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성웅이순신 ▒

1595년 8월 선조 28년 을미년 (충무공 이순신 51세)

천하한량 2007. 5. 5. 18:06

 

 

 

 

 

8월1일[신축/9월4일] 비바람이 세게 일다. 어사(신식)와 같이 식사하고, 곧 배로 내려가 순천 등의 다섯 고을의 배를 점검했다. 저물어서 나는 어사 있는 곳으로 내려가 같이 이야기했다.
8월2일[임인/9월5일] 흐리다. 우도의 전선을 점고한 뒤에 그대로 남도포 막사에서 머물렀다. 나는 나가 앉아 충청수사와 함께 이야기했다.
8월3일[계묘/9월6일] 맑다. 어사는 저녁 나절에 경상도 진으로 가서 점고했다. 저녁에 경상도 진으로 가서 같이 이야기하는데, 몸이 불편하여 곧 돌아왔다.
8월4일[갑진/9월7일] 비오다. 어사가 이곳에 왔기에 여러 장수들을 모아 종일 이야기하고서 헤어졌다.
8월5일[을사/9월8일] 흐리되 비는 아니오다. 아침에 어사와 작별을 이야기하러 충청수사 있는 곳에 이르러 어사를 전별(餞別)하고 나니, 조방장 정응운이 아뢰고 돌아았다.
8월6일[병오/9월9일] 비가 흠뻑 쏟아졌다. 우수사ㆍ경상수사, 두 조방장이 모여 함께 종일 이야기하고서 헤어졌다.
8월7일[정미/9월10일] 비오다. 아침에 아들 울과 허주 및 현덕린, 우후(이몽구)가 같이 배를 타고 나갔다. 저녁 나절에 두 조방장, 충청수사가 같이 이야기했다. 저녁에 표신을 가진 선전관 이광후가 임금의 분부를 가지고 왔다. "원수가 삼도 수군을 거느리고 바로 적의 소굴로 들어가라"는 것이었다. 그와 함게 이야기하며 밤을 새웠다.
8월8일[무신/9월11일] 비오다. 선전관이 나갔다. 경상수사ㆍ충청수사 및 두 조방장과 같이 이야기하다가 같이 저녁밥을 먹었다. 날이 저물어서 저마다 돌아갔다.
8월9일[기유/9월12일] 하늬바람이 세게 불다.
8월10일[경술/9월13일] 맑다. 몸이 불편한 것같다. 홀로 다락위에 앉았으니 온갖 생각이 다 일어난다. 저녁 나절에 대청으로 나가 공무를 보고 난 뒤에 활 다섯 순을 쏘았다. 정제(鄭霽)와 결성현감(손안국)이 같이 배로 나갔다.
8월11일[신해/9월14일] 비가 오락가락하다. 종 한경도 본영으로 갔다. 배영수ㆍ김응겸이 활쏘기를 겨루었다. 김응겸이 이겼다.
8월12일[임자/9월15일] 흐리다. 일찍 나가 공무를 봤다. 저녁나절에 두 조방장과 함께 활을 쏘았다. 김응겸이 경상우수사에게 갔다가 돌아올 때에 우수사(이억기)에게 들러서 뵙고 활쏘기 겨루기를 했는데, 배영수가 또 졌다가 했다.
8월13일[계축/9월16일] 종일 비오다. 장계 초고를 고치고 공문을 결재했다. 독수(禿水)가 왔는데, 도양장(고흥군 도양면)의 둔전치는 일에 이기남이 하는 짓이 괴상한 것이 많다고 했다. 그래서 우후가 달려가 부정사실을 조사하도록 공문을 만들어 보냈다.
8월14일[갑인/9월17일] 종일 비오다. 진해현감 정항 및 조계종(영등포만호)이 와서 이야기했다.
8월15일[을묘/9월18일] 새벽에 망궐례를 했다. 우수사(이억기)ㆍ가리포첨사(이응표)ㆍ임치현감(홍견) 등 여러 장수들이 함께 왔다. 오늘 삼도의 수사와 본도 잡색군을 먹이고, 종일 여러 장수들과 함께 같이 취했다. 오늘밤 으스름 달빛이 다락을 비치니, 잠을 이룰수 없어 밤새도록 휘파람 불며 시를 읊었다.
8월16일[병진/9월19일] 궂은비가 걷히지 않고 종일 부슬부슬 내렸다. 생각이 몹시 어지럽다. 두 조방장과 같이 이야기했다.
8월17일[정사/9월20일] 가랑비가 오고 샛바람이 불다. 새벽에 김응겸을 불러 일을 물었다. 저녁 나절에 나가 공무를 봤다. 두 조방장과 함께 이야기하고 활 열 순을 쏘았다.
8월18일[무오/9월21일] 궂은비가 걷히지 않다. 신ㆍ박 두 조방장이 와서 같이 이야기했다.
8월19일[기미/9월22일] 날씨가 활짝 개었다. 두 조방장 및 방답첨사와 함께 활을 쏘았다. 밤 열 시쯤에 조카 봉, 아들 회ㆍ울이 들어왔다. "체찰사(이원익)가 21일 진주성에 이르러 군사에 관한 일을 묻고자 체찰사의 군관이 들어왔다"고 하였다.
8월20일[경신/9월23일] 맑다. 종일 체찰사의 전령을 기다렸으나 오지 않았다. 경상수사 권준, 우수사(이억기)ㆍ발포만호(황정록)가 와서 보고 돌아갔다. 밤 열 시쯤에 전령이 들어왔다. 한범 자정에 배를 타고 곤이도(통영시 산양면)에 이르렀다.
8월21일[신유/9월24일] 흐리다. 저녁 나절에 소비포(고성군 하일면 춘암리) 앞바다에 이르니 전라순찰사(홍세공)의 군관 이준이 공문을 가지고 왔다. 강응표ㆍ오계성이 같이 와서 함께 한 시간 남짓 이야기했다. 경수(이억기의 字)ㆍ권언경ㆍ자윤(박종남의 字)ㆍ언심(신호의 字)에게 편지를 썼다. 저물 무렵에 사천 땅 침도(針島:삼천포)에 이르러 잤다. 밤에 몸이 몹시 차갑고 마음이 쓸쓸하다.
8월22일[임술/9월25일] 맑다. 이른 아침에 각종 공문을 만들어 체찰사에게 보냈다. 아침밥을 먹은 뒤에 걸어서 사천현에 이르렀다. 오후에 진주 남강가에 이르니 "체찰사는 벌써 진주에 들어왔다"고 했다.
8월23일[계해/9월26일] 맑다. 체찰사 있는 곳으로 가서 조용히 이야기하는 사이에 백성을 위해서 고통을 덜어주어야겠다는 생각이 많이 났다. 호남순찰사는 헐뜯어 말하는 기색이 많으니 한탄스럽다. 저녁 나절에 나는 김응서와 같이 촉석루에 이르러 장병들이 패전하여 죽은 곳을 보니, 비통함을 이기지 못하였다. 이윽고 체찰사가 나더러 먼저 가라고 하므로 배를 타고 소비포로 돌아와 정박했다.
8월24일[갑자/9월27일] 맑다. 새벽에 소비포 앞에 이르니 고성현령 조응도가 와서 알현하고서, 소비포 앞바다에서 잤다. 체찰사와 부사(김륵), 종사관(노경임)도 잤다.
8월25일[을축/9월28일] 맑다. 일찍이 식사를 한 뒤에 체찰사와 부사, 종사관은 함께 내가 탄 배를 타고 오전 여덟 시쯤에 출항하여 같이 서서 여러 섬들과 여러 진 합병할 곳과, 또 접전할 곳 등을 손가락으로 가리켜 보이면서 의논했다. 곡포(남해군 이동면 화계리)는 평산포(남면 평산리)에 합하고, 상주포(상주면 상주리)는 미조항(삼동면 미조리)에 합하고, 적량(창선면 진동리 적량)은 삼천진(삼천포시)에 합하고, 소비포(고성군 하일면 춘암리)는 사량(통영시 사량면 금평리)에 합하고, 가배량(거제도 도산면 노전동)은 당포(통영시 산양면 삼덕리)에 합하고, 지세포(일운면 지세포리)는 조라포(일운면 구조라리)에 합하고, 제포(진해시 웅천1동 제덕동)는 웅천에 합하고, 율포(거제군 장목면 대금리)는 옥포(장승포시 옥포동)에 합하고, 안골포(진해시 안골동)는 가덕진(부산시 강서구 천가동)에 합치기로 결정했다. 저녁에 진중에 이르러 여러 장수들이 교서에 숙배하고 공사례를 한 다음 헤어졌다.
8월26일[병인/9월29일] 맑다. 저녁에 부사(김륵)와 서로 만나 은밀히 이야기했다.
8월27일[정묘/9월30일] 맑다. 군사 5,480명에게 밥을 먹였다.1) 저녁에 상봉에 이르러 적진과 적이 다니는 길을 손가락으로 가리켜 보였다. 바람이 몹시 사납다. 밤을 틈타 도로 내려왔다.
8월28일[무진/10월1일] 맑다. 이른 아침에 체찰사 및 부사ㆍ종사관이 같이 다락 위에 앉아 여러 가지 폐단되는 점을 의논했다. 식사를 하기 전에 배로 내려와서 배를 타고 나갔다.
8월29일[기사/10월2일] 맑다. 일찍 나가 공무를 보다. 경상수사가 체찰사 있는 곳에서 왔다.

1) 李芬이 쓴『행록』(을미년)에는 "체찰사 이원익의 이름으로 군사들에게 잔치를 베풀어주니, 정승이 기뻐했고 온 군중이 좋아라 했다(吾爲相公巳辦了相公若許之則當以相公之命饋之祖公大喜)"고 했다.『이충무공전서』권9,「부록」18쪽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