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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4일[계사/5월14일] |
맑다. 아침에야 비로소 통증이 겨우 가라앉는 것같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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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5일[갑오/5월15일] |
맑다가 저녁 나절에 비가 조금 내리다. 동헌에 나가 공무를 봤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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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6일[을미/5월16일] |
맑다. 진해루로 나가 공부를 본 뒤에 군관을 시켜 활을 쏘게 했다. 아우 여필을 배웅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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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7일[병신/5월17일] |
나라 제사날(중종 문정왕후 윤씨 제사)이라 공무를 보지 않았다. 낮 열시 경에 비변사에서 비밀공문이 왔는데, 영남관찰사와 우병사의 장계에 의한 것이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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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8일[정유/5월18일] |
흐리되 비는 아니오다. 아침에 어머니께 보낼 물건을 쌌다. 저녁 나절에 여필이 떠나갔다. 객창에 홀로 앉았으니 만단의 회포가 어리어 온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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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9일[무술/5월19일] |
아침에 흐리더니 저녁 나절에야 맑다. 동헌에 나가 공무를 봤다. 방응원이 방비처에 갈 공문을 써 보냈다. 군관들이 활을 쐈다. 광양현감(어영담)이 수색에 대한 일로 배를 타고 왔다가 저물어서 돌아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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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10일[기해/5월20일] |
맑다. 식사를 한 귀에 동헌에 나가 공무를 봤다. 활 렬 순을 쏘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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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11일[경자/5월21일] |
아침에 흐리더니 저녁 나절에야 맑다. 공무를 본 뒤에 활을 쐈다. 순찰사(이광)의 편지와 별록을 순찰사의 군관 남한이 가져왔다. 비로소 베로 톷을 만들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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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12일[신축/5월22일] |
맑다. 식사를 한 뒤에 배를 타고 거북배의 지자ㆍ현자포를 쏘았다. 순찰사의 군관 남공(남한)이 살펴 보고갔다. 정오에 동헌으로 나가 활 열 순을 쏘았다. 관청으로 올라 갈때 노대석을 보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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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13일[임인/5월23일] |
맑다. 동헌에 나가 공무를 본 뒤에 활 열 다섯 순을 쏘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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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14일[계묘/5월24일] |
맑다. 동헌에 나가 공무를 본 뒤에 활 열 순을 쏘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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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15일[갑진/5월25일] |
맑다. 나라 제사날(성종 공혜왕후 한씨 제사)이라 공무를 보지 않았다. 순찰사에게 보내는 답장과 별록을 써서 역졸을 시켜 달려 보냈다. 해질 무렵에 영남우수사(원균)의 통첩에, "왜선 90여 척이 와서 부산앞 절영도(영도)에 정박했다" 고 한다. 이와 동시에 또 수사(경상좌수사 박홍)의 공문이 왔다. "왜선 350여 척이 이미 부산포 건너편에 도착했다"1) 고 했다. 그래서 즉시 장계를 올리고2), 겸하여 순찰사(이광)ㆍ병마사(최원)ㆍ우수사(이억기)에게도 공문을 보냈다. 영남관찰사(김수)의 공문도 왔는데, 역시 같은 내용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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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16일[을사/5월26일] |
밤 열시 경에 영남우수사 (원균)의 공문이 왔다. "부산진이 이미 함락되었다" 고 한다. 분하고 원통함을 이기지 못하여 즉시로 장계를 올리고, 또 삼도에 공문을 보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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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17일[병오/5월27일] |
흐리고 비오더니 저녁 나절에야 맑다. 영남우병사(김성일)에게서 공문이 왔다. "왜적이 부산을 함락시킨 뒤에 그대로 머물면서 물러가지 않는다" 고 한다. 저녁 나절에 활 다섯 순을 쏘았다. 번을 그대로 서는 수군(仍番)과 새로 번드는 수군(奔番)이 잇달아 방비처로 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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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18일[정미/5월28일] |
아침에 흐리다. 이른 아침에 동헌에 나가 공무를 봤다. 순찰사(이광)의 공문이 왔다. "발포권관은 이미 파직되었으니 대리(假將)를 정하여 보내라" 고 하였다. 그래서 군관 나대용을 이 날로 바로 정하여 보냈다. 낮 두시 경에 영남우수사의 공문이 왔다. "동래도 함락되고, 양산(조영규)ㆍ울산(이언함) 두 군수도 조방장으로서 성으로 들어갔다가 모두 패했다" 고 한다. 이건 정말로 통분하여 말을 할 수가 없다. 병사(이각)와 수사(박홍)들이 군사를 이끌고 동래 뒤쪽까지 이르렀다가 그만 즉시 회군했다고 하니 더욱 가슴 아프다. 저녁에 순천의 군사를 거느리고 온 병방이 석보창(여천시 봉계동 석창)에 머물러 있으면서 군사들을 거느리고 오지 않았다. 그래서 잡아 가두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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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19일[무신/5월29일] |
맑다. 아침에 품방에 해자 파는 일로 군관을 정해 보냈고, 일찌기 아침밥을 먹은 뒤에 동문 위에 나가 품방 역사를 몸소 독려했다. 오후에 상격대를 순시했다. 이 날 분부군(입대하러 온 군사) 700명을 만나보고 역사하는 일을 점검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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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20일[기유/5월30일] |
맑다. 동헌에 나가 공무를 봤다. 영남관찰사(김수)의 공문이 왔다. "많은 적들이 휘몰아 쳐들어 오니 이를 막아낼 수가 없고, 승리한 기세가 마치 무인지경을 드는 것과 같다" 고 하면서, 내게 "전선을 정비하여 와서 후원해 주기를 바란다고 조정에 장계하였다"3) 고 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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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21일[경술/5월31일] |
맑다. 성 위에 군사를 줄지어 서도록 과녁터에 앉아서 명령을 내렸다. 오후에 순천부사(권준)가 달려 와서 약속을 듣고 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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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22일[신해/6월1일] |
맑다. 새벽에 정찰도 하고 부정 사실도 조사할 일로 군관을 내어 보냈다. 배응록은 절갑도(고흥군 금산면 거금도)로 가고, 송일성은 금오도(여천군 남면)로 갔다. 또 이경복ㆍ송한련ㆍ김인문 등으로 하여금 두산도(여천군 돌산도)의 적대목을 실어 내리는 일로 각각 군인 쉰 명씩을 데리고 가게 하고, 나머지 군인들은 품방에서 역사시켰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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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23일 부터 4월30일까지는 일기가 빠지고 없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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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26일[을묘/6월5일] |
「장계」에서 이 달 20일 성첩한 좌부승지 민준의 서장이 왔다. "물길을 따라 적선을 요격하여 적들로 하여금 뒤를 돌아보게 하는 것이 가장 좋은 방책이다. 그래서 경상도순변사 이일이 내려갈 때 이미 일러 보내었는데, 다만 군사상 진퇴하는 것은 반드시 기회를 보아 시행하여야만 그르침이 없는 것이다. 따라서 마땅히 먼저 적선의 많고 적음과, 지나가는 섬 사이에 적병이 있나 없나를 살펴 본 뒤에 나아감이 좋을 것이다. 그러나 이같이 신중을 기하는 것이 매우 좋은 방책이지만, 만일 형세가 유리한데도 시행해야 할 것을 시행하지 않으면 기회를 놓치게 되는 바, 조정은 멀리서 지휘할 수 없으니 도내에 있는 주장의 판단에 맡길 따름이다. 본도는 이미 이 뜻을 알렸으니, 경상도에는 공문을 보내어 서로 의논하고 기회를 보아 조치하도록 하라" 고 하였다. 그러나 나는 일개의 주장으로서 마음대로 처리하기 어려우므로 겸관찰사 이광, 방어사 곽영, 병마절도사 최원 등에게도 분부한 사연을 낱낱이 알렸으며, 한편 경상도순변사 이일과 겸관찰사 김수, 우수가 원균 등에게는 "그 도의 물길 사정과, 두 도의 수군이 모처에 모이기로 약속하는 내용과 더불어 적선의 많고 적음과, 현재 정박해 있는 곳과 그밖의 대책에 응할 여러가지 기밀을 모두 급히 회답해 달라" 고 통고하고, 각 고을과 포구에도 "전쟁 기구와 여러가지 비품을 다시 철저히 정비하여 명령을 기다리라"고 공문을 돌렸다.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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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27일[병신/6월6일] |
「장계」에서 이 달 23일 성첩된 좌부승지의 서장을 새벽 네 시에 선전관 조명이 가져왔다. "왜적들이 이미 부산과 동래를 함락하고 또 밀양에 들어왔다는데, 이제 경상도우수사 원균의 장계를 본즉 '각 포구의 수군을 이끌고 바다로 나가 군사의 위세를 뽐내고 적선을 엄습할 계획이다'고 하니, 이는 가장 좋은 기회이므로 반드시 그 뒤를 따라 나가야 할 것이다. 그대가 원균과 합세하여 적선을 쳐부순다면 적을 평정시킬 것조차도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선전관을 급히 보내어 이르노니, 그대는 각포구의 병선들을 거느리고 급히 출전하여 기회를 놓치지 말도록 하라. 그러나 천리 밖이라 혹시 뜻밖의 일이 있을 것같으면 그대의 판단대로하고, 너무 명령에 거리끼지는 말라"고 하였다. 이 말대로라면 왜적들은 침입한지 오래되어 반드시 지쳐서 사기가 떨어지고, 가진 전비품도 거의 써버렸을 것이니, 왜적들을 꼭 이 때에 막아내야 하겠거니와, 다만 앞뒤 적선의 수가 500여 척 이상이라 하므로 우리의 위세를 엄하게 갖추어 엄습할 모습을 보여서 적으로 하여금 겁내고 떨도록 해야 하겠다. 그래서 수군에 소속된 방답ㆍ사도ㆍ여도ㆍ발포ㆍ녹도 등 5개 진포의 전선만으로는 세력이 심히 고약하기 때문에 수군이 편성되어 있는 순천ㆍ광양ㆍ낙안ㆍ흥양ㆍ보성 등 5개 고을에도 아울러 방략에 따라 거느리고 갈 예정인 바, 처음에는 경상도로 출전하면 해로를 지나게 되는 "본영 앞바다로 일제히 도착하라"고 급히 통고하였다. 그러나 추출할 기일이 급한데다 수군의 여러 장수 중에 보성 및 녹도 등지는 3일이나 걸리는 먼 거리에 있기 때문에 통고하여 불러 모은다 해도 그곳 수군은 쉽게 모일 수 없으므로, 반드시 기일을 지키지 못할 것같다. 그래서 그밖의 여러 장수들만이라도 모두 이 달 29일 본영 앞바다에 모이게 하여 거듭 약속을 밝힌 뒤에 즉시 경상도로 출전하기 로 했다. 그러나 풍세의 순역을 미리 생각하여 어렵게 되면 형편에 따라 빨리 출전하려는 바, 경상도순변사(이일), 겸관찰사(김수), 우수사 등에게도 공문을 보내어 약속하였음을 장계올렸다.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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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29일[무오/6월8일] |
「장계」에서 정오에 경상우수사 원균의 회답 공문이 왔다. "적선 500여 척이 부산ㆍ김해ㆍ양산ㆍ명지도 등지에 정박하고, 제 맘대로 상륙하여 연해변의 각 고을과 포구, 병영 및 수영을 거의 다 점령하였으며, 봉화불이 끊어졌으니 매우 통분하다. 본도(경상우도)의 수군을 뽑아내어 적선을 추격하여 10척을 쳐부수었으나, 나날이 병사를 끌어들인 적세는 더욱 성해져서, 적은 많은데다 우리는 적기 때문에 적을 맞아 싸울 수 없어서 본영(경상우수영)도 이미 함락되었다. 귀도(전라좌도)의 군사와 전선을 남김없이 뽑아내어 당포 앞바다로 급히 나와야 하겠다"는 내용이었다.6) 그래서 소속 수군으로, 중위장에 방답첨사 이순신을, 좌부장에 낙안 군수 신호를, 전부장에 흥양현감 배흥립을, 중부장에 관양현감 어영담을, 유군장에 발포가장ㆍ영군관ㆍ훈련원봉사 나대용을, 우부장에 보서군수 김들광을, 후부장에 녹도만호 정운을, 좌척후장에 여도권관 김인영을, 우척후장에 사도첨사 감완을, 한후장에 영군관ㆍ급제 최대성을, 참퇴장에 영군관ㆍ급제 배응록을, 돌격장에 영군관 이언량 등을 모두 배치하고 거듭 약속을 명확히 하였다. 선봉장은 우수사 원균과 약속할 때 그 도의 변장으로써 임명할 계획이며, 본영은 우후 이몽구를 유진장으로 임명하고, 방답ㆍ사도ㆍ여도ㆍ녹도ㆍ발포 등의 5개 포구에는 담략이 있는 이를 가장(假將)으로 임명하여 엄중히 훈계하여 보냈다. 나는 수군의 여러 장수들을 거느리고 4월30일 새벽 네시에 출전할 예정으로, 경상우도 남해현 미조항과 상주포ㆍ곡포ㆍ평산포 등 네 개 진영이 이미 거듭 들어왔으므로, 그 현령ㆍ첨사ㆍ만호 등에게 "당일 군사와 병선을 정비하여 길 중간까지 나와서 대기하라"고 새벽에 공문을 만들어 사람을 달려 보냈다. 낮 두시 경 본영의 진무이고 순천 수군인 이언호가 급히 돌아와서 보고했다. "남해현 성안의 관청 건물과 여염집들은 거의 비었고, 집안에서 밥짓는 연기마저 별로 나지 않으며, 창고의 문은 이미 열려 곡물은 흩어지 채로 있고, 무기고의 병기마저 모두 없어지고 비어 있는데, 마침 무기고의 행랑채에 한 사람이 있기에 그 이유를 물어보니, '적의 세력이 급박해지자 온 성안의 사졸들이 소문만 듣고 달아났으며, 현령과 첨사도 따라 도망하여 간 곳을 알 수 없다'고 대답하므로, 돌아오다가 또 한 사람을 보았는데, 쌀섬을 진 채 장전을 가지고 남문 밖에서 달려 나오다가 장전의 일부를 소인에게 주는 것이다"고 하였다. 그래서 그 장전을 살펴보니 '曲捕'라고 새긴 것이 분명하며, "성을 비우고 달아났다"는 말이 그럴 듯하다. 그러나 하인들이 보고하는 말을 그대로 믿기 어려워서 군관 송한련에게 "이 말이 사실과 같다면 적의 군량을 쌓아 주는 격이 되고, 점점 본도(전라좌도)로 침입하여 오래 머물며 물러가지 않을 것이므로 그 창고와 무기고 등을 불살라 없애라"고 전령하여 급히 달려 보냈다. 대체로 보아 흉악한 적의 세력이 커져 부대를 나누어 도적질을 하는데, 한 부대는 육지 안으로 향하여 먼 곳까지 석권하고, 한 부대는 연해안으로 향하여 닥치는대로 함락하고 있으나, 육지나 바다의 여러 장수들이 한 사람도 막아 싸우지 못하여 벌써 적의 소굴이 되어 버렸고, 바다의 진영으로서도 남은 것이라고는 오직 우수영과 남해의 평산포 등 네 개의 진영뿐이자만, 이제 들으니 우수영마저도 함락되었고, 남해의 온 섬들은 벌써 무인지경이 되었다고 하는 바, 이른바 우수영은 내가 지키는 진영과 일해상접하여 있고, 남해는 복소리와 나팔소리가 서로 들리고, 앉은 사람의 모양마저 똑똑하게 세어 볼 수 있는 가까운 곳이다. 그러므로 본도로 침범해 올 시기가 곧 박두하였으니 매우 한심할 뿐 아니라, 본도 내의 육지와 연해안 각 고을과 변두리의 성을 방어함에 있어서 새로 뽑은 조방군 등 정예의 사졸은 모두 육전으로 나가고 변두리에 남은 진보(鎭堡)에는 병기를 가진 사람조차 너무 적어 다만 맨손으로 모인 수군을 거느리게 되므로, 그 세력이 매우 약하여 달리 방어할 대책이 없다. 뿐만 아니라 수군의 중위장이며 순천부사인 권준도 바다로 나가 사변에 대비하다가 관찰사의 전령으로 전주로 달려갔다. 더구나 오랫동안 임지에 있던 자들은 뜬소문만 듣고서도 가족을 데리고 짐을 지고 길가에 잇달았으며, 혹은 밤을 이용하여 도망하고, 혹은 틈을 타서 이사하는데, 본영의 수졸과 본고장 사람들 사이에도 또한 이같은 무리들이 있으므로 그 길목에 포망장(도망자 잡는 장수)을 보내어 도망자 두명을 찾아내어 우선 목을 베어 군중에 효시하여 군사들의 공포심을 진정시키었거니와 "경상도를 구원 하러 출전하라" 는 분부가 이같이 정녕할 뿐 아니라, 나도 그 소식을 듣고 분노가 가슴에 서리고 쓰라림에 뼈속에 사무쳐 한번 적의 소굴을 무찔러 나라를 위해 몸을 바치려는 충곡이 자나 깨나 간절하여 수군을 거느리고 우수사와 함께 합력하여 무찔러서 적의 무리를 섬멸할 것을 기약하였다. 그런데 남해에 첨입된 평산포 등 네 개의 진영의 진장과 현령 등이 왜적들의 얼굴을 보지 아니하고 먼저 도피하였으므로, 나는 남의 도의 군사이니 그 도의 물길이 험하고 평탄한 것도 알 수 없고, 물길을 인도할 배도 없으며, 또 작전을 상의할 장수도 없는데 경솔하게 행동한다는 것은 천만 뜻밖의 실패도 없지 않을 것이다. 소속 전함을 모두 합해 봐야 30척 미만으로서 세력이 매우 고약하기 때문에 겸관찰사 이광도 이미 이 실정을 알고 본도 우수사(이억기)에게 명령하여 "소속 수군을 신(臣)의 뒤를 따라서 힘을 모아 구원하도록 하라"고 하였다. 그래서 일이 매우 급하더라도 반드시 구원선이 다 도착되는 것을 기다려서 약속한 연후에 출항하여 바로 경상도로 출전해야 하겠다. 흉하고 더러운 무리들이 벌써 조령을 넘어 서울로 육박하게 되어 본도의 겸관찰사가 홀로 분발하여 많은 군사를 거느리고 곧 서울로 향하여 왕실을 보호할 계획이라 하는 바, 이 말을 듣고 흐르는 눈물을 가누지 못하고, 칼을 어루만지며 혀를 차면서 탄식하고, 또 여러 장수를 거느리고 서울로 달려가 먼저 육지 안으로 들어간 적을 없애고자 하니. 국경을 지키는 신하의 몸으로서 함부로 하기 어려워 부질없이 답답한 채 분함을 참고 스스로 녹이며 엎드려 조정의 명령을 기다리고 있다. 내 어리석은 생각으로는 오늘날 적의 세력이 이와 같이 왕성하여 우리를 업신여기는 것은, 모두 해전으로써 막아내지 못하고 적을 마음대로 상륙하게 하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경상도 연해안 고을에는 깊은 도랑과 높은 성으로 든든한 곳이 많은데, 성을 지키던 비겁한 군졸들이 소문만 듣고 간담이 떨려 모두 도망갈 생각만 품었기 때문에 적들이 포위하면 반드시 함락되어 온전한 성이라고는 하나도 없다. 지난번 부산 및 동래의 연해안 여러 장수들만 하더라도 배들을 잘 정비하여 바다에 가득 진을 치고 엄습할 위세을 보이면서 정세를 보아 전선을 알맞게 병법대로 진퇴하여 적을 육지로 기어 오르지 못하도록 했더라면, 나라를 욕되게 한 환란이 반드시 이렇게까지는 되지 않았을 것이다. 생각이 이에 미치니 분함을 더 참을 수 없다. 이제 한번 죽을 것을 기약하고 곧 범의 굴을 바로 두들겨 요망한 적을 소탕하여 나라의 수치를 만분의 일이라도 씻으려 하는 바, 성공하고 안하고, 잘되고 못되고는 내 미리 생각할 바가 아니리라.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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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30일[기미/6월9일] |
「장계」에서 낮 두시경에 전날 쓴 것을 장계로 써 올렸다.8)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