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남 이상재 선생의 지도자상
전택부 서울 YMCA 명예회장
*6월 13일 강연을 요약한 것임
월남月南 李商在 선생(1850 - 1927)이 태어난 지 올해로 150주년이 된다. 월남 선생은 지금 이 시대에 꼭 널리 알려져야 할 분이라고 나는 확신한다.
선생는 위대한 정치가였다. 이런 표현을 쓰는 이유는 다음과 같은 일이 있었기 때문이다.
1972년에 내가 중앙일보에 <남기고 싶은 이야기>를 72회 연재한 적이 있었는데 어느날 정구영 선생에게서 만나고 싶다는 연락이 왔다. 방문해 보니 북아현동 조그마한 기와집에 하얀 옷을 입고 사랑방에서 나를 맞이하여 주었다. 그분은 "나도 YMCA 출신입니다" 라고 말하며 - 1912 YMCA년 학관 상과 출신 - 하시는 말씀이 "월남 이상재 선생을 노소동락老少同樂하며 농담을 잘하시는 분으로만 알았는데, 지금 생각하니 정말 '위대한 정치가'요. 살아계시면 우리나라가 이렇게 갈라지고 싸우고 파쟁하진 않았을 거요"하며 눈물을 참지 못하는 거였다.
나는 선생의 '큰 정치가'로서의 면모를 다음의 10가지로 정리해 보았다.
1. 나라 사랑의 큰 어른, 원로 중의 원로다.
원로라는 말이 여러 가지로 해석되겠지만 나이로만 해도 선생은 19-20세기에 살아있는 지도자중 가장 나이 많았고 오래사신 분이다.
2. 불세출의 야인野人이다.
선생은 평생 야인으로 지냈다. 18살 때 과거에 실패한 후에 3세까지 13년간 박정양 선생의 사랑방에서 심부름꾼으로 지냈다. 일평생 야인생활을 하였다. 그때에 비범한 인물임을 주위사람은 알았고, 정부에서 고급 관리를 제안하기도 했지만 선생은 다 거절하였다. 선생은 직접 몸으로 살아간 야인이었다.
3. 청년이란 말을 처음으로 발견하고 그 개념을 육성, 발전시킨 구원의 청년이다.
청년이란 말은 이조시대에는 사용하지 않던 말이다. 선생은 1906년 YMCA에 유도부를 만들었다. 이것은 신라시대 화랑들이 했던 운동이다. 그래서 1910년 초단증을 줄 때 그 증명서에는 '淸風海勢流'라는 명칭이 들어가 있었다.
선생은 우리의 고유 스포츠 정신을 살려야 한다고 하여 창설 개관식때에는 "여기서 장사壯士 100명만 양성하자"고 하였다. 당시의 병사, 군사란 말 대신에 장사란 말을 사용한 것이다.
뜀박질, 체조를 시키니 양반출신 자제들은 갓신을 신고 운동하니 그것이 벗겨지고 하여 "이런 학교는 안 다닌다"고 할 정도였다. 또 김홍식이란 만능선수가 있었다. 그는 세상을 떠날 때까지 유도회의 고문을 지낼 정도로 운동에 뛰어난 사람이었다. 그가 그 보수적인 유교시대에 짧은 팬츠 차림으로 거리를 뛰어 다니는 것에 대해 굉장한 비난이 있었다. 어쩔 수 없이 학교에서 정학을 시키고 말았는데 그는 화가나서 두문불출하였다. 그런데 월남 선생이 그를 위로하러 찾아가서 하는 말씀이 "미안하다. 난 너를 안다. 너 잘 뛰지? 너 나와 같이 뛰겠니? 너는 종로부터 동대문까지 뛰고 나는 전차를 타고 가는 거야" 하셨다. 그렇게 경주를 하면서 전차에서 머리를 쑥 내밀려 김홍식을 쳐다보며 "그놈 참 비호같구나. 잘 뛴다. 잘 뛴다"고 하니 종로 네거리를 지나는 인파들이 다들 서서 구경하였다. 또 월남 선생 같은 분이 그런 말을 하니 여론다 잠잠해져서 김홍식은 다시 학교로 돌아오게 되었다.
이렇게 선생은 젊은이들과 함께 하고 그들의 청년정신을 발전시켜주었다.
4. 선생은 독립협회의 3거두중 1인이다.
독립협회 3거두로는 창설자 서재필이요, 계승자 윤치호, 확충자 이상재이다. 선생은 민권운동의 야전사령관이었다고 할 수 있고 의회민주주의 민권운동을 발전시킨 분이었다.
5. 자유와 화합의 사도이다.
선생은 본래 유가 출신이었는데 1902년에서 1904년까지 옥고 치르는 동안에 기독교 신자가 되었다. 감옥에서 요한복음서를 발견하고 30여 회를 읽었는데 특히 8:31의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萬事無求眞理外)는 구절과 17:21의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처럼 그들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안에 있게 하라"는 구절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 선생의 화합정신의 뿌리를 알 수 있게 해주는 구절이다. 선생의 유명한 글씨 "一心相照不言中"도 여기에서 나온 것이다.
6. 무저항 비폭력의 혁명가이다.
선생의 무저항은 초저항이다. 수주 변영로가 쓴 그의 비문에는 그중에 특기할 것은 3·1운동의 방법을 지적한 것이다. 손병희 선생과 함께 모의를 거듭하실 때 다수인이 한결같이 살육을 주장했으나 오직 선생은 '살육하느니보다 우리가 죽기로 항거하여 대의를 세움만 못하다'고 제의하시었다. 그리하여 무저항 비폭력 혁명운동이 처음으로 전개되어 인류사상 우리가 영광스런 사적史蹟을 가지게 되었다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으니 선생의 무저항 비폭력의 정신을 알 수 있다.
7. 청빈과 희생으로 일관한 민족의 거인이다.
선생은 원래 한산 출생이었다. 목은 이색의 16대손인 선비집안이었는데 세상 태어날 때 몹시 가난하였다. 선생은 평생을 셋집에 사셨다.
이완용이 총리대신이 되어 선생을 법무대신으로 삼고자 하였을 때도 거절하였다. 그들이 돈으로 회유하고자 할 때도 "나는 평생 편안히 살 팔자가 아니야. 그건 나보고 죽으라는 거야"라고 일축하였다.
어느날 YMCA의 모 유지가 월남 이상재 선생 댁을 방문하였다가 냉방에서 지내시는 걸 보고 봉투를 드렸더니 쓱 받으시는 거였다. 그때 일본 유학을 간다는 학생이 인사차 들렀더니 "학비는 있느냐"고 묻더니 받았던 봉투를 척 내주며 "이것 보태써라" 하였다. 그걸 보고 돈을 드린 사람이 말렸더니 "사정아는 사람이 또 주겠지"하며 그 유지를 쳐다 보았다고 한다. 선생은 이런 분이었다. 청빈이란 표현도 모자랄 정도였다.
또 이런 일도 있었다. 1907년 이완용이 미술협회 발대식에 총리대신으로 참가하여 사회의 명사를 다 청해서 피로연을 열었는데 도요토미 히데요시伊藤博文도 이완용의 옆자리에 앉아 있었다. 맞은편에 앉은 선생은 이완용에게 "대감, 동경으로 이사가시지요. 대감은 나라 망치는데 선수시니 동경가면 일본도 망하지 않겠습니까?"라고 일침을 가하셨다. 또 일한합방 이후 일본으로 시찰을 보냈을 때도 거리낌없이 따라가셔서 일본을 시찰하며 하는 말씀이 "일본 군기창을 보니 참 강대국이오. 그러나 걱정이 되는구려. 성경에 '칼로써 흥한 자는 칼로써 망한다'고 했으니 말이요. 일본의 앞날이 걱정이구려."
청빈과 희생의 정신으로 뭉친 선생은 두려움없이 사신 분이다.
8. 불쌍한 민중과 생사고락을 같이 한 선구자, 대한의 성웅이다.
월탄 박종화가 월남 선생을 사모하여 쓴 시에 이런 구절이 나온다.
해 지고 어두운 거리
우리 청년의 갈 길 험악도 하였어라.
모두가 다 헤맸네.
(중략)
이 중 선생은 우리들의 등불.
오! 당신만이 이 겨레의 아버지, 대한의 성웅이셨네.
또 1922년 YMCA 세계대회 때 임시정부 수석으로 임명하려 했으나 "나까지 망명하면 되겠소. 나는 국내에서 싸워야지. 국내 동포들이 불쌍하지 않소"라고 하며 이 땅에 남아서 민중과 고락을 함께 하였다.
9. 죽는 순간까지 해학과 풍자를 구사한 소크라테스와 같은 철인哲人이다.
당시 일본 고등계 형사 중 악명 높은 미와(三輪)가 있었는데 그는 월남 선생을 '아버지'로 부르며 존경하였다. 월남 선생이 세상을 떠날 때 병문안 온 그를 보고 "이놈아! 죽는 데까지 따라올테냐? 나는 천당 못가고 지옥 가"라고 하였다.
또한 수주 변영로와 가까웠는데 어느날 거리를 걸어가는 수주를 보고 "변정상(수주의 아버지) 씨"라고 부렀다. 수주는 길거리에서 아버지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는 선생에게 너무나 화가 났다. 그러자 선생은 "이놈아! 네가 변정상의 씨가 맞지 않냐?"라고 하였다. 평소에 술을 즐기는 수주에게 씨알머리 있는 사람이 되라는 일침을 가한 것이다.
10. 한마음 정신, 민족화합의 위대한 정치가이다.
선생은 정치적 뿐 아니라 종교적으로도 일심一心을 강조하였다. 선생이 기독교신자였지만 편견이 없었다. 사람과 사람은 귀천, 종교를 다 초월하여 하나가 되야 한다고 하였다.
선생은 우리나라 역사상 최초로 당파를 초월한 단일당인 신간회新幹會의 초대 회장을 맡으셨었고, 돌아가실 때에도 이러한 선생의 정신을 추모하는 20만 인파가 몰려 우리나라 최초의 사회장으로 그 장례가 치러졌다.
통일을 앞두고 있는 우리는 지금 특히 월남 이상재 선생의 이런 위대한 지도자상을 잘 보고 배워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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