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월남이상재 ▒

월남 이상재 선생의 연보

천하한량 2006. 12. 8. 01:34

                   이상재(李商在) 1850. 10. 26~1927. 3. 29   호:월남(月南)

 

 

                                   

  

 

 

                     

   충청남도 서천(舒川)군 한산(韓山)면 종지(種芝)리에서 태어났다.
   1881년에 정부가 일본에 신사유람단(紳士遊覽團)을 파견할 때에 박정양(朴定陽)의 추천으로 그의 수원이 되어 일본의 국정을 시찰하고 이것이 계기가 되어 개화사상을 갖게 되었다. 이 여행 도중에 홍영식(洪英植)과 두터운 교분을 맺게 되었으며, 귀국 후에는 조선도 선진제국에 낙후되지 않도록 과감한 혁신을 꾀할 것을 역설하였다. 1884년에 개화파들이 우정국을 개설하여 근대적 우편제도를 수립하고 홍영식이 그 총판이 되자 그의 요청으로 우정국 수사가 되어 처음으로 관직에 나아갔다. 그러나 그 해 12월 4일 개화당이 갑신정변을 일으켰다가 실패하여 홍영식이 참살당하자, 정변에 가담하지는 않았지만 사임하고 낙향하였다. 1887년 6월에 박정양이 초대 주미(駐美)공사로 부임하게 되자 그의 추천으로 2등서기관으로 임명되어 도미(渡美)하였다. 청국이 종주권을 주장하면서 조선의 자주 외교를 인정치 아니하고 주미청국공사가 고종의 국서를 자기가 대리하여 미국 대통령에게 전달하겠다고 하면서 주미조선공사의 독립적 활동을 저지하려 하자, 크게 분개하여 청국공사관원과 담판하고 박정양 조선공사로 하여금 단독으로 국서를 전달케하여 자주독립외교를 실천하였다. 그러나 이에 분개한 청국이 조선조정에 압력을 가하여 1888년에 정부로부터 소환령을 받고 귀국하였다. 정부는 다른 관직을 제수했으나 사양하고 낙향하였다. 1894년 7월에 갑오경장 내각이 수립되고 개혁정책을 실시하게 되자 학부대신 박정양의 추천으로 학부 학무국장이 되어 사범학교, 관립중학교, 관립소학교, 외국어 학교의 설립에 주동적 역할을 하였으며, 외국어학교 교장을 겸직하고 일본의 내정간섭을 배제하기 위하여 부심하였다. 1896년 2월 「아관파천」이 일어나자 관직을 다시 사임하였다.
   1896년 7월 2일 서재필(徐載弼)과 함께 독립협회(獨立協會)를 창립하는데 주동적 역할을 하여 중앙위원으로 선출되고 뒤이어 부회장으로 선출되었다. 독립문?독립공원?독립관의 건설을 서재필과 함께 추진하여 완성했으며, 「토론회」를 조직하여 국민을 계몽하였다. 1898년 2월에는 러시아의 절영도(絶影島) 조차(租借)를 치로수구파 정부가 허락하려 하자 이를 반대하는 구국선언상소를 올리고 독립협회 회원들과 함께 서울 종로에서 만민공동회를 개최하여 러시아의 내정간섭과 이권요구를 물리치는데 성공하였다. 뒤이어 독립협회 회원들과 함께 열강의 이권 침탈을 반대하는 운동을 벌이어 더 이상의 이권양여를 저지하였다. 계속하여 의회(議會)를 설립해서 전제군주제를 입헌 군주제로 개혁하려는 운동을 벌이다가 친로수구파에 의하여 독립협회가 입헌군주제를 수립하려는 것이 아니라 박정양을 대통령, 윤치호를 부통령, 이상재를 내부대신으로 한 공화제(共和制)를 수립하려 한다는 모략에 걸리어 17명의 동지와 함께 체포되었다. 그러나 서울시민들의 자발적 만민공동회가 개최되어 이상재 등 17명의 지도자 석방을 강경히 요구했으므로 10여일 만에 석방되었다. 1898년 12월 말 독립협회가 강제 해산당한 후에는 초야에 묻혀 일체 관직에 나가지 아니하였다. 1902년에는 옛 독립협회 동지들과 국정의 개혁을 논의하다가 개혁당(改革黨)으로 몰리어 투옥되어 2년간 옥고를 치르었다. 이 때 감옥 안에서 기독교 성서들을 읽고 기독교에 입교하였다. 1905년 일제가 「을사조약」을 강제 체결하여 국권을 박탈하자, 기독교도들과 함께 애국계몽운동을 적극적으로 지원하였다. 1907년 4월에는 신민회(新民會)에 가입하여 원로회원으로서 활동하였다. 1908년에는 황성기독교청년회(皇城基督敎靑年會)의 종교부 총무와 교육부장에 취임하여, 당시 일제가 일본에서 파견한 동아기독교협회(東亞基督敎協會)를 중심으로 한국 기독교계를 친일화하려는 정치공작을 분쇄하고 기독교계를 국권회복운동 편에 서게 하는데 결정적 역할을 하였다. 그의 지도하에 이 운동은 큰 성과를 거두어 일제 통감부는 기독교세력을 반일독립세력으로 두려워하게 되었다. 1910년 8월 일제가 한국을 병탄하자, 주로 기독교청년운동에 종사하여 국권을 회복할 실력을 배양하려고 하였다. 1911년 4월에 황성기독교청년회 종교부장에 취임하여, 한국기독교청년회를 일본기독교 청년회에 예속시키려는 일제의 정책을 남궁억(南宮檍)등 동지들과 함께 분쇄하는데 진력하였다. 또한 전국 각 지방 순회강연을 하여 민족의식을 고취하고, 불교청년회 및 천도교청년회와 종교단체 친목회를 조직해서 독립운동의 기반을 닦기에 노력하였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기독교계열의 독립운동을 지도한 혐의로 일제에 의해 체포되어 4개월 만에야 석방되었다. 1920년 8월 미국의원단이 내한하자, 일제의 모략과 방해를 무릅쓰고 미국의원단들을 만나 한국의 탄압받는 실정을 설명하고 한국독립에 협조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1921년에는 조선교육협회(朝鮮敎育協會)를 창립하여 그 회장에 선출되었다. 1922년 4월에는 북경에서 개최되는 세계학생기독교청년연맹대회에 한국대표로 참가하여 일제에게 탄압받는 한국기독교운동을 폭로하고 조선기독교청년회와 일본 기독교청년회의 분리를 결의케 한 다음 귀국하는 길에 일본에 들려서 이 결의를 통고하여 조선기독교청년회의 독립을 실현하여다. 1924년에 조선일보(朝鮮日報) 사장에 추대되어 당시 새로 대두되는 자치론을 저지하고 완전독립을 민족운동노선으로 정립하는데 노력하였다. 1927년 2월 완전독립, 절대독립노선을 추구하는 민족주의 독립운동과 사회주의 독립운동이 연합하여 민족협동전선인 신간회(新幹會)를 창립하자, 이상재는 그 초대 회장으로 선출되었다. 그러나 그 다음 달에 노환으로 서거하여, 10만 군중의 애도속에 사회장으로 장의를 엄수하였다.
   정부는 그의 일생을 통한 공훈을 기리어 1962년에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 出典:『大韓民國 獨立有功者 功勳錄』 第 1卷, 國家報勳處, 1986年, pp.190~193.

註ㆍ韓國獨立運動史(文一民) 90?236面
   ㆍ明治百年史叢書 第2卷 996面
   ㆍ高等警察要史 49面
   ㆍ獨立運動史(國家報勳處) 10卷 601面
   ㆍ獨立運動史 資料集(國家報勳處) 14卷 741面

 

 

 

 

월남(月南) 연보

 

1850년 10월 26일 충청남도 서천군 한산면 종지리 출생

1888년 외교관으로서 미국에서 청(淸)의 불간섭과 자주외교를 주장하다, 청의 압력에 의해 정부로부터 소환령을 받고 귀국

1896년 내각총서와 중추원 일등의관(一等議官)이 되어 탐관오리 및 부정부패와 싸우면서 국왕을 보필. 7월 2일 서재필 등과 독립협회를 창립하고 독립문과 독립관을 각각 건립

1898년 2월 23일 자주독립수호의 구국운동선언 상소를 독립협회를 대표하여 작성, 정부에 제출. 3월 10일 종로에서 최초의 만민공동회를 개최

1902년 탐관오리의 부패상을 탄핵하자 국체개혁의 음모를 했다는 죄목으로 둘째 아들 승인(承仁)과 함께 구금

1903년 옥고를 치르는 동안 선교사들이 차입해주는 기독교서적과 성경을 읽게 되었으며, 54세에 기독교신자가 됨

1904년 노일전쟁의 발발로 국사범들의 석방과 함께 출옥하였으며, 동지들과 함께 연동교회에 입교함과 동시에 황성기독교청년회(지금의 서울YMCA)에 가입

1905년 을사조약 체결. 고종의 간청에 따라 의정부참찬이 되었으나 YMCA활동을 더욱 열심히 하면서 청년운동에 헌신. YMCA교육부 위원장이 됨

1906년 세계평화회의(네델란드 헤이그)에 이준, 이위종, 이상설 세 사람을 고종의 밀사로 파견하는 일을 비밀리에 도움

1908년 망국의 한을 이기지 못해 자결하려 하였으나 주위 사람들의 간곡한 만류로 마음을 돌이키고, 새로 회관을 짓고 입주한 YMCA의 종교부 위원장으로 취임. 나라를 위해 청년들을 강하게 키울 것을 결심

1910년 제1회 전국 기독교학생회 하령회를 조직하여 새로운 학생운동을 일으킴. 기독교회의 백만인 구령운동에 적극 참여하여 이를 구국운동으로 발전시킴

1913년 “105인 사건”으로 YMCA총무(지금의 회장) 질렛트가 국외로 추방되자 그 후임으로 총무에 취임. 총독부의 매수 공작과 유신회 등 YMCA를 일제에 예속시키려는 총독부 앞잡이들의 침략마수를 굳세게 물리침

1918년 일제의 무단정치 하에서 비밀리에 기독교, 천도교, 불교 지도자들과 만나며, 3?1독립운동을 배후에서 도움. 한편, 일요강화, 강연회 등을 통하여 청년지사들을 규합

1924년 연합 소년척후단(지금의 한국스카우트연맹)의 초대총재로 추대. 물산장려운동, 절제운동, 지방전도운동, 창문사운동 등을 진두지휘

1927년 2월 15일, 민족의 단일전선을 결성하여 공동의 적 일본과 투쟁할 것을 목적으로 조직된 신간회의 회장으로 추대. 3월 29일, 78세를 일기로 재동 자택에서 별세. 4월 7일 사회장(社會葬)으로 한산 선영에 모심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 추서

1986년 4월 10일, 월남 이상재 선생 동상 제막식을 종묘시민공원에서 개최

2002년 3월 이달의 문화인물 지정(문화관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