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성웅이순신 ▒

1592년 5월 선조 25년 임진년 (충무공 이순신 48세)

천하한량 2007. 5. 4. 03:30

 

 

 

 

 

제1차 출전도(옥포 승첩)
5월1일[경신/6월10일] 수군이 일제히 앞바다에 모였다. 이 날은 흐리되 비는 오지 않고 마파람만 세게 불었다. 진해루에 앉아서 방답첨사(이순신), 흥양현감(배흥립), 녹도만호 정운 등을 불러들이니, 모두 분격하여 제 한 몸을 잊어버리는 모습이 실로 의사들이라 할 만하다.
5월2일[신유/6월11일] 맑다. 송한련이 남해서 돌아와서 하는 말이,"남해현령(기효근), 미조항첨사(김승룡), 상주포ㆍ곡포ㆍ평산포만호(김축) 등이 하나같이 왜적의 소식을 듣고는 달아나 버렸고, 군기물 등도 흩어 없어져 남은 것이라곤 거의 없다"고 했다. 놀랍고도 놀랄 일이다. 오정 때에 배를 타고 바다로 나가 진을 치고 여러 장수들과 약속을 하니, 모두 기꺼이 나가 싸울 뜻을 가졌으나 낙안군수(신호)만은 피하려는 뜻을 가진 것같으니 탄식이 절로 난다. 그러나 군법이 있으니, 비록 물러나 피하려 한들 그게 될 일인가. 저녁에 방답의 첩입선 세 척에 돌아와 앞바다에 정박했다. 군호를 용호라 하고 복병을 산수라 하였다.
5월3일[임술/6월12일] 가랑비가 아침내 오다 중위장(이순신)을 불러 내일 새벽에 떠날 것을 약속하고 장계1)를 고쳤다. 소문을 듣고 이 날 여도 수군2) 황옥천이 달아났다. 자기 집에서 잡아와 목을 베어 군중 앞에 높이 매어 달았다.
5월4일[계해/6월13일] 맑다. 먼동이 틀 때3) 출항했다. 곧바로 미조항(남해군 삼동면 미조리) 앞바다에 이르서 다시 약속했다. 개이도를 거쳐 평산포ㆍ상주포ㆍ미조항을 지나갔다.
  (5월5일 부터 5월28일까지는 일기가 빠지고 없음)
  「장계」에서
본도 우수사 이억기에게 "수군을 거느리고 신의 뒤를 따라 오라"고 공문을 보낸 사연을 장계했다.4) 이 날 그 시각에 여러 장수들과 판옥선 24척, 협선 15척, 포작선 46척(모두 85척)을 거느리고 떠나 경상우도의 소비포(고성군 하일면 춘암리) 앞바다에 이르자 날이 저물기로 진을 치고 밤을 지냈다.
5월5일[갑자/6월14일] 「장계」에서
새벽에 (소비포를)출항하여 두 도의 수군이 모이기로 약속한 곳인 당포 앞바다로 급히 달려 갓으나 그 도의 우수사 원균은 약속한 곳에 있지 않았다. 내가 거느린 경쾌선으로써 "당포로 빨리 나오라"는 뜻으로 공문을 보냈다.5)
5월6일[을축/6월15일] 「장계」에서
아침 여덟 시에 원균이 우수영 경내의 한산섬에서 단지 한 척의 전선을 타고 왔다. 적선의 많고 적음과 지금 정박하고 있는 곳과 접전했던 절차를 상세히 묻고 있는데, 그 도의 여러 장수인 남해현령 기효근, 미조항첨사 김승룡, 평산포권관 김축 등이 판옥선 한 척에 같이 타고, 사량만호 이여념, 소비포권관 이영남 등이 각각 협선을 타고, 영등포만호 우치적, 지세포만호 한백록, 옥포만호 이운룡 등은 판옥선 두 척에 같이 타고 어제 이어 속속 뒤따라 왔다. 두 도의 여러 장수들을 한 곳에 불러 모아 두번 세번 명확히 약속한 뒤에 거제도 송미포 앞바다에 이르자, 날이 저물어 밤을 지냈다.
5월7일[병인/6월16일] 「장계」에서 새벽에 일제히 출항하여 적선이 머물고 있다는 천성ㆍ가덕으로 향하여 가다가 오정 때에 옥포 앞바다에 이르자, 우척후장 사도첨사 김완과 여도권관 김인영 등이 신기전을 쏘아 급변한 일을 알리므로 적선이 있음을 알고 다시금 여러 장수에게 신칙했다.
"함부로 움직이지 말라! 침착하게 태산같이 신중히 행동하라!"고 전령한 뒤에 옥포 바다 안으로 대열을 지어 일제히 들어가니, 왜선 50여척이 옥포선창에 나뉘어 정박하고 있는데, 대선은 사면에 온갖 무늬를 그린 휘장을 둘러치고, 그 휘장가에는 대나무 장대를 꽂았으며, 붉고 흰 작은 깃발들을 어지러이 매달았고, 깃발의 모양은 여러 가지 인데 모두 무늬있는 비단으로 만들어졌드며, 바람결 따라 펄럭이어 바라보기에도 눈이 어지러울 지경이다.
도둑떼들은 그 포구에 들어가 분탕하여 연기가 온 산을 가렸는데, 우리 배들을 돌아보고는 허둥지둥 어찌 할 바를 모르면서 제각기 분주히 배를 타고 아우성치며 급하게 노를 저었지만 중앙으로는 나오지 못하고 기스락으로 배를 몰고 있었다. 그 가운데 여섯 척은 선봉으로 달려 나오므로 내가 거느린 여러 장수들은 일심분발하여 모두 죽을 힘을 다하니, 관리와 군사들도 그뜻을 본받아 분발하여 서로 격려하며 죽음으로써 기약했다. 그리하여 동서로 포위하면서 바람처럼 우레처럼 총통과 활을 쏘기 시작하자, 적들도 총과 활을 쏘기 시작하자, 적들도 총과 활을 쏘다가 기운이 다하여 배 안에 있는 물건들을 바다에 내어 던지느라고 바빴고 화살에 맞은 자는 그 수를 알 수 없으며, 헤임치는 자도 얼마인지 그 수를 알 수 없고, 또 일시에 무너지고 흩어져서 바위 언덕으로 기어 올라가면서 뒤떨어질까봐 두려워하는 것이었다.
낙안군수 신호는 왜대선 한 척을 때려 부수고 머리 한급을 베었으며, 배안에 있던 칼, 갑옷, 의관 등은 모두 왜장의 물건인 듯하다. 우부장 보성군수 김득광은 왜대선 한 척을 때려 부수고 사로잡혔던 우리나라 사람 한 명을 산채로 빼앗았다.
전부장 흥양현감 배흥립은 왜대선 두 척을, 중부장 광양현감 어영담은 중왜선 두 척과 소선 두 척을, 중위장 방답첨사 이순신은 왜대선 한 척을, 우척후장 사도첨사 김완은 왜대선 한 척을, 우부기전통장 사도진군관보인 이춘은 왜중선 한 척을, 유군장 발포가장 내군관 훈련봉사 나대용은 왜대선 두 척을, 후부장 녹도만호 정운은 왜중선 두 척을, 좌척후장 여도권관 김인영은 왜중선 한 척을 때려 부수고, 좌부기전통장 순천대장 전봉사 유섭은 왜대선 한 척을 쳐부수고 우리나라 사람으로 사로잡혔던 소녀 한 명을 산채로 빼앗았으며, 한후장 군관 급제 최대성은 왜대선 한 척을, 참퇴장 군관 급제 배응록은 왜대선 한 척을, 돌격장군관 이언량은 왜대선 한 척을, 대솔군관 훈련봉사 변존서와 전봉사 김효성 등은 힘을 합하여 왜대선 한 척을 각각 때려 부수었다.
경상우도 여러 장수들은 왜선 다섯 척을 때려 부수고, 우리나라의 사로잡혔던 사람 세 명6)을 산채로 빼앗았는데, 합하여 왜선 스물 여섯 척을 모두 총통으로 쏘아 맞히고 때려 부수고 불태우니, 넓은 바다에는 불꽃과 연기가 하늘을 덮었으며, 산으로 올라간 도둑떼들은 숲속으로 숨어 엎드려 겁내지 않는 놈이 없었다.
나는 여러 전선에서 용감한 사부를 뽑아 산에 오른 적을 따라 잡으려고 하였으나, 거제도는 산이 험준하고 나무가 울창하여 사람들이 발붙이기가 어려울 뿐 아니라, 막 적의 굴속에 들어 있는데 전선에 사부가 없으면 혹 뒤로 포위될 염려도 있고, 날도 저물어가므로 뜻을 이루지 못하고 영등포 앞바다로 물러나 머물면서 군졸들에게 나무 하고 물 긷는 일을 시키면서 밤을 지낼 준비를 하였다.
그런데 오후 네 시쯤 “멀지 않는 바다에 또 왜대선 다섯 척이 지나간다”고 척후장이 보고했다. 그래서 여러 장수를 거느리고 이를 쫓아서 웅천땅 합포(진해시 웅천2동 합개. 학개라고도 함) 앞바다에 이르자 왜적들이 배를 버리고 육지로 올라가므로 사도첨사 김완이 왜대선 한 척을, 방답첨사 이순신이 왜대선 한 척을, 광양현감 어영담이 왜대선 한척을, 부통속 방답진에서 귀양살던 이응화가 왜소선 한 척을, 군관 봉사 변존서ㆍ송희립ㆍ김효성ㆍ이설 등이 힘을 합하여 활을 쏘아 왜대선 한 척을 모두 남김없이 쳐부수고 불태웠으며, 밤을 타 노를 재촉하여 창원땅 남포(마산시 합포구 구산면 남포) 앞바다에 이르러 밤을 지냈다.7)
5월8일[정묘/6월17일] 「장계」에서
이른 아침에 진해땅 고리량에 왜선이 정박하고 있다는 정보를 듣고, 곧 출항을 명하여 안팎의 섬들은 협공ㆍ수색하면서 돝섬(마산시 합포구 구산면 저도)을 지나 고성땅 적진포(고성군 거류면 당동)에 이르자, 왜의 대선과 중선을 합하여 열 세 척이 바다 어귀에 벌여 정박하고 있는데, 왜놈들은 포구 안 여염집을 분탕하고서 우리 군사들의 위세를 바라보고는 겁내어 산으로 올라가므로, 낙안군수(신호)는 그 부의 소속 순천대장 유섭과 협력하여 왜대선 한 척을, 같은 부통장으로 그 고을에 사는 급제 박영남과 보인 김봉수 등이 협력하여 왜대선 한 척을, 보성군수(김득광)가 왜대선 한 척을, 방답첨사(이순신)가 왜대선 한 척을, 사도첨사(김완)가 왜대선 한 척을, 녹도만호(정운)가 왜대선 한 척을, 그의 부통장으로 귀양살던 전봉사 주몽룡이 왜중선 한 척을, 대솔군관 전봉사 이설과 송희립 등이 합력하여 왜대선 두 척을, 군관 정로위 이봉수가 왜대선 한 척을, 군관 별시위 송한련이 왜중선 한 척 등 모두 총통으로 쏘아 쳐부수고 불태웠다.
사졸들에게 명령하여 아침밥을 먹고 쉬려고 하는데, 적진포 근처에 사는 향화인 이신동이 우리 수군을 바라보고 산마루에서 아기를 업고 내려오므로 소선으로 실어와서 직접 도둑떼들의 행동을 물어보았다. “그 왜적들이 어제 이 포구로 와서 여염집에서 빼앗은 재물을 소와 말로 실어 가서 그들의 배에 나눠 싣고는, 초저녁에 배를 바다 가운데에 띄워 놓고 소를 잡아 술을 마시며 노래하고 피리 불며 날이 새도록 그치지 않았는데, 숨어서 그 곡조를 들어보니 모두 우리나라의 음이었고, 오늘 이른 아침에는 반수는 배를 지키고 반수 가량은 육지로 내려와서 고성으로 향하였다. 소인의 노모와 처자는 적을 보자 서로 헤어져 간곳을 모른다”고 하면서 애절히 눈물 흘리며 호소하므로 그 정상이 가련하고 적의 포로가 될 것을 염려스러워서 데리고 다닐 뜻을 말하니, 그 사람은 노모와 처자를 찾아야 하기 때문에 따르려고 하지 않았다.
모든 장수와 군사들이 이 말을 듣고는 더욱더 분하게 여겨 서로 돌아보면서 기운을 가다듬어 한 마음으로 힘을 합하여 곧 천성ㆍ가덕ㆍ부산 등지로 향하여 그 적선을 섬멸하려고 생각하였으나, 위의 적선이 정박하고 있는 곳은 지세가 좁고 얕아서 판옥선과 같은 큰 배로서는 싸우기가 매우 어려울 뿐 아니라, 우수사 이억기가 미처 달려 오지 않아서 홀로 적 속으로 진격하기에는 세력이 너무나 외롭고 위태로워, 원균과 함께 계획을 논의하고 별도로 기묘한 계획을 짜내어 나라의 치욕을 씻으려고 했는데, 도사 최철견의 첩보가 뜻밖에 도착하여 비로소 임금께서 관서로 옮겨 가신 기별을 알게 되어 놀랍고 통분함이 망극하여 종일토록 서로 붙들고 오장이 찢어지는 듯하고, 울음소리와 눈물이 한꺼번에 터졌다. 그래서 하는 수 없이 각자 배를 돌리기로 하였다.8)
5월9일[무진/6월18일] 「장계」에서
정오에 모든 전선을 거느리고 본영으로 무사히 돌아왔다. 곧 이어서 여러 장수들에게 “배들을 더 한층 정비하여 바다 어귀에서 사변에 대비하라”로 알아듣도록 타이르고서 진을 파하였다.
순천대장 유섭이 빼앗아 온 우리나라 소녀는 겨우 너댓살인데 그 내력을 알 길이 없다. 보성군수 김득광이 빼앗아 온 소녀 한명은 나이가 좀 들었으나 머리를 깎고 왜인이 되었는데, 심문해 보니 5월7일 동래 응암리에 사는 백성 윤백련이고, 나이는 열 네 살이며, 제가 아무날 어느 곳에서 왜인을 만나 누구누구와 같이 포로되었다가 그날 접전할 때 도로 붙잡혀 나오게 된 연유와, 왜적들의 모든 소행을 비롯하여 생년월일과 신분 등을 아울러 진술하였다.
“아버지는 다대포 수군 곤절인데, 왜란이 일어나자 생사를 알 수 없고, 어머니는 양가집 딸이고 이름은 모론인데 지금은 죽었으며, 내외조부모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모른다. 저는 기장에 사는 신선 김진명의 하인인데 날짜는 기억할 수 없으나, 지난 4월에 왜적들이 부산포에 정박하자 호수(조선의 正軍) 진명은 군령에 의하여 제게 군장을 지우고 부산진으로 데리고 가는데, 마빌이현(동래구 서면 범전)에 이르자 왜적이 벌써 부산을 함락하였음을 듣고 되돌아와서 저를 데리고 바로 기장으로 달려가 성 안에서 진을 쳤다가 군졸들이 도망하므로 진명이 제 집으로 데리고 가서 하룻밤을 지낸 뒤에 저의 아버지와 친척들이 이곳으로 피난해 온 것들 우연히 길가에서 만나 그 고을 운봉산 속에서 지냈는데, 여덟 아흐레 동안 왜적들이 무수히 침입하여 저와 오빠 복룡 등은 먼저 포로되어 해가 질 무렵에 부산성으로 끌려가서 밤을 지낸 뒤에 오빠 복룡은 간 곳을 알 수 없고, 저는 선창 아래에 넣어 두고서는 마음대로 행동하지 못하게 하였다. 날짜는 기억하지 못하나 하루는 적선 30여 적이 김해부로 향하여 떠나고, 반 정도는 뭍에 내려 그곳에 있던 적과 대엿새 동안 머문 뒤, 이달 6일 낮 열 시쯤에 일제히 출항하여 율포(거제군 장목면 대금리)에 와서 밤을 지내고, 7일 새벽에 그곳에서 옥포 앞바다에 이르러 정박했다. 그 날 접전할 때에는 왜인의 배 안에 우리나라의 철환과 장전과 편전이 비오듯 쏟아져 맞는 놈마다 곧 넘어져 피를 뚝뚝 흘리자, 왜놈들은 아우성치며 엎드려 넘어지는 등 어찌할 바를 모르다가 모두 물에 뛰어들어서 산으로 올라 도망쳤는데, 저는 다행히 말이 통하여 산채로 잡혔거니와, 철없는 놈이라 선창 아래에 오래 있었기 때문에 다른 일들은 알지 못한다”고 진술하였다.
이 말을 듣고 윤백련과 소녀 등을 순천ㆍ보성 등 관원에게 “각별히 보호하라”하고 돌려 주었거니와, 흉추한 적들의 해독이 이 지경에 이르러 벌써 살륙도 많고, 또 노략질도 많이 하여 모든 백성들 중에 어버이나 자식을 잃지 않은 사람이 없을 지경이다.
뿐만 아니라 이번에 연해안을 두루 돌아보니 지나가는 산골짜기마다 피난민 없는 곳이 없으며, 우리 배를 바로보고는 아이나 늙은이나 짐을 지고 서로 이끌며 흐느껴 울며 부르짖는 것이 재생할 길을 얻은 것같아서, 혹은 적의 종적을 알려 주는 자도 있었는데, 보기에 비참하고 불쌍하여 곧 싣고 가고 싶었으나, 그런 사람들이 너무나 많을 뿐 아니라 전쟁을 해야 하는 배에 사람들을 가득 실으면 배를 운용하는 데에 편리하지 못할 것을 생각하여 “돌아갈 때 데리고 갈 예정이니 각각 잘 숨어서 적에게 들키지 않도록 조심하여 사로잡히는 일이 없도록 하라”고 알아듣도록 타이른 뒤에 적을 쫓아내려 멀리 떠났다가, 별안간 임금 수레가 서쪽으로 몽진하신 기별을 듣고 어찌할 바를 알지 못하여 노를 재촉하여 그대로 돌아왔어도 불쌍한 정경은 오히려 잊을 수 없다.
이들 피난민이 집을 나온지 오래 되어 남은 양곡마저 떨어져 굶어 죽을 것이 분명하므로, 그 도의 겸관찰사에게 “끝까지 찾아내어 구호하기 바란다”고 통보하였다.
대체로 보아 여러 장수와 관리들은 모두 분격하여 서로 앞을 다투어 적진에 돌진하면서 함께 대첩할 것을 기약하였는데, 무릇 앞뒤 해전에 서 40여 척을 불태우고 부술 즈음에, 왜적의 머리를 벤 것이 다만 둘뿐이다. 섬멸하고 싶은대로 다 못하여 더 한층 통분했지만, 접전할 때에는 그럴 수밖에 없었다.
적선은 빠르기가 나는 듯하며, 우리 배를 보고 미처 도망치지 못하면 으레 기스락을 따라 고기두름 엮는 듯이 줄지어 행선하다가, 형세가 불리하게 되면 뭍으로 도망했다. 그런데도 이번에 섬멸하지 못하여 간담이 찢어질 것같아 칼을 어루만지며 혀를 차고 탄식했다. 왜선에 실렸던 왜의 물건은 모두 찾아내어 다섯 칸 창고에 가득히 채우고도 남았으며, 그밖의 사소한 잡물은 다 기록하지 못하고 그 중에서 전쟁에 쓸만한 물건을 골라서 별도로 그 종류대로 모아 놓았는데, 김해부 사람의 이관안(吏官案)과 분군성책(分軍成冊) 및 각종 활ㆍ화살 등은 아울러서 차례로 조목조목 적었거니와, 왜선에 실려 있었던 물건 중에 우리가 먹을 만한 쌀 300여 섬은 여러 전선의 굶주린 격군과 사부들의 양식으로 적당히 나누어 주고, 의복과 목면 등의 물건도 군사들에게 나누어 주어서 적을 무찔러서 이득을 바라는 마음을 일으키게 하려 했으나, 먼저 조정의 조치를 기다렸다.
대개 왜적들은 붉고 검은 철갑이며 여러 가지 철투구에, 입에는 갈기가 엇갈리게 붙어 있어 마치 철광대같았으며, 금관ㆍ금깃ㆍ금삽ㆍ비옷ㆍ우췌ㆍ소라같은 것은 기이한 모양으로 매우 사치하고 호사하여 귀신같기도 하고 짐승같기도 하여 보는 사람마다 놀라지 않는 이가 없었으며, 성을 깨뜨리는 여러 기구와 큰 쇠못, 사줄같은 물건도 역시 매우 괴상하였으므로 군용 물품중에 가장 긴요한 것 한가지씩 뽑아서 올렸다.
그중에서 철갑ㆍ총통 등의 물품과 낙안군수 신호가 벤 머리 한 급은 왼쪽 귀를 도려서 궤 안에 넣고 봉함하여 처음 접전할 때 공로를 세운 군관 송한련과 진무 김대수 등에게 주어서 올려 보내고, 그밖에 올려 보낼 물건도 원 수량대로 적어 놓았다.
접전할 때 순천대장선 사부요, 순천에 사는 정병 이선지가 왼쪽 팔에 화살을 맞아 조금 다친 것 이외에는 전상자가 없다. 우수사 원균은 오직 세 척의 전선을 거느리고서 신의 여러 장수들이 사로잡은 왜선을 활을 쏘면서 빼앗으려고 했기 때문에 사부 두 명이 상처를 입게 되었으니, 주장으로서 부하 단속을 잘못한 일이 이보다 더한 것은 없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거제현령 김준민은 멀지 않은 바다요, 그가 관할하는 지역 안에서 연일 교전하였기에 주장인 원균이 빨리 오라는 격문을 보냈어도 끝내 나타나지 않았으니, 이는 해괴한 일이니 조정에서 조치하도록 해야겠다.
내 어리석은 생각으로는 적을 막는 방책에 있어서 수군이 작전을 하지 않고 육전에서 성을 지키는 방비에만 전력하였기 때문에 나라의 수백 년 기업이 하루 아침에 적의 소굴로 변해진 것이라, 생각이 이에까지 미치니 목이 메어 말이 나오지 않는다.
적이 만약 뱃길로 본도를 침범해 온다면 내가 해전으로써 결사적으로 담당하겠으나, 육지로 침범해 오면 본도의 장사들은 싸움 말이 한필도 없으니 도리가 없다.
내 생각으로는 돌산도 백야곶(순천시 화양면 백야리)과 흥양 도양장(고흥군 도양면 도덕리)의 목마 중에 전쟁에 쓸만한 말들이 많이 있으므로, 많이 몰아내어 장수와 군사들에게 나누어 주어 살찌게 먹이고, 달리기를 훈련시켜 전쟁에 쓴다면 승첩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것은 내 독단으로 품계할 일이 아니고, 사태가 급하므로 겸관찰사 이광에게 감목관을 정해 보내게 하고, 말몰이 하는 군사는 각진포에서 뽑혀 온 군사를 동원하여 하루 이틀 기한으로 잡아내어 훈련시키도록 이첩했다.9)
5월10일[기사/6월19일] 「장계」에서
장계를 써 올렸다.10)
5월26일[을유/7월5일] 「장계」에서
부산의 적들이 서로 잇따르며 떼를 지어 점점 거제도 서쪽으로 침범하여 연해안 여러 고을을 분탕하고 긴요한 것을 가지고 가는 것이 잦으니, 분하고 답답함을 금할 수 없다. 그래서 한편으로는 본도의 수군을 징집하고, 한편으론 우수사 이억기에게 “합력하여 적을 쳐부술 예정이니 빨리 달려옴이 좋겠다”는 내용의 공문을 보내면서 “물길이 멀고 바람의 세기나 방향을 예측하기 어려우니 6월 초사흘까지 본영 앞바다로 일제히 모여 구원하러 출전하자”고 했다.11)
5월27일[병술/7월6일] 「장계」에서
경상우수사 원균의 공문이 왔다. “적선 10여 척이 벌써 사천ㆍ곤양 등지에 육박하였기로 수사는 남해 땅 노량으로 이동했다”고 하였다.
만일 초사흘에 모이기로 약속한 날까지 기다려서 출전한다면 그 사이에 적이 뒤따르는 무리를 끌어들여 사태가 극성으로 덤빌 것이 염려되어 군관 전만호 윤사공을 유진장으로 임명하고, 조방장 정걸에게 좌도의 각진 각포에 지휘할 사람이 없으므로 “흥양에 머물러서 책략에 따라 사변에 대비하도록 하라”고 지시하였다.
5월29일[무자/7월8일] 우수사(이억기)가 오지 않으므로 홀로 여러 장수들을 거느리고12) 새벽에 출항하여 곧장 노량에 이르니 경상우수사 원균이 와서13) 만났다. 적이 머물러 있는 곳을 물으니, “지금 사천 선창에 있다”고 한다. 곧 쫓아가니 왜놈들은 벌써 뭍으로 올라가서 산 위에 진을 치고 배는 그 산 아래에 매어 놓고 항전하는 태세가 매우 견고했다. 나는 여러 장수들을 독려하여 일제히 달려 들며 화살을 비 퍼붓듯이 쏘고, 각종 총포들을 우레같이 쏘아대니 적들이 무서워서 물러나는데, 화살을 맞은 자가 헤아릴 수 없을 정도이고, 왜적의 머리를 벤 것만도 많으며, 왜선 열 세 척을 불살라 버렸다. 이 싸움에서 군관 나대용이 탄환에 맞았고14), 나도 왼쪽 어깨 위에 탄환을 맞아 등을 관통하였으나 중상은 아니었다.

1)『이충무공전서』권2,「장계」9쪽,「赴援慶尙道狀(二)」에 "우수사 이억기는 이 달 30일 출항한다"고 했음.
2) 임진 2월 19일에는 '呂島權官'이라 했음.
3)『이충무공전서』권2,「장계」9쪽,「玉浦破倭兵狀」에는 "丑時發船"이라 함.
4)「장계」9쪽,「赴援慶尙道狀(二)」.
5)『이충무공전서』권2,「장계」10쪽,「玉浦破倭兵狀」.
6) 조성도.「임진장초」260쪽,「狀七初度玉浦勝捷啓本」에는 "國被擄人一名檎"임.
7)『이충무공전서』권2,「장계」10~12쪽,「玉浦破倭兵狀」.
8)『이충무공전서』권2,「장계」12~14쪽.
9)『이충무공전서』권2, 「장계」14~17쪽, 「玉浦破倭兵狀」.
10) 조성도,「임진장초」 47쪽, 「제1차 옥포승첩을 아뢰는 계본」.
11)『이충무공전서』권2, 「장계」18쪽, 「唐浦破倭兵狀」.
12)「장계」18쪽엔 "獨領戰船二十三隻"이라고 함.
13)「장계」에는 "元均只率三隻船移在河東船艙"라 하였음.
14)「장계」20쪽엔 "이설도 화살맞았다(李渫逢箭幷不至死)"가 더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