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알앤엘 바이오’란 신약회사 회장으로 변신한 임창열 전 경제부총리. (photo 이경호 조선영상미디어 기자)
바이오 벤처 회장 된 임창열 전 부총리
“요즘 단기 외채 비중, IMF 직전보다 커
위기 다시 올 수도… 시급히 내수 살려야”
‘IMF 격동기’에 경제부총리를 맡았던 임창열(63)씨는 지난 11월 15일 “이대로 간다면 2~3년 내에 외화 유동성 위기가 또 올 수 있다”고 경고했다. 그는 한국은행 자료를 인용해 “2007년 우리나라의 총 외환보유고가 2590억달러이며 단기 외채는 1378억달러”라며 “현재 단기 외채 비중이 44.3%로, 10년 전 외환위기 직전의 36.6%보다 7.7%나 더 높은 상황”이라고 경고 이유를 밝혔다.
김영삼 정부가 IMF에 구제금융을 공식신청하기 이틀 전인 1997년 11월 19일, 경제사령탑을 맡아 IMF 금융지원 전 과정을 총괄한 그는 “엔화가 약세를 보이자 ‘저금리’라면서 엄청 끌어다 쓰지 않았느냐”며 “미국 주택담보 부실 대출 등으로 국제 경제가 냉각되면 이 자금이 순식간에 빠져나갈 수 있기 때문에, 하루 빨리 내수와 성장동력을 살려야 한다”고 역설했다. 그는 “경제적 측면에서 볼 때 지난 5년은 잃어버린 세월”이라 규정한 뒤 “제발 포퓰리즘 정책 좀 펴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임창열씨는 현재 줄기세포를 이용한 세포치료제와 천연물 신약을 개발하는 회사인 ‘알앤엘 바이오’의 회장으로 있다. 이 회사는 임 회장의 지인이 운영하는 회사다. 임 회장은 5년 전 ‘경기도의 힐러리’로 유명한 의사 주혜란씨와 이혼한 뒤 싱글로 지내고 있다.
“국민이 사실을 정확하게 알지 못하고 있어요.” 임 회장의 이야기는 1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갔다. “1997년 3월경부터 위기 경보가 계속 울렸습니다. 그런데 그걸 귀담아 듣지 못했지요. 그러다 상황이 악화된 겁니다. (IMF 구제금융을 신청하기 닷새 전인) 11월 16일 캉드쉬 IMF 총재가 비밀리에 입국했습니다. 그런데 전임 경제팀은 그 뒤에도 ‘IMF 구제금융을 받을 생각이 없다’고 했어요. 그래서인지 캉드쉬 총재도 ‘한국은 구제 금융에 대한 생각이 없다’고 했습니다.”
임 회장이 당시 조선일보와 연합통신의 보도를 꺼내 들었다. “경제팀이 교체된 11월 19일까지도 그랬어요. 한국이 아무런 요구를 않자, IMF가 ‘한국은 구제금융을 요청한 적이 없다’고 공식 발표를 했습니다. 그런데 전임 팀은 자기들 재임 중에 IMF행이 결정됐다고 했습니다. 이건 역사적 진실을 왜곡하는 겁니다.”
그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 역시 대선 국면이었어요. IMF는 ‘대선 후보들이 동의해줘야만 금융지원 프로그램을 가동할 수 있다’고 고집을 피웠어요. 정권이 어디로 갈지 모르는 상황이었으니까요. 그래서 11월 20일에 피셔 IMF 부총재를 만나고, 미국 재무차관보를 만났습니다. 그 자리에서 금융지원 약속을 받은 뒤 김대중·이회창 당시 후보의 양해를 얻었습니다. 그리고 그날 밤 기자회견을 하게 된 겁니다.”
임 회장은 “다시 그 상황으로 돌아간다 하더라도 선택의 여지는 없을 것”이라고 했다.
“다른 방법이 없었습니다. 미국은 ‘(한국을) 도와주겠다. 단, IMF를 통해서만 도와주겠다’고 선을 그어 놓은 상태였어요. 막다른 길이었습니다. 구제금융을 받지 않으면 모라토리움(채무불이행)을 선언해야 했어요. 그러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석유 공급도 끊기고, 식량 공급도 끊기지 않겠습니까? 외자가 모조리 빠져나가는 것은 말할 것도 없겠죠. 그땐 선택의 여지가 없었습니다.”
임 회장이 말을 이었다. “하지만 아쉬운 점은 있습니다. 남미와 아시아를 가리지 않고 획일적으로 고금리를 적용한 것이 하나예요. IMF에 ‘이렇게 금리를 높이면 한국 기업들 다 망한다’며 반대했습니다. 그런데 캉드쉬 총재가 ‘고금리 없이는 안 된다’고 자르더군요. ‘금리를 높이지 않으면 한국으로 외자가 들어오지 않는다’는 논리였어요. 그런데 결과적으로 IMF의 판단이 틀렸습니다. 금리를 30% 가까이 올렸지만 그동안 들어온 외자는 수천만 달러 규모에 불과했어요. 그러니까 금리를 높여도 외자가 들어오지 않은 것이죠. 결국 1997년 12월에 금리를 다시 내렸습니다. 적대적 M&A도 마찬가집니다. ‘이거 하면 한국에 살아남을 기업이 하나도 없다’고 강력하게 반대했습니다. 그래서 초기 얼마간은 적대적 M&A를 허용하지 않게 됐습니다.”
임 회장은 “지금의 경제 상황도 심상치 않다”고 말했다.
“버냉키 미 연방준비제도(FRB) 의장이 얼마 전 스태그플레이션 위험을 경고한 바 있습니다. 미국은 5년 동안 고성장·저물가를 이룬 나라입니다. 그런데 경기가 나빠지니까 주택을 담보로 돈을 빌린 사람들이 빚을 못갚게 된 거죠. 이게 부실채권으로 이어지고, 소비가 얼어붙게 되는 겁니다. 기름값은 오르는데 달러 가치는 내려갑니다. 우리는 수출로 먹고 사는 나라입니다. 그런데 미국 소비가 줄어들면 내수로 이걸 소화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 내수가 어떻습니까? 죽었잖습니까. 노무현 대통령은 대통령에 출마하면서 ‘7% 경제성장’을 공약으로 내걸었어요. 그런데 정부는 ‘내년 5% 성장’을 자랑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외국에선 다들 ‘5% 성장이 어렵다’고 보고 있습니다.”
그가 한국은행 자료를 꺼내 들었다. “2007년 우리나라의 총 외환보유고가 2590억달러입니다. 단기 외채는 1378억달러예요. 단기 외채 비중이 44.3%죠. 10년 전 외환위기 직전엔 36.6%였어요. 지금은 그때보다 7.7%나 더 높은 상황입니다. 외환위기 때도 단기외채 때문에 문제가 촉발된 겁니다. 세계 경기가 냉각되면서 이런 상태로 간다면 2~3년 내 외화 유동성 위기가 또 올 수 있습니다.”
임 회장이 말을 이었다. “물론 1997년 같은 위기는 아닐 것입니다. 그때보단 여러 모로 좋아졌으니까요. 하지만 지금은 정신 바짝 차려야 할 때입니다. 1997년에도 위기 경보는 있었습니다. 하지만 정부는 ‘우리 경제가 튼튼하다’고 했어요. 지금 정부는 ‘2만달러 시대’라고 자랑하고 있죠? ‘주가가 2000을 넘었다’고 자랑하고 있습니다. 그게 자기들이 한 겁니까? 이렇게 반기업적 정부가 어디 있습니까? 대기업이 신규 공장을 지으면, 대부분 외국에 짓습니다. 중국 산둥성에만 한국 중소기업이 2만개라고 합니다. 사실상 기업이 나라를 떠나고 있는 거예요. 거기다 각종 규제는 또 얼마나 많습니까. 세금은 또 얼마나 많습니까. 두바이는 법인세가 아예 없어요. 홍콩은 15%대 밖에 안 됩니다. 우리나라는 기업을 자식이게 물려주려면 그 기업을 팔아야 해요. 아이러니죠. 경제적 측면에서 보면, 지난 5년은 잃어버린 세월입니다. 제발 포퓰리즘 정책 좀 펴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 ▲ ‘니어(NEAR)재단’이란 연구소 이사장으로 있는 정덕구 전 차관보. (photo 유창우 조선영상미디어 기자)
‘니어재단’ 이사장 된 정덕구 전 차관보
“대선 광풍이 IMF 사태 악화시켜
상황적으론 지금도 그 때와 비슷”
‘IMF 구제금융’ 논의가 한창이던 1997년 11월 19일, 재정경제원 2차관보로 임명돼 IMF 협상 수석대표를 맡아 외채협상을 주도했던 정덕구(59)씨는 “1997년의 대선 광풍이 상황을 악화시켰다”며 “10년이 지난 지금, 또 다른 경제 위기 가능성이 있다”고 경고했다. 그는 “10년 전에도 여러 번의 경고 신호가 있었지만, 대선~총선으로 이어지는 정치적 이해관계 때문에 주목받지 못했다”며 “이번의 미국발 경제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선 정치가 실물 경제에서 손을 떼어야 한다”고 역설했다.
“마침 타이밍이 잘 맞았네. 모레 중국으로 가야 하기 때문에 오늘밖에 시간이 없었는데, 잘 왔어요.” 정덕구 이사장이 반갑게 손을 내밀었다. 그는 현재 ‘니어(NEAR) 재단’이란 연구소의 이사장으로 있으면서 모교인 고려대와 중국 인민대학에서 국제금융학을 강의하고 있다.
“사실 이런 연구는 정부가 해야 해요. 그런데 정부의 도움을 받으면 정부가 자꾸 간섭을 하게 되고, 정부가 간섭하게 되면 통계의 신뢰도가 떨어져요. 그래서 뜻이 맞는 사람들끼리 아예 연구소를 차렸어요.”
정 이사장이 말을 이었다. “한·중·일 3국 무역자유화를 통한 단일 시장, 나아가 3국 단일통화를 모색해 보자는 겁니다. 그래서 위기에 대한 대응능력을 갖추자는 겁니다. 최근의 환율 전쟁도 그래요. 약세를 보이는 엔화와 별로 움직이지 않는 위안화 사이에서 우리는 고전을 면치 못했잖아요? 고래 싸움에 새우등 터진 격이죠. 이런 고립현상은 갈수록 심화될 거예요. 무역·산업에서만 샌드위치가 되는 게 아니라 통화부문에서도 샌드위치 신세가 되는 거죠. 이걸 극복할 수 있는 방안을 찾자는 겁니다.”
정 이사장이 재단의 취지를 설명했다. “통화를 하나로 묶으면 우리는 13억 시장을 자유롭게 헤엄쳐 다닐 수 있어요. 미국 경제에 대항할 수도 있지요. 미국은 무역이나 재정에 있어서 적자를 면치 못하고 있어요. 이걸 다른 나라, 특히 동아시아로 전이하면서 위험도를 분산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중국이나 일본과 달리 우리는 그에 대항할 능력이 없어요. IMF도 따지고 보면 외화 유동성의 위기였어요. 그때 뼈저리게 느꼈죠. ‘한국이 형편없는 나라구나. 외국 은행 하나가 나라 경제를 통째로 좌지우지할 수 있구나. 국제금융제도라는 것은 더 이상 믿을 것이 못 되는구나’ 하고 말입니다.”
그가 말을 이었다. “위기가 터졌던 1997년 12월 5일, 1차로 구제금융 56억달러를 받아왔어요. 그런데 외국 은행들이 그 돈을 들고 나가더라고요. ‘한국이 망하면 손해다’ 이거죠. 하이에나를 보는 것 같았습니다. 그때 학자들 간에 나왔던 얘기가 커런시 스왑(currency swap)이었어요. ‘한 나라의 외화부족을 다른 나라가 메워주는 방식’을 논의했던 거죠. 그런데 그 다음은 뭐냐 이겁니다. 그 다음으로 논의된 것이 단일 시장이었습니다. 그럼 그 다음은 뭐냐? 단일 통화 구축입니다.”
흥미로운 논제였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중국이 단일 통화에 동의하겠느냐는 의문이 들었다. “물론 아직 어렵습니다. 중국은 금융제도도 개선해야 하고, 아직 개방도 되지 않았어요. 하지만 우리는 학자들이니까. 논의를 한번 해 보고, 로드맵을 만들어보자 이겁니다. 그래야 IMF 같은 위기를 극복할 수 있어요.”
이야기가 1997년으로 옮겨갔다. “당시엔 미국이 초기대응을 잘못한 측면이 있어요. 한마디로 한국을 이해하지 못했던 겁니다. 미국은 불똥이 한국까지 번지리라고 예상하지 못했던 것 같아요. 그리고 원화 환율이 한 번 밀리면 얼마나 밀리는지도 예측 못했던 것 같습니다. 막상 위기가 터졌을 때, 진화부터 하려 하지 않고 원인부터 따지려 했던 것도 잘못이었습니다. 하지만 더 큰 이유는 한국의 대선 ‘광풍’이었어요. 온 나라가 대선에 몰입돼 상황판단 능력을 상실했던 겁니다. 10년이 지난 지금도 그래요.”
이야기가 2007년 현재로 돌아왔다. “지금은 미국발 경제위기가 흐르고 있습니다. 전엔 주로 후진국에서 위기가 발생했죠. 하지만 이번엔 미국 본토입니다. 누가 무슨 힘이 있어서 미국을 도와줄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문제예요. 이번엔 국제 공조가 불가능하거든요. 각 나라가 그저 불똥이 튀지 않도록 막기에만 급급합니다. 경제엔 프리 런치(free lunch)가 없어요. 그 동안 미국은 인플레이션을 억제해왔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계속 경기가 좋아질 것’이라 낙관해 왔습니다. 그러면서 상업은행이 투자은행의 역할까지 해 왔어요.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가 그것입니다. 모기지(주택담보대출)가 증권화된 것이죠. 사람들이 대출을 받아 증권에 투자하고, 은행은 이걸 받아 다시 다른 데로 투자해서 눈덩이처럼 부피가 커진 겁니다. 거기에 투기펀드까지 가세했어요. 전체 규모가 얼마나 되는지 파악도 안됩니다. 이런 건 대차대조표에 나오지도 않아요.”
이야기가 심각해졌다. “미국 경제는 성장률이 1%만 떨어져도 냉각됩니다. 그러면 급속하게 소비가 위축되죠. 한국은 수출에서 치명타를 입게 되고, 이것이 약달러정책과 맞물리게 되면 우리 경제는 냉각될 수밖에 없습니다. 또 다른 시그널은 신용경색이에요. 예전에 미국의 대출 기한은 3년이었어요. 지금은 1주일입니다. 은행이 돈을 안 꿔줘요. 이것이 금융시장을 강타하게 되면 증시가 마비되죠. 이게 엉키면 세계적 위기가 오게 됩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정치적 안정입니다. 그리고 정치가 실물 경제에서 손을 떼야 해요. 정부가 외환시장에 개입하면 안됩니다. 우리 외환 보유고가 투기적 공격을 막을 만큼은 되니까, 맞을 만큼 맞고 나면 자연스럽게 회복할 수 있습니다.”
정 위원장은 1999년 5월~2000년 1월까지 산업자원부 장관을 지낸 뒤, 17대 국회의원(열린우리당·비례대표)을 지내다 “정치권에 실망했다”며 자진 사퇴해 이목을 끌었다.
“지금 12월 대선 갖고 난리를 치는 것도 다 총선 때문이에요. 정치인들은 ‘옳지 않다’고 느끼면서도 ‘표가 된다’고 판단되면 합니다. 저도 이해는 합니다. 하지만 그래선 안되죠.”
그는 최근 ‘IMF 징비록(懲毖錄·가제)’이란 이름의 회고록을 탈고했다. 징비록이란 ‘징계하여 후환을 경계한다’는 의미. 이 회고록엔 협상 주역으로서 보고 느낀 감회가 녹아 있다. 정 위원장은 이렇게 덧붙였다.
“곳곳에 위험 요소가 있어요. 현명한 나라의 국민은 이걸 관리가 가능한 정도로 작게 줄입니다. 미련한 나라는 위험을 방치하고 키웁니다. 그래서 결국 남의 손을 빌려서 해결하려 하게 되죠. 하지만 관리 가능한 리스크는 가끔씩 발생하는 것이 좋습니다. 그래야 건전한 긴장상태를 계속 유지할 수 있거든요. 이게 1997년 IMF를 보면서 얻은 제 결론입니다.”
강경식 전 부총리, 국가경영전략연구원 이사장
김인호 전 경제수석, 김인호경제연구소 대표
이경식 전 한은 총재, 21세기경영인클럽 회장
강만수 전 차관, 이명박 캠프 경제 브레인
윤진식 전 비서관, 한나라당 경제살리기 특위
최공필 전 연구원, 국정원 경제담당정보관
2007년 11월 21일은 우리나라가 국제통화기금(IMF)에 구제금융을 신청(1997년 11월 21일)한 지 꼭 10년이 되는 날이다. 아직도 기억에 생생한 악몽 ‘IMF’사태. 소용돌이치던 당시 격랑의 한복판에 있던 사람들은 지금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
1997년 격동기에 경제부총리를 맡은 강경식(71)씨는 자신이 1991년 설립한 비영리연구소 ‘국가경영전략연구원(NSI)’의 이사장을 맡고 있다. 그는 동부그룹 상임고문을 겸하고 있다. 2000년 총선에 무소속으로 출마하기도 한 그는 자신의 근황을 묻자 “다 지난 일이고 재판도 끝났는데 더 할 말이 있겠느냐”며 말문을 닫았다.
강 전 부총리는 김영삼 정부가 IMF에 구제금융을 신청하기 2일 전인 1997년 11월 19일 경질됐다. 김인호(65) 당시 청와대 경제수석과 함께였다. 두 사람은 이듬해인 1998년 5월 직무유기와 직권남용 혐의로 구속됐지만 법원은 “정책적 판단은 사법적 판단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며 무죄를 선고했다. 김 전 수석은 올해 7월까지 중소기업연구원장으로 있다 물러나 현재 ‘김인호경제연구소’의 대표로 있다. 그는 강경식 전 부총리의 국가경영전략연구원 이사로도 활동하고 있다. 김 전 수석은 11월 14일 현재 일본 후쿠시마에 출장 중이어서 통화가 이뤄지지 않았다.
당시 한국은행 총재로서 경제정책의 고삐를 쥐고 있던 이경식(76)씨는 ‘21세기 경영인클럽’의 회장이다. ‘21세기 경영인클럽’ 측은 “이 전 총재가 올 여름 미국으로 건너가 내년 귀국할 예정”이라고 했다.
1997년 ‘IMF협의단’ 단장으로 활동한 강만수(62) 당시 재경원 차관은 2003년 17대 총선 때 한나라당 공천심사위원을 맡은 뒤, 서울시정개발연구원장을 거쳐 이명박 후보 경제브레인으로 활동하고 있다.
외환시장 관리를 맡았던 원봉희(59) 당시 재경원 금융총괄심의관은 ‘김&장’ 변호사로 있다. 또 청와대 조세금융비서관이던 윤진식(61)씨는 한나라당 경제살리기 특위 부위원장이다. 변양호(53) 당시 재경원 정책조정과장은 2005년 토종 자본인 ‘보고펀드’를 설립해 대표를 맡고 있다.
1997년 당시 외환위기의 이상 징후를 포착, 경고한 최공필(49) 당시 한국금융연구원 경제동향팀장은 국가정보원 경제담당정보관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의 근황을 묻기 위해 지난 14일 전화를 했지만 연락이 닿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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