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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5일[계해/9월15일] |
맑다. 옥과(곡성군 옥과읍) 땅에 이르니 피난민이 길에 가득 찼다. 말에서 내려 타일렀다. 옥과현에 들어갈때, 이기남의 부자를 만나 현에 이르니 정사준,정사립이 와서 마중했다. 옥과현감(홍요좌)은 병을 핑계대며 나오지 않았다. 잡아다 죄주려 하니 그제야 나와서 봤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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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6일[갑자/9월16일] |
맑다. 옥과에서 머물렀다. 저녁에 송대립이 적을 정탐하고 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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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7일[을축/9월17일] |
맑다. 일찍 길을 떠나 곧장 순천(순천시행동)으로 갔다. 길에서 선전관 원집을 만나 임금의 분부를 받았다. 병마사의 군사들이 모두 패하여 돌아가는 길이 줄을 이었다. 그래서 말 세 필과 활과 살을 약간 빼앗아 왔다. 곡성 강정(석곡면 능파2구 능암리 일대)에서 잤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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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8일[병인/9월18일] |
새벽에 떠나 부유창(순천시 주암면 창촌리)에서 아침밥을 먹는데, 이곳은 병마사 이복남이 이미 명령하여 일부러 불을 질렀다. 다만 타다 남은 재만 있어 보기에도 처참하였다. 광양현감 구덕령, 나주판관 원종의가 부유창 언덕에 있다가 내가 왔다는 말을 듣고 구치(순천시 주암면 행정리 접치)로 달아났다. 내가 곧 전령을 내리니 한꺼번에 와서 봤다. 나는 피해 다니는 것을 꾸짖었다. 순천에 이르니 성 안팎에 사람 발자취가 하나도 없어 적막했다. 중 혜희가 와서 알현하므로 의병장의 사령장을 주었다. 관사와 곳간의 곡식 및 군기 등 물건은 옜날과 같다. 병마사가 처치하지 않은 채 달아났다. 한탄스럽다. 총통같은 것은 옮겨 묻고, 장전과 편전은 군관들이 나누어 가지고 거기에서 머물러 잤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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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9일[정묘/9월19일] |
맑다. 일찍 떠나 낙안(순천시 낙안읍)에 이르니, 사람들이 많이 나와 오리까지나 환영하였다. 백성들이 달아나고 흩어진 까닭을 물으니 모두 하는 말이, "병마사가 적이 쳐들어온다고 겁을 먹고 창고에 불을 지르고 물러갔다. 그 때문에 이와같이 백성들도 뿔뿔이 흩어졌다"고 했다. 군청에 이르니 관청과 창고가 모두 다 타버리고, 관리와 마을 사람들이 흐르는 눈물을 가누지 못하고 와서 봤다. 오후에 길을 떠나 십리쯤 오니, 늙은 할아버지들이 길가에 늘어서서 술병을 다투어 바치는데, 받지 않으면 울면서 억지로 권했다. 저녁에 보성 조양창(조성면 조성리)에 이르니 사람은 하나도 없고, 창고에는 곡식이 묶여진 채 그대로였다. 그래서 군관 네 명을 시켜 지키게 하고, 나는 김안도의 집에서 잤다. 그 집 주인은 벌써 피난가 버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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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10일[무진/9월20일] |
맑다. 몸이 몹시 불편하여 그대로 김안도의 집에 머물렀다. 동지 배흥립도 같이 머물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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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11일[가사/9월21일] |
맑다. 아침에 양산원의 집으로 옮겼다. 송희립,최대성이 와서 봤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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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12일[경오/9월22일] |
맑다. 장계를 손잡고 그대로 머물렀다. 거제현령(안위),발포만호(소계남)가 들어와 명령을 들었다. 그들 편에 경상수사 배설의 겁내던 꼴을 들으니 더욱 한탄스러움을 이길 길이 없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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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13일[신미/9월23일] |
맑다. 거제현령,발포만호가 돌아갔다. 우후 이몽구가 전령을 받고 들어왔는데, 본영의 군기를 하나도 옮겨 실어 오지 않은 죄로 곤장 여든 대를 쳐서 보냈다. 하동현감 신진이 와서, "3일 내가 떠난 뒤에 진주 정개산성과 벽견산성도 풀어 흩어지니 스스로 무너졌다"고 하였다. 통탄할 일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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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14일[임신/9월24일] |
아침에 각각으로 장계 일곱 통을 봉하여 윤선각으로 하여금 지니고 가게 했다. 오후에 어사(임몽정)를 만날 일로 보성에 이르러 열선루에서 잤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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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15일[게유/9월25일] |
비오다가 저녁 나절에 개었다. 열선루 위에 앉아 있으니 선전관 박천봉이 임금의 분부를 가지고 왔다. 곧 받들어 받았다는 장계를 썼다. 보성의 군기를 검열하여 네 말에 나누어 실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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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16일[갑술/9월26일] |
맑다. 아침에 보성군수와 군관 등을 굴암으로 보내어 도피한 관리들을 찾아오게 했다. 박사명의 집에 사람을 보냈더니, "박사명의 집은 이미 비어 있었다"고 했다. 김희방,김붕만이 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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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17일[을해/9월27일] |
맑다. 아침식사를 하고 장흥땅 백사정(장흥읍 원도리)에 이르러 말을 먹였다. 군영구미(장흥군 안양면 해창리)에 이르니 일대가 모두 무인지경이 되어 버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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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18일[병자/9월38일] |
맑다. 회령포(대덕읍 회진리)에 갔더니 수사 배설이 멀미를 핑계삼고서 와 보지 않았다. 관사에서 잤다. 「행록」에서 전선이라곤 다만 열 척이었다. 전라우수사 김억추를 불러 병선(兵船)을 거두어 모으게 하고, 또 여러 장수들에게 분부하여 "전선을 거북배로 꾸며서 군세를 돋구도록 하라"고 하고, 또 "우리들이 임금의 명령을 같이 받들었으니 의리상 같이 죽는 것이 마땅하다. 그런데 사태가 여기까지 이르렀는데, 한번 죽음으로써 나라에 보답하는 것이 무엇이 그리 아까울소냐! 오직 죽음이 있을 뿐이다"고 굳게 약속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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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19일[정축/9월29일] |
맑다. 여러 장수들이 교서에 숙배를 하는데, 수사 배설은 받들어 숙배하지 않았다. 그 업신여기고 잘난 체하는 꼴을 말로 다 나타낼 수 없다. 그래서 그 영리(營吏)에게 곤장쳤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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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20일[무인/9월30일] |
맑다. 앞 포구가 몹시 좁아서 진을 이진(해남군 북평면 이진리)으로 옮겼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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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21일[기묘/10월1일] |
맑다. 새벽에 도와리(곽란, 토사)가 일어나 몹시 아파 인사불성이 되었다. 밤을 앉아 새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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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22일[경진/10월2일] |
맑다. 도와리가 점점 심하여, 일어나 움직일 수가 없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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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23일[신사/10월3일] |
맑다. 병세가 무척 심하여 정박한 배에서 지내기가 불편하므로 배타는 것을 포기하고 바다에서 나와서(물에서) 잤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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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24일[임모/10월4일] |
맑다. 일찍 도괘 땅에 이르러 아침밥을 먹었다. 어란 앞바다에 이르니 가는 곳마다 텅텅 비었다. 바다 위에서 잤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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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25일[계미/10월5일] |
맑다. 당포의 보자기(어부)가 소를 훔쳐 끌고 가면서, "적이 쳐들어 왔다"고 헛소문을 내었다. 나는 그것이 거짓말인 줄 알고 헛소문을 낸 두 사람을 잡아 곧 목을 베게 하니 군중 인심이 크게 안정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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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26일[갑신/10월6일] |
맑다. 임준영이 말을 타고 와서 급히 보고하는데, "적병이 이진에 이르렀다"고 한다. 전라우수사가 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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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27일[을유/10월7일] |
맑다. 경상우수사 배설이 와서 보는데, 많이 두려워하는 눈치다. 나는 "수사는 어찌 피하려고만 하시오!"라고 말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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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28일[병술/10월8일] |
말다. 적선 여덟 척이 뜻하지도 않았는데 들어왔다. 여러 배들이 두려워 겁을 먹고, 경상수사는 피하여 물러나려 하였다. 나는 꼼짝하지 않고 호각을 불고 깃발을 휘두르며 따라잡도록 명령하니 적선이 물러갔다. 뒤쫓아 갈두(새남군 송지면 갈두)까지 갔다가 돌아왔다. 저녁에 진을 장도(노루섬)로 옮겼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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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29일[정해/10월9일] |
맑다. 벽파진(진도군 고군면 벽파리)에 대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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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30일1)[무자/10월10일] |
맑다. 그대로 벽파진에 진을 쳤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