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성웅이순신 ▒

1592년 8월 선조 25년 임진년 (충무공 이순신 48세)

천하한량 2007. 5. 4. 03:38

 

 

 

 

 

제4차 출전도(부산 승첩)
  (6월11일부터 8월23일까지는 일기가 빠지고 없음)
8월1일[무자/9월6일] 「장계」에서
각 도에 가득찼던 적들이 날마다 내려온다 하므로 그들이 도망해 갈 시기를 이용하여 수륙으로 협공하려고 본도(전라도) 좌ㆍ우도의 전선 일흔 네 척과 협선 아흔 두 척을 모두 빈틈없이 정비하여 본영 앞바다에 이으러 진을 치고 거듭 약속을 명확히 했다. 이럴 즈음에1) 경상우도 순찰사 김수의 공문이 왔는데 그 내용은, "위로 침범한 적도들이 낮에는 숨고 밤에만 행군하여 양산 및 김해강 등지로 잇달아 내려오는데, 짐을 가득 실은 것으로 보아 도망가려는 형적이 현저하다"고 하였다.2)
8월24일[신해/9월29일] 「장계」에서
오후 네 시쯤에 배를 출항하여 노질을 재촉하여 노량 뒷바다에 이르러 정박했다. 한밤 열 두 시에 달빛을 타고 배를 몰아 사천 모자랑포3)에 이르니 벌써 날이 새었다. 새벽 안개가 사방에 끼어서 지척을 분간키 어려웠다.
8월25일[임자/9월30일] 맑다. 오전 여덟 시쯤에 안개가 걷혔다. 삼천포 앞바다를 지나서 거의 당포에 이르러 경상우수사(원균)와 만나 배를 매 놓고 이야기했다. 오후 네 시쯤에 당포에 정박하여 밤을 지냈다.4)
8월26일[계축/10월1일] 맑다. 견내량에 이르러 배를 세우고 우수사와 더불어 이야기했다. 순천부사 권준도 왔다. 저녁에 배를 옮겨 각호사(角乎寺) 앞바다에서 밤을 지냈다.5)
8월27일[갑인/10월2일] 맑다. 영남우수사(원균)과 같이 의논하고, 배를 옮겨 거제 칠천도에 이르렀다. 웅천현감 이종인이 와서 말하는데, "왜적의 머리 서른 다섯 개를 베었다"고 한다. 저물녘에 제포ㆍ서원포를 건너니 밤이 벌써 열 시쯤인데, 하늬바람이 세게 불고 나그네의 회포가 어지럽다.6)
8월28일[을묘/10월3일] 맑다.
  (8월28일부터 12월30일까지는 일기가 빠지고 없음)
  「장계」에서
경상도의 육군 체탐인이 와서, "고성ㆍ진해ㆍ창원 병영 등지에 진치고 있던 왜적들이 이 달 24, 5일 밤중에 모두 도망했다"고 했다. 이는 필시 산에서 망보던 적들이 우리 함대를 바라보고 위엄에 놀라 배를 정박해 둔 곳으로 급히 도망한 것이리라.
이른 아침에 출항하여 바로 양산과 김해의 두 강 앞바다로 향하는데, 창원땅 귀곡포의 보자기 정말석이라는 사람이 포로된지 사흘째 되는 오늘(28일) 김해강에서 도망쳐 돌아와서 말하기를, "김해강에 머물고 있던 적선이 며칠 동안에 많은 수가 떼를 지어 몰운대 바깥바다로 노를 재촉하여 나가는 바, 도망가려는 의도가 현저하여 소인은 밤에 몰래 도망쳐 돌아왔다"고 했다.
그래서 가덕도 북서쪽 기스락에 배를 감추어 숨어 있게 하고, 방답 첨사 이순신과 광양현감 어영담을 가덕도 바깥에서 잠복케 하고 "양산의 적선을 탐망하고 오라"고 사람을 보내었는데, 오후 다섯 시쯤 돌아와서 "종일 살펴 보았으나, 왜의 소선 네 척이 두 강 앞바다에서 나와서 바로 몰운대로 지나갈 뿐이다"고 말했다. 그래서 그대로 천성 선창으로 가서 밤을 지냈다.
8월29일[병진/10월4일] 「장계」에서
닭이 울자 출항하여 날이 밝을 무렵에 두 강 앞바다에 도착하니, 동래땅 장림포 바다 가운데서 낙오된 왜적 서른 남짓이 대선 네 척과 소선 두 척에 나누어 타고 양산에서 나오다가 우리 함대를 바라 보고서는 배를 버리고 뭍으로 올라가는 것을 경상우수사가 거느린 수군들이 도맡아 불태웠다.
그런데 좌별도장 우후 이몽구도 대선 한 척을 쳐부수고 머리 한 급을 벤 뒤에 군사를 좌우로 나누어 두 강으로 들어가려 했으나, 그 강 입구의 형세가 매우 좁아서 판옥같은 대선은 쉽게 싸울 수 없었으므로, 어두어질 무렵에 가덕 북변으로 되돌아 와서 밤을 지내면서 원균 및 이억기 등과 함깨 밤새도록 상의하였다.

1) 조성도, 『임진장초』, 「제4차 부산포 승첩을 아뢰는 계본」에는 "그달 초여드레 선전관 안흥국이 가져온 본부위 서장도 받고, 경상우도 순찰사 김수의 공문"도 받았다.
2) 『이충무공전서』권2, 「장계」 45쪽, 「釜山破倭兵狀」.
3) 『이충무공전서』에는 "우수사 이억기 등과 출항하여 수군 조방장 정걸도 함께 거느리고 남해땅 관음포에 이르러 밤을 지냈다.(與右水使李億祺等發船舟師助防將丁傑幷爲率領南海境觀音浦經夜)"라 함.
4) 조성도, 『임진장초』에는 "사량 바다 가운데 약속한 곳에 이르러 경상우수사 원균을 만나 적정을 상세히 물은 뒤에 다 함께 당포에 이르러 밤을 지냈다(到蛇梁洋中적約會處同道右水使元均相逢備問賊奇後偕到唐浦經夜)"임.
5)「장계」에는 "비바람이 섞어 쳐 쉬이 출항하지 못하다가 날이 저물녘에 거제도의 자루치에 이르러 밤에 몰래 견내량을 건넜다(風雨交作未能發船日暮到臣巨濟島乘夜潛渡)"라 함.
6)「장계」에는 "옹천땅 제포 뒷바다의 원포에서 밤을 지냈다(態川地濟浦後洋院浦經夜)"라 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