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성웅이순신 ▒

1594년 7월 선조 27년 갑오년 (충무공 이순신 50세)

천하한량 2007. 5. 5. 17:17

 

 

 

 

7월1일[정축/8월16일] 맑다. 나라 제사날(인종의 제서)이라 공무를 보지 않았다. 배응록이 원수에게서 돌아와서 원수가 한말을 뉘우치며 보내더라고 했다.
7월2일[무인/8월17일] 맑다. 늦더위가 찌는 듯하다 사수들의 활쏘기를 시험하고 적의 장물을 나누어 줬다. 저녁 나절에 순천부사ㆍ충청수사와 함께 활을 쏘았다.
7월3일[기묘/8월18일] 맑다. 충청수사ㆍ순천부사가 활을 쏘았다. 웅천혐감이 아뢰고 돌아갔다. 각배에서 여러번 양식을 훔친 사람들을 처형했다.
7월4일[경진/8월19일] 맑다. 충청수사ㆍ마량첨사ㆍ소비포권관이 와서 같이 식사를 했다. 왜적 다섯 명과 도망병 한 명을 아울러 처형했다. 활 열 순을 쏘았다.
7월5일[신사/8월20일] 맑다. 탐후선이 들어와서 어머니께 편안하시다고 한다. 다행이다. 심약(審藥)이 내려 왔는데 매우 용렬하니 한심스럽다. 우수사ㆍ충청수사가 같이 왔다. 여도만호는 술을 가져와 같이 마셨다. 활 여남은 순을 쏘았다.
7월6일[임오/8월21일] 종일 궂은 비가 오다. 몸이 붚편하여 공무를 보지 않았다. 정원명 등을 격군을 정비하지 않은 일로 잡아 가두었다.
7월7일[계미/8월22일] 비가 뿌렸다. 우수사ㆍ순천부사ㆍ사도첨사ㆍ가리포첨사ㆍ발포만호ㆍ녹도만호가 홤께 활을 쏘았다. 이영남이 배를 거느리고 올 일로 곤양으로 나갔다.
7월8일[갑신/8월23일] 흐리되 비는 아니오고 종일 바람이 세게 불다. 각 고을에 공문을 적어 보냈다. 고성 사람으로 사로 잡혔다가 도망해 온 사람을 직접 문초했다.
7월9일[을유/8월24일] 바람이 세게 불다. 충청우후(원유남)가 교서에 숙배하였다. 저녁 나절에 순천ㆍ낙안ㆍ보성의 군관과 색리들의 기일을 어긴 죄를 처벌했다. 낙안의 군량 벼 이백 석을 받아서 나누었다.
7월10일[병술/8월25일] 아침에 맑다가 저녁에 비오다 아들 면의 병이 중태에 빠졌다고 하니 걱정이다 신흥헌과 송전이 들어왔다.
7월11일[정해/8월26일] 종일 궂은비 오고 바람이 세게 불다. 장계를 손수 초잡아 고쳐 주었다. 오후에 군관등과 함께 화살을 쏘았다. 충청수사가 와서 봤다.
7월12일[무자/8월27일] 맑다. 공무를 본 뒤에 활을 쏘았다. "영의정 유성룡이 죽었다는 부고가 순변사가 있는 곳에 왔다"고 한다. 이는 유정승을 미워하는 자들이 반드시 말을 만들어 비방하는 말일 것이다.
7월13일[기축/8월28일] 비오다 비가 내리는데 홀로 앉아 아들 며의 병세가 어떨까 하고 글자를 짚어 점을 쳐 보았더니 좋은 괘가 나왔다 . 좀 마음이 놓인다. 또 비가 올 것인가 개일 것인가를 점쳤더니 앞르로 비가 많이 내릴 것이니 농사일이 염려된다.
7월14일[경인/8월29일] 비오다 어제 저녁부터 빗발이 삼대같았다 지붕이 새어 마른 곳이 없다. 간신히 밤을 지냈다.
7월15일[신묘/8월30일] 비오다가 저녁 나절에 개이다 조카해ㆍ종 경이 들아와서 "아들 명의 병이 차도가 있다" 는 소식을 자세히 들으니 기쁘기 그지없다. 조카 분의 편지에 "아산 고향의 선산이 아무 탈 없고 가묘도 편안하며 어머니께서도 편안하시다"고 하니 다행이다. 활 여남은 순을 쏜 뒤에 수루에 올라거서 이리저리 거닐 적에 박주사가 급히 와서 "명나라 장수의 배가 이미 본영 앞에 이르러 이리로 온다"고 했다.
7월16일[임진/8월31일] 흐리고 바람이 차겁다. 늦은 아침부터 비가 퍼붓듯이 종일 왔다. 경상수사 원균, 충청수사, 우수사가 모두 와서 봤다. 명나라 장수가 삼천진(삼천포시)에 이르러서 머물러 묵는다고 했다. 저녁에 본진으로 돌아왔다.
7월17일[계사/9월1일] 맑다. 새벽에 포구로 나가 진을 쳤다 오전 열 시쯤에 명나라 장수 파총 장흥유가 병호선(兵號船) 다섯 척을 거느리고 돛을 달고 들어와서 곧장 영문에 이르러서는 육지에 내려 이야기하자고 청했다. 그래서 나는 여러 수사들과 함께 활터 정자에 올라가서 올라오기를 청했더니 파총이 배에서 내려 곧 왔다. 이들과 같이 앉아서 먼저 바닷길 만리 먼길을 어렵다 않으시고 여기까지 오신데 대하여 감사함을 비길 데가 없다고 하였더니 대답히기를 "작년 7월절강에서 배를 타고 요동에 이르니 요동 사람들이 바닷가에는 돌섬과 암초가 많고, 또 앞으로 강화가 이루어질 것이니 갈 필요가 없다고 억지로 말리는데도 그대로 요동에 머물면서 시랑(侍郞) 손광(孫鑛)과 총병(總兵) 양문(楊文)에게 보고하고 올 3월초에 출항하여 들어왔으니 뭐 수고하고 할 것이 있는가" 했다. 나는 차를 마시자고 청하고 또 술잔을 권하니 감개무량하다 또 적의 형세를 이야기하느라고 밤이 깊은 줄도 몰랐다.
7월18일[갑오/9월2일] 맑다. 다락 위로 올라가자고 청하여 술을 권했다. 대체로 내년 봄에 배를 거느리고 곧장 제주에 이르러, 우리 수군과 합세하여 추악한 적들을 무찌르자고 성의있게 이야기했다. 초저녁에 헤어졌다.
7월19일[을미/9월3일] 맑다. 환영 예물단자를 올리니. 감사해 마지 못하겠다면서 주시는 물건이 매우 풍성하다고 했다. 또 자(字)와 호(別號)를 물으니 써서 주는 데 자는 중문(仲文)이요, 호(軒號)는 수천(秀川)이라고 했다.
7월20일[병신/9월4일] 맑다. 아침에 통역관이 와서 명나라 장수(장흥유)가 남원에 있는 총병 유정이 있는 곳에는 가지 않고, 곧장 돌아가겠다고 했다. 나는 명나라 장수에게 간절히 말을 전하기를 "처음에 파총(장홍유)이 남원으로 온다는 소식이 이미 총병관 유정에게 전해졌으니, 만약 가지 않는다면 그 중간에 남의 말들이 있을 것이므로 바라건대 가서 만나보고 돌아가는 것이 좋겠다"고 하였다. 그러니 파총이 나의 말을 전해 듣고 과연 옳다고 하며, "내 말을 타고 혼자 가서 만나 본뒤에 군산으로 가서 배를 타겠다"고 했다는 것이다. 아침식사를 한 뒤에 파총이 내 배로 와서 조용히 이야기하고 이별의 잔을 권했다. 파총이 일곱 잔을 마신 뒤 홋줄을 풀고 함께 포구 밖으로 나가 두번 세번 애달픈 뜻으로 송별하였다. 그리고 경수(이억기), 충청수사, 순처부사, 발포만호, 사도참사와 같이 사인암(舍人巖)으로 올라가 취하며 이야기하고서 돌아왔다.
7월21일[정유/9월5일] 맑다. 명나라 장수와의 문답 내용을 원수에게 보고했다. 오후에 흥양의 군량선이 들어왔다. 아들 회가 방자(지방관청의 종)에게 매질했다고 하기에 아들을 잡아와서 뜰 아래에 세워 꾸짖고 매는 때리지 않았다.1) 저녁 나절에 발포만호가 복병 내보내는 일로 와서 아뢰고 갔다. 우수사(이억기)가 군량 스무 섬을 꾸어 갔다.
7월22일[무술/9월6일] 맑다. 아침에 장계 초고를 수정했다. 오후에 여러 장수들과 활을 쏘았다.
7월23일[기해/9월7일] 맑다. 활을 쏘았다. 조카 해가 돌아갔다.
7월24일[경자/9월8일] 맑다. 여러가지 장계를 직접 봉했다. 저녁에 활 일곱 순을 쏘았다.
7월25일[신축/9월9일] 맑다 식사를 한 뒤에 우수사에게로 갔다. 활 열 순을 쏘았다. 하천수에게 장계를 지니게 하여 내어 보냈다.
7월26일[임인/9월10일] 맑다. 각 고을에 공문을 써 보냈다. 녹도만호가 도망병 여덟 명을 잡아왔다. 그래서 그 중 주모자 세 명을 처형하고 그 나머지는 곤장을 쳤다. 아들들의 편지를 보니 "어머니께서 편안하시고 면의 병도 나아진다"고 하니 다행이다. 윤돈이 종사관으로 내려온다고 한다. 신천기ㆍ신제운ㆍ노유발이 들어왔다.
7월27일[계묘/9월11일] 흐리고 바람 불다. 충청수사ㆍ순천부사와 함께 활을 쏘았다.
7월28일[갑진/9월12일] 맑다. 신제운이 주부로 임명되어서 갔다.
7월29일[을사/9월13일] 종일 가랑비 오다. 몸이 몹시 불편하여 밤새도록 신음했다.

1) 초서본 『난중일기』에는 이 날의 아들 회에 대한 사건내용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