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상
월남이상재선생동상(月南李商在先生銅像) 기독교계 민족지도자로 신간회 초대회장을 지낸 민족운동가 이상재(1850∼1927)선생의 동상이다. 1850년 충남 서천(舒川)에서 태어나 1881년 신사유람단(紳士遊覽團)의 일원으로 일본의 국정을 시찰한 것이 계기가 되어 개화사상(開化思想)을 갖게 되었다. 1896년 서재필(徐載弼)과 함께 독립협회(獨立協會)를 창립하고 종로에서 만민공동회(萬民共同會)를 개최하여 시국에 대한 개혁안인 헌의6조를 정부에 건의하였고, 1908년에는 황성기독교청년회(皇城基督敎靑年會)의 종교부 총무와 교육부장으로 취임하여 기독교계 국권회복운동에 앞장섰다. 1921년에는 조선교육협회(朝鮮敎育協會)를 창립하고,1922년 세계학생기독교 청년대회에 한국대표로 참가하여 일제에 타압받는 한국기독교 운동을 폭로하고, 조선기독교 청년회와 일본기독교 청년회의 분리를 결의하게 한다음, 귀국하는 길에 일본에 들려서 이 결의를 통고하여 조선기독교청년회(Y.M.C.A)의 독립을 실현하였다. 1927년 신간회(新幹會)가 창립되자 초대회장으로 취임하여 활동중 서거하였으며, 10만 군중의 애도 속에 사회장으로 장의를 엄수하였다. 정부에서는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월남이상재선생추모비(月南李商在先生追慕碑) 한산면 지현리
기념관 사진
이상재선생기념관(李商在先生紀念館) 이상재(1850∼1927)선생은 충청남도 한산군 북부면 종지동(현재 서천군 한산면 종리) 본댁에서 이희택공의 장남으로 출생하였다. 1856년 7세에 사숙에 입학하였다. 1867년 18세때 과거보러 상경하였다. 1881년 박정양(朴定陽)을 수행하여 일본의 행정제도를 시찰하였으며 1884년에는 우정국 주사가 되었다. 1888년 통위영문안(統衛營文案)이 되었다. 1892년 전환국 위원이 되었다. 1894년 승정원 우부승지 겸 경연각 참찬관이 되었으며, 학무아문참의가 되고, 학무국장사무를 겸관하였다. 1895년에는 학부참서관 범무참서관이 되었다. 1896년 학부참서관 겸 외국어학교장이 되었다. 서재필과 함께 독립협회를 조직하였다. 1898년 독립협회사건으로 경무청에 구금되고 10일만에 석방되었다. 1903년 기독교에 입신하였다. 1905년 11월 의정부 참찬을 사면하였다. 1908년 황성기독교청년회 종교부 총무가 되고, 교육부장을 겸임하였다. 1911년 황성기독교청년회 종교부장이 되었고, 1913년 중앙기독교청년회 사무를 띠고 일본에 갔다왔다. 1914년에도 거듭 중앙기독교청년회 사무를 띠고 일본에 갔다왔다. 1919년 3·1운동사건으로 경무총감부에 구속되어, 6개월만에 석방되었다. 1921년 조선교육협회장이 되고, 중국북경에서 개최된 만국기독교청년회연합대회에 참가하였다. 1923년 중앙기독청년회 고문이 되었다. 소년연합척후대총재로 피임되었다. 1924년 조선일보사사장이 되었다. 1927년 신간회 회장에 피선되고, 조선일보사장을 사면하였다. 동년 3월 29일(음력 2월 27일) 재동 본제에서 서거하여, 사회장으로 한산에 안장하였다.
충청남도 서천(舒川)군 한산(韓山)면 종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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