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태권도자료 ▒

태권도 40年] 21. 대한태권도협회 [중앙일보]

천하한량 2008. 10. 15. 17:53

올림픽 30年·태권도 40年] 21. 대한태권도협회 [중앙일보]

공수단·해병대 1개 대대씩 와서
대통령기 대회를 싸움판 만들어

태권도협회장이 된 직후 열린 대회에서 시상하고 있다.
 1971년 1월, 나는 대한태권도협회장 자리를 제의 받았다. 이종우(지도관), 임운규(청도관), 홍종수(무덕관) 관장 등이 나를 추천했다. 이때 태권도협회는 체육단체 중 가장 말썽이 많은 곳이었다. 무덕관·청도관·지도관·창무관·송무관·한무관·정도관·강덕원·오도관 등 30개 유파가 군웅할거 식으로 반목하고, 단증도 자기들 마음대로 발급했다.

체계도 잡혀 있지 않아 어떤 곳에서는 일본 공수도의 형(形)을 그대로 쓰고 있었다. 장충체육관에서 대통령기 대회를 할 때 공수단 1개 대대와 해병대 1개 대대가 와서 싸우는 바람에 난장판이 되기도 했다. 사범 교육 제도도 없고, 재정도 없었다. 협회장도 6개월마다 바뀌었다. 더구나 제3대 태권도협회장을 지낸 최홍희씨가 국제태권도연맹(ITF)를 창설해 태권도계가 양분되는 양상이었다.

다른 단체에는 실력자가 많았다. 축구 장덕진, 농구 이병희, 배구 이낙선, 사격 박종규, 빙상 김재규, 야구 김종낙, 복싱 김택수 등이었다. 이들은 나름대로 운영비도 마련하고 제각기 전용경기장 건립을 공약하고 있었다.

태권도협회장 직을 놓고 한 달간 고민한 끝에 받아들이기로 결정했다. 이왕 수락한 바에는 이름만 몇 개월 걸어놓고 있다가 나갈 수는 없었다. 협회장이라는 자리가 무보수 비상근 명예직이긴 하지만 책임감과 사명감이 요구되므로 굉장한 압력을 받는 자리다. 나는 태권도의 네 가지 비전을 제시했다. ▶국기화▶세계화▶국위선양의 기수▶호국의 기수였다.

태권도 역사도 화랑도에서 왔느냐, 일본 공수도의 일파냐 하면서 분명히 정립되지 않은 상태였다. 태권도를 우리 민족 고유의 전통 무예로 정립해 자부심과 긍지를 갖도록 해야 했다. 조직적 체계를 갖추고 분석적 방법을 써서 세계에 내놓아야 했다. 그래서 세계가 인정하도록 해야겠다는 계획을 세웠다.

태권도는 중앙도장이 없어 외국에서 누가 와도 보여줄 게 없었다. 매월 승단심사는 한성여고 체육관에서 열었고, 전국체전 때는 서울운동장 배구장에서 경기를 했다.

회장 취임 후 첫 기자회견 자리였다. 기자들이 중앙도장을 지을 계획이냐고 물었다. 그때 중앙도장을 갖는 것은 태권도인들의 소원이었다. 나도 경동고 시절부터 태권도와 가라테에 관심을 가졌고, 태권도 공인 5단이었기 때문에 당연히 중앙도장을 희망했다. 중앙도장을 짓겠다고 하자 이번엔 “얼마짜리냐”고 한다. 옆에 있던 이종우 지도관장에게 물었더니 쪽지에 ‘3억’이라고 써줬다. 너무 많은 것 같아서 “2억원”이라고 했더니 다음날 모든 신문에 ‘태권도 중앙도장 건립’이라는 기사가 나왔다.

당시에는 많은 경기단체가 매년 경기장을 짓는다고 발표했는데 정작 이뤄진 것은 태릉사격장뿐이었다. 한국 경제력이 그 정도일 때였다. 66년 아시안게임을 유치했다가 돈이 없어서 반납한 지도 얼마 안 됐다. 태권도 중앙도장인 ‘국기원’을 짓기 위한 노력을 시작했다.


김운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