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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재 선생 난고(益齋先生亂藁) 서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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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 (元)나라가 천하를 차지하여 사해(四海)가 일단 하나의 세계가 된 뒤로, 삼광(三光 해ㆍ달ㆍ별)과 오악(五嶽)의 웅혼한 기운이 한데 어울려 충만해진 가운데 사방으로 고동(鼓動)을 치며 급속도로 퍼져 나간 결과 중화(中華)나 먼 변방의 지역이나 별 차이가 없게 되었다. 그런 까닭에 한 세상을 울릴 만한 걸출한 인재들이 이 세계 어디에서나 뒤섞여 배출되어, 농익은 향기에 흠뻑 몸을 적시고 그 정수(精粹)를 채취하여 몸에 두른 채, 이를 문장으로 펼쳐 내어 당대의 치세(治世)를 아름답게 장식하였으니, 참으로 성대했다고 말할 만하다.
고려(高麗)의 익재(益齋 이제현(李齊賢)) 선생도 바로 이런 때에 태어나서, 약관(弱冠)의 나이가 되기도 전에 벌써 당세(當世)에 문명(文名)을 떨치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충선왕(忠宣王)의 지우(知遇)를 크게 받고 황성(皇城)에 따라가서 거하게 되었는데, 당시 중국 조정의 대유(大儒)요 진신 선생(搢紳先生)인 목암(牧菴 요수(姚燧)) 요공(姚公)과 염공 자정(閻公子靜 염복(閻復))과 조공 자앙(趙公子昻 조맹부(趙孟頫))과 원공 복초(元公復初 원명선(元明善))와 장공 양호(張公養浩)와 같은 분들이 모두 충선왕을 찾아와서 노닐었으므로, 선생도 이들과 모두 교제할 수 있었다. 그리하여 보는 것이 바뀌고 듣는 것이 새로워지는 가운데 자신을 절차탁마하면서 계속 변화시켜 나갔으니, 이때에 벌써 정대(正大)하고 고명(高明)한 학문의 절정에 이르게 된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여기에 또 천촉(川蜀)으로 사명(使命)을 받들고 가고, 충선왕을 따라 오회(吳會)를 다녀오면서 무려 1만여 리를 왕래하는 동안, 웅장한 산하(山河)와 색다른 풍속과 옛 성현의 유적(遺跡) 등 우리의 상상을 뛰어넘는 엄청난 구경거리를 모두 남김없이 가슴속에 담았을 것이니, 툭 트여서 막힘이 없는 그 기걸찬 기상이야말로 자장(子長)에 비교해 보아도 거의 뒤지지 않았으리라고 여겨진다.
따 라서 선생이 중국 조정의 관직에 이름을 올리고 황제의 제고(制誥 조서(詔書) 등의 글)를 관장하면서 대각(臺閣)에서 여유 있게 노닐었더라면, 공업(功業)을 성취한 면에서 앞에 말한 몇 분의 군자들에게 결코 양보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그 실력을 발휘하지 못한 채 동쪽으로 돌아와서 다섯 임금을 보좌하며 총재(冢宰)를 네 번이나 역임하였으니, 우리 동방의 백성으로서야 행운이라고 해야겠지만 사문(斯文)의 입장에서는 어떠했다고 하겠는가. 비록 그렇긴 하지만 우리 동방의 사람들이 선생을 태산(泰山)처럼 우러러보게 되었음은 물론이요, 학문하는 선비들도 고루한 폐습에서 벗어나 점차 정아(正雅)하게 바뀌게 되었으니, 이것은 모두가 선생의 교화 덕분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옛사람들을 살펴보건대, 비록 그 이름을 중국 조정의 관직에 올리지는 못했다 하더라도 각자 자기 나라에서 교화를 행한 결과 후세에까지 그 풍도(風度)를 드날린 예가 있으니, 가령 숙향(叔向)이나 자산(子産)과 같은 사람들을 우리가 어떻게 낮게 평가할 수 있겠는가. 천자를 보좌하면서 천하에 호령을 하는 일이야 어떤 사람인들 원하지 않겠는가마는, 이름이 후세에 전해지느냐의 여부는 중국 조정의 관직에 있지 않고 교화(敎化)에 있다고 할 것이니, 이렇게 본다면 또 무슨 유감이 있다고 하겠는가.
선생은 저술을 매우 많이 하였다. 그러면서도 늘상 “선친인 동암공(東庵公 이진(李瑱))의 문집도 아직 세상에 행해지지 못하고 있는데, 하물며 소자(少子)의 경우야 더 말해 무엇하겠는가.” 하고는, 시문을 한 편 지으면 곧장 버리기 일쑤였는데, 그럴 때마다 사람들이 그 글을 간수하여 보관하곤 하였다. 이제 막내아들인 대부 소경(大府少卿) 창로(彰路)와 맏손자인 내서 사인(內書舍人) 보림(寶林)이 서로 더불어 몇 권 분량의 글을 모은 다음에 간행할 계획을 세우고는 나에게 서문을 써 달라고 부탁하였다.
나는 말한다. 선생이 수찬(修撰)한 국사(國史)도 병화(兵火)로 인해 없어지는 일을 면하지 못했으니, 남의 책 상자에 들어 있는 단편적인 문자들이야 불에 타서 없어질 것은 의심할 여지도 없다고 하겠다. 따라서 이 몇 권의 책자만이라도 속히 간행해야 하겠으니, 두 분은 더욱 노력해야만 할 것이다. 아, 내가 어찌 말할 줄 아는 사람이겠는가. 그저 우리 부자(父子)가 선생의 문생(門生)이었기 때문에, 감히 사양할 수가 없어서 우선 이렇게 소견을 적게 된 것이다.
[주D-001]천촉(川蜀)으로 …… 동안 : 충 숙왕(忠肅王) 3년(1316)에 상왕(上王)으로 연경(燕京)에 가 있던 충선왕 대신에 촉 땅의 아미산(峨嵋山)에 제사를 올리기 위하여 3개월 동안 다녀온 것과, 충숙왕 6년(1319)에 충선왕이 중국에 있으면서 티베트 승려를 불러다가 계(戒)를 받고 절강(浙江)의 보타산(寶陀山)에 불공을 드리러 갈 때 따라간 것을 말한다. 오회(吳會)는 회계군(會稽郡) 오현(吳縣)의 약칭으로, 절강 지역에 속한다.
[주D-002]자장(子長) : 사 마천(司馬遷)의 자(字)이다. 그가 20세 때부터 남쪽의 회계(會稽)와 우혈(禹穴)과 구의(九疑)로부터 북쪽의 문수(汶水)와 사수(泗水)에 이르기까지 중국 각지를 거의 빠짐없이 종횡무진 유력(遊歷)하면서 비범한 기상을 길러 두었기 때문에, 마침내 《사기(史記)》라는 불후의 명작을 남기게 되었다는 고사가 전한다. 《史記 太史公自序》
[주D-003]숙향(叔向)이나 자산(子産) : 모 두 춘추 시대의 같은 시기에 활동했던 명신(名臣)으로, 숙향은 진(晉)나라 양설힐(羊舌肸)의 자(字)이고, 자산은 정(鄭)나라 공손교(公孫僑)의 자인데, 공자가 이들에 대해서 각각 옛날의 유직(遺直)이요 유애(遺愛)라고 칭찬하였다.
《설곡시고(雪谷詩藁)》 서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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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이 어쩌면 그렇게 후하게도 내가 즐기고 좋아하는 것을 듬뿍 내려 주시는지 모르겠다. 왕년에 내가 연경(燕京)에 있을 적에는, 같은 동네에 사는 오 현윤(吳縣尹)의 집에 《당백가시선(唐百家詩選)》이 있기에, 반절의 분량쯤 빌려다가 일독(一讀)을 하였고, 또 그 사이에 당대의 명경(名卿)과 재능이 있는 대부(大夫)들의 가집(家集)을 얻어다가 읽어 볼 기회를 가졌다. 비록 그 시문들의 깊고 얕은 정도를 속속들이 파악할 여유는 없었지만, 모두 그런대로 혼자서 즐기기에는 충분하였다. 그러다가 귀국할 즈음에는 또 당시(唐詩) 10여 질(帙)을 행장 속에 넣어 가지고 왔으니, 이는 장차 한산(韓山)에서 은거하면서 혼자 즐길 자료로 삼기 위함이었다.
그런데 재주도 없는 이 몸이 주상의 지우(知遇)를 받아 직무에 매이게 되는 바람에 시를 읊고 노래하는 데에 전념할 수가 없어서 마음속으로 아쉽게 생각하였으며, 여기에 또 선배들의 저술조차 많이 볼 수가 없었으므로 늘상 한스럽게 여겨 왔다. 게다가 오늘날로 말하면 난리를 치른 뒤끝이니, 어떻게 이런 일에 다시 뜻을 둘 수가 있었겠는가. 하지만 이런 와중에서도 급암(及菴 민사평(閔思平))의 유고(遺藁)와 익재(益齋 이제현(李齊賢))의 문집을 구해서 한 번 읽어 보고는, 남쪽으로 내려온 이래 불만스러웠던 기분을 통쾌하게 씻어 낼 수가 있었으니, 어찌 하늘이 내려 준 복이라고 해야 하지 않겠는가.
나의 동년(同年)인 정공권(鄭公權 정추(鄭樞)) 씨가 선친인 간의공(諫議公)의 작품을 기록해서 모아 두었다가 《설곡시고(雪谷詩藁)》라고 이름을 붙여 두 권으로 만들고는, 나에게 보여 주면서 책머리에다 서문을 써 달라고 부탁해 왔다. 내가 설곡의 시를 살펴보건대, 맑으면서도 궁상맞지가 않고 화려하면서도 넘치는 일이 없이, 사기(辭氣)가 점잖고 심원한 가운데 세태에 영합하는 속된 문자는 하나도 쓰려고 하지 않았다. 그리고 득의(得意)의 작품이라고 할 시들 중에는 내가 중국에서 보았던 재주 있는 대부들의 그것과 우열을 가리기 힘든 것들도 왕왕 눈에 띄었으며, 당나라 요(姚)ㆍ설(薛) 등 제공(諸公)의 사이에 두어도 부끄럽지 않을 것들도 있었다.
아, 천하에서 창졸간에 당한 난리 가운데 신축년 중동(仲冬)에 우리가 당한 것보 다 더 참혹한 경우가 어디에 있겠는가. 이런 때를 당하여서는 지혜로운 자나 어리석은 자 그리고 어진 사람이나 불초한 사람을 가릴 것 없이, 자기 집안에 있는 물건 중에 언제고 절실하게 필요한 것들이나 있고 없는 데 따라 생사와 직결되는 것들이라 할지라도 어려워하는 기색이 없이 모두 내버리고 떠날 수밖에 없었으니, 더군다나 이 책처럼 가지고 가기에는 무겁고 버리기는 쉬운 옛날의 종이 뭉치야 더 말할 것이 있었겠는가.
그렇다고는 하더라도 자식으로서 행할 도리를 생각해 본다면 차마 그렇게 하지 못할 점이 분명히 있다고 하겠는데, 공권 씨 같은 사람이 아닌 다음에야 꼭 그렇게 하리라고 내가 감히 보장할 수 없는 것이 또한 현실이라고 하겠다. 그런데 또 한편으로 생각해 보면, 만약에 하늘이 내가 즐기고 좋아하는 것을 후하게 내려 주시려 하지 않았던들, 국난(國難)을 당하여 파천(播遷)까지 한 뒤끝에 내가 또 어디에서 이렇게 즐거운 일을 얻어, 느긋한 마음으로 읊조리고 노래하면서 평소에 원하던 일을 누릴 수 있게 되었을까 하는 느낌도 드는 것이다.
비록 그렇긴 하지만, 이것이 어찌 나 혼자만의 행운이라고 하겠는가. 뒷날 태사씨(太史氏 사관(史官))가 예문(藝文)에 관한 내용을 기록할 때에도 이 문집을 증거로 삼을 것이요, 혹 예산농은(猊山農隱)의 뒤를 이어서 우리 동방의 글을 분류해 뽑는 사람이 나올 경우에도 이 문집을 취할 것이 분명하다. 그러고 보면 설곡(雪谷)의 이름이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더욱 드러나게 되는 것이 장차 이 문집에 있다고 해야 하지 않겠는가. 그런데 이 문집이 없어지지 않게 된 것은 바로 우리 공권 씨의 덕분이라고 할 것이니, 아, 공권 씨 같은 사람이야말로 자식 된 도리를 제대로 해냈다고 할 만하다.
설곡의 휘(諱)는 포(誧)요 자(字)는 중부(仲孚)인데, 선친인 가정공(稼亭公)과 친하게 지내었다. 그런데 나 역시 공권 씨를 무척이나 좋아할뿐더러 선인(先人)의 업적을 보전하려는 그 뜻이 또 서로 같기에, 즐거운 마음으로 이렇게 서문을 쓰게 되었다.
[주D-001]당백가시선(唐百家詩選) : 송(宋)나라 왕안석(王安石)이 당나라 덕종(德宗)과 현종(玄宗)의 시를 위시해서 107인의 시 1262수를 20권으로 모아 놓은 책이다.
[주D-002]요(姚)ㆍ설(薛) : 요 합(姚合)과 설거(薛據)를 말한다. 요소감(姚少監)으로 더욱 알려진 요합은 일찍이 무공현시(武功縣詩) 30수로 명성을 떨쳐 무공체(武功體)의 시파(詩派)를 형성하였으며, 설거는 시를 잘 지어서 왕유(王維)ㆍ두보(杜甫)와 친밀하게 지냈던 인물이다.
[주D-003]신축년 …… 것 : 홍 건적(紅巾賊)의 재침(再侵)으로 개경(開京)이 함락된 것을 말한다. 신축년 즉 공민왕 10년(1361) 10월에 사유(沙劉) 등이 이끈 10만의 홍건적이 침입하자, 왕이 광주(廣州)를 거쳐 복주(福州) 즉 안동(安東)으로 파천(播遷)한 가운데 11월 24일에는 적이 개경으로 쳐들어왔는데, 적이 2개월 남짓 그곳에 진을 치고 머무는 동안 남자와 여자를 함부로 죽여서 지져 먹는가 하면 임신한 여자들의 유방을 베어서 구워 먹는 등 잔학한 짓을 멋대로 했다는 기록이 《동사강목(東史綱目)》 14 하(下) 공민왕 10년 11월 조에 나온다.
[주D-004]예산농은(猊山農隱) : 목은보다 40년 선배인 최해(崔瀣)의 호인데, 말년에 고려 명현의 시문을 뽑아 《동인지문(東人之文)》 25권을 편찬하였다.
《근사재일고(近思齋逸藁)》 후서(後序)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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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 조(元朝)에서 북정(北庭 연경(燕京))의 진사(進士)들은 고문(古文)으로 세상에 이름을 날렸는데, 그중에서도 마조상(馬祖常) 백용(伯庸)이나 여궐(余闕) 정심(廷心)과 같은 사람이 특히 걸출했다고 하겠다. 그리고 을유년 을과(乙科) 출신인 설백료손(偰伯遼遜 설손(偰遜)의 초명(初名)) 공원(公遠) 역시 남방에서 학업을 닦아 20세가 되기도 전에 과거를 응시하는 과목에 모두 통달하고 나서 틈이 나는 대로 고문을 공부하여 이름을 크게 떨쳤다.
그는 급제한 뒤에 한림 응봉(翰林應奉)으로 있다가 단본당 정자(端本堂正字)로 선발되었으며, 숭문감(崇文監)의 승(丞)이 되어 바야흐로 크게 쓰일 기회를 맞게 되었다. 그러나 당시에 국정을 담당한 자가 그의 부친인 회남 좌승공(淮南左丞公)과 원한 관계에 있었으므로 외방에 나가서 선주(單州)를 맡게 되었는데, 그곳에서도 잘 다스린다는 명성을 얻었다.
얼마 뒤에 모친상을 당하여 대령(大寧)에 우거(寓居)하였다. 그런데 그때 적(賊)이 이미 상도(上都)를 무너뜨리고 요서(遼西)로 향하자, 공원(公遠)이 자제들을 이끌고 단기(單騎)로 요하(遼河)를 건너 고려 땅으로 들어왔는데, 그가 길을 떠난 지 며칠 만에 적이 대령을 함락시켰다. 주상이 그와는 단본당에서 종유(從遊)한 인연이 있었으므로 사람을 잇따라 보내 영접하고 위로하였으며, 서로 만나 보고 나서는 예우를 하며 크게 은혜를 베풀어 부원(富原)에 전토(田土)를 하사하는 한편 군(君)에 봉해 주고 부(府)를 열게 하였는데, 몇 년이 지나서 병이 들어 죽고 말았다.
그의 아우인 공문(公文)과 공소(公素)가 형의 문고(文藁)가 흩어져 없어진 것을 애석하게 여긴 나머지 기록해 둘 만한 시를 붓으로 적어서 두 질(帙)을 만들었는데, 신축년의 병화를 당해 피난하다가 그것마저 또 분실하고 말았다. 그런데 지금 진주 판관(晉州判官)인 김군 자빈(金君子贇)이 그중 한 질을 잿더미 속에서 찾아내어 설씨(偰氏)에게 돌려주었다.
설 씨는 회홀(回鶻)의 대족(大族)으로, 중국에 들어와서 명가(名家)를 이루었다. 그리하여 등제(登第)한 사람을 아홉 명이나 배출하는 가운데, 시서(詩書)와 예의(禮義)에 흠뻑 몸을 적시면서 몇 세대를 내려오다가, 공원의 시대에 이르러서 그 영화(英華)를 한 몸에 축적하고는 한 번 떨쳐 일어나 그 실력을 유감없이 발휘하였던 것이었다. 그래서 그의 글을 보아도 눈부시도록 뛰어나서 백용(伯庸)이나 정심(廷心)과도 곧장 우열을 다툴 정도가 되었으니, 후세에 전할 수 있는 작품인 것이 분명하다고 하겠다.
그런데 그 몸이 아직 죽기도 전에 원고를 이미 잃어버렸고, 잃어버린 것을 다시 기록했다가 또다시 잃어버려서 거의 없어지는 지경에 이르고 말았으니, 이 또한 생각하면 슬픈 일이다. 지금 이 문고를 살펴보건대, 모두 소싯적에 지은 것들인데도 노련한 기상이 창연(蒼然)히 우러나고 있으니, 장년 시절에 지은 것들은 과연 어떠할지 대개 상상할 수 있는 일이다.
그의 아들인 도관 총랑(都官摠郞) 천우(天祐)가 나에게 말하기를, “이 문고가 있게 된 것은 바로 김후(金侯)가 힘을 써 준 덕분입니다. 그런데 나의 형인 천민(天民)이 다행히도 그곳의 장관이 되었으므로, 장차 판각(板刻)을 해서 진주(晉州)의 향학(鄕學)에다 보관하려 하니, 이에 대한 사연을 서문으로 써 주셨으면 합니다.” 하였다. 이에 내가 공의 대략적인 출처(出處)를 약간 서술한 다음에, 이 문고 한 질이 다행히 전해질 수 있게 된 사연을 끝에다 덧붙임으로써, 뒷날 계속해서 동인(東人)의 글을 분류하여 편찬하려는 사람들이 참고할 수 있도록 하는 바이다.
[주D-001]상도(上都) : 연경인 대도(大都)에 상대되는 말로 난하(灤河)의 개평부(開平府)를 가리킨다.
[주D-002]신축년의 병화 : 홍 건적(紅巾賊)의 재침(再侵)으로 개경(開京)이 함락된 것을 말한다. 신축년 즉 공민왕 10년(1361) 10월에 사유(沙劉) 등이 이끈 10만의 홍건적이 침입하자, 왕이 광주(廣州)를 거쳐 복주(福州) 즉 안동(安東)으로 파천(播遷)한 가운데 11월 24일에는 적이 개경으로 쳐들어왔는데, 적이 2개월 남짓 그곳에 진을 치고 머무는 동안 남자와 여자를 함부로 죽여서 지져 먹는가 하면 임신한 여자들의 유방을 베어서 구워 먹는 등 잔학한 짓을 멋대로 했다는 기록이 《동사강목(東史綱目)》 14 하(下) 공민왕 10년 11월 조에 나온다.
유사암(柳思菴)의 시권(詩卷)에 기증한 서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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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자에게는 종신토록 즐길 낙이 있으니, 하루아침의 즐거움 같은 것은 자신의 낙이 되기에 부족하다고 하겠다. 무적(無適)하고 무막(無莫)하는 가운데 동정(動靜)과 부앙(俯仰)의 사이에서 조금도 부끄러워할[怍與愧] 여지가 없게 된다면, 이른바 나의 낙이라고 하는 것이 그 속에 담연(湛然)히 존재하게 되는 것이다.
사 생(死生)과 수요(壽夭)는 하늘에 속한 일이요, 길흉(吉凶)과 영욕(榮辱)은 사람 사이에 속한 일이니, 이것은 모두 내가 어떻게 할 수 없는 것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이 때문에 기뻐하고 두려워한다면, 이것은 정욕(情欲)이 나를 이기는 것이다. 정욕이 나를 이기는 현상이 계속되면, 내 속의 천성(天性)이 없어지기 시작할 텐데, 이렇게 하고서도 “나는 종신토록 즐길 낙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면, 나는 그 말을 결코 믿지 않을 것이다.
관작(官爵)은 나를 귀하게 해 주는 것이요, 봉록(俸祿)은 나를 부유하게 해 주는 것이지만, 나를 부유하게 해 주는 자는 반드시 나를 빈궁하게 만들 수도 있는 것이요, 나를 귀하게 해 주는 자는 반드시 나를 천하게 만들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감히 그런 명을 듣지 않을 수 없는 것은, 그렇게 할 수 있는 권한이 상대방에게 있고 나에게는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본래 나의 소유가 아닌데도 하루아침에 나에게 주어질 경우, 그것이 비록 더할 수 없이 영광스러운 부귀(富貴)라 할지라도 나로서는 기뻐할 이유가 하나도 없는 것이다. 이런 것은 기뻐해서도 오히려 안 되는 것인데, 더군다나 종신토록 즐길 낙으로 삼을 수 있겠는가.
이른바 종신토록 즐길 낙이라고 하는 것은 자기 자신만이 알고 있을 뿐이라서, 설령 아버지라도 자식에게 줄 수가 없는 것이요, 남편이라도 아내에게서 뺏을 수가 없는 것이다. 이 세상에서 지극히 친근하고 지극히 밀접한 관계 중에서도 부자(父子)와 부부(夫婦)보다 앞서는 것은 없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대방에게 줄 수도 없고 상대방에게서 뺏을 수도 없다고 한다면, 거기에는 그럴 만한 이유가 반드시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이러한 도리를 머릿속으로 이해할 뿐만 아니라 또 몸으로 반드시 실천해 나간다면, 밖에서 오는 환란 같은 것은 여기에서 없어지게 될 것이 분명하다.
사암(思菴 유숙(柳淑)) 선생은 대체로 이런 경지에 가까이 다다르신 분이라고 할 것이다. 경사(京師)에 머무른 11년 동안에는 같은 반열에 있는 사람들이 그의 높은 행실을 추앙하였고, 국정(國政)에 참여한 14년 동안에는 같은 조정에 있는 사람들이 그의 넓은 도량에 심복하였다. 그리하여 포의(布衣)로부터 시작해서 정승의 지위에까지 올랐고 보면 이 또한 성대한 일이라고 할 수 있는데, 선생 자신은 털끝만큼도 자득(自得)하는 뜻을 말이나 행동 사이에서 보인 적이 없었다. 거처하는 곳을 보거나 음식과 복장을 보거나 더불어 노니는 자들을 보면, 모두 한 세상의 부귀한 자라고 일컬어질 만도 하였는데, 정작 그의 모습을 보면 포의의 신분으로 있을 때와 다름이 없었으니, 하루아침의 즐거움을 가지고 종신토록 즐길 낙으로 삼지 않는 분임이 분명하다고 하겠다.
10여 년 간에 걸쳐 드높이 현달해서 빛나게 영화를 누리던 사람들을 보더라도 끝까지 자신의 몸을 제대로 보전한 경우는 대개 드물다고 할 것인데, 선생은 조용히 진퇴를 하면서 관작과 봉록이 있고 없는 것을 영욕(榮辱)으로 여기지 않았다. 그리하여 옛적에 묘당(廟堂)에 있을 적에는 그 도(道)가 행해지는 것을 즐거워하였고, 지금 전원(田園)에 돌아와서는 자신의 몸이 온전한 것을 즐기고 있으니, 그러고 보면 자신의 몸과 도를 모두 제대로 보전한 분이라고 하겠다. 선생의 입장에서 돌이켜 생각하면 지나간 옛일이 마치 구름이 떠가고 물이 흘러가 듯 이미 자취도 없이 사라졌겠지만, 그래도 임금을 사랑하는 마음과 종신토록 즐길 자신의 낙만큼은 마음속에서 잠시도 떨어져 있지 않을 것이다. 만약 잠시라도 떨어질 수 있는 것이라면, 그것이 어찌 내가 이른바 종신토록 즐길 낙이 될 수 있겠는가.
성균 사예(成均司藝) 강자야(康子野 강호문(康好文))는 선생의 문인이다. 장차 제공(諸公)의 시편(詩篇)을 얻어다가 선생의 은거(隱居)에 도움이 되게 하려 하면서, 내가 선생을 깊이 알고 있다는 이유로 나에게 서문을 부탁해 왔기에, 내가 대체적인 내용을 약간 말하게 되었다. 장주(莊周)가 말하지 않았던가. “텅 빈 골짜기에 숨어서 사는 사람은 저벅저벅 걸어오는 사람의 발자국 소리만 들어도 기뻐하는 법이다.[逃空虛者 聞人足音跫然而喜]”라고. 그런데 하물며 우리의 이 글이야 더 말해 무엇하겠는가. 그러고 보면 선생도 무릎을 치면서 이렇게 탄식할 것이 분명하다. “서로 알아주는 사람이 세상에 없어서는 안 되는 것이 이와 같다.”라고.
[주D-001]무적(無適)하고 …… 된다면 : 선 입견이나 감정에 치우치지 않고 중용(中庸)의 도리에 따라 올바른 의리를 행해 나가기 때문에, 어떤 일을 하거나 부끄러워할 일이 없게 되는 것을 말한다. 《논어(論語)》 이인(里仁)에 “군자는 이 세상에서 어떤 일을 꼭 해야 된다고 고집을 부리거나 어떤 일을 해서는 안 된다는 주관적인 편견을 배격하고, 오직 대의(大義)에 입각해서 행동한다.[君子之於天下也 無適也 無莫也 義之與比]”는 공자의 말이 나오고, 《맹자(孟子)》 진심 상(盡心上)에 “하늘을 우러러보아도 부끄러움이 없고, 땅을 굽어보아도 부끄러움이 없는 이것이 군자의 두 번째 낙이다.[仰不愧於天 俯不怍於人 二樂也]”라는 말이 나온다.
[주D-002]텅 빈 …… 법이다 : 《장자(莊子)》 서무귀(徐无鬼)에 나온다.
양광도 안렴사(楊廣道按廉使)로 나가는 한 시사(韓侍史) 홍도(弘道) 를 전송한 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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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어렸을 적에 산속에서 글 읽는 것을 좋아하였는데, 옛날에 노닐던 곳을 지금도 하나하나 셀 수가 있다. 그런데 그중에서도 금곡(金谷 배천(白川)의 속역(屬驛))에서 밥을 빌어먹던 일이 특히 잊혀지지를 않는다.
지 금 사헌부(司憲府)의 한 시사(韓侍史)와 민부(民部 호조(戶曹))의 장 의랑(張議郞) 그리고 나, 이렇게 셋이서 책 보따리를 짊어지고 바다 속의 교동(喬桐) 화개산(華蓋山)으로 들어갔는데, 그곳이 외따로 떨어져서 인적이 드문 것을 기꺼워하여 오래 머물 계책을 세워 보려고 하였으나, 산속에 워낙 먹을 것이 없어서 더 이상 머무를 수가 없기에 장차 서울로 돌아가려고 하였다. 그런데 배를 타고 오면서 서해도(西海道)의 여러 산들을 바라보다가 문득 “평주(平州 평산(平山)의 옛 이름) 남쪽에 모란산(牡丹山)이 있는데, 그곳도 옛사람들이 독서하던 곳이니 한 번 가 보는 것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하여 마침내 의랑(議郞)에게 돌아가서 두 집안을 보살펴 달라고 부탁을 하고는, 뱃사람에게 강청해서 우리 두 사람이 서쪽 해안에 내리게 되었다.
그러고 나서 갈대밭 사이를 6, 7리 정도 헤쳐 나가는 사이에, 해도 어느덧 지려 하고 발의 힘도 다 빠져서 더 이상 걸어갈 수가 없기에, 금곡의 역사(驛舍)에 들러서 주인에게 밥을 빌어먹을 수밖에 없었으니, 그 당시에 완전히 녹초가 된 채 구걸을 했던 정상을 생각하면 그저 웃음이 나올 뿐이다. 하지만 그때는 그래도 우리 맹자(孟子)의 호연지기(浩然之氣)에 대한 말씀이 마음속에 뿌리박고 있어서 숨길 수 없는 점이 있었기 때문에, 주인도 그런 기색을 알아채고는 우리를 후하게 대접했던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그리고 이와 함께 옛날의 군자들은 동심 인성(動心忍性)을 하면서, 모두 하루아침에 재난을 당해 고생한 경험을 가지고 종신토록 유익한 도움이 되게 하였는데, 우리는 과연 어떻게 자처했던가 하고 다시 돌아보게도 되는 것이다.
우리가 어찌 당초에 고거사마(高車駟馬)와 몽몌 집구(蒙袂輯屨) 따위를 가지고 영욕으로 여기기나 했었던가. 처음에 나는 시사(侍史)와 함께 신사년 진사과(進士科)에 입격(入格)하였고, 계사년에 또 그와 함께 대과(大科)에 급제(及第)하였다. 그는 나보다 일곱 살이나 많은 데다가, 학문과 문장에 있어서도 내가 미칠 수 있는 바가 아니었으며, 그의 절조로 말하면 또 승상(丞相)이나 봉후(封侯)와 같은 것도 전혀 개의하지 않은 채, 오직 곡학아세(曲學阿世)하는 것을 비루하게 여기고 있을 따름이었다. 내가 그래서 분수에 넘치는 벼슬자리를 요행히 차지하게 된 이래로 미상불 부끄럽게 여기고 있었는데, 그는 여전히 말단 관직을 배회하면서 장차 그렇게 몸을 마치려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였다. 그런데 지금에 와서는 호기 있게 대각(臺閣)으로 들어가서 시사(侍史)의 신분이 되었으니, 이쯤 되면 또한 때를 얻었다고도 할 만하다. 그런데 옛날 역사(驛舍)에서 밥을 구걸하던 날과 비교해 보면 처지가 또한 완전히 달라졌다고 할 것인데, 우리 두 사람이 그때부터 지켜 오던 그 신념 역시 변한 점이 있는지 없는지 궁금하기도 하다.
대저 선비가 조정에 일단 몸을 담게 된 이상에는, 지위의 높고 낮음이나 봉록의 후하고 박함을 따질 것 없이 자신의 뜻을 행할 수만 있으면 족하다고 할 것이다. 시사의 직책으로 말하면 탄핵을 주도하면서 위로는 군상(君上)의 잘잘못을 간쟁하고 아래로는 재상(宰相)의 옳고 그름을 힐책하니, 백관들 모두가 마치 초목이 바람에 쏠리듯 하면서 감히 위로 쳐다보지도 못하는 지위라고 하겠다. 그리고 안렴사(按廉使) 역시 이와 마찬가지로 중하기 그지없는 직책이라고 할 것이다. 임금을 대신하여 산천(山川)에 제사를 지내고 민간의 풍속을 관찰함은 물론이요 상을 내리고 벌을 주는 전권(專權)을 행사하기 때문에, 수령들이 더욱 각별하게 떠받들어 모시면서 사소한 음식 한 가지라도 반드시 좋아할지 싫어할지를 살펴 감히 조금이라도 뜻에 어긋나지 않게 하려고 애쓰는 바이다. 이런 환경인데도 불구하고 자신의 뜻을 행할 수 없다고 한다면, 나는 결코 이를 믿지 않을 것이다.
시사가 이런 두 가지 중책을 한 몸에 겸하게 되었고 보면, 그동안 스스로 힘써 온 점이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 그래서 조정의 사대부들이 시를 지어 노래 부르면서 그의 떠나는 길을 아름답게 장식해 주려고 한 것인데, 시사는 말하기를, “서문만은 반드시 목은이 써야만 내 뜻에 맞게 될 것이다.”라고 하였다. 내가 글 짓는 것을 좋아하지 않을뿐더러 실력이 또 졸렬하다는 것은 시사도 잘 알고 있을 텐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꼭 나의 글을 원하는 것은 내가 아첨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옛날에 함께 노닐었던 일을 서술하여, 우리가 배운 것을 저버리지 말고 노력하자는 뜻으로 이렇게 말한 것이다.
[주D-001]동심 인성(動心忍性) : 《맹자》 고자 하(告子下)에 “하늘이 어떤 사람에게 큰 사명을 내리려 할 때에는……그의 마음을 뒤흔들어 놓고 그의 성질을 굳게 참고 버티도록 하여[動心忍性], 그동안 잘하지 못했던 일을 더욱 잘하게끔 해 준다.”라는 말이 나온다.
[주D-002]고거사마(高車駟馬)와 몽몌 집구(蒙袂輯屨) : 현 달하여 높은 지위에 오르는 것과 끼니도 제대로 잇지 못한 채 빈궁하게 사는 것을 뜻하는 말이다. 고거사마는 네 마리의 말[駟馬]이 끄는 높은 수레라는 뜻으로 고관(高官)을 가리키고, 몽몌 집구는 《예기(禮記)》 단궁 하(檀弓下)의 “굶주린 사람 하나가 남이 알아보지 못하게 소매로 얼굴을 가리고[蒙袂] 피곤해서 발을 절뚝거리면서[輯屨] 밥을 먹여 주는 곳으로 비틀비틀 걸어왔다.”라는 말에서 나온 것이다.
경상도 안렴사(慶尙道按廉使)로 부임하는 송 도관(宋都官) 명의(明誼) 을 전송한 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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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성을 길러 주는 사람으로는 장자(長者)만한 이가 없다. 조정에 있는 사람들에 대해서야 내가 어떻게 흠잡을 수가 없다고 하겠지만, 사절(使節)을 받들고 가서 사방을 순시(巡視)하는 사람이야말로 장자를 엄하게 가려 뽑아서 보내야만 할 것이다. 그는 풍속의 미악(美惡)을 살펴서 표창하고 규탄함은 물론이요 수령의 현부(賢否)를 심사해서 권장하고 징계를 행할 수가 있으니, 그러고 보면 형벌을 내리고 상을 주는 권한이 그의 손 안에 들어 있다고 하겠다. 그러니 형벌을 내리고 상을 주는 권한을 어떻게 하루라도 자격이 없는 사람에게 내줄 수가 있겠는가.
국가에서 경기(京畿) 바깥으로 팔도(八道)를 세우고는, 부(府)와 주(州)와 군(郡)과 현(縣)이 마치 바둑판처럼 그 주위를 에워싸게 하였다. 그리고 매년 봄가을이 되면 조신(朝臣) 8인을 가려 뽑아 팔도에 나누어 보냈는데, 그 사람이 이름만을 좋아하다 보면 백성들이 으레 불행하게 되고, 그 사람이 관대하게 포용하는 정사를 펼치게 되면 백성들이 그 은택을 입게 마련이었으므로, 조정에서도 그러한 사실을 잘 알고서 선발해 보내는 일을 매번 중하게 여겼다. 그래서 그 직책에 합당한 사람이 아니면 여기에 선발되는 경우가 매우 드물었다.
과거에 내가 양부(兩府)에 참여하여 이 선발을 함께 의논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는데, 도관(都官)인 송군(宋君)의 이름도 미상불 그 속에 들어 있곤 하였다. 그런데 도관이 수상(首相)인 태재공(泰齋公)의 인친(姻親)이 되는 까닭에 실제로 쓰이지 못했으니, 이는 혐의를 피하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그를 천거하는 자들이 날로 불어나는 바람에 형세상 더 이상 막을 수가 없게 되었으니, 이는 사적(私的)인 관계가 공론을 이기지 못하는 하나의 증거라고도 하겠다.
도관은 근후(謹厚)해서 장자(長者)의 풍도를 갖춘 데다가 업무를 처리하는 능력도 특별히 뛰어난 점이 있었다. 그런데 경상도로 말하면 옛날 신라(新羅)의 전역(全域)을 차지한 곳으로서, 산천의 풍기(風氣)가 오래도록 쌓여 새어 나가지 않은 가운데 백성들에게 전해진 선한 풍습이 아직까지도 보존되어 오고 있는 터이다. 따라서 다스릴 지역이 넓고 처리할 업무가 많다고는 하더라도 백성을 부리기가 쉬워서 일을 쉽게 수습할 수가 있으니, 이런 점에서는 어떤 다른 도(道)도 따라올 수가 없다 하겠다.
도관이 오래도록 방백(方伯)으로 쓰임을 받지 못하다가 이번에 쓰이게 되면서 이 도를 맡게 되었으므로 나의 기쁨이 더욱 크기만 하다. 마음대로 휘젓고 다니는 큰 물고기에게는 큰 바다가 안성맞춤이라고 하겠지만, 재단(裁斷)하는 솜씨가 형편없는 자에게는 한 필의 비단도 아까운 법이다. 그러고 보면 이 사람에 이 도야말로 서로 걸맞다고 해야 하지 않겠는가.
그 래서 나만 혼자서 크게 기뻐할 뿐 아니라 이 시대의 사대부들도 기뻐하지 않는 사람이 없기 때문에, 그가 떠나는 것을 노래로 지어서 찬미하는 이들이 마치 물이 밀려오듯 끝없이 이어지고 있는 형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맨 첫머리를 장식하는 서문(序文)만은 꼭 졸렬한 나의 글을 받겠다고 하는 것이 도관의 생각인데, 도관이 나와는 안면이 없는 관계로 대신 자신의 뜻을 전달케 하였으니, 나에게 전달해 준 사람은 바로 나의 동료인 김군 백은(金君伯誾)이었다.
[주D-001]조정에 …… 하겠지만 : 《맹 자》 공손추 하(公孫丑下)에 “조정에는 관작만한 것이 없고 백성을 기르는 데에는 덕만한 것이 없다.[朝廷莫如爵 長民莫如德]”는 말이 나온다. 또 《논어》 태백(泰伯)에 “우 임금님에 대해서는 내가 어떻게 흠잡을 데가 없다.[禹吾無間然]”는 공자의 말이 나오는데, 본문에서는 전적으로 칭찬하는 말 대신에 약간 풍자가 섞여 있다.
[주D-002]마음대로 …… 법이다 : 도 관처럼 그릇이 커야만 경상도와 같은 큰 지방을 다스릴 수 있지 설익은 솜씨의 소유자에게는 작은 고을 하나라도 맡길 수가 없다는 말이다. 한(漢)나라 왕포(王褒)의 〈성주득현신송(聖主得賢臣頌)〉에 “큰 물고기가 큰 바다를 마음대로 휘젓고 다니는 것처럼 시원스럽다.[沛乎若巨魚縱大壑]”는 말이 나오고, 춘추 시대 정(鄭)나라 자산(子産)이 대관(大官)과 대읍(大邑)을 옷으로 비유하면서, 옷을 재단하는 솜씨가 서투른 자에게 아름다운 비단을 내주면 안 되는 것처럼 무능한 자에게 고을을 맡기면 안 된다고 말한 고사가 전한다. 《春秋左氏傳襄公31年》
강릉도 안렴사(江陵道按廉使) 김 선생을 전송한 시의 서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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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 늘과 땅이 생긴 이래로 청명(淸明)한 기운과 탁란(濁亂)한 기운이 서로 그 사이에서 쇠했다 성했다 하는 현상을 보이고 있으니, 비록 호걸스러운 인사라 할지라도 ‘홀로 우뚝 서서 변화를 받지 않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고 하겠다. 그렇기 때문에 다행히 청명한 기운이 성한 때에 태어나서 태평 시대를 만나게 될 경우에는, 살아서는 성현(聖賢)이 되고 죽어서는 밝은 신명이 되어 당세에 명성이 부합됨은 물론이요 후세에도 끝없는 은택을 끼쳐 주게 되겠지만, 불행히도 탁란한 기운이 성한 때에 태어나서 쇠퇴의 길로 접어든 말세(末世)와 맞닥뜨리게 될 경우에는, 걸핏하면 화(禍)만 뒤따를 뿐이요 얻는 것보다는 잃는 것이 많게 된 채 그저 목숨만 유지하다가 허망하게 죽고 말 따름이니, 이 또한 너무나도 애처로운 일이 아니겠는가. 내가 이런 생각을 해 온 지가 오래되었다고 하겠다.
그동안 나와 뜻을 같이하는 자는 겨우 몇 사람에 지나지 않았는데, 영가(永嘉 안동(安東)의 옛 이름)의 김씨(金氏) 형제도 그중의 하나였으니, 백씨(伯氏)는 자(字)가 경지(敬之 김구용(金九容))요 숙씨(叔氏)는 자가 중현(仲賢 김제안(金齊顔))이었다. 두 분 모두 총명하여 뛰어난 재질을 지니고 있는 것은 똑같았으나, 다만 숙씨의 경우로 말하면 역적 신돈(辛旽)이 사납게 날뛰는 날을 당하여 영민하고 예리한 그 기질을 스스로 억누르지 못하는 점이 있었다. 그리하여 이따금씩 그 기질을 발휘하면서 분연히 일어나 빈손으로 맹수를 때려 잡고 맨주먹으로 날카로운 칼날에 맞서려 하다가 끝내 화를 당한 나머지 그만 목숨을 잃고 말았다.
반면에 경지(敬之)는 편안한 마음으로 조용히 거하면서 외물(外物)과 갈등을 빚는 일이 없이 수사(洙泗 공자의 고향으로 유가(儒家)를 뜻함)의 가르침을 깊이 음미하였는데, 그 강령(綱領)과 조목(條目)이 모두 《대학(大學)》 속에 들어 있다고 생각하고는 아침저녁으로 반복하여 공부하면서 빈틈없이 몸에 익혔다. 그리하여 사변(事變)에 응수할 적에도 한결같이 이에 입각해서 자신을 드러낸 결과, 이른바 자겸(自慊)이라고 하는 것에 대해서 전혀 유감이 없게 되었으니, 내 속에 들어 있는 기운을 배양함으로써 저 탁란한 기운에 녹아나지 않게 된 것을 알 수 있다 하겠다.
그 러다가 지금에 와서는 정치를 개혁하여 조정이 엄숙하고 경건해진 가운데 온 나라 사람들이 모두 떨쳐 일어나 생기를 띠게 되었는데, 경지가 바로 이런 때에 맨 먼저 조정에 선발되어 강릉도(江陵道)를 안찰하는 책임을 맡고서 한 도를 전제(專制)하게 되었으니, 이는 그야말로 선비의 크나큰 영광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강릉도로 말하면 백성이 순박하고 업무가 간소한 데다 기이하고 그윽한 경치가 또 빼어나서 천하의 으뜸이 되는 까닭에, 안렴사가 되기를 희망하는 사람들은 모두 이곳을 얻어서 즐겨 봤으면 하고 바라고 있는 터이다. 그런데 경지 자신은 이를 평범한 일처럼 간주하기만 할 뿐 근심스러운 기색도 용모에 나타내지 않고 기쁜 표정도 안색에 드러내지 않고 있으니, 이것이 이른바 ‘홀로 우뚝 서서 변화를 받지 않는’ 경우와 가까운 것이 아니겠는가.
조 정의 사대부들이 그의 부임을 축하하며 노래 부르고 있지만, 그들 모두가 경지의 마음속 경지가 이러하다는 것을 안다고는 할 수 없겠기에, 여기에다 내가 알고 있는 바를 서술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이 기회에 덧붙여서 일러 둘 말이 또 하나 있다. 상이 바야흐로 학교를 일으켜서 교화(敎化)를 앞세우고 형명(刑名)을 뒤로 하고 있는데도 유술(儒術)의 효과가 환하게 드러나지 않은 지가 오래되었으므로, 세상에서는 오히려 이를 두고 오활(迂闊)하다면서 비방하는 일을 그치지 않고 있는 형편이다. 그런데 선생은 이미 《대학》에 밝다는 이름을 얻은 분이요, 게다가 성균관(成均館)의 교관(敎官)을 거쳐서 안렴사가 된 것이 또 선생으로부터 비롯되었고 보면, 선생이야말로 더욱 힘을 기울여야만 할 것이다. 나 역시 앞으로 《대학》의 실효(實效)가 어떻게 나타날지 눈을 씻고서 기다려 보려 한다.
[주D-001]자겸(自慊) : 자 신의 마음에 비추어 볼 때 부끄러움이 없이 만족스럽게 된 것을 말한다. 《대학장구(大學章句)》 성의장(誠意章)에 “뜻을 참되게 한다는 것은 자신을 속이지 않는다는 말이다. 말하자면 악취(惡臭)를 싫어하고 호색(好色)을 좋아하는 것처럼 해야 하니, 이것을 일러 자겸이라고 한다.”라고 되어 있다.
어버이를 찾아뵈러 가는 박 중서(朴中書)를 전송한 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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붕 우 관계가 형세 때문에 맺어진 경우라면 서로 안다고 해야 그저 안면밖에는 없을 것이다. 따라서 마음으로 합쳐져야만 의로운 교우(交友) 관계가 성립된다고 할 것이니, 그런 뒤에야 서로 아는 것도 비로소 지극해질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런데 나와 박 중서의 관계를 뒤돌아본다면, 서로들 아는 것이 지극하다고 해야 할 것인가, 아니면 아직도 미흡한 점이 있다고 해야 할 것인가.
중 서군이 조정에서 배척을 당하고 나서 대부인(大夫人)을 찾아뵈러 떠날 즈음에 나에게 글을 써 달라고 부탁하였다. 이에 내가 광범위하게 다른 말을 끄집어내어 이야기할 겨를이 없기에, 우선 군에 대해서 아는 것을 가지고 질정해 보기로 하였다.
중서군은 젊은 나이에 조정에 몸을 담고서 화려한 관직과 시종(侍從)의 직책을 차례로 거쳤으므로 사람들이 영광스럽게 여겼는데, 정작 군 자신은 이를 영예로 여기지 않았다. 그리고 조정에서 물러나서는 아침저녁으로 부모님 모시는 데 정성을 다하고 형제간에 우애하고 공경하였으므로 집안에 항상 화기(和氣)가 감돌아서 참으로 볼 만한 점이 있었는데도, 정작 군 자신은 늘상 뭔가 부족한 듯이 느끼기만 하였다.
중서군이 조정에 있을 때에는, 자신의 직무를 극진하게 수행할 것만을 생각하여 마땅히 해야 할 일이 있으면 하지 않는 일이 없었다. 그리하여 아침에 출근하고 저녁에 숙직을 하는 모든 일에 있어서 흐트러지는 모습을 보이지 않고 갈수록 성실한 모습을 보여 주기만 하였다. 그러니 자신이 쓰여지건 버려지건 승진하든 쫓겨나든 간에, 그것이 자기와 무슨 상관이 있어서 영욕(榮辱)으로 삼을 가치가 있다고 생각했겠는가. 이것이 바로 중서군의 마음이라 할 것이다.
그리고 중서군이 집에 있을 때에는, 부친을 깍듯이 모시면서 애모하고 공경하는 일을 모두 극진히 하였다. 하지만 그런 가운데에서도 자당(慈堂)이 멀리 향리에 떨어져 계신 것을 생각하노라면, 부모님을 한 집 안에 같이 모시고서 형제가 서로 그 아래에서 아이처럼 재롱을 부리고 싶은 생각이 어찌 들지 않았겠는가. 이것이 바로 중서군의 마음이라 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 배척을 당했으면서도 평소와 다름없이 화락한 기색을 잃지 않고 성내는 빛을 조금도 보이지 않으면서, 오직 부모님을 찾아뵙는 하나의 일만을 가지고서 붕우에게 고하고 부형(父兄)과 상의하고 있는 것이다. 이를 통해서 우리는 중서군의 행동이 ‘한 번 떠나가면 하루종일 갈 수 있는 데까지 가는’ 그런 졸장부의 행태와는 전혀 다르다는 것과, 평소에 모친을 사모하는 그 마음이 너무도 절실했기 때문에 찾아뵐 수 있는 틈이 생긴 것을 기뻐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하겠다.
어 버이를 섬기거나 임금을 섬기거나 그 도리는 똑같은 것이다. 자식이 부모에 대해서 그 도리를 제대로 다하여 극진히 섬기는 것과, 신하가 임금에 대하여 그 도리를 제대로 다하여 극진히 섬기는 것, 이것이 바로 효(孝)와 충(忠)의 개념이라고 할 것인데, 정자(程子)가 ‘자기를 모두 바치는 것’으로 충을 해석한 뒤에 사람들이 비로소 효라는 것도 충과 같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뿐이다.
이 렇게 본다면 신하가 되어서 자기를 모두 바치는 그것은 바로 조정에 있어서의 효라 할 것이요, 자식이 되어서 자기를 모두 바치는 그것은 바로 집안에 있어서의 충이라 할 것이다. 따라서 벼슬할 때에는 기뻐했다가 그만둘 때에는 성을 낸다면 이것은 임금에게 자기를 모두 바치지 못하는 것임이 분명하고, 가까이 있을 때에는 친근하게 굴다가 멀리 있을 때에는 잊어버린다면 이것은 어버이에게 자기를 모두 바치지 못하는 것임이 분명하다. 효라는 것은 멀고 가까운 데에 따라 달라지지 않는 것이요, 충이라는 것은 벼슬하고 그만두는 데에 따라 바뀌지 않는 것인데, 자기를 모두 바치는 자가 아니라면 어떻게 이것을 제대로 해낼 수가 있겠는가.
이쯤 이야기했고 보면 내가 중서군을 아는 것이 지극하다고 할 것인가, 아니면 그렇지 않다고 할 것인가. 아마도 중서군이 갔다가 돌아오면 자기를 알아준다고 나에게 복명(復命)할 것도 같은데, 뒷날에 가서도 중서군이 나를 저버리지 않는다면, 나를 지기(知己)로 알아주는 것이 또 의심할 여지가 없다고 할 것이니, 그때 가서는 내가 그에게 서문을 청해 볼까 한다.
[주D-001]한 번 …… 행태 : 《맹 자》 공손추 하(公孫丑下)에 “내가 어찌 그런 졸장부처럼 행동할 수가 있겠는가. 임금에게 바른말을 하다가 받아 주지 않으면 성을 내어 잔뜩 노기(怒氣)를 띠고서, 한 번 떠나가면 하루종일 갈 수 있는 데까지 죽어라고 달려가서 잠을 잘 수가 있겠는가.”라는 말이 나온다.
서 도사(徐道士)가 사신으로 왔다가 돌아갈 때 전송한 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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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무(洪武) 3년(1370, 공민왕19) 4월에, 조천궁(朝天宮)의 도사(道士)인 옥암(玉巖)이라는 자가 향폐(香幣 제사에 사용하는 향과 폐백)와 축책(祝冊 제왕의 제문(祭文))을 받들고, 금릉(金陵)에서 바다를 건너 왕경(王京)에 도착하였다. 이에 교외에서 영접하고 관소(館所)에서 위로하는 등 일정한 격식에 따라 모두 근실하게 돌보아 주었으며, 예부(禮部)에 명하여 제사에 필요한 물품을 공급해 주도록 하였다. 그리고 동지 밀직(同知密直)인 이공 성림(李公成林)에게 그 일을 감독하도록 하였는데, 나도 거기에 참여하였다.
그해 5월 정유일에 백관이 배석한 가운데, 도성 남쪽에서 산과 물의 신명(神明)들에게 합제(合祭)를 올렸다. 그러자 그 이튿날에 옥암이 매우 기뻐하면서 빨리 돌아가 복명(復命)하려고 예성강(禮成江) 항구에서 순풍이 불어오기를 기다렸다. 그러던 중에 얼마 지나지 않아서 왕이 이르기를, “도사가 왔을 때 내가 몸이 좀 불편해서 그와 함께 예(禮)를 행하지 못했으므로 마음속으로 미안하게 느낀다.” 하고는, 그를 불러 위문하면서 한참 동안 조용히 이야기하였다.
그런데 옥암이 이미 나와는 제사를 올리는 과정에서 안면을 익혀 왔던 데다가, 또 내가 유자(儒者)의 관(冠)을 쓰고 있는 것을 보고는 시를 써 달라고 매우 부지런히 요청해 왔다. 그리고 이와 함께 자신의 보따리를 풀어 대창(大倉)에서 얻은 제자(諸子)의 시를 꺼내 보여 주었으므로, 내가 끝까지 다 읽어 볼 수가 있었다. 그러고 보면 옥암은 참으로 시를 좋아하는 자라고 할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이 사람들에게서 어떻게 이런 시들을 쉽게 얻을 수가 있었겠는가. 이에 내가 여러 벗들에게 시를 청하는 한편, 그 첫머리에다 대략 다음과 같은 글을 써넣게 되었다.
도가(道家)의 학파에 대해서는 사마천(司馬遷)이 지은 《사기(史記)》의 기록을 통해서 알아볼 수가 있다. 노씨(老氏 노자(老子))가 주(周)나라의 주하사(柱下史)로 있다가 때를 만나지 못하자 오천언(五千言 《도덕경(道德經)》)의 글을 남겼다. 여기에서 두 번 전해져 개공(蓋公)에 이르게 되었는데, 이때 조참(曹參)이 그를 문제(文帝)에게 천거하여 한(漢)나라에 형벌이 필요 없는 시대를 열게 하였으니, 비록 우리 유자(儒者)가 천하에 쓰인다 하더라도 모두 이처럼 아름다운 효과를 거둔다고는 꼭 장담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가령 수록(授籙)과 배장(拜章)이나 부주(符呪)와 환단(還丹) 같은 술법으로 말하면, 거기에 각각 그럴듯한 설명이 붙어 있기는 하지만 모두 허무맹랑하고 괴상망측할 뿐이어서 노씨(老氏)가 말한 내용과는 전혀 딴판이라고 하겠다. 따라서 그의 제자가 된 사람들은 마땅히 그 스승의 도를 밝히는 데에 힘을 기울여야만 할 것이다.
지금 천자(天子)께서는 해와 달처럼 영명(英明)하시기 때문에, 인심(人心)의 진위(眞僞)와 학술의 사정(邪正)을 빠짐없이 비춰 보고 계신다. 그리하여 특히 현교(玄敎 도교(道敎))의 청정(淸淨)한 도에 깊이 계합(契合)하여, 천하를 편안하게 통일시키려 하고 계시니, 그 웅장한 규모와 원대한 계획이야말로 한(漢)나라 때의 그것을 훨씬 멀리 능가하는 것이라고 하겠다.
그 런데 이런 때에 옥암이 조천궁(朝天宮)을 나와 만리 밖 외국에 와서 제사를 대신 올리게 된 사실만 보더라도, 그 사람됨이 얼마나 훌륭한지를 알 수 있다고 할 것이다. 내가 그를 살펴보건대, 그는 정신이 완전하고 신념이 확고한 데다 말이 간결하면서도 그 뜻이 명백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의 참된 본성을 보양(葆養)하는 것을 중히 여기는 가운데 재계(齋戒)하고 목욕(沐浴)하여 그 덕을 신령스럽고 밝게 하는 경지에 이르렀고, 마땅히 제사 지내야 할 곳에 제사를 지냄으로써 사람을 다스리는 근본을 확립하였다고 할 것이다.
그 러고 보면 정결(淨潔)하고 정미(精微)하게 온축(蘊畜)하는 일을 극진히 하지 않은 자는 이런 일에 참여할 수가 없을 것이니, 이것이 바로 옥암이 우리나라에 오게 된 까닭이라고 할 것이요, 이와 동시에 상법(常法)에 구애받지 않고 훌륭한 사람을 쓰고 있는 점을 통해서 우리는 또 명(明)나라 조정의 사람 쓰는 법을 알 수 있다고 하겠다. 아, 장차 개공(蓋公)과 같은 분이 이 세상에 나오게 된다면, 이 백성들이 얼마나 그 은혜를 입게 되겠는가.
옥암은 성이 서씨(徐氏)요 이름이 사호(師昊)로서, 양주(楊州) 사람이다. 여기에다 그에 대해서 갖추어 기록해 두는 것은, 망사(望祀)를 실질적으로 지내는 의례(儀禮)가 이해로부터 비롯된 것을 드러내 보이기 위함이다. -그런데 제공(諸公)이 취성(鷲城) 때문에 감히 시를 짓지 못하였으므로, 결국 이 글도 옥암에게 주지 못하였다.
[주D-001]조천궁(朝天宮) : 도관(道觀)의 이름이다. 명(明)나라 태조(太祖)가 이곳에 도록사(道錄司)라는 관청을 설치하여 예부(禮部)에 소속시키고 도교(道敎)에 관한 일을 전담하게 하였다. 《吏文輯覽 卷2》 《明史 卷74》
[주D-002]조참(曹參)이 …… 하였으니 : 조 참이 제(齊)나라 정승으로 있을 적에 청정무위(淸淨無爲)의 정사를 주장하는 개공의 말을 채택하여 제나라를 크게 안정시켰으며, 혜제(惠帝) 때 조정에 들어가 정승이 되었을 때에도 개공의 도를 따랐으므로 천하가 칭송하는 노래를 불렀다는 기록이 보인다. 《史記 卷54 曹相國世家》《高士傳 中 蓋公》 그런데 조참은 혜제 5년(B.C. 190)에 죽었고, 문제의 재위 기간은 그가 죽은 뒤인 B.C. 179~B.C.157년에 이르고 있는 만큼, 조참이 개공을 문제에게 천거했다는 본문의 내용은 목은의 착오인 듯하다. 《한서(漢書)》 권4 〈문제기찬(文帝紀贊)〉을 보면, 문제의 시대에는 범법자가 없었으므로 “거의 형벌을 쓸 일이 없게끔 되었다.[幾致刑措]”라는 유명한 말이 나온다.
[주D-003]수록(授籙) …… 환단(還丹) : 수 록은 신선이 되는 비록(祕籙)을 차례로 전수해 준다는 말인데, 《수서(隋書)》 경적지(經籍志) 4 도경(道經)에, “천존(天尊)이 천지를 개벽하고 나서 천진황인(天眞皇人)에게 명하여 천음(天音)을 해석하게 하였으며, 그 뒤로 여러 선인(仙人)들이 차례로 전수받은 다음에 세상 사람들에게 비로소 전해 주기 시작하였다.”라는 기록과, 또 “그 도를 받는 법에도 단계가 있으니, 처음에는 오천문록(五千文籙)을 받고 다음에는 삼통록(三洞籙)을 받고 다음에는 통현록(洞玄籙)을 받고 다음에는 상청록(上淸籙)을 받는다.”라는 기록이 보인다. 배장은 귀신에게 축복을 비는 기도문을 말하고, 부주는 귀신을 부릴 수 있는 부적(符籍)과 주문(呪文)이고, 환단은 복용을 하기만 하면 즉시로 신선이 된다는 단약(丹藥)을 말한다.
[주D-004]현교(玄敎)의 …… 계시니 : 조참(曹參)이 소하(蕭何)의 뒤를 이어 한(漢)나라의 정승이 되고 나서, 청정한 도를 실천하여 백성을 편안하게 통일시켰다[載其淸淨 民以寧一]는 기록이 《사기(史記)》 조상국세가(曹相國世家)에 나온다.
[주D-005]재계(齋戒)하고 …… 이르렀고 : 《주역(周易)》 계사전 상(繫辭傳上)에 “성인이 이 일을 가지고 재계하여 그 덕을 신령스럽고 밝게 한다고 할 것이다.[聖人以此齋戒 以神明其德夫]”라는 말이 나온다.
[주D-006]취성(鷲城) : 취성부원군(鷲城府院君) 신돈(辛旽)을 가리킨다.
김 판사(金判事)의 시권(詩卷) 뒤에 써 준 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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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 제(喪制)가 무너진 지 오래되었다. 과거에 내가 중원(中原)에서 노닐 적에, 사대부들이 상복(喪服)을 입은 채 술과 고기를 먹는 것을 보고서 처음에는 무척이나 해괴하게 생각하였다. 그러다가 그들이 삼년상(三年喪)을 다 마치도록 아침저녁으로 곡(哭)하는 것을 게을리하지 않아, 비록 사납고 흉악한 무리라 할지라도 그 소리를 듣고는 마음속으로 슬퍼한 나머지 어쩔 수 없이 눈물을 흘리지 않는 자가 없는 것을 본 뒤에야, 중국의 강상(綱常)의 아름다움이 아직도 사라지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고려(高麗)는 주(周)나라가 은(殷)나라 태사(太師)를 이 땅에 봉(封)한 때로부터 대개 중국 문명의 영향을 받아 왔다. 그래서 상을 입는 기간도 미상불 삼년으로 정해 놓았는데도 100일만 지나면 길사(吉事)를 행하는가 하면, 훈채(葷菜)를 먹지 않으면서도 쌀밥은 태연히 먹고 있는 실정이다. 그리고 장지(葬地)를 정하는 일이나 죽은 이를 보내는 절차 등은 중국과 대략 같으면서도 우제(虞祭)와 졸곡제(卒哭祭)는 없고, 소상(小祥)과 대상(大祥)을 거쳐 담제(禫祭)를 지내는 예법도 원래 있건마는, 아침저녁으로 곡을 하지 않고 있다. 그래서 그가 아직도 상중(喪中)에 있는지를 사람들이 알 수 없는 형편이다. 이런 관점에서 살펴본다면 오늘날 천하의 상제(喪制)와 관련하여 중원과 우리의 득실(得失)이 대개 상반(相半)한다고 하겠다.
우리나라의 복제도(服制圖)를 상고해 보면, 삼년상을 당했을 때에는 100일의 휴가를 주고, 기타의 상을 당했을 때에는 차례로 낮춰서 휴가를 주게 되어 있다. 따라서 실제로 100일을 가지고 삼년에 해당시킨다고 한다면 소상ㆍ대상ㆍ담제 등도 100일 안에 모두 들어 있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지금은 그렇지가 않아서 죽은 지 한 돌 만에 소상을 지내고 두 돌 만에 대상을 지내며 다시 한 달을 걸러서 담제를 지내고 있으며, 또 이 기간 동안 모두 휴가를 내 주고 있으니, 그러고 보면 27개월로 행해지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고 하겠다.
그리고 휴가라고 하는 것은 관직에 있는 자를 두고 하는 말이니, 휴가가 일단 끝나게 되면 공무(公務)를 보아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길흉(吉凶)을 같은 그릇 안에 담아 둘 수는 없는 노릇이니, 관원의 입장에서는 일단 복을 벗지 않을 수 없다고 하겠으나, 다른 사람들이야 무슨 관계가 있다고 스스로 복을 벗어 버린단 말인가. 또 관원들 역시 비록 복을 벗었다고 하더라도 술을 마시거나 고기를 먹거나 내실(內室)에 거처하는 일 등을 하지 말고서 심상(心喪) 삼년을 입어야 옳을 것인데, 그만 “나는 휴가가 이제 다 끝나서 상복도 벗게 되었다.”라고 하고는 못하는 짓이 없으니, 이것 역시 너무도 생각을 하지 않은 것이라고 하겠다.
이렇게 된 폐단의 원인을 살펴보건대, 관원들에게 휴가를 주었다가 기복(起復)을 시키는 일이 광범위하게 이루어지고 있기 때문이라고 할 것이다. 그리하여 관직이 없는 자까지도 이를 본받는가 하면, 나아가서는 일반 백성들 모두가 또 이를 흉내 내면서 구차하고 간편하게 답습하기만 한 나머지 마침내는 그 잘못을 알지도 못하게 된 것이라고 하겠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 삼년상을 제대로 행하려면 오직 여묘(廬墓) 살이를 해야만 가능하리라고 여겨진다. 대저 묘(墓)는 체백(體魄)만을 모신 곳이라서 혼기(魂氣)는 집으로 돌아오게 마련이기 때문에, 삼우제(三虞祭)를 지내고서 집에다 편안하게 모시는 것이다. 그런데 가묘(家廟)에 모실 수 없게 된 경우라도 정신(精神)은 막힘없이 두루 돌아다니는 것이기 때문에 어디를 간들 자손에게 의지하여 붙지 않는 경우는 없다고 할 것이니, 자손이 있는 곳이 바로 신이 의지하는 곳이라고 하겠다. 그렇다면 아침저녁으로 곡을 하고 제사를 올리는 일을 집에서 하지 않고 산야(山野)에서 한들 또한 무슨 잘못이 있다고 하겠는가.
이렇게 하는 것이 성인의 예제(禮制)에 비추어 볼 때 혐의(嫌疑)가 있을지는 모르겠으나, 지금 예법이 완전히 무너져 버린 때에 자식으로서의 지극한 심정을 극진히 쏟아내면서 삼 년이 지난 뒤에야 부모의 품을 벗어난 은혜를 갚을 수 있는 길로는 이보다 더한 것이 없다고 할 것이다. 그래서 국가에서 그의 향리(鄕里)에 표창하고 사람들이 그를 효자라고 일컫는 것인데, 이에 대해서는 성인이 다시 나오신다 해도 결코 바꾸려 하지 않으실 것이다.
낙 안 김씨(樂安金氏)는 삼한(三韓)의 대족(大族)이다. 그 집안의 형제가 모친을 극진히 봉양하여 효자로 소문이 났는데, 신축년(1361, 공민왕10) 겨울에 홍건적(紅巾賊)이 경성(京城)을 침범하자 모친을 모시고 남쪽으로 피난을 갔다. 이때 백씨(伯氏)인 제학(提學)이 불행히도 길에서 병에 걸려 죽자, 모친이 비감(悲感)에 젖어 얼마 뒤에 또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이에 숙씨(叔氏)인 판사공(判事公)이 영구(靈柩)를 받들어 태산(泰山 태인(泰仁)의 옛 이름)의 별장에다 빈소를 차리고는 밤낮으로 울부짖으면서 거적자리를 떠나지 않은 것이 몇 개월이나 되었으며, 장례를 치른 뒤에는 또 그 옆에서 거처하면서 복제(服制)를 마쳤다.
이는 내가 위에서 말한 ‘성인이 다시 나오신다 해도 결코 바꾸려 하지 않으실’ 경우에 해당되는 일이었으므로 담암(淡菴 백문보(白文寶)) 백 선생(白先生)이 그 극진한 효성을 서술하였고, 사대부들도 노래를 지어 부르면서 찬미했던 것이었다. 그런데 나로 말하면 바로 ‘휴가를 마치고 나서 곧장 공무를 살핀’ 경우에 해당되는 자였으므로, 이 시권(詩卷)을 읽으면서 슬픔에 젖어 들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마침내 상제(喪制)의 득실과 그 폐단이 있게 된 이유, 그리고 여묘 살이를 하는 것이 자식으로서의 지극한 심정을 쏟아내는 그 의리에 합당하다는 것에 대해서 나의 소견을 적어 후서(後序)로 삼게 되었다.
[주D-001]은(殷)나라 태사(太師) : 기자(箕子)를 가리키는데, 《두씨통전(杜氏通典)》에 “조선은 주나라가 은 태사를 봉해 준 나라이다.[朝鮮 周封殷太師之國]”라는 기록이 나온다.
[주D-002]삼 년이 …… 은혜 : 《논어》 양화(陽貨)에 “자식이 태어나서 삼 년이 지난 뒤에야 부모의 품을 벗어나게 된다.[子生三年然後 免於父母之懷] 따라서 삼년상은 온 천하의 공통된 상(喪)이라고 할 것이다.”라는 공자의 말이 나온다.
《전등록(傳燈錄)》 서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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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상께서 즉위하신 지 21년이 되는 봄 정월에, 판조계종사(判曹溪宗事) 신(臣) 각운(覺雲)이 상언(上言)하기를, “《전등록》은 선학(禪學)의 지침이 되는 책입니다. 그런데 그 판본(板本)이 병화(兵火)에 불타 버리고 말았으니, 손으로 일일이 뽑아서 베껴 쓰기에는 무척이나 어려운 점이 있습니다. 더군다나 지금은 오로지 승려들이 묵좌(默坐 참선(參禪))에 힘을 기울이면서 만에 하나라도 공을 이루게 되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는 터인데, 심오한 도리를 이야기해 주는 이 책이 또 없어지게 된다면 사도(斯道)가 더욱 어두워지지나 않을까 걱정이 됩니다. 그러니 지금 다시 이 책을 간행하여 널리 유포시킴으로써 배우는 이들에게 은혜를 끼쳐 주는 것이 어떨까 합니다.” 하니, 상이 그렇게 하라고 윤허하였다.
이에 광명사(廣明寺)의 주지 경예(景猊)와 개천사(開天寺)의 주지 극문(克文)과 굴산사(崛山寺)의 주지 혜식(惠湜)과 복암사(伏巖寺)의 주지 탄의(坦宜)가 그 일을 주관하게 되었으니, 이는 모두가 상의 명에 따른 것이었다. 그리하여 자재(資材)를 모으고 공장(工匠)을 동원해서 일이 진척되기 시작하자, 각운이 또 상언하기를, “신의 종문(宗門)이 이제 더할 수 없는 영광을 입게 되었습니다. 다만 이에 대한 사연을 적어서 첫머리에다 실어 놓지 않는다면 뒷날 징험할 수가 없게 될 것이니, 문신(文臣)에게 명하시어 그 일을 기록하도록 해 주셨으면 합니다.” 하니, 나에게 명을 내려 그 일을 맡도록 하였다. 그런데 그때 마침 내가 모친상을 당해 국도(國都)를 떠나 있다가 이듬해에 기복(起復)하라는 명을 받고 국도에 오자, 각운이 나를 찾아와서는 공사가 다 끝났다면서 나의 글을 재촉하였다.
이 에 내가 《전등록》이라는 책을 구해서 읽어 보았더니, 그 제목의 위에 경덕(景德 송 진종(宋眞宗)의 연호. 1004~1007)이라는 글자를 덧붙여 놓았으며, 한림학사(翰林學士) 양억(楊億)과 병부 원외랑(兵部員外郞) 이유(李維)와 태상승(太常丞) 왕서(王曙)가 조칙(詔勅)을 받들고 함께 재단(裁斷)하여 결정하면서 그 내용을 빼고 취하여 정리했다는 사연이 그 서문에 매우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었다.
그런데 《송사(宋史)》를 상고해 보건대, 대중상부(大中祥符 송 진종의 연호. 1008~1016) 2년에 소주(蘇州)의 승려 도원(道元)이 불조(佛祖) 이래 명승(名僧)의 선문답(禪問答) 등의 이야기를 찬미하여 만든 《전등록》 30권을 바치자 판각하여 선포하도록 했다고 기록되어 있었다. 그런데 양억 등이 정리해 놓은 사실은 기재해 놓지 않았으니, 이는 어쩌면 사씨(史氏)가 일부러 생략했기 때문일까? 그리고 제목을 《경덕전등록(景德傳燈錄)》이라고 한 것은, 어쩌면 경덕 연간에 일단 이 책을 완성하였다가 대중상부 연간에 바쳤기 때문에 그런 것일까? 그것도 아니라면 이렇게 기록해 놓은 것은 사씨의 잘못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파양 마씨(鄱陽馬氏 원(元)나라 마단림(馬端臨))가 지은 《문헌통고(文獻通考)》를 보면, 이 책을 양억이 지은 것이라고 지적해 놓았다. 그런데 양억이 비록 문장으로 이름난 인사였다고는 하더라도, 그는 후비(后妃)를 책립(冊立)하는 제서(制書)도 오히려 거부하고 짓지 않을 만큼 기개가 있던 사람이었다. 그런 그가 뭣 때문에 부도(浮屠 불교)에 몸을 의탁하고는 위서(僞書)를 지어서 임금을 기만하고 세상을 현혹시키려 하였을까? 그 당시에는 재상(宰相) 왕단(王旦)이 나라의 권세를 쥐고 있었는데, 그는 한 시대의 위인(偉人)이라고 할 만하였지만, 죽을 임시에 자신의 머리를 깎고 치의(緇衣 승복(僧服))를 입혀서 염(殮)을 하라고 유언할 정도로 불교에 심취해 있던 상태였다. 그런데 양억이 한림학사로 있으면서 선학(禪學)에 조예가 깊다고 일컬어졌기 때문에 이 《전등록》이 나라에 바쳐졌을 때 왕단이 그에게 개수(改修)하라는 명을 대뜸 내리게 된 것은 아니었을까?
《책부원귀(冊府元龜)》는 역대 군신(君臣)의 사적(事跡)을 적어 놓았고, 요현(姚鉉)이 지은 《문수(文粹)》는 당(唐)나라 사람들의 문장을 모아 놓은 것으로서, 모두 세교(世敎)와 관계되는 책들이라고 할 것이다. 그런데 이 두 가지 책들이 모두 대중상부 연간에 이루어졌음에도 불구하고, 판각해서 선포하라는 명이 내려졌다는 말을 듣지 못했고 보면, 이 《전등록》이 그 당시에 얼마나 중시되었는지를 알 수 있다고 하겠다.
삼가 생각건대, 우리 주상 전하의 지극한 인덕(仁德)은 백성들의 마음을 흡족하게 해 주고, 그 지극한 도는 세속을 멀리 초월해 있다고 여겨진다. 그리하여 별도로 전하는 정법안장(正法眼藏)의 오묘한 도리를 말없는 가운데 계합(契合)하고 계시니, 이는 비루한 유자(儒者)의 천박한 견해로는 도저히 헤아릴 수가 없는 바라고 하겠다.
각 운(覺雲)이 일찍이 궁중에서 꼬박 1년 동안이나 이 《전등록》을 담론한 적이 있었다. 이에 상이 그의 능력을 깊이 인정하고는 열 글자의 법호(法號)와 선교 도총섭(禪敎都摠攝)의 직함을 내리는 한편 조계 도대 선사(曹溪都大禪師)로 삼아 내원당(內院堂)에 들어와서 거하게 하였다. 이러한 인연이 있었기 때문에 각운이 상의 거룩한 마음을 제대로 몸 받고서 《전등록》을 간행하여 널리 유포하게 하였으니, 후학에게 은혜를 끼치고 심학(心學)을 넓힌 그 공을 어찌 말로 다할 수가 있겠는가.
마음을 비유하자면 등불과 같다고도 할 것이다. 마음과 마음이 서로 인증(認證)하면서 끝없이 이어 나가듯이, 등불과 등불도 불씨를 서로 전하여 끝없이 이어 나가는 것이다. 우리나라가 위로 부처의 대자대비(大慈大悲)한 광명에 힘입어 하늘의 운수를 이어 나가는 것 역시 등불이 끝없이 이어지는 것처럼 되기만 한다면, 나의 이 서문도 아무 뜻 없이 지은 것이 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니 뒷날의 학자들도 그렇게 되도록 축복하는 일에 힘을 기울여야 할 것이요, 한갓 자기 한 몸만 꾸미려고 해서는 안 될 것이다. 그 밖에 선문답(禪問答) 등의 이야기에 대해서는 내가 아직 배우지 못했기 때문에 여기에다 언급하지 못한다.
[주D-001]책부원귀(冊府元龜) : 송 (宋)나라 진종(眞宗) 때 양억(楊億)과 왕흠약(王欽若) 등이 명을 받들어, 육경(六經)과 자사(子史)의 자료를 주로 취해서 역대 군주의 사적을 1000권으로 집대성한 책인데, 《태평어람(太平御覽)》과 함께 송대(宋代)의 대표적인 유서(類書)로 꼽힌다.
[주D-002]별도로 …… 도리 : 언 어와 문자를 떠나 마음과 마음으로만 전할 수 있는 선종(禪宗)의 최고의 경지라는 말이다. 석가모니(釋迦牟尼)가 영산회상(靈山會上)에서 염화시중(拈華示衆)했을 때, 대중이 모두 침묵을 지키는 가운데 오직 가섭(迦葉)만이 파안 미소(破顔微笑)를 짓자, 석가가 “나에게 있는 정법안장(正法眼藏)ㆍ열반묘심(涅槃妙心)ㆍ실상무상(實相無相)ㆍ미묘법문(微妙法門)ㆍ불립문자(不立文字)ㆍ교외별전(敎外別傳)을 마하가섭(摩訶迦葉)에게 부촉하노라.”라고 했다는 말이, 《연등회요(聯燈會要)》 권1과 《경덕전등록》 권1 마하가섭부법(摩訶迦葉付法) 조에 나온다.
2010-0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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