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남 이상재(月南 李商在)
월남 휘 상재 선생은 자가 계호, 호는 월남 입니다. 목은의 16대손, 휘 종덕 문양공의 15대손, 휘 맹진 판중추공?의 14대손으로 고향인 충남 한산군 서천면 종지리에서 철종 원년 1850년에 출생하였습니다. 아버지는 휘 희택이고 어머니는 밀양박씨로 농사를 짓던 중농 살림의 한 평범한 한산이씨 양반집에서 선생은 태어났습니다. 어려서는 전통교육을 받고, 1864년 고종원년, 선생의 나이 15세에 강릉유씨와 혼인하였습니다. 18세되던 1867년 서울에 올라와 과거를 치뤘는데, 돈에 눈이 어두운 오리들과 소인배들의 매관매직으로 선생은 뜻을 이루지 못하고 낙방거사가 되었습니다. 이에 개탄한 선생은 세상을 등지고 고향으로 돌아가 초야에 파묻히려 하였으나, 막중한 겨레에 대한 책임과 의무를 갖고 태어났던 운명이었던만큼 하늘은 선생을 그렇게 초야에 뭏히게 가만히 놔두지 않았습니다. 친족인 휘 장직의 권유로 당시 승지였던 박정양의 집에 들어가 1880년, 선생의 나이 31세 되던해까지 개인비서일을 보게 되었습니다. 이듬해인 1881년 박정양의 추천으로 10여명의 수행원중 한 명이 되어 신사유람단에 참가해 26명의 사절단과 함께 일본에 갔습니다. 이때 일본의 신흥문물과 사회의 발전상을 보고 크게 충격을 받았으며, 홍영식과 두터운 교분을 쌓고 귀국한 뒤 개화운동에 참가할 수 있는 소지를 마련하였던 것입니다. 1884년, 선생이 35세되던 해에 신관제에 의하여 개설된 우정총국의 총판 홍영식이 선생을 주사로 임명하였습니다. 그러나 12월 갑신정변의 실패로 선생은 낙향을 하게 됩니다. 1887년, 나이 38세때 박정양에 의하여 친군영의 문안으로 임명되었고, 그해 6월 박정양이 초대주미공사로 갈 때 2등 서기관으로 채용되었습니다. 이 때 청나라가 우리 나라와 미국이 직접 외교관계를 맺지 못하도록 국서의 수교를 방해하였으나, 선생은 청국공사와 담판을 벌여 박정양으로 하여금 단독으로 국서를 전달하게 하는데 성공하셨습니다. 귀국한 뒤 낙향하셨으나, 몇 년 후인 1892년, 선생의 나이 43세에 전환국위원, 1894년 45세에 승정원 우부승지 겸 경연각 참찬, 학부아문 참의 겸 학무국장이 되었습니다. 이 때 신교육제도를 창안하여 사범학교등을 설립, 한때는 외국어학교 교장을 겸하기도 하셨습니다. 1896년, 47세에 내각총서와 중추원 1등의관이 되고, 다시 관제개편에 따라 내각총무국장에 올라 탐관오리의 구축 등 국운을 바로잡기에 힘쓰셨습니다. 이해 7월 서재필등과 독립협회를 조직하였으며, 독립협회가 주최한 만민공동회 의장 또는 사회를 맡아 보았습니다. 만민공동회가 종로에서 개회되었을때, 6개 조항을 의결, 두 차례 상소문을 올렸다가 16명과 함께 경무청에 구금되었으나, 참정 심상훈의 간곡한 상소로 10일 만에 석방되셨습니다. 그러나 1898년 12월 25일, 선생의 나이 49세, 독립협회가 정부의 탄압과 황국협회의 방해로 해산돼자, 모든 벼슬을 버리고 초야에 묻히셨는데, 계속 나라의 운명을 걱정, 탐관오리들의 부패상과 비정을 탄핵하시다가 정부대신들의 미움을 받아, 1902년 6월, 선생의 나이 53세때에 국체개혁을 음모하였다는 이른바 개혁당 사건으로 둘째 아들 휘 승인과 함께 다시 구금되십니다. 2년후인 1904년 2월 석방되십니다. 옥고를 치루시는 동안에 감방 벽틈 사이에 낀 작은 쪽지를 발견하고 읽었는데, "너희는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 하였다는 것을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치 말라.... 네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는 내용이었습니다. 원수를 사랑하라는 가르침은 어디에서도 들어보지 못한 것이었으며 참으로 큰 승리는 상대를 쓰러뜨리는 것이 아니라, 그를 위해 기도하고 용서하며 마음으로 감화시키는 것이라는 것을 깨달으신 월남은 이 날부터 성경을 읽고 드디어 세례를 받으며 독실한 기독교 신자로 재탄생하십니다. 석방된 뒤 함께 감옥에 있었던 김정식등과 함께 황성기독교청년회(후일 YMCA)에 가입하십니다. 1905년, 선생의 나이 56세때에 을사조약이 강제체결된 뒤 고종의 애절한 하명을 거절할 수 없어 잠시 의정부참찬에 머물렀고, 1907년 선생의 나이 58세때에 법무대신의 교섭을 받았으나, 사양하시고, 군대해산이 있은 뒤 관계를 떠나셨습니다. 1906년, 59세때에 YMCA 초대교육부장이 되어 민중계몽운동과 청년교육에 헌신적인 투신을 하시게 됩니다. 1910년 선생의 나이 63세 되던해에, 일제에 의하여 국권이 강탈되고, 일제는 무단정치를 강행하였습니다. 66세가 되던 1913년에는 어용단체인 유신회를 동원, 청년회를 파괴하였는데, 이 때문에 간부들은 국외로 추방 당하거나 해외망명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선생은 이해에 총무에 취임, 사멸직전의 청년회를 사수하는데 성공하십니다. 이듬해인 1914년에는 전국적으로 여러 학생 YMCA를 발족케 하고, 조선기독교청년회 전국연합회를 조직하셨습니다. 이 때 모든 민간단체는 해산되는 동시에 집회 및 언론의 자유를 완전히 박탈당하였으나, 오직 YMCA만은 해산당하지 않고 튼튼히 서 있음으로써 국내의 유일한 민간단체가 되게 하였고, 1919년 3.1운동의 발판이 되게 하였습니다. 3.1운동에 연루되어 6개월간 옥고를 치뤘고, 특히 3.1운동의 무저항 비폭력의 혁명 운동정신을 이뤄 놓으셨습니다. 선생의 나이 71세되던 1920년 부터는 YMCA의 명예총무 또는 전국연합회장으로서 1920년 미국회의원으로 구성된 시찰단이 내한하였을때의 이른바 제2독립운동에 해당하는 여러 YMCA 운동을 주관하였으며, 각종 강연회와 지방순회강연 등 폭넓은 민족운동을 주도하셨습니다. 73세되던 1922년에는 신흥우등 YMCA대표단을 인솔, 북경에서 열린 세계학생기독교 청년연맹대회(WSCF)에 참석하여, 한국 YMCA가 단독으로 세계YMCA연맹에 가입할 수 있는길을 터놓았으며, 한국YMCA 창설에도 기여하셨습니다. 같은 해에 조선교육협회를 창설하여 회장에 취임하셨고, 조선민립대학기성회를 조직하여 회장이 되셨습니다. 1924년, 75세 고령의 나이에 조선일보 초대사장이 되셨고, 1925년 제1회 전국기자회 의장으로서 한국언론의 진작 및 단합에 크게 기여하는 한편, 공산주의 사상에 물들어가는 지식인과 언론인들을 민족주의의 편으로 끌어들이는데 결정적인 구실을 하십니다. 선생의 나이 78세 되던 1927년 2월 15일, 민족주의 진영과 사회주의 진영에서 이른바 민족의 단일전선을 결성하고 공동의 적인 일본과 투쟁할 것을 목표로 신간회를 조직할 때 여러 번 사양끝에 창립회장으로 추대되셨습니다. 그러나 그 해 사망, 4월 7일 사상초유의 성대한 사회장으로 치러졌는데, 애도 인파가 거리마다 인산인해를 이뤘습니다. 한상선영에 배치되셨습니다. 1957년 선생이 떠난지 30년이 지난 해에, 경기도 양주군 장흥면 삼하리로 이장되었고, 변영로가 비문을 썼습니다. 선생은 풍자와 기지가 넘쳤고 차원 높은 해학으로 살벌한 사회분위기를 순화시키셨으며, 악독한 일제의 침략과 불의를 날카로운 풍자와 경구로써 제아하셨습니다. 해마다 열리는 월남 선생의 추모제엔 선생을 기억하는 각계의 인사들이 줄을 이으며 선생의 정신을 길이 되살리고 있습니다. <<청년이여>>, <<청년위국가지기초>>, <<상정부서>>, <<독립문건설소>>등 다수의 저서를 남기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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