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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2일[경인/7월10일] |
맑다. 아침에 떠나2) 곧장 당포 앞 선창에 이르니, 적선 20여 척3)이 줄지어 머물러 있다. 서로 둘러싸고 싸우는데, 적선 중에 큰 배 한 척은 우리나라 판옥선만 했다. 배 위에 다락이 있는데 높이가 두 길4)은 되겠고, 그 누각 위에는 왜장이 떡 버티고 우뚝 앉아 끄덕도 안했다. 「장계」에서 그래서 먼저 거북선으로 하여금 층루선 밑으로 곧장 충돌하러 들어가면서 미르 아가리로 현자 철환을 치쏘게 하고, 또 편전과 대ㆍ중 승자 총통으로 비오듯 어지러히 쏘아대니, 적장이 화살을 맞고 떨어진다. 그러자 왜적들은 한꺼번에 놀라 흩어졌다. 여러 장졸이 일제히 모여들어 쏘아대니, 화살에 맞아 거꾸러지는 놈이 얼마인지 헤아릴 수도 없다. 모조리 섬멸하고 한 놈도 남겨두지 않았다. 얼마 뒤에 왜놈의 큰 배 20여 척이 부산에서부터5) 깔려 들어오다가 우리 군사들을 바라보고서는 개도로 뺑소니치며 들어가 버렸다. 「장계」에서 여러 전선이 뒤쫓아 갔으나 이미 날이 어두워 접전할 수 없으므로 진주땅 창신도(남해군 창선도)에 정박하여 밤을 지냈다.6)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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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5일[계사/7월13일] |
아침에 출항하여10) 고성땅 당항포에 이르니, 왜놈의 큰 배 한 척이 판옥선과 같은데, 배 위에 누각이 높고 그 위에 적장이 앉아서 중선 열두 척과 소선 스무 척(계 서른 두 척)을 거느렸다. 한꺼번에 쳐서 깨뜨리니11) 활에 맞아 죽는 자가 부지기수요, 왜장의 모가지도 일곱이나 베었다. 나머지 왜놈들은 뭍으로 올라 달아나는데, 그 수는 얼마 되지 않았다. 우리 군사의 기세를 크게 떨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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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6일[갑오/7월14일] |
맑다. 「장계」에서 새벽에 방답첨사 이순신이 “당항포에서 산으로 올라간 적들이 필시 남겨둔 배를 타고 새벽녘에 몰래 나올 것이다”고 하여, 그가 거느린 전선을 이끌고 바다 어귀로 나가 적들이 나오는 것을 모조리 잡아 놓고서 급히 보고했다. “오늘 새벽에 당항포 바다 어귀에 이르러 잠깐 있으려니까, 과연 왜선 한 척이 바다 어귀에서 나오므로 첨사가 불시에 돌격하였다. 한 척에 타고 있던 왜적들은 거의 백 여 명이었는데, 우리편 배에서 먼저 지자ㆍ현자 총통을 쏘고, 또 장전ㆍ편전ㆍ철환ㆍ질려포ㆍ대발화 등을 잇달아 쏘고 던질 적에 왜적들은 마음이 급한지 어찌할 줄 모르고 허둥지둥 도망하려 하였으므로, 요구금으로써 바다 가운데로 끌어내자 반이나 물에 뛰어들어 죽었다. 그 중에서도 스물너댓 되는 왜장은 용모가 훤출하며, 화려한 군복을 입은 채 칼을 집고 홀로 서서 나머지 부하 여덟명과 함께 지휘하고 항전하면서 끝내 두려워하지 않았는데, 첨사가 그 장수를 맞히자 화살 여나믄 대를 맞고서야 소리가 나지 않을 정도로 몹시 울며 물에 떨어졌다. 곧 목을 베게 하고, 다른 여덟 명은 군관 김성옥 등이 합력하여 쏘고 목을 베었다. 이 날 오전 여덟 시에 적선을 불사르자, 경상우수사 원균과 남해현령 기효근 등은 그곳으로 뒤쫓아 와서 물에 빠져 죽은 왜적을 모두 찾아 내어 목을 벤 것이 50여 급이 넘거니와, 왜선의 맨 앞쪽에는 별도로 햇볕을 가리는 차양 달린 집을 만들었는데, 방안의 장막이 모두 매우 화려하였으며, 옆에 있는 작은 궤 안에는 문서를 가득 넣어 두었기에 집어 보니 왜놈 3,040 여 명의 분군기였는데, 각기 이름 아래에 서명하고 피를 발라둔 것이 필시 삽혈하여 서로 맹서한 문서인 듯했다. 그 분군기 여섯 축을 비롯하여 갑옷ㆍ투구ㆍ창ㆍ칼ㆍ활ㆍ총통, 범가죽으로 된 말안장 등의 물건을 올려 보낸다“고 하였다. 그 분군기를 살펴보니, 서명하고 피를 바른 흔적이 과연 보고된 바와 같았다. 그들의 흉포한 꼴을 형언할 수 없다. 왜의 머리 아홉 급 중에서 왜장의 머리는 이순신 별도로 표하여 올려 보냈다. 그런데 왜놈들의 깃발에 물들인 것이 서로 다르다. 전일 옥포는 붉은 깃발이었고, 이번의 사천은 흰 깃발이고, 당포는 누런 깃발인 바 그 까닭을 생각해보면, 아마도 그들의 부대를 분간하기 위해서 그렇게 했을 뿐 아니라, 삽혈하여 맹서한 글이 또 이와 일치된 것으로 보아 일찍부터 우리를 깔보고 침범하려는 마음을 품고서 군대를 준비한 상황이었음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오늘은 비가 내리고12) 구름이 끼어 바닷길을 분간하기 어려워서 당항포 앞바다로 옮겨 군사들을 위로하고, 저녁 무렵에 고성땅 마루장(고성군 동해면)으로 옮겨서 밤을 지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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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7일[을미/7월15일] |
맑다. 적선을 찾으로 아침에 출항하여 영등13) 앞바다에 이르니, 적선이 율포에 있다고 한다. 복병선으로 하여금 탐지케 했더니, 적선 다섯 척이 먼저 우리 군사가 오는 것을 알고 남쪽 넓은 바다로 달아났다. 여러 우리나라 배가 일제히 쫓아가 사도첨사 김완이 한 척을 온전히 잡고, 우후 이몽구도 한 척을 온전히 잡고, 녹도만호 정운도 한 척을 온전히 잡으니 모두 왜적의 머리가 서른 여섯 개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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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8일[병신/7월16일] |
맑다. 우수사(이억기)와 바다 가운데서 머물러 지냈다. 「장계」에서 창원땅 마산포ㆍ안골포ㆍ제포ㆍ웅천 등지로 적의 종적을 알아내려고 탐망선을 정해 보내고, 창원땅 시루섬과 남포 해상으로 나가 진을 쳤는데, 저녁 때 위의 탐망선이 돌아와서 말하기를 “어느 곳에도 적의 흔적이 없다”고 하므로 송진포로 돌아와서 밤을 지냈다.1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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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9일[정유/7월17일] |
맑다. 곧장15) 천성ㆍ가덕에 이르니, 왜적이 하나도 없다. 재삼 수색하고 나서 군사를 돌려 당포로 돌아와 밤을 지냈다. 새벽도 되기 전에 배를 출항하여 미조항 앞바다에 이르러 우수사(이억기)와 이야기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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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10일[무술/7월18일] |
맑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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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11일부터 8월23일까지는 일기가 빠지고 없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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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계」에서 미조항 앞바다에 이르러 우수사 이억기 및 원균 등과 진을 파하고서 각기 돌아왔다. 가덕에서 수색하던 날, 그대로 부산 등지로 향하여 왜적의 씨를 섬멸하려고 했으나, 연일 대적을 만나 해상을 전전하면서 싸우느라고 군량이 벌써 덜어지고, 군사들도 매우 피곤하여 전상자도 또한 많았는데, 우리들의 피로한 군사로써 편안히 숨어있는 적과 대적함은 실로 병가(兵家)의 좋은 방책이 아니며, 하물며 양산강의 지세가 매우 좁아서 겨우 배 한척을 수용할 만한데, 적선이 연일 머물러서 이미 험고한 곳에 거점을 마련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가 싸우려고 하면 적이 출전하지 않을 것이고, 우리가 물러나면 도리어 약함을 보이게 될 것이요, 설령 부산으로 향한다 하더라고 양산의 적들이 서로 호응하여 뒤를 둘러쌀 것이다. 그러니 다른 도에서 온 군사로써 현군(지원군의 후속없이 홀로 적진에 깊숙이 들어가는 군대)하여 앞과 뒤로 적을 맞는다는 것은 빈틈없는 계획이라고 할 수 없다. 또 본도 병마사(최원)의 공문에, “서울을 침범한 흉악한 무리들의 조운서을 빼앗아 타고 서강을 거쳐 내려온다”고 하였다. 조운선을 빼앗아 탄다는 것은 그럴리 만무하겠지만, 뜻밖의 사변도 염려하지 않을 수 없어서 이억기와 상의하여 다시금 가덕 등지의 섬들을 탐색했다. 그러나 끝내 적의 종적이 없었으므로 곧 군사를 돌이켜 본영으로 돌아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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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14일[임인/7월22일] |
「장계」에서 역전한 여러 사람들은 내가 직접 등급을 결정하여 일등으로 기록하고 장계를 올렸다.16) 도순찰사 이광의 공문이 3일에 수원에서 발송되어 오늘 공문이 도착했다.19)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