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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심당기(平心堂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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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 계(曹溪)의 안 상인(安上人)이 황려(黃驪 여주(驪州)의 옛 이름)의 강가로 나를 찾아와서는 평심당(平心堂)의 기문을 지어 달라고 청하면서 말하기를, “나의 스승이신 환암 선사(幻菴禪師)께서 명하신 바이니, 선생께서 이에 대한 뜻을 부연(敷衍)해 주시면 다행이겠습니다.” 하였다.
이에 내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나는 유자(儒者)이다. 따라서 길에서 얻어들은 불가(佛家)의 교설(敎說)을 가지고 감히 입에 올릴 수는 없는 일이니, 우선 내가 배운 것을 가지고 말해 볼까 한다. 천지(天地) 사이에 마음이란 것이 있으니, 이것을 일컬어 ‘하늘의 밝은 명’이라고 한다. 이 마음을 만물 모두가 골고루 품부(稟賦)받고 있지만, 그중에서도 특히 인간의 경우가 가장 신령스럽다고 하겠다. 하지만 인간 역시 앞에서는 기품(氣稟)에 구속받고 뒤에서는 물욕(物欲)에 가리어지고 있으니, 여기에서 삼품(三品)의 설이 일어나게 되었다. 그래서 성인이 이 점을 걱정한 나머지 가르침을 베풀어 인륜(人倫)을 밝히고 사욕(私慾)을 극복하여 예(禮)로 복귀하게 하였으니, 이렇게 해서 상하 사방 모두가 똑같이 방정(方正)하게 되었다고 하겠다. 이것이 우리 유자의 설이다.
스님의 스승은 조사(祖師)의 뜻을 잘 드러내 밝힌 분으로, 내가 사모하는 분인데, 마음의 체(體)와 용(用)에 대해서 분석한 것이 정밀하기만 하였으니, 내가 또 무슨 말을 덧붙일 수가 있겠는가. 28대(代)인 달마 대사(達磨大師)가 처음에 신광(神光)을 얻고 나서 마음을 가지고 마음을 찾게 하여 안심(安心)의 경지를 열어 준 것을 보면, 마음의 전체(全體)와 묘용(妙用)이 빠짐없이 드러났다고 할 것인데, 이것이 전해져 내려와 육조(六祖 혜능(慧能))에 이르러서는 항하사(恒河沙)와 같은 세계에 그 미묘한 법문(法門)이 두루 퍼지게 되었으니, 내가 또 무슨 군더더기 말을 할 수가 있겠는가. 그리고 영산(靈山)에서 꽃을 들고서[拈花] 가섭(迦葉)에게 열반묘심(涅槃妙心)을 부촉(付囑)한 것에 대해서는, 서건(西乾 인도)이나 동진(東震 중국)을 막론하고 대대로 이에 관한 글이 끊이지 않은 가운데 종장(宗匠)들이 또 많이 배출되었으니, 내가 또 어떻게 군더더기 말을 할 수가 있겠는가.
상 인(上人)은 범상한 인물이 아니다. 그리하여 동류(同流)보다 훨씬 뛰어나서 더불어 어깨를 견줄 자가 없기 때문에, 환암(幻菴)의 선불장(選佛場 불교 도량(道場))에서도 계위(階位)에 올랐다는 인가(認可)를 얻게 된 것이라고 하겠다. 상인은 법(法)을 살핌에 있어서도 높고 낮음의 차등을 두지 않고 도(道)에 들어감에 있어서도 이쪽과 저쪽의 차이를 두지 않고 있다. 그래서 그 마음이 담연(湛然)하기가 마치 오래된 우물과 같고, 퇴연(隤然)하기가 마치 대지(大地)와 같은데, 그러다가도 한 번 발동을 하면 마치 신룡(神龍)과 같아서 천하에 비를 내려 촉촉이 적셔 주고 있으니, 그 마음을 어찌 쉽게 이야기할 수가 있겠는가.
우리 유자들은 마음을 공평하게 쓰고 기운을 평이하게 다스리려고 노력하는데, 그렇게 하는 목적은 수신(修身)과 제가(齊家)의 과정을 거쳐서 평천하(平天下)를 이루려는 것이다. 그런데 상인의 뜻을 보면 이 정도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만덕(萬德)을 고루 갖추고 만행(萬行)을 원만히 달성해서 삼계(三界)의 도사(導師)가 되고야 말겠다는 것이라고 하겠다. 그러나 그렇게 하는 것이 멀리 떨어져 있는 일이라고 하겠는가. 결코 멀리 떨어져 있는 일이 아니기 때문에, ‘삼계유심(三界唯心)’이요 ‘만법유식(萬法唯識)’이라는 말이 있게 된 것인데, 그렇다면 마음에 대해서 평(平)이니 불평(不平)이니 하는 것을 붙여서 논의할 수가 있겠는가. 상인은 한 번 생각해 보도록 하라. 아, 내가 다 늙은 몸으로 이렇게까지 군더더기 말을 하게 되었는데, 상인이 마음을 평온하게 하고서[平心] 좌선하며 참구(參究)해 본다면, 내 말을 긍정할 것인가 아니면 부정할 것인가. 아마도 부정하지는 못할 것이다.
[주D-001]삼품(三品)의 설 : 사 람의 성품에 상(上)ㆍ중(中)ㆍ하(下)의 세 등급이 있어서 상품(上品)은 오직 선할 따름이고, 중품은 상하로 이동이 가능하고, 하품은 오직 악할 따름이라는 주장을 말하는데, 당(唐)나라 한유(韓愈)의 〈원성(原性)〉이라는 글에 그 내용이 나온다.
[주D-002]28대(代)인 …… 것 : 불 교 선종(禪宗)의 이른바 ‘안심법문(安心法門)’을 말한다. 달마(達磨)는 서천(西天) 28조(祖)로서 중국에 건너와 중국 선종(禪宗)의 초조(初祖)가 된 보리 달마(菩提達磨)이고, 신광(神光)은 달마를 이어 2조(祖)가 된 혜가(慧可)의 초명(初名)이다. 혜가가 초조인 달마에게 “내 마음이 편안하지 못하니 스승께서 마음을 편안하게 해 주셨으면 합니다.[我心未安 請師安心]” 하자, 달마가 “그 마음을 가지고 와라. 너에게 편안함을 주겠다.[將心來 與汝安]” 하였는데, 혜가가 한참 뒤에 “그 마음을 찾아보았으나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覓心了不可得]” 하니, 달마가 “내가 너에게 이미 안심의 경지를 주었다.[吾與汝安心竟]”고 한 고사가 전한다. 《景德傳燈錄 卷3》
[주D-003]영산(靈山)에서 …… 것 : 석 가(釋迦)가 영산회상(靈山會上)에서 염화시중(拈花示衆)을 했을 적에, 대중 모두가 침묵을 지키고 있었으나 가섭(迦葉) 혼자만이 미소를 짓자, 석가가 “나의 정법안장(正法眼藏), 열반묘심(涅槃妙心), 실상무상(實相無相), 미묘법문(微妙法門), 불립문자(不立文字), 교외별전(敎外別傳)을 마하가섭(摩訶迦葉)에게 부촉(付囑)한다.”고 했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五燈會元 七佛 釋迦牟尼佛》
[주D-004]삼계(三界)의 도사(導師) : 삼계, 즉 불교에서 말하는 욕계(欲界)ㆍ색계(色界)ㆍ무색계(無色界)에서 윤회하는 중생들을 구제하여 이끄는 스승이란 뜻으로, 석가모니처럼 성스러운 불보살(佛菩薩)을 말한다.
[주D-005]삼계유심(三界唯心)이요 만법유식(萬法唯識)이라는 말 : 이 세계 안에서 일어나는 모든 현상은 오직 우리들 마음의 작용 때문이라는 설을 말하는데, 유식론(唯識論)이나 기신론(起信論) 등 유명한 대승 불교의 논서(論書)들이 《화엄경(華嚴經)》에서 대표적으로 드러난 이 사상을 기초로 하고 있다.
부훤당기(負暄堂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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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 악 상인(雪嶽上人)은 나옹(懶翁)의 제자이다. 나옹은 당초 신광사(神光寺)에 석장(錫杖)을 머물고 있다가 원적사(圓寂寺)로 거처를 옮겼으며, 다시 노골(露骨)과 청평(淸平)과 오대(五臺)의 산사(山寺)를 거쳐 송광사(松廣寺)에서 주석(住錫)하였다. 그리고 또 송광사에서 회암사(檜巖寺)로 왔다가 다시 회암사를 떠나 서운(瑞雲)과 길상(吉祥) 등의 여러 산사를 돌아다닌 뒤에 회암사로 복귀하였다. 그런데 상인이 이 모든 곳을 따라다니면서 아침저녁으로 직접 훈도(薰陶)를 받은 결과 자못 터득한 점이 있었다. 상인을 일숙각(一宿覺)과 비교한다면 물론 그 정조(情調)에 차이가 있다고 하겠지만, 날마다 쓰면서도 알지 못하는 자들로서는 감히 바랄 수 있는 바가 아니라고 하겠다.
상 인이 이번에 나를 찾아와서는 자기 거처에 이름을 지어 달라고 간청하였다. 내가 저번에 신륵사(神勒寺)에 갔을 적에 상인이 뭇사람들 속에 섞여 있었는데, 그의 외모를 살펴보니 준수하면서도 고요하였고, 그의 말을 들어 보니 간략하면서도 타당하였으므로, 내가 마음속으로 남다르게 여겼었다. 그래서 그의 요청을 다시 사양하지 못하겠기에, 부훤(負暄)이라는 이름으로 책임을 면해 보려고 생각하면서, 다음과 같이 일러 주었다.
스님의 스승이 설악이라고 스님의 호를 지어 준 것은, 아마도 “일천 산에는 새들의 날갯짓 끊어지고, 일만 길에는 사람의 발자취 사라졌네.[千山鳥飛絶 萬徑人蹤滅]”라 는 시의 기상을 취한 것이라고 여겨진다. 한 점의 티끌도 없이 온몸이 홀로 쑥 드러나서 멀리 구름 밖으로 솟아 있고 보면, 음양(陰陽)과 한서(寒暑)가 얼게 하거나 녹게 할 수 없는 것이 또한 분명하다고 하겠다. 하지만 혈기(血氣)를 지니고 있고 성명(性命)을 보존하고 있는 한 묽은 죽으로라도 배를 채워야 하고 거친 옷으로라도 몸을 가려야 할 것인데, 이는 비록 절학 무위(絶學無爲)의 경지에 올라선 사람이라 할지라도 면할 수 없는 바라고 하겠다.
내 가 생각건대, 설악 상인이 겨울철에 생활하다 보면, 방 안에는 주전자 물도 얼고 화롯불도 꺼져 있을 것이며, 바깥에는 우물물이 얼어붙을 정도로 그지없이 매서운 추위가 몰아닥칠 것이다. 그러다가 아침 해가 높은 산봉우리 위로 솟아 나와 짧은 처마 속으로 들어오면 그 훈훈한 온기가 반갑게 느껴질 법도 하고, 그 햇살을 등지고서 조용히 눈을 감고 있노라면 몸의 기운이 서서히 펴지면서 정신도 스르르 풀리게 될 것이다. 이쯤 되면 서유(犀帷)와 봉탄(鳳炭)을 갖춘 아늑한 규방(閨房)의 아랫목이라 할지라도 이보다 더 좋을 수는 없을 것이니, 집에다 이 편액(扁額)을 내건 것이 헛된 미사(美辭)만 되지는 않을 것이다.
대 저 지극한 도는 형체가 없지만 만물의 존재 양태를 통해서 그 속성을 드러낸다고 하겠다. 그리고 만물과 인간은 또 별개의 것이 아니니, 눈이 내리면 춥게 느끼고 해가 비치면 따뜻하게 느끼며, 따뜻해지면 기운이 펴지고 추워지면 기운이 움츠러드는 이런 것은, 우리 인간의 몸뿐만이 아니라 천지(天地)에 두루 통하는 도리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그 사이에서 지극한 도리가 작용하는 곳이 바로 마음이라고 할 것인데, 이 마음이란 것이 워낙 미세해서 방촌(方寸)이라고 말하기도 하지만, 지극한 도가 깃들어 있는 곳인 만큼 춥거나 덥다고 해서 조금도 변하는 일이 없으니, 그 당당한 전체(全體)야말로 하늘을 덮고 땅을 덮는 것이라고 할 것이다. 상인이 좌선(坐禪)하면서 찾아보아야 할 것이 바로 여기에 있다고 해야 하지 않겠는가. 나의 번뇌가 너무도 뜨겁게 달아오르고 있는데, 우리 스님을 만나서 한 잔의 차를 마시며 열기를 식힐 수 있는 날이 언제쯤이나 가능할지 모르겠다.
[주D-001]일숙각(一宿覺) : 당 (唐)나라의 영가(永嘉) 현각 선사(玄覺禪師)가 육조(六祖) 혜능(慧能)을 찾아가서 문답을 나누며 서로 계합(契合)하고는 곧바로 떠나가려 하자 육조가 만류하여 하룻밤을 자고 가도록 하였으므로, 일숙각이라고 일컬었다는 고사가 전한다. 《景德傳燈錄卷5 溫州永嘉玄覺禪師》
[주D-002]날마다 …… 자들 : 일반 백성들을 말한다. 《주역(周易)》 계사전 상(繫辭傳上)에 “인자(仁者)는 도를 보고서 인(仁)이라 하고, 지자(知者)는 도를 보고서 지(知)라 하는데, 백성들은 날마다 쓰면서도 알지 못한다.[百姓日用而不知]”는 말이 나온다.
[주D-003]일천 산에는 …… 사라졌네 : 당 (唐)나라 유종원(柳宗元)의 〈강설(江雪)〉이라는 오언 절구에 나오는 내용인데, 참고로 뒤의 구절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도롱이에 삿갓 쓴 노인 외로이 배를 타고, 눈 덮인 추운 강 속에서 홀로 낚시질하누나.[孤舟簑笠翁 獨釣寒江雪]”
[주D-004]절학 무위(絶學無爲)의 …… 사람 : 더 이상 배울 것이 없이 불교 구극(究極)의 경지를 터득한 도인(道人)이라는 말이다. 당나라 선승(禪僧) 영가(永嘉) 현각(玄覺)이 지은 〈증도가(證道歌)〉 첫머리에 “그대는 보지 못했는가. 배움도 끊어지고 아무 할 일도 없이 한가한 도인은, 굳이 망상을 없애려 하지도 않고 참된 진리를 찾으려 하지도 않는다는 것을. 이름 없는 실제 성품이 바로 불성이요, 허깨비 같은 허망한 몸이 바로 법신인 것을.[君不見 絶學無爲閑道人不除妄想不求眞 無名實性卽佛性 幻化空身卽法身]”이라는 말이 나온다.
[주D-005]서유(犀帷) : 추 위를 몰아내는 장막이라는 뜻이다. 당나라 개원(開元) 2년에 교지국(交趾國)에서 물소 뿔[犀角]을 바쳤는데, 이것을 궁전 안에다 놓아두자 한기(寒氣)가 물러가고 온기(溫氣)가 퍼지기 시작했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開元天寶遺事 辟寒犀》
[주D-006]봉탄(鳳炭) : 봉황의 모습을 빚어서 만들어 놓은 사치스런 석탄이라는 뜻이다. 당나라 양국충(楊國忠)의 집에서 석탄 가루를 꿀로 반죽하여 쌍봉(雙鳳)의 형태로 빚어 놓고는 겨울철에 난로에다 집어 넣었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開元天寶遺事 鳳炭》
각암기(覺菴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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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 려 지선(志先)이 자기 거처에다 각암(覺菴)이라는 편액을 내걸고는 목은자(牧隱子)를 찾아와서 기문을 청하였다. 이에 내가 승낙하기는 하였으나 오래도록 지어 주지 못하였는데, 이는 내가 글을 아끼려고 해서가 아니라 겨를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그의 요청이 또 간절하였고 보면, 내가 대략적으로나마 말해 주지 않을 수가 없게 되었다.
《맹자(孟子)》에 ‘하늘이 낸 백성 가운데 먼저 깨달은 사람’이 라는 말이 나오는데, 이것은 이윤(伊尹)의 말을 기술한 것이다. 그런데 이윤의 뜻을 자기의 뜻으로 삼는 자라면야 이 말을 가지고서 자신의 뜻을 드러내는 것이 마땅하다고 하겠지만, 지금 지선은 승려의 신분인데 어찌 이런 뜻을 취하기야 했겠는가.
이 윤이 활동했던 은(殷)나라 이전은 하(夏)나라요 은나라 이후는 주(周)나라인데, 주나라가 쇠해지면서 석씨(釋氏)의 가르침이 처음으로 나오게 되었다. 그런데 이윤의 뜻을 살펴보건대, 평민 중에서 요순(堯舜)의 혜택을 입지 못하는 자가 있으면 마치 자기가 그들을 구렁 속으로 밀어 넣는 것처럼 여겼으니, 그가 천하의 일을 가지고 자임(自任)한 것이 지극했다고 하겠다.
이렇게 해서 이윤의 풍도(風度)가 일단 중국 전역에 퍼지고 나서는 멀리 서역(西域)에까지 그 영향이 미치게 되었는데, 이때 석씨가 홀로 그 풍도를 이어받아 더욱더 그 범위를 확대하기에 이르렀다. 그리하여 삼계(三界 욕계(欲界)ㆍ색계(色界)ㆍ무색계(無色界))를 말하고 삼세(三世 전생(前生)ㆍ금생(今生)ㆍ내생(來生))를 말하면서 “꿈틀거리는 뭇 생명들은 모두가 나의 분신(分身)이니, 물에 빠진 자를 구해 주고 배고픈 자를 먹여 주리라.” 하였다. 그러고는 쉴 새 없이 입을 놀리고 부지런히 육신을 수고롭히면서도 정작 자기 몸은 조금도 돌보지 않았으니, 이렇게 본다면 석씨 또한 이윤과 그 뜻이 같았다고 할 수 있겠다.
다만 관면(冠冕)을 찢어서 훼손시키는가 하면 부자(父子) 사이의 인연을 끊고서 금수(禽獸)와 한 무리가 된 것은 이윤과 다른 점인데, 우리 유자(儒者)가 그 때문에 더러 배척을 가하게 된 것 역시 지나친 일은 아니라고 할 것이다. 그러나 지금 세상의 예교(禮敎)가 옛날과 같지 않아 인륜이 무너진 나머지 석씨에게 비웃음을 당하는 일이 또 적지 않게 되었고 보면, 석씨가 비록 자신의 몸 하나만 선하게 유지하려는 것과 가깝다고는 하더라도 그 정도의 풍도만 가지고서도 쇠퇴한 세상의 기풍을 오히려 격려할 수가 있겠기에, 내가 어쩔 수 없이 인정하면서 이따금씩 그들과 왕래하게 된 것이었다. 그런데 더구나 석씨가 군상(君上)에게 축복을 기원하고 있는 그 뜻이 가상한데야 더 말해 무엇하겠는가.
지 금 지선(志先)으로 말하면 또 그들 무리 가운데에서 특히 그러한 뜻을 지닌 자라고 하겠다. 그렇기 때문에 멀고 가까운 곳을 막론하고 분주히 돌아다니면서 구속받지도 않고 남과 계교(計較)도 하지 않은 채 오직 만물에 은혜를 베풀어 줄 일만을 급선무로 삼고 있으니, 이른바 ‘쇠 중에서도 쩡쩡 울리는 경우[鐵中錚錚]’라고 하겠다. 비록 그렇긴 하지만, 어떤 사람을 비유할 때에는 반드시 그 사람에게 걸맞은 예를 찾아야 한다는 점에 비추어 본다면, 내가 죄를 피할 길이 없게 되었다는 것도 물론 알고 있다. 그러나 귀를 늘어뜨리고 꼬리를 흔들어 대는 것과는 차이가 있으니, 그렇다면 나의 죄도 말감(末減)되어야 마땅할 것이다. 그런데 불가(佛家)의 말을 들어 보면 부처가 곧 각자(覺者)라고 하나, 이에 대해서는 내가 아직도 자세히 알 수가 없다.
[주D-001]하늘이 …… 사람 : 이 윤(伊尹)이 은(殷)나라 탕왕(湯王)의 부름을 받고 나아갈 적에 자신의 포부를 토로하면서 “나는 하늘이 낸 백성 가운데 먼저 깨달은 사람이다.[予天民之先覺者] 따라서 내가 이 도를 가지고 이 백성들을 깨우쳐야 할 것이니, 내가 깨우치지 않는다면 그 누가 하겠는가.”라고 말한 대목이 《맹자》 만장 상(萬章上)에 나온다.
[주D-002]자신의 …… 하더라도 : 《맹자》 진심 상(盡心上)에 “곤궁해지면 자기의 몸 하나만이라도 선하게 하고, 뜻을 펴게 되면 온 천하 사람들과 그 선을 함께 나눈다.[窮則獨善其身 達則兼善天下]”는 말이 나온다.
[주D-003]쇠 중에서도 …… 경우 : 같은 무리 중에서 재능이 비교적 뛰어난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다.
[주D-004]어떤 사람을 …… 알고 있다 : 승 려인 지선(志先)의 각암기를 써 주면서 목은 자신이 외람되게 성현인 이윤(伊尹)의 고사에다 그를 비유했다는 말이다. 《문심조룡(文心雕龍)》 지하(指瑕)에 “군자가 어떤 사람을 비유할 때에는 그 사람에게 걸맞은 예를 찾아야만 하는데, 최원은 이공의 뇌문을 쓰면서 그의 행동을 그만 황우에게 비유했고, 상수는 혜생의 부를 지으면서 그 죄를 그만 이사에게 비유하고 말았다.[君子擬人必於其倫而崔瑗之誄李公 比行於黃虞 向秀之賦嵆生 方罪於李斯]”는 구절이 나온다.
[주D-005]귀를 …… 것 : 아 무런 이유도 없이 상대방에게 듣기 좋은 말만 해 주는 것을 말한다. 한유(韓愈)의 〈응과목시여인서(應科目時與人書)〉에 “강아지처럼 머리를 굽히고 귀를 늘어뜨린 채 꼬리를 흔들며 동정을 구하는 것은 나의 뜻이 아니다.[若俛首帖耳 搖尾而乞憐者 非吾之志也]”라는 말이 나온다.
설산기(雪山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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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산(雪山)은 서역(西域)에 있는 산이다. 나 역시 그 이름만을 들었을 뿐이요 그 진면목이 어떠한지는 확인할 길이 없다. 그런데 우선(牛禪)이라는 승려가 설산을 취하여 자기의 호로 삼았으니, 이는 나의 말을 따른 것이었다.
소 중에서는 설산에 있는 것이 가장 살지고 윤이 나는 데다가 또 말할 수 없이 깨끗하기 때문에, 그 똥까지도 계단(戒壇)의 용도에 쓰인다고 한다. 내가 일찍이 불서(佛書)에서 그런 이야기를 얻어들었기 때문에 감히 그에게 그 말을 일러 주었는데, 상인(上人)도 평소 그 고사를 알고 있었으므로 기꺼이 그 말을 취해서 호로 삼은 것이었다. 사정이 그렇고 보면 지금 그가 기문을 써 달라고 요청하는 것을 나로서는 사양하기가 어렵게 되었다고 하겠다.
《논어(論語)》에 “그림 그리는 일은 흰 비단이 있은 뒤에야 가능하다.[繪事後素]”는 말이 나온다. 여기에서 흰 비단은 문채가 없는 바탕으로서 다섯 가지 채색(彩色)을 모두 받아들이는 만큼, 우리의 성(性)에 비유될 수 있는 것이라고 하겠다. 성(性)이란 동요되는 바가 없이 담연(湛然)하고 잡스러운 것이 없이 순일(純一)하여 오상(五常 인ㆍ의ㆍ예ㆍ지ㆍ신)의 전체(全體)가 되는 것이니, 이 성을 우리가 마땅히 길러야 한다는 점에 있어서는 유가(儒家)나 불가(佛家) 모두 조금도 다를 바가 없다고 하겠다.
따라서 우선(牛禪)의 입장에서 말한다면, 계 (戒)를 가지고 물욕(物欲)을 끊음으로써 혹시라도 그 흰 바탕이 오염되지 않도록 해야 할 것이요, 정(定)을 가지고 물욕을 예방함으로써 혹시라도 그 맑은 바탕이 흔들리지 않게 해야 할 것이며, 혜(慧)를 가지고 물욕을 변화시킴으로써 순일한 본바탕으로 돌아오도록 해야 할 것이다.그렇게 되면 그 깨끗한 것이 소에게 있지 않고 우리 속에 있게 될 것이니, 내가 스님을 대하면 설산이 스님의 속에 있는 것과 같아서 설산이 멀리 있지 않게 될 것이요, 스님 역시 설산으로 자신을 드러내게 되면 설산과 스님이 또한 둘이 아니게 될 것이다.
계(戒)를 통해서 정(定)으로 들어가고 정을 통해서 혜(慧)를 발휘하게 되면, 성(性)의 전체(全體)와 대용(大用)이 백정(白淨)으로 순일하게 되어 부처와 다름없이 될 것인데, 이 사실을 어찌 그래도 의심할 수가 있겠는가. 아, 그렇게 되면 설산의 진면목을 또한 스님을 통해서 볼 수 있게 될 것이다.
[주D-001]그 똥까지도 …… 한다 : 설산(雪山)에 사는 대력(大力)의 백우(白牛)는 그 산속의 살지고 윤이 나는 향초만을 먹고 또 설산의 맑은 물만 마셔서, 그 똥이 미세하기 때문에 전단향(栴檀香)과 섞어서 쓸 수가 있다는 말이 《능엄경(楞嚴經)》에 나온다.
[주D-002]그림 …… 가능하다 : 《논어》 팔일(八佾)에 나오는데, 이에 대해서는 상반된 주석이 있으나 목은은 집주(集註)의 해설을 따르고 있다.
[주D-003]계(戒)를 …… 것이다 : 승려가 닦아야 할 이른바 계(戒)ㆍ정(定)ㆍ혜(慧) 삼학(三學)의 공부를 말하는데, 계는 계율(戒律), 정은 선정(禪定), 혜는 이를 통해서 발휘되는 지혜(智慧)를 뜻한다.
[주D-004]백정(白淨) : 백 정무구식(白淨無垢識)의 준말로, 아마라식(阿摩羅識) 혹은 청정식(淸淨識)이라고도 부르는 가장 마지막 단계의 제9식(識)을 말한다. 이 식은 일체중생이 원래 지니고 있는 청정한 본원(本源)의 심지(心地)로서, 부처가 증득한 법신(法身)과 전혀 다를 바가 없기 때문에, 생멸(生滅)과 증감(增減) 등의 현상을 초월하여 태허(太虛)처럼 담약(湛若)하다고 한다. 《楞伽經卷9》
오대산(五臺山) 상원사(上院寺)의 승당(僧堂)에 관한 기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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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 려 영로암(英露菴)은 나옹(懶翁)의 제자이다. 오대산에서 노닐면서 상원사에 들어갔다가 승당의 터만 있고 건물은 없는 것을 보고는 탄식하여 말하기를, “오대산은 천하의 명산이요, 상원사는 또 큰 사찰이다. 그리고 승당으로 말하면 불도(佛道)를 성취하는 곳으로서 시방(十方)의 운수(雲水 행각승(行脚僧))들이 모여드는 장소인데, 어찌 없어서야 되겠는가.” 하고는, 열심히 뛰어다니며 시주(施主)를 구하였다. 그러자 판서(判書) 최백청(崔伯淸)의 부인인 안산군부인(安山郡夫人) 김씨(金氏)가 이 말을 듣고는 기뻐한 나머지 최 판서와 상의하여 금전을 희사하였는데, 부인 자신이 시주한 것이 대다수를 차지하였다. 그리하여 병진년 가을에 공사를 시작하여 정사년 겨울에 완공을 보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그해 겨울에 승려 33명을 불러들여 10년을 기한으로 좌선(坐禪)을 시작하였는데, 5년째 되는 신유년이 바로 그 절반에 해당되었으므로 법회(法會)를 성대하게 열고서 치성을 드리게 되었다. 그런데 그해 11월 24일에 달이 이미 들어갔는데도 승당이 아무 까닭 없이 저절로 환하게 밝아졌다. 이에 대중(大衆)이 이 신비한 현상을 괴이하게 여기고는 그렇게 된 까닭을 찾아보았더니, 그 광명(光明)은 바로 성승(聖僧 나옹(懶翁))의 앞에 놓여 있는 촛불에서 나온 것이었으므로 대중이 모두 경악하였다. 그리하여 이제는 그 불꽃을 산중의 여러 암자에서 서로 이어 오면서 오늘날에 이르렀는데, 세상에서는 이를 두고 김씨의 지극한 정성으로 말미암은 것이라고 이야기들을 하고 있다.
김씨가 그런 현상을 직접 눈으로 보고 나서는 더욱 감격하여 믿는 마음이 한층 더 돈독해지면서 불교를 더더욱 숭상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노비(奴婢)와 전토(田土)를 또 희사하여 사찰의 운영에 보탬이 되게 하였는데, 후세 사람들이 혹 이런 사실을 알지 못하게 될까 염려하여 나에게 기문을 써 달라고 요청해 왔다. 이에 나 역시 이런 사실에 경탄을 금치 못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어떻 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단 말인가. 나는 그런 일이 있었다는 말을 예전에 듣지 못하였다. 대저 등(燈)이나 초[燭]에 모두 심지가 있고 기름과 밀랍이 있긴 하지만, 반드시 거기에 불을 붙인 뒤에야 광명을 발하게 마련이다. 그런데 지금 불을 붙이지 않았는데도 저절로 밝아졌으니, 부처의 신령스러운 힘이 아니면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겠는가. 그리고 부처가 아무리 신령스럽다 하더라도, 부처가 자기의 위령(威靈)을 빛낼 또 다른 인연이 없었고 보면 김씨의 이름이 전해지는 것도 당연하다 할 것이니, 승당의 기문을 또한 짓지 않을 수 없다고 하겠다.
보법사기(報法寺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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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 성(王城)의 남쪽 백마산(白馬山)의 북쪽에 큰 사찰이 있었다. 이 사찰은 태조(太祖)의 비(妃)인 유씨(柳氏)가 집을 희사해서 세운 것인데, 그때 시주한 전토(田土)와 농민(農民)이 지금까지도 그대로 내려오고 있다. 그런데 중도에 폐허로 변한 지가 오래되었으므로, 시중(侍中)인 칠원부원군(漆原府院君) 윤공(尹公 윤환(尹桓))이 선원(禪源) 법온 화상(法蘊和尙)과 중건(重建)할 것을 함께 맹세하고 지정(至正) 계미년(1343, 충혜왕4)에 공사를 시작하였다.
그러다가 장차 공사를 마칠 즈음에 또 상의하여 말하기를 “대장경(大藏經)이 없어서는 안 되겠다.” 하고는, 이에 중국의 강절(江浙)에서 대장경을 구해 왔으니 이때가 무자년(1348, 충목왕4)이요, 거주하고 있던 서당(西堂)을 철거하고서 대장경을 비호하게 하였으니 이때가 임진년(1352, 공민왕1)이었다. 이렇게 해서 전각(殿閣)이 일단 갖추어지자 범패(梵唄)에 쓰이는 도구라든가 일상생활에 필요한 물품 등을 하나도 빠짐없이 마련해 놓고는 계사년(1353, 공민왕2)에 낙성 초회(落成初會)를 열었으며, 신축년(1361, 공민왕10)에 다시 낙성 중회(落成中會)를 개최하였다.
그러나 그해 겨울에 사적(沙賊 사유(沙劉) 등이 이끈 홍건적(紅巾賊))의 유린을 당한 나머지 전각과 기명(器皿)을 비롯해서 불서(佛書)와 불상(佛像) 등이 거의 남아 있지 않게 되었다. 그리하여 국가가 경성(京城)을 수복한 뒤에 약간이나마 다시 수선하고 나서 조계(曹溪)의 선사(禪師)인 행재(行齋)를 초빙하여 사찰의 주지를 맡게 하였으니, 이때가 갑진년(1364, 공민왕13)이었다. 을사년(1365, 공민왕14)에 부인 유씨(柳氏)가 죽자 윤공이 한편으로는 슬퍼하고 한편으로는 느끼는 바가 있어 공사를 더욱 급히 독촉한 결과 그 이듬해에 완공을 보게 되었다.
그러고는 정미년(1367, 공민왕16)에 다시 강절에서 대장경을 구해 왔으며, 그 이듬해에는 일상생활에 필요한 기명을 또 완전히 갖추게 되었다. 그러자 윤공이 “이것은 우리 사찰이 재차 이 세상에 태어난 것이다.” 하고는 이에 낙성 초회를 개최하였으며, 다시 경술년(1370, 공민왕19)에 낙성 중회를 열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정사년(1377, 우왕3)에 조계의 선사인 행비(行備)를 초빙하여 사찰의 주지를 맡게 하였으며, 무오년(1378, 우왕4) -원문 빠짐- 에는 1만 일 동안의 미타회(彌陀會)를 처음으로 열기 시작하였다.
이 사찰은 모두 -원문 빠짐- 칸의 건물로 되어 있는데, 사치스럽지도 않고 누추하지도 않은 가운데 보는 이들로 하여금 외경심을 일으키게 하였다. 부인은 3월 5일에 죽었고 공은 8월 4일에 태어났으므로, 한 해에 두 번씩 전장(轉藏)하는 법회(法會)를 열 때마다 그날을 택하고 있다. 그런데 공의 생각으로는 공이 죽고 나면 생일 대신에 자기가 죽은 날로 대체하려 하고 있으니, 아, 그 생각이 또한 원대하다고 하겠다.
공 은 이 사찰에 포목(布木) 1000필(疋)을 보시하면서 본전은 그대로 놔두고 이자만 받아서 쓰도록 하였다. 또 전토도 보시하였는데, 부평부(富平府)와 김포현(金浦縣)과 수안현(守安縣)과 동성현(童城縣)에 있는 것은 공이 선조로부터 물려받은 것이었으며, 그 밖에 김포와 동성의 전토가 또 있었으니 이것은 부인이 선조로부터 물려받은 것이었다. 그리하여 한 해의 비용이 모두 거기에서 나오게 하여 단월(檀越 불교 신도)의 집에 구걸하는 일이 한 번도 없게 하였으니, 공이 그야말로 계책을 제대로 세워 주었다고 말할 만하다. 세상에는 땀을 뻘뻘 흘리면서 남의 문간에 기대어 서 있는 자들이 많은데, 어찌 그들의 마음이 부끄러움을 느끼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제 미타회가 시작된 지도 벌써 6년의 세월이 흘렀다. 그런데 공이 계속 건강하게끔 하늘이 어쩌면 도와줄 법도 하니, 공이 앞으로 1만 일의 태반(太半)에 이르도록 수명을 누릴 것 또한 분명한 사실이라고 하겠다. 그리고 불경(佛經)을 높이 떠받들다 보면 삼승(三乘)의 교해(敎海)가 방촌(方寸 마음) 안에 스며들게 될 것이요, 아미타불(阿彌陀佛)의 명호(名號)를 부르다 보면 구품(九品)의 낙국(樂國)이 지척의 사이에 있게 될 것이니, 예전의 허물을 벗어 버리고 새로운 복을 더 받으면서 만물에 은택을 끼치게 될 것을 또 의심할 것이 뭐가 있다고 하겠는가. 다만 알지 못할 것은, 공의 뒤를 이어 이 사찰의 공덕주(功德主)가 될 사람들이 과연 공과 같은 마음을 지니고서 수백 세(世)에 걸치도록 그 뜻을 변하지 않을 것인가 하는 점이다. 아, 공이 나에게 기문을 요청한 뜻도 바로 여기에 있다고 할 것이다.
공은 재상으로 현릉(玄陵)을 보좌하면서 그 누구보다도 덕망이 높았으므로, 지금까지도 조야(朝野)에서 마치 태산(太山)처럼 공을 의지하고 있는 터이다. 그리고 임금에게 보답하기 위하여 복을 내려 달라고 부처에게 축원하면서, 나와 남들 모두가 이롭게 되도록 하려는 그 마음 씀씀이가 또한 시간이 가면 갈수록 조금도 흐트러지지 않고 있으니, 어찌 크게 뒷사람들의 모범이 되지 않겠는가. 좌사(左使) 염중창(廉仲昌 염흥방(廉興邦)) 씨가 공의 부탁을 받고 나에게 기문을 청하면서 “사씨(史氏 사관(史官))가 마땅히 써야 할 일이다.”고 하기에 내가 사양하지 못하고 이렇게 적게 되었다.
[주D-001]전장(轉藏) : 대 장경을 전독(轉讀)한다는 뜻이다. 전독은 1부(部)의 경(經)을 처음부터 끝까지 다 읽는 진독(眞讀)과 상대되는 말로, 불경이 너무 방대한 점을 감안해서 법회(法會) 때에 불경의 처음과 중간과 마지막 몇 줄 정도를 읽고서 끝내는 것을 말한다.
[주D-002]삼승(三乘)의 교해(敎海) : 바 다와 같이 넓은 불교의 가르침이라는 말이다. 삼승은 불교 용어로, 초근인(初根人)을 위해 사제법(四諦法)을 행하게 하는 소승(小乘) 즉 성문승(聲聞乘)과, 중근인(中根人)을 위해 12인연(因緣)을 깨닫게 하는 중승(中乘) 즉 연각승(緣覺乘)과, 상근인(上根人)을 위해 6바라밀(波羅蜜)을 닦게 하는 대승 즉 보살승(菩薩乘)을 말하는데, 보통 불법(佛法)을 비유하는 말로 사용된다.
[주D-003]구품(九品)의 낙국(樂國) : 아미타불(阿彌陀佛)의 서방 정토(西方淨土)를 말한다. 그곳은 상ㆍ중ㆍ하에 다시 상ㆍ중ㆍ하로 나뉘어지는 아홉 단계의 등급이 있는데, 세상을 떠나 극락왕생할 적에 각자 행한 업보에 따라 거기에 맞는 등급의 낙을 얻게 된다고 한다.
고암기(古巖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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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 해년에 조계(曹溪)의 대선(大選)에 뽑힌 천긍(天亘)은 나의 동년(同年)인 최 병부(崔兵部)의 아우이다. 병부에게 아우가 있다는 말은 오래전에 들었지만, 그가 승려가 되었다는 사실은 모르고 있었다. 그런데 우연히 광암사(光巖寺)에서 만나서 그의 얼굴을 보았더니 병부와 똑같았으므로, 나의 마음이 더욱 슬퍼지기만 하였다. 병부에게 자식이 하나도 없는 터에 아우마저 또 이렇게 되다니, 이것이 어찌 된 일이란 말인가. 그런데 하루는 그가 나를 찾아와서 말하기를, “저의 호(號)는 고암(古巖)입니다. 이것은 귀곡(龜谷)께서 지어 주신 것인데, 그 이유는 제가 좋아하는 것이 옛것이고 제가 사는 곳이 산중이기 때문입니다. 옛것을 좋아하다 보니 지 금의 시대와 맞지 않게 되고 산중에 살다 보니 평지와 멀어지게 되었습니다만, 저의 입장에서는 이제 막 배움의 길에 들어선 만큼, 시대를 거슬러 올라가 옛사람들과 벗하면서 가급적 평지의 세속을 피하려고 하는 것일 뿐이지 지금 승려로서 아제(揭諦)를 부르려고 하는 것은 아니라고 하겠습니다. 그러니 저 자신의 뜻을 드러낼 수 있도록 선생께서 한마디 말씀을 해 주셨으면 합니다.” 하였다.
이에 내가 다음과 같이 말해 주었다.
동 년의 아우는 바로 나의 아우라고 할 것이니, 내가 어찌 나의 말을 아낄 수가 있겠는가. 그리고 상인(上人)이 일단 스님의 형을 저버리고서 이단(異端)으로 들어갔다고는 하더라도, 형의 벗을 공경할 줄 알고 있는 데다가 또 글을 구하면서 우리 유가(儒家)를 사모할 줄을 알고 있으니, 내가 어찌 나의 말을 아낄 수가 있겠는가. 하지만 상인의 학문은 나의 학문이 아니요 나의 학문은 상인의 학문이 아니니, 자칫하면 길에서 듣고 길에서 흘려버리는 것과 비슷하게 되지 않겠는가.
옛날로 거슬러 올라간다 하더라도 반고씨(盤古氏)는 너무나 머니, 여기에서는 생략하기로 하겠다. 그 뒤에 대우씨(大禹氏) 때에 이르러서 그가 높은 산과 큰물을 안정시킨 결과 사람들이 평지를 얻어서 살게 되었는데, 그 대신 험준한 산과 깊숙한 골짜기 등 사람의 발자취가 드물게 이르는 곳은 모두 범과 이리와 원숭이와 새들의 소굴이 되었다. 하지만 그런 가운데에서도 산과 못이 각각 위아래에서 서로 기운을 통하면서[山澤通氣] 때때로 구름을 일으켜 비를 내려 준 덕분에 평지에서 전야(田野)에 물을 댈 수가 있었다. 그리하여 황제(黃帝)가 정전법(井田法)을 시행한 뒤로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백성이 받은 이로움이 컸으니, 배불리 먹고 편안하게 거처하면서 그렇게 된 유래를 알지 못한다면 망녕된 사람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내가 후생(後生)들을 만나면 늘상 이런 이야기를 해 주곤 하는데, 그들이 내 말을 과연 수긍할는지 안 할는지는 또 모를 일이다.
하지만 우리 천긍 상인만은 내 말을 인정할 것처럼 여겨지기도 하는데, 그것은 자신이 거처하는 집의 이름만 보더라도 어디까지나 실제에 주안점을 두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상인은 스스로 그렇게 이름을 짓게 된 뜻을 추구하여, 삼도(三塗 지옥(地獄)ㆍ축생(畜生)ㆍ아귀(餓鬼))의 중생들에게 은혜를 흡족하게 끼쳐 주고 삼제(三際 전생(前生)ㆍ금생(今生)ㆍ내생(來生))에 걸쳐 두루 도가 행해질 수 있도록 해야겠다는 마음을 지녀야 할 것이다. 그리하여 모두 포용해서 고금(古今)의 구분이 없게 하고 평등한 마음으로 고하(高下)의 차이가 없게 하여, 기필코 각성(覺性)이 시방세계(十方世界)를 원만하게 하고 주변 법계(周遍法界)를 청정하게 하도록 정진해야만 할 것이다. 그렇게 되면 옛날이니 지금이니 하는 것이라든가 산중이니 평지이니 하는 것들 모두가 내 속에 있는 마음의 전체(全體)와 묘용(妙用)이 되고 말 것이다. 따라서 면벽(面壁)을 하고 그 마음을 참구해 보노라면 시방(十方)의 허공이 또한 모조리 무너져 소멸될 것인데, 거기에 어찌 수궁(竪窮)과 횡긍(橫亘)에 따른 차이가 있을 수 있겠는가.
상 인이 이미 삭발을 하여 형체를 훼손하긴 하였지만, 그래도 고암(古巖)이라는 이름에서 보듯 자신의 본심을 숨기지 못했고 보면, 세교(世敎 예교(禮敎))에 대해서 도외시하며 관심이 없는 것 같지는 않다고 여겨졌다. 그래서 내가 황제(黃帝)와 대우(大禹)의 일을 인용하여 이야기할 하나의 단서를 꺼내고 나서 불가(佛家)의 말을 가지고 마무리하였으니, 상인이 이 중에서 스스로 하나를 선택해 가지기 바란다. 그러나 상인이 지금 거처하는 곳은 누구의 힘에 의한 것이며, 상인이 지금 먹는 것은 누구의 덕분이라 하겠는가. 상인은 바로 동년의 아우인데, 내가 어찌 감히 나의 본심을 이야기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주D-001]귀곡(龜谷) : 선승(禪僧)인 귀곡 각운(覺雲)을 가리키는데, 목은이 환암(幻菴) 혼수(混修)와 함께 그 선(禪)의 경지를 가장 높이 평가하면서 친하게 교류했던 인물이다.
[주D-002]지금 …… 하겠습니다 : 현 세(現世)를 혐오한 나머지 고통이 없는 피안(彼岸)으로 넘어가기 위해 애쓰지는 않는다는 말이다. 아제(揭諦)는 범어(梵語) gate의 음역(音譯)으로, 《반야심경(般若心經)》 맨 마지막에 “아제 아제 바라아제(揭諦揭諦波羅揭諦)”라는 말이 나오는데, 이를 풀이하면 “가세, 가세, 저 피안으로 건너가세.”라는 뜻이 된다.
[주D-003]자칫하면 …… 않겠는가 : 아 무리 좋은 말을 해 주어도 상대방이 진지하게 듣지 않으면 아무 의미도 없게 될 것이라는 말이다. 《논어》 양화(陽貨)에 “길에서 듣고서 곧장 길에서 말해 버린다면, 이는 곧 덕을 버리는 것이다.[道聽而塗說 德之棄也]”라는 공자의 말이 나온다.
[주D-004]반고씨(盤古氏) : 천지가 개벽될 당시에 맨 먼저 나와서 세상을 다스렸다는 중국 신화 속의 인물이다.
[주D-005]산과 …… 통하면서 : 《주역》 설괘전(說卦傳)에 나오는 말이다.
[주D-006]황제(黃帝) …… 뒤로부터 : 《사물기원(事物紀原)》 이원조도부(利源調度部) 정전(井田) 조에, “정전법(井田法)은 황제(黃帝)로부터 시작되어 대우(大禹)에서 완성되었으며, 주(周)나라 때에 두루 시행되었다가 진(秦)나라 때에 무너졌다.”는 기록이 나온다.
[주D-007]거기에 …… 있겠는가 : 우 리의 마음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항상 변치 않고 여일(如一)하다는 말이다. 수궁(竪窮)과 횡긍(橫亘)은 세로로 다하고 가로로 뻗쳐 있다는 말로, 각각 시간과 공간을 뜻하는데, 그의 법호가 천긍(天亘)이라는 점을 감안하여 한유(韓愈)의 〈백이송(伯夷頌)〉에 나오는 “천지가 다하고 만세에 뻗치도록[窮天地 亘萬世]”이라는 말을 변용한 것이다.
고암기(杲菴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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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 상인(昇上人)이 현릉(玄陵)의 지우(知遇)를 받아 광암사(光巖寺)의 주지로 머문 기간이 10년이나 되었는데, 일찍이 현릉으로부터 ‘일승고암(日昇杲菴)’이라는 친필(親筆)을 하사받기도 하였다. 그동안 여러 차례나 그만두고 떠나겠다고 청하였지만, 현릉의 재세(在世) 중에는 끝내 뜻대로 허락을 받지 못하였다. 그러다가 금상(今上 우왕)이 즉위하고 나서 모두 세 차례에 걸쳐 사퇴를 청하였으나 또 허락을 받지 못하자, 마침내 몸을 빼어 돌아갔다.
그 뒤에 상당(上黨 청주(淸州)의 옛 이름)의 한 선생(韓先生 한수(韓脩))이 상인을 신륵사(神勒寺)에서 만나자, 상인이 선생을 통해서 고암(杲菴)에 대한 기문을 지어 달라고 한산자(韓山子)에게 부탁해 왔다. 그런데 한산자가 장차 붓을 들려고 할 즈음에 마침 성산(星山 성주(星州)의 옛 이름)의 이자안(李子安 이숭인(李崇仁)) 씨가 찾아왔기에, 한산자가 너무도 기쁜 나머지 그에게 붓을 건네 주면서 “그대가 나를 대신해서 이야기해 줄 수 있겠는가.” 하였더니, 자안 씨가 말하기를,
“그것 은 어렵지 않은 일입니다. 고(杲)라는 글자를 보면 해[日]와 나무[木]로 되어 있으니, 해가 나무 위에 있다는 말입니다. 나와 상인이 살고 있는 곳이 동해의 언덕이고 보면 그곳이야말로 해가 뜨는 곳이라고 하겠는데, 해가 뜨는 것을 보면 함지(咸池 해가 진다는 큰 못)에서 목욕하고는 부상(扶桑 해 뜨는 동해 속의 신목(神木))의 나뭇가지를 떨치고서 솟구쳐 올라오니, 이것이 바로 해 뜰 고(杲) 자가 해와 나무로 된 이유라고 하겠습니다.
제가 일찍이 남쪽으로 내려가 계림(鷄林 경주(慶州)의 옛 이름)을 유람할 적에, 불일사(佛日寺)의 동쪽 봉우리에 올라가서 드높은 하늘을 올려다보고 드넓은 바다를 굽어본 적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때가 이른 새벽이라서 빛을 구분할 수가 없었는데, 하늘과 바다가 각각 위아래에서 언뜻 밝아졌다 언뜻 어두워지기도 하고 금세 붉어졌다가 금세 까맣게 변하는 등 종잡을 수 없이 신속하게 변화가 일어났으므로, 제가 실로 경탄을 금치 못하였습니다. 그러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서 붉은 햇덩이가 불쑥 튀어나와서는 별안간에 하늘로 뛰어올랐는데, 그 광명이 어찌나 찬란하던지 털끝까지도 셀 수 있을 정도였으며, 이와 함께 아까 말한 부상의 나뭇가지까지도 내 눈 속에 보이는 듯 여겨져서 제 마음이 실로 상쾌하기만 하였습니다. 지금 이 상인도 일찍이 이런 광경을 분명히 목도하였을 것인데, 그래서 그가 자기 암자에다 이런 이름을 내걸게 되었는지는 제가 잘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우리 유자(儒者)의 입장에서 말한다면, 밝은 명은 하늘에 대해서 말한 것이고 밝은 덕은 인간에 대해서 말한 것이니, 밝은 명을 돌아보면서 밝은 덕을 밝히는 것이야말로 학자의 일이라고 하겠습니다. 강보(襁褓)에 싸인 갓난아이라도 모두 자기 부모를 사랑할 줄 아는 이것은 마음이 밝아진 것이요, 어린아이가 엉금엉금 기어서 우물 속에 들어가려고 하는 이것은 마음이 어두워진 것이며, 순전히 밝게 되지도 못하고 순전히 어둡게 되지도 못한 이것은 학자의 공부가 아직 정립되지 못한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따라서 학문이 밝게 빛나 그 광명이 온 누리를 덮어 주게 되는 것이야말로 학자의 마지막 목표요 성인(聖人)만이 행할 수 있는 일이라 할 것인데, 이것이 바로 해가 부상의 나뭇가지를 떨치고 하늘로 솟아올라 비춰 주지 않는 것이 없는 것과 같은 것이 아니겠습니까.
상인이 강남(江南) 지방을 유력(遊歷)하면서 식견 높은 인사들을 두루 찾아다녔고 보면, 그의 학문이 어떠할지는 물어보지 않아도 알 수 있다 하겠습니다. 다만 알 수 없는 것은, 상인이 중국의 박학다식한 인물들과 교제할 적에 한마디 유익한 말을 부탁해 봤을까 하는 점인데, 만약 그렇게 했더라면 제가 지금 말해 준 내용으로 일러 준 사람이 분명히 있었을 것이라고 여겨지기도 합니다.”
하였다. 이에 한산자가 빙그레 웃으면서 말하기를, “그대의 말이 옳다. 내가 언젠가 승 상인을 만나면 한 번 물어보도록 하겠다.” 하고는, 마침내 이 내용을 그대로 써서 기문으로 삼기로 하였다.
[주D-001]강보(襁褓)에 …… 아는 : 《맹자》 진심 상(盡心上)에 나온다.
[주D-002]어린아이가 …… 하는 : 《맹자》 등문공 상(滕文公上)에 나온다.
청주(淸州) 용자산(龍子山) 송천사(松泉寺)에 있는 나옹(懶翁) 진당(眞堂)의 기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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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옹의 진당은 명산의 복지(福地)라면 어느 곳이든지 세워져 있는데, 한산(韓山)의 목은자(牧隱子)가 붓을 잡고서 그 시말(始末)을 적어 온 지가 오래되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그의 문도(門徒)인 각련(覺連)이 또 찾아와서 말하기를, “청주 용자산에 돌미륵[石彌勒]과 석탑(石塔)이 있는데, 실로 복지라고 할 만합니다. 그래서 제가 읍내와 시골 마을을 돌아다니면서 청신남(淸信男 남자 신도)과 청신녀(淸信女 여자 신도)들에게서 약간의 재물을 시주받은 뒤에, 세 칸의 집을 짓기 시작하여 무술년 8월에 공사를 마쳤습니다. 그러고는 우리 나옹 큰스님의 진영(眞影)을 가운데 칸에다 봉안(奉安)하고, 승려들은 왼쪽과 오른쪽 칸에 거처하면서 아침저녁으로 향화(香火)를 받들어 올리며 스승의 은혜에 보답하려 하고 있으니, 선생께서 기문을 써 주셨으면 합니다. 기문이야 누군들 짓지 못하겠습니까마는, 진당의 기문만은 선생께서 써 주셔야겠습니다.” 하였다.
이에 내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나 옹의 사리탑(舍利塔)에는 내가 왕명을 받들어 명(銘)을 지어 주었고, 나옹의 진당에는 내가 그 문도를 위해서 글을 지어 주었다. 나는 나옹과 섭화(攝化)의 인연이 전혀 없었기 때문에, 나옹의 문하에 나아가서 노닐어 볼 기회를 얻지 못하였다. 그렇긴 하지만 나옹의 진당이 나로 인해서 오래도록 전해지고, 후세 사람들로 하여금 나옹의 이름을 알게 하는 것이 실로 나의 붓 때문이라고 한다면, 평소 나옹이 살았을 때 그로부터 직접 훈도를 받았으면서도 나옹이 죽은 뒤에 아무런 보탬이 되지 못하는 자들과 어떻게 함께 비교해서 말할 수가 있겠는가. 이렇게 된 것이 나의 행운이라 할 것인가, 아니면 나옹의 행운이라 할 것인가, 그것도 아니면 각련의 행운이라 할 것인가. 모든 것이 인연 따라 우연히 이루어지는 것이리니, 그저 한 번 웃고서 넘길 일이다.
적암기(寂菴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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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 엄(華嚴)의 대선(大選)인 경원(景元)이 흥왕사(興王寺)에 머물고 있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서 세상의 그물을 끊어 버리고는 초연히 행운유수(行雲流水)의 생활을 하면서, 누더기 옷과 나물밥으로 장차 몸을 마치려고 하였다. 그런데 그의 기상이 호걸스럽고 그의 뜻이 고결하였으므로, 그를 보는 사람들마다 사랑하고 공경하지 않는 이가 없었는데, 나도 벽사(甓寺 신륵사(神勒寺))를 왕래하다가 그와 처음으로 교분을 맺게 되었다.
원공(元公)이 일찍이 나옹(懶翁)을 스승으로 모시고 있었는데, 나옹이 그에게 적(寂)이라는 이름을 지어 준 지가 오래되었다. 그런데 지금 그가 맹운(孟雲 한수(韓脩)) 한 선생(韓先生)으로부터 큰 글자 하나를 받아서 편액(扁額)으로 내건 뒤에, 나에게 기문을 요청하면서 말하기를, “이각(二覺)이 적(寂)으로 돌아가는 이것은 교(敎)의 극치요, 삼관(三觀)이 적(寂)으로 끝나는 이것은 선(禪)의 극치입니다. 이런 경지에서는 공덕(功德)을 쌓으려는 행동도 끊어지고 옳으니 그르니 하는 분별심(分別心)도 없어질 것이니, 이 적(寂)을 통해서 영가(永嘉)가 거론한 시비(是非)도 모두 잊어버리고 달마(達磨)가 공덕(功德)에 대해서 말한 의미를 꿰뚫어 아는 것이 바로 나의 뜻입니다. 하지만 선생이 어찌 나의 적(寂)에 대해서 모두 알 수야 있겠습니까. 내가 산중에 있다 보면, 낮에는 새 한 마리도 울지 않고 밤에는 외로운 달만이 다시 나올 뿐이요, 꽃들 사이로는 물만 혼자서 흘러가고 소나무 위에는 눈만이 수북이 쌓여 있을 따름입니다. 나 홀로 서 있을 때 느끼는 적막감이야 물론 말할 것이 없지만, 여럿이 함께 있을 때에도 적요(寂寥)하기는 마찬가지이니, 이런 적적함의 맛에 대해서는 어떻게 말로 다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내가 나의 암자에다 그런 이름의 현판을 내걸게 된 것입니다. 내가 살펴보건대, 선생 역시 소란스러운 세상을 피하려는 것처럼 보이기는 합니다만, 우리의 도(道)에 대해서 꼭 알고 계시지는 않으리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이각과 삼관, 그리고 달마와 영가의 설을 대략 거론한 뒤에 끝에 가서 산중의 일을 말씀드리게 된 것인데, 선생께서는 이 중에서 어떤 것을 취해서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하였다.
이에 내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우 리 유자(儒者)가 복희씨(伏羲氏) 이래로 간수하면서 서로 전해 온 것도 바로 적(寂)이라고 할 것이니, 나같이 형편없는 사람의 경우라 할지라도 감히 이를 실추시킬 수는 없는 일이다. 태극(太極)은 적(寂)의 근본이 된다 할 것이니 그것이 한 번 움직이고 한 번 고요함에 따라 만물이 순일하게 변화하고, 인심(人心)은 적(寂)의 버금이 된다 할 것이니 그것이 한 번 느끼고 한 번 반응함에 따라 만선(萬善)이 널리 행해지게 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대학(大學)》의 강령(綱領)도 정정(靜定)에 두고 있으니, 이것이 바로 적(寂)을 말함이 아니겠는가. 또 《중용(中庸)》의 요체도 계구(戒懼)에 두고 있으니, 이것이 바로 적을 말함이 아니겠는가. 계구는 한마디로 경(敬)이요, 정정 역시 경이라고 할 수 있는데, 경이란 단지 주일무적(主一無適)일 따름이다. 주일(主一)은 지키는 바가 있음을 말하고 무적(無適)은 옮겨 감이 없는 것을 말하는데, 지키는 바가 있고 옮겨 감이 없는 것을 적(寂)이 아니라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리하여 이 적(寂)에 기초하여 정사(政事)를 행하다 보면 치평(治平)의 밝은 효과가 나타나게 되고, 도덕(道德)을 닦아 나가다 보면 위육(位育)의 큰 효험이 드러나게 되는 것이다.
우 리 스님의 적(寂)이라는 것도 중생을 널리 이롭게 해 주려는 마음의 본원이 되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런데 만약 혹시라도 그 형체를 마른 나무 등걸처럼 만들고 그 마음을 불 꺼진 재처럼 만든 채 오로지 적(寂)에만 걸려 버리고 만다면, 우리 유자가 말하는 ‘새와 짐승과 무리 지어 사는 자’와 다를 것이 뭐가 있겠는가. 그렇게 된다면 우리 유자의 입장에서도 인간관계를 단절하는 것이 될 뿐만 아니라, 석씨(釋氏)의 입장에서도 죄인이 되는 결과를 면치 못할 것이니, 나와 적암(寂菴) 모두가 스스로 잘 도모하여 한쪽으로 휩쓸려 들어가지 않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가령 산중의 적막함 같은 것이야 스님에게나 속하는 일이지 나와는 아무 관계가 없으니, 내가 또 어떻게 말을 할 수가 있겠는가.
[주D-001]이각(二覺)이 적(寂)으로 돌아가는 : 이 각은 본각(本覺)과 시각(始覺)을 말한다. 본각은 중생이 본래 갖추고 있는 바, 여래(如來)와 똑같은 청정한 지혜를 말하고, 시각은 일단 미혹(迷惑)된 중생의 본각이 다시 본성으로 환원된 지혜를 말하는데, 《대승기신론(大乘起信論)》에 이 사상이 나온다. 적(寂)은 일체의 상(相)을 떠난 적멸(寂滅)의 상태를 말한다.
[주D-002]삼관(三觀) : 관법(觀法)을 닦을 때의 마음의 상태를 말하는데, 이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지만, 여기서는 당(唐)나라 징관(澄觀)이 말한 정관(靜觀)ㆍ환관(幻觀)ㆍ적관(寂觀)을 가리키는 것이 아닌가 싶다.
[주D-003]영가(永嘉)가 거론한 시비(是非) : 일 숙각(一宿覺)으로 유명한 당나라 승려 영가의 〈증도가(證道歌)〉에 “그르다고 하는 것도 사실 그른 것이 아니고, 옳다고 하는 것도 사실 옳은 것이 아니니, 처음에 털끝만큼이라도 분별심을 낸다면 나중에는 천리나 어긋나게 될 것이다.[非不非是不是 差之毫釐失千里]”라는 말이 나온다.
[주D-004]달마(達磨)가 …… 의미 : 양 무제(梁武帝)가 보리 달마(菩提達磨)에게 “내가 즉위한 이후로 절을 짓고 불경을 간행하며 승려를 양성하는 일을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이 하였는데, 앞으로 무슨 공덕을 받겠는가?”라고 물었을 때, 달마가 “하나도 공덕이 없다.”고 대답했던 그 진정한 뜻을 말한다. 《景德傳燈錄 卷3》
[주D-005]정정(靜定) : 《대학장구》의 첫머리에서 삼강령(三綱領)을 제시한 다음에, 바로 “지(止)할 곳을 안 뒤에야 정(定)함이 있고, 정(定)한 뒤에야 정(靜)할 수 있고, 정(靜)한 뒤에야 안(安)할 수 있다.”는 말이 나온다.
[주D-006]계구(戒懼) : 《중 용장구》 첫 부분에 “이 때문에 군자는 보이지 않는 곳에서도 경계하며 조심하고, 들리지 않는 곳에서도 두려워하며 겁을 내는 것이다.[君子戒愼乎其所不睹恐懼乎其所不聞]”라는 말이 나오는데, 계구는 계신(戒愼)과 공구(恐懼)를 합해서 말한 것이다.
[주D-007]경이란 …… 따름이다 : 주 일무적(主一無適)은 마음을 전일(專一)하게 하여 다른 잡념이 없게 하는 것을 말한다. 《논어》 학이(學而)의 〈경사이신(敬事而信)〉에 대한 주희(朱熹)의 〈집주(集註)〉에 “경은 주일무적을 의미한다.[敬者主一無適之謂]”라는 말이 나온다.
[주D-008]치평(治平) : 《대학장구》의 팔조목(八條目) 가운데 마지막 완성 단계인 치국(治國)과 평천하(平天下)를 말한다.
[주D-009]위육(位育) : 《중용장구》의 “중과 화에 이르게 하면, 천지가 제자리를 잡게 되고 만물이 육성된다.[致中和 天地位焉 萬物育焉]”는 말을 요약한 것이다.
[주D-010]새와 …… 자 : 《논어》 미자(微子)에, 공자가 은자(隱者)인 장저(長沮)와 걸닉(桀溺)의 비평을 듣고는 “새와 짐승과는 더불어 무리 지어 살 수 없다.[鳥獸不可與同群]”고 탄식한 말이 나온다.
중방(重房)의 새로 지은 공해(公廨)에 대한 기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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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무(洪武) 계해년(1383, 우왕9) 겨울 10월 초하룻날에 응양 호군(鷹揚護軍) 배구(裵矩)가 나를 찾아와 그의 반주(班主)인 밀직(密直) 최공(崔公)의 말을 전하면서 말하기를, “우리 중방의 수조기(修造記)를 써 달라고 감히 선생에게 부탁드리려고 합니다.” 하였다. 그러고는 공사 내용을 기록한 책자를 꺼내어 보여 주었는데, 이에 의하면 대청(大廳)이 3칸이요, 서청(西廳)이 3칸이요, 누고(樓庫)가 3칸이요, 남쪽 회랑(回廊)이 9칸이요, 문(門)이 1칸이었으며, 여기에 단청으로 채색을 하고 밖에다 담장을 둘렀으니, 또한 하나의 큰 공사라 할 만하였다.
재목은 모두 돈을 주고 구입하였으며, 부족한 것은 도통사(都統使)인 최 시중(崔侍中)이 도와준 순군만호부(巡軍萬戶府)의 포목(布木) 250필(疋)로 해결하였다. 그리고 근장(近仗)과 내상(內廂)과 감문(監門)에서 위정(尉正)이 군사를 각각 분담하여 공사에 참여하였으며, 공장(工匠)으로는 승려로서 집에 거주하는 자들이 삯을 받고는 앞 다투어 나아왔다. 또 돈을 주고 수레를 빌려 재목을 나르게 하는 한편, 관원을 파견해서 공사를 감독하게 하였는데, 5월 24일에 시작한 공사가 9월 그믐날에 완공을 보기에 이르렀다.
나는 말한다.
어쩌면 이처럼 멋있게 해낼 수가 있단 말인가. 관아에서 이런 공사를 벌이는데도 백성이 전혀 알지 못했는가 하면, 윗사람이 뭔가 일을 하려고 하자 아랫사람들이 서로 권면하였으니, 이는 근래에 들어 보기 어려운 일이라고 하겠다.
동 역관(董役官 총감독관)은 대호군(大護軍) 정승가(鄭承可)였는데, 그가 공사를 거의 끝낼 즈음에 공차(公差 공적으로 파견되는 것)로 그 일을 대신한 이는 염치중(廉致中)이요, 이 일을 처음부터 끝까지 보살핀 사람은 오직 배군(裵君)이었다. 그 아래로는 낭장(郞將) 최유(崔愉)와 김을정(金乙鼎), 별장(別將) 배천석(裵天碩), 산원(散員) 윤영렬(尹英烈) 등이 있고, 또 그 아래로 도장교(都將校) 원을부(元乙富)와 서자(書者) 이임발(李林發)과 서역(書役) 정규부(鄭圭夫) 등이 있다. 이번 일은 반주가 지휘한 것인데, 아래로 서역(書役)에 이르기까지 모두 이 일과 관련하여 이름을 남길 수 있게 되었으니, 영광이라고 해야 하지 않겠는가.
내가 생각건대, 문(文)과 무(武)는 국가의 쓰임이 됨에 있어서 인체의 두 팔과 같고 수레의 두 바퀴와 같으니, 어느 하나를 일방적으로 무시해서는 물론 안 될 것이다. 하지만 시대의 치란(治亂)에 따라 쓰이는 면에 있어서도 경중(輕重)이 있는 법이니, 지금 이처럼 어려운 일이 많은 때를 당해서는 나와 같은 문관(文官)들은 높은 다락 위에다 묶어 두어야만 할 것이다. 그렇게 하면 무관(武官)들이 간성(干城)이 되고 조아(爪牙 용감한 장수)가 되어 나라의 운명을 제대로 떠맡게 되리라는 것을 또한 알 수가 있다.
최 공(崔公)은 충직하기로 이름난 분으로, 상의 지우(知遇)를 받고서 국가의 기밀(機密)에 참여하여 주도적인 역할을 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손한 자세로 온화하기만 하여 조정에 있는 이들도 모두 사모하고 있으니, 군교(軍校)들이 충심으로 섬기며 따르는 것도 당연한 일이다. 따라서 졸지에 위급한 사태가 발생할 경우에 무기를 잡고 기꺼이 뛰어나와 싸울 것 또한 분명히 기약할 수 있으니, 하물며 이런 사소한 공사 정도야 더 말해 무엇하겠는가.
나는 나이 15세에 부음(父蔭)으 로 평민의 신분에서 별장(別將)의 임명을 받은 적이 있다. 그러고 보면 나도 예전에 응양군(鷹揚軍)에 속한 하나의 장교였으니, 반주가 청하는 글을 어떻게 감히 사양할 수가 있겠는가. 그런데 무관(武官)은 어디까지나 간소한 것을 위주로 하는 만큼, 곧장 그 일만을 써 내려갈 뿐 다른 이야기는 감히 번거롭게 덧붙이지 않기로 하였다. 반주는 서반(西班)을 주재(主宰)하는 분으로서, 8인의 상장군(上將軍) 가운데 가장 높은 지위에 있기 때문에, 양부(兩府)의 재상이 겸직을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주C-001]중방(重房) : 고려 때 이군육위(二軍六衛)의 상장군과 대장군이 모여서 군대의 일을 의논하던 곳이다.
[주D-001]반주(班主) : 고려 때 응양군(鷹揚軍)의 상장군(上將軍)으로서 병부 상서(兵部尙書)를 겸한 사람을 일컬었던 말이다.
[주D-002]근장(近仗) : 고려 때 임금과 궁성의 시위(侍衛)를 맡았던 응양군과 용호군(龍虎軍)의 통칭이다.
[주D-003]내상(內廂) : 궁중이나 각도(各道)의 치소(治所)에 있던 병영(兵營)을 말한다.
[주D-004]감문(監門) : 궁성 내외의 각 문을 지키는 일을 담당했던 군대를 말한다.
[주D-005]위정(尉正) : 하급 장교인 교위(校尉)와 대정(隊正)의 병칭이다.
[주D-006]지금 …… 것이다 : 국 가가 위급한 때에는 문관이 뒤로 물러서고, 그 대신 무관들이 힘을 발휘할 기회를 주어야 한다는 말이다. 진(晉)나라 유익(庾翼)이, 당시에 명성을 독점하고 있던 두예(杜乂)와 은호(殷浩)에 대해서 “이 사람들은 높은 다락 위에 묶어 두었다가, 천하가 태평해진 뒤에야 써 먹을 일을 의논해야 할 것이다.”고 평했던 고사가 있다. 《晉書卷73 庾翼列傳》
[주D-007]부음(父蔭) : 부친의 관작으로 인하여 관직을 얻는 것을 말한다.
남양부(南陽府) 망해루(望海樓)의 기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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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 양부는 삼국 시대에 당성(唐城)으로 불리다가, 본국에 들어와서는 중세(中世) 이래로 익주(益州)가 되었다. 이 고을의 홍씨(洪氏)는 태조(太祖)가 일어날 때부터 익대(翼戴 받들어 추대함)의 공이 있었으니, 휘(諱) 은열(殷悅)이 바로 그분이다. 대대로 대족(大族)을 이루며 살아오다가 강도(江都) 시대의 말기에 이르러서는 남양군(南陽君 홍규(洪奎))이 권신(權臣 임유무(林惟茂)를 가리킴)을 죽이고 왕실을 중흥하였는데, 이분의 따님인 문예부주(文睿府主 충숙왕의 비(妃) 명덕태후(明德太后))가 양조(兩朝)의 태모(太母)가 되었으므로, 주(州)를 승격시켜 부(府)로 삼게 되었다.
대개 산천의 신령스럽고도 빼어난 정기(精氣)가 한데 뭉쳐 아름다운 상서(祥瑞)를 드러냄으로써 억만년토록 끝없이 이어 갈 기업(基業)의 토대를 마련해 주었으니, 다른 군현(郡縣)과 똑같이 간주될 수 없는 것 또한 당연한 일이라 하겠다. 그렇기 때문에 그곳을 지키는 신하도 중하게 여겨, 반드시 신중을 기해서 뽑아 보내곤 하였던 것이다.
해정 어수(海亭漁叟) 정후(鄭侯)가 이곳에 부임하여 말하기를, “태양도 나오고 들어가는 곳이 있고 장강(長江)의 물도 솟아 나오는 곳과 돌아가는 곳이 있으니, 아무리 멀고 큰 것이라 할지라도 제대로 잘 살필 줄만 알면 모두 그 시원(始原)을 알 수가 있는 법이다. 그런데 더구나 군상(君上)이 나오게 된 곳이야 더 말해 무엇하겠는가. 따라서 신하 된 자라면 그곳에 대해서 당연히 공경하는 마음을 품고서 감히 소홀히 해서는 안 될 것인데, 하물며 나로 말하면 덕음(德音)을 널리 입고서 군상이 나온 이 땅을 지키는 신하가 되었는데야 더 말할 나위가 있겠는가.” 하고는, 이 때문에 더욱 밤낮으로 외경심을 지니고서 가능한 한 덕을 앞세우려고 힘을 기울였다. 그리하여 아전을 교화시키려고 노력하였을 뿐 무턱대고 그들에게 법을 가하려고 하지 않았으며, 백성들에게 은혜를 베풀려고 노력하였을 뿐 무턱대고 위엄을 보이려고 하지 않았다. 이렇게 한 해가 지나가자 온 고을이 크게 평화롭게 되면서, 이로운 것은 일어나지 않는 것이 없고 해로운 것은 모두 없어지기에 이르렀다.
이에 고을의 치소(治所)에다 누각을 세워 외관(外觀)을 웅장하게 하는 한편 찾아오는 손님들을 즐겁게 해 주려고 하였는데, 누각의 이름을 망해(望海)라 하고는 그의 아들인 국자감(國子監)의 학생 이(彝)를 보내어 나에게 기문을 요청하였다. 그런데 이와 관련해서 이야기를 들려주기를, “이 고을에 옛날에는 못이 있었는데, 오래전부터 방치하고 수리하지 않은 결과 위에는 잡초가 무성하고 아래에는 진흙만 쌓여서, 주민들이 그 속에 들어가 서로들 뒤섞여 경작을 하였습니다. 주민들의 말에 의하면 그 못의 용이 다른 경내(境內)로 옮겨 가는 바람에 그 뒤로 말라붙게 되었다고 합니다만, 그것이 믿을 수 있는 이야기인지는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부사(府使)께서 부임하고 나서 이 못을 파내고 수축하라는 명을 내렸는데, 이날 먹구름이 갑자기 동남쪽에서 일어나더니 바람과 우레가 뒤따라 이르렀습니다. 이때 고을 사람들이 바라보니, 꿈틀거리는 용의 꼬리가 하늘 높이 보이다가 못까지 내려왔는데, 그 뒤로 못물이 사흘 동안이나 끓어오르고 흰 기운이 뭉게뭉게 피어나면서 그치지 않았으므로, 모두가 감탄하며 이상하게 여겼다고 합니다.” 하였다.
나는 말한다.
마음의 작용이야말로 위대하다고 할 것이니, 그 마음을 한군데로 집중하기만 하면 천하의 일이란 족히 하고 말 것이 없는 것이다. 정후(鄭侯)의 공경하는 그 마음이 환하게 통해서 막힘이 없었기 때문에, 밝은 곳에서는 사람들이 화목하게 되고 어두운 곳에서는 용과 같은 영물(靈物)이 찾아오게 된 것이니, 이 누각과 같은 작은 일이야 굳이 말할 것이 있겠는가. 그래서 이 고을의 연혁(沿革)을 먼저 적어 넣은 다음에 용이 돌아오게 된 사연을 기록해서 이곳을 찾는 사람들에게 알려 주려고 한 것이다. 정후의 이름은 을경(乙卿)이요 자(字)는 선보(善輔)인데, 일을 맡길 만한 재능이 있다고 세상에 알려져 있다.
청주목(淸州牧) 제용재(濟用財)의 기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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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 주(淸州)는 양광도(楊廣道)에 있는 목관(牧官)의 고을로, 충주(忠州) 및 공주(公州)와 경계를 맞대고 있다. 그곳은 토호(土豪)가 많기는 하였으나, 아전들은 법을 받들어 준수하고 백성들도 조금은 유순한 편이었다. 그런데 그곳에 부임해 오는 자들을 보면 백성들을 관대하게 대하는 이도 있고 위엄을 보이는 이도 있었으며, 또 구차하게 세월만 보내다가 교체되어 떠나는 자도 있었는데, 이러한 현상은 그 고을의 이민(吏民)이라고 해서 다른 고을과 원래 다를 바가 없었다.
그리고 곡식을 내어 관가에 바치게 하거나 고을의 재정을 비축해서 빈객을 대접하는 등의 일 역시 대부분 법으로 정해 놓지 않은 채 더러 백성을 착취하기까지 하였으므로, 백성들이 이 때문에 곤욕을 당했음은 물론 아전들이 그 기회를 이용해서 횡포를 부리는 폐단이 있어 온 지가 오래되었다. 그동안 관대함과 위엄 사이의 중도(中道)를 얻어 폐기되고 실추된 일을 다시 닦아 밝히는 이가 있었다 하더라도, 그것도 모두 한때 이롭게 해 주는 정도에 그치고 말았을 뿐, 영구히 전해질 수 있는 제도를 만들어 상하(上下)의 잘못된 점을 변통하고 주선함으로써 옛날의 폐단을 없애고 이민의 생활을 안정시켜 준 경우는 대개 드물었다고 하겠다.
용구(龍駒 용인(龍仁)의 옛 이름)의 이모지(李慕之) 씨는 내가 성균관(成均館)에 있을 때의 생도였다. 당시에 동료들이 그의 학식을 일컫곤 하였는데, 마침 집정(執政)이 그의 실력을 인정하고는 그를 천거하여 참관(參官)이 되게 하였다. 그런데 최근의 규례(規例)에 따르면 참관은 또 과거 시험장에 들어갈 수가 없었으므로 과거에 응시하지 못하였으나, 자기 자신은 이미 시험을 본 자들과 비교해서 조금도 부끄러울 것이 없다고 생각하였다. 그리고 그가 청주를 다스린 것을 보면 그의 학문의 정도를 충분히 알 수가 있으니, 대개 내가 아까 말한 ‘드물다’고 한 경우에 모지가 해당되리라고 여겨진다.
청주가 왜구(倭寇)에게 유린당한 나머지 백성들의 집에 남은 것이 없이 텅텅 비어 스스로 생활을 유지할 수가 없게 되었는데, 이러한 때에 모지가 명을 받고 부임한 뒤에 직접 찾아다니며 묻고 계획을 세워 시행하면서 따뜻하게 보살피고 어루만져 준 결과 2년 만에 은택이 골고루 미치게 되어 백성들은 어버이처럼 친근하게 따르고 아전들은 법을 받들어 준수하기에 이르렀다. 이에 잘 다스린다는 소문이 조정에까지 퍼지자 교체할 시기가 되었는데도 교체하지 않고 백성에게 계속 은혜를 베풀게 하였으니, 모지의 입장에서는 비록 외방에서 오래도록 고달프게 되었다 하더라도 조정에서 백성을 사랑하는 그 마음은 훤히 드러났다고 하겠다.
모지가 그 고을에서 오랫동안 절약한 끝에 백미(白米) 20석, 현미(玄米) 70석, 좁쌀 80석, 메밀 30석과 포목 1000필을 비축하였는데, 포목과 쌀을 마구 사용해서 고갈시키기보다는 본밑천은 그대로 놔두고 이식(利息)만을 취해서 계속 쓸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러고는 이 일을 다시 걱정하여 말하기를, “내가 떠난 뒤에 나를 대신하는 자가 모두 내 마음처럼만 한다면야 본밑천이 그대로 남아 있겠지만, 혹 그렇지 못할 때에는 이식이 장차 어디에서 나오겠는가. 그렇게 되면 앞으로 몇 년이 지나지 않아서 나의 법이 없어지고 말 것이니, 아, 이를 생각하면 가슴이 아프다.” 하고는, 이에 대한 대책을 또 생각하여 말하기를, “입으로 말하고 글로 써서 전하는 것도 극진한 방법이 되지 않는 것은 아니겠으나, 당사자가 그럴 만한 사람이 못 된다면 사람들이 혹 멸시할 수도 있을 것이다. 만약 당대(當代)에 글을 잘 짓는 이에게 부탁해서 이 일을 기록하게 한다면 그 글이 반드시 널리 전파될 것이니, 청주 사람들이 설령 나의 현판(懸板)을 불살라 버린다 하더라도 그 기문을 끝내 없앨 수는 없을 것이다. 따라서 뒤에 목사(牧使)로 부임하는 자가 이 기문을 가지고 와서 ‘기문에 이렇게 적혀 있는데 지금 그 쌀과 포목은 어디에 있느냐.’고 묻는다면, 그 사람도 할 말이 없게 될 것이다.” 하였다.
이에 한산자(韓山子)에게 글을 보내 기문을 요청하였는데, 그의 백씨(伯氏)인 판각공(判閣公)이 또 잇따라 찾아와서 부탁하였다. 나는 태사(太史)이다. 따라서 훌륭한 일을 들으면 반드시 써야 하기 때문에, 이렇게 적어서 기문으로 삼게 하였다.
운헌기(雲軒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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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 엄(華嚴)의 의공(宜公)이 지난번에 나에게 시편(詩篇)을 보여 주었는데, 그 맛을 음미해 보고는 나 스스로 시승(詩僧)을 얻었다고 생각하였다. 그 뒤 오랫동안 헤어져 있던 중에 그가 옥천사(玉泉寺)에 머물면서 나에게 수백 언(言)의 글을 보내왔는데, 말하려고 하는 뜻과 지어 낸 표현을 살펴보니, 곧장 문인(文人)과 미세한 부분까지 다퉈 보려는 듯한 인상을 받았다. 내가 이를 통해서 의공이 시문에 관심을 쏟는 것이 매우 독실하다는 것을 알고는, 그와 한 번 만나서 못다 한 이야기를 들어 보고 싶다는 생각이 더욱 절실해진 지가 오래되었다. 그런데 금년 여름에 그가 서울에 와서 나를 방문하여 말하기를, “내가 나의 거처에다 운(雲)이라는 이름을 걸었는데, 선생에게 기문을 부탁드릴까 합니다.” 하였다.
내가 예전부터 그의 서론(緖論)을 들어 보고 싶었으므로, 운헌(雲軒)이라고 이름 지은 뜻에 대해 물어보면서 말하기를, “공이 어쩌면 색(色)ㆍ수(受)ㆍ상(想)ㆍ행(行)ㆍ식(識)에 시달림을 당한 나머지 부운(浮雲)을 떨쳐 버리려고 생각해서 그런 것은 아닌가?” 하였더니, 아니라고 대답하였다. 그래서 내가 또 묻기를, “공이 어쩌면 신(信)ㆍ행(行)ㆍ주(住)ㆍ향(向)ㆍ지(地)를 사모한 나머지 법운(法雲)의 경지에 곧장 뛰어올라가려고 생각해서 그런 것은 아닌가?” 하였더니, 그것도 아니라고 하였다. 이에 내가 갑자기 환하게 깨달아지는 점이 있기에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그 렇다면 이 구름은 공이 살고 있는 곳의 구름인 것이 분명하다. 누워 있을 적에 몸을 푹신하게 받쳐 주는 것은 산속에 머물고 있는 구름이요, 앉아 있을 적에 이리저리 눈길을 돌리게 하는 것은 하늘가에 떠 있는 구름일 것이다. 마루가 어두워지면 구름이 몰려오는 것을 알 것이요, 마루가 환해지면 구름이 물러간 것을 알게 될 것이다. 마루에서 계곡을 굽어보노라면 꽃 옆에 머문 구름이 어여쁠 것이요, 마루에서 소나무를 마주 대하노라면 그 위에 떠다니는 구름이 애틋할 것이다. 달이 마루를 찾아올 적에 구름이 가렸다가 비켜 서면 맑은 달빛이 더욱 생동할 것이요, 바람이 마루로 불어올 적에 구름이 뒤따라 들어서면 써늘한 기운이 더욱 사무칠 것이다.
의공이 이 사이에서 읊조리면서 노래를 부르노라면, 시의 격조(格調)는 더욱 드높아질 것이요 문사(文詞) 역시 갈수록 오묘한 경지를 보이게 될 것이니, 자신에게 이익되는 점이 또한 많을 것이다. 그러나 어디 그뿐이겠는가. 구름이 뭉게뭉게 일어나서 가뭄에 단비를 내려 주기라도 하면, 백성들에게 은택을 흡족하게 끼친 그 공이 사전(祀典)에 높이 기재될 것이니, 이렇게 되면 어찌 세교(世敎)에 주는 도움이 크다고 해야 하지 않겠는가. 그러고 보면 우리 스님이 만물에 혜택을 주려고 하는 그 마음이 여기에 드러나 있다고 말할 수도 있겠다. 그러한 마음이 미리 이처럼 정해져 있고 보면, 앞으로 부운(浮雲)을 떨쳐 버리고 법운(法雲)에 뛰어올라 삼천 대천세계(三千大千世界)를 자운(慈雲)으로 덮어 줄 날도 머지않으리라고 생각한다. 이상의 내용으로 기문을 삼으면 어떨까 싶다.
[주D-001]색(色) …… 식(識) : 불 교 용어인 오온(五蘊)의 내용으로, 인간의 심신(心身)을 구성하는 다섯 가지의 가합적(假合的) 요소를 뜻하는데, 색은 물질 현상인 육신을 말하고, 기타 네 가지는 심리 현상을 설명하는 것들이다. 《반야심경(般若心經)》에 “관자재보살(觀自在菩薩)이 깊은 반야바라밀다(般若波羅蜜多)를 행할 때에, 오온(五蘊)이 모두 공(空)한 것을 비춰 보고 일체의 고액(苦厄)을 벗어났다.”는 말이 나온다.
[주D-002]신(信) …… 지(地) : 대승(大乘) 보살(菩薩)의 수행 단계인 50계위(階位)를 말한다. 10신(信)과 10주(住)와 10행(行)과 10회향(廻向)과 10지(地)를 거쳐서, 등각(等覺)과 묘각(妙覺)의 마지막 단계에 이르는 것으로 되어 있다.
[주D-003]꽃 옆에 머문 구름 : 두보(杜甫)의 시에 “일렁거리는 강물 속에 달빛은 바위로 옮겨 가고, 텅 빈 계곡 속에 구름은 꽃 옆에 머물렀네.[江動月移石 溪虛雲傍花]”라는 유명한 구절이 있다. 《杜少陵詩集 卷13 絶句六首 六》
엄곡기(嚴谷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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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 구니(比丘尼)인 화엄곡(華嚴谷)이 자신의 거처에다 엄곡(嚴谷)이라는 편액(扁額)을 내걸었으니, 이는 자초(自超) 무학 선사(無學禪師)가 지어 준 이름이었다. 그녀가 나의 글을 받아서 기문을 삼으려 하기에, 내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내가 듣건대, 화엄은 원교(圓敎)로서, 만덕(萬德)을 그 안에 구비하고 문호(門戶)를 연 하나의 종파라고 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크고 작고 거창하고 미세한 것과 통하고 막히고 밝고 어두운 것을 위시해서, 유성(有性)ㆍ무성(無性)이 나 유형(有形)ㆍ무형(無形)의 것을 모두 그 안에 포용하고 있고, 심지어 번뇌(煩惱)와 해탈(解脫)까지도 똑같이 일자(一者)로 돌아가게 하면서 터럭만 한 작은 차이도 그 사이에 두지 않는다고 하였으니, 더군다나 남녀(男女)의 차별상(差別相) 같은 것이야 더 말할 필요가 있다고 하겠는가.
하지만 이런 학설에 대해서는 내가 자세히 알지 못하니, 우선 일상적인 일을 가지고 말해 볼까 한다. 기거(起居)에 때가 있게 하고 음식(飮食)에 절도가 있게 하는 것은 아침저녁으로 행해야 할 엄(嚴)이요, 안으로 화두(話頭)를 참구(參究)함에 법도가 있게 하고 밖으로 임금의 복을 축원함에 규범이 있게 하는 것은 내외(內外)의 엄이요, 여럿이 거처하거나 혼자 있거나 간에 오로지 자신의 몸을 깨끗이 하는 데에 뜻을 기울이면서 혹시라도 해이해지지 않게 하는 것은 종신토록 지켜야 할 엄이다. 이 세 가지 중에서 어느 하나라도 폐하는 일이 없게 된다면, 도에 그런대로 가깝게 갈 수 있을 것이다. 우리 증자(曾子)의 가르침 가운데에 “열 개의 눈이 지켜보고, 열 개의 손이 가리키고 있으니, 얼마나 삼엄하다고 하겠는가.[十目所視 十手所指 其嚴乎]”라는 말씀이 있다. 이는 대개 치밀하게 살펴서 마음을 다잡고 성찰하라는 의미인데, 이것이 바로 자기를 단속하는 공부라고 하겠다.
엄 곡은 부인(婦人)의 신분인 만큼 내가 가까이해서도 안 되고 또 가르칠 수도 없는 입장이라고 하겠다. 하지만 나옹(懶翁)으로부터 인정을 받아 화두를 참구하기까지 했고 보면, 백 가지 복을 받고서 장엄하게 장식할 날도 머지않아 오리라고 여겨진다. 화엄(華嚴)에서 말하는 53참(參)이라는 것도 어찌 여기에서 벗어나는 것이겠는가. 이것으로 기문을 삼으면 어떨까 싶다.
[주D-001]원교(圓敎) : 수많은 불경의 뜻을 한데 수습하여 한 곳에 치우침이 없이 각 종파를 조화시키는 원만한 가르침이란 뜻으로, 불교에서 보통 화엄종(華嚴宗)과 천태종(天台宗)의 교설이 여기에 해당된다고 일컫는다.
[주D-002]유성(有性)ㆍ무성(無性) : 유성은 불성(佛性)을 지니고 있어 성불(成佛)할 가능성이 있는 중생을 말하고, 무성은 불성이 없어서 끝없이 윤회(輪廻)할 수밖에 없는 중생으로 일천제(一闡提)를 가리킨다.
[주D-003]열 개의 …… 하겠는가 : 《대학장구》 성의장(誠意章)에 나오는 말이다.
[주D-004]53참(參) : 《화엄경(華嚴經)》 입법계품(入法界品)에 나오는, 선재동자(善財童子)가 깨달음을 얻기 위하여 110성(城)의 53선지식(善知識)을 찾아다니며 법문을 구한 결과 마침내 미진수(微塵數)의 삼매문(三昧門)에 들어선 것을 말한다.
2010-0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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