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 마음
담 모롱이 매화가 바람에 다 지니
살구꽃 가지 위로 봄 마음도 옮겨가네.
살구꽃 가지 위로 봄 마음도 옮겨가네.
墻角小梅風落盡 春心移上杏花枝
-이달(李達), 〈호운(呼韻)〉, 3,4구
-이달(李達), 〈호운(呼韻)〉, 3,4구
이른 봄, 아직 그늘엔 잔설이 남았는데, 매화가 나무 가득 꽃을 피웠다. 흐믓함도 잠시, 시샘하는 봄바람에 한 잎 두 잎 꽃잎이 흩지다가 어느새 매화는 다 지고 없다. 서운한 눈길을 둘 데 없더니, 이번엔 마당 저편에서 살구꽃이 꽃망울을 터뜨린다. 전엔 눈에 들어오지도 않던 살구나무가 갑자기 어여쁘다.
요랬다 조랬다 하는 것은 봄 마음이 아니라 내 마음이다. 그때는 그렇게 듬직하던 사람이 지금은 꼴도 보기 싫다. 오늘 이렇게 좋고 마음 설레던 것이 내일은 마주 하고 싶지도 않다. 매화가 좋다고 그 야단일 때는 언제고, 그새 마음이 살구 가지 위로 옮겨 갔구나. 권벽(權擘)의 〈춘야풍우(春夜風雨)〉시 3,4구에서는 또 "간밤에 바람 불고 비까지 내리더니, 복사꽃 만발하고 살구꽃은 다 졌다오.(昨夜有風兼有雨, 桃花滿發杏花空)"라고 했다. 그러니 조금 있으면 살구꽃에 가 있던 마음은 또 온통 복사꽃으로 옮겨갈게 아닌가. 어여쁘고 고운 것을 사랑하는 것이야 흠될 것이 있으랴. 하지만 왠지 얄밉다. 심술 사납고 변덕스러운 것이 봄 마음이다. 피고 지는 꽃잔치에 봄날이 간다. 제멋대로 춤추는 마음 따라 봄날이 간다.
이달(李達)이 허봉(許 )의 집에 놀러갔을 때, 아우인 허균(許筠)이 왔다가 이달의 꾀죄죄한 행색을 보고 업신여기는 빛이 있었다. 허봉이 운자를 부르자 즉석에서 대답해 부른 시의 3,4구가 위의 시다. 허균이 이 시를 보고 낯빛을 바꾸고 무릎 꿇고 사죄했다. 허균은 이후 그를 시 스승으로 섬겼다. 시 한 수가 오만한 마음을 싹 씻어가 버렸던 모양이다.
원시
曲란晴日坐多時 閉却重門不賦詩 (난간 란)
墻角小梅風落盡 春心移上杏花枝
曲란晴日坐多時 閉却重門不賦詩 (난간 란)
墻角小梅風落盡 春心移上杏花枝
가을 종소리
외론 성 밖 한 마리 새
옛 절 가을 남은 종소리.
獨鳥孤城外 殘鍾古寺秋
-이지완(李志完), 〈송경남루(松京南樓)〉 1,2구
옛 절 가을 남은 종소리.
獨鳥孤城外 殘鍾古寺秋
-이지완(李志完), 〈송경남루(松京南樓)〉 1,2구
군살은 없고 뼈만 남았다. 새 한 마리 성밖에서 울고 있다. 짝들은 어디 가고 혼자 우는가? 옛 절에서 종소리가 울린다. 댕그렁 댕그러어엉. 여운이 길게 뻗지 못한다. 송도 남루(南樓)에 올라 바라본 풍경이다. 절정의 한 시절이 스러지고, 쉬 이우는 가을 햇살처럼 모든 것은 순식간에 변해 버렸다. 종소리도 구름에 막혀 되돌아 오고, 성에는 목동들의 풀피리 소리만 남았다. 새들도 떠난 지금, 나그네 홀로 누각 기둥에 기대 지나간 역사의 의미를 되묻고 있다
지식인 노릇
가을 등불 아래 책 덮고 천고를 생각하니
인간 세상 지식인 노릇 참으로 어렵구나.
秋燈掩卷懷千古 難作人間識字人
-황현(黃玹), 〈절명시(絶命詩)〉 셋째수 3,4구.
인간 세상 지식인 노릇 참으로 어렵구나.
秋燈掩卷懷千古 難作人間識字人
-황현(黃玹), 〈절명시(絶命詩)〉 셋째수 3,4구.
매천 황현이 망한 나라가 부끄러워 목숨을 끊으려 더덕술에 아편덩이를 타서 마시기 전에 부른 노래다. 마지막 결심을 하고 흔들리는 호롱불을 보며 읽던 책을 덮었겠지. 주마등처럼 스쳐가는 상념인들 왜 없었으랴. 애초에 몰랐다면 무지렁이 백성으로 살아갔겠으되, 갈 길이 분명한데 가지 않는다면 글자 배운 보람이 없지 않겠는가. 고개 한 번 돌리면 외면할 수도 있었을 그 부끄러움조차 지니지 않으려고 그는 아편덩이를 삼켰다. 우리 모두를 부끄럽게 했다.
마하연 소묘
산중이라 해가 중천에 떠 있어도
풀잎에 이슬이 짚신 적신다.
山中日亭午 草露濕芒
-이제현(李齊賢), 〈마하연(摩訶衍)〉 1,2구
풀잎에 이슬이 짚신 적신다.
山中日亭午 草露濕芒
-이제현(李齊賢), 〈마하연(摩訶衍)〉 1,2구
금강산 만폭동의 마하연을 찾았다. 암자에는 사람이 없다. 깊은 산 속에 햇볕이 들지 않아, 한낮인데도 간밤 이슬에 신발이 다 젖었다. 풀물 밴 대님을 풀어 바지를 말리며 임자 없는 암자 마루에 앉아 본다. 올려다 뵈는 하늘은 참 푸르고 맑다. 심심한 구름이 마당 안까지 들어 와 세월과 함께 놀고 있다. 나는 누구인가? 왜 여기 있는가? 이제 또 어디로 갈 것인가? 고개를 빼어 내어다 보면 올라온 길이 문득 보이지 않는다.
날 밝자 제각금
뭇새들 한 가지서 잠을 자고는
날 밝자 제각금 날아가누나.
衆鳥同枝宿 天明各自飛
-무명씨(無名氏), 〈제역정벽상(題驛亭壁上)〉 1,2구
날 밝자 제각금 날아가누나.
衆鳥同枝宿 天明各自飛
-무명씨(無名氏), 〈제역정벽상(題驛亭壁上)〉 1,2구
새들은 서로 몸 부비며 추운 밤을 났다. 날 밝자 뒤도 안돌아 보고 각자 저 갈 데로 간다. 한 세상 건너가는 일도 다를 것이 하나 없다. 나그네들이 여관방에 들어 하루밤 자고, 새벽녘 뿔뿔히 흩어지는 것과 무에 다른가. 잠깐 깃들어 쉬다 떠나는 것이 인생이다. 슬퍼할 것 없다. 천지는 만물이 깃드는 여인숙, 세월은 백대를 지나가는 길손이다. 하지만 우리는 새가 아니니 훌쩍 떠난 가지 위에도 눈물이 남는다. 정(情)이 없이 우리는 아무 것도 아니다
물에 잠긴 돌
솟은 돌은 오히려 피할 수 있지만
잠긴 돌이 참으로 두려웁다네.
出石猶可避 暗石眞堪畏
-신최(申最), 〈기탄(岐灘)〉 3,4구
잠긴 돌이 참으로 두려웁다네.
出石猶可避 暗石眞堪畏
-신최(申最), 〈기탄(岐灘)〉 3,4구
물위로 솟은 바위야 겁날 게 없다. 물에 잠긴 바위가 배 밑창에 구멍을 낸다. 세상의 여울도 다를 것 하나 없다. 소리장도(笑裏藏刀), 구밀복검(口蜜腹劍). 웃음 속에 칼을 숨겼고, 입은 꿀인데 뱃 속엔 칼을 품었다. 방심하고 지나치다간 치명상을 입는다. 발등을 찍는 것은 늘 믿는 도끼다. 마음 상할 것 없다. 세상 일 그렇지 않은 적이 언제 한번이나 있었던가? 겉만 보고 방심했던 내 잘못이 크다. 도처에 내 발목을 노리는 함정이다. 마음 놓지 마라.
얻기도 전에
얻기 전에 먼저 잃을 것을 근심하고
기쁜 일을 만나서도 슬픔 마음 일어나네.
未得先愁失 當歡已作悲
-정사룡(鄭士龍), 〈감회(感懷)〉 낙구(落句)
기쁜 일을 만나서도 슬픔 마음 일어나네.
未得先愁失 當歡已作悲
-정사룡(鄭士龍), 〈감회(感懷)〉 낙구(落句)
자라 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 보고 내려 앉는다. 내게 기쁨이 되고 설레임이 되었던 것들, 돌아보면 먼지처럼 스러지고 없다. 득의의 순간은 늘 잠깐 뿐이다. 기쁜 일이 생겨도 무턱대고 기뻐할 수가 없다. 조바심을 치는 내 마음을 나도 잘 알 수가 없다. 오늘의 큰 기쁨이 내일 가눌길 없는 슬픔이 되는 경험도 숱하게 했다. 일희일비(一喜一悲) 할 것 없다고 마음을 다잡아 보지만, 신뢰를 잃은 마음은 작은 일에도 깜짝깜짝 놀란다. 늘 불안하다.
낙엽 속
약초 캐다 어느 새 길을 잃었네
천봉 가을 잎 속에서.
採藥忽迷路 千峰秋葉裏
-이이(李珥), 〈산중(山中)〉 1,2구
천봉 가을 잎 속에서.
採藥忽迷路 千峰秋葉裏
-이이(李珥), 〈산중(山中)〉 1,2구
금빛 바람 한번 불자 온산이 탄다. 다 탄 잎이 낙엽으로 쌓인다. 낙목귀근(落木歸根), 가지를 떠나 뿌리로 간다. 약초 캐러 산에 왔다. 송이가 살지는 계절. 진 잎이 무릎을 묻는 골짝. 올라온 길이 안 보인다. 난감하구나. 길을 찾는 내게 가을 산은 자꾸 길을 지운다. 사는 일 허망하다고, 욕심 다 내려 놓고 가라고 흔적을 지운다. 초록에 지쳐 단풍이 들고, 열정을 다 태우곤 낙엽이 된다. 가을 산 낙엽 속에서 나는 길을 잃는다.
달 보며
초승달 땐 더디 둥금 안타깝더니
둥근 뒤엔 이리 쉽게 이지러지나.
未圓常恨就圓遲 圓後如何易就虧
-송익필(宋翼弼), -〈망월(望月)〉 1,2구
둥근 뒤엔 이리 쉽게 이지러지나.
未圓常恨就圓遲 圓後如何易就虧
-송익필(宋翼弼), -〈망월(望月)〉 1,2구
손톱달이 뜨면 언제 보름달이 되려나 싶었다. 둥두렷 달이 뜨면 내 마음도 덩달아 보름달이 되었다. 그런데 그 보름달은 어느새 그믐의 어둠을 향해 허물어지는구나. 저 달이 언제나 중천에 높이 떠서 어둠길을 밝혀주면 좀 좋을까? 하지만 그믐밤의 밤길이 무서워야 보름달의 환한 빛이 고마운 줄을 알지. 날마다 만월이면 그 빛이 무슨 생색이 날까? 세상길의 어긋남이야 안타깝지만, 늘 설레이며 바래는 기다림 속에 산다.
가을 풍경
지는 해에 쓰르라미 울어쌓는데
긴 하늘 지친 새 돌아가누나.
落日寒蟬 長天倦鳥還
- 이규보(李奎報), 〈십육일(十六日)〉 5,6구
긴 하늘 지친 새 돌아가누나.
落日寒蟬 長天倦鳥還
- 이규보(李奎報), 〈십육일(十六日)〉 5,6구
하루해가 저문다. 쓰르라미는 온힘을 다해 운다. 적막한 들판 위로 퍼지는 소리. 길게 뻗은 하늘에 새가 난다. 보금자리를 찾아 가는 길이다. 오늘 하루는 참 피곤하였다. 지친 날개를 쉬고 싶구나. 쓰르라미야 하루 하루 가는 날이 아깝기도 하겠지. 하지만 해가 저물면 새도 날개를 접는다. 보름이 지나면 그믐이 오고, 암흑은 다시 광명을 잉태한다. 가을날의 하루가 이리 저문다. 돌고 도는 것이 세상 사는 이치다. 날개를 접고 쉬어서 가자.
침묵과 웃음
침묵해선 안될 데서 입을 다물고
웃지 말아야 할 곳에서 웃음을 짓네.
或默不默處 或笑不笑處
-박제가(朴齊家), 〈유탄(有歎)〉 1,2구.
침묵해야 할 곳에서 시끄럽게 떠들고, 웃어야 할 자리에선 공연히 성을 낸다. 목청을 높여야 할 데서는 짹소리도 못한다. 후환이 두려워서다. 자리도 못 가리고 헤픈 웃음을 짓는다. 챙길 잇속이 있는 까닭이다. 원효 큰스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참기 어려운 것을 능히 참고, 말할 수 있는데도 말하지 않는다.(難忍能忍, 可言不言)` 아첨을 위한 인내가 아니다. 굴종을 위한 침묵이 아니다. 침묵에도 등급이 있다. 웃음에도 수준이 있다.
귀뚜라미 울음
차고 맑게 내 문에 다가와 울제
어인 일로 네 소리 차마 못듣겠구나.
凄淸近我戶 何事不堪聞
-유득공(柳得恭), 〈실솔〉 7,8구
凄淸近我戶 何事不堪聞
-유득공(柳得恭), 〈실솔〉 7,8구
귀뚤귀뚤 귀뚜라미가 운다. 눈 감으면 더 커지는 그 소리에 가을밤이 깊어간다. 굳이 내 창 밑에 와서 우는 뜻을 일러라. 무슨 할말이 그리도 많노. 바람에 문풍지가 운다. 지난날이 못 견디게 부끄럽다. 그땐 왜 그랬을까? 이렇게 했더면 좋았을 것을. 부끄러운 일이 어디 한 두가지랴. 이 밤 너 말고도 잠 못 드는 정신이 있어, 시리도록 찬 밤을 하얗게 지새고 있다. 귀뚤귀뚤귀뚤. 귀뚜라미 울음 소리.
서리달
저물녘 보슬비 긴 하늘 씻고
밤 들자 높은 바람 구름을 걷네.
晩來微雨洗長天 入夜高風捲暝烟
-이행(李荇), 〈상월(霜月)〉 1,2구
밤 들자 높은 바람 구름을 걷네.
晩來微雨洗長天 入夜高風捲暝烟
-이행(李荇), 〈상월(霜月)〉 1,2구
다 늦은 저녁에 보슬비가 긴 하늘을 말끔히 씻었다. 밤 되자 바람은 구름을 걷어간다. 달님이 빼끔 고개를 내밀었다. 세상 살며 끼어 드는 이런저런 시름들도 이렇듯 어느 한 순간 말끔히 씻겨가 버렸으면 좋겠다. 가을 밤 등불을 밝혀 놓고 앉은뱅이 책상에 오두마니 앉아서, 문득 지붕 위로 들리는 우주가 돌아가는 소리, 물리가 순환하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싶다. 광풍제월(光風霽月), 해맑은 정신을 지녀두고 싶다.
동해에서
바다에 뜨니 지금이 옳은 것을 알겠고
이름 쫓던 어제가 그른줄을 깨닫네.
浮海知今是 趨名悟昨非
-임억령(林億齡), 〈죽서루(竹西樓)〉
이름 쫓던 어제가 그른줄을 깨닫네.
浮海知今是 趨名悟昨非
-임억령(林億齡), 〈죽서루(竹西樓)〉
한바다를 굽어보니 지난날이 부끄럽다. 진작에 그만 두었어야 했다. 자리를 뭉개고 앉아 있을 일이 아니었다. 바다는 잘 왔다고, 좀더 일찍 오지 그랬느냐고 내 어깨를 토닥인다. 저물녘 해송(海松) 사이로 바람이 차다. 속살을 헤집는다. 그래 다 가져가거라. 이름을 남기겠다는 알량한 집착, 무언가 이루겠다는 사나운 욕심, 나 아니면 안된다는 스사로운 생각도 바람에 씻겨 다 날려 가거라. 동해 바닷가에서 나는 살아온 지난 날과 결별한다.
밤을 새워 얘기 하세
하루 밤에 평생 얘기 다하기 어려우니
술잔 잡고 닭울음을 또 들음이 어떠한가.
一宵難盡平生語 把酒如何更聽鷄
-조수성(曺守誠), 〈차정가원운(次鄭可遠韻)〉 3,4구
여러 해 두고 그리던 벗을 관서(關西) 땅에서 만났다. 어찌 지냈나 이 사람. 맞잡은 두 손을 놓을 줄 모른다. 숙소에 들어서도 대화는 끝이 없다. 이야기가 한동안 지난 날의 추억길에서 맴돌더니, 지금 살아가는 모양새로 옮겨간다. 술항아리는 이미 바닥이 났다. 창밖이 희부윰한 것이 머잖아 동이 틀 모양이다. `피곤한데 이만 자세.` `안될 말일세. 하고픈 말 끝없으니, 이대로 술잔 잡고 밤을 꼬박 새우세나.`
가을밤의 강물
달 져서 찬 조수도 고요하길래
돛 달자 자던 기러기 놀라 우짖네.
月落寒潮靜 帆開宿雁呼
-조신준(曺臣俊), 〈강행(江行)〉 1,2구
돛 달자 자던 기러기 놀라 우짖네.
月落寒潮靜 帆開宿雁呼
-조신준(曺臣俊), 〈강행(江行)〉 1,2구
달이 졌다. 물결도 가라 앉았다. 돛 달고 안개를 헤치며 강길을 미끄러져 간다. 물 위에 뜬채 잠자던 기러기가 침입자에 놀라 끼룩대며 날아간다. 3,4구에서는 "몽롱한 안개 자욱한 언덕, 하마 벌써 지났는가 술집 뵈잖네. 朦朧烟霧岸, 已過酒家無"라 했다. 울컥 술 생각에 깊은 밤 강가 주막집으로 술 받으러 나선 길이었던 모양이다. 눈감고도 훤하던 주막집 언덕이 오늘사 이상스레 찾을 수가 없다.
부질없는 생각
지는 볕 스러지고 큰 강물 넘실대니
천고의 흥망이 한 피리에 빗겼구나.
斜陽斂盡大江平 千古興亡一笛橫
-김진(金搢), 〈백제회고(百濟懷古)〉
석양빛이 스러지자, 강물은 큰 소리를 내며 운다. 천년 전 일을 울어 무삼하리. 백마강 위에서 부소산 옛 궁터를 바라본다. 목동의 풀피리 소리만 구성지게 들린다. 한 때의 부귀와 권세를 믿고 제멋대로 나대는 자들아! 저 피리 소리를 들어라. 세상 만사 지나고 나면 다 부질 없다. 덧없는 세상에서 덧없는 일을 놓고 덧없는 인간들이 덧없이 싸우다 덧없이 스러지는 것이 덧없는 우리네의 한 생애가 아닐 것인가.
가을비 그리움
벗 그리워 혼자서 잠 못 이루니
창 밖에선 괴이한 새가 우누나.
懷侶不能寐 隔窓啼怪禽
-백대붕(白大鵬), 〈추일(秋日)〉
가을 밤 촛불 하나 타고 있다. 물설고 낯선 타관의 하루 밤이 또 그렇게 지난다. 반딧불이는 풀더미 속을 날아다니고, 성근 비는 먼 숲을 적신다. 촛불을 보고 있자니 보고픈 얼굴이 떠오른다. 속으로 타는 촛불처럼 내 속이 바짝바짝 탄다. 창 밖에는 가을 비 속에 청승스리 새가 운다. 저나 내나 타는 가슴을 삭일 길이 없었던 게로구나. 호로로 호로로 하며 우는 탄식 같은 소리에 내 잠은 그만 십리나 달아나 버린다.
가을 볕
띠집은 대숲 길에 연이어 있고
가을 볕은 곱고도 따사롭구나.
茅齋連竹逕 秋日艶晴暉
-서거정(徐居正), 〈추풍(秋風)〉 1,2구
가을 볕은 곱고도 따사롭구나.
茅齋連竹逕 秋日艶晴暉
-서거정(徐居正), 〈추풍(秋風)〉 1,2구
가을 볕에 과일엔 마지막 단맛이 스민다. 대숲 사이로 보이는 초가집 한 채. 뒷짐진 채로 숲 길을 서성이는 주인의 모습도 보인다. 스스스 대바람 소리에 숲이 떨리면 가을 햇살도 잘게 부서지며 햇무리를 짓는다. 눈이 부시다. 지금 생각해도 참 잘한 일이었다. 복닥대던 현실을 털고 물러난 것은. 이 순간이 새삼 울렁이도록 고맙다. 늦과일의 단맛을 찾아 잉잉대는 꿀벌. 물가에는 까북까북 조으는 오리. 온몸이 가뿐하고 정신도 새틋하다.
마음 공부
자취를 살펴 보면 물외(物外)의 몸이언만
마음에 비춰보니 보통 사람 부끄럽다.
觀迹超然物外身 求諸方寸愧平人
-김창흡(金昌翕), 〈갈역잡영(葛驛雜詠)〉 중 3,4구
설악 깊은 골에 오두막 집을 짓고 산다. 여러 날 사람 구경 못할 때도 있다. 남들은 물외(物外)에 사는 날 부럽다고 하겠지. 욕심 사나운 생각도 없는 줄 알겠지. 설악의 바람이, 계곡의 시냇물이 다 씻어 준 줄로 알겠지. 내 거울에 비춰 보면 부끄럽기 짝이 없다. 아직도 멀었다. 누가 나를 알아주기라도 하면 금세 속내를 다 보여줄 것만 같다. 몸을 어디에 두든 거울처럼 투명하게 마음자리를 닦고 또 닦겠다. 나 자신과 정면으로 승부하겠다.
웅숭깊은 속내
풍악산 맑은 기운 즈믄해나 쌓여 있고
동해의 푸른 물결 만 길이나 깊어 있다.
楓山灝氣千年積 東海蒼波萬丈深
-송시열(宋時烈), 〈유풍악(遊楓嶽)〉 5,6구
금강산 골짝마다 맑은 기운이 가득하다. 하늘을 우러 두 팔 벌린 나무들. 그 사이로 걸어가면 겨드랑이 밑에서 날개가 돋아 허공으로 훨훨 날아갈 것만 같다. 비로봉 꼭대기에 오르니 울렁울렁 동해 물결에 가슴이 설렌다. 가없는 물결 위에 만장의 깊이를 간직한 바다. 희끗대는 포말도 그 웅숭깊은 속내를 들춰 보여주진 못하리라. 아! 나도 저 한바다의 깊은 속내를 지니고 싶다. 푸르름으로 늘 거듭나는 바다가 되고 싶다.
약이 되는 말씀
정말로 약이 되는 한 마디 말 있으니
일 덜고 마음 맑혀 고요 속에 사는 것.
最有一言眞藥石 淸心省事靜中居
-문덕교(文德敎), 〈절구(絶句)〉 3,4구
일 덜고 마음 맑혀 고요 속에 사는 것.
最有一言眞藥石 淸心省事靜中居
-문덕교(文德敎), 〈절구(絶句)〉 3,4구
해 묵은 병을 고칠까 싶어 양생서를 뒤적인다. 그 중에 가장 마음에 닿는 말. `마음을 맑게 하고, 일에서 벗어나라. 생활 속에 침묵을 깃들여라.` 정말 약이 되는 말씀이다. 마음 속 가득한 욕심 때문에 하루에도 몇 번 심화가 솟는다. 번다한 잡사에 끄달리다 심신은 지쳐 녹초가 된다. 남 욕하고 짜증내다 마음의 평정은 흐트러져 버렸다. 이제부터 나는 말을 줄이겠다. 일을 줄이겠다. 마음을 비우겠다. 그 자리에 솔바람 소리와 물소리를 들이겠다.
길가의 무덤
길 가에 외로운 무덤이 하나
자손들 지금은 어디에 있나.
자손들 지금은 어디에 있나.
路傍一孤塚 子孫今何處
-김상헌(金尙憲), 〈노방총(路傍塚)〉 1.2구
-김상헌(金尙憲), 〈노방총(路傍塚)〉 1.2구
길가의 무덤. 봉분은 허물어져 잡초에 덮였다. 무덤 앞에 돌 사람을 세울 땐 집안의 영화가 한없을 줄 알았겠지. 자손들은 그새 영락하여 제 조상의 묘마저 돌볼 여력이 없고, 길 가던 나그네가 공연히 민망한 탄식을 흘린다. 흙에서 나와 흙으로 가는 것이 인생이다. 살아서의 부귀가 죽은 뒤엔 아무런 소용이 없다.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가는 것이 삶이다. 황량한 무덤 앞에 서서 나는 덧없는 욕망의 뒤끝을 본다.
굳센 적
강한 자 어찌 늘상 강하겠는가
때로는 굳센 적과 맞닥뜨리지.
强者豈常强 有時遇勁敵
-장유(張維), 〈방언(放言)〉 5,6구
때로는 굳센 적과 맞닥뜨리지.
强者豈常强 有時遇勁敵
-장유(張維), 〈방언(放言)〉 5,6구
나대지 마라. 뛰는 놈 위 나는 놈 있다. 늘 기는 놈만 상대하다 보니 교만이 쌓인다. 그러다 임자를 만나 정신이 번쩍 들었을 때는 이미 늦었다. 큰놈이 작은놈을 먹어 치우고, 센 놈이 약한 놈 위에 군림한다. 주먹은 주먹을 낳고, 힘은 더 큰 힘을 부른다. 죽고 죽이는 싸움이 그칠 날 없다. 차라리 마음을 텅 비워, 해치려는 마음, 되갚겠다는 생각을 지워버림이 어떨까? 허공을 이길 수 있는가? 허공을 꺾을 수 있는가?
외나무 다리
걸음걸음 깊은 물 조심하는 마음으로
공명의 벼슬길에 옮겨다가 보리라.
須將步步臨深意 移向功名宦路看
-신천(申 ), 〈목교(木橋)〉 3,4구
거센 물결이 다리에 부딪쳐 섯돌며 넘실댄다. 조심해라. 헛디디면 그대로 미친 물결 속이다. 내딛는 발끝이 자꾸 벌벌 떨린다. 높은 지위에 올라 부귀와 권세를 한 손에 넣었다면 부러울 것이 없겠지. 그렇지만 한 발만 잘못 디디면 아득한 나락 속으로 떨어진다. 여리박빙(如履薄氷), 살얼음을 밟는 듯 조심조심 갈 일이다. 잠깐의 득의가 오래 갈 리 없다. 하늘 끝까지 붕 떴다가 한꺼번에 추락하는 날개 없는 군상들을 많이 본다.
가을 빛
푸른 바다 성난 소리 저물녁에 밀려오고
푸른 산 근심 겨워 맑은 가을 싸늘하다.
滄海怒聲來薄暮 碧山愁色冷淸秋
-광해군(光海君), 〈제주(濟州)〉 3,4구
섬나라에 비가 몰려 온다. 해무(海霧) 자옥한 바닷가 누다락에 올라 저무는 바다를 본다. 공연한 자의식 때문이었을까? 바다는 분노의 소리를 내며 나 있는 쪽으로 몰려든다. 고개를 돌려 외면하지만 가을산도 온통 근심의 빛을 띠었다. 서울서의 일들은 한바탕 봄꿈을 꾼 것만 같다. 나는 이제 땅거미가 밀려드는 섬나라 해변에서 차고 시린 가을을 맞고 있다. 얼마 안 있어 혹독한 겨울이 와 대지는 흰 눈의 망각 속에 잠겨들 것이다. 아! 슬프다
외론 등불
초생달 숲에 들어 그림자
밤 밝히는 외론 등불.
纖月入林影 孤燈終夜明
-변계량(卞季良), 〈차자강야좌운(次子剛夜坐韻)〉 3,4구.
밤 밝히는 외론 등불.
纖月入林影 孤燈終夜明
-변계량(卞季良), 〈차자강야좌운(次子剛夜坐韻)〉 3,4구.
눈썹달이 숲에 걸려 좀체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 겨우 빠져 나온 달빛이 마당에 흔들리는 그림자를 만든다. 문 닫아건 텅 빈 방엔 앉은뱅이 책상 하나. 그 위엔 경서 한 권. 달빛이 희미하길래 가물대는 외론 등불이 가을 밤을 대신 밝힌다. 이따금 한번씩 책장 넘어가는 소리. 그때마다 등불은 한번씩 일렁이고. 곧추 앉은 주인은 한마디 말이 없다. 달이 중천에 떠올랐다가 다시 서편으로 넘어가도록, 방안의 소식은 알 길이 없다.
낙엽 한 잎
뜰 앞 한 잎 지니
침상 밑 벌레는 슬퍼.
庭前一葉落 床下百蟲悲
-정지상, 〈송인(送人)〉 1.2구.
침상 밑 벌레는 슬퍼.
庭前一葉落 床下百蟲悲
-정지상, 〈송인(送人)〉 1.2구.
툭. 오동잎 하나 떨어진다. 이것을 신호로 가을이 시작된다. 제 까짓 게 뭘 안다고. 가을 벌레들도 말문이 터진다. `찌익-짝, 찌익-짝` 베짱이는 겨울옷을 길쌈하고, `귀뚤귀뚤` 귀뚜리는 침대 맡을 파고든다. 가뜩이나 슬픈 가을에 그대는 왜 떠나나. 빈 방 혼자서 긴 밤을 어이 나리. 자다 놀란 꿈은 이어지지 않는다. 귀를 기울이면, 마당엔 차곡차곡 낙엽 쌓이는 소리. 찌익-짝, 찌익-짝, 귀뚤귀뚤귀뚤. 바람에 몰려갔다 몰려오는 발자국 소리.
건곤은 뜻이 있어 남자를 냈건만은
세월은 무정하여 장부를 늙게 했네.
乾坤有意生男子 歲月無情老丈夫
-조국빈(趙國賓), 〈향거자탄(鄕居自歎)〉 3,4구
일없이 무료하여 억지로 잠 청하다
옷 입고 되 앉으니 하루 밤이 일년 같네.
無事無聊强就眠 披衣還坐夜如年
-김수증(金壽增), 〈잡영(雜詠)〉
갈대 뿌리에서 갈대 싹이 나오고
복사꽃에는 복숭아가 달린다.
荻根生荻芽 桃花結桃子
-이용휴(李用休), 〈만필( 筆)〉 1,2구
한 곡조 연주함은 무방하지만
알아들을 사람이 너무 적구나.
不妨彈一曲 지是少知音
-이자현(李資玄), 〈낙도음(樂道吟)〉 3,4구
동해 물 기울여 봄 술 담가서
티끌 세상 억조창생 취케 하련다.
欲傾東海添春酒 醉盡 中億萬人
-임숙영(任叔英), 〈등비로봉(登毗盧峰)〉 3,4구
비로봉에 올라보니, 푸른 동해가 한눈에 들어온다. 저 물로 술을 담궈, 명리에 취하고 탐욕에 절은 억조창생의 찌들은 마음을 깨끗이 헹궈냈으면 싶다. 정철이 〈관동별곡〉에서 "이 술 가져다가 사해에 고루 나눠 억조창생을 다 취케 만든 후에 그제야 고쳐 만나 또 한잔 하잣고야"라 한 흥취를 그대로 누려본 것이다. 이 술에 취하면 이전의 어리 취한 생각들은 간 데 없고, 맑고 시원한 정신, 쇄락한 마음이 샘솟으리라. 그런 술은 어디에 있나?
양켠 언덕
한 띠의 푸른 물결 양켠 언덕 가을인데
바람 불자 보슬비 가는 배에 흩뿌리네.
一帶滄波兩岸秋 風吹細雨灑歸舟
-이인로, 〈소상야우(瀟湘夜雨)〉 1,2구.
바람 불자 보슬비 가는 배에 흩뿌리네.
一帶滄波兩岸秋 風吹細雨灑歸舟
-이인로, 〈소상야우(瀟湘夜雨)〉 1,2구.
푸른 물결이 띠를 이루며 밀려든다. 물결이 지나는 양켠 언덕이 마치 도미노가 쓰러지듯 단풍으로 물든다. 이 얼마나 근사한 연상이냐? 고기잡이 배는 이렇게 가을을 몰고 돌아온다. 바람도 뒤에서 슬쩍 등을 떠민다. 보슬비가 뱃전에 흩뿌린다. 하루 해도 어느덧 저물었다. 일을 마치고 묵묵히 고깃배를 물가에 맨다. 대숲에선 잎마다 가을을 앓는 소리를 낸다. 강물 위엔 어느새 안개가 쳐들어와 풍경을 차례로 지운다.
솔방울 주워
솔 아래서 솔방울 주워
차 끓이니 더 향기롭다.
松下摘松子 煎茶茶愈香
-혜심(慧諶), 〈묘고대상작(妙高臺上作)〉 3,4구.
차 끓이니 더 향기롭다.
松下摘松子 煎茶茶愈香
-혜심(慧諶), 〈묘고대상작(妙高臺上作)〉 3,4구.
묘고대(妙高臺) 위에서 골짝을 굽어본다. 산마루엔 구름이 걸려 못넘어 가고, 시냇물은 뭣이 그리 바쁜지 달려만 간다. 일부러 느릿느릿 걸어 솔방울을 줍는다. 차 화로에 불을 붙인다. 송진 내음을 내며 타닥타닥 솔방울이 튄다. 시냇물이야 바쁘던지 말던지, 서둘 일이 없다. 보글보글 찻물이 끓고, 한 김을 식혀 차잎을 내린다. 작은 찻잔에 따라, 눈으로 한번 마시고, 코로 한번 마시고, 비로소 입으로 머금어 내린다. 식도를 타고 향기론 샘물이 흐른다.
새로 씻긴 가을 빛
갑자기 부슬부슬 가랑비 지나더니
새로 씻긴 가을 빛이 임천에 드네.
忽有蕭蕭微雨過 洗新秋色入林泉
-충지(沖止), 〈복성도중(福城途中)〉 7,8구.
새로 씻긴 가을 빛이 임천에 드네.
忽有蕭蕭微雨過 洗新秋色入林泉
-충지(沖止), 〈복성도중(福城途中)〉 7,8구.
전남 보성 땅 가지산(迦智山) 보림사(寶林寺)를 찾아가는 길이다. 가을날 운수행각에 든 스님의 바랑이 가볍다. 강물을 끼고 구불구불 이어져, 가도가도 끝없는 3백리 길이다. 가을 바람에 미친 흥을 달랠 길 없더니, 생각잖은 가랑비가 부슬부슬 내려 마음을 차분히 가라 앉힌다. 비에 씻긴 숲에는 가을 빛이 성큼 짙어졌다. 가랑비가 가랑가랑 물감을 뿌렸던가? 붉고 노란 빛깔들을 칠해 놓고 갔구나.
서리 숲 새 소리
서리 숲 새벽 새 소리
나그네 잠은 바람에 놀래.
鳥語霜林曉 風驚客榻眠
-고조기(高兆基), 〈숙금양현(宿金壤縣)〉 1.2구.
나그네 잠은 바람에 놀래.
鳥語霜林曉 風驚客榻眠
-고조기(高兆基), 〈숙금양현(宿金壤縣)〉 1.2구.
문풍지에 우는 새벽 바람이 맵다. 고단한 초저녁 잠이 이 소리에 놀라 깬다. 새벽 달 처량한데, 먼동이 튼다고 새들이 지저귄다. 갈 길이 머니 어서 떠날 채비를 하라는 게로구나. 이불을 한켠으로 밀고 앉는다. 나는 누구냐? 어디로 가는가? 허망한 물음은 낙엽으로 뒹군다. 안개 자옥한 새벽길, 스산한 바람은 속살을 헤집는데, 또 한 가을이 길 위에서 이렇게 지난다. 희미한 달빛, 꾸다만 고향 꿈이 나뭇가지에 걸려 있다.
그림 속
시냇가에 말 세우고 갈 길 묻는데
이 내 몸 그림 속에 든 줄 몰랐네.
立馬溪邊問歸路 不知身在畵圖中
-정도전(鄭道傳), 〈방김거사야거(訪金居士野居)〉 3,4구
이 내 몸 그림 속에 든 줄 몰랐네.
立馬溪邊問歸路 不知身在畵圖中
-정도전(鄭道傳), 〈방김거사야거(訪金居士野居)〉 3,4구
소리 없이 진 잎으로 땅이 다 붉다. 빈손으로 돌아간 가을 숲은 훵하다. 친구를 찾아보고 오는 길. 길은 다리께서 두 갈래로 갈린다. 낙엽에 묻혀 잘 보이지 않는다. 사람을 만나면 물어 보자고 다리 위에 말을 세우고 섰다. 길 저편 끝으로 눈길을 주다 무심코 고개를 들었다. 하늘은 파랗고 산은 빨갛다. 땅 위 낙엽이 바람에 뒹군다. 그대로 한 폭의 그림이다. 한 폭 그림 속에 내가 서 있다. 가을이다.
옛 절
가을 풀, 고려 때 절
남은 비, 학사의 글.
秋草前朝寺 殘碑學士文
-백광훈(白光勳), 〈홍경사(弘慶寺)〉 1,2구.
남은 비, 학사의 글.
秋草前朝寺 殘碑學士文
-백광훈(白光勳), 〈홍경사(弘慶寺)〉 1,2구.
홍경사는 충남 성환에 있다. 고려 때 한림학사 최충이 왕명으로 비문을 지었다. 가을 풀이 나그네의 발목을 붙든다. 을씨년스럽다. 절은 하마 없어지고, 나그네 묵어가는 객관만 남았다. 동강 나 구르는 비석만이 지난 날의 영화를 증언한다. 애저녁에 마음 다친 나그네가 공연히 빈터를 서성거린다. 노을이 불탄다. 내 가슴도 탄다. 모든 것 허망하다고 가을 풀은 공연히 스스대는데, 고개 돌려 보면 긴 한숨처럼 땅거미가 밀려온다. 아!
한송정 달밤
달 흰 한송정 밤
물결 잔 경포의 가을.
月白寒松夜 波安鏡浦秋
-장연우(張延祐), 〈한송정(寒松亭)〉 1.2구.
물결 잔 경포의 가을.
月白寒松夜 波安鏡浦秋
-장연우(張延祐), 〈한송정(寒松亭)〉 1.2구.
한송정에 달이 떴다. 경포 호수에 가을빛이 물씬하다. 미풍에 파르르 떠는 잔잔한 물결. 함께 거닐던 옛 님은 어디 갔나. 갈매기만 그때처럼 끼룩끼룩 날고 있다. 그대 떠난 후 내 마음엔 물결 잘 날이 없었다. 달 떠오면 자꾸만 사무치는 그리움에, 오늘밤도 잠 못 이루고 호숫가를 서성인다. 달은 바다에도 뜨고, 호수 위에도 뜨고, 그대의 눈동자에도 뜨고, 마주 든 술잔에도 떠올랐거니. 그렇게 우리의 사랑은 깊어갔거니.
불청객
뜰 가득 달빛은 연기 없는 촛불인데
자리 드는 산빛은 청하지 않은 손님.
滿庭月色無煙燭 入座山光不速賓
-최충(崔沖), 〈절구(絶句)〉 1,2구.
자리 드는 산빛은 청하지 않은 손님.
滿庭月色無煙燭 入座山光不速賓
-최충(崔沖), 〈절구(絶句)〉 1,2구.
달빛이 곱다. 밤 깊어도 촛불 밝힐 일이 없다. 한 잔 술을 마시려 하니, 주섬주섬 끼어드는 손님들이 있다. 달빛 보며 같이 한 잔 하자는 수작이다. 앞산이 내 앞에 마주 자릴 잡더니, 옆 산도 어느새 슬그머니 끼어 든다. 솔바람은 제가 무슨 거문고라도 되는 줄 아는지 한 곡조 맑은 가락을 곁들인다. 달님을 촛불로 밝혀 증인으로 앉혀 놓고, 날 둘러싼 청산과 어깨동무를 하고, 솔바람 가락에 맞춰 개운하게 잘 놀았다.
가을 산 가을 강
산 모습 가을 들어 더욱더 좋고
강 빛은 밤인데도 외려 밝아라.
山形秋更好 江色夜猶明
-김부식, 〈제송도감로사차운(題松都甘露寺次韻)〉 3,4구.
강 빛은 밤인데도 외려 밝아라.
山形秋更好 江色夜猶明
-김부식, 〈제송도감로사차운(題松都甘露寺次韻)〉 3,4구.
낙엽 밟고 가을 산에 올랐다. 생각이 시원하다. 잎 다 내린 가을 산. 마음이 조촐해진다. 손에 쥔 것 다 놓고 하늘 향해 두 팔 올린 나무들. 가을 산은 목하 예배 중이다. 밤 강물은 이상한 밝음으로 빛난다. 어둠 속에 신비한 빛을 흘리며 몸을 푸는 강물. 이 밤 송도 감로사에서 나는 나와 정면으로 맞닥뜨린다. 덕지덕지 붙은 사나운 욕심 다 버리고, 잎 진 나무처럼 서고 싶다. 밤 강물로 흐르고 싶다.
백년간
인생 백년간
덧없기 바람 앞 촛불.
人生百世間 忽忽如風燭
-최유청(崔惟淸), 〈잡흥(雜興)〉 제 2수, 1,2구.
덧없기 바람 앞 촛불.
人生百世間 忽忽如風燭
-최유청(崔惟淸), 〈잡흥(雜興)〉 제 2수, 1,2구.
사람 살다가는 한 세상이 바람 앞 촛불과 다를 바 없다. 어디서 불어올 지 모를 바람에 혹시나 꺼질세라 전전긍긍 살아왔다. 죽기 전에는 만족함이 없을 부귀를 더 가지려 노심초사 마음을 졸여 왔다. 위태롭게 흔들리는 촛불처럼. 세상 길은 엎어지고 자빠짐이 많고, 그렇다고 훌훌 털고 저 신선의 꿈을 꿀 방법도 없다. 큰잔에 한잔 술을 가득 따라 놓고서 천장을 우러르며 큰 소리로 노래를 불러 보리라.
낙엽이
닭 울어 앞길 묻는데
누런 잎 날 향해 날려오네.
鷄鳴問前路 黃葉向人飛
-권필(權 ), 〈도중(途中)〉 3,4구.
누런 잎 날 향해 날려오네.
鷄鳴問前路 黃葉向人飛
-권필(權 ), 〈도중(途中)〉 3,4구.
하루 종일 걸어와 산 속 여관에 지친 몸을 뉘였다. 먼동이 트기 전에 어서 길을 재촉해야지. 닭 울음소리와 함께 길을 떠난다. 나그네 꾸다만 꿈이 제 발자국 소리에 놀라 저만치 달아난다. 서리 새벽, 길 끝은 아직도 보이지 않는다. 어디로 가야 하나? 길을 묻는 내게 낙엽이 자꾸만 입을 막는다. 길은 어디에도 있고 어디에도 없다고. 길 찾아 헤매는 것이 인생이 아니냐고. 물어 뭣하겠느냐고.
낙엽이
닭 울어 앞길 묻는데
누런 잎 날 향해 날려오네.
鷄鳴問前路 黃葉向人飛
-권필(權 ), 〈도중(途中)〉 3,4구.
누런 잎 날 향해 날려오네.
鷄鳴問前路 黃葉向人飛
-권필(權 ), 〈도중(途中)〉 3,4구.
하루 종일 걸어와 산 속 여관에 지친 몸을 뉘였다. 먼동이 트기 전에 어서 길을 재촉해야지. 닭 울음소리와 함께 길을 떠난다. 나그네 꾸다만 꿈이 제 발자국 소리에 놀라 저만치 달아난다. 서리 새벽, 길 끝은 아직도 보이지 않는다. 어디로 가야 하나? 길을 묻는 내게 낙엽이 자꾸만 입을 막는다. 길은 어디에도 있고 어디에도 없다고. 길 찾아 헤매는 것이 인생이 아니냐고. 물어 뭣하겠느냐고.
무정한 세월
건곤은 뜻이 있어 남자를 냈건만은
세월은 무정하여 장부를 늙게 했네.
乾坤有意生男子 歲月無情老丈夫
-조국빈(趙國賓), 〈향거자탄(鄕居自歎)〉 3,4구
조물주가 날 세상에 낼 때는 필시 무슨 뜻이 있었겠지. 지금껏 그 뜻을 헤아리려 애 쓰며 살아왔다. 하늘 뜻은 여태 깨닫지도 못했는데 얼굴엔 주름살만 남았다. 되돌아 보면 먹고 살려고 아웅다웅한 기억 밖에 없다. 타관 땅 전전하다 늙마에 고향을 찾았다. 조물주는 무슨 생각으로 이 몸을 이 세상에 냈던고. 낙망한 나머지 불쑥 던진 물음이다. 무정한 세월 앞에 마음 다친 중늙은이 하나가 앉아 있다. 아! 부끄럽다.
갈림길
뜬 구름 일정한 자태가 없고
곧은 길엔 갈래 길이 많기도 하다.
浮雲無定態 直道幾多岐
-장유(張維), 〈장부금주차백주운(將赴錦州次白洲韻)〉 5,6구
곧은 길엔 갈래 길이 많기도 하다.
浮雲無定態 直道幾多岐
-장유(張維), 〈장부금주차백주운(將赴錦州次白洲韻)〉 5,6구
구름은 제멋대로 떠간다. 간사한 사람 마음 같다. 곧게 뻗은 길도 외길로만 이어지지 않는다. 곳곳에 갈림길이요, 여기저기 샛길이다. 오늘 내 무심한 발걸음이 인생의 모습을 바꾸어 놓는다. 한 발짝인들 어이 경솔히 하랴. 세상사 뜬구름 같은데, 나는 또 갈림길에 서서 또 하나의 새 길을 걸어간다. 여보게, 친구! 뜬구름 보다 뜬금없이 자네 생각을 했네. 언제가 될지 기약할 순 없지만, 다시 만날 그때까지 몸 성히 계시게.
새지 않는 밤
일없이 무료하여 억지로 잠 청하다
옷 입고 되 앉으니 하루 밤이 일년 같네.
無事無聊强就眠 披衣還坐夜如年
-김수증(金壽增), 〈잡영(雜詠)〉
산 속에 혼자 산다. 삼동(三冬)을 침묵 속에 지나왔다. 밤에도 정신은 닦아 놓은 유리알 같다. 잠을 자야지. 이불 속에서도 생각은 꼬리를 물고, 얼음장 밑 개울물 소리까지 다 들린다. 다시 일어나 주섬주섬 옷을 입는다. 정좌를 하고 책상 앞에 사려 앉는다. 겨울밤은 밝아올 기미가 전혀 없다. 우주가 나를 덮씌우듯 짓눌러온다. 잠자던 정신이 화들짝 깨어나고, 사물이 내게 말을 걸어온다. 행간이 훤히 다 보인다.
콩 심은 데 콩 나고
갈대 뿌리에서 갈대 싹이 나오고
복사꽃에는 복숭아가 달린다.
荻根生荻芽 桃花結桃子
-이용휴(李用休), 〈만필( 筆)〉 1,2구
갈대 뿌리에서 대나무 싹이 나오는 법이 없다. 복사꽃 진 자리에 매실이 열리는 법도 있던가. 해는 동쪽에서 떠서 서쪽으로 진다. 오늘도 그렇고 내일도 그렇다. 언제나 그렇고 영원히 그렇다. 이런 것을 천리(天理)라 한다. 천리를 거스르면 재앙이 온다. 순천자(順天者)는 흥하고 역천자(逆天者)는 망한다고 했다. 가야할 길을 놔두고, 가서 안될 길만 골라가니 제 몸을 망치고, 제 집안을 망치고, 제 나라를 망친다.
거문고 연주
한 곡조 연주함은 무방하지만
알아들을 사람이 너무 적구나.
不妨彈一曲 지是少知音
-이자현(李資玄), 〈낙도음(樂道吟)〉 3,4구
투명한 아침, 흥을 주체치 못하고 거문고를 당긴다. 둥기둥 가락에 내 마음을 얹는다. 깊은 산 속이라 들어 줄 사람이 없다. 나는 그것이 때로 좀 서운하다. 거문고 소리는 내 마음이다. 세상을 향해 깨달음의 한 자락을 슬며시 펼쳐 보지만 아무도 내 말귀를 알아듣지 못한다. 하지만 산 빛 닮은 그 소리가 내 마음을 푸르게 해주니, 남이 알아주고 몰라주고는 내 관심사가 아니다. 울리는 가락에 온 숲이 춤춘다.
이 술 가져다가
동해 물 기울여 봄 술 담가서
티끌 세상 억조창생 취케 하련다.
欲傾東海添春酒 醉盡 中億萬人
-임숙영(任叔英), 〈등비로봉(登毗盧峰)〉 3,4구
비로봉에 올라보니, 푸른 동해가 한눈에 들어온다. 저 물로 술을 담궈, 명리에 취하고 탐욕에 절은 억조창생의 찌들은 마음을 깨끗이 헹궈냈으면 싶다. 정철이 〈관동별곡〉에서 "이 술 가져다가 사해에 고루 나눠 억조창생을 다 취케 만든 후에 그제야 고쳐 만나 또 한잔 하잣고야"라 한 흥취를 그대로 누려본 것이다. 이 술에 취하면 이전의 어리 취한 생각들은 간 데 없고, 맑고 시원한 정신, 쇄락한 마음이 샘솟으리라. 그런 술은 어디에 있나?
붉게 물든 마을
아득히 먼지 구름 자옥한 성
아스라히 붉은 잎 물든 마을.
渺渺黃雲城 依依紅葉村
-김시습, 〈한아서부경(寒鴉栖復驚)〉 5,6구
아스라히 붉은 잎 물든 마을.
渺渺黃雲城 依依紅葉村
-김시습, 〈한아서부경(寒鴉栖復驚)〉 5,6구
저 멀리 성은 누런 먼지 구름에 잠겨 있다. 바라다 뵈는 마을은 붉게 물든 잎으로 불이 붙었다. 부슬부슬 겨울을 재촉하는 비가 내리고, 갈가마귀 떼는 심란함을 견디지 못해 집 근처를 낮게 돌며 까왁까왁 까왁신다. 붉게 물든 단풍잎을 바라보다가 나는 문득 그대가 그립다. 까왁 까왁 까왁 비 맞고 짖어대는 네 울음소리에 내 애가 다 녹는다. 이 비가 긋고 나면 시리도록 파아란 하늘이 열리겠지. 서러운 빛깔이 짙어가겠지.
원시
楓葉冷吳江 蕭蕭半山雨
寒鴉栖不定 低回弄社塢
渺渺黃雲城 依依紅葉村
相思憶遠人 聽爾添鎖魂
楓葉冷吳江 蕭蕭半山雨
寒鴉栖不定 低回弄社塢
渺渺黃雲城 依依紅葉村
相思憶遠人 聽爾添鎖魂
벗에게
여관, 가물대는 등불, 새벽
외론 성, 부슬비, 가을.
旅館殘燈曉 孤城細雨秋
-월산대군(月山大君), 〈기군실(寄君實)〉 1,2구.
외론 성, 부슬비, 가을.
旅館殘燈曉 孤城細雨秋
-월산대군(月山大君), 〈기군실(寄君實)〉 1,2구.
명사만 토막 토막 이어 놓았다. 여관방. 등불이 가물거린다. `잔등(殘燈)`은 밤을 새워 방을 밝힌 등불이다. 새벽이 되도록 그는 왜 잠을 못 이루고, 객지의 가을 밤을 꼬박 새웠을까? 낯설고 물선 땅. 인적도 흔치 않은 외로운 성. 이 방의 불마저 꺼지면 세상이 다 어둠으로 지워질 것만 같아서였겠지. 창밖엔 부슬부슬 가을을 앓는 비가 내린다. 이제 추워지겠지. 여보게, 친구! 잘 지내시는가. 밤새 자네가 그리도 보고싶었네.
원시
旅館殘燈曉 孤城細雨秋
思君意不盡 千里大江流
旅館殘燈曉 孤城細雨秋
思君意不盡 千里大江流
찬 연기
빈 숲 밥짓는 연기 찬데
초가집 사립문은 닫혀 있다.
空林烟火冷 白屋掩荊門
-김정(金淨), 〈감흥(感興)〉 3,4구.
초가집 사립문은 닫혀 있다.
空林烟火冷 白屋掩荊門
-김정(金淨), 〈감흥(感興)〉 3,4구.
쓸쓸한 들판 너머로 해가 진다. 갈가마귀도 하루 일과를 마치고 나무 위에 모여 앉았다. 저렇게들 앉아서 또 추운 밤을 나겠지. 산자락 초가집에선 밥짓는 연기가 피어난다. 굴뚝을 채 벗어나기도 전에 낮게 깔려 흩어진다. 스산하다. 둘러봐도 사람은 하나도 보이지 않는다. 가시나무로 엮은 사립문은 꽉 닫혔다. 오늘은 어디서 묵어 가나. 걸음이 자꾸 망설여진다. 저만치서 땅거미가 온다. 어둠이 온다. 시리디 시린 풍경이다.
感興
落日臨荒野 寒鴉下晩村
空林烟火冷 白屋掩荊門
落日臨荒野 寒鴉下晩村
空林烟火冷 白屋掩荊門
외론 안개
외론 안개 옛 나루에 가로 걸리고
찬 해는 먼 산에 진다.
孤烟橫古渡 寒日下遙山
-정렴(鄭 ), 〈주과저자도향봉은사(舟過楮子島向奉恩寺)〉 1,2구.
찬 해는 먼 산에 진다.
孤烟橫古渡 寒日下遙山
-정렴(鄭 ), 〈주과저자도향봉은사(舟過楮子島向奉恩寺)〉 1,2구.
배타고 저자도를 지나 봉은사를 향해 가며 본 풍경이다. 강 건너 나루가 잘 보이지 않는다. 한 떼의 안개가 배 앞을 막아선다. 어디다 배를 대나. 난감하다. 노 젓는 소리 삐걱대고, 배는 안개 속으로 들어간다. 고개 돌려 보니 먼 산 너머로 해가 떨어진다. 안개가 감춘 나루를 찾느라 뱃길은 자꾸만 더뎌지는데, 봉은사는 배에 내려서도 한참 길이다. 외롭고 쓸쓸한 것이 인생길이다. 가을의 생각은 차다.
孤烟橫古渡 寒日下遙山
一棹歸來晩 招提杳靄間
一棹歸來晩 招提杳靄間
가을날의 이별
경황 없는 서편 교외의 이별
가을 바람 술 한 잔.
草草西郊別 秋風酒一杯
-하응림(河應臨), 〈송인(送人)〉 1,2구.
가을 바람 술 한 잔.
草草西郊別 秋風酒一杯
-하응림(河應臨), 〈송인(送人)〉 1,2구.
서쪽 교외에서 그대를 보낸다. 가을 바람은 어서 가자 옷 소매를 잡아챈다. 아니될 말일세. 내 술 한잔 더 받고 가시게. 불콰해진 얼굴, 눈물이 그렁그렁 한채로 그대는 떠났다. 나는 그대의 뒷모습이 조금씩 조금씩 작아지다가, 산 모롱이를 돌아서서 영영 눈앞에서 사라질 때까지 장승처럼 그 자리에 서 있는다. 혼자 돌아오는 길, 서산에 지는 해가 내 뒤로 긴 그림자를 만든다. 벗에게로 달려가는 내 마음을 알기라도 하겠다는 듯이.
草草西郊別 秋風酒一杯
靑山人不見 斜日獨歸來
靑山人不見 斜日獨歸來
고요한 마음
집 가난해 병 고치기 쉽지 않아도
고요한 맘 근심 잊기 충분하도다.
家貧妨養疾 心靜足忘憂
-정도전(鄭道傳), 〈산중(山中)〉 3,4구
고요한 맘 근심 잊기 충분하도다.
家貧妨養疾 心靜足忘憂
-정도전(鄭道傳), 〈산중(山中)〉 3,4구
소나무에도 가을빛이 깃들었다. 모처럼 고향에 돌아와, 손에서 책을 놓고 한가롭게 지낸다. 몸에 병이 있어도 약 살 돈이 없는 가난한 살림이지만, 내 마음에 고요가 있으니 근심을 잊고 지낸다. 대숲 사이로 작은 길을 내고, 산을 바라보자고 작은 정자를 얽었다. 얼마만에 맛보는 해방감이냐. 산을 마주보며 앉아 있는데 이웃 절의 스님이 글을 묻겠다고 날 찾아왔다. 심심해서 하루 종일 이런저런 이야기로 붙들어두었다.
弊業三峯下 歸來松桂秋
家貧妨養疾 心靜足忘憂
護竹開迂徑 憐山起小樓
隣僧來問字 盡日爲相留
家貧妨養疾 心靜足忘憂
護竹開迂徑 憐山起小樓
隣僧來問字 盡日爲相留
가슴 속의 책
평생의 묵은 버릇 스러져 간 데 없고
가슴 속엔 만권 책이 있을 뿐일세.
多生結習消磨盡 只有胸中萬卷書
유방선(柳方善), 〈즉사(卽事)〉 3,4구
가슴 속엔 만권 책이 있을 뿐일세.
多生結習消磨盡 只有胸中萬卷書
유방선(柳方善), 〈즉사(卽事)〉 3,4구
찾아오는 사람 없고, 나갈 일도 없다. 골목길엔 잡초가 무성하다. 세간 없는 빈방엔 주인 혼자 앉아 있고, 마당엔 나무 한 그루, 가지 끝엔 조각 구름 하나가 걸려 있다. 손에 쥐었던 것 다 놓고 나니 허전하고 또 후련하다. 20년 가까운 차가운 유배 생활은 가슴 속에 가시처럼 얽혀 있던 욕심과 번뇌마저 다 가져가 버렸다. 빈 껍데기 같은 몸뚱이로 잡초 속에 혼자 산다. 베풀어 쓸 곳 없어도, 가슴 속에는 보석처럼 빛나는 만권의 책이 있다.
門巷年來草不除 片雲孤木似僧居
多生結習消磨盡 只有胸中萬卷書
多生結習消磨盡 只有胸中萬卷書
술이 있다해도
술이 있다한들 뉘와 함께 마실까
비바람이 추위를 재촉할까 근심하네.
縱有盃尊誰共對 已愁風雨欲催寒
박은(朴誾), 〈재화택지(再和擇之)〉 3,4구
비바람이 추위를 재촉할까 근심하네.
縱有盃尊誰共對 已愁風雨欲催寒
박은(朴誾), 〈재화택지(再和擇之)〉 3,4구
잎은 어느새 다 져 버렸다. 낙엽은 문 앞까지 밀려와 답쌓인다. 들창을 여니 산빛이 핼쓱하다. 어제 분 비바람이 남은 잎을 마저 떨구고, 겨울이 눈 앞에 왔음을 일러준다. 나갈 일 없어 굳게 닫힌 문 안에서 나는 혼자다. 설령 술동이에 묵은 술이 있다 해도, 함께 마실 그 한 사람이 없다. 가난이야 선비의 숙명이 아닐 것인가. 징징거리지 않겠다. 가슴 속에 서린 근심을 한 주먹에 움켜서 내던져 버리리라.
深秋木落葉侵關 戶유全輸一面山
縱有盃尊誰共對 已愁風雨欲催寒
天應於我賦窮相 菊亦與人無好顔
撥棄憂懷眞達士 莫敎病眼만長산
縱有盃尊誰共對 已愁風雨欲催寒
天應於我賦窮相 菊亦與人無好顔
撥棄憂懷眞達士 莫敎病眼만長산
첫 눈
새는 산 속의 나무를 잃고
중은 돌 위의 샘을 찾는다.
鳥失山中木 僧尋石上泉
이숭인(李崇仁), 〈신설(新雪)〉 3,4구
중은 돌 위의 샘을 찾는다.
鳥失山中木 僧尋石上泉
이숭인(李崇仁), 〈신설(新雪)〉 3,4구
날이 꾸물꾸물 하더니 소담스레 눈이 내렸다. 길 가다 만난 첫눈에 나그네의 발길만 공연히 바쁘다. 가만 보니 바쁜 것은 나그네만이 아니다. 갑작스레 펑펑 내린 눈이 산 속 새의 둥지를 덮고, 바위 틈의 샘물도 지워버렸다. 내 집이 어딜까. 샘물이 어디 갔나. 먼 숲에서 흰 연기가 올라간다. 반갑다. 흰눈에 덮인 순결한 대지. 그 위에 첫발자국을 찍으며 간다. 묵은 증오와 미련 다 지우며, 소망처럼 내리는 첫눈을 본다.
蒼茫歲暮天 新雪遍山川
鳥失山中木 僧尋石上泉
飢烏啼野外 凍柳臥溪邊
何處人家在 遠林生白煙
鳥失山中木 僧尋石上泉
飢烏啼野外 凍柳臥溪邊
何處人家在 遠林生白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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