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월남이상재 ▒

고모 박씨는 월남 이상재의 막내(이승준) 며느리이다.

천하한량 2007. 8. 8. 22:45

익산·김제지역의 'ㄱ자예배당' 유적 : '거시기' 문화를 찾아서

 

학기중이라고 하는 부담감을 갖고 떠나는 답사인지라 왠지 흥이 나질 않았다. 워낙 답사를 좋아하던 나였으나 이번 답사에는 여러 가지 개인적인 사정까지 겹쳐 참석하지 않았으면 하는 잠시나마 희망을 가져 보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희망사항일 뿐이었다.

출발 당일, 연구소 박선생과 양재역에 도착한 시각은 오전 7시 20분. 차가 막히지 않은 관계로 너무 일찍 도착하였기에 편안한 마음으로 우리 팀이 만나기로 한 양재역 환승주차장을 찾았다. 이미 그곳에는 오늘 하루동안 우리의 다리가 되어줄 버스가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이를 어쩌나! 주차장에는 삼성그룹 직원들을 기흥까지 실어 나르는 대형버스가 주차를 해야 하기에 외부차량은 들일 수가 없다는 것이다. 아무리 사정을 했지만 전혀 여지가 보이지 않아 기사 아저씨의 순발력으로 차는 서초문화회관 앞으로 가서 우리를 기다리기로 하였다. 지하철 출구 7번과 8번에 집결지를 알리는 방향 표시판을 붙인 우리는 이제 주차장에서 오늘 참석할 사람들을 눈치껏 알아보고서 차가 있는 곳으로 안내해야 했다. 종전과 달리 이번 답사에는 얼굴을 아는 분들이 그리 많이 참석하지 못한 관계로 우리 편(?)을 찾는데 전력을 다하였다.

갑작스런 집결지의 변경으로 조금의 애로가 있었으나 예정시간 보다 15분 정도가 지난 8시 15분에 참석하기로 한 분들이 거의 도착하였다(한 분만 빼고, 답사를 다녀와서 알게 되었는데 갑자기 다리가 아프셨다고 함). 검은색이라고 하기 보다는 먹물을 들인 것 같은 생활한복을 입은 이덕주 목사님의 안내로 오늘의 답사를 시작하기로 하였다.

차안에서 인원 점검과 함께 간단한 아침을 먹고는 출발. 계절의 여왕이라는 5월을 막 지난 때인지라 신록이 참으로 푸르렀다. 고속도로에 들어서자 이덕주 목사님이 오늘 우리가 답사를 하게 되는 익산과 김제에 대해 개괄적인 설명을 시작하셨다. 매번 답사 때마다 느끼는 것이지만 목사님의 달변에 다시 한번 기대감을 가져보았다.

먼저 오늘 답사에 참석한 이들을 둘러보자. 연세에도 불구하고 언제나 왕성한 의욕을 보여주시는 이찬영 목사님을 비롯하여, 일본에서 오신 세 분, 재미교포이신 선생님, 그리고 그 어느 때보다 젊은 학생들이 많이 참석하였는데 그 가운데도 여성들이 많다는 고무적인 현상이 벌어졌다. 왠지 이번 답사에서 좋은 일이 있을 것 같은 예감이 뇌리를 스치는 가운데 이덕주 목사님의 사회로 자기 소개 시간을 가지면서 차는 남쪽을 향해 전진.

죽암 휴게소에서 잠시의 휴식을 취한 후 첫 번째 답사지역으로 향한 우리 일행은 예정 시간보다는 조금 늦은 때에 강경 나바위본당에 도착하였다. 성당의 고색 창연한 모습과 함께 그곳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이들이 있었다. 바로 익사지역 기장여전도회 집사님들 네 분이셨다. 현지 분들과 합류한 우리는 성당 주위를 둘러보고 목사님의 설명에 따라 남녀가 구분하여 성당 안으로 들어갔다.

한국 최초의 사제인 김대건 신부가 1845년(현종 11) 10월 12일에 제3대 조선교구장 페레올 주교, 다블뤼 신부와 함께 도착한 이곳은, 1897년에 본당이 설립되었다. 서울의 성공회 대성당과는 달리 익랑이 성당 밖에 위치하고 있었는데 한국 건축에 대해 문외한인 내가 보기에는 조선시대 궁궐의 정전에 위치하는 회랑과 같은 구조인 듯 싶었다. 또한 이 성당은 남녀석을 구분하기 위해 가운데에 칸막이를 하였던 흔적이 페인트 사이로 모습을 나타내었다. 남녀 칠세부동석이라는 우리의 전통 관념이 이곳에도 적용되고 있었다. 특별히 이 성당에서 나의 마음을 흐뭇하게 한 것은 유리창문이었다. 빛의 예술이라는 고딕양식에 맞게 창문이 많은 이 성당은 유리창문이 다른 성당의 색유리가 아닌 우리의 정통 색한지로 도배되어 있었다. 이 모습은 바깥의 열주와 함께 너무나 잘 어울렸다. 다시 한번 가장 한국적인 것이 세계적이라는 것을 실감하는 순간이었다.

성당 내부를 둘러본 우리는 마당으로 나와 기념사진을 촬영하고 차에 올랐다. 현장에서 합류한 집사님들 가운데 두 분이 우리 차에 올랐는데 자기 소개를 할 수 있는 시간을 드렸더니 익산 자랑을 한바탕 늘어 놓으셨다. 답사를 가기 전 익산에 대해 아는 것이라고는 익산의 대표적인 미륵사지 정도였는데 이곳에 와서 보니 화강석과 금속공예가 유명하다고 하며 무엇보다 구수한 사람들의 인정미가 일품이었다.

드디어 오늘의 주제인 'ㄱ자예배당' 가운데 하나인 두동교회를 찾은 것은 12시 20분 정도였다. 금강의 범람을 막아주려는 듯 병풍처럼 금강변을 따라 길게 누워 있는 함라산 북쪽 줄기에 돋아 오른 일치봉 동쪽 산자락 마을인 '杜洞'은 토박이말로 '막은 골'이란 뜻으로 이름 그대로 막다른 동네였다. 교회 입구에는 비석이 하나 있는데 바로 '소화 15년(1940) 6월'에 '성당면 유지 일동'이 세운〈前 道會議員 朴公在新 紀念碑〉가 있다. 전형적인 조선식 비석의 형태를 지닌 이것은 일제시기 두동마을을 좌지우지했던 '삼천석지기' 부자 박재신이 성당초등학교를 설립할 때 큰 돈을 냈고, 마을 1천 가구의 세금을 대납해 주었으며, 마을에 기근이 들었을 때 자비를 베푼 것을 기념하기 위해 세운 이 마을의 '地界石'이다. 이 목사님의 설명에 의하면 해방후 각 지역의 비석에 '소화' 등으로 새겨진 글자는 모두 정으로 쪼아냈는데 이것은 비석 뒷면에 새겨져 있어 길에서는 보이지 않기에 유지되었다고 한다. 우리 일행은 이 비석 앞에서 약간은 어색한 모습으로 사진을 찍는 일행의 모습에 웃음을 머금으면서 두동교회로 향했다.

두동교회에서 우리를 반갑게 맞이한 분은 박정호 장로님이었다. 두동교회의 'ㄱ자예배당'을 지키기 위해 오랜 동안 애를 쓰셨던 박 장로님은 겉으로 뵙기에는 아주 소박한 우리네 할아버지와 같은 모습이셨지만 교회의 지나온 역사를 말씀해 주실 때 그의 목소리는 젊은이 못지 않았다. 우리는 먼지가 소복이 쌓인 예배당에 들어섰다. 예배당 한편에는 탁구대가 놓여 있었고 의자며 방석이 여기 저기 널려 있어 이곳이 현재 제 구실을 하지 못하고 있음을 느끼게 해주었다.

이 목사님의 소개로 강대상에 올라 서서 두동교회의 역사를 설명해주시는 장로님의 모습은 참으로 감동적이었다. 두동교회의 역사는 조금 전 우리가 지나온 비석의 주인공과 관련이 있었다. 당시 두동 사방 삼십리 지경에 그의 땅을 밟지 않고는 지날 수 없었던 큰 부자 박재신의 집안에 복음이 전해지게 된 것은 부인들에 의해서였다. 일찍이 두동에 처음 복음을 전한 선교사는 해리슨(하위렴)과 김정복 및 안신애 전도부인이다. 안신애의 전도를 받고 용안 쪽으로 약 3킬로미터 떨어진 부곡까지 다닌 부인들 중에는 바로 박재신의 어머니(황한라)와 아내(한재순), 그리고 고모인 박씨 부인이 끼어 있었다. 특히 고모 박씨는 월남 이상재의 막내(이승준) 며느리이다. 이외에 박씨 집안에 시집와서 동서지간이 된 임현숙·신영애도 함께 믿음 생활을 하는 등 두동마을의 복음 역사는 여인들로 시작되었다는 목사님의 설명을 듣는 순간 왜 하나님이 오늘 답사에 여자들을 많이 참여하게 하셨는지를 알 것 같았다.

"교회에 다녀야 집안이 복을 받고 자식도 얻을 수 있다"는 말에 당시 손이 귀했던 박재신의 집안 남자들은 여자들이 교회당을 나가는 것을 묵인해 주었다. 이 때 한재순이 실제로 임신을 하게 되자 박재신은 자기집 사랑채를 예배 처소로 내어놓았고 1923년 5월 18일, 드디어 두동교회가 시작되었다. 지주의 눈치를 보느라 1년 사이에 교인이 80명으로 증가하는 놀라운 '부흥'을 일으켰던 두동교회는 박재신이 곳간으로 쓰던 고패집(ㄱ자형) 창고에 마루를 깔고 예배처소를 넓혔다.

그러나 아들 '요한'이 1929년에 죽자 박재신의 마음은 급변하였고 "안 나오면 논을 뗄까봐"교회에 나오던 교인들은 이번에는 "나가면 논을 뗄까봐" 두려워 교회를 떠났다. 그리고 '논을 떼일지도 모른다'는 공포심에서 해방된 자들만이 남아 교회를 지키다가 이종규가 내놓은 채소 밭 100여 평에 새 예배당을 건축하게 되었다. 이 부분의 이야기를 하는 장로님은 "알곡 신자를 가려내기 위한 하나님의 역사였지요" 하셨다. 당시 안평도에서 풍랑으로 떠내려온 소나무를 가져다가 '개미역사'를 이룬 교인들의 눈물나는 노력을 말씀해 주시며, 당시 불렀다던 '독립가'(?)를 생생하게 기억하시며 우렁차게 부르시는 장로님의 목소리는 세월의 무상함을 느끼게 했다. 대표기도를 해주시는 장로님의 기도 소리에 가슴 한 구석에서 뭉클한 무엇인가가 밀려 오면서 다시 한번 여호와 이레의 하나님이심을 체험케 하였다.

장로님의 말씀 중에 그 교회를 담임하시는 젊은 김탁모 목사님과 김권사님이 들어오셨다. 그리고 목사님이 대접해주신 맛있는 아이스크림으로 우리는 갈증을 해소할 수 있었다. 또한 아흔이 다 되신 여자 권사님(정확한 성함은 잊었고 다만 김권사님으로만 기억)의 교회 건축의 역사와 겨울밤 목사님 방에 군불을 지펴주시던 얘기는 참으로 정감있었다. 우리가 장로님과 권사님의 설명에 귀를 기울이고 있는 동안 우리의 이덕주 목사님은 잠시도 쉬지 않고 교회 창문을 모두 열어 놓으셨다. 왜 그러시는지를 알 수 있었기에 목사님의 세심함에 흐뭇한 마음이 들었다.

우리의 전통적인 건축 양식 가운데 하나인 ㄱ자형 주택을 예배당으로 사용하였던 우리 신앙의 선조들의 지혜에 감탄하면서 교회 마당으로 나와 김목사님과 장로님, 권사님과 함께 기념사진을 촬영하면서 내내 내 마음은 '이러한 신앙의 1세대들이 돌아가시기 전에 개교회에 흩어진 자료를 정리해야 할 텐데'하는 생각으로 가득하였다. 우리 일행은 담임목사님께 귀한 문화재예배당을 잘 지켜주십사 하는 조금은 부담되는(?) 당부를 거듭했다. 그리고 김권사님의 손을 꼭 잡고서는 오래오래 건강하시라고 당부드리면서 두동교회를 떠나 왔다. 두동마을을 돌아나오는 길에 박재신의 생가와 함께 이상재 선생의 막내아들이 살았다는 집을 둘러 보았고, 특히나 박재신의 고모인 이상재 선생의 막내 며느리의 '문지방' 일화를 들으면서 옛 우리 여인네들의 순진함에 빙그레 웃음이 나왔다.

한적한 두동마을을 돌아 나오면서 우리 일행은 이곳 익산에서 유명하다는 육회 비빔밥을 잘한다던 진미식당으로 주린 배를 움켜 잡고 출발하였다. 구름 한점없이 내리 쬐는 태양, 그리고 들녘의 푸른 벼이삭 등은 이곳이 곡창지대임을 말하고 있는 듯하여 시장기를 더욱 부추겼다.

우리가 찾은 식당은 그저 평범한 시골 저자거리에 있는 식당으로 국밥이나 해장국 정도가 어울릴 것 같은 곳이었다. 혹시나 하는 음식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육회가 아닌 소고기볶음밥을 주문한 대부분의 여성 동지들은 그곳 식당에서 나온 음식과 함께 '익산의 홍보 도우미' 집사님들의 진수성찬에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더구나 생전 처음 먹어본 머구라는 음식은 나의 식욕을 돋우기에 충분하였다. 준비해 오신 쑥떡과 재배하시는 것을 아침에 따 오셨다는 설탕 수박은 그 자체의 맛도 맛이었으나 호남 사람들의 넉넉함과 맛갈스러움을 함께 느끼게 하기에 충분하였다. '食後景'이라고 했던가? 우리 일행은 부른 배를 달래며 다시 다음 행선지를 향해 출발하였다.

한국기독교와 3·1운동을 이야기하면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바로 유관순, 제암리사건, 그리고 '문용기'이다. 달리는 차안에서 문용기 열사의 일화와 '혈의'를 지킨 여인들에 대한 얘기를 하시는 이덕주 목사님의 말씀은 너무나 감동적이어서 식후임에도 불구하고 졸음은 고사하고 눈시울을 적시게 하였다. 특히나 설명 끝에 하신 마지막 말씀은 많은 것을 생각게 했다. "무슨 명분있는 일을 하는 것은 남자들이지만 그들 뒤에서 많은 것을 참아내면서 인내의 세월을 지내야 하는 것은 아마도 한국 여성들의 몫일 것이라"는…

시간 관계상 문용기 열사의 생가는 차를 타고 가면서 차창 밖으로만 바라 보았고 우리는 '솜리' 장터로 향했다. 남전교회 교인들을 중심으로 만세시위를 벌였던 역사의 현장이다. 한말 이후 이리와 그 주변 '옥익꾸뜰'은 일본인들에게 '노다지' 같은 곳이었다고 한다. 가을에 만개한 갈대꽃이 솜 같아서 '솜리'라 하였고 그 모양이 아낙네 속살 같아서 '속마을'(裏里)이라고도 했다는 설명을 들으면서 가을이 아님을 못내 아쉬워했다.

이 지역에 들어온 일본인들은 '개간'이란 명분으로 길을 닦은 후 익산군 일대 주인 없는 땅을 '불하' 명목으로 차지하였고 여기 저기에 '농장'을 세웠다 한다. 그래서인지 이 지역을 답사하는 동안 계속해서 나의 시선에 들어온 것은 논 주변의 관개 수로가 잘 정비되어 있는 것과 당시의 건물일지도 모를 창고 건물들이 계속 들어왔다. 바로 이곳이 호남의 곡창지대이구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솜리장터의 시위는 이러하였다. 남전교회 교인들은 4월 4일 이리 장날을 거사 날로 정하였다. 시위대는 3대로 나누어 1대는 이리 역에서 최대진 목사가, 2대는 솜리 시장에서 문용기 씨가 3대는 동이리 역에서 김만순이 각각 맡아 솜리 시장 대교농장 앞에 집결하기로 했다. 최대진 목사는 제4회 전북노회에 참석하느라고 그 장소에 나오지 못하였다고 한다. 이에 최대진 목사에 대한 남전교회 교인들의 감정은 좋지 않았다고 한다. 정한 시간에 그들은 태극기를 흔들며 독립만세를 외치기 시작하였다. 바로 그 역사의 현장에 도착했을 때 우리를 맞이하는 사람은 지금 남전교회를 담임하고 계시는 정인 목사님이셨다.

우리 일행은 현재는 중국화교학교로 사용되고 있는 대교농장 터에서 정인 목사님의 열정어린 설명을 들었다. 뙤약볕 아래에서 교회의 역사와 지역교회사 연구사업 및 기념사업을 하고 계시는 젊은 목사님의 열정은 보는 이의 마음을 흐뭇하게 하기에 충분하였다. 1890년대 기록이 담긴 교회 당회록과 교회록을 간직하고 있는 남전교회, 옛 건물이 남아 있지 않다는 것이 아쉽기는 하지만 곳곳에서 저렇게 한국기독교사 연구 및 발굴을 위해 애쓰는 분들의 소중함을 다시 한번 인식하는 기회가 되었다.

그 역사의 현장 앞에 서 있는 솜리 구시장 터의 순국열사비 앞에서 6·25전쟁의 상처를 눈으로 확인하고 우리는 이목사님이 안내하는 문용기 열사의 만세시위 현장, 사거리에 모였다. 그곳에서 우리는 짧게나마 신앙을 지키기 위해, 그리고 나라의 독립을 찾기 위해 피흘린 우리의 조상들, 특히 믿음의 조상들을 기억하면서 기도를 드렸다. 그곳에서도 내 마음 깊은 곳에서는 무엇인지 모를 뭉클함이 치밀어 올랐다. "저 사람들은 뭐하는 사람들이냐?" "뭐 그냥 지나가는 거야?" 하는 등등 주위에서 장사를 하시는 분들의 말들을 등 뒤로 하고 그 현장을 떠나오면서 우리 일행은 한 마음으로 정인 목사님께 부탁드렸다. "목사님! 이곳에 기념 비석이라도 하나 세우셨야겠어요. 그리고 이 지역에서 목사님이 하셔야 할 일이 아주 많네요."

익산지역에서 초등학교 선생님을 하셨고 지금은 주일학교 부장을 하신다던 권사님이 제공해주신 시원한 음료수로 갈등을 해소하면서 우리는 차에 올라 김제지역으로 출발하였다. 차창 밖은 김제평야의 너른 들판이 우리를 안고 있는 듯했다. 잘 정리된 토지 및 수리시설은 일제시대 일본인들의 침략의도를 생각하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이 땅에서 얼마나 많은 조선인들이 굶주림에 고통을 당하고 있었을까 하는 생각을 하면서 김제지역의 역사적 면모를 되새겨보았다.

학창시절 여러 차례 답사를 다녔던 나는 김제의 벽골제, 김제 금산사 등은 기억하고 있었으나 이곳에 오래된 'ㄱ자 예배당'이 있었다는 것은 알지 못했다. 금산사 입구 큰 연못에 비단 잉어가 있었다는 것과, 미륵전의 미륵 삼존불이 너무 커서 놀랐던 기억을 가지고 이번 답사의 최종 목적지인 금산교회로 향하였다.

금산교회는 노령산맥 중봉에 해당하는 모악산 국립공원의 금산사 입구 마을에 있었다. 전라도에서 성공한 경상도 출신 목사는 배은희 목사와 이자익 목사를 꼽는데 그 가운데 이자익 목사를 배출한 교회가 바로 금산교회이다. 그런데 이곳에는 이자익 목사보다 더 훌륭한 분이 한 분 있었다고 한다. 이자익에게 새 삶의 기회를 주었던 조덕삼이란 인물이다. 조덕삼 집의 마부였던 이자익은 주인과 하인이 비슷한 시기에 개종을 하였고, 1909년 금산교회에서 처음으로 장로를 뽑을 때 아홉 살 아래인 이자익이 초대 장로로 선출되자 이를 기꺼이 받아들였으며, 이자익이 평양신학교를 졸업하고 1915년 금산교회 목사로 부임해 내려올 때도 그를 당회장 목사로 깍듯이 대접하였다 한다. 현대를 살면서 교양인·문화인을 자처하는 우리네의 모습 속에서 이런 여유로움은 찾기 어려운데 지금부터 무려 80여 년 전에 이런 인물들이 있었다는 목사님의 설명은 다시 우리의 신앙의 자리들을 생각하게 했다.

금산교회로 들어가는 길에서 이 목사님은 이곳을 찾을 때마다 어머니 자궁 속으로 들어가는 느낌을 받는다는 설명에 힘입어 나도 지긋이 눈을 감아 보았다. 눈을 뜨는 순간 조금은 이상한 건물들이 곳곳에 보였다. 바로 이곳이 증산교의 창시자인 강일순의 무덤이 있는 곳이며, 증산교의 성지이기에 곳곳에 증산교 도당이 있었다. 미륵불교의 총본산이자 최근 불교계 개혁을 주도하고 있는 조계종 총무원장 송월주가 금산사 주지 출신이라는 사실로 더욱 유명해진 금산사가 있고, 계열교단이 50여 개에 달하는 증산도가 있고, 그곳에 바로 1892년이라는 빠른 시기에 기독교가 전해진 것이니 이 지역은 참으로 연구 대상지역이라 아니할 수 없을 듯싶다.

금산교회에 도착한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고풍스럽고 건강한(?) 'ㄱ자예배당'과 1986년 처음 부임해서 중간에 잠깐 떠났다가 다시 와서 8년째 금산교회를 담임하고 있는 이인수 목사님이었다. 모악산 너머 배재[梨峴]에 있던 전주 이씨 집안의 齋室을 옮겨다 지었다는 이 예배당은 1908년에 지은 것으로 1997년 7월 도지방문화재 136호로 지정되었다. 좌우의 길이가 동일한 두동교회와는 달리 남북의 남자석이 긴 이곳 금산교회 예배당은 기와에서부터 시작하여 옛스러움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우리 일행은 모두 교회 안으로 들어가 마루바닥에 앉았다. 우리의 전통적인 한옥의 마루바닥에 앉아 있노라니 뭔지 모를 따뜻함이 느껴졌다.

이인수 목사님이 이 교회에 처음 부임해 왔을 때 교회 창문에는 '불온글씨'의 흔적이 남아 있었고 이에 놀란 목사님은 흔적을 남기지 않고 지워 버렸다 하니 그때가 언제이런가? 우리 모두 그런 시절을 살아온 것이다. 교회 바닥에 앉아 맨발 벗은 시골 목사님의 설명을 듣고 있자니 모처럼 만에 여유로움을 느낄 수 있었다. 단지 아쉬운 것은 여자석 한 켠에 칸막이를 치고 얼마전까지 목사님네 식구가 살았다는 설명을 듣고는 왠지 뵙지는 못했지만 목사님의 사모님이 떠올랐다. 가난한 시골교회의 목사님과 그 가족!

재미있는 것은 이곳 금산교회 예배당에는 상량문이 두 곳에 있다는 것으로 특히 남자석은 한문으로(고후 5 : 1-6), 여자석은 한글(고전 3 : 16-17)로 새겨져 있음이 특이했다. 모두 주의 재림을 간절히 기다리는 내세지향적 간구의 구절로 이곳이 미륵신앙의 본지임을 다시 한번 상기시키게 하기에 충분하였다. 양반집 조상 제사를 지내던 재실을 뜯어다 '하나님의 성전'으로 만든 이들은 현실보다 미래에 소망을 두었고 그런 점에서 그들은 불안했던 한말에 '安身立命'을 좇아 모악산 아래 금산 땅을 찾았던 가난하고 힘없는 민중들과 같은 꿈을 갖고 있었고 당시 교회는 그런 꿈을 실현시켜 주었다. 지금 우리의 교회는 얼마나 현실 속에서 실의에 빠져 있는 우리의 소외된 이웃에게 꿈을 주고 있는가?

예배당 마당 한 켠에 서서 전통 예배당과 유광학교 자리에 세워진 현대식 예배당을 보자 여러 생각이 들었다. 전통을 지킨다는 것은 어쩌면 불편을 감수해야 되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현재 금산교회 마당을 전부 차지하고 있는 'ㄱ자예배당'은 역사의식이 없는 이들이 보기에는 당장 헐어버리고 운동장이나 넓은 교회마당으로 사용하면 좋겠다는 생각을 불러 일으키기에 충분한 위치에 있었다. 편리함과 전통은 가끔은 서로 평행선을 이루면서 진행되고 있는 것이 아닌가. 목사님께 감사의 말씀을 전하면서 우리 일행은 두동교회에서 부탁드리던 마음을 다시 전했다. "이 귀한 예배당을 잘 지켜주세요."

이제 남북으로 헤어져야 할 시간이다. 익산지역에서 만난 집사님들, 원광대학교 건축공학도 연인들(?), 그리고 하루종일 사진을 찍는 일에 온 몸을 바친(?) 목사님과 작별 인사를 나누고 우리는 우리의 안식처인 서울을 향하는 버스에 몸을 실었다. 얼마 후에 있다는 금산교회 보수작업이 원형을 잘 보존한 상태에서 유지될 수 있기를 기원하는 마음을 가지고.

시작할 때 귀찮았던 마음은 사라졌으나 피곤한 몸은 남아 있었다. 하지만 마음은 잔잔한 감동으로 충만하였다. 마치 답사를 한 것이 아니고 걸어 다니는 부흥회를 참석한 느낌이었다. 오늘의 답사를 평가하는 시간, 모두 한 마디, 두 마디씩. 바라기는 오늘 우리가 느낀 느낌들이 옛 교회를 지키기 위해 애쓰신 老 권사님이나 장로님들의 인내를 교훈 삼아 우리들의 삶 속에서 녹아나길, 그리고 각 지역에서 한국기독교사 및 문화를 지키기에 애쓰시는 분들이 많이 배출되기를 간절히 기도하면서 피곤한 눈을 감았다. 서울이 다시 우리를 흔들어 깨울 때까지.*

[이순자(숙대 박사과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