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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NOT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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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What A Wonderful World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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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금 흐르고 있는 곡은 팝을 조금이라도 접해 본 사람이라면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잘 알려진 재즈계의 최고의 거장, "루이 암스트롱"[1900.7.4~1971.7.6]이 그 특유의 호소력 있는 목소리로 부르는 재즈의 명곡 "What a Wonderful World" 이다.
- 1968년 자신의 노년기에 다시 한번 노익장을 과시하며, 평소에 자신이 추구한 팝("Pop")음악에 대한 철학을 담아낸 이 곡은 영국에선 발표 즉시 차트1위(1968년 4/24-05/15(4주))를 차지했지만 정작 본토 미국에선 별 반응이 없다가, 1987년 로빈 윌리엄스가 주연한 영화 『굿모닝 베트남』의 배경음악으로 주목받으면서 뒤늦게 톱40에 오르게 된 곡이다. 넉넉한 그의 보컬이 멋진 선율과 어우러진 이 곡은 그 무렵 만화가 이현세씨가 출연한 모 맥주광고 CF에 깔려 국내에서도 광풍을 일으켰다.
- 트럼펫 연주 외에 허스키한 목소리를 앞세운 보컬리스트로도 맹활약한 그는 `What A Wonderful World`로 특히 한국에서 많은 사랑을 받았으며 1971년 7월 6일 뉴욕에서 심장병으로 숨을 거두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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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The History of Louis Armstrong?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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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루이 암스트롱은 미국 재즈사에서 절대적인 중심 인물이다. 그는 재즈가 태동할 무렵부터 시작하여 여러 다양한 트럼펫 연주기술 뿐 아니라 노래까지 섭렵하면서 후배 음악인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뉴올리언즈의 거리로부터 유럽의 왕궁에 이르기까지 그는 연주활동을 통해 '미국의 대사'라 불릴 만큼 활발한 연주 활동을 했다.
1901년 8월 4일 뉴올리언즈에서 태어난 루이 암스트롱은 열세 살 때 신년 축제로 인한 들뜬 마음에 의붓아버지의 권총을 들고 거리로 나와 신나게 방아쇠를 당겼고 그 때문에 소년원에 수감되었다. 빈민촌에서 살던 그는 이전부터 잘 곳, 먹을 것, 그리고 밴드가 있는 소년원에 들어가기를 원했었고 그의 소원대로 소년원에서 코넷을 불게되었다. 출감후 고향인 뉴올리언즈에서 직업적인 음악인으로 출발했으며 밴드를 조직해 길거리에서 연주하고 노래하며 돈을 벌기도 했다. 18살때 키드 오리(Kid Ory) 밴드에 들어간 그는 1922년 뉴올리언즈의 최고의 트럼펫터 킹 올리버(King Oliver)를 만나게 되고 코넷에서 트럼펫으로 악기를 바꾸면서 일취월장한 기량을 선보였다. 1922년에는 시카고로 이주하여 킹 올리버 악단에 합류했고 1924년 뉴욕으로 이주하면서 플레처 헨더슨(Fletcher Henderson) 밴드와 합류했다. 그는 1920년대 초반에 유행하던 연주 스타일인 스타카토(Staccato) 주법 – 끊어서 연주하는 주법 - 에서 길고 안정적인 솔로 연주를 시작했으며 독주자의 역할을 최초로 정형화시켰다. 1925년부터 3년간은 기념비적인 작은 그룹, 핫 파이브(Hot Five)와 핫 세븐(Hot Seven)을 이끌면서 재즈를 대중화 시켰으며 동시에 단기간에 루이 암스트롱의 명성을 미 전역에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이 시기 이들의 연주는 재즈의 스윙의 모태가 되었으며 이것은 30년대까지 계속 이어져서 그가 작은 그룹을 해체하고 빅밴드를 만들어 활동할 때까지 전성기를 맞았다. 30년대 말에는 빅밴드를 해체, 6명으로 이루어진 'All Stars'를 결성하였다. 1940년대 후반부터 그는 가수로서도 많은 활동을 했다. 원래 그는 연주와 동시에 가끔 노래도 부르면서 놀라운 목소리와 소울풀한 창법으로 많은 사람들을 감동시키기도 했는데, 가수로서의 경험이 그를 더 좋은 트럼펫터로 나아가게 했다. 그의 낙천적인 인생관이 담긴 'What A Wonderful World'는 그가 부른 노래 중 가장 널리 알려진 곡. 또 그는 무의미한 소리들을 반복하여 내면서 음악을 더욱 활기차게 만드는 스캣(Scat) 창법을 창시해서 빌리 할러데이(Billie Holiday), 시나트라(Sinatra), 냇킹콜(Nat King Cole) 등의 가수들에게 영향을 줬다. 1947년 루이 암스트롱이 만든 All Stars는 뉴욕의 Town Hall에서 공연하는가 하면 [Plays W.C.Handy], [Palys Fats And At The Crescendo] 등의 앨범들을 발표하면서 1950년대 최고의 전성기를 누렸다. 이들 All Stars 밴드는 1959년 그에게 첫 심장마비 증상이 나타날 때까지 투어공연도 가졌고, 그 후 10년 동안 발표한 음악들이 계속 히트곡의 대열에 오르면서 1971년 7월 심장병으로 세상을 뜰 때까지 연주활동을 계속했다. 그는 예술가이기 이전에 대중을 즐겁게 해주는 연예인이기를 원했다. 그래서 때로는 구수한 만담으로 사람들을 웃기기도 했는데 이것이 오히려 그의 위대성을 더하는 계기가 됐다. 재즈의 천재 루이 암스트롱. 빈민굴에서 자란 소년이 미국의 국보급 존재로 성장함으로써 소외된 흑인들에게는 우상으로, 전 미국인들에게는 그들의 자존심으로 자리잡았다. 그의 트럼펫 소리는 어느 음역에서나 고르고 따스하게 감싸는 무엇인가가 있다. 여기에 바로 음악으로 전 인류를 포용하려는 그의 희망이 담겨있다. [ From Music-sportsseoul.musiccity.co.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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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Who Is Louis Armstrong?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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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Real Name : Louis Daniel Armstrong
*Born : Aug 4, 1901 in New Orleans, Louisianna *Died : Jul 6, 1971 in New York, NY *Genres : Jazz *Styles : Vocal Jazz, Traditional Pop, New Orleans Jazz, Classic Jazz, Swing *Instruments : Vocals, Leader, Trumpet *Tones : Humorous, Boisterous, Playful, Sweet, Rollicking, Joyous, Cheerful, Earthy, *Amiable/Good-Natured, Exuberant, Summery, Whimsical, Carefree ~~~~~~~~~~~~~~~~~~~~~~~~~~~~~~~~~~~~~~~~~~~~~~~~~~
- 재즈의 아버지라고 불리우는 예술가 이면서도, 스스로 평생을 연예인이라고 생각하면서 살았던 루이 암스트롱은 1971년 7월 6일 자기가 노래부르던 '아름다운 세상'<What a wonderful world>을 아쉽게도(?) 떠나고 말았다. 빈민굴에서 자란 소년이 미국의 국보급 존재로 성장함으로써 소외된 흑인들에게는 우상으로, 전 미국인들에게는 그들의 자존심으로 자리잡았다. 그의 트럼펫 소리는 어느 음역에서나 고르고 따스하게 감싸는 무엇인가가 있다. 여기에 바로 음악으로 전 인류를 포용하려는 그의 희망이 담겨 있다.
뉴올리언스에서 태어나 비참했던 성장기를 거친 루이는 시대적 배경이 미리 암시해 주는 대로, 그의 출신 성분은 비참한 것이었다. 1900년 4월 7일, 뉴올리언스에서 태어난 그는 노예였던 할아버지의 뒤를 이어 공장의 막일꾼이었던 아버지의 대를 잇는 아들이었다. 그의 아버지는 나름대로 열심히 일한 덕택에 공장의 감독 지위까지 오르는 출세(?)를 했으나, 가정에는 별반 도움을 주지 못하는 사람이었다. 암스트롱 자신의 술회에 따르면, 항상 창녀들의 뒤꽁무니를 따라 다니느라 바빴던 인물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어머니로부터는 따뜻한 사랑을 받았다. 하지만 이혼한 이후의 어머니는 남자를 자주 바꾸었으며, 암스트롱은 어머니를 자주 폭행하는 여러 명의 남자들을 아버지라고 부르며 자라나야 했다. 단벌인 누더기 옷에 맨발로 거리를 떠돌며, 때로는 배고픔에 못 이겨 쓰레기 통을 뒤지기도 하는 생활 속에서 그의 눈에 비치는 것이라고는, 술에 곤드레만드레 취해 소리를 지르는 사람들 아니면, 눈에 초점을 잃고 갈길을 몰라 떨고 있는 마약 중독자들, 키득거리며 거리를 지나는 남자들을 유혹하는 매춘부들, 골목 어귀에서의 살기 어린 싸움들, 그리고 살인 같은 것들이었다. 온갖 불결함 속에 둘러 싸여서 그는 석탄 배달 등의 힘든 일을 하며 하루하루의 삶을 지탱해 나갔다. 하지만 이 더러운 환락의 도시 뉴올리언스는 언제나 음악으로 넘쳐 흘렀다. 랙 타임(Ragtime), 행진곡, 각종 댄스 음악, 프랑스 민요, 아일랜드 민요 등 거리에서는 음악이 끊일 날이 없었던 것이다.
- 빈민굴에서 태어나고 살았던 Louis Armstrong은 어릴적부터 생계를 위해 길거리에서 노래를 불렀지만 그다지 서러울 만큼 어두웠던 어린시절을 보낸 것 같지는 않다. 아마도 유머러스한 그의 낙천적인 성격 탓이 아니었을까 생각되며 다른 뛰어난 뮤지션들 보다 오랜 삶을 살았던 것도 본인과 더불어 재즈계에 큰 축복이었다.
- 역사는 바로 이 시기에 시작이 되었다. 1913년 1월 1일. 새해를 맞기 위한 축하 퍼레이드와 함께 폭죽이 터지는 한바탕 떠들썩한 축제 분위기에 고무된 이 배고픈 천진난만한 아이는 자기 의붓 아버지의 권총을 들고 거리에 나가 재미로 하늘을 향해 방아쇠를 당긴다. 결국은 이 행위로 그는 경찰에 체포되었고, 곧 소년원에 보내지게 되었다. (일부에서는 인종차별의 결과로 그가 수감되었다고 주장하고 있지만 어린나이에 길거리에서 총을 쏜다는 건 현대에서도 좀 어려운 일 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것이 바로 전화위복의 계기였다. 우연이 필연이 되듯 이 곳에서 어린 Louis Armstrong은 음악을 접하고 브라스 계열인 코넷을 익히게 된다.
거친 사회로부터 격리된 그는 그 곳에서의 생활에 익숙해지면서 특유의 친화력이 힘을 발휘하기 시작했으니, 바로 소년원의 브라스 밴드 마스터에게 호감을 사게 된 것이다. 밴드 마스터는 그에게 코넷을 가르쳤고, 아무것도 모르는 그는 오로지 귀 하나에 의지해서 코넷을 마스터했다. 3년 후 출옥할 무렵, 그러니까 그가 16세가 되었을 때 그는 석탄 배달 이외에도 그보다 더 많은 수입을 올려줄 수 있는 기술을 갖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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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음악과 내면의 성장
그는 소년원 내에 있는 브라스 밴드에 가입하여 관악기인 코넷을 배정 받는다. '음악적 이론 교육이 전무'했던 이 '음악 천재'는 음악은 이론보다는 마음과 본능으로 채득하는 것이 우선이라는 것을 이미 보여준다. 별 다른 교육없이 스스로 음악적인 센스를 터득하여 화성이나 멜로디 라인 기본적인 대위법 등을 익히고 표현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루이 자신은 그런 이론적인 것들을 전혀 몰랐던 것이다. 소년원내 밴드 마스터에게 재능을 인정받은 루이는 부족하지만 나름대로의 음악적 코치를 받으며 소년원 생활을 하던 중 아버지의 도움으로 출소하여 사창가 스토리빌에서 약간의 돈을 받고 연주 활동에들어가게 된다. 그의 연주에 질적 양적인 속도가 붙으면서 그는 점점 유명해져 드디어 'Kid Ory' 와 조우하게 되고 '키드 오리 악단'에서 코넷 주자로 있었던 '킹 올리버'와도 만나게 된다. 올리버는 소년 루이에게 기본적인 코넷의 연주 테크닉이나 자세 등을 가르쳐 준다. 그의 New Orleans Jazz 활약시기를 얘기할 때 가장 중요하게 거론될 음악인은 아마도 킹 올리버 일 것이다. 그는 킹 올리버 크레올 재즈 밴드(King Oliver's Creole Jazz Band)를 이끌며 뉴 올리언즈 재즈의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했다. 대중적으로도 큰 성공을 거두어 시카고나 디트로이트 등지의 클럽에서는 그에게 연주를 맡기려고 치열한 경쟁이 붙기도 했다. 뛰어난 코넷 연주자인 그는 1918년에 시카고에서 처음 성공을 거둔 뒤, 뉴올리언즈와 시카고를 오가며 많은 활동을 했다. 그를 따라 같이 활동했던 음악인들 중에는 클라리넷의 자니 도즈가 훌륭한 연주로 세인들의 입에 오르내렸고, 코넷과 트럼펫을 연주했던 Louis Armstrong도 끼여 있었다. 루이가 대중들 앞에 등장할 수 있었던 것은 킹 올리버의 관심과 애정 때문이었다. 킹 올리버가 어째서 자신 이외에 또 다른 코넷 연주자인 루이 암스트롱을 자신의 밴드에 참여시켰는지는 정확히 알려져 있지 않지만, 그는 루이를 친 동생 또는 아들처럼 아꼈다고 한다. 하지만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고 본심은 이기적이라고 했던가... Louis Armstrong이 음악적 역량을 인정받으며 대중들의 사랑을 받자 킹 올리버는 전과 다르게 그를 대했고, 자신만의 밴드를 가지고자 했던 루이에게는 큰 장애물로 다가왔다. 어찌 되었건 Louis Armstrong은 1924년 자신의 두번째 아내인 피아니스트 Lilian Harden과 결혼하게 되었다. (그녀는 루이의 재능을 사랑했으며 이때 루이는 그녀로부터 많은 중요한 음악적 이론을 학습받게 된다. 그 해 루이 암스트롱은 '킹 올리버 크레올 재즈 밴드'를 떠나 뉴욕에 있는 'Fletcher Henderson'빅 밴드로 부터 가입 권유를 받게 된다. 이제 루이 암스트롱의 실력은 정평이 나 있었으며, 그와 겨룰 경쟁자가 없을 정도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위치에 올라 있었다. 그리고 드디어 역사적인 'Hot Five & Hot Seven' 을 결성하게 된다.(Hot Five와 Hot Seven은 각각 다른 밴드다) Louis Armstrong은 우리가 익히 아는 바와 같이 음악적으로나 대중적으로 큰 성공을 거두어 평안한 삶을 누렸었다. 하지만 이에 비해 1938년에 40대 초반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 킹 올리버의 마지막 직업은 구두닦이 였다고 한다. 한 시대를 풍미한 음악인이었던 킹 올리버는 점점 방탕하고 무절제한 생활에 빠져들었던 것이다. 루이 암스트롱은 그런 모습을 보면서 많은 것을 느꼈다고 한다. 그러면서 그는 "나는 저렇게 살지 않겠다. 음악을 한다고 꼭 불행해지는 것은 아니다."라는 다짐을 했었다고 후에 그 측근들이 전하고 있다. 루이 암스트롱은 스무살이 되던 해(1921) 부터 자신의 음악적 재능을 인정받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이제 Louis Armstrong에 열광하기 시작했고, 다른 어느 누구도 루이의 연주를 따라잡지 못했다.
■ Louis Armstrong, 그의 음악적 깊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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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통 그를 칭하는 부류는 두 가지로 구분된다. 하나는 재즈계의 몇 않되는 천재이자 거목으로 다른 하나는 음악적 깊이에도 불구하고 대중음악에 그 능력을 소비한 "Pop Star"로 말이다. 특히 국내에서는 후자의 경우가 많은데 그 이유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노래인 'What a wonderful world'에서 찾을 수 있다. 진작부터 유명한 노래였지만 당시 베트남전 위문공연의 영상으로 인하여 많은 이들의 눈물과 감동을 자아낸 그 영향력이 막강했기 때문이다. 이제 Louis Armstrong 그의 능력과 업적을 하나하나 짚어보자.
- Musician & Trumpet 1929년 뉴욕으로 건너간 루이 암스트롱은 점점 더 상업성이 강한 음악을 행하며 대중적인 성공을 거두게 된다.
- 이 당시 그는 새로운 변화를 모색하는데 곡의 구조상 즉흥연주가 비로소 자리를 잡고 재즈가 미학적인 측면에서 한 단계 고차원적인 음악으로 자리잡을 수 있었던 것에는 암스트롱의 역할이 가장 컸다고 할 수 있다. 실제로 그전까지는 연주에서는 즉흥연주의 비중이 크지 않았다.
루이 암스트롱은 재즈 역사상 가장 위대한 트럼페터이자 코넷 연주자였다. 그의 끝없이 고음에서 솟구치는 하이 노트 프레이즈와 언제, 어떠한 환경에서도 풍부한 스윙감을 잃지 않는 능력은 지금도 재즈 트럼페터, 다른 기악 연주자들의 귀감이 되고 있다. 하늘을 가를 듯 뻗어나가는 통렬한 애드립, 농밀한 구성으로 짜여진 앙상블, 진부한 틴 판 앨리를 새롭게 구조한 화성과 편곡은 그에게로 향하는 부당한 음악적 편견을 무색케 한다. 루이 암스토롱은 1920년대까지 앙상블 음악이라는 고정된 관념에 쌓여 있던 재즈에 대한 인식을 본격적인 솔로 즉흥 연주를 통해, 재즈에서 솔리스트의 역할을 일깨웠던 최초의 플레이어이기도 했다. 그의 여유롭고 풍성한 스윙감을 동반한 트럼펫 솔로, 힘들이지 않고 4분 음표를 8분 음표로 분할하는 자유자재의 프레이즈는 1920년대 초기의 딱딱한 스타카토 솔로 스타일을 진화시키는 근원이 되었으며, 다채로운 코드 감각과 블루스에서 옮겨온 멜로딕한 연주는 스윙시대 뿐만 아니라 모던 재즈와 오늘에 이르기까지 모든 재즈 트럼페터에게 거대한 그늘로 자리하고 있다. 그를 폄하하는 사람들이 간과하는 것은 그의 연주 실력이다. 그는 기술적으로도 매우 훌륭한 연주자 였다. 다른 트럼펫 연주자들이 대개 높은 음자리표 위의 첫 G나 A정도의 음역을 소화하는데 비해, 당시 그는 2도나 4도 높은 C음까지 연주를 해내곤 해서 많은 이들을 감탄시켰다. 특히 주목할 것은 그의 음색이다. Louis Armstrong의 앨범 몇 장을 관심있게 들어본 사람은 후에 그의 소리를 판별해 낼 만큼 그의 음색은 그만의 개성과 색깔을 가지고있다. 보통 트럼펫소리와 약간은 다른 그만의 소리를 가지고 있다는 건 천편일률적인 연주를 하던 당시로서는 일종의 충격이었고 다른 연주자들에게도 영향을 미쳐 뮤지션을 스터일리스트화하는데 크게 일조한 부분도 있다. 루이의 초기 레코딩을 듣다 보면, 그의 트럼페터로서의 역량은 지금도 전혀 낡지 않은 신선한 사운드 그 자체임을 발견하게 된다. '재즈 트럼페터 중 루이 암스트롱의 영향권 밖에 놓여진 사람은 단 한 명도 없다'라는 단정은 결코 허구가 아니다. 이 당시에 남겨진 'Weather Bird' 이외에도 핫 파이브나 핫 세븐의 이름으로 발표된 암스트롱의 'Potato Head Blues'. 'Hotter than That', 'West End Blues' 등은 당시 녹음기술의 한계를 감안하고 들어봐도 매우 깊은 감명을 남겨준다.
- Vocalist & Scat 루이 암스트롱은 재즈 보컬이라는 개념을 최초로 그리고, 가장 구체적으로 제시했던 재즈 보컬리스트였다. 그가 노래하기 이전에도 많은 보컬리스트들이 활동하고 있었지만, 그들 대부분은 블루스 보컬리스트였을 뿐이었다. 이런 블루스 보컬리스트의 간접적 영향을 제외한다면, 온전한 최초의 재즈 보컬리스트는 루이 암스트롱이었다. 1920년대 핫 파이브 시절, 완성했던 기악적인 프레이즈를 옮긴 보컬 창법은 빌리 할리데이 뿐만 아니라 백인 보컬리스트 빙 크로스비와 프랭크 시나트라의 보컬 스타일에도 많은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으며 그가 자신의 트럼펫 사운드를 보컬로 전이시킨, 특유의 허스키한 음색으로 불러대는 스캣(Scat : 무의미한 음절로 리드미컬하게 흥얼거리는 창법)은 인간의 목소리를 완벽한 하나의 악기로 대체시킨 음악사의 위대한 발명이었다. 그가 시작한 스캣 싱잉뿐 아니라 본격적인 보컬에 있어서도 루이의 노래는 트럼펫 연주 못지 않은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재즈계의 DIVA라 일컬어지는 3대 재즈보컬 중(Billie Holiday, Ella Fitzgerald, Sarah Vaughan) 2명이 (Billie Holiday, Ella Fitzerald) 그의 직 간접적인 영향력 아래에 있었다는 사실을 알면 그의 능력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듯 싶다. 그들에게 무대 뒤에서 보컬을 전수하고 지도한 것도 다름아닌 루이 암스트롱이었으니까 말이다. 특히 Louis Armstrong - Ella Fitzgerald로 계보가 이어지는 스캣 싱잉에서 좀 더 알아보자. 스캣에 대한 설명은 여러 가지로 시도할 수 있지만, 코러스와 반대되는 의미에서 이해하면 된다. 코러스는 리듬과 멜로디를 받쳐주고 곡의 전체적인 리듬과 마찬가지로 뼈대를 구성하지만 스캣은 멜로디와 리듬 그 자체가 되며 곡의 살에 해당하는 독립적인 멜로디로 구성된다. 이를 좀 더 구체화해서 생각해보면 스캣은 나름대로의 솔로도 가능하다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하나의 악기로서 그 성능을 발휘한다는 얘기다. 다른 연주자들의 솔로가 진행될 때 행해지는 보컬은 코러스의 관점에서 볼 수 있으며, 다른 연주자들이 코러스를 할 때 그 위에서 진행되는 보컬은 스캣으로 인식되는 경우가 많다. 스캣의 최초발견은 의견이 분분하지만 가장 재미있는 설(說)이 하나 있다. 1926년 루이 암스트롱이 'Heebie jeebies'라는 곡을 취입하던 중, 악보를 떨어뜨려 즉흥적으로 부른 것이 스캣의 효시라는 것이다. 그의 제안을 통해 재즈 보컬리스트를 평가하는 가장 중요한 기준으로 스캣의 능력이 제시되었으며, 스캣이라는 방법론은 재즈 보컬의 고유성을 규정하는 최우선의 기준으로 자리하게 되었다. 훗날 스캣, 재즈 보컬의 교과서라 불리게 되는 엘라 피츠제랄드가 스캣의 모든 것을 전수 받은 곳이 바로 루이 암스트롱이었다. 스캣은 대개 특별한 뜻이 없는 음절의 나열로 이루어지는데 가장 사람들의 감탄을 사는 스캣은 아마도 악기의 연주를 흉내낸 것이 아닐까 싶다. 대개 실력이 있는 보컬들은 상당한 수준의 스캣싱잉의 실력을 가지고 있는데 'Mack The Knife(Ella In Berlin)'에서 보여주는 Ella Fitzgerald의 스캣은 전율을 자아내기 까지 한다. 스캣의 매력을 곡 전체에서 만끽할 수는 없지만 계속 회자되고 있는 만큼 들어볼 가치는 충분하다. (Tip : 여기서 엘라는 가사를 까먹는 실수를 저지른다. 하지만 그 위기를 넘기는 재치와 까무러칠만한 스캣이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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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Entertainment & Entertainer
우리는 일반적으로 '진정한 예술'이라는 것을 높이 평가하고 '상업적 예술' 은 폄하한다. 그 기준은 다른데 있지 않고 자기자신의 편협한 시각에 있으며 진짜 예술은 대중성이 어느정도 결여되어 있는 순결한 그 무엇이라고 생각한다. 이러한 생각대로라면 루이 암스트롱은 말 그대로 '싸구려 대중문화인'이다. 하지만 무엇이 그 기준에서 다루어지고 있느냐 라고 한다면 얘기가 틀려진다. '재즈는 대중문화인가? 그리고 대중이 즐길만한 성향을 충분히 가지고 있는가?' 물론 재즈를 좋아하는 사람들에게는 쓸데없는 질문이지만 일반적인 보통 사람들은 누구의 연주인지, 누구의 노래인지도 모른체 멜랑꼬리한 음악을 좋아하면서 그것이 재즈라고 생각한다. Rock도 마찬가지지만 재즈도 상당한 Sub-Genre를 가지고 있다. Vocal Jazz와 Sweet Jazz는 아주 작은 부분만을 차지하고 있을뿐이다. 재즈를 알고자 덤벼든 사람들도 그 열정이 금새 식을 만큼 재즈는 그리 녹녹한 음악은 아니다. 이러한 재즈의 특성을 일일이 말하지 않더라도 하나의 결론을 얻을 수 있다. '재즈는 대중적 취향을 아주 부분적으로만 가지고 있다' 라는 것... 루이 암스트롱의 라이브 공연을 다룬 비디오를 보다보면 특이한 점을 발견하게 된다. 노래 중간중간에 마치 만담가처럼 수다를 떨면서 관객에게 농담을 거는 ... 그리고 청중들의 웃음을 즐기는 그러한 모습을 말이다. 언뜻 보면 우스꽝스럽고 익살맞은 검둥이 언터테이너 같지만 그의 의도를 알면 이러한 생각은 사라진다. 루이 암스트롱은 "재즈는 대중 연예 산업의 산물이다"라고 주장했다. 헐리우드에서 <상류 사회>, <글렌 밀러 스토리> 등의 영화에 출연하는가 하면, 그의 트럼펫과 목소리로 팝 레퍼토리를 연주하는 빈도는 더욱 많아졌다. 쇼 무대에서 연주와 함께 만담을 곁들이는 것도 그만의 상품 가치를 드높였다. 그러나 루이 암스트롱은 팝 넘버를 부르면서도 자신의 음악적 근본이 재즈에 있음을 망각하지 않았다. 그는 재즈를 사랑했다. "진정한 예술은 많은 사람들이 함께 즐길 수 있는 보편적 미학을 함유하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음악적 신념이었다. '미국의 친선 대사(America's Goodwill Ambassador)'라는 닉네임은 그냥 생겨난 것이 아니다. 현재 우리가 즐기는 재즈에는 이러한 루이의 애정과 노력이 많은 부분 함유되어 있다.
■ Remember the Louis Armstrong Louis Armstrong의 가치를 가장 위대한 재즈 뮤지션, 또는 장르의 범위를 넘어선 20세기 대중 음악사를 빛낸 위대한 음악인으로 확대하더라도, 그 설명에는 부족함이 있다. 루이 암스트롱의 존재를 정확하게 규정하기 위해서는 재즈라는 제한도, 음악이라는 폭넓은 적용도 충분하지 않다. 그는 서구의 클래시컬한 배경에 적지 않은 열등감을 지니고 있던 미국인들이 20세기의 문화를 대중 문화로 설정한 후, 전 세계를 시장으로 바라봤던 미국의 연예 산업에 등장했던 최초의 전형적 스타였다. 사실 루이 암스트롱만큼 재즈 역사에 영향을 끼친 아티스트는 없다. 쿨 재즈나 퓨전재즈의 탄생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던 마일스 데이비스(Miles Davis)나 비밥 재즈를 개척한 찰리 파커(Charlie Parker)가 오히려 더 중요한 아티스트일 수도 있다. 하지만 루이 암스트롱이 재즈계에 몸을 던졌던 1920년대는 그야말로 황무지나 다름없던 시대였다. 재즈라는 음악의 형식은 물론이려니와 악기 편성, 편곡법 따위조차 확립되지 않았으나 바로 이 시기에 루이가 출현함으로써 트럼펫 연주법, 보컬 방법, 악기 편성 등 기본적인 재즈의 패턴이 시작되었다. 위에 언급한 천재의 조건이 바로 Creativity(창조성)였다. 재즈의 발전과 성장을 이룩한 것이 아니라 최초 재즈의 음악적 형식 및 기초를 확립하고 연주, 보컬, 편성 등의 시작이 바로 루이 암스트롱이라는 말이다. Louis Armstrong의 커다란 매력은 그의 음악을 남녀노소 모두가 즐길 수 있다는 점이다. 요즘처럼 재즈의 장르가 복잡해지고 팬들의 기호가 세분화 되었을 때조차도 모두 한자리에 앉아 즐길 수 있는 음악이 바로 Louis Armstrong인 것이다. 1971년 7월 6일 뉴욕 자택에서 심장마비로 사망하기까지 루이 암스트롱은 대중들의 곁에서 재즈의 매력을 설파했던 선교사로서의 임무에 충실했다. 루이 암스트롱과는 사뭇 다르게 재즈의 귀족처럼 우대되었던 Duke Ellington 조차도 "루이 암스트롱은 재즈의 대명사였으며 항상 재즈와 함께 했다. 나는 그를 사랑했으며 존경했다"라는 말로 그의 가치를 대신했으며 그가 가장 사랑한 대중들이 그의 죽음을 가장 슬퍼했다. Louis Armstrong은 숱한 논란에도 불구하고, 가장 영향력 있는 재즈 아티스트로 기억될 것이며, 그의 영향 속에서 트럼펫, 보컬, 재즈의 편곡과 화성은 현대적으로 진화할 수 있었음을 기억해야 한다. 재즈를 심각하게만 받아 들이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루이 암스트롱의 삶은 말한다. " 재즈는 당신의 지적, 문화적 허영심을 채우는 수단이 아니다. 재즈는 우리의 삶의 느낌들을 진솔하게 표현하는 대중들의 음악일 뿐이다." 루이 암스트롱은 스스로의 가치를 실천하기 위해, 대중들 앞에서 우스꽝스러운 광대로 자리했던 진정한 예술까였다. 공연장에서의 루이는 이제 막 여드름이 피어오르기 시작한 10대 소년에서부터 칠순 노인에 이르기까지 모두 즐겁고 유쾌하게 공연을 감상하게 만든다. 만담도 뛰어나고 공연장의 분위기를 조였다 풀었다 하는 솜씨는 도무지 달인의 경지가 아니고서는 도달할 수 없는 그 무엇을 보여준다. 가장 완벽한 엔터테이너. 재즈는 루이 암스트롱의 말대로 진지한 것이 아니다. 재즈는 결국 음악이고 음악은 즐기라고 존재하는 것이니까 말이다.
- 오늘날의 모든 재즈는 다 그로부터 시작하고 있다. 다른 연주자들의 지상과제는 모두 어떻게 하면 암스트롱처럼 연주할 수 있나? 에 맞추어졌던 것이다.
아름다운 음색, 명인다운 테크닉, 놀랄만한 멜로디 생산력, 비교의 상대가 없는 스윙 감각, 독특하게 굴절되는 보컬 솜씨, 개성적인 존재감으로 다른 모든 연주자들을 압도한 그는 재즈 사상 최초의 천재였던 것이다. [ From Brd1.chosun.com & Kisb.net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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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What a wonderful world : 원 문장은 What a wonderful world (it is)! 감탄문
- = It is a very wonderful world. 너무도 아름다운(훌륭한) 세상이야
- *sacred : 신성한, 신께 바쳐진. HOLY 類語
- a sacred building 신전(神殿) - a sacred edifice 교회 건물.
- *much : 비교급·최상급을 수식해서 썩, 아주, 훨씬(greatly)더, 더욱 더.
- I'm feeling much better today. 오늘은 기분이 썩 좋아졌습니다 - This is much the best. 이것이 제일 좋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