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성웅이순신 ▒

1592년 6월 선조 25년 임진년 (충무공 이순신 48세)

천하한량 2007. 5. 4. 03:33

 

 

 

 

 

제2차 출전도(당포 승첩)
6월1일[기축/7월9일] 맑다. 사량도(통영시 사량면 금평리) 뒷바다에 진을 치고 밤을 지냈다.
「장계」에서
새벽에 경상우수사 원균이 내게 말하기를 “어제 접전할 때, 짐짓 남겨둔 적선 두 척이 도망쳤는지 여부를 알아볼 겸하여 화살에 맞아 죽은 왜놈의 목을 베어 오겠다”고 했다. 원균은 처음에 패전한 뒤로 군사없는 장수로서 작전을 지휘할 수 없으므로, 교전하는 곳마다 활살이나 철환에 맞은 왜놈을 찾아내어 머리 베는 일을 담당한다 하여 그날 낮 여덟 시에 그곳을 들리고서는 하는 말이, “왜적들은 육지를 경유하여 멀리 도망하였기 때문에 남겨두었던 배를 불태웠는데, 죽은 왜놈을 수색하여 목을 벤 것이 세 급이며, 그 나머지는 숲이 무성하여 끝까지 탐색할 수가 없었다”고 하였으므로 출항하였다.1)
6월2일[경인/7월10일] 맑다. 아침에 떠나2) 곧장 당포 앞 선창에 이르니, 적선 20여 척3)이 줄지어 머물러 있다. 서로 둘러싸고 싸우는데, 적선 중에 큰 배 한 척은 우리나라 판옥선만 했다. 배 위에 다락이 있는데 높이가 두 길4)은 되겠고, 그 누각 위에는 왜장이 떡 버티고 우뚝 앉아 끄덕도 안했다.
「장계」에서
그래서 먼저 거북선으로 하여금 층루선 밑으로 곧장 충돌하러 들어가면서 미르 아가리로 현자 철환을 치쏘게 하고, 또 편전과 대ㆍ중 승자 총통으로 비오듯 어지러히 쏘아대니, 적장이 화살을 맞고 떨어진다. 그러자 왜적들은 한꺼번에 놀라 흩어졌다. 여러 장졸이 일제히 모여들어 쏘아대니, 화살에 맞아 거꾸러지는 놈이 얼마인지 헤아릴 수도 없다. 모조리 섬멸하고 한 놈도 남겨두지 않았다. 얼마 뒤에 왜놈의 큰 배 20여 척이 부산에서부터5) 깔려 들어오다가 우리 군사들을 바라보고서는 개도로 뺑소니치며 들어가 버렸다.
「장계」에서
여러 전선이 뒤쫓아 갔으나 이미 날이 어두워 접전할 수 없으므로 진주땅 창신도(남해군 창선도)에 정박하여 밤을 지냈다.6)
6월3일[신묘/7월11일] 맑다. 아침에 다시7) 여러 장수들을 격려하여 개도를 협공하였으나, 이미 달아나버려 사방에는 한 놈도 없다. 고성 등지로 가고자 했으나 아군의 형세가 외롭고 약하기 때문에 울분을 참고 머물러 밤을 지냈다.8)
6월4일[임진/7월12일] 맑다. 우수사(이억기)가 오기를 고대하고 있던 차, 정오에 우수사가 여러 장수들을 거느리고9) 돛을 달고 왔다. 진중의 장병들이 기뻐서 날뛰지 않는 이가 없었다. 군사를 합치고 약속을 거듭한 뒤에 착포량(통영시 당동 착량)에서 밤을 지냈다.
6월5일[계사/7월13일] 아침에 출항하여10) 고성땅 당항포에 이르니, 왜놈의 큰 배 한 척이 판옥선과 같은데, 배 위에 누각이 높고 그 위에 적장이 앉아서 중선 열두 척과 소선 스무 척(계 서른 두 척)을 거느렸다. 한꺼번에 쳐서 깨뜨리니11) 활에 맞아 죽는 자가 부지기수요, 왜장의 모가지도 일곱이나 베었다. 나머지 왜놈들은 뭍으로 올라 달아나는데, 그 수는 얼마 되지 않았다. 우리 군사의 기세를 크게 떨치었다.
6월6일[갑오/7월14일] 맑다.
「장계」에서
새벽에 방답첨사 이순신이 “당항포에서 산으로 올라간 적들이 필시 남겨둔 배를 타고 새벽녘에 몰래 나올 것이다”고 하여, 그가 거느린 전선을 이끌고 바다 어귀로 나가 적들이 나오는 것을 모조리 잡아 놓고서 급히 보고했다.
“오늘 새벽에 당항포 바다 어귀에 이르러 잠깐 있으려니까, 과연 왜선 한 척이 바다 어귀에서 나오므로 첨사가 불시에 돌격하였다. 한 척에 타고 있던 왜적들은 거의 백 여 명이었는데, 우리편 배에서 먼저 지자ㆍ현자 총통을 쏘고, 또 장전ㆍ편전ㆍ철환ㆍ질려포ㆍ대발화 등을 잇달아 쏘고 던질 적에 왜적들은 마음이 급한지 어찌할 줄 모르고 허둥지둥 도망하려 하였으므로, 요구금으로써 바다 가운데로 끌어내자 반이나 물에 뛰어들어 죽었다. 그 중에서도 스물너댓 되는 왜장은 용모가 훤출하며, 화려한 군복을 입은 채 칼을 집고 홀로 서서 나머지 부하 여덟명과 함께 지휘하고 항전하면서 끝내 두려워하지 않았는데, 첨사가 그 장수를 맞히자 화살 여나믄 대를 맞고서야 소리가 나지 않을 정도로 몹시 울며 물에 떨어졌다. 곧 목을 베게 하고, 다른 여덟 명은 군관 김성옥 등이 합력하여 쏘고 목을 베었다.
이 날 오전 여덟 시에 적선을 불사르자, 경상우수사 원균과 남해현령 기효근 등은 그곳으로 뒤쫓아 와서 물에 빠져 죽은 왜적을 모두 찾아 내어 목을 벤 것이 50여 급이 넘거니와, 왜선의 맨 앞쪽에는 별도로 햇볕을 가리는 차양 달린 집을 만들었는데, 방안의 장막이 모두 매우 화려하였으며, 옆에 있는 작은 궤 안에는 문서를 가득 넣어 두었기에 집어 보니 왜놈 3,040 여 명의 분군기였는데, 각기 이름 아래에 서명하고 피를 발라둔 것이 필시 삽혈하여 서로 맹서한 문서인 듯했다. 그 분군기 여섯 축을 비롯하여 갑옷ㆍ투구ㆍ창ㆍ칼ㆍ활ㆍ총통, 범가죽으로 된 말안장 등의 물건을 올려 보낸다“고 하였다.
그 분군기를 살펴보니, 서명하고 피를 바른 흔적이 과연 보고된 바와 같았다. 그들의 흉포한 꼴을 형언할 수 없다. 왜의 머리 아홉 급 중에서 왜장의 머리는 이순신 별도로 표하여 올려 보냈다.
그런데 왜놈들의 깃발에 물들인 것이 서로 다르다. 전일 옥포는 붉은 깃발이었고, 이번의 사천은 흰 깃발이고, 당포는 누런 깃발인 바 그 까닭을 생각해보면, 아마도 그들의 부대를 분간하기 위해서 그렇게 했을 뿐 아니라, 삽혈하여 맹서한 글이 또 이와 일치된 것으로 보아 일찍부터 우리를 깔보고 침범하려는 마음을 품고서 군대를 준비한 상황이었음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오늘은 비가 내리고12) 구름이 끼어 바닷길을 분간하기 어려워서 당항포 앞바다로 옮겨 군사들을 위로하고, 저녁 무렵에 고성땅 마루장(고성군 동해면)으로 옮겨서 밤을 지냈다.
6월7일[을미/7월15일] 맑다. 적선을 찾으로 아침에 출항하여 영등13) 앞바다에 이르니, 적선이 율포에 있다고 한다. 복병선으로 하여금 탐지케 했더니, 적선 다섯 척이 먼저 우리 군사가 오는 것을 알고 남쪽 넓은 바다로 달아났다. 여러 우리나라 배가 일제히 쫓아가 사도첨사 김완이 한 척을 온전히 잡고, 우후 이몽구도 한 척을 온전히 잡고, 녹도만호 정운도 한 척을 온전히 잡으니 모두 왜적의 머리가 서른 여섯 개이다.
6월8일[병신/7월16일] 맑다. 우수사(이억기)와 바다 가운데서 머물러 지냈다.
「장계」에서
창원땅 마산포ㆍ안골포ㆍ제포ㆍ웅천 등지로 적의 종적을 알아내려고 탐망선을 정해 보내고, 창원땅 시루섬과 남포 해상으로 나가 진을 쳤는데, 저녁 때 위의 탐망선이 돌아와서 말하기를 “어느 곳에도 적의 흔적이 없다”고 하므로 송진포로 돌아와서 밤을 지냈다.14)
6월9일[정유/7월17일] 맑다. 곧장15) 천성ㆍ가덕에 이르니, 왜적이 하나도 없다. 재삼 수색하고 나서 군사를 돌려 당포로 돌아와 밤을 지냈다. 새벽도 되기 전에 배를 출항하여 미조항 앞바다에 이르러 우수사(이억기)와 이야기하였다.
6월10일[무술/7월18일] 맑다.
  (6월11일부터 8월23일까지는 일기가 빠지고 없음)
  「장계」에서
미조항 앞바다에 이르러 우수사 이억기 및 원균 등과 진을 파하고서 각기 돌아왔다. 가덕에서 수색하던 날, 그대로 부산 등지로 향하여 왜적의 씨를 섬멸하려고 했으나, 연일 대적을 만나 해상을 전전하면서 싸우느라고 군량이 벌써 덜어지고, 군사들도 매우 피곤하여 전상자도 또한 많았는데, 우리들의 피로한 군사로써 편안히 숨어있는 적과 대적함은 실로 병가(兵家)의 좋은 방책이 아니며, 하물며 양산강의 지세가 매우 좁아서 겨우 배 한척을 수용할 만한데, 적선이 연일 머물러서 이미 험고한 곳에 거점을 마련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가 싸우려고 하면 적이 출전하지 않을 것이고, 우리가 물러나면 도리어 약함을 보이게 될 것이요, 설령 부산으로 향한다 하더라고 양산의 적들이 서로 호응하여 뒤를 둘러쌀 것이다. 그러니 다른 도에서 온 군사로써 현군(지원군의 후속없이 홀로 적진에 깊숙이 들어가는 군대)하여 앞과 뒤로 적을 맞는다는 것은 빈틈없는 계획이라고 할 수 없다.
또 본도 병마사(최원)의 공문에, “서울을 침범한 흉악한 무리들의 조운서을 빼앗아 타고 서강을 거쳐 내려온다”고 하였다.
조운선을 빼앗아 탄다는 것은 그럴리 만무하겠지만, 뜻밖의 사변도 염려하지 않을 수 없어서 이억기와 상의하여 다시금 가덕 등지의 섬들을 탐색했다. 그러나 끝내 적의 종적이 없었으므로 곧 군사를 돌이켜 본영으로 돌아왔다.
6월14일[임인/7월22일] 「장계」에서
역전한 여러 사람들은 내가 직접 등급을 결정하여 일등으로 기록하고 장계를 올렸다.16)
도순찰사 이광의 공문이 3일에 수원에서 발송되어 오늘 공문이 도착했다.19)

1)『이충무공전서』권2, 「장계」20~21쪽.
2)『이충무공전서』에는 "적선이 당포 선창에 정박하고 있다는 말을 듣고 오전 8시 출항하여 10시에 당포에 도착했다(辰時聞賊船__泊唐浦船滄巳時直到)." 사량과 당포간 거리가 12km이고, 2시간 걸렸으므로, 이 때의 거북선 속도는 6km/h이다.
3)『이충무공전서』, 「장계」21쪽에는 "판옥선만한 대선 9척, 중·소선 12척"임.
4)『이충무공전서』에는 "3·4장"이라고 함. 1장(丈)은 10자임
5) 『이충무공전서』에는 "거제도에 와서 정박했다(自巨濟來泊)"라 했음.
6)「장계」22쪽에 "諸船追逐外海日已昏暮接戰不得晋州境昌信島__泊經夜"가 있음.
7)「장계」에는 "새벽에 출항하여 추도(통영시 산양면)로 향하면서 그 근처 섬들을 협공 수색했다.(曉頭發向楸島傍近島嶼挾攻搜討)" 임.
8)「장계」에는 "고성땅 고둔포에서 밤을 지냈다(日暮固城地古屯浦經夜)"고 했음.
9)「장계」에는 "우수사 이억기가 전선 25척을 거느리고 와 모였다(右水使李億祺率戰船二十五隻來曾于)"임.
10)「장계」23쪽에 "아침 안개가 사방에 끼었다가 늦게야 개었다. 거제로 도망쳐서 정박해 있는 적을 토벌하려고 돛을 올려 바다로 나오다(朝霧四塞至晩乃捲欲討巨濟遁泊之賊懸帆出海)."
11)「장계」34쪽에서 "우리의 위세를 본 왜적은 철환을 싸라기눈이나 우박이 퍼붓듯 마구 쏘는데, 여러 전선이 포위하고 먼저 거북배를 돌진시켜 천자ㆍ지자 총통을 쏘아 적의 대선을 꿰뚫게 하고, 여러 전선이 서로 번갈아 드나들며 총통과 철환을 우레처럼 쏘면서 한참동안 접전하여 우리의 위세가 더욱 떨치다·····. 그런데 저 적들이 만약 형세가 불리하게 되어 배를 버리고 상륙하면 모조리 섬멸하지 못할 것을 염려하여 '짐짓 포위한 진형을 해체하고 퇴군할 것을 보이면 적들이 반드시 그틈을 타서 배를 옮길 것이니, 그 때 좌우 뒤에서 추격하면 거의 섬멸할 수 있을 것이다'고 전령한 뒤에 물러나 한쪽을 터주자, 층각선이 과연 트인 수로를 따라 나오는데, 검은색 돛을 둘씩이나 달았으며, 다른 배들은 날개처럼 벌려 층각선을 옹위아며 노를 재촉하였으므로 우리의 여러 전선은 사면으로 포위하면서 재빠르게 협공하고, 돌격장이 탄 거북배는 층각선 밑으로 달려가서 총통을 치쏘아 층각선을 당파하고, 여러 전선이 화전으로 그 비단 장막과 돛배를 쏘아 맞혔다"가 있음.
12)「장계」26쪽에는 "同日雨下雲暝海程莫辨移屯唐項浦前洋"라고 비가 왔으며, 『난중일기』권5, 16쪽에는 '晴(맑다)'이라 했음.
13)「장계」에는 "웅천땅 시루섬 해상에서 진을 쳤다가··· 정오 때에 영등포에 이르다(至熊川地甑島洋中結陣··· 午?永等浦前洋)"고 함.
14)「장계」27쪽에는 그 뒤로 "밤 여덟 시에 거제 온천량 송진포에서 밤을 지냈다(初更?巨濟溫川梁松津浦經夜)"임.
15)「장계」에는 "아침에 출항하여 웅천 앞바다에 이르러 진을 치고, 소선을 가덕·천성·안골포·제포 등지로 나누어 보내어 다시금 탐색케 했다(早朝發船到熊川前洋結陣分遣小船加德天城安骨浦薺浦等處更審)"임.
16) 조성도, 『임진장초』, 61~67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