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월남이상재 ▒

월남 이상재 선생 (을사조약이 체결되던 날 고종의 어명을 거역하며)

천하한량 2006. 12. 8. 01:13
                                       월남 이상재 선생 영정

 

 


                        

 

 

(을사조약이 체결되던 날 고종의 어명을 거역하며)


「…신(臣)은 비록 만번 주륙을 당할지라도

이런 매국의 도적들과는 조정에 같이 설 수 없사온 즉,

폐하께서 만일 신이 그르다고 생각 하시면

신의 목을 베이사 모든 도적들에게 사례하시고

만일 옳다 여기시면 모든 도적의 목을 베이사

온 국민에게 사례를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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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관 한산(韓山). 호 월남(月南). 본명 계호(季皓). 충청남도 서천(舒川)에서 출생하였다. 1867년 과거에 응시하였으나 낙방하고, 서울에서 박정양(朴定陽)과 사귀어 l0여 년 간 그의 집에서 식객 노릇을 하다가, 1881년 그가 신사유람단(紳士遊覽團)의 한 사람으로 일본에 갈 때 그의 수행원이 되어 도일(渡日), 동행하였던 홍영식(洪英植)·김옥균(金玉均) 등과 깊이 사귀었다. 1884년 우정국 총판(郵政局總辦) 홍영식의 권유로 우정국 주사(主事)가 되어 인천에서 근무하다가, 갑신정변(甲申政變) 후 낙향하였다. 1887년 박정양이 초대 주미공사(駐美公使)에 임명되자 그를 따라 미국으로 건너가 1등서기관으로 근무하였으나, 청나라의 압력으로 이듬해 사신 일행과 함께 귀국하였다. 1894년 갑오개혁 후 박정양이 내무독판(內務督辦)이 되자 우부승지(右副承旨) 겸 경연참찬(經筵參贊)이 되었고, 이어 학무아문참의(學務衙門參議)로 학무국장(學務局長)을 겸임하면서 신교육령(新敎育令)을 반포하여 실시하게 하였다. 1895년 학부참사관(學部參事官)·법부참사관(法部參事官)을 지내고, 1896년 국어학교 교장·내각총서(內閣總書) 및 중추원 1등의관(中樞院一等議官)을 거쳐 의정부(議政府) 총무국장이 되었다. 서재필(徐載弼) 등과 독립협회를 조직, 부회장이 되어 만민공동회(萬民共同會)를 개최하고, 1898년 독립협회사건으로 구금되었다가 10일 후 석방되어 의정부 총무국장을 사임하였다. 1902년 개혁당(改革黨)사건으로 3년간 복역하는 동안 그리스도교도가 되었다. 1904년 러일전쟁에서 일본이 이기자 특사로 출옥, 1905년 의정부참찬(參贊)에 임명되어 헤이그 만국평화회의 밀사파견 준비차 내밀히 한규설(韓圭卨)·이상설(李相卨)의 집을 왕래하던 중 체포되었으나, 증거불충분으로 2개월 후 석방되었고 관직에서 물러났다. 이듬해 황성기독교청년회(YMCA) 종교부 총무 및 교육부장을 겸임하던 중 3·1운동에 민족대표로 참여교섭을 받았으나 참가를 거부하였다. 1921년 조선교육협회(朝鮮敎育協會) 회장이 되어 베이징[北京]에서 열린 만국기독교청년연합대회에 조선 대표로 참석 후 1923년 소년연합척후대(少年聯合斥候隊:보이스카우트) 초대 총재가 되고, 이듬해 조선일보사(朝鮮日報社) 사장에 취임하였다. 1927년 신간회(新幹會) 초대 회장에 추대되었으나 곧 병사하였다. 장례는 한국 최초의 사회장(社會葬)으로 집행되었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