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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부나가, 히데요시 그리고 도쿠가와 이에야스

천하한량 2007. 6. 5. 19:09
도쿠가와 이에야스
 
 
일본 센고쿠(戰國) 시대는
크고 작은 다이묘(大名, 영주)들이 일본열도에 할거하던 시기로,
 
이때 작은 다이묘인 미카와 오카자키 성주의 아들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군웅할거의 소용돌이에 휘말리면서도
 
착실하게 성장하여 천하를 손에 넣고 265년간에 걸친
에도 바쿠후(江戶幕府)의 기초를 다져나가는 과정을 먼저 살펴보자.
 
스루가의 이마가와 가문, 오와리의 오다 가문 등
양대 세력 틈에 낀 미카와의 운명은 문자 그대로 형극(荊棘)의 길이었다.
 
이에야스는 여섯 살에 이마가와 가문의 인질로 잡혀가
고난을 겪은 일을 시작으로,
 
장성해서는 최대의 세력으로 군림했던 ‘불세출의 천재’
오다 노부나가의 강요로 맏아들을 죽이지 않을 수 없었으며,
 
노부나가의 뒤를 이어 패권을 잡은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는
양자라는 이름으로 아들을 인질로 보내고
 
여러 번 결혼 경험이 있는 히데요시의 여동생을
정실로 맞이하는 굴욕을 당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에야스는 인종(忍從)의 세월을 감수하고
꾸준히 천하통일의 길을 닦으면서 신중하게 처신해 나간다.
 
이 과정에서 노부나가, 히데요시 등
센고쿠 시대 무장들의 야망, 음모, 전략, 전쟁,
 
난세를 사는 여인들의 애절한 몸부림이 교차하고,
혼돈에서 통합, 전쟁에서 평화로 향하는 새로운 에도시대가 점차 열린다.
 
천하를 평정한 이에야스는
수도를 에도로 옮기고, 해외 무역을 강화하며,
 
스스로 뛰어난 ‘국가적 세일즈맨’으로 맹활약하여
일본 발전의 기틀을 마련한다.
 
 
노부나가, 히데요시 그리고 도쿠가와 이에야스
 
두견새가 울지 않으면,
그 새를 오다 노부나가는 죽여 없애고,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울게 만들고,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울 때까지 기다린다는 유명한 말이 있다.
 
 흔히 세 영웅의 성격을 요약해서 나타내는 말로 통용되고 있다.
 
그러나 이 말 만으론 오해의 소지가 많다.
특히 오다 노부나가는 그저 성미가 급한 인물쯤으로 치부되기 쉬운데
 
사실 그렇지 않다.
 두견새를 죽인다는 것은
 
오다 노부나가의 성격이 포악하거나 급하다는 의미가 아니라
기발하고 대담하다는 의미다.
 
그는 상식을 초월하고 남의 의표를 찌르는
천재성과 대담성을 지닌 인물이었다.
 
전 생애에 걸쳐 약 100회쯤 전투를 치렀는데
단 한번도 같은 전법을 사용하지 않았다는 사실만 보아도 알 수 있다.
 
오케하자마 전투가 그 좋은 예다.
센고쿠 시대의 맹장인 이마가와의 가문은
 
오다 노부나가의 작은 병력으로 급습을 받아
하루아침에 멸망하게 된다.
 
또한 늘 오다 노부나가는
지극히 합리적인 리얼리스트였다는 점이 중요하다.
 
그는 상대를 알고 나를 알면 백전백승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현실성 있는 정보 수집력이 아주 뛰어났다.
 
그 훌륭한 예가 오다 노부나가의 막강한 총포대다.
15세기 전후로 일본에 총포가 전래되었는데,
 
센고쿠 시대 오다 노부나가만큼 총포의 위력을 재빨리 알아차리고
이를 효율적으로 전쟁에 활용한 인물은 없었다.
 
그 유명한 타케다 신겐의 기마부대를 무찌르고
천하의 최강자에 올라서게 된 동기도
 
총포를 비롯한 과학적 지식에 대한 남보다 빠른 정보 수집력과
그 현실적 응용력, 결단력에서 찾을 수 있다.
 
노부나가는 상상을 초월하는 결단력과 추진력을 지닌 인물이었다.
히에이잔 승려들이나 혼간사 승려들을 불태워 죽인 사건이나,
 
자신의 사위이며 이에야스의 장남인
노부야스에게 자결을 요구하는 행위 등에서
 
천하를 통일하여
절대 국가를 수립하는데 방해된다고 판단될 때는
 
냉정하고도 무서운 결단을 내리고
이를 곧장 실행에 옮겼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일본 국민들이 오다 노부나가의 죽음을 애석해하고
그를 국민적 영웅으로 지금도 좋아하는 이유는,
 
그의 천재성과 합리적 현실주의, 과감한 결단력과 추진력이
근대적 절대 국가를 세우는 교두보 역할을 했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래서 일본 지식인들은
그를 근대 프랑스의 나폴레옹이나 로마의 카이사르와 비견한다.
 
 
오다 노부나가에 이어 일본 천하를 휘어잡은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원래 장돌뱅이 평민 출신이다.
 
그는 바늘장수였고
또 생김새 때문에 원숭이란 별명이 따라다녔다.
 
히데요시 성격의 특징은
무엇보다도 겸손함과 정직함을 꼽을 수 있다.
 
겸손함 때문에 센고쿠 시대의
무시무시한 살풍경 속에서도 그의 인품이 돋보였다.
 
히데요시는 오다 노부나가를 찾아가
노부나가의 마장 관리인으로 인연을 맺기 시작한다.
 
그는 오다 노부나가의 가신들이 곤경에 빠져 있을 때
그들을 진심으로 돕고 그로 인해 그들로부터 환심을 산다.
 
전쟁의 소용돌이로
약육강식의 인간 관계가 지배적이던 당시 상황을 생각할 때,
 
이런 히데요시의 겸손함과 정직함, 남에 대한 배려는
그의 주변에 적이 별로 없게 만들었다.
 
히데요시는 겸손이 지나친 탓인지
의도적으로 자신을 낮추고 깎아 내렸다.
 
남의 말에 귀를 기울이거나 털털한 행동을 하면 자못 조잡해진다.
그러나 그렇게 보이게 하는 것이 히데요시에게는 처세 철학의 하나였다.
 
의도적이든 아니든, 그러한 우스꽝스러울 정도의 겸손과
천진난만할 정도의 정직으로
 
의심이 가득한 난세에 히데요시는
전혀 악의를 느끼게 하지 않는 인물로 부각되었던 것이다.
 
오다 노부나가도 죽을 때까지 그를 믿었고
귀족들은 장돌뱅이 출신인 그를 가까이했다.
 
이런 처세술이
난세를 살아가는 자의 지혜로 해석되고
 
이는 오늘 날 고도의 자본주의적 경쟁 사회에서
하나의 훌륭한 처세술의 모델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언제나 바보가 될 수 있고
또 그렇게 바보 행세를 한 히데요시..
 
그것은 보는 이에 따라 절묘한 속임수일 수도 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사람들은
 
설령 그것이 고도의 속임수라는 것을 알면서도
겸손과 정직을 갖춘 인물에게 반하고야 만다는 점이다.
 
자신의 주군인 오다 노부나가와
가신들을 홀딱 반하게 만든 후
 
히데요시는 그의 탁월한 재능과 주도면밀함으로
주어진 일을 빈틈없이 처리하여 실적을 쌓았고
 
1582년 키요스 회의를 통해
히데요시는 바야흐로 꿈에 그리던 정권을 잡게 된다.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두고 일본의 저명한 작가인 시바 료타로는
“봉급 생활자의 영웅”이라고 말한 바 있다.
 
인내심, 근면, 성실, 구두쇠라고 할 수 있을 정도의
검소함과 절약 정신 등을 두루 갖춘 지도자였다.
 
이에야스는 죽으면서 으로 절약 정신을 강조했다.
일본인의 특징 중 하나로 꼽는 절약 정신은 이에야스를 효시로 하고 있다.
 
지식계의 한 귀퉁이에선
이러한 도쿠가와의 근면함과 성실성, 구두쇠 성향을 두고서
 
일본인을 소시민화하고 왜소화한 장본인이라고 비판한 바 있다.
그러나 이는 옳은 비판이 아니다.
 
실제로 보잘것없는 지방 성주 출신인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천하 제패의 웅지를 펴기 위해 놀라운 사리 분별력과 인내심을 발휘해야 했다.
 
여섯 살의 이에야스가 이마가와 가의 인질로 끌려가다
오다 가로 납치되어 오랜 인종의 세월을 보낸 후,
 
와신상담하기를 수 차례,
미카타가하라에서 타케다 신겐에게 첫 패배를 당하고,
 
유랑을 거듭하기까지 가혹한 그의 삶이 살아 남기 위한 신중함,
가난한 가문을 지키려는 근검절약정신은 자연스레 길러졌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그는 그 시련기에 가문의 명분과
주군으로서의 근엄함을 부하들 앞에서 한시도 잃지 않았다.
 
이에야스는 아네가와 전투, 나가시마 전투에서 승리한 후,
점차 막강한 다이묘로 성장하지만,
 
결코 사치하거나 위세를 부리지 않는
사려 깊음을 보여주었을 뿐 아니라,
 
천하 평정의 그 순간까지 자신만의 특유의 끈기와
팽팽한 합리주의적 정신을 더욱 견고하게 만들어갔다.
 
천하 패권의 향방을 가름하는 1600년의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이러한 성격과 태도는 아주 잘 드러난다.
 
당시 이 전투가 천하 패권을 결정할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은 다이묘는 이에야스 밖에 없었다.
 
그만큼 이에야스는 정세 판단에 탁월했고,
그는 오다 노부나가처럼 정보 수집력에서 상대를 압도,
 
이를 최대한 적절히 이용한 후,
적이 곤경에 빠지기까지는 먼저 움직이지 않고
 
끈기 있게 기다림으로써
마침내 천하를 통일하게 된다.
 
놀라운 인내심,
사려 깊음,
 
겸손함,
검소하고 소박함,
 
오다 노부나가 같은 두둑한 배짱,
부하를 가까이도 멀리도 하지 않는 균형의 리더십,
 
그리고 만백성의 평온한 삶을 늘 생각하는
평화의 철학 등.
 
“훌륭한 부하를 데리고 있으려면 자신의 몫을 줄여서라도
부하에게 배고프다는 생각을 갖게 해서는 안된다”,
 
“부하는 인연으로 묶어서도 안되고, 비위를 맞춰줘서도 안되고,
멀리해서도 안되고, 너무 가까이해서도 안되고,
 
위압적이어도 안되고, 방심하게 해서도 안되는 것이다….
부하는 두려워하게 만들어야 하는 것이다”- 도쿠가와 이에야스 }
 
이러한 이에야스의 지도에 의해
분열된 일본은 통일되고 근대국가 일본은 탄생되었으며
 
이후 대외 무역을 통해 이에야스는
뛰어난 사업가로서도 맹활약하며
 
에도문화는 265년 동안 만개한다.
 이런 점에서 일본인들은
 
이에야스에게서 진정한 근대적 지도자의 모습을 발견하고
그를 추앙하게 된 것이다.
 
(류한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