서 중생을 제도(濟度)한다는 아미타불(阿彌陀佛)의 이름을 부르면서 극락왕생(極樂往生)을 염원했다는 말이다.
[주D-002] 앞에다 …… 그것이었다 :
연 꽃은 불교에서 숭상하는 꽃으로서 정토종(淨土宗)의 극락세계를 연화세계(蓮花世界)라고 일컫고, 버들은 도연명(陶淵明)이 좋아한 나무로서 자기 집 옆에다 다섯 그루를 심어 놓고 오류선생(五柳先生)이라고 자호(自號)했던 고사가 있기 때문에 이렇게 말한 것이다.
[주D-003]술잔을 …… 않으시겠는가 :
더 이상 늙지 않게끔 세월의 흐름을 막아 달라고 달에게 부탁한다는 말이다. 섬아는 달을 몰고 운행하는 여신(女神)의 이름인데, 이백(李白)의 〈파주문월(把酒問月)〉 시에푸른 하늘 저 달은 언제부터 있었을꼬, 나는 지금 술잔을 멈추고 한 번 물어보노라.[靑天有月來幾時 我今停杯一問之]”라는 유명한 구절이 나온다. 《李太白集 卷19

 

 

 

2010-01-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