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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은기(漁隱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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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동정(廉東亭 염흥방(廉興邦))이 천녕(川寧 여주(驪州)의 속현(屬縣))에서 살 적에 자기의 호를 어은(漁隱)이라고 하고는 돌아와서 나에게 기문(記文)을 지어 달라고 부탁하였다. 이에 내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상고(上古) 시대에 성인이 괘상(卦象)을 관찰하여 기구를 만들었는데, 우리 부자(夫子 공자(孔子))가 《주역(周易)》의 계사전(繫辭傳)을 지으면서 이를 취하여 설명하였으니, 망고(網罟)를 만들어서 전어(佃漁)를 하게 했다는 것도 대개는 그중의 하나이다. 그리고 맹자(孟子)는 공자를 배운 분인데, 그가 말하기를 “웅덩이나 못에다 촘촘하게 짠 그물을 치지 못하게 하면 물고기와 자라가 많아져서 이루 다 먹을 수 없게 될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것을 보면 대개 천지 사이에 생물이 매우 많지만, 그것을 잡는 데에는 적절한 도구가 필요하고 또 그것을 먹는 데에는 합당한 시기가 있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따라서 지나친 것을 억제하고 모자란 것을 보충해서 천지간에 온당한 도리가 이루어지도록 하는 것이 바로 성인의 일이다.
홍수의 재앙을 당했을 그 당시에 당우(唐虞 요순(堯舜))의 군신(君臣)은 모두가 훌륭했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우씨(夏禹氏)는 도산(塗山)으로 장가들어서 나흘밖에 머무르지 못하였고, 어린 자식의 울음소리를 듣고서도 귀여워할 틈이 없었으며, 자기 집 문 앞을 세 번이나 지나가면서도 들어가질 못했으니, 이는 당시의 상황이 너무나도 급박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때에는 온갖 짐승과 새들의 발자국이 중국 전역에 온통 찍혀 있는 등 백성들의 피해가 정말 참혹했다고 할 만하였다. 그래서 백성들에게 각종 날고기를 먹는 방법을 일러 주기에 이르렀으니, 이쯤 되어서는 사냥과 고기잡이를 하기 위한 도구의 필요성이 더욱 급해졌다고 하겠다.
그런데 사람의 성품이란 그저 자기가 즐겨하고 좋아하는 쪽으로만 날마다 치달리면서 멈출 줄을 모르는 속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한 자가 채 못 되는 물고기는 시장에 내다 팔 수도 없고 사람이 먹을 수도 없게 하는 법을 또 만들게 되었다. 이렇게 되자 시내와 연못 사이에 사람의 손에서 해방된 물고기들이 자유를 한껏 누리면서, 그야말로 물속을 가득 채운 채 마음껏 뛰어오르는 광경을 연출하게 되었으니, 이것이 또한 지극히 잘 다스려진 세상의 모습이라고 하겠다.
그리고 학교(學校)를 잇따라 일으켜서 인재를 양성하였는데, 그때에도 반드시 배우는 이들로 하여금 소리개가 날고 물고기가 뛰노는 그 경지를 살펴보게 하였다. 그리하여 교육을 통해 변화시켜 막힘없이 행해지게 하는 그 묘한 도리를 나의 본심(本心)인 전체(全體) 대용(大用)의 바탕 위에서 깊이 체득하게 하였으니, 이로써 성학(聖學)의 공이 이루어졌다고 하겠다. 이와 함께 분어(盆魚)의 낙을 관찰한 고사 역시 후학(後學)에게 도움이 된다고 할 것인데, 요컨대 하나의 물건이 있으면 그 속에 모두 일정하게 하늘의 원리가 깃들어 있으니 어떤 일도 인(仁) 아닌 것이 하나도 없다고 할 것이다.
동정(東亭)은 옛사람의 도를 좋아하면서 엄하게 자신을 닦아 나갔고, 항상 군자의 마음을 지니고서 타인을 사랑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가렴주구(苛斂誅求)하는 무리들을 개나 돼지로 여겼을 뿐만 아니라, 어떻게 해서든 물고기나 자라까지도 모두 편히 살도록 하는 공을 이루겠다고 자임(自任)하였다.
지금 이 어은(漁隱)이라는 자호(自號)는 대개 천녕(川寧)으로부터 비롯된 것이다. 천녕은 여강(驪江)의 하류에 있는데, 그 땅은 농사짓기에 알맞은 데다 소나무가 또 많으며, 백련정사(白蓮精舍)라는 곳도 바로 거기에 있다. 금사장(金沙莊)의 팔영시(八詠詩)를 보면 그곳의 풍물(風物)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알 수가 있는데, 그 가운데 ‘동강조어(東江釣魚)’를 읊은 곳이 바로 어은이 사는 곳이다.
한 문공(韓文公)의 시에,
솔숲 낀 다리에서 백 걸음쯤 걸어갈까 / 橋夾水松行百步
스님 집에 도착하니 대 평상에 돗자리라 / 竹床莞席到僧家
주먹 쥐고 잠깐 동안 머리 괴고 누웠다가 / 蹔拳一手支頭臥
이내 낚싯대 손에 들고 모래톱으로 내려갔소 / 還把魚竿下釣沙
라 고 하였다. 한 문공은 내가 스승으로 모시는 분이다. 그런데 내가 이제 늙었으니, 하늘이 가령 나에게 복을 내려 동정의 이웃에다 빈터를 잡고 살게끔 해 준다면, 동정과 함께 이 시를 읊조리면서 나의 생애를 마치고 싶은 생각도 든다. 그 밖에 낚싯대와 낚싯줄을 위시해서 낚싯바늘이나 미끼 따위, 그리고 굽은 낚시를 할 것인지 아니면 곧은 낚시를 할 것인지 등에 대해서는, 동정과 함께 돌아가서 상의해도 늦지 않을 것이다. 이것으로 어은기를 삼고자 한다.
[주D-001]망고(網罟)를 …… 것 : 《주 역(周易)》 계사전 하(繫辭傳下)에 “노끈으로 매듭을 지어 맺어 각종 그물을 만든 뒤에 사냥과 고기잡이를 하게 하였으니, 이는 대개 이괘(離卦)에서 취한 것이다.[作結繩而爲網罟 以佃以漁 蓋取諸離]”라는 말이 나온다. 망(網)은 조수(鳥獸)를 잡는 그물이요, 고(罟)는 어별(魚鱉)을 잡는 그물이다.
[주D-002]웅덩이나 …… 것이다 : 《맹자(孟子)》 양혜왕 상(梁惠王上)에 나오는 말이다.
[주D-003]지나친 …… 것 : 《주역》 태괘(泰卦) 상사(象辭)에 나오는 말이다.
[주D-004]도산(塗山)으로 …… 없었으며 : 《서경(書經)》 익직(益稷)에 그 내용이 나온다.
[주D-005]자기 집 …… 못했으니 : 《맹자》 등문공 상(滕文公上)과 이루 하(離婁下)에 그 내용이 보인다.
[주D-006]백성들에게 …… 이르렀으니 : 우(禹)가 익(益)과 함께 백성들에게 그 방법을 가르쳐 주었다는 기록이 《서경》 익직 첫머리에 나온다.
[주D-007]한 자가 …… 되었다 : 《맹자》 양혜왕 상의 “웅덩이나 못에다 촘촘하게 짠 그물을 치지 못하게 하면 물고기와 자라가 많아져서 이루 다 먹을 수 없게 될 것이다.”라는 구절의 주자(朱子) 주(註)에 그 내용이 실려 있다.
[주D-008]사람의 …… 누리면서 : 《맹자》 만장 상(萬章上)에, “잡은 물고기를 놓아주자 처음엔 어릿어릿하더니[圉圉焉], 조금 뒤엔 자유스럽게[洋洋焉] 꼬리를 치며 사라져 갔다.”는 말이 나온다.
[주D-009]물속을 …… 광경 : 《시경(詩經)》 대아(大雅) 영대(靈臺)에 “왕께서 영소에 계시니, 아, 고기들이 가득히 뛰놀도다.[王在靈沼 於牣魚躍]” 하였는데, 맹자가 왕자(王者)의 덕화(德化)를 설명하면서 그 부분을 인용하였다. 《孟子 梁惠王上》
[주D-010]소리개가 …… 경지 : 《시경》 대아 한록(旱麓)에 “소리개 날아 하늘에 이르고, 물고기 못에서 뛰놀도다.[鳶飛戾天 魚躍于淵]” 하였는데, 만물이 모두 제자리를 얻고서 각자의 가능성을 최대한 발휘하게 하는 왕도정치(王道政治)의 극치를 표현한 말이다.
[주D-011]분어(盆魚)의 …… 고사 : 송 유(宋儒) 정명도(程明道)가 분지(盆池)에다 송사리 몇 마리를 키우면서 때때로 관찰하였는데, 어떤 이가 그 까닭을 묻자 “만물이 자득하는 뜻을 보려고 한다.[欲觀萬物自得意]”고 대답했던 고사를 말한다. 《宋元學案 卷14 明道學案下 附錄》
[주D-012]하나의 …… 있으니 : 《시경》 대아(大雅) 증민(烝民)에 “하늘이 백성을 내시매, 모든 사물에 법칙을 두시었다.[天生烝民 有物有則]” 하였다.
[주D-013]항상 …… 사랑하였다 : 《맹자》 이루 하(離婁下)에 “군자가 다른 사람과 다른 점은 마음가짐 때문이다. 군자는 항상 인에 마음을 두고 예에 마음을 둔다.[君子所以異於人者 以其存心也 以仁存心 以禮存心]”고 하였다.
[주D-014]물고기나 …… 자임(自任)하였다 : 물 고기나 자라까지도 모두 편히 살도록 한다는 것은 태평 시대를 뜻하는 말로, 《서경》 이훈(伊訓)에 나오는 내용이다. 염흥방(廉興邦)은 우왕(禑王) 때에 폭정(暴政)을 행하며 탐학을 일삼은 대표적인 인물인데, 목은이 이토록 극찬한 것을 보면, 이 글은 그 이전에 그가 일시적으로 여주(驪州)에 귀양 가 있을 당시 친밀하게 지내면서 〈금사팔영(金沙八詠)〉을 지어 줄 즈음의 작품이 아닌가 싶다. 실제로 《고려사(高麗史)》의 이색열전(李穡列傳)에는, 장차 나라를 잘못되게 할 자로 이인임(李仁任)과 함께 염흥방을 거론하면서 그가 수탈을 일삼고 있다고 비판한 대목이 보인다.
[주D-015]금사장(金沙莊)의 팔영시(八詠詩) : 《목은시고(牧隱詩藁)》 제16권에 보인다.
[주D-016]한 문공(韓文公)의 시 : 한 유(韓愈)의 〈제수선사방(題秀禪師房)〉이라는 칠언 절구(七言絶句)로, 《한창려집(韓昌黎集)》 권10에 수록되어 있다. 그런데 전구(轉句)의 두(頭) 자와 결구(結句)의 조(釣) 자가 《목은문고》에는 각각 이(頤) 자와 만(晚) 자로 잘못 기록되어 있는데, 여기서는 글자를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보개산(寶蓋山) 지장사(地藏寺) 중수기(重修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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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승려 자혜(慈惠)를 처음 만난 것은 좌주(座主)인 익재 선생(益齋先生 이제현(李齊賢))의 부중(府中)에서였다. 그는 키가 크고 이마가 널찍했으며, 겉모습이 질박한 데다 말을 하는 것이 또 정직하였다. 그래서 선생이 그를 무척이나 사랑하였는데, 그는 철원(鐵原)에 있는 보개산의 지장사에 거처하고 있었다. 선생이 세상을 떠날 때에도 자혜가 또 그 곁을 떠나지 않으면서 마치 자제(子弟)가 부형(父兄)을 모시는 것처럼 하였다. 그래서 상인(上人)이 일반 승려들보다 훨씬 뛰어나다는 것을 나도 진작부터 알고 있었다.
자혜가 일찍이 사찰의 일 때문에 경사(京師 연경(燕京))로 달려가서 공경(公卿)을 찾아다닌 적이 있었다. 그때 그의 이름이 중궁(中宮)에까지 알려지자, 중궁이 내탕금(內帑金)을 내주어 범패(梵唄)에 소요되는 기구를 주조하게 하였다. 그 일이 마무리되자 자혜가 임천(臨川) 위 선생(危先生 위소(危素))에게 글을 부탁해서 사찰의 일에 대한 시말(始末)을 기록한 다음 돌에다 새겨서 배에 실어 본국으로 보내었다. 그리고 자신은 향과 폐백을 받들고서 말을 치달려 돌아온 뒤에, 비석을 사찰의 마당 가운데에 세우고는 대대적으로 낙성(落成)의 법회(法會)를 열었으니, 참으로 능력 있는 사람이라고 하겠다.
그러다가 신축년(1361, 공민왕10)에 병화(兵火)가 산속에까지 미치는 바람에, 사찰의 건물이 삼분의 일밖에 남아 있지 않게 되자, 자혜가 다시 분발해서 새로 지으려고 계획하였다. 이에 위로는 원조(元朝)의 황비(皇妃)와 아래로는 본국의 희비(禧妃)가 각각 돈을 내어 시주하였으며, 철원군(鐵原君) 최맹손(崔孟孫)과 감승(監丞) 최충보(崔忠輔)가 나서서 일을 거들었다. 그리고 이와 함께 정당문학(政堂文學) 이공(李公 이보림(李寶林))과 판전농시사(判典農寺事) 박후(朴侯 박동생(朴東生))가 각각 그들의 조부와 장인이 자혜를 사랑했던 점을 감안하여 익재 선생이 평소에 대했던 것처럼 자혜를 대우하면서 모두 재물을 시주하여 중건 공사가 원만히 끝나도록 도와주었다.
그리하여 병진년(1376, 우왕2) 4월 15일에 대장경(大藏經)을 전독(轉讀)하 는 법회를 열고서 낙성식을 갖기에 이르렀다. 이에 자혜가 나에게 말하기를, “내가 지금 늙긴 하였어도, 이 절의 일만큼은 또한 성실하게 해 왔다고 말할 수가 있다. 그렇지만 지금 글을 기꺼이 지어 줄 분을 찾아뵙고서 이 일을 기록해 두지 않는다면, 뒷날 비석의 글을 읽는 이들이 오늘날의 일이 있게 된 사연을 어떻게 알 수가 있겠는가. 그래서 지금 이 일을 돌에다 새겨 두고 싶지만, 마땅한 석재(石材)가 이 땅에서는 나오지가 않고, 또 연경(燕京)으로 가서 구해 오고 싶어도 길이 통하지 않는 데다 내 몸마저 너무도 쇠약해진 상태이다. 그러니 장차 목판(木板)에 새겨서 벽에 걸어 두었다가 뒷날 나와 뜻을 같이하는 자가 나오기를 기다리려 한다.” 하였는데, 그 말이 슬퍼서 내가 차마 사양하지 못하였다. 그러고는 말하기를, “이름난 산과 보배로운 사찰이 어디를 가도 있지 않은 곳이 없는데, 꼭 이 산에서만 거처하려 하고 꼭 이 절만을 다시 지으려 하니, 여기에는 또 다른 이유가 있는 것인가?” 하였더니, 자혜가 처연한 표정으로 대답하기를, “스승이 그렇게 명하셨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않다면 실로 공이 말한 것처럼 했을 것이다.” 하였다.
아, 그러고 보면 자혜는 참으로 스승을 저버리지 않는 사람이라고 하겠다. 내가 그 스승이 누구냐고 물었더니, 진공 대로(眞空大老)라고 하였다. 그런데 내가 진작부터 그분이 이인(異人)이라는 말을 듣고서도 얼굴을 알지 못해 항상 유감으로 생각해 왔었는데, 지금 자혜와 함께 이야기를 나눌 수 있게 되었으니, 이 어찌 나의 행운이 아니겠는가. 제자가 스승을 저버리지 않고 자손이 선조를 저버리지 않는 것이야말로 내가 지극히 바라 마지않는 바이다. 그러니 감히 사연을 갖추써서 뒤에 오는 사람들에게 권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래서 이렇게 적는 바이다.
[주D-001]좌주(座主) : 고려 때 과거 급제자가 자기를 뽑아 준 시관(試官)을 높여 부르던 말인데, 은문(恩門)이라고도 한다.
[주D-002]전독(轉讀) : 전독은 1부(部)의 경(經)을 처음부터 끝까지 다 읽는 진독(眞讀)과 상대되는 말로, 불경이 너무 방대한 점을 감안해서 법회(法會) 때에 불경의 처음과 중간과 마지막 몇 줄 정도를 읽고서 끝내는 것을 말한다.
향산(香山) 윤필암기(潤筆菴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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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 산은 압록강(鴨綠江)의 남쪽 평양부(平壤府)의 북쪽에 위치하여 요양(遼陽)과 경계를 이루고 있는데, 산이 웅장해서 더불어 비할 데가 없으니 바로 장백산맥(長白山脈)이 뻗어 내려 나뉘어진 곳이다. 그곳에는 향나무를 위시해서 사철나무가 많이 자라고 있는 데다 선도(仙道)와 불도(佛道)의 옛 자취가 서려 있기 때문에 향산이라는 이름이 붙여지게 되었다.
불교의 도량(道場)이 있는 곳은 보제(普濟 나옹(懶翁) 혜근(惠勤))가 생전에 두루 유력(遊歷)을 하였는데, 일찍이 이 산에서도 주석(住錫)한 적이 있었으므로, 그가 입적(入寂)한 뒤에 제자인 승지(勝智)라는 자가 장차 사리(舍利)를 받들고서 이 산으로 들어오려고 하였다. 그런데 각청(覺淸)이라는 자도 보제의 제자였는데, 그가 옛터를 얻어 집을 지으면서 앞 기둥 세 개를 세우는 것으로 그치고는, 공사가 끝나자 스승의 진영(眞影)을 모셔 와 불당 안에다 걸어 놓고서 아침저녁으로 예배(禮拜)를 하였다.
그럴 즈음에 승려 지선(志先)이 각청의 부탁을 받고 나에게 와서 기문(記文)을 청하기에, 내가 말하기를, “각청의 얼굴이 어떻게 생겼는지 내가 기억이 나지 않는데, 지금 지선의 혀를 통해서 각청의 말이 나의 귀에 들어왔다. 각청이 나에게 청해 왔다 하더라도 내가 잊어버린들 무슨 상관이 있겠는가. 그리고 각청이 청해 오지 않고 지선 상인(上人)이 입이 닳도록 요청한다 하더라도, 나는 단지 보제만을 알고 있을 따름이다. 그러니 다른 사람들이야 나와 무슨 관계가 있다고 하겠는가마는, 내가 바로 그런 이유 때문에 또 사양하지를 못하는 것이다.” 하였다.
보제의 제자들은 이루 헤아릴 수도 없이 많다. 그리하여 보제가 입멸(入滅)한 뒤에 그를 위해 바쁘게 뛰어다니면서 부도(浮圖)에 명(銘)을 하고 진당(眞堂)에 기문을 내걸어 불후하게 되도록 꾀하는 승려들이 서로 줄을 잇고 있다. 그런가 하면 이들을 좇아 부화(附和)하는 민간인들이 존비(尊卑)나 지우(智愚)를 막론하고 한덩어리로 굳게 합쳐서 무엇으로도 깨뜨릴 수 없는 형세를 이루고 있다.
이것은 과연 누가 그렇게 하도록 만든 것인가? 혹시 모양을 보고 짖자 소리를 듣고 짖어 대는 것처럼 형세상으로 볼 때 필연적으로 일어나는 일이라고 해야 할 것인가, 아니면 서리가 내리자 종이 울리고 돌을 던지자 물이 받아들이는 것처 럼 감응(感應)하고 교제(交際)하는 도리로 볼 때 꼭 그렇게 하려고 하지 않았는데도 자연히 그렇게 된 것이라고 해야 할 것인가? 어쨌든 간에 보제가 이렇게 되도록 만든 이면에는 분명히 그의 도(道)가 작용한 점이 있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지금 머리를 깎고 무리 지어 노니는 자들이 거의 나라의 반을 차지하고 있으니, 수백 년 위로 거슬러 올라가 찾아보더라도, 지금처럼 불교가 성행한 적은 있지 않았다고 할 것이다. 하지만 세상을 떠나고 난 뒤에까지 보제처럼 탁월한 영향력을 끼치고 있는 이에 대해서는 내가 많이 들어 보지 못하였다. 그러니 지금 세상에서 충심으로 보제를 신봉하는 그 까닭도 충분히 짐작할 만하다. 그런데 보제가 살아 있을 적에는 비방하는 자들이 그렇게도 많았건만, 막상 그가 죽고 나자 그를 사모하여 따르는 것이 또 이와 같으니, 아, 사람의 마음이란 과연 그 누가 주관하는 것인가.
이러한 내용의 말들을 내가 또 지선에게 일러 주면서 각청(各廳)에게도 아울러 이야기해 주도록 하였으니, 이는 보제에게 귀의하는 그의 마음이 더욱 간절해지게 하는 동시에 스승의 사리를 길이 전하는 일을 더욱 근실하게 행하도록 하려는 의도에서였다. 이 산의 승경(勝景)에 대해서는 승려들이 허다히 이야기하는데, 내 몸이 워낙 쇠해서 그 산을 한 번 찾아가 볼 수가 없으니 애석하기 짝이 없다. 이 점도 아울러 기록해 둔다.
[주C-001]윤필암기(潤筆菴記) : 윤 필(潤筆)은 원래 글을 지어 주는 대가로 받는 일종의 사례금으로써 집필료(執筆料)를 말한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권8 지평현(砥平縣) 불우(佛宇) 조에, “이색이 왕명을 받들고 나옹의 부도명을 지어 주자, 문도들이 윤필의 재물을 마련하여 사례하였는데, 이색이 그것을 받지 않고 허물어진 절을 수리하도록 하였기 때문에 윤필암이라는 이름이 붙게 되었다.[李穡以王旨撰懶翁浮屠銘 其徒致潤筆物 穡不受使修廢寺 因名之]”라고 하여 윤필암의 유래를 설명하고 있다. 이렇게 해서 원래 나옹의 사리탑이 있던 신륵사(神勒寺)와 회암사(檜巖寺) 외에도, 나옹의 문도들이 다시 나옹과 관련이 있는 묘향산(妙香山)ㆍ금강산(金剛山)ㆍ소백산(小白山)ㆍ사불산(四佛山)ㆍ치악산(雉岳山)ㆍ용문산(龍門山)ㆍ구룡산(九龍山) 등 일곱 곳에 진당(眞堂)을 세우고 사리를 나누어 모셨는데, 이 일곱 곳에 모두 목은이 기문을 써 주었다.
[주D-001]모양을 …… 것 : ‘한 마리의 개가 이상한 형체를 보고 짓자 다른 백 마리의 개가 그 소리를 듣고서 짖어 댄다.[一犬吠形 百犬吠聲]’는 속담에서 나온 말로, 어떤 일의 진위(眞僞)를 살피지도 않고 자기 주관도 없이 맹목적으로 붙좇는 것을 말한다. 《潛夫論 賢難》
[주D-002]서리가 …… 울리고 : 풍산(豐山)에 구종(九鍾)이 있는데, ‘이 종은 서리가 내리면 울줄을 안다[是知霜鳴]’는 전설이 있다. 《山海經 中山經》
[주D-003]돌을 …… 것 : 상 호 간에 의기가 투합하는 것을 말한다. 장량(張良)이 황석공(黃石公)의 병법을 터득하고 나서 군웅(群雄)에게 유세할 적에는 마치 물을 돌에 던지는 것처럼 받아들여지지 않았으나[以水投石 莫之受], 한 고조(漢高祖)에게 유세할 적에는 마치 돌을 물에 던지는 것처럼 모두 받아들여졌다.[以石投水 莫之逆]는 이야기가, 삼국 시대 위(魏)나라 이강(李康)의 《운명론(運命論)》에 나온다.
금강산(金剛山) 윤필암기(潤筆菴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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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 제(普濟) 나옹(懶翁)이 입적(入寂)하자, 사람들이 비로소 그의 도를 크게 신봉하여 따르며 사모하였다. 그러니 더군다나 그의 문도(門徒)들이야 더 말해서 무엇하겠는가. 한산자(韓山子)가 왕명을 받들어 보제의 부도명(浮屠銘)을 지었는데, 바로 이로 인해서 윤필암(潤筆庵)이 지어지게 되었다. 윤필암은 모두 일곱 곳인데, 공양(供養)과 좌선(坐禪)에 필요한 기구들이 모두 더할 나위 없이 정결하게 갖추어지게 되었다. 보제의 몸은 비록 이 세상을 떠났어도 보제의 도는 이처럼 날이 갈수록 더욱 빛나게 드러나고 있으니, 보제가 얼마나 깊이 사람들을 감화시켰는지를 분명히 알 수 있다 하겠다.
금강산에 선주암(善住庵)이 있는데, 집만 있고 사람이 살지 않은 지가 거의 30년이나 되었다. 그런데 보제가 여기에서 여름 한 철을 지내면서 돌을 쌓아 대(臺)를 만들고는 뭇 산봉우리들을 굽어보았으므로, 사람들이 나옹대(懶翁臺)라고 불렀다. 그 암자의 동쪽에는 향로봉(香爐峯)이 있고, 남쪽에는 금강대(金剛臺 표훈사(表訓寺) 북쪽의 석벽(石壁))가 서 있으며, 그 아래를 물이 휘돌아 마치 성벽처럼 감싸고 있다. 나옹은 천하를 유력(遊歷)하면서 산천을 두루 살펴본 분이다. 그런데 금강산에 들어와서는 벌집처럼 수없이 널려 있는 암자 중에서도 유독 여기에 머무르면서 결제(結制)를 하였으니, 그렇게 한 데에는 뭔가 분명히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지 림(志林), 찬여(粲如), 지옥(志玉), 신원(信元), 각봉(覺鋒) 등이 나옹을 공경히 모실 계책을 세우고는, 이곳에다 진영(眞影)을 드리워 놓고 아침저녁으로 향화(香火)를 올리는 한편, 승려 15인을 공양하면서 불사(佛事)를 행하였다. 그리고 좌선을 통해 도를 깨달아 사람마다 모두 나옹처럼 되려고 노력하면서, 바쁘게 일을 하다가도 틈이 나기만 하면 오직 화두(話頭)만을 생각하면서 놓지 않았으니, 정말 뜻 있는 이들이라고 할 만하다.
지금 집기가 부족해지자 서울에 와서 신도들에게 보시(布施)를 청하는 한편, 기문(記文)을 구해 벽에다 걸어 놓고 뒷사람들에게 알려 주고자 하였다. 그러고는 또 말하기를, “천 일 동안 좌선을 행하는 법회를 이미 지난해 3월 3일에 시작하였는데, 그 기한이 끝나면 다시 시작할 예정이니, 스승의 뜻을 이어받으려고 하는 이 일에 대해서도 아울러 기록해 주셨으면 합니다.” 하기에, 내가 말하기를, “지림 등이 이런 일을 행하다니, 또 얼마나 훌륭한가. 비록 영겁(永劫)의 세월이 지난다 할지라도, 천 일이 지나거든 또 천 일을 이어 가면서 마치 하루의 일처럼 행해 간다면, 여기에서 도를 체득하고 나가는 이들을 어찌 다 헤아릴 수가 있겠는가.” 하였다. 아래에 시주(施主)의 명단을 갖추 기록해 둔다.
기미년(1379, 우왕5) 윤5월 일에 짓다.
[주D-001]결제(結制) : 승려들이 절 문을 나서지 않고 일정한 기간 동안 수행하는 것을 말한다. 음력 4월 보름부터 시작하는 석 달 동안의 결제를 하안거(夏安居)라 하고, 10월 보름부터 석 달 동안 행하는 결제를 동안거(冬安居)라 한다.
침류정기(枕流亭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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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동정(廉東亭)이 귀양살이하는 도중에 안쪽으로 천녕현(川寧縣 여주(驪州)의 속현(屬縣))으로 옮겨 와서, 물가에 걸터앉은 모양으로 정자를 짓고는 그 위에서 휴식을 취하며 노닐었다. 그리고 이를 인하여 ‘수석침류(漱石枕流)’의 고사를 취해 정자의 이름을 짓고는, 귀양에서 풀려 돌아와서 나에게 기문을 청하기에, 내가 말하기를, “동정은 선왕(先王 공민왕)의 지우(知遇)를 받아 젊은 나이에 재상의 지위에까지 올랐다. 그러니 금상(今上)에게 보답하려고 하는 그 뜻이 간절할 것은 더 말할 필요도 없다. 그래서 말을 할 적에는 혐의를 피하지 않았고, 일을 행할 적에는 어려운 것도 사양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어둡고 혼탁한 세상의 온갖 비난을 받으면서도 막강한 권세를 과시하는 자들의 발호(跋扈)를 진정시키려고 노력하였으니, 금석(金石)보다도 견고한 그 굳센 의기(意氣)와 귀신을 감동시킬 만한 그 충성심이 그야말로 확고부동했다고 하겠다. 그리고 비록 외방으로 쫓겨와서 귀양살이를 했다고는 하더라도, 그 대신 몸을 온전히 유지하고 목숨을 보전하면서 평소 원하던 대로 때마침 산수(山水)의 낙을 즐기게 되었으니, 이렇게 본다면 상이 안전하게 보호해 준 그 은혜가 또 하늘과 같다고 해야 할 것이다. 따라서 어느 때나 잠시라도 그 은혜를 감히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니, 멀리 강호(江湖)에 떨어져 있다 하더라도 임금을 걱정하는 마음을 지녀야만 온당하다고 할 것인데, 어찌하여 정자의 이름은 그것과 정반대로 지었단 말인가. 그렇다면 앞으로 자신의 귀를 물에 씻으면서 세상일에 대해서는 듣고 싶지 않단 말인가? 그리하여 앞으로는 자신의 몸만 깨끗이 유지하면서 티끌세상에는 관여하고 싶지 않단 말인가?” 하였더니, 동정이 말하기를, “그렇지 않다. 대저 물의 속성은 바로 맑음 그것이다. 그래서 그 기운이 사람에게 닿으면 뼛속까지 오싹하게 한기(寒氣)를 느끼게 하기 마련이니, 마음이 혼탁한 자도 이에 환하게 밝아지고 마음이 혼란스러운 자도 이에 고요히 안정을 되찾게 되어, 위로 상제(上帝)를 제대로 섬기면서 사령(四靈)이 이르게 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천수(天數)인 1이 물을 내어 오행(五行)의 으뜸이 되게 하였으니, 만물이 번창하는 것은 모두가 물의 공덕이라고 하겠다. 또 오늘날 사람들이 아침저녁으로 남의 집 문을 두드리면서 물과 불을 구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하루라도 없으면 살지 못하기 때문이다. 하루라도 물이 없을 경우에는 사람이 생명을 보전할 수가 없으니, 그러고 보면 물의 공덕이 이런 점에서도 위대하다고 하겠다. 따라서 내가 침류(枕流)라는 표현을 쓴 것은 물과 가까이하려고 하는 마음에서일 따름이지, 다른 뜻이 있는 것은 아니다. 이것이 바로 내가 그렇게 이름을 지은 까닭이니, 그대가 이에 대한 설을 마무리해 주면 다행이겠다.” 하였다.
내가 일찍이 듣건대, 하늘과 땅 사이에 있는 것 가운데 물이 가장 크기 때문에 땅도 물 위에 있는 것이라고 하였다. 이렇게 일단 물 위에 실려 있는 상황이고 보면, 각자 모양과 색깔을 지니고서 그 양쪽 사이에 살며 번식하는 것들 모두가 사실은 물을 베개 삼고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러니 어찌 유독 사람만이 예외라고 하겠는가.
지금 저 산을 보면 엄청난 크기로 우뚝 서서 위로 하늘 높이 솟구쳐 있는데, 금수(禽獸)와 초목(草木)들이 모두 이 산을 의지하여 살고 있다. 그러나 비와 이슬이 내려서 그들을 길러 주는 점이 있다 할지라도, 만약 물 기운이 그 사이에 통하지 않는다면, 장차 어떻게 그들의 생을 영위할 수가 있겠는가. 태화봉(太華峯) 정상의 옥 연못에 핀 연꽃 같은 것이 바로 그 하나의 예라고 할 것이다.
그 런데 더군다나 평평한 언덕이나 너른 들판, 그리고 끊어진 산기슭이나 평지의 숲이 있는 곳이야 더 말해서 무엇하겠는가. 거기에서 물이 쏟아져 나오는 것도 형세상 당연한 일이라고 하겠다. 그러고 보면 사람의 거처도 물이 없어서는 안 되고, 사람의 음식도 물이 아니면 구할 수가 없을 것이니, 대체로 볼 때 물과 사람은 잠시라도 떨어질 수 없는 관계에 있는 것이 또한 분명한 사실이다.
동정은 생활 환경이 바뀌면 거기에 맞춰서 적응을 잘 해 나가니, 그 식견이 세상 사람들보다 훨씬 뛰어나다고 하겠다. 부귀한 환경에 처하면 부귀한 생활을 하고, 환란을 당하게 되면 또 거기에 맞는 생활을 하니, 이는 대개 자득(自得)한 경지가 깊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나 는, 구름이 걷히면서 달이 뜨고 물이 흘러가면서 바람이 일어나는 저 정자 위에 임하노라면, 동정이 표연히 세상을 초월하여 홀로 우뚝 선 느낌을 지니리라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니 어찌 부귀나 환란 따위에 마음이 동요될 리가 있겠는가. 이렇게 본다면 이 정자야말로 하늘이 동정에게 은혜를 더욱 베풀어 주기 위하여 내려 준 것이라고도 하겠다. 그리고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사방에 그 은혜를 고르게 베풀어 주어, 우리 백성들로 하여금 번뇌의 불길을 씻어 내 버리고 정신을 통명(通明)하게 하여 상의 은덕에 감격케 하는 것 역시 하늘의 뜻에 달려 있다고 하겠다. 이로써 기문을 삼는다.
[주D-001]수석침류(漱石枕流) : 은 거 생활을 뜻한다. 진(晉)나라 손초(孫楚)가 숨어 살려고 하면서, “돌을 베고 물에 양치질하련다.[枕石漱流]”라고 말해야 할 것을, “물을 베고 돌로 양치질하련다.[枕流漱石]”라고 잘못 말했는데, 왕제(王濟)가 그 말을 듣고서 잘못을 지적하자, 손초가 “물을 베는 것은 속진(俗塵)에 찌든 귀를 씻어 내기 위함이요, 돌로 양치질하는 것은 연화(煙火)에 물든 치아의 때를 갈아서 없애려 함이다.”라고 대답했던 고사가 전한다. 《世說新語 排調》
[주D-002]자신의 …… 씻으면서 : 은 거 생활을 뜻한다. 진(晉)나라 손초(孫楚)가 숨어 살려고 하면서, “돌을 베고 물에 양치질하련다.[枕石漱流]”라고 말해야 할 것을, “물을 베고 돌로 양치질하련다.[枕流漱石]”라고 잘못 말했는데, 왕제(王濟)가 그 말을 듣고서 잘못을 지적하자, 손초가 “물을 베는 것은 속진(俗塵)에 찌든 귀를 씻어 내기 위함이요, 돌로 양치질하는 것은 연화(煙火)에 물든 치아의 때를 갈아서 없애려 함이다.”라고 대답했던 고사가 전한다. 《世說新語 排調》
[주D-003]사령(四靈) : 태평 시대에 출형한다는 용(龍), 기린(麒麟), 신귀(神龜), 봉황(鳳凰)을 가리킨다.
[주D-004]천수(天數)인 …… 하였으니 : 천 수(天數)는 양(陽)으로 1ㆍ3ㆍ5ㆍ7ㆍ9이고, 지수(地數)는 음(陰)으로 2ㆍ4ㆍ6ㆍ8ㆍ10인데, 1과 6이 합쳐져서 수(水)가 되고, 2와 7이 합쳐져서 화(火)가 되는 등, 수(水)ㆍ화(火)ㆍ목(木)ㆍ금(金)ㆍ토(土)의 순서대로 음양(陰陽)에서 오행(五行)이 생성된다고 하는 학설을 말한다. 《주역》 계사전 상(繫辭傳上)과 《근사록(近思錄)》 권1 〈태극도설(太極圖說)〉의 주(註)에 대략적인 내용이 나와 있다.
[주D-005]사람들이 …… 때문이다 : 《맹자》 진심 상(盡心上)에 나오는 내용을 인용한 것이다.
[주D-006]태화봉(太華峯) …… 연꽃 : 한 유(韓愈)의 칠언 고풍(七言古風)인 〈고의(古意)〉 첫 구절에 “태화산 정상 옥 연못에 피는 연꽃은, 꽃이 피면 십 장이요 뿌리는 배 같다네.[太華峯頭玉井蓮 開花十丈藕如船]”라는 표현이 나온다. 《韓昌黎集 卷3》 중국의 오악(五岳) 중 서악(西岳)에 해당하는 태화산의 중봉(中峯)을 연화봉(蓮花峯)이라고 하는데, 그 위에 못이 있어 천엽(千葉)의 연꽃이 핀다는 전설에서 연유한 것이다.
[주D-007]생활 환경이 …… 해 나가니 : 《맹자》 진심 상(盡心上)의 “거처가 기질을 바꾸고 봉양이 체질을 바꾼다.[居移氣 養移體]”는 말을 전용(轉用)한 것이다.
훤정기(萱庭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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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詩)에 이르기를 “어디에서 훤초를 하나 얻어 와, 우리 집 뒷마당에 심어 볼거나.[焉得諼草 言樹之背]”라 고 하였는데, 이를 해설하는 이가 망우초(忘憂草)라고 하였고, 자서(字書)를 보면 훤(萱)이 또한 망우초라고 풀이하고 있다. 훤(諼)은 잊는다는 말이니 바로 근심을 잊는다는 뜻이요, 훤(萱)이라는 글자 속에는 선(宣)이 들어 있으니 답답함을 푼다는 말이다. 마음이 답답할 때 풀어 버리면 통창(通暢)하게 되고, 마음에 근심이 있을 때 잊어버리면 즐겁게 되는데, 즐겁게 되면 어버이의 뜻을 알고 잘 따르게 되어 어버이도 즐겁게 되고, 통창하게 되면 천지(天地)에도 통해져서 천지가 또한 평온해지게 마련이다.
이렇듯 천지가 평온해지도록 하고 부모님이 즐겁게 되도록 하는 것이야말로 요순(堯舜)이 시옹(時雍)의 정치를 펼친 도리라고 할 것이니, 이는 아무나 미칠 수 없는 경지이다. 그런데 그 도리의 소재(所在)를 찾아보려면 상(象)으로 드러나 있는 것을 통해서 알 수가 있고, 상으로 드러나 있는 것을 찾아보려면 바로 훤(萱)을 통해서 알 수가 있다. 그러고 보면 훤이라는 것이 비록 하찮은 물건이고 또 그리 중요하지 않은 글자로 보일지 몰라도, 그 속에 천리(天理)와 인정(人情)의 도리가 밝게 드러나 있는 만큼, 정체(政體)와 국풍(國風)과도 밀접한 관련성을 지니고 있다고 할 것이다. 그래서 내가 일찍이 이 시를 읽고 음미하면서 뜻을 같이하는 이와 강론(講論)해 보려고 생각한 지가 오래되었다.
나의 문생(門生) 중에 염정수(廉廷秀)라는 자가 있는데, 자(字)를 민망(民望)이라고 하였다. 그런데 그가 하루는 나를 찾아와서 말하기를, “저의 백씨(伯氏)는 자신의 거처를 국파(菊坡)라고 이름하고, 중씨(仲氏)는 자신의 거처를 동정(東亭)이라고 이름하였습니다. 그런데 못나고 어리석은 제가 요행히 진사과(進士科)에 입격하였으므로, 세 아들 모두가 급제(及第)한 데 따른 관례가 적용되어 모친에게 국가의 늠료(廩料)가 지급되기에 이르렀습니다. 이에 우리 형제 세 사람이 기운을 합치고 마음을 같이하면서, 모든 기거(起居)와 동작(動作)을 함에 있어 항상 서로 살피고 서로 권유하며 오로지 착하게 되려고 노력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제가 나름대로 자신의 분수도 헤아리지 않은 채 거처를 훤정(萱庭)이라고 이름 지어 볼 생각을 갖게 되었으니, 원컨대 선생께서 그 뜻을 대략 서술해 주셨으면 합니다.” 하였다.
그래서 내가 시(詩)를 인용하여 대략 글자의 뜻을 설명한 다음에, 다음과 같이 그에게 거듭 일러 주었다.
하늘과 땅 사이에 기(氣)가 충만해 있는데, 사람은 물론이고 다른 생물들도 모두 이 기를 받아서 살아가고 있다. 그런데 무리를 나누어 같은 종류끼리 모여 살면서, 물은 축축한 곳으로 우선 번져 가고 불은 건조한 곳으로 먼저 타 들어가는 차이를 보이는 등, 외면적으로는 각양각색으로 어지럽게 뒤섞여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내면적으로는 그야말로 질서 정연하여 찬연히 빛나는 가운데 그 조리(條理)가 한 번도 문란해진 적이 없다고 하겠다.
사 군자(士君子)가 소년 시절에 글을 읽으며 사물의 이치를 탐구하면 천하의 사리(事理)에 밝아질 수 있을 것이요, 장년 시절에 임금을 섬기며 사물을 다스리게 되면 천하의 사리에 공평해질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마음이 넓어져서 사사로움이 없게 될 것이니 나의 기운에 무슨 누(累)가 되는 일이 있을 것이며, 마음이 활짝 펴지면서 쾌활해질 것이니 나의 마음에 무슨 손상되는 일이 있을 것인가. 화기가 감돌면서 모든 일이 순리대로 전개되고 얼음이 녹듯 모든 갈등이 해소될 것이니, 그 사이에 어찌 털끝만큼이라도 서로 어긋나는 점이 있을 수 있겠는가.
민망(民望)은 나이가 매우 연소한데도 학식이 무척이나 풍부한데, 여기에 또 한 세상의 문사(文士)들과 교유하고 있으니, 습감(習坎)의 대상(大象)이 벌써 드러났다고 하겠다. 그렇기 때문에 뜻이 독실하여 방만(放漫)한 데에 빠져들지 않고, 이를 힘껏 실천에 옮겨 허탄(虛誕)한 데로 치달리지 않으니, 안으로 반성하여 마음에 비추어 보아도 걱정할 것이 없고 답답할 것이 하나도 없다 하겠다. 그리하여 오직 천지를 섬기고 부모를 섬기는 그 마음을 가지고 다시 임금을 섬김으로써, 가화(嘉禾)와 주초(朱草) 같은 상서(祥瑞)가 곧장 전야(田野)에 두루 나타나게 하려 하고 있으니, 그 마음가짐이 정말 원대하다고 할 만하다.
시의 첫머리에서 “우리 님은 용감하신 나라의 인걸[伯兮朅兮邦之桀兮]”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나라의 인걸이란 다른 재주나 덕행의 소유자를 뜻하는 말이 아니다. 그것은 오직 부모에게 순종하고 천지에 통하여, 자기 몸으로 직접 요순의 시옹(時雍)의 도리를 드러내는 사람을 말함이니, 민망은 그렇게 되도록 힘써야 할 것이다.
[주D-001]어디에서 …… 볼거나 : 《시경》 위풍(衛風) 백혜(伯兮)에 나오는 내용이다.
[주D-002]시옹(時雍) : 《서경》 요전(堯典)에 나오는 ‘오변시옹(於變時雍)’의 준말로, 백성들이 크게 교화되어 천하에 화평한 기운이 감도는 치세(治世)를 이루게 되었다는 뜻이다.
[주D-003]무리를 …… 등 : 《주역》 건괘(乾卦) 문언(文言) 구오(九五)에 이에 대한 내용이 나온다.
[주D-004]습감(習坎)의 대상(大象) : 《주역》 감괘(坎卦) 상사(象辭)에 “물이 계속해서 흘러내려오는 것이 습감괘이다. 따라서 군자는 이 상을 보고서 덕행을 항상 행하고 가르침에 관한 일을 익힌다.[君子以 常德行 習敎事]”라고 하였다.
천보산(天寶山) 회암사(檜巖寺) 수조기(修造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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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 암사의 주지(住持) 윤절간(倫絶磵)이 일찍이 나에게 말하기를, “보제(普濟)가 입적(入寂)한 뒤에 부도(浮屠)에 명(銘)을 하고 비석을 세웠습니다. 그러니 이제는 사찰의 일에 관한 시말(始末)을 기록해서, 보제가 이 사찰에 힘을 쏟아 끝없이 전해지도록 한 그 공적을 드러내야 하겠습니다. 그래서 이 일을 역시 선생에게 부탁하는 바이니, 사양하지 않으면 다행이겠습니다.” 하기에, 내가 승낙하였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서 문인(門人)인 각전(覺田)이 또 찾아와서 말하기를, “우리 스승께서 세상을 떠나신 뒤에 우리 문도들이 모두 사방으로 흩어지게 되었으니, 이 사찰이 예전처럼 유지될 수 있을지 알 수가 없습니다. 아, 슬픈 일입니다. 우리 스승의 도(道)야 세상의 추이(推移)에 따라 중시되거나 경시될 성격의 것이 아니라고 하겠습니다만, 사찰의 흥망성쇠로 말하면 뒷사람들에게 달려 있다고 할 것인데, 우리 문도들이 떨쳐 일으킬 수 있을지도 미리 알 수가 없습니다. 아, 슬픈 일입니다. 우리 스승께서 이 절의 공사를 처음 시작하셨습니다. 그런데 지시해 주신 그 땅과 머무르셨던 그 장소는 예전과 똑같건만, 이제는 까마득히 음성도 듣지 못하고 용모도 뵙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또 우리 스승께서는 바로 여기에서 불법(佛法)을 펼치셨습니다. 그런데 축도(祝禱)하는 그 법도와 방할(棒喝)의 가풍(家風)은 예전과 똑같건만, 이제는 위의(威儀)와 호령(號令)이 삭막해지고 말았습니다. 그리하여 원우(院宇)는 적막해지고 향화(香火)는 쓸쓸해진 가운데, 강월(江月 나옹(懶翁)의 호가 강월헌(江月軒)임)의 경계 역시 들판의 안개 속에 잠기고 말았습니다. 비록 그렇긴 하지만, 불성(佛性)은 사람마다 지니고 있는 것이고, 후생가외(後生可畏)라는 말도 있으니, 뒷날에 스승보다 뛰어난 제자가 나오지 않을지 또 어떻게 알겠습니까. 이것이 바로 우리 문도들이 스스로 괴로운 마음을 위로하는 까닭이기도 합니다. 다만 생각건대, 이 절로 말하면 철산 장로(鐵山長老)가 그 전에 편액(扁額)을 써서 내걸었고, 지공 화상(指空和尙)이 그 뒤에 땅을 측량했던 곳입니다. 그리고 산과 물의 형세가 서축(西竺)의 아란타사(阿蘭陀寺)와 완연히 똑같다고 한 것이 또 지공 자신이 한 말이고 보면, 여기가 복지(福地)라는 것은 너무도 분명한 사실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런데 훗날의 사람들이 혹시라도 이런 사실을 알지 못하고서 새로 지은 것이라고 지목하여 철거해 버리기라도 한다면, 보제의 문인들이 아름다운 인연을 맺기 위해 고심했던 그 뜻이 마멸되어 전해지지 않을 것입니다. 제가 나름대로 이 점을 슬프게 여긴 나머지 감히 도록(圖錄)을 가지고 오게 되었으니, 선생께서 붓을 잡고서 써 주셨으면 합니다.” 하였다.
이에 내가 살펴보건대, 보광전(普光殿) 5칸이 남쪽을 향해 서 있고, 그 전 뒤에 설법전(說法殿) 5칸이 서 있으며, 또 그 뒤에 사리전(舍利殿) 1칸이 있고, 그 뒤에 또 정청(正廳) 3칸이 있었다.
정 청의 동쪽과 서쪽에 방장실(方丈室) 두 곳이 있는데, 각각 앞 기둥이 세 개로 되어 있다. 동쪽 방장실의 동쪽에는 나한전(羅漢殿) 3칸이 자리 잡았고, 서쪽 방장실의 서쪽에는 대장전(大藏殿) 3칸이 자리 잡았다. 그리고 입실료(入室寮)가 동쪽 방장실의 앞에 서쪽을 향해 서 있고, 시자료(侍者寮)가 서쪽 방장실의 앞에 동쪽을 향해 서 있다.
설법전의 서쪽에는 조사전(祖師殿)이 있고, 또 그 서쪽에는 수좌료(首座寮)가 있으며, 설법전의 동쪽에는 영당(影堂)이 있고, 또 그 동쪽에는 서기료(書記寮)가 있는데, 모두 남쪽을 향하였다. 그리고 영당의 남쪽에 서쪽을 향해서 향화료(香火寮)가 서 있고, 조사전의 남쪽에 동쪽을 향해서 지장료(知藏寮)가 서 있었다.
보광전의 동쪽에서 조금 남쪽으로 전단림(旃檀林)이 있는데, 동운집(東雲集)은 서쪽을 향하였고, 서운집(西雲集)은 동쪽을 향하였다. 동운집의 동쪽에는 동파침(東把針)이 있는데 서쪽을 향하였고, 서운집의 서쪽에는 서파침(西把針)이 있는데 동쪽을 향하였다. 그리고 천랑(穿廊) 3칸이 서승당(西僧堂)과 붙어 있으면서 보광전을 마주 보고 서 있다.
정문(正門)은 3칸으로 되어 있다. 정문 동쪽에 천랑 6칸이 동객실(東客室)의 남쪽에 잇닿아 있고, 정문 서쪽에 열중료(悅衆寮) 7칸이 서 있다. 여기서 꺾여서 북쪽으로 7칸짜리 건물이 있으니 그것이 동료(東寮)이다. 정문의 동쪽에 서쪽을 향한 5칸 건물이 동객실이요, 그 서쪽에 동쪽을 향한 5칸 건물이 서객실(西客室)이다. 열중료 남쪽에 관음전(觀音殿)이 있고, 그 서쪽에 동쪽을 향한 5칸 건물이 욕실(浴室)이다.
부사료(副寺寮) 동쪽에 미타전(彌陀殿)이 있으며, 도사료(都寺寮) 5칸이 남쪽을 향하고 있다. 그 동쪽에는 고루(庫樓)가 있고, 그 남쪽에는 심랑(心廊) 7칸이 있는데 미타전과 붙어 있으며, 그 북쪽에는 장고(醬庫) 14칸이 있다. 고루는 동쪽에 12칸이 있으며 문루(門樓)가 있다. 문루에서 동쪽으로 4칸이 있고, 거기에서 또 북쪽으로 꺾여 6칸이 있으며, 또 서쪽으로 꺾여 3칸이 있는데, 서쪽은 비어 있다.
정문을 마주 보는 방향에서 조금 동쪽으로 종루(鍾樓) 3칸이 있다. 종루의 남쪽 5칸 건물이 사문(沙門)이요, 종루의 서쪽에 동쪽을 향한 건물이 접객청(接客廳)이요, 종루의 동쪽에 북쪽을 향한 건물이 지빈료(知賓寮)이다. 접객청 남쪽에 동쪽을 향한 건물이 양로방(養老房)이요, 지빈료 동쪽에 서쪽을 향한 건물이 전좌료(典座寮)이다. 여기에서 꺾여서 동쪽 편에 향적전(香積殿) 7칸 건물이 있고, 향적전 동쪽 고루(庫樓) 남쪽에 원두료(園頭寮) 3칸이 서쪽을 향하고 있으며, 향적전 남쪽에 마구(馬廐) 4칸이 있다.
이렇게 해서 전체 건물 수가 모두 262칸에 이른다. 이 밖에 15척(尺)의 불상(佛像)이 일곱 개요, 또 관음(觀音)이 10척인데, 이는 각전(覺田)이 화주(化主)로서 모금(募金)한 것이다. 이 사찰의 웅장함과 화려함이야말로 동방의 으뜸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래서 강호를 두루 유람해 본 자들이 모두 말하기를 “비록 중국에 간다 하더라도 이런 사찰은 많이 찾아볼 수가 없다.”고 하는데, 이 역시 과장된 말이 아니다.
나는 평소에 불교를 좋아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현릉(玄陵 공민왕의 능호)이 일찍이 보제를 스승으로 대우하였기 때문에, 그를 경모(敬慕)하면서 감히 도외시하지 못하였다. 그런데 내가 또 왕명을 받들어 보제의 부도명(浮屠銘)을 짓는 과정에서 평생의 행적을 자세히 살펴보고는, 그가 결코 보통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을 더욱 알게 되었는데야 더 말해 무엇하겠는가.
그리고 불상(佛像)을 조성하고 탑(塔)을 세워도 공덕이 하나도 없다고 하는 말이 있긴 하지만, 보제의 도로 볼 때에는 그것은 논할 성격의 것이 아니라고 할 것이요, 따라서 윤절간이 간청을 하고 각전이 수고한 것을 헛되게 욕보일 수는 없다고 생각되었다. 그래서 공사가 언제 시작되고 언제 끝났는지 물어보았더니, 모년 모월이라고 대답하였다.
이에 내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유능하기도 하다. 어쩌면 그렇게도 쉽게 일을 마칠 수가 있었단 말인가. 보제의 도력(道力)이 사람의 마음을 감동시키지 못했거나 또 그 제자들이 일을 주관하는 자질을 갖추지 못했다면, 어떻게 이렇게까지 해낼 수가 있었겠는가. 그렇긴 하지만 기업(基業)을 새로 세우고 나서 후대에 법통(法統)을 전하여 길이 이어질 수 있게끔 하는 것이 군자의 행동이라고 할 것이니, 후세를 돌아보지도 않고 분수를 헤아리지도 않은 채 자신의 욕심대로만 하면서 사치만을 일삼는 것은 군자가 더럽게 여기는 바이다. 그러나 설혹 그렇다 하더라도, 보제는 이미 선견지명을 갖추고 있었을 것이니, 보제가 소원한 대로 도량(道場)이 조금도 쇠하는 일이 없이 더욱 흥성해질지 또 어떻게 알겠는가. 내가 그래서 기쁜 마음으로 기문을 쓰는 바이다.
[주D-001]방할(棒喝) : 선사(禪師)가 제자의 깨달음을 유도하기 위하여 언어 대신에 파격적으로 보여 주던 일종의 선기(禪機)로, 덕산 선사(德山禪師)의 몽둥이와 임제 선사(臨濟禪師)의 고함소리라는 뜻의 ‘덕산방 임제할(德山棒臨濟喝)’이 유명하다.
[주D-002]불상(佛像)을 …… 없다 : 불심천자(佛心天子)라고 일컬어질 정도로 불교를 숭상하며 불사(佛事)를 많이 일으켰던 양 무제(梁武帝)가 달마(達磨)에게 자신의 공덕이 어떠하냐고 물었을 때 달마가 “무(無)”라고 대답했다는 일화가 있다. 《碧巖錄 1則 評唱》
오관산(五冠山) 흥성사(興聖寺)의 전장법회(轉藏法會) 기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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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 성(京城)의 동북쪽, 천마산(天磨山)의 동남쪽, 고암(鼓巖)의 서쪽에 산봉우리 다섯 개가 서 있는데, 한데 모여 둥그렇게 에워싸고 있기 때문에 멀리서 바라보면 마치 하나처럼 보인다. 그래서 그 산의 이름을 오관(五冠)이라고 하였으니, 이는 봉우리 다섯 개의 형상을 취한 것 이외에 그 기막힌 경치가 또한 삼한(三韓)의 산 중에서 으뜸을 차지할 만했기 때문이었다.
정화공주 (貞和公主)의 부친인 보육(寶育)이 실로 여기에서 거처하였는데, 그는 바로 우리 태조(太祖)의 증조(曾祖)인 작제건(作帝建)의 외조부가 된다. 태조가 나라를 세워 왕업(王業)을 이룬 뒤에 그 집을 사원(寺院)으로 희사(喜捨)하고 이름을 숭복(崇福)이라 하였는데, 그 현판을 보면 이에 대한 내용을 알 수가 있다. 그 절은 그 뒤에 병화(兵火)로 소실되었는데, 고쳐 지을 겨를을 내지 못한 지가 오래되었다.
경효대왕(敬孝大王 공민왕)은 선조를 추모하는 뜻이 깊었다. 그래서 조종(祖宗)이 세운 법도는 빠짐없이 계승해서 다시 밝혔으며, 사원에 대해서도 옛것을 온전히 하고 더 새롭게 만들어서 모두 뜻한 바대로 되게 하였다. 그러고는 말하기를, “정화공주가 거처했던 이곳에 대해서 후비(后妃)들은 극진한 마음을 가져야 할 것이다.” 하였다.
그리하여 이로부터 노국공주(魯國公主) 자신이 공덕주(功德主)가 되어 건물과 돈과 양식 등을 모두 새롭고 넉넉하게 마련해 주는 한편, 또 대장경(大藏經)의 화주(化主)가 되어 장경의 서궤(書櫃)와 표지(標識) 등을 모두 가지런하게 정리해서 찬연히 빛나게 하였다. 그러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서 공주가 세상을 떠나자, 공주 부모의 진영(眞影)을 봉안(奉安)하고 시절(時節)에 따라 제사를 올렸는데, 현릉(玄陵)의 시대가 다하도록 쇠하는 일 없이 갈수록 풍성해졌으므로, 마침내 거대한 총림(叢林)을 성대하게 이루게 되었다.
지금의 주지(住持)는 대선사(大禪師) 내명(乃明)으로, 조계(曹溪)의 장로(長老)이다. 그가 시자(侍者)인 불혜(佛惠)를 나에게 급히 보내 기문을 청하면서 말하기를, “본사(本寺)에서 노국공주를 위해 장경을 전독(轉讀)하는 법회를 이미 세 차례나 거행하였습니다. 그 거룩한 공덕으로 말하면 영겁토록 전해질 것인바, 입으로 이루 다 말하기가 어려울 정도이니, 장차 현판에 써서 걸어 두어 뒷사람들에게 보여 주려고 합니다. 선생은 붓을 잡고 운수승(雲水僧)에게 글을 지어 줄 때에도 전혀 인색하게 대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더구나 선왕(先王)의 은혜를 받은 것이 결코 얕지 않으니, 이 기문을 기꺼이 써 주시리라고 확신하는데, 이것이 바로 내가 직접 찾아가서 뵙지 않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예우는 변변찮게 해 드리면서 요구하는 것이 크기만 한데, 이것 역시 선왕의 위령(威靈)을 의지하는 한편, 선생의 추모하는 마음이 독실해서 필시 사양하지 않으리라고 믿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였다.
이에 내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내가 듣건대, 내명 스님은 지금 나이가 67세인데 이 절의 주지로 있은 것만도 11년이나 된다 하니, 선왕의 지우(知遇)를 받은 것이 또한 얕지 않다. 그리하여 아침저녁으로 향을 피워 올리면서 선왕과 노국공주와 노국공주의 부모를 추모하고 있는데, 전생(前生)의 허물을 씻고 내생(來生)의 복을 많이 받도록 축원하리라는 것은 굳이 묻지 않아도 알 수가 있으니, 이는 선왕의 은혜를 저버리지 않으려는 마음에서라고 하겠다. 아침저녁으로 모시고 있는 신하들로 하여금 모두 내명 스님이 하는 것처럼 선왕의 뜻을 저버리지 않게 할 수 있다면, 이 어찌 다행스러운 일이 아니겠는가. 내가 밤낮으로 그렇게 되기를 소망하고 있기 때문에, 기쁜 마음으로 기문을 짓는 바이다.
무오년(1378, 우왕4) 정월에 쓰다.
지평현(砥平縣) 미지산(彌智山) 죽장암(竹杖菴)의 중영기(重營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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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려 각조(覺照)가 나의 집을 찾아와서 부탁하기를,
“세 상에서는 지평의 용문산(龍門山)으로 알고 있습니다만, 본래의 이름은 미지산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그 산속에 예전부터 개현(開現)이라는 암자가 하나 서 있었는데, 그 암자에 거처하면서 도를 깨친 이가 있었다고 합니다. 지금 그의 이름은 알 수 없습니다만, 그가 군왕으로부터 죽장(竹杖)을 하사받았기 때문에 죽장이라는 편액(扁額)을 내걸게 되었다고 산에 사는 사람들이 서로 그렇게 전해 오고 있습니다.
이 암자가 산속의 높은 곳을 차지하여 마치 심장 부위에 있다고 한다면, 정작 상원사(上院寺)는 배꼽 정도의 위치에나 있다고 할 것입니다. 그래서 이 암자에 올라서면 저 푸르른 숲과 뫼 바깥으로 멀리 벗어나 앞이 툭 터지는 상쾌한 기분을 맛볼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아래를 굽어보면 치악(雉岳)과 여강(驪江)이 마치 손바닥 안에 들어 있는 것처럼 보이는가 하면, 근처의 산봉우리들 역시 좌우에서 줄지어 에워싸고서 머리를 굽혀 절을 하고 있는 듯합니다. 이렇듯 특출하게 수려하면서도 너그럽게 두루 감싸는 기상을 지니고 있어서 사랑할 만도 하고 완상(玩賞)할 만도 한데, 사계절의 경치가 또 밤낮으로 변화하는 모습 역시 말로 다 표현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벽을 마주하고 참선하면서 마음이 재처럼 식게 되면 정경(情境)을 모두 잊게 마련인데, 거기에만 치우친 나머지 공적(空寂)한 경계로 빠져드는 것에 대해서는 불법(佛法)을 배우는 자가 또 염려하는 바입니다. 그래서 입정(入定)에서 일단 벗어나 소맷자락을 펄럭이고 눈썹을 추어올리면서 사방을 바라보노라면, 일만 리 창공에는 조각구름과 나는 새가 떠 있고, 병풍처럼 둘린 산과 흰 깁처럼 빛나는 강물이 좌우에서 비춰 줄 것이니, 이런 때에 안계(眼界)는 막힘없이 툭 터지고 심원(心源)은 밑바닥까지 투명해져서, 의망(疑網)이 떨어져 나가고 업장(業障)이 소멸되기에 이를 것입니다.
이 를 비유하자면, 병이 들어서 꼼짝도 하지 못하던 사람이 지팡이를 짚고서 일어나고, 길을 가다가 힘이 빠진 사람이 지팡이를 의지해서 다시 걷게 되는 것과 같은 이치라고 할 것입니다. 말하자면 외부의 경계(境界)가 계기가 되어 내부의 마음이 촉발되고, 바로 그 마음을 통해서 도(道)의 경지가 현현(顯現)함으로써, 그동안 애태우면서 힘을 기울여 왔던 커다란 의문 덩어리도 저절로 말없는 가운데 풀어지며 계합(契合)되는 경지를 맞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더구나 대나무로 말하면 속이 텅 비어서 칼을 대는 대로 쪼개져 나갈 것인데야 더 말할 게 있겠습니까. 이것이 바로 내가 이 암자를 다시 세우려 하는 이유입니다.”
하고, 또 말하기를,
“내 가 이 암자를 중수(重修)하려고 처음 뜻을 세웠을 때, 아무런 인연도 없었고 어떤 도움도 받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마침 유 대언(柳代言)의 부인인 원씨(元氏)가 산중을 찾아왔기에 내가 곧장 그 일을 이야기했더니, 부인이 흔쾌히 승낙하면서 스스로 공덕주(功德主)가 되어 주었습니다. 그리하여 정사년(1377, 우왕3) 봄 3월에 공사를 시작해서 가을 7월에 마무리를 하였으며, 다시 9월에 단청(丹靑)을 입혀서 10월에 낙성(落成)을 하였습니다. 이 암자가 비록 세 칸밖에 되지 않는다 하더라도, 부처님이 중앙에 거처하시고 승려가 좌우에서 모시고 있으니, 대총림(大叢林)과 다를 것이 뭐가 있겠습니까. 한 사람이 참된 마음을 내어 근원에 도달하면, 시방(十方)의 허공(虛空) 세계가 한꺼번에 와그르르 무너져 없어진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러고 보면 승가(僧家)의 수효나 건물 규모 따위는 우리들이 따질 성격의 것이 아니니, 부디 선생께서 한마디 말씀을 내려 기록해 주셨으면 합니다.”
하였다. 이에 내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각조 스님이 허공 꽃[空華]과 같은 이 인간 세상을 벗어나 자진해서 불법(佛法)에 입문하였고 보면, 이처럼 절급(切急)한 심정으로 마음속에서 건율태(乾栗駄)를 찾아 금강(金剛)처럼 무너지지 않는 경지를 얻으려고 하는 것이 또한 당연하다고 하겠다.
그 런데 좌구(坐具)를 펴 놓은 이 하나의 공간을 삼천 대천세계(三千大千世界)와 비교해 본다면 대소의 차이가 원래 정해져 있다고도 하겠으나, 삼천 대천세계가 일어났다 사라졌다 하는 것은 또 방촌(方寸)의 마음을 벗어나지 않는다고 할 것이요, 방촌의 마음을 찾는 일은 또 마땅히 좌구를 펴 놓은 이 하나의 공간에서 이루어져야 할 것이니, 그렇게 본다면 스님이 들어앉은 이 하나의 방을 어찌 작다고 할 수가 있겠는가. 이것이 바로 한산자(韓山子)가 기문을 쓰는 이유이기도 한데, 뒷날 이 글을 읽는 이들이 기롱이나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기미년(1379, 우왕5) 5월에 짓다.
[주D-001]정경(情境) : 정(情)은 사물을 대하여 인식하는 사람의 주관적인 마음을 가리키고, 경(境)은 인식의 대상이 되는 외부의 객관적인 현상을 가리킨다.
[주D-002]한 사람이 …… 있습니다 : 송 (宋)나라 소철(蘇轍)의 〈서전등록후(書傳燈錄後)〉에, 붕언 상좌(朋彦上座)가 스님을 방문하자, 스님이 “한 사람이 참된 마음을 내어 근원에 도달하게 되면 시방의 허공 세계가 한꺼번에 와그르르 무너지는 법이다. 지금 천태산이 우뚝 서 있는데, 어떻게 하면 와그르르 무너져 버리게 할 수가 있겠는가?[一人發眞歸源十方虛空 一時消隕 今天台嶷然 如何得消隕去]”라고 물었다는 말이 나온다.
[주D-003]건율태(乾栗駄) : 범어(梵語) hrdaya의 음역(音譯)인 건율타야(乾栗陀耶)의 다른 말로, 중생이 본래 가지고 있는 여래장(如來藏)의 마음, 즉 불성(佛性)을 뜻한다.
여강현(驪江縣) 신륵사(神勒寺)의 보제 사리석종(普濟舍利石鐘) 기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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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 제가 여흥(驪興)의 신륵사에서 입적(入寂)할 당시에 신령스러운 이적(異蹟)이 성대하게 일어났으므로, 그동안 의심했던 자들은 오해가 풀리고, 믿었던 자들은 더욱 분발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천 년 뒤에까지 보제에 대한 외경심(畏敬心)을 일으키게 하려고 꾀한 나머지, 불당을 지어서 진영(眞影)을 걸어 놓는가 하면, 석종(石鐘 종 모양의 사리탑)을 만들어서 사리(舍利)를 봉안하는 등, 그 일을 위해서 대개 하지 않는 것이 없었다.
이때 각신(覺信)이라는 승려가 실로 석종을 조성하는 일을 주관하였다. 그러자 각주(覺珠)라는 승려가 빗돌을 구해서 장차 그 일을 기록해 둘 목적으로, 나에게 기문(記文)을 청하면서 말하기를, “염 정당(廉政堂 염흥방(廉興邦))이 천녕(川寧)에 있을 적에 우리 절을 왕래하였습니다. 그래서 내가 이 일에 대해서 이야기했더니, 염공이 흔쾌히 말하기를 ‘내가 서울에 가면 스님을 위해서 한산자(韓山子)에게 한마디 말을 부탁할 것인데, 한산자도 필시 사양하지 않을 것이다.’ 하였습니다. 바라건대, 선생께서 한마디 말씀을 내려 주셨으면 합니다.” 하기에, 내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강 월헌(江月軒)은 보제가 생전에 거처하던 곳이다. 보제의 육신은 불길 속에 이미 사라졌지만, 강과 달은 여전히 예전과 다름이 없다. 이제 장강(長江)을 굽어보고 있는 신륵사 위에 석종이 우뚝 세워지게 되었으니, 달이 뜨면 석종의 그림자가 강물 위에 거꾸로 비쳐 흔들리게 될 것이요, 이와 함께 하늘빛과 물 색깔이 서로 비추는 가운데, 등불의 그림자와 피어오르는 향의 연기가 그 속에 한데 어울리게 될 것이니, 강월헌이라고 하는 곳 역시 비록 억겁(億劫)의 세월을 지난다 할지라도 보제가 살아 있을 때와 변함이 없게 될 것이다.
지금 보제의 사리가 사방으로 흩어져서 높은 산속의 구름과 안개 가운데에 있기도 하고, 일반 민가의 연기와 티끌 속에 있기도 한데, 어떤 이는 머리에 이고서 달리기도 하고 어떤 이는 팔로 감싸고서 잠을 자기도 하니, 사리를 받들어 모시는 그 모습을 보제가 살아 있을 때와 비교해 본다면, 열 배나 더 차이가 날 뿐만이 아니라고 하겠다. 그런데 더군다나 신륵사로 말하면 보제가 입적한 곳인데야 더 말할 나위가 있겠는가. 그러고 보면 각주 스님이 사리에다 온통 마음을 쏟는 것도 당연한 일이라고 하겠다.
그리고 신륵사로 말하면 보제로 말미암아 웅장한 도량(道場)으로서의 면모를 갖추게 되었으니, 장차 세월이 아무리 흐른다 하더라도 그 명성이 실추되는 일은 없을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 또 굳고 단단한 석종이 세워지게 된다면, 비단 신륵사와 함께 시종(始終)을 같이하게 될 뿐만이 아니라, 장차 이 강과 이 달로 더불어 또 무궁한 세월을 함께하게 될 것이다.
아, 본체[理]의 차원에서 본다면, 허공 꽃과 같은 이 인생이 짧은 것이 아니요, 영겁의 세월이라고 해서 긴 것이 아니라고 하겠지만, 현상[事]의 측면에서 본다면, 이 세계는 또한 필연적으로 생성과 소멸의 과정을 거치게 마련이다. 그런데 세계가 비록 생성하고 소멸한다 할지라도, 사람의 본성만큼은 항상 변함없이 여전하다고 할 것이다.
그렇다면 보제의 사리를 대할 때에도, 생성하고 소멸하는 이 세계의 측면에서 보아야 할 것인가, 아니면 항상 변함없이 여전한 사람의 본성이라는 차원에서 보아야 할 것인가? 이에 대해서는 아무리 어리석은 일반 대중이라도 무엇을 택해야 할지 또한 알 것이다. 따라서 뒷날 사리를 예배(禮拜)하는 이들이 보제의 높은 정신을 흠뻑 맛보고 돌아가서 자기 마음속의 본성을 찾는다면, 그때에 비로소 보제의 은혜에 보답할 수가 있게 될 것이다. 만약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보제의 도(道)는 보제 자신의 도일 뿐이니, 우리들에게 무슨 의미가 있다고 하겠는가. 이상의 내용으로 기문을 삼으면 어떨까 싶다.
양헌기(陽軒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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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 성부원군(龜城府院君) 김공(金公)은 천력(天曆) 연간에 황제를 섬기면서 규장각(奎章閣)에서 독서하였다. 당시에 우강(盱江) 게 문안공(揭文安公 게혜사(揭傒斯))이 규장각의 강관(講官)으로 있었으므로, 김공이 제자의 예를 갖추어 깍듯이 받들어 모셨다. 그러고는 때때로 공이 우거(寓居)하고 있는 곳으로 찾아가 심오한 뜻을 질문하면서 마침내 경사(經史)에 통달했으며 시장(詩章)을 익히기도 하였다. 그리고 그 뒤 지정(至正 원 순제(元順帝)의 연호) 연간에 이르러 황제로부터 후한 예우를 받기도 하였다.
공 은 누차 관직을 옮긴 끝에 인장(印章)을 찬 대경(大卿)의 지위에까지 이르렀는데, 그 자리는 상과 가까운 데다 관아가 또 궁금(宮禁) 안에 있었다. 그래서 자연히 부유하고 존귀한 신분의 사람들과 지내게 되었는데도, 공은 속기(俗氣)를 벗어나 화려하고 사치스러운 일을 하는 일이 없이, 유아(儒雅)한 진신(搢紳)들과 어울려 노닐기를 즐겨 하였다. 그리하여 날씨가 화창하고 경치가 좋은 날에는 사람들을 불러 구가(謳歌)하고 서로들 번갈아 가며 창화(唱和)하면서 성정(性情)을 닦아 길렀으니, 이는 시의 흥취를 깊이 터득했기 때문이라고 하겠다.
공은 직숙(直宿)을 하다가도 어버이에 대한 생각이 나면 그때마다 상에게 말미를 청하곤 하였는데, 상이 그 요청을 특별히 받아들여서 향(香)을 내려 주며 역마(驛馬)를 타고 돌아가게 한 것이 두세 차례나 되었다. 그리하여 공이 금강산(金剛山)에 가서 상을 위해 축수(祝壽)하고 나서는, 고당(高堂)에 돌아와 술잔을 올리며 어버이의 장수를 기원하곤 하였다. 이렇듯 어버이가 즐거워하는 것을 오직 공의 기쁨으로 삼으면서 어버이가 계신 곳에 항상 화기(和氣)가 감돌게 하였으므로, 사람들이 지금까지도 그 일을 일컫고 있다. 그리고 공의 풍류가 한가롭고 아취(雅趣)가 있었으므로 선배인 석유(碩儒)들이 공과 함께 많이 노닐었는데, 나의 선군(先君)인 가정공(稼亭公)도 그중의 한 분이었다.
또 공은 충의(忠義)에 입각하여 거취(去就)를 결정하는 큰 절조(節操)를 지니고 있었으니, 시류(時流)에 편승하여 가볍게 행동하는 일은 또한 있지 않았다. 가령 현릉(玄陵)이 기축년에 뜻을 얻지 못했을 당시에 변함없이 뜻을 지킨 것만 보아도 뭇사람들보다 훨씬 뛰어난 것을 알 수 있으니, 정말 군자(君子)라고 일컬을 만하다고 하겠다. 그리하여 이로 인해서 현릉이 공을 더욱 애지중지하였으니, 공이 독서를 통해서 얼마나 깊이 터득했는지를 또한 알 수 있다.
지금 공이 천녕현(川寧縣)에 거처하면서, 산이 있는 곳이면 올라갈 수가 있고 물이 있는 곳이면 내려다볼 수가 있으니, 지팡이 짚고 나막신을 신고서 왔다 갔다 하는 그 즐거움으 로 말하면, 염동정(廉東亭 염흥방(廉興邦))도 얻을 수 없었던 것이라고 하겠다. 공이 지금 이 좋은 시절을 당하여 음풍농월(吟風弄月)하면서 하늘과 땅 사이를 오만하게 흘겨보노라면, 전날 번화하고 북적거렸던 인물의 성대함이라든가 읍양(揖讓)하고 주선(周旋)했던 예법의 아름다움 같은 것은 아예 녹아 없어져서 생각도 나지 않고 몽매간(夢寐間)에 그저 황홀하기만 할 뿐 더 이상 털끝만큼도 미련이 남아 있지 않을 것이니, 우수(迂叟)의 독락(獨樂)도 이보다 더하지는 못할 것이다. 《시경(詩經)》에서 ‘즐거우셔라 우리 군자님[君子陽陽]’이라고 노래하였는데, 이것은 작은 벼슬에 자신을 숨기고 사는 이를 읊은 것이다. 그런데 공은 지금 푸른 산수(山水) 사이에 은거하고 있으니, 자취는 비록 다르다고 할지라도 그 마음만큼은 똑같다고 하겠다.
동 정(東亭)이 조정에 돌아오고 나서 나를 볼 때마다 늘 공을 칭찬해 마지않았는데, 이번에는 또 공의 부탁이라면서 양헌(陽軒)의 기문을 청하였다. 이에 내가 말하기를, “김공은 부친의 친구분이시니, 의리상 사양할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내가 오래도록 병이 든 몸이라서 그 뜻을 곡진하게 밝힐 수가 없으니, 우선 하나의 이야기를 가지고서 답할까 한다. 양(陽)은 군자를 상징하고 음(陰)은 소인을 상징한다. 《주역(周易)》의 64괘(卦) 모두가 양을 일으켜 세우고 음을 억누르고 있는데, 이것은 바로 군자의 도를 길러 주기 위함이라고 하겠다. 성인(聖人)께서 이처럼 큰 교훈을 세상에 드리워 주셨고 보면, 음의 기운을 억눌러 소인의 힘을 소멸시켜야 하는 그 뜻이 또한 깊다고 하겠다. 환희(歡喜)와 열락(悅樂)은 양에 속하고, 심각(深刻)과 비참(悲慘)은 음에 속한다고 할 것인데, 여기에서는 다만 내가 알고 있는 것만을 가지고 말해 볼까 한다. 병 뒤끝에 느지막하게 일어나서는 처마 밑에서 따뜻한 햇볕을 등에 지고 있노라면, 몸이 펴지고 기운이 나면서 정신은 맑아지고 뜻은 굳건해지곤 한다. 그 즐거움이야말로 말로써는 다 형용할 수가 없는데, 내가 일찍이 그 햇볕을 임금님에게 바치고 싶어 했던 옛사람의 이야기를 가지고 스스로 징험해 보니, 참으로 음미할 만한 점이 있었다. 더군다나 지금 요동(遼東) 땅 요새(要塞)에는 여름에도 눈이 내릴 것이니, 김공이 햇볕을 바치고 싶어 하는 마음이 어느 날인들 있지 않겠는가. 아, 그런데 아쉽게도 내 머리칼이 또 반절이나 하얗게 세었으니, 하물며 김공이야 더 말해 무엇하겠는가. 이런 정도의 말로 책임을 메울까 하는데, 어떻게 생각하는가?” 하니, 동정이 말하기를, “그만하면 되었다.” 하였다.
그래서 마침내 이렇게 써서 기문을 삼기로 하였다.
[주D-001]현릉(玄陵)이 …… 당시에 : 고 려의 충목왕(忠穆王)이 세상을 떠나자, 충혜왕(忠惠王)의 동모제(同母弟)인 강릉군(江陵君), 즉 뒷날의 공민왕(恭愍王)이 왕이 되기에 합당하다고 모두들 생각하고 있었는데, 원(元)나라에서 충혜왕의 서자(庶子)인 저(㫝)를 입조(入朝)시켜 충정왕(忠定王)으로 세운 것을 말한다. 현릉은 공민왕의 능호(陵號)이다.
[주D-002]지팡이 …… 즐거움 : 노 년(老年)에 친한 벗과 어울리면서 자주 왕래하는 것을 말한다. 소식(蘇軾)의 〈답전제명서(答錢濟明書)〉에 “만약 이 일만 끝나면 공과 함께 지팡이 짚고 나막신을 신고서 서로 왕래하며 나의 여생을 즐기겠다.[若遂此事 與公杖屨往還 樂此餘年]”라고 한 데에서 유래한 것이다. 염흥방은 당시에 유배된 신분으로 천녕(川寧)에 있었기 때문에, 본문의 바로 뒤에서 그렇게 말한 것이다.
[주D-003]우수(迂叟)의 독락(獨樂) : 우수는 송(宋)나라 사마광(司馬光)의 호인데, 자기 정원의 참된 즐거움을 격조 있게 서술한 〈독락원기(獨樂園記)〉가 유명하다.
[주D-004]시경(詩經)에서 …… 것이다 : 《시경》 왕풍(王風) 군자양양(君子陽陽)에 나오는데, 모시(毛詩) 서(序)에 의하면, 군자들이 어지러운 세상을 당하여 적당히 녹(祿)이나 받고 생활하면서 몸을 보전하고 해를 멀리함을 노래한 것이라고 하였다.
[주D-005]햇볕을 …… 이야기 : 송 (宋)나라의 농부가 추운 겨울을 간신히 보내고 나서 해 뜬 봄날에 밭을 갈다가 자기 처에게 말하기를, “해를 등지고 있으면 얼마나 따뜻한지 아무도 모르니, 이 햇볕을 우리 임금에게 바치면 큰 상을 내릴 것이다.[負日之暄人莫知者 以獻吾君 將有重賞]”라고 했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列子楊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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