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화론자에서 식민론자로의 화려한 변신
윤덕한(민족문제연구소 연구원)
대표적 친일파로 알려진 이완용, 그러나 그가 독립헙회 회장까지 지낸 인물이었다는 주장이 나왔다. 이 글은 이완용의 ’애국 활동’에 대해 애써 외면하는 기존 연구에 새로운 시각을 주문한다. 또한 수많은 매국노와 그 후손들이 이완용을 속죄양으로 삼아 자신들의 매국행위를 숨긴 채 지배층으로 군림하는 현실에 대한 역설적 고발이기도 하다.
구한말 애국계몽운동을 주도했던 독립협회라고 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인물이 아마 서재필일 것이다. 물론 독립협회가 서재필에 의해 발기, 결성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1896년 7월 2일 독립협회가 결성된 이후 2년 가까이 이 협회를 실제로 주도한 인물이 이완용이라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이완용은 독립협회 발기 당시위원장으로서, 그 뒤에는 부회장, 회장으로서 독립협회가 정부에 의해 강제해산당하기 9개월 전인 1898년 3월 초까지 실질적으로 협회를 이끌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독립협회를 거론하면서 이완용을 빼놓을 수는 없다.
그런데도 우리 현대사 연구자들은 무슨 ’애국심’에서인지 독립협회 내에서의 이완용의 역할과 활동을 의도적으로 외면하거나 축소하고 있다. 심지어 독립협회 연구로 이름을 얻은 어느 유명 교수조차도 그의 방대한 독립협회 연구 저서에서 ’마지못한 듯‘ 이완용의 이름을 거론하면서도 그의 역할에 대해서는 대단히 ’애매하게’ 형식적으로 기술하고 있다.
독립협회 주도세력은 친미배일 정동파
이것이 과연 ’애국적’인 행동이며 학자로서의 올바른 자세인가. 물론 매국노라는 오명을 천추에 남기게 된, 그래서 매국노와 동의어가 되어버린 인물이 독립협회 운동의 핵심 주역이었다는 사실은 우리 현대사의 비극이자 수치임에 틀림없다. 독립협회 활동에 엄청난 역사적 의미를 부여하는 터에 그 협회 존속 기간의 3분의 2 이상을 그후 매국노가 되어 버린 인물이 실질적으로 주도했다고 쓰기는 계면쩍기도 하고 쑥스럽기도 했을지 모른다. 그것은 독립협회의 의미와 성격 자체를 재검토해야 할 정도로 심각한 문제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독립협회의 민족사적 의미가 훼손되는 것이 두렵다고 해서 이완용의 독립협회 활동을 의도적으로 외면하거나 축소하는 것은 애국적인 행위가 결코 아니며, 학문을 연구하는 학자의 자세는 더욱 아닐 것이다. 독립협회 운동사에서 이완용의 이름을 빼 버린다고 해서 그의 활동 사실 자체가 역사에서 지워지거나 없어지는 것은 결코 아니기 때문이다.
그보다는 한때 독립협회를 이끌었던 인물이 왜, 어떻게 매국노로 변신하게 되었는지, 그 비극적 과정을 규명하려는 노력이 보다 절실하지 않을까. 우리 역사의 치부를 덮어 두기보다는 그것을 과감하게 역사의 전면으로 끌어내 조명하는 쪽이 진정한 애국에 좀더 가깝지 않을까, 그러한 작업을 통해서만이 우리는 제2의 이완용이 나타나는 비극을 막을 수 있을 것이다. 필자가 친일 문제를 연구하면서 이완용에게 관심을 갖고 그의 평전을 쓰기로 결심한 것도 바로 그 때문이다.
그러면 먼저 이완용이 독립협회를 주도하게 된 배경과, 그 과정에서 나타나는 그의 고뇌의 흔적 같은 것을 살펴보기로 하자. 독립협회 결성 초기부터 이완용이 핵심적인 역할을 한 것은 독립협회를 주도한 인물들의 면면과 세력을 �f어보면 지극히 당연한 일로 받아들일 수 있다. 간단히 말해서, 당시 독립협회를 주도한 세력은 친미배일적인 성격의 정동파였다. 그리고 정동파의 우두머리는 이완용이었다. 독립협회가 1896년 7월 2일 발기인 총회를 당시에 이완용이 대신으로 있던 외부 청사에서 열고 그 날 안경수를 회장으로, 이완용을 위원장으로 뽑은 것도 이런 배경에서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정동파란 정동의 손탁호텔에 자주 출입하면서 당시 조선에 주재하던 구미 외교사절 및 선교사들과 가깝게 지내던 일단의 조선인 고급 관료들을 일컫던 말이다. 이들이 자주 접촉하던 외국인은 미국공사관 서기관 알렌과 조선 정부의 미국인 고문 다이 및 리젠드르, 미국인선교사 언더우드와 아펜젤러 등이었다. 정동파라는 이름도 바로 여기에서 유래한 것이다. 정동파는 공사관원으로 미국에 주재한 경험이 있거나 외교사절로 서구 문물을 접할 수 있었던 인물들이 주축을 이루고 있었다. 여기에 속한 인사로는 1888년부터 초대 주미공사관원으로 워싱턴에서 이완용과 함께 근무했던 이상재, 이채연, 이하영을 비롯해 윤치호, 민상호, 민영환, 이윤용, 이범진, 현홍택 등을 들 수 있으며 이완용은 이들의 우두머리격이었다. 이완용은 1887년 7월 초대주미공사관의 참찬관으로 임명되어 그해 9월 하순 미국으로 출발했는데 당시 공사는 박정양이었다. 참찬관은 공사관에서 공사 다음 서열이었고 이상재와 이하영은 서기관, 이채연은 통역으로 함께 부임했다. 알렌은 미국인으로서 주미조선공사관서기관으로 임명되어 이들을 워싱턴의 외교 무대에 등장시키는 안내인 역할을 했다. 알렌은 2년후인 1890년에는 거꾸로 주조선미국공사관의 서기관이 되어 조선에 돌아오게 된다. 이완용은 1888년에 병으로 일시 귀국했으나 그해 10월 다시 미국에 귀임, 참찬관 또는 대리 공사로 2년 이상 근무하다 1890년 10월 완전 귀국했다.
이들 정동파는 친러배일 정책을 추구하던 민비를 추종함으로써 일명 왕비파라고도 불렸다. 1895년 10월 8일 새벽, 일본이 대원군을 앞세우고 경복궁에 들어와 민비를 살해하자 이완용을 비롯한 정동파 인사 일부는 미국과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한다.
그로부터 4개월 후인 1896년 2월 11일 이들 정동파 가운데 이범진과 이완용이 러시아를 등에 업고 고종을 러시아 공사관으로 빼돌리는데, 이것이 이른바 아관파천이다. 이들 정동파는 아관파천으로 친일 김홍집내각을 무너뜨리면서 이완용이 외부대신에 기용되는 것을 필두로 정부의 요직을 차지하게 되며, 이어서 독립협회 결성의 핵심 세력으로 등장하게 된다. 서재필이 갑신정변 실패 후 망명 11년 만에 미국에서 귀국한 때는 아관파천이 일어나기 한달 보름 전인 1895년 12월 26일이었다. 귀국했을 때 그는 이미 일본의 세력을 빌려 개혁하려던 갑신정변 당시의 친일파가 아니었다. 그는 언더우드의 집에 머물면서 그를 통해 서구적 경험을 공유하던 과정에서 친미배일적이던 정동파와 아주 자연스럽게 가까워졌다. 서재필이 귀국한 지 4개월도 안되는 1896년 4월 7일 독립신문을 발행할 수 있었던 것도 미국공사관의 후원도 후원이거니와 당시에 정부의 요직을 차지하고 있던 정동파의 지원에 힘입은 바 크다. 특히 미국공사실은 외부대신 이완용에게 서재필의 독립신문을 지원해 주라고 비공식적으로 요청하기까지 했다.
이완용 형제, 독립문 건립비로 2백원 내
독립협회 결성 목적은 처음에는 아주 단순한 것이었다. 청일전쟁으로 이제 조선이 청국의 속국 지위에서 벗어나 독립했으니 그 사실을 기념하고 내외에 알리기 위해 과거 청국 사신을 맞던 영은문 자리에 독립문을 짓자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건립 보조금을 모금하자는 것도 결성 목적의 하나였다. 이완용과 이윤용 형제는 독립협회 창립 당일 건립 보조금으로 각각 일백원의 거금을 내놓았다. 한국은행이 쌀값으로 환산한 바에 의하면, 당시의 1백원은 오늘날의 2백13만원에 해당하는 적지 않은 돈이었다. 대부분의 위원들이 10원에서 30원, 회장인 안경수도 40원을 낸 것에 비하면 이완용 형제는 큰 돈을 낸 셈이다.
1896년 11월 21일 오후 2시, 각국 외교사절들과 시민・학생 등 4천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독립문 정초식, 즉 주춧돌을 놓는 식을 갖게 되는데 이 때 이완용은 '조선의 장래'라는 제목으로 애국적인 연설을 하게 된다. 그 내용은 “독립을 하면 미국처럼 부강한 나라가 될 것이며 만일 조선 인민이 단결하지 못하고 서로 싸우거나 해치려고 하면 구라파의 폴란드라는 나라처럼 남의 종이 될 것이다. 미국처럼 세계 제일의 부강한 나라가 되는 것이나 폴란드 같이 망하는 것 모두가 사람 하기에 달려 있다. 조선 사람들은 미국같이 되기를 바란다’는 것이었다. 그의 친미파적인 성향을 엿볼 수 있는 연설 내용이다. 이에 앞서 11월 14일 독립문 정초식 초청장을 각계 인사들에게 발송했는데 초청인은 이완용, 권재형, 이채연 3인 명의로 되어 있다.
지난해 8월말, 「독립문현판, 이완용이 썼나 김가진이 썼나」라는 제목으로 독립문 현판을 이완용이 썼을지도 모른다는 의혹을 제기한 적이 있는데, 이 현판을 이완용이 썼다는 것은 100% 확실하다. 앞서도 지적했듯이 독립협회는 독립문 건립을 목표로 발족됐으며, 발기 당시부터 정동파의 리더인 이완용이 주도했다. 발기 당일 이완용은 위원들 중에서 보조금을 가장 많이 냈고, 위원장으로 선출되었다. 게다가 이완용은 당대 제일의 명필이라는 명성 덕분에 덕수궁 중화문의 상량문을 비롯해 창덕궁 함원전의 현판 등 궁중의 여러 전각 현판을 썼고, 고종 국장 때는 고종의 일대기를 기록한 행장과 덕행을 칭송하는 시책문을 쓰는 서사원으로 임명되기도 했다. 일제 시대에는 전국의 명승고적지를 유람하며 수 많은 글씨를 남겼고 국보급에 속하는 유명 사찰의 대웅전 현판을 써 주기도 했다. 독립문 현판이 이완용 작품이라는 가장 확실한 근거는 그 글씨체가 굵고 힘있는 전형적인 이완용체라는 점이다.
일부에서는 독립문 현판이 김가진 글씨라는 주장을 펴기도 하지만 이것은 완전한 난센스다. 당시 김가진은 친일파로서 정동파가 주도하는 독립협회 사업에 적극적이지도 않았고 창립총회 때도 보조금으로 10원밖에 내지 않았다. 그가 창립총회 당일 위원으로 선정된 것은 사실이지만, 독립협회 발기인들의 인적 구성이나 친일파가 몰락한 당시의 정계 분위기로 보아활동에 주도적으로 나설 입장이 아니었다. 독립문의 굵은 글씨체 역시 가는 글씨에 능한 그의 필체와는 거리가 멀다.
러시아에 예속된 상태에서 세운 독립문
나라의 자주독립을 기념하기 위해 세웠다는 건축물의 현판을 후세에 매국노로 지탄받는 인물이 썼다는 것은 우리 역사의 비극이고 아이러니다. 이것은 정말 인정하기 괴로운 사실이다. 그래서 '애국심'에 넘치는 일부 학자들은 민족적 자존심을 들먹이며 독립문현판 시비가 표면화되는 것을 덮어 두려고 쉬쉬하고 있다.
그러나 역사의 부끄러운 부분을 감추어 둔다고 해서 그것이 자랑스런 유산이 될 수는 없을 것이다. 그것은 마치 고름을 그대로 놔둔다고 해서 고름이 살이 되지 않는 것과 같은 이치다. 고름은 짜내야 새살이 돋아난다. 매국노가 쓴 독립문 현판은 우리 역사의 고름과 같은 것이다. 당장의 아픔을 참고 역사의 고름을 짜내야만이 진정으로 자랑스런 민족사를 창조할 수 있다.
이와 함께 여기서 우리가 제기할 수 있는 근본적 의문은 과연 독립문 건립의 역사적 의의는 무엇인가라는 것이다. 독립문은 청나라에 대한 예속에서 벗어나 조선이 명실 공히 자주독립국이 되었다는 사실을 세계 만방에 알리고 그것을 기념하기 위해 세웠다고 한다. 그러나 그것을 세울 당시 조선의 정치 상황은 어떠했는가. 독립을 내세울 정도로 조선 정부는 과연 자주적이었는가. 잘 아는 바와 같이 독립문을 세울 당시인 1896년 11월 국왕인 고종은 조선에 주재하던 외국 공사관의 하나인 러시아 공관에 몸을 맡기고 있었다. 소위 아관파천 기간 중이었다. 한 나라 주권의 상징인 전제군주가 자기 나라에 주재하는 외국 공사관에 몸을 숨긴 것은 주권을 포기하는 행위나 마찬가지다. 당시 조선의 국왕과 정부는 러시아의 보호 아래 있었으며, 내각은 러시아 공사 베베르의 조종을 받는 괴뢰 내각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청국으로부터의 독립을 기념하고 조선이 독립국이 되었음을 세계 만방에 알리기 위해 독립문을 건립한다는 발상 자체를 어떻게 평가해야 될까. 청국으로부터의 독립만이 독립이고 러시아에 대한 새로운 예속은 예속이 아니란 말인가. 당시 러시아의 궁극적인 목적이 조선 병합이었다는 것은 바보가 아니라면 누구라도 알아차릴 수가 있었다. 사실 청국으로부터의 독립은 굳이 강조를 할 필요도 없었다. 이미 청국은 그림자도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조선에서 철수한 뒤였다. 1885년 이래 조선 총리로서 10년 가까이 사실상 조선을 지배하던 원세개가 청일전쟁 개전 직전인 1894년 7월 20일 도망치듯이 조선을 떠난 이후 청국은 조선에 공사관조차 두지 못할 정도로 영향력을 완전히 상실하고 있었다.
그런데 왜 여기서 이런 문제를 제기하는가. 이와 비슷한 코미디가 오늘날에도 벌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몇년 전 김영삼 정부는 식민지 잔재를 청산한다는 명분으로 구조선총독부 건물을 철거했다. 경복궁 앞에 버티고 서있는 그 건물을 철거한 것이 잘못이라는 말이 아니다. 필자도 그 건물 철거를 찬성하는 사람 가운데 하나다. 문제는 일제의 잔재를 청산한다고 법석을 떨면서 오늘의 불평등하고 비정상적인 한미 관계는 왜 외면하느냐는 점이다. 조선총독부 건물 철거에 앞서 미군에게 넘겨준 군사작전권을 회수하고 주한 미군에게 사실상 치외법권을 인정하고 있는 한미행정협정을 개정하며 대북한 정책을 비롯해 미국의 대외 정책에 무조건적으로 추종하는 자세부터 되돌아보는 성찰이 필요하지 않을까.
그 문제는 여기서 줄이기로 하고 다시 이완용의 독립협회 활동으로 되돌아가 보자. 활동이 계속되고 회원이 늘어나면서 독립협회는 당초의 목적이나 의도와는 달리 차츰 정치단체로 그 성격이 변모되어 가고 있었다. 독립협회는 그 성격상 러시아와 대립하지 않을 수 없었다. 특히 독립협회가 중심이 되어 고종 환궁 운동을 적극적으로 벌임으로써 러시아 공사관과의 긴장관계가 깊어져갔다. 1897년 1월부터는 이완용도 독립협회 위원장으로서 고종 환궁 운동에 적극 참여함으로써 러시아 공사 베베르와 불편해지기 시작했다.
러시아와 대립하다 외부대신 자리에서 쫓겨난 이완용
고종은 결국 1897년 2월 20일 지금의 덕수궁으로 환궁하지만 이완용은 내각 내 수구파 대신들로부터 외국에 이권을 많이 넘겨주었다는 비난을 받을 뿐 아니라, 밖으로는 베베르로부터 소외당하는 난처한 입장에 빠지게 된다. 이완용이 베베르와 결정적으로 대립하게 된 것은 러시아측 군사교관 파견 계획을 그가 정면으로 거부하면서부터다. 이 점이야말로 이완용의 전 생애를 통해 가장 용기있고 ’애국적’인 결단이었다고 평가할만한 부분이다.
러시아는 고종 환궁 후인 1897년 4월경부터 조선 군대를 완벽하게 러시아 군제로 편성하고 이를 토대로 조선을 지배하기 위해 조선 정부에 러시아 군사 교관을 추가로 받아들일 것을 강요하고 있었다. 러시아는 이미 그 전 해에 고종의 환궁에 대비해 왕궁 수비병을 훈련시킨다는 명목으로 13명의 군사교관을 파견한 바 있다. 이는 물론 조선 정부의 요청에 따른 것이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조선 정부에서 원하지도 않는데 군사교관을 1백60명이나 추가 파견하겠다고 나선 것이다. 명목은 군대 훈련이지만 조선 군대를 러시아 군제로 편성함으로써 조선 군대를 장악하려는 의도였다.
조선 정부에서 부정적인 반응을 보이자 베베르는 당시 군부대신 서리 심상훈을 시켜 이를추진하려고 했다. 심상훈이 교관단수를 21명으로 줄여 러시아에 요청하는 형식을 취하게 한 것이다. 러시아는 심상훈의 이런 ’요청’을 근거로 군사교관을 파견하겠다고 조선 정부에 통보했다. 이에 대해 이완용은1897년 5월 10일자로 러시아 공사관에 “외국과 관련된 모든 문제는 외부를 통해서 교섭하도록 되어 있는데 이번에 군부대신 심상훈이 외부를 거치지 않고 군사교관을 요청한 것은 격식에 어긋난 것이다”라는 요지의 공문을 보내 러시아의 군사교관 파견 계획을 명확히 거부했다.
이완용의 이런 자세에 대해 주미 공사관 시절부터 각별하게 친분을 쌓아온 미국 공사관 서기관 알렌은 혹시 그의 신변에 좋지 않은 일이라도 생길까 걱정하면서 입장을 바꾸라고 충고하기까지 하였다고 한다. 당시 이완용이 러시아의 군사교관을 단호하게 거부한 것은 다음과 같은 이유에서였다. 즉 현재의 정세를 살펴볼 때 앞으로 수 년 안에 일본과 러시아 간에 충돌이 일어날 것은 불을 보는 것보다도 더 명백하다. 이런 판국에 조선이 러시아 군제를 받아들인다면 뒷날 커다란 화근을 만들 것이니 이 점을 걱정하지 않을 수 없다. 차라리 외부대신직에서 물러나는 한이 있더라도 이것은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다는 논리였다. 우리는 이완용을 만고의 역적이고 매국노라고 욕하고 있다. 그가 매국노인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해방 이후 오늘날까지 완벽하게 미군에 의해 훈련되고 미국의 무기로 무장해서 미군의 작전 지휘 아래 동족과 대치하고 있는 한국 군대를 보면서 러시아 군사교관을 거부했던 매국노 이완용의 그 고뇌를 새삼 곱씹지 않을 수 없다. 외부대신 이완용의 거부에도 불구하고 러시아는 막무가내식으로 그 해 7월 25일 군사교관단 13명을 서울에 파견하고 외부에 계약을 요구했다.
이완용은 여기에 대해서도 완강하게 거부했다. 이틀 후인 7월 30일, 마침내 그는 외부대신 직에서 학부대신으로 밀려난다. 러시아 공사 베베르가 그를 외부대신직에서 몰아낸 것이다. 당시 그의 나이 40세였다.
이완용, 독림협회 졔2대 회장이 되다
학부대신으로 밀려난 뒤에도 이완용은 여전히 독립협회 일에 열성적이었다. 그때 독립협회는 청국 사신이 묵던 모화관을 개수해서 독립관으로 이름을 바꾸고 이곳에서 매주 일요일마다 주제를 하나씩 정해 토론회를 벌이기로 했다. 제1회 토론회는 1897년 8월 29일 오후 3시에 ‘조선의 급선무는 인민의 교육’이라는 주제 아래 학부대신 이완용 주관으로 열렸다. 당시 토론회는 좌우 양편으로 대표 토론자를 나누어 서로 의견을 말하게 하고, 이어 방청석에 앉은 독립협회 회원들이 각기 좌우 토론자의 견해에 찬성과 반대의 뜻을 표시하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이리하여 이 땅에 민중이 참여하는 토론이라는 형식이 처음으로 선을 보인 깃이다.
토론회 이틀 후인 9월 1일 이완용은 다시 평남 관찰사로 쫓겨가게 된다. 학부대신으로 밀려난 지 꼭 한 달만이었다. 베베르는 그가 내각에 남아 있는 것을 용납하지 않은 것이다. 다음 날인 9월 2일 신임 러시아공사 스페이어가 서울에 부임했다. 베베르를 스페이어로 교체한 것은 더욱 노골적으로 조선을 장악하겠다는 러시아의 분명한 의사표시였다. 스페이어는 러시아의 영토와 세력 확장을 위해서라면 물불을 가리지 않는 제국주의자였다. 그는 부임하자마자 그의 부임 직전 미국 공사로 승진한 알렌에게 이완용을 지목하면서 "그는 언제나 독립을 외치는 친미 그룹의 우두머리다. 나는 이 그룹을 없애 버릴 것이다. 내가 이 곳에 있는 동안 그는 벼슬을 얻지 못할 것이니 두고 보라’고 큰소리쳤다.
이완용은 평남 관찰사로 쫓겨난 것에 대한 불만 표시인 듯 연로한 아버지를 가까이에서 모셔야 하므로 지방에 갈 수 없다면서 사직 상소를 올려 9월 21일자로 관찰사 직을 물러난다. 그러나 일주일 후인 9월 27일 고종은 그를 한직인 중추원의 1등 의관에 임명한다. 이어 12월 6일에는 국왕의 비서실장 격인 비서원경에 임명된다. 그에 대한 고종의 변함없는 신임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이 무렵 독립협회는 대중적인 정치단체로 그 성격이 완전히 변모되어 정부의 실정과 대신들의 무능을 신랄하게 공격하고 나섰다. 초기에 독립협회에 적극 참여했던 정부 고관들 가운데 상당수가 이미 협회에서 몸을 뺐으며 일부 수구파 대신들은 독립협회를 없애 버릴 방도를 강구하고 있었다. 이완용의 입장도 난처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비서원경으로서 독립협회의 정부 공격에 동조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독립협회에서 몸을 뺄 수도 없는 처지였다. 이런 와중에서 그는 1898년 3월 27일 안경수에 뒤이어 독립협회 제2대 회장으로 선출되었다.
3월 10일에는 종로에서 독립협회 주최로 최초의 만민공동회가 열렸다. 이완용은 독립협회 회장 자격으로 서재필과 함께 여기에 참석한다.
그리고 다음날인 3월 11일 그는 전라북도 관찰사로 전임하라는 명령을 받는다. 독립협회 활동으로부터 그를 떼어놓기 위한 조치였다. 러시아 공사 스페이어의 입김이 작용했음은 불문가지다. 이완용에 대해 별로 호의적이지 않던 윤치호마저도 자신의 일기에서 이 인사는 이완용을 독립협회에서 떼어 놓으려는 것이라고 적고 있다.
이완용은 전북 관찰사로 부임한 후에도 독립협회 회장 자격을 그대로 갖고 있었다.
그러나 이후 그는 사실상 독립협회 일에서 손을 떼게 되었고, 부회장인 윤치호가 회장 대리로서 협회를 이끌어갔다.
그로부터 4개월 후인 7월 17 일 외부대신 직에 있을 때 외국에 이권을 많이 넘겨주었다는 이유로 이완용은 독립협회로부터 제명처분을 당한다. 이로써 그와 독립협회와의 2년에 걸친 인연은 완전히 끝나고, 독립협회 역시 그 해 12월 25일 정부에 의해 강제해산 되기에 이른다.
이종찬, 민복기, 윤보선에 드리운 천일의 흔적
아관파천 기간 중 철도 부설권, 광산 채굴권, 삼림 벌채권과 같은 이권들이 미국, 러시아, 독일, 프랑스 등에게 무더기로 넘어간 것은 사실이다. 그래서 당시 어느 서구 인사는 조선을 가리켜 "이권을 노리는 외국인 모리배들의 즐거운 사냥터"라고 말하기도 했다. 그 모든 이권들이 외부대신 이완용의 손을 거쳐 나갔음은 물론이다. 그 중에서도 가장 실속을 챙긴 나라는 운산금광 채굴권과 경인철도 부설권을 획득한 미국이었다. 구한말 최대의 이권 사업이었던 운산금광 채굴권은 민비가 살아 있을 때 알렌의 요청을 받고 직접 하사한 것을 이완용이 사무적으로 뒷처리해 준 것이다. 그러나 경인철도 부설권은 알렌이 이완용을 비롯한 정동파 고관들의 협조 아래 미국인 모스에게 얻어준 것이다. 알렌은 이 일과 관련해 훗날 "반드시 그럴 필요는 없지만 일이 제대로 추진되도록 하기 위해 모스가 이완용에게는 1만5천불, 이채연에게는 1만불 정도는 사례해야한다고 생각했다"고 적고 있다. 당시 미국 공사 알렌의 연봉은 1천 5백불이었으며 조선인 광산 노동자 하루 일당은 5~10센트로 일년내내 죽어라고 쉬지 않고 일해도 30불 벌기가 어려웠다.
이완용의 열성적인 독립협회 활동과 무더기 이권 양여 그리고 그에 따른 뇌물 수수 의혹, 이 상반되는 행동에서 뒷날 그가 매국노로 변신하게 되는 실마리를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우리는 흔히 이완용이 나라를 팔아먹었다고 말한다. 이 말 속에는 이완용만 아니었으면 나라가 망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뜻도 포함되어 있다. 그래서 망국과 매국의 모든 책임을 이완용 한 개인에게 돌리고 그를 저주하는 것으로 위안을 삼고 있다.
물론 그가 1905년 을사보호 조약에 찬성한 이후 학부대신으로서, 또는 내각총리 대신으로서 일제의 한국 병탄 작업에 앞장서서 주구 노릇을 한 것은 사실이다. 특히 1910년 8월 22일 대한제국 전권위원으로 합방조약에 서명함으로써 그는 우리 역사가 지속되는 한 매국노의 오명을 씻을 수가 없게 되었다.
그러나 이완용 때문이 나라가 망했다는 얘기는 사실이 아니며, 망국과 매국의 모든 책임을 이완용 한사람에게 돌리는 것 역시 이성적인 역사 인식이 아니라는 점만은 지적해 둘 필요가 있다. 이런 식의 단세포적인 역사인식이 계속되는 한, 우리는 역사에서 아무런 교훈도 얻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구한말 대한매일신보는 "대한의 황족 귀인과 정부 대관 가운데 매국노 아닌 자가 없다"고 통탄했다. 사실이 그랬다. 소위 황족 가운데 일제의 병탄 음모에 항거하는 시늉이라도 한 자가 단 한 명이라도 있었던가, 정부 대신 가운데 일제 통감 이등박문에게 아부하지 않고 그 자리를 얻은 자가 단 한 명이라도 있었던가. 이것이 바로 당시 이 나라 지배 집단의 실상이었다.
어디 그뿐인가. 한때 척양척왜를 기치로 내걸고 일제 침략군에 맞서 이 땅의 산하를 선혈로 물들였던 동학당과, 자주 독립을 외치던 독립협회의 잔존 세력들이 일진회를 만들어 외교권을 일본에 넘기라고 아우성을 치고 한일 합방 상주문을 올리는 기가 막히는 일을 벌이지 않았던가. 이런 판국에 어찌 망국과 매국의 책임을 이완용에게만 물을 수 있는가. 오늘 이 수많은 매국노들과 그 후손들은 모두 이완용의 등 뒤에 숨어서 매국노는 오직 이완용 한 명뿐이라는듯이 그를 속죄양으로 삼아 자신들의 매국 행위를 호도하면서 또다시 이 나라의 지배층으로 군림하고 있다.
이것은 정말 비열하고 파렴치한 행위다. 몇 년 전 이완용의 증손자가 이완용 땅 찾기 소송을 냈다고 해서 한바탕 소동이 벌어진 적이 있다. 매국의 대가로 얻은 재산을 그 후손이 되찾겠다고 나서다니 민족감정상 용납할 수 있는 짓이냐는 것이다. 백 번 천 번 옳은 말이다. 그러나 냉정하게 우리 사회를 한번 휘 둘러보자. 매국의 대가로 얻은 재산을 그대로 이어받았을 뿐 아니라 그것을 토대로 오늘 이 나라의 지도자로 군림하고 있는 사람이 어디 한둘인가.
대표적인 예를 몇 명만 들어보자. 이완용과 함께 초대 미국공사관의 서기관으로 근무한 이하영은 을사보호조약에 찬성한 매국 대신이다. 그는 그 공로로 한일합방때 일제로부터 자작의 작위를 받았다. 그 장손자가 ‘해방독립된 대한민국’의 육군 참모총장과 국방장관을 지냈으며 참군인으로 추앙받고 있는 이종찬이다.
이완용과 친구 사이인 민병석은 병합당시 궁내부 대신으로서 합방에 반대하는 궁중 여론을 무마하는 데 앞장서면서 황실의 합방 작업을 마무리 지은 매국노다. 그 역시 합방 때 자작의 작위를 받았는데 그의 아들 민복기는 대한민국에서 두 차례나 대법원장을 지냈다.
친일 개화파로 갑신정변에도 관여했던 윤웅렬 역시 합방 때 남작을 받았다. 그의 자손들도 대를 이어 친일을 했는데 윤치호가 장남이고 윤치영은 조카이며 4대 대통령을 지낸 윤보선은 윤응렬의 조카 윤치소의 아들이다.
과연 이완용과 이하영, 민병석, 윤웅렬의 매국 행위에 얼마나 큰 차이가 있다고 한 쪽은 묘까지 파헤쳐지고 그 자손은 이 땅에서 얼굴을 들지 못하고 있는데, 다른 쪽은 대한민국 최고의 명문가로 떵떵거리며 그 후손은 대통령, 대법원장, 육군 참모총장으로 이름을 날리고 있단 말인가.
이것이 정녕 정상적인 사회인가. 좀 더 냉정하고 이성적인 눈으로 우리 사회와 역사를 되돌아볼 필요가 있다.
<출처:[월간말], 1999년 8월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