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재홍(安在鴻) 선생 생가
평택시 고덕면 두릉리 646. 이 건물은 해방을 전후한 시기에 시대의 선구자이며 대표적인 언론인으로 활동하였던 민세 안재홍선생(1891~1965)이 태어나 살던 집이다. 그는 안윤섭의 차남으로 태어나 수원 기독교계 학교로 진학한후, 서울 황성기독청년회(현YMCA) 중학부에 입학한다. 이곳에서 이상재, 남궁억, 윤치호 등에게서 많은 영향을 받는다.
월남 이상재의 권유로 일본 와세다대학 정경학부에 입학, 다양한 학문을 습득한다. 책벌레라는 별명이 붙을 만큼 밤을 새워가며 정치학·경제학·인류학·문학 등 다양한 신지식을 습득하였다. 그는 조선인 유학생 학우회를 결성, 조만식·송진우·장덕수·이광수 등과 교유하면서 독립운동에 가담하였다.
귀국후 중앙학교 학감, 조선일보 주필 및 사장 등을 역임하면서 언론 교육활동을 통한 민족계몽과 독립사상고취에 헌신하여 모두 아홉번에 걸쳐 옥고를 치르기도 하였다. 그는 고대사와 실학에 대한 연구에 몰두 하여 신채호의 저작을 《조선일보》에 소개했다. 이는 식민사관에 맞서 역사 연구를 독립운동의 한 방략으로 진행한 것이다. 「단군 연구」 「정약용 연구」와 같은 글을 저술하고 1940년부터는 필생의 작업인 『조선상고사』 저술을 위해 고향인 고덕면 두릉리에서 칩거하며 연구에 몰두한다. 오늘날에도 고조선 사회에 대한 기본 인식은 민세의 연구가 이룩한 중요한 업적의 하나로 사학계는 평가하고 있다. 일제는 항상 그를 요시찰인물로 감시했다.
해방 직후 미군정의 한인 최고책임자인 민정장관을 역임하고 1950년 평택에서 제2대 국회의원에 당선되었으나 6.25동란 중 납북되었다. 안재홍은 홍명희, 정인보와 함께 한국근현대 3대 천재로 알려질 만큼 다양한 분야에서 많은 업적을 남겼으며 높은 절개를 가진 국가적인 선비로 평가 받고 있다.
가옥은 원래 대문간채까지 있었던 것이나 지금은 안채와 사랑채만 남아 있다. 건물 상량문에 의하면 안채는 1914년, 사랑채는 1932년에 건립되었다. 안채는 "ㄱ"자형 평면의 전형적인 경기도 지역의 건축형태를 따르면서 20세기 초 생활 상의 변화를 반영하여 부엌과 대청 사이에 연결 통로를 설치하였다. 사랑채 역시 전통가옥의 형태를 유지하면서도 유리창을 설치하는 등 시대적인 변화를 적절히 가미하고 있다.
평택시 고덕면 두릉리 646. 이 건물은 해방을 전후한 시기에 시대의 선구자이며 대표적인 언론인으로 활동하였던 민세 안재홍선생(1891~1965)이 태어나 살던 집이다. 그는 안윤섭의 차남으로 태어나 수원 기독교계 학교로 진학한후, 서울 황성기독청년회(현YMCA) 중학부에 입학한다. 이곳에서 이상재, 남궁억, 윤치호 등에게서 많은 영향을 받는다.
월남 이상재의 권유로 일본 와세다대학 정경학부에 입학, 다양한 학문을 습득한다. 책벌레라는 별명이 붙을 만큼 밤을 새워가며 정치학·경제학·인류학·문학 등 다양한 신지식을 습득하였다. 그는 조선인 유학생 학우회를 결성, 조만식·송진우·장덕수·이광수 등과 교유하면서 독립운동에 가담하였다.
귀국후 중앙학교 학감, 조선일보 주필 및 사장 등을 역임하면서 언론 교육활동을 통한 민족계몽과 독립사상고취에 헌신하여 모두 아홉번에 걸쳐 옥고를 치르기도 하였다. 그는 고대사와 실학에 대한 연구에 몰두 하여 신채호의 저작을 《조선일보》에 소개했다. 이는 식민사관에 맞서 역사 연구를 독립운동의 한 방략으로 진행한 것이다. 「단군 연구」 「정약용 연구」와 같은 글을 저술하고 1940년부터는 필생의 작업인 『조선상고사』 저술을 위해 고향인 고덕면 두릉리에서 칩거하며 연구에 몰두한다. 오늘날에도 고조선 사회에 대한 기본 인식은 민세의 연구가 이룩한 중요한 업적의 하나로 사학계는 평가하고 있다. 일제는 항상 그를 요시찰인물로 감시했다.
해방 직후 미군정의 한인 최고책임자인 민정장관을 역임하고 1950년 평택에서 제2대 국회의원에 당선되었으나 6.25동란 중 납북되었다. 안재홍은 홍명희, 정인보와 함께 한국근현대 3대 천재로 알려질 만큼 다양한 분야에서 많은 업적을 남겼으며 높은 절개를 가진 국가적인 선비로 평가 받고 있다.
가옥은 원래 대문간채까지 있었던 것이나 지금은 안채와 사랑채만 남아 있다. 건물 상량문에 의하면 안채는 1914년, 사랑채는 1932년에 건립되었다. 안채는 "ㄱ"자형 평면의 전형적인 경기도 지역의 건축형태를 따르면서 20세기 초 생활 상의 변화를 반영하여 부엌과 대청 사이에 연결 통로를 설치하였다. 사랑채 역시 전통가옥의 형태를 유지하면서도 유리창을 설치하는 등 시대적인 변화를 적절히 가미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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