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나라때 유행하던 시(詩)는 송나라때가 오면서 그 빛을 잃어가게되고 사(詞)라는 새로운 장르가 환영을 받습니다 당나라 말년에 화류계에서 생겨난 '사(詞)'라는 표현양식은 원래는 정해진 가락을 지닌 노래의 가사였습니다 이 새로운 문학 장르는 소동파와 같은 시인들이 그 격조를 높이면서 단숨에 성숙도가 높아졌으며 이청조라는 여자에 의해 만개를 합니다
이청조(李淸照,1081 ~ 1141)
송나라때 유복한 집안에서 태어난 이청조는 18살의 나이에 고위관료의 아들인 조명성(趙明誠)과 행복한 결혼을 합니다
이때 재미있는 일화가 전해내려옵니다 어느날 조명성이 꿈을 꾸웠는데 그 꿈에 나온 책속에 "언(言)은 사(司)와 만나고 안(安)의 위가 떨어지고 지(芝)와 부(芙)의 풀이 빠져있다"는 글이 적혀있었다고 합니다 이 꿈 이야기를 전해들은 명성의 아버지는 이것이 글자놀이의 일종인 파자(破字)임을 단번에 알아차립니다. 言과 司를 합하면 사(詞)가 되고
安위의 갓머리를 떼면 여(女)가 되며 芝와 芙에서 초두머리 艸를 떼어내면 각각 지(之)와 부(夫)가 되는 것으로 이것을 모두 합치면 사년지부(詞女之夫)라는 문귀가 되는거죠 이는 자기 아들이 '사(詞)'를 쓰는 여자의 지아비가 된다는 말로 조명성의 아버지는 당시 유명한 '사녀(詞女)'였던 이청조를 염두에 두고... 이청조 집안에 찾아가 혼약을 넣어 혼사를 성립시켰다고 합니다
이 남편되는 조명성이라는 사람은 학자 기질이 다분해서 그랬던지 서화(書畵)와 골동품의 열광적인 수집가였다고 합니다 결혼후 이청조는 이 남편의 취미에 공감하여 당장 동지가 되었다고 하는군요. 이들 부부는 오랫동안 수집하여 방대한 양에 이른 서적을 분류하여 서고에 넣고 목록을 만드는 공동작업에 몰두하였으며 이들은 틈틈이 어떤 책의 몇 권 몇 쪽 몇째줄에 무엇이 적혀있는지를 알아��히는 게임을 즐겼다고 합니다
산동성 제남에 있는 이청조 기념관 모습입니다
이들 부부의 다정한 모습을 하얀 대리석 조각으로 만들어 놓았습니다
이들 부부가 잠시 떨어져 있을 때 이청조는 남편을 그리는 마음을 담아
다음과 같은 '사(詞)'를 써서 남편한테 보냅니다
紅藕香殘玉점秋 연꽃 향기 채 가시지 않은 고운 대자리위에 가을이 오는군요 輕解羅裳 獨上蘭舟 살며시 덮개 치마 벗어들고.. 홀로 목란배에 올라 봅니다 雲中誰寄錦書來 구름속의 그 누가있어 님 편지 전해 줄런지요 雁字回時 줄지은 기러기는 돌아오고 月滿西樓 서쪽 누각에는 달빛만 가득합니다 花自飄零水自流 꽃잎은 흐르는 물위에서 절로 흘러만가니 一種相思 한 가지 그리움으로 兩處閑愁 두 곳에서 뜻 모를 수심에 애태울수 밖에요 此情無計可消除 그래도 그리운 이 마음 도저히 없앨 수 없어 才下眉頭 却上心頭 눈�� 내리우니 그리움 다시 솟내요....
진동지선생의 이청조 그림입니다
이청조가 떠난 지 400년 후...
조선에서 태어난 난설헌 허초희는
15세의 나이에 당시 세도가였던 안동김씨 집안의 김성립이라는 사람과 결혼을 합니다 이 김성립이라는 분은 나중에 임진왜란 당시에 의병장으로도 활약을 하였고 승지까지 지냈다고 하니 나름대로 인물이었던 것 같은데 이들 부부 사이의 금실은 좋지 못했다고 합니다 워낚 문재(文才)에 출중했던 그녀가 남편이 성에 안찼는지 남편 또한 잘난 부인에게 주눅이 들어서 그랬는지... 잘 파악은 안되지만... 남편이 외도를 자주 했었다는 기록은 사실인 것 같습니다 과거 시험을 앞두고 접(接=학교라는 뜻)에는 가지 않고 매일 첩(妾)집에서 사는 남편에게 난설헌이 보낸 편지가 남아 있습니다
古之接有才 옛날에는 접(接=학교)에는 재(才)가 있었는데
(= 옛날에는 당신께서 학교에 다니셨는데..) 今之接無才 요즘 접(接)에는 재(才)가 없내요...
(= 요즘에는 첩 집에만 계시는군요)
접(接)자에서 재변(才邊)이 없다면 첩(妾)으로 되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또 다른 난설헌의 시를 보면
我有一端綺 아름다운 비단 한필 곡게 지녀 왔어요 拂拭光凌亂 먼지털어 내니 맑은 윤이 나대요 對織雙鳳凰 한쌍의 봉황을 마주 보게 수 놓으니 文章何燦爛 반짝이는 그 무늬가 얼마나 아름답던지... 幾年筐中藏 여러해 장롱속에 간직해 두었지만 今朝持贈郞 오늘 아침 당신 가시는 길에 드리옵니다 不惜作君袴 당신의 옷을 만드신다면 아깝지 않지만 莫作他人裳 다른 여인의 치맛감으로는 주지마세요...
인테넷 강국, 대한민국의 포탈싸이트를 다 뒤져서 간신히 난설헌의 영정 그림 하나 구했습니다....
400년의 시공을 뛰어넘는 이들 두 여류 천재문인에게 비슷한 분위기의 귀엽고 깜찍한 시가 있어서 같이 올려봅니다
이청조의 '꽃행상에게서 봄꽃을 사다' 라는 작품입니다
賣花擔上 꽃을 메고 다니는 이한테 買得一枝春欲放 봄이 되어 막 피어나는 꽃 한가지를 샀어요 漏梁輕勻 살며시 �션薦獵� 꽃의 눈물은 猶帶?霞曉露痕 아침 햇살에 빛나는 새벽 이슬의 흔적이랍니다 파郞猜道 奴面不如花面好 당신이 꽃보다 제 얼굴이 못하다 할까봐 雲빈斜簪 꽃을 귀밑머리에 비스듬히 꽃고서야 徒要敎郞比幷看 겨우 당신께 한번 비교해 보라고 하내요....
난설헌의 장간행(長干行)이라는 시입니다
家居長干里 우리 집은 장간리에 있었답니다.
來往長干道 어느 날 이 마을의 앞 길을 지나가다가
折花問阿郞 꽃가지 꺾어 들고 님에게 묻곤 했었죠.
何如妾貌好 꽃하고 나하고 어느 쪽이 더 이뽀??.....
이청조 상
이청조는 그녀의 나이 49살에 홀로 남게 됩니다 때는 금나라에 의해 조국 송나라가 절단이 나고 있었을 때(1129년)로 이청조는 남편의 집념이 담긴 약 2만권의 서적과 2천 권의 탁본... 애장하는 그림과 골동품을 껴안고 망연자실합니다 이청조는 이 소장품들을 조정에 기증하지만 그래도 남아있었던 것들 많았는지,... 이 골동품을 보고 이청조에게 접근하는 남자들이 많았다고 합니다 그러던 중... 잠시 이청조가 정신이 나갔었는지 이청조는 그런 사기꾼 중에 한 사람과 재혼을 합니다 그렇지만 이청조는 이 사람의 사람됨을 금방 알아 보았고 새 남편의 공금 횡령사실을 알아채고는 용감하게 관아에 가서 고발을 합니다 이로써 이청조는 이혼을 하게 되었으며 100일도 되지 않았던 결혼 생활은 종지부를 찍습니다 이청조는 이렇한 암담하고 답답한 현실속에서 분명 고독하였을 것이고...외로웠을 것입니다 이청조는 븐명 먼저 죽은 남편 생각을 했었을 것이고 이에 중국문학사에 길이 남을 성성만(聲聲慢)이라는 작품을 쓰게 됩니다
尋尋覓覓 찾고 또 찾아보건만,
冷冷淸淸 차갑고 쓸쓸하기만 하여
凄凄慘慘戚戚 서럽고 처참하네.
乍暖還寒時候 갑자기 따뜻해진 추운 계절은
最難將息 가장 견디기 어렵구나
三杯兩盞淡酒 잔 두개를 가져다 놓고 석 잔 술을 마셔보지만
즘敵他? 어찌 견딜 수 있으리오?
晩來風急 밤이 되니 바람도 거세지고
雁過也 기러기도 날아가버리고
正傷心 떠올리기 정말 가슴 아프지만
却是舊時相識 그 옛날 사랑의 안부 전해주던 낯익은 기러기였다내
滿地黃花堆積 마당 가득 국화꽃 쌓여 있고
憔悴損 초췌하게 시들어 가지만
如今有誰堪摘? 이제 누가 있어 꽃을 따리오
守著窓兒,창가에 지켜 앉아
獨自즘生得黑 홀로 어찌 이 어두움을 견딜 수 있으리오...
梧桐更兼細雨,오동잎 다시 가랑비 머금었다가
到黃昏點點滴滴。황혼녘까지 뚝뚝!!..
這次第,이런 처지에 있는 이내 마음을
즘一個愁字了得! 어찌 수심 '愁'자 하나로 표현할 수 있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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