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량해전도(추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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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1일[기축/10월11일] | 맑다. |
9월2일[경인/10월12일] | 맑다. 오는 새벽에 경상수사 배설이 도망갔다. |
9월3일[신묘/10월13일] | 비오다. |
9월4일[임진/10월14일] | 된바람이 세게 불다. 각 배들을 겨우 보전했다. |
9월5일[계사/10월15일] | 된바람이 세게 불다. |
9월6일[갑오/10월16일] | 바람은 조금 자는 듯했으나 물결은 가라앉지 않았다. |
9월7일[을미/10월17일] | 바람이 비로소 그쳤다. 탐망군관 임중형이 와서 보고하기를, "적선 쉰 다섯 척 가운데 열 세 척이 이미 어란 앞바다에 도착했다. 그 뜻이 우리 수군에 있는 것같다"고 했다. 그래서 각 배들에게 엄중히 일러 경계하였다. 오후 네 시쯤에 적선 열 세 척이 곧장 우리 배로 향해 왔다. 우리 배들도 닻을 올려 바다로 나가 맞서서 공격하니, 적들이 배를 돌려 달아나 버렸다. 뒤쫓아 먼 바다에까지 갔지만, 바람과 조수가 모두 거슬러 흐르므로 항해할 수가 없어 벽파진으로 돌아왔다. 오늘밤 아무래도 적의 야습이 있을 것같아 각 배에 경계태세를 갖추라고 하였다. 밤 열 시쯤에 적선이 포를 쏘며 야습해 왔다. 우리의 여러 배들이 겁을 집어 먹는것같아 다시금 엄명을 내리고, 내가 탄 배가 곧장 적선 앞으로 가서 포를 쏘았다. 그랬더니 적이 침범할 수 없음을 알고 자정에 물러갔다. |
9월8일[병신/10월18일] | 맑다. 적선이 오지 않았다. 여러 장수들을 불러 대책을 논의했다. 우수사 김억추는 한갓 만호감이나 맞을까 대장으로 쓰일 재목은 못되는 데도 좌의정 김응남이 서로 정다운 사이라고 해서 억지로 임명하여 보냈다. 한탄스럽다. |
9월9일[정유/10월19일] | 맑다. 오늘이 곧 9일(중양절)이라 장병들에게 음식을 먹이고 있는데, 적선 두 척이 곧장 감보도(진도군 고군면)로 들어와 우리 배의 많고 적음을 정탐했다. 영등포만호 조계종이 끝까지 따라갔으나 잡지 못했다. |
9월10일[무술/10월20일] | 맑다. 적도들이 멀리 달아났다. |
9월11일[기해/10월21일] | 흐리고 비가 오다. 홀로 배 위에 앉았으니, 그리운 생각에 눈물이 흘렀다. 아들 회는 내 심정을 알고 심히 언짢아 하였다. |
9월12일[경자/10월22일] | 비오다. |
9월13일[신축/10월23일] | 맑고 된바람이 세게 불다. |
9월14일[임인/10월24일] | 맑다. 임준영이 육지를 정탐하고 달려와서 보고하는데, "적선 이백 여 척 가운데 쉰 다섯 척이 이미 어란 앞바다에 들어왔다"고 하였다. 또 "적에게 사로잡혔던 김중걸이 전하는데 김중걸이, 이달 6일 달마산으로 피난갔다가 왜놈에게 붙잡혀 묶여서는 왜선에 실렸습니다. 김해에 사는 이름 모르는 한 사람이 왜장에게 빌어서 묶인 것을 풀어 주었습니다. 그날 밤 김해 사람이 김중걸의 귀에대 대고 하는 말이, '조선 수군 10여척이 왜선을 추격하여 사살하고 불태웠으므로 할 수 없이 보복해야겠다. 그리하여 여러 배들을 모아 조선 수군들을 모두 몰살한 뒤에 한강으로 올라가겠다'고 하였습니다"는 것이다. 이 말은 비록 모두 믿기는 어려우나 그럴 수도 없지 않으므로, 전령선을 우수영으로 보내어 피난민들을 타일러 곧 뭍으로 올라가라고 하였다. |
9월15일[계묘/10월25일] | 맑다. 수가 적은 수군으로써 명량을 등지고 진을 칠 수 없다. 그래서 진을 우수영 앞바다로 옮겼다. 여러 장수들을 불러 모아 약속하면서 이르되, "병법에 반드시 죽고자 하면 살고 살려고만 하면 죽는다고 했으며, 또 '한 사람이 길목을 지키면 천 사람이라도 두렵게 한다'고 했음은 지금 우리를 두고 한 말이다. 너희 여러 장수들이 살려는 생각은 하지 마라. 조금이라도 명령을 어기면 군법으로 다스릴 것이다"고 재삼 엄중히 약속했다. 이날 밤 신인이 꿈에 나타나, "이렇게 하면 크게 이기고, 이렇게 하면 지게 된다"고 일러 주었다. |
9월16일[갑진/10월26일] | 맑다. 아침에 별망군이 나와서 보고하는데, "적선이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이 곧장 우리 배를 향하여 옵니다"고 했다. 곧 여러 배에 명령하여 닻을 올리고 바다로 나가니 적선 330여 척이 우리의 여러 배를 에워쌌다. 여러 장수들이 중과부적임을 알고 돌아서 피할 궁리만 했다. 우수사 김억추는 물러나 아득히 먼곳에 있었다. 나는 노를 바삐 저어 앞으로 돌진하여 지자포·현자포 등 각종 총통을 어지러이 쏘아대니, 마치 나가는 게 바람과 우레같았다. 군관들이 배 위에 빽뺵히 서서 빗발치듯이 쏘아대니, 적의 무리가 감히 대들지 못하고 나왔다 물러갔다 하곤 했다. 그러나 적에게 몇 겹으로 둘러 싸여 앞으로 어찌 될지 한 가진들 알수가 없었다. 배에 있는 사람들이 서로 돌아보며 얼굴빛을 잃었다. 나는 침착하게 타이르면서, "적이 비록 천 척이라도 우리 배에게는 맞서 싸우지 못할 것이다. 일체 마음을 동요치 말고 힘을 다하여 적선을 쏘아라"고 하고서, 여러 장수들을 돌아보니 물러나 먼 바다에 있으면서 관망하고 진격하지 않았다. 나는 배를 돌려 바로 중군장 김응함의 배로 가서 먼저 그 목을 베어 효시하고 싶었으나, 내 배가 뱃머리를 돌리면 여러 배들이 차차로 멀리 물러날 것이요, 적선이 점점 육박해 오면 일은 아주 낭패다. 곧 호각을 불어서 중군에게 명령하는 기를 내리고 또 초요기를 올리니, 중군장 미조항첨사 김응함의 배가 차차로 내 배에 가까이 오고, 거제현령 안위의 배가 먼저 왔다. 내가 배 위에 서서 몸소 안위를 불러 이르되, "안위야, 군법에 죽고 싶으냐. 네가 군법에 죽고 싶으냐. 도망간다고 해서 어디 가서 살 것 같으냐"고 하니 안위가 황급히 적선 속으로 돌입했다. 다시 김응함을 불러 이르되, "너는 중군장으로서 멀리 피하고 대장을 구하지 않으니, 그 죄를 어찌 면할 것이냐. 당장 처형할 것이로되 적세 또한 급하므로 우선 공을 세우게 한다"고 하니, 두 배가 곧장 쳐들어가 싸우려 할 때, 적장이 그 휘하의 배 세 척을 지휘하여 한꺼번에 개미 붙듯이 안위의 배로 매달려 서로 먼저 올라 가려고 다투었다. 안위와 그 배에 탔던 사람들이 죽음을 각오하고 어지러이 싸우다가 힘이 거의 다하게 되었다. 나는 배를 돌려 곧장 쳐들어가 빗발치듯 어지러이 쏘아대니 적선 세 척이 몽땅 다 엎어지는데, 녹도만호 송여종, 평산포대장 정응두의 배가 줄이어 와서 합력하여 적을 쏘았다. 항복해온 왜놈 준사란 놈은 안골포의 적진에서 투항해온자이다. 내 배 위에서 내려다 보며, "저 무늬있는 붉은 비단옷을 입은 놈이 적장 마다시다"고 하였다. 나는 김돌손으로 하여금 갈구리를 던져 이물로 끌어 올렸다. 그러니 준사는 펄쩍 뛰며 "이게 마다시다"고 하였다. 그래서 곧 명령하여 토막으로 자르게 하니 적의 기운이 크게 꺾여 버린다. 이때 우리의 여러 배들이 일제히 북을 치며 나아가면서 지자포·현자포 등을 쏘고, 또 화살을 빗발처럼 쏘니 그 소리가 바다와 산을 뒤흔들었다. 적선 서른 척을 쳐 부수자 적선들은 물러나 달아나 버리고 다시는 우리 수군에 감히 가까이 오지 못했다. 이것은 실로 천행이다. 물살이 무척 험하고 형세도 또한 외롭고 위태로워 당사도(무안군 암태면)로 진을 옮겼다. |
9월17일[을사/10월27일] | 맑다. 어외도(무안군 지도면)에 이르니 피난선이 무려 삼백 여 척이 먼저 와 있었다. 우리 수군이 대첩한것을 알고 서로 다투어 치하하고, 또 많은 양식을 가져 와 군사들에게 주었다. 나주진사 임선·임환·임업 등이 와서 봤다. |
9월18일[병오/10월28일] | 맑다. 그대로 어외도에서 머물렀다. 내 배에서는 순천감목관 김탁과 본영의 종 계생이 탄환에 맞아 죽고, 박영남과 봉학 및 강진현감 이극신도 탄환에 맞았으나 중산에 이르지는 았았다. |
9월19일[정미/10월29일] | 일찍 떠나 출항했다. 바람도 순하고 물살도 순조를 타 무사히 칠산(영광군 낙월면) 바다를 건넜다. 저녁에 법성포(영광군 법성면)에 이르니 흉악한 적들이 육지로 해서 들어와 집집마다 불을 질렀다. 해질 무렵에 홍농(영광군 홍농면) 앞바다에 이르러 배를 정박시키고 잤다. |
9월20일[무진/10월30일] | 맑다. 새벽에 출항하여 곧장 위도(영광군 위도면)에 이르니 피난선이 많이 정박해 있었다. 이광축·이지화 부자가 와서 봤다. |
9월21일[기유/10월31일] | 맑다. 일찍 떠나 고구산도(옥구군 미면 선유도)에 이르니, 호남순찰사가 내가 왔다는 말을 듣고 배를 타고 급히 옥구로 갔다고 하였다. |
9월22일[경술/10월1일] | 맑다. 된바람이 세게 불어 그대로 머물렀다. 나주목사 배응경, 무장현감 이람이 와서 봤다. |
9월23일[신해/11월2일] | 맑다. 승첩 장계의 초본을 수정했다. 정희열이 와서 봤다. |
9월24일[임자/11월3일] | 맑다. 몸이 불편하여 신음했다. 김홍원이 와서 봤다. |
9월25일[계축/11월4일] | 맑다. 몸이 몹시 불편하고 식은땀이 온몸을 적셨다. |
9월26일[갑인/11월5일] | 맑다. 몸이 불편하여 종일 나가지 않았다. |
9월27일[을묘/11월6일] | 맑다. 송한·김국·배세춘 등이 승첩장계를 가지고 뱃길로 올라 갔다. |
9월28일[병진/11월7일] | 맑다. 송한이 바람에 막혀 되돌아 왔다. |
9월29일[정사/11월8일] | 맑다. 장계와 판관 정제가 도로 올라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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