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월남이상재 ▒

월남 이상재 선생 생가

천하한량 2006. 12. 8. 21:29

 

월남 이상재 선생 생가

 

이상재선생 생가

 

월남 이상재 선생 생가

 

이상재 선생 유물 전시관

 

 

 

월남 이상재선생(1850~1929)


본관 한산(韓山). 호 월남(月南). 본명 계호(季皓). 충청남도 서천(舒川)에서 출생하였다. 1867년 과거에 응시하였으나 낙방하고, 서울에서 박정양(朴定陽)과 사귀어 l0여 년 간 그의 집에서 식객 노릇을 하다가, 1881년 그가 신사유람단(紳士遊覽團)의 한 사람으로 일본에 갈 때 그의 수행원이 되어 도일(渡日), 동행하였던 홍영식(洪英植)·김옥균(金玉均) 등과 깊이 사귀었다. 1884년 우정국 총판(郵政局總辦) 홍영식의 권유로 우정국 주사(主事)가 되어 인천에서 근무하다가, 갑신정변(甲申政變) 후 낙향하였다.

1887년 박정양이 초대 주미공사(駐美公使)에 임명되자 그를 따라 미국으로 건너가 1등서기관으로 근무하였으나, 청나라의 압력으로 이듬해 사신 일행과 함께 귀국하였다. 1894년 갑오개혁 후 박정양이 내무독판(內務督辦)이 되자 우부승지(右副承旨) 겸 경연참찬(經筵參贊)이 되었고, 이어 학무아문참의(學務衙門參議)로 학무국장(學務局長)을 겸임하면서 신교육령(新敎育令)을 반포하여 실시하게 하였다.

1895년 학부참사관(學部參事官)·법부참사관(法部參事官)을 지내고, 1896년 국어학교 교장·내각총서(內閣總書) 및 중추원 1등의관(中樞院一等議官)을 거쳐 의정부(議政府) 총무국장이 되었다. 서재필(徐載弼) 등과 독립협회를 조직, 부회장이 되어 만민공동회(萬民共同會)를 개최하고, 1898년 독립협회사건으로 구금되었다가 10일 후 석방되어 의정부 총무국장을 사임하였다. 1902년 개혁당(改革黨)사건으로 3년간 복역하는 동안 그리스도교도가 되었다.

1904년 러일전쟁에서 일본이 이기자 특사로 출옥, 1905년 의정부참찬(參贊)에 임명되어 헤이그 만국평화회의 밀사파견 준비차 내밀히 한규설(韓圭卨)·이상설(李相卨)의 집을 왕래하던 중 체포되었으나, 증거불충분으로 2개월 후 석방되었고 관직에서 물러났다. 이듬해 황성기독교청년회(YMCA) 종교부 총무 및 교육부장을 겸임하던 중 3·1운동에 민족대표로 참여교섭을 받았으나 참가를 거부하였다.

1921년 조선교육협회(朝鮮敎育協會) 회장이 되어 베이징[北京]에서 열린 만국기독교청년연합대회에 조선 대표로 참석 후 1923년 소년연합척후대(少年聯合斥候隊:보이스카우트) 초대 총재가 되고, 이듬해 조선일보사(朝鮮日報社) 사장에 취임하였다. 1927년 신간회(新幹會) 초대 회장에 추대되었으나 곧 병사하였다. 장례는 한국 최초의 사회장(社會葬)으로 집행되었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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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념물 84호, 유물 전시관(1991년 생가 옆에 유품전시)

구한말 종교가 독립운동가 인 이상재선생이 태어나 자란 목조초가 삼간집

으로 아채와 사랑채가 있으며 1981년 안채와 담을 복원했다. 생가 옆에는

전시관을 건립하여 선생의 손때 붇은 유품을 전시하고 있다.

 월남 이상재선생(1850~1929)은 조선시대말 철종1년(1850)에 태어난

종교가, 청치가, 독립운동가이다.

자는 계호(季皓) 이고 호는 월남(月南) 이며 본관은 한산이다. 그는 일찍부터

기독교에 입문하여 신앙운동을 통하여 민족정신 고취에 주력했다.

일본을 사찰하고 돌아와 고종 25년(1888) 주미공사관 서기로 부임했으며

귀국후 우부승지 학부 법학부의 협판의정부 참찬을 역임했다가 광무 2년

(1898)에서는 서재필과 함께 독립협회를 조직 부회장을 지내면서 민중

계몽에 전력했다. 그 뒤에 기독청년회 회장, 조선일보사장을 거쳐 신간회

(新幹會) 회장을 지냈다. 1929년에 별세하였으며 대한민국 공로훈장복장을

1962년 3월 1일에 받았다

 관 리 청 : 서천군청 문화관광과(041-950-4224)

개    요 : 이상재 선생 생가는 안채와 사랑채가 있는 초가집으로 앞면 4칸, 옆면 2칸 규모이며
           대문은 솟을대문을 두었다.
           안채는 1800년 경에, 사랑채는 1926년경에 지었다고 하나, 원래 건물은 1955년에 없
           어지고 지금 있는 건물은 1972년, 1980년 두 차례에 걸쳐 복원한 것이다.
           특징으로는 안채와 사랑채를 구분 짓는 내외담 없이 생가터에 들어서면 안채가 훤히
           개방된 구조이다. 중부지방의 전통적 농가 분위기를 그대로 간직하고 있어서 교육적
           가치가 매우 높으며 전면 지붕의 길이가 후면보다 길게 만들어진 것이 특징이다.
           생가 옆의 유물전시관은  1990년 11월 착공하여 1991년 7월에 개관하였으며, 선생이
           생전에 남기신 유품들을 전시하고 있다. (기념물 제8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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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물현황 : 서적 1132점 / 신문기사 80점 / 만장 56점 / 상소문 1점 / 임명장 6점
           사진   49점 / 가훈      1점 / 병풍  1점 / 친필   3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