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성웅이순신 ▒

1596년 2월 선조 29년 병신년 (충무공 이순신 52세)

천하한량 2007. 5. 5. 18:23

 

 

 

 

 

2월1일[무술/2월28일] 아침에 흐리다가 저녁 나절에 개었다. 여러 장수들과 함께 활을 쏘았다. 권숙이 이곳에 왔다가 취해서 갔다.
2월2일[기해/2월29일] 맑다. 아들 울과 조기(趙琦)가 같은 배로 나갔다. 우후도 갔다. 저녁에 사도첨사가 와서 어사의 장계에 따라 파면되었다고 전했다. 그래서 곧 장계를 초잡았다.
2월3일[경자/3월1일] 맑다. 아침에 장계를 수정했다. 경상수사가 와서 봤다. 적량만호 고여우가 장담년(張聃年)에게 소송을 당하여 순찰사가 장계를 올려 파면시키려 한다고 들었다. 어두울 무렵 어란만호가 견내량 복병한 곳에서 보고하기를, "부산의 왜놈 세 명이 성주에서 투항해 온 사람들을 데리고 복병한 곳에 이르러 장사하겠다 한다"고 하였다. 그래서 곧 장흥부사에게 전령하여 내일 새벽에 가서 타일러 보라고 했다. 이런 왜적들이 어찌 장사를 하고자 하겠는가. 우리의 허실을 엿보려는 것이다.
2월4일[신축/3월2일] 맑다. 아침에 장계를 봉하여 사도 사람 진무성에게 부쳤다. 느지막이 흥양현감이 와서 보고 돌아갔다. 오후에 활 열 순을 쏘았다. 여도만호·거제현령·당포만호·옥포만호도 왔다. 저녁에 장흥부사가 복병한 곳에서 돌아와 "왜놈들이 도로 들어갔다"고 전했다.
2월5일[임인/3월3일] 아침에 흐리다가 저녁 나절에 개었다. 사도첨사·장흥부사가 일찍 왔다. 그래서 같이 아침밥을 먹었다. 권숙이 와서 돌아가겠다고 하므로 종이와 대검[佩刀]을 주어 보냈다. 저녁 나절에 삼도의 여러 장수들을 불러 모아 위로하는 음식을 먹이고, 겸하여 활을 쏘고 풍악을 잡히다가 취하여 헤어졌다. 우수사의 편지가 왔는데 기한을 늦추자고 하니 한심스럽다.
2월6일[계묘/3월4일] 흐리다. 새벽에 귀장이[耳匠 : 목수] 열 명을 거제에 배를 만들러 보냈다. 사도첨사 김완은 조도어사의 장계로써 파면되어 본디의 포구(골사도)로 내어 보냈다.
2월7일[갑진/3월5일] 흐리다. 몸이 좋지 않다. 저녁 나절에 나가 군사들에게 음식을 먹였다. 장흥부사·우후·낙안군수·흥양현감을 불러 이야기하다가 날이 저물어서야 헤어졌다.
2월8일[을사/3월6일] 맑다. 녹도만호가 와서 봤다. 흥양현감이 둔전의 벼 삼백 쉰 두 섬을 바쳤다.
2월9일[병오/3월7일] 맑다. 경상수사 권준이 와서 이야기하고 활 열 순을 쏘았다. 견내량과 부산의 왜적선 두 척이 나왔다는 말을 들었다. 그래서 웅천현감 및 우후를 탐색하러 보냈다.
2월10일[정미/3월8일] 맑다. 박춘양이 왔다. 저녁에 몸소 곳집 짓는 곳을 보았다. 웅천현감·우우후가 견내량에서 돌아와서 왜놈들이 겁에 질려 두러워하는 모양을 보고했다.
2월11일[무신/3월9일] 맑다. 보성의 계향유사 임찬(林瓚)이 소금 쉰 섬을 실어 갔다. 임달영이 제주에서 돌아왔다. 제주의 편지와 박종백·김응수의 편지도 가지고 왔다. 장흥부사와 우우후가 왔다. 또 낙안군수와 흥양현감을 불러 활을 쏘았다.
2월12일[기유/3월10일] 맑다. 살대[箭竹] 쉰 개를 경상수사에게 보냈다. 저녁나절에 수사가 와서 같이 이야기했다. 저녁에 활을 쏘았다. 장흥부사·흥양현감도 같이 쏘았다.
2월13일[경술/3월11일] 맑다. 식사를 한 뒤에 공무를 봤다. 강진현감(이극신)의 기일 어긴 죄를 처벌했다. 영암군수(박홍장)를 파면시킬 장계를 초잡았다. 임달영이 돌아갔다. 제주목사(이경록)에게 답장했다.
2월14일[신해/3월12일] 맑다. 저녁 나절에 나가 공무를 보고 장계 초잡은 것을 수정했다. 동복(同福)의 계향유사 김덕린이 와서 인사했다. 경상수사가 쑥떡을 보내왔다. 낙안군수·녹도만호 등을 불러서 떡을 먹였다. 새로 지은 곳집에 지붕을 이었다. 강진현감이와서 인사하므로 위로하고 술을 먹였다. 저녁에 물을 부엌가로 끌어들이는데 물 긷는 길을 편하게 했다. 흥양의 계향유사 송상문이 와서 쌀과 벼를 합해 일곱 섬을 바쳤다.
2월15일[임사/3월13일] 새벽에 비오다. 전라우도의 투항해 온 왜놈과 경상도의 투항해 온 왜놈이 같이 짜고 도망갈 꾀를 낸다고 들었다. 그래서 전령을 내어 알렸다. 아침에 장계 초잡은 것을 수정했다. 동복의 계향유사 김덕린, 흥양의 계향유사 송상문 등이 돌아갔다.
2월16일[계축/3월14일] 맑다. 아침에 장계 초잡은 것을 수정했다. 저녁 나절에 나가 공무를 봤다. 장흥부사·우우후·가리포첨사가 와서 같이 활을 쏘았다.
2월17일[감인/3월15일] 흐리다. 나라 제사날(세종의 제사)이라 공무를 보지 않았다. 식사를 한 뒤에 아들 면이 본영으로 갔다. 저녁에 흥양현감이 와서 이야기하다가 저녁식사를 같이 했다. 미조항첨사 성윤문의 문안 편지가 왔는데, "방금 관찰사[方伯]의 공문을 받고 진주성[晉城]으로 부임하게 되어 나아가 인사드리지 못한다. 자기 대신으로 황언실이 되었다"고 했다.
2월18일[을묘/3월16일] 맑다. 식사를 한 뒤에 나가 공무를 봤다. 체찰사의 비밀 공문이 세 통 왔다. 그 하나는 제주목에게 계속하여 후원하라는 것이고, 또 하나는 영등포만호 조계종을 심문하는 일에 관한 것이고, 다란 하나는 진도 진선을 아직은 독촉하여 모으지 말라는 것이었다. 저녁에 김국이 서울에서 들어와서 비밀 공문 두 통을 가지고 왔다.
2월19일[병진/3월17일] 맑다. 경상수자 권준이 왔다. 장흥부사·웅천현감·낙안군수·흥양현감·우우후·사천현감 등과 같이 이야기했다. 경상도 진에 남아 있는 투항한 왜놈을 이곳에 있는 왜놈 난에몬(亂汝文 : 南汝文) 등을 시켜 묶어 와서 목을 베게 했다.
2월20일[정사/3월18일] 맑다. 손만세가 사사로이 입대(入隊)에 관한 공문을 만든 죄를 처벌했다. 오후에 활 열 순을 쏘았다.
2월21일[무우/3월19일] 비오다.
2월22일[기미/3월20일] 맑다. 웅천현감·흥양현감이 와서 봤다. 우우후·장흥부사·낙안군수·남도포만호·가리포첨사·여도만호·녹도만호가 와서 활을 쏘았다. 나도 활을 쏘았다.
2월23일[경신/3월21일] 맑다. 일찍 식사한 뒤에 나가 공무를 봤다. 둔전의 벼를 다시 되어 세 곳간에 백 예순 일곱 섬을 쌓았다. 저녁 나절에 거제현령·고성현감·하동현감·강진현감·회령포만호가 와서 봤다. 하천수·이진도 왔다.
2월24일[신유/3월22일] 맑다. 일찍 식사한 뒤에 나가 공무를 봤다. 둔전의 벼를 다시 되어 백 일흔 섬을 곳간에 넣었다. 우수사가 들어왔다. 낙안군수(선의경)가 갈렸다는 기별이 왔다.
2월25일[임술/3월23일] 비오다가 오정 때 개었다. 장계 초잡은 것을 수정했다. 나주판관(원종의)이 와서 봤다. 장흥부사가 와서 "수군을 다스리기 어려운 것은 관찰사가 방해하기 때문이다"고 하였다.
2월26일[계해/3월24일] 맑다. 경상수사가 와서 봤다. 조금 있으니 견내량 복병이 달려와서 보고하기를, "왜적선 한 척이 견내량을 거쳐 들어와 해평장에까지 이르를 즈음에 머물지 못하게 했다"고 하였다.
2월27일[갑자/3월25일] 흐리다. 녹도만호 등과 함께 활을 쏘았다. 흥양현감이 휴가를 받아 돌아갔다.
2월28일[을축/3월26일] 맑다. 일찍 침을 맞았다. 장흥부사와 체찰사의 군관이 이곳에 이르렀는데, 장흥부사는 "종사관이 발행한 전령으로 자기를 잡으러 온 일 때문에 왔다"고 했다. 또 "전라도 수군 안에서 우도의 수군이 전라좌·우도를 왔다갔다 하면서 성원한다"고 했다. 저녁에 거제현령을 불러 와서 일을 물어 본 뒤에 돌려 보냈다.
2월29일[병인/3월27일] 맑다. 아침에 공문 초잡은 것을 수정했다. 식사를 한 뒤에 나가 공무를 봤다. 우수사 및 경상수사, 장흥부사, 체찰사의 군관이 왔다. 경상우도 순찰사의 군관이 편지를 가지고 왔다.
2월30일[정묘/3월28일] 맑다. 아침에 정사립으로 하여금 보고문을 써서 체찰사에게 보냈다. 장흥부사도 체찰사에게 갔다. 해가 뉘엿할 때 우수사가 보고하는데, "벌써 바람이 따뜻해졌으니 협동작전할 계획이 시급하여 소속 부하를 거느리고 본도(전라우도)로 가고자 한다"는 것이었다. 그 마음가짐이 몹시도 해괴하여 그의 군관 및 도훈도에게 곤장 일흔 대를 때렸다. 저녁에 송희립·노윤발·이원룡등이 들어왔다. 몸이 몹시 불편하여 밤새도록 식은땀을 흘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