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성웅이순신 ▒

1592년 7월 선조 25년 임진년 (충무공 이순신 48세)

천하한량 2007. 5. 4. 03:36
제3차 출전도(한산 승첩)
  (6월11일부터 8월23일까지는 일기가 빠지고 없음)
7월4일[신유/8월10일] 「장계」에서
떼를 지어 출몰하는 적을 맞이하여 낱낱이 무찌르고자 서로 공문을 돌려 약속하며 배를 정비하고, 경상도의 적세를 탐문했는데, “가덕ㆍ거제 등지에 왜선이 혹 10여 척, 혹은 30여 척이 떼를 지어 출몰한다”고 할 뿐 아니라, 본도 금산 지경에도 적세가 크게 뻗쳤는 바, 수륙으로 나누어 침범한 적들이 곳곳에서 불길같이 일어나건만 한번도 적을 맞아 싸운 적이 없어서 깊이 침범하게 되었으므로 처음에 본도 우수사도 모이기로 약속한 오늘 저녁 때에 약속한 그 장소에 도착하였다.1)
7월5일[계해/8월11일] 「장계」에서
서로 약속하였다.
7월6일[임술/8월12일] 「장계」에서
함대를 거느리고 일시에 출항하여 곤양과 남해의 경계인 노량에 도착하니, 경상우수사가 파손된 것을 수리한 전선 일곱 척을 거느리고 그곳에 머물고 있었다. 그래서 바다 가운데서 같이 만나 재삼 약속하고, 진주 땅 창신도에 이르자 날이 저물어 밤을 지냈다.
7월7일[갑자/8월13일] 「장계」에서
샛바람이 세게 불어 항해하기 어려웠다. 고성땅 당포에 이르자, 날이 저물기로 나무 하고 물 긷고 있을 때, 피난하여 산으로 올랐던 그 섬의 목동 김천손이 우리 함대를 바라보고는 급히 달려와서 말했다. “적의 대ㆍ중ㆍ소선을 합하여 70여 척이 오늘 낮 두 시쯤 영등포 앞바다에서 거제와 고성의 경계인 견내량에 이르러 머무르고 있다”고 하므로, 다시금 여러 장수들에게 신칙했다.
7월8일[을축/8월14일] 「장계」에서
이른 아침에 적선이 머물러있던 곳(견내량)으로 항해했다. 한바다에 이르러 바라보니, 왜대선 한 척과 중선 한 척이 선봉으로 나와서 우리 함대를 몰래 보고서는 도로 진치고 있는 곳으로 들어갔다. 그래서 뒤쫓아 들어가니, 대선 서른 여섯 척과 중선 스물 네 척, 소선 열 세 척(모두 일흔 세 척)이 대열을 벌려서 정박하고 있었다. 그런데 견내량의 지형이 매우 좁고, 또 암초가 많아서 판옥전선은 서로 부닥치게 될 것같아서 싸움하기가 곤란했다. 그리고 적은 만약 형세가 불리하게 되면 기슭을 타고 뭍으로 올라갈 것이므로 한산도 바다 가운데로 유인하여 모조리 잡아버릴 계획을 세웠다.
한산도는 사방으로 헤엄쳐 나갈 길이 없고, 적이 비록 뭍으로 오르더라도 틀림없이 굶어 죽게 될 것이므로 먼저 판옥선 대여섯 척으로 먼저 나온 적을 뒤쫓아서 엄습할 기세를 보이게 하니, 적선들이 일시에 돛을 달고 쫓아 나오므로 우리 배는 거짓으로 물러나면서 돌아나오자, 왜적들도 따라 나왔다. 그때야 여러 장수들에게 명령하여 학인진을 펼쳐 일시에 진격하여 각각 지자ㆍ현자ㆍ승자 등의 총통들을 쏘아서 먼저 두 세 척을 깨뜨리자, 여러 배의 왜적들은 사기가 꺾이어 물러나므로 여러 장수와 군사와 관리들이 승리한 기세로 흥분하며 앞다투어 돌진하면서 화살과 화전을 잇달아 쏘아대니, 그 형세가 마치 바람처럼 우레처럼 적의 배를 불태우고 적을 사살하기를 일시에 다 해치워 버렸다.
그리고 왜인 사백 여명2)은 형세가 아주 불리하고 힘이 다 되었는지 스스로 도망가기 어려운 줄 알고 한산도에서 배를 버리고 뭍으로 올라갔으며, 그 나머지 대선 한 척, 중선 일곱 척, 소선 여섯 척(모두 열 네 척) 등은 접전할 때 뒤처져 있다가 멀리서 배를 불태우며 목 베어 죽이는 꼴을 바라보고는 노를 재촉하여 도망해 버렸으나, 종일 접전한 탓으로 장수와 군사들이 노곤하고 날도 땅거미가 져 어둑어둑하여 끝까지 추격할 수 없어서 견내량 내항에서 진을 치고 밤을 지냈다.3)
7월9일[병인/8월15일] 「장계」에서
가덕으로 향하려는데, “안골포에 왜선 40여 척이 정박해 있다”고 탐방군이 보고했다. 즉시 본도 우수사 및 경상우수사와 함께 적을 토멸할 계책을 상의한 바, 이 날은 날이 이미 저물고 맞바람이 세게 불어 항해하여 앞으로 나갈 수 없으므로 거제땅 온천도(거제군 하청면 칠천도)에서 밤을 지냈다.
7월10일[정묘/8월16일] 「장계」에서
새벽에 출항하여 “본도 우수사는 안골포 밖의 가덕 변두리에 진치고 있다가 우리가 만일 접전하면 복병을 남겨두고 급히 달려오라”고 약속하고, 나는 함대를 이끌고 학익진을 형성하여 먼저 진격하고, 경상우수사는 내 뒤를 따르게 하여 안골포에 이르러 선창을 바라보니 왜대선 스물 한 척, 중선 열 다섯 척, 소선 여섯 척(모두 마흔 두 척)이 머물고 있었다. 그중 삼층으로 방이 마련된 대선 한 척과 이층으로 된 대선 두 척이 포구에서 밖을 향하여 물에 떠 있었고, 나머지는 고기 비늘처럼 줄지어 정박하고 있었다.
그런데 포구의 지세가 좁고 얕아서 조수가 물러나면 뭍이 드러날 것이고, 판옥대선으로는 용이하게 드나들 수가 없으므로 여러번 유인해내려고 하였으나, 그들의 선운선(先運船) 쉰 아홉 척을 한산도 바다 가운데로 유인하여 남김없이 불태우고 목 베었기 때문에 형세가 궁해지면 하륙하려는 계획으로 험한 곳에 배를 매어둔 채 두려워하면 겁내어 나오지 않았다.
그래서 할 수 없이 여러 장수들에게 명령하여 서로 교대로 드나들면서 천자ㆍ지자ㆍ현자 총통 및 여러 총통 뿐 아니라 장전과 편전 등을 빗발같이 쏘아 맞히고 있을 무렵에, 본도 우수사가 장수를 정하여 복병시켜 둔 뒤 급히 달려 와서 협공하니, 군세가 더욱 강해져서 삼층방 대선과 이층방 대선을 타고 있던 왜적들은 거의 다 사상하였다.
그런데 왜적들은 사상한 자를 낱낱이 끌어내어 소선으로 실어내고, 다른 배의 왜적들은 소선에 옮겨 실어 층각대선으로 모아들였다. 이렇게 종일토록 하여 그 배들을 거의 다 깨부수자 살아남은 왜적들은 모두 뭍으로 올라갔는데, 뭍으로 간 왜적들을 다 사로잡지는 못했다. 그러나 그곳 백성들이 산골에 잠복해 있는 자가 무척 많은데, 그 배들을 모조리 불태워 궁지에 몰린 도적이 되게 한다면 잠복해 있는 백성들이 오히려 비참한 살륙을 면치 못할 것이다. 그래서 잠까 1리 쯤 물러나와 밤을 지냈다.
7월11일[무진/8월17일] 「장계」에서
새벽에 다시 돌아와 포위해 봤으나 왜적들이 허둥지둥 당황하여 닻줄을 끊고 이용하여 도망갔으므로, 전날 싸움하던 곳을 탐색해 보니 전사한 왜적들을 열두 곳에 모아놓고 불태웠는데, 거의 타다 남은 뼈다귀와 손발들이 흩어져 있고, 그 포구 안팎에는 흘린 피가 땅바닥에 그득하여 곳곳이 붉은 빛인 것으로 보아도 알 수 있듯이 도적들의 사상자를 이루 헤아릴 수가 없었다.
낮 열시쯤 양산강과 김해포구 및 감동포구(부산시 북구 구포)를 모두 수색하였으나 왜적의 그림자는 전혀 없었다. 그래서 가덕 바깥부터 동래 몰운대에 이르기까지 배를 늘여 세워 진을 치게 하고, 군대의 위세를 엄하게 보이게 한 다음 “적의 많고 적음을 탐망해서 보고하라”고 가덕도의 응봉과 김해의 금단곶 연대 등지로 탐망군을 정하여 보내었는데, 밤 여덟 시 쯤에 그 탐망군인 경상우수영 수군 허수광이 와서 보고했다.
“연대에서 탐망하려고 올라갈 때, 산봉우리 아래 작은 암자에 한 늙은 중이 있기에 같이 연대로 올라가서 양산과 김해의 두 강의 으슥한 곳과 그 두 고을 쪽을 바라보니 적선이 나뉘어 정박해 있는 수는 거의 백 여 척쯤 되는데, 그 늙은 중에게 적선의 동정을 물었더니 대답하는 말이 ‘날마다 50여 척이 떼를 지어 드나들며, 11일 본토에서 그 강으로 들어왔다가 어제 안골포에서 접전할 때 포쏘는 소리를 듣고는 간밤에 거의 다 도망가고 다만 백여 척이 남아 있을 것이다’고 하였다.”
왜놈들이 너무 두려워서 도망친 꼴을 짐작할 수 있겠다. 저물녘에 천성보로 나아가서 잠깐 머물면서 적에게 우리들이 오랫동안 있을 것이라고 의심하게 하고, 밤을 이용하여 군사를 돌렸다.
7월12일[기사/8월18일] 「장계」에서
낮 열 시쯤에 한산도에 이르니, 이곳에 하륙했던 왜적들이 연일 굶어서 걸음을 잘 걷지 못한 채 피곤하여 바닷가에서 졸고 있었다. 거제도의 군사와 백성들이 이미 머리를 세 급 베었고, 그 나머지 사백 여 명의 왜적은 탈출해도 도망갈 길이 없는 초롱 속의 새와 같았다. 나와 본도우수사는 다른 도에 주둔하는 군사로서 군량이 벌써 떨어졌을 뿐 아니라 “금산의 적세가 크게 성하여 이미 전주에 도착했다”는 기별이 잇달아 도착하므로, 그 섬에 하륙한 적들은 “거제도의 군사와 백성들이 합력하여 목을 베고 그 급수를 통고하도록” 그 도의 우수사와 약속하였다.
7월13일[경오/8월19일]

「장계」에서
본영으로 돌아왔다. 여러 사람의 문초 내용이 비록 낱낱이 믿을 만한 것이 못된다 하더라도 “세 개의 부대로 나누어 배를 정비하여 전라도로 향한다”는 말만은 믿을 만한 근거가 있는 것같다. 이들 중 첫째부대의 왜선 일흔 세 척은 거제도 견내량에 와서 머물고 있다가 이미 섬멸되었고, 역시 우리에게 패하여 무수한 사상자를 내고 밤에 도망하였으니 다시 그 무리를 데리고 와서 병력을 합세하여 바로 몰아 침범해오면 마침내는 우리가 앞뒤로 적을 받게 될 것이므로 병력이 분산되고 형세가 약한 것이 극히 염려스럽다.
그래서 “군대를 정비하여 창을 베개로 삼아 변을 기다려 다시 통고하는 즉시로 수군을 거느리고 달려오라”고 본도 우수사 이억기와 약속하고 진을 파하였으며, 포로되었다가 도로 잡혀 온 사람은 각각 그 빼앗은 관원에게 명하여 “구휼하고 편히 있게 하였다가 사변이 평정된 뒤에 고향으로 돌려 보내라”고 알아 듣도록 타일렀다.

7월15일[경오/8월21일] 「장계」에서
여러 장수와 군사 및 관리들이 제몸을 돌아보지 않고 처음부터 끝까지 여전하여 여러번 승첩을 하였다만, 조정이 멀리 떨어져 있고 길이 막혔는데, 군사들의 공훈 등급을 만약 조정의 명령을 기다려 받은 뒤에 결정한다면 군사들의 심정을 감동케 할 수 없으므로 우선 공로를 참작하여 1ㆍ2ㆍ3등으로 별지에 기록하였으며, 당초의 약속과 같은 비록 왜적의 머리를 베지 않았다 하더라도 죽을 힘을 다해 역전한 사람들은 내가 본 것으로써 등급을 나누어 결정하고 함께 기록하여 장계하였다.
7월16일[계유/8월22일] 「장계」에서
본영과 본도 소속 각 진포의 군량은 원 수량이 넉넉하지 못하였는데, 세 번이나 적을 무찌르느라고 해상에서 여러 날을 보내게 되어 많은 전선의 군졸들이 굶주리므로 원 군량은 벌써 다 나누어 주었다. 적은 물러가지 않으므로 잇달아 바다로 내려가 출전해야 하고, 군량은 달리 변통하여 마련할 길이 없어 순천부에 두었던 군량 오백 여 섬을 본영과 첩입한 방답진에, 흥양 군량 사백 여 섬을 여도ㆍ사도ㆍ발포ㆍ녹도 등의 네 개 포구에 백 섬씩을 먼저 옮겼다가 뜻밖의 일에 대비하도록 하고, 도순찰사에게 공문을 보내고 장계를 올렸다.4)

1)『이충무공전서』권2, 「장계」34쪽, 「見乃梁破倭兵狀」.
2)「장계」51쪽. ②일본측 기록인 『脇坂記(朝鮮役水軍史)』에는 200여 명임.
3)『이충무공전서』권2, 「장계」36쪽.
4)『이충무공전서』권2, 「장계」44~45쪽,「移劃軍糧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