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시이야기 ▒

삶의 갈피 갈피에 켜켜히 쌓인 사랑 [한국의 애정한시]

천하한량 2007. 5. 4. 00:17
눈썹 그리는 여인
    
                                    銀臺仙 2수 /  姜渾                                    
 
 
천상의 선녀인가 자태가 옥 같구나                          
이른 새벽 거울 보며 눈썹을 그린다오.                      
막걸리에 취한 듯 발그레한 그 얼굴에                       
봄바람 솔솔 불어 검은 머리 흩날리네.                      
姑射仙人玉雪姿  曉窓金鏡畵蛾眉
卯酒半산紅入面  東風吹징綠參差
 
 
고야선인姑射仙人은 《장자》 〈소요유〉편에 나오는 피부는 눈과 같고 아름답기는 처녀와 같으며, 오곡을 먹지 않고 바람을 들이마시며 이슬을 마신다는 신인神人/ 묘주卯酒는 막걸리/ 참치參差는 가지런하지 않은 모양.
 
 
은대선銀臺仙은 성주星州의 유명한 기생이었다. 그녀의 아름다운 모습을 언어로 그려낸 한 폭의 미인도다. 백설 같이 흰 살결, 옥 같은 그 자태. 그 자태는 장자가 말한 묘고야산의 선녀가 환생한 듯 눈이 부시다. 이른 새벽 일어나 하는 눈썹 단장은 누굴 위한 것일까? 그만 부끄럽게 내달린 마음 속 님 생각에 수줍게 두 뺨이 타오르고 말았다. 봄 바람도 짖궃게 그 뺨을 간지르며 삼단 같은 귀밑 머리털을 날리우고 있다.
 
봄은 설레임의 계절이다. 까닭도 모를 공연한 기대에 가슴은 울렁인다. 이 봄엔 늠름하신 님이 흰 말을 높이 타고 문득 나타나실 것만 같은 생각, 왠지 그런 예감이 그녀의 뺨을 발그레 물들였다. 그 마음 알겠노라며 간지르는 봄 바람의 심술궃은 장난에 아가씨의 마음은 벌써 거울 앞을 떠난지 오래다. 경 속에 정이 의연히 드러나는 데에 작품의 묘가 있다.
 
허균의 《국조시산》에는 제목이 〈정성주기呈星州妓〉로 되어 있다.  옛날의 명기는 오늘날의 매춘부와는 달라 정조가 있었다. 그리고 한번 정을 주면 그 소실로 들어가는 것이 상례였다.
 
 
검은 머리 곱게 빗고 누각에 기대                           
 쇠 피리 빗겨 부는 부드러운 손.                            
관산월 한 가락에 그대 그리워                              
두 줄기 맑은 눈물 떨구었다오.                             
雲환梳罷倚高樓  鐵笛橫吹玉指柔
萬里關山一輪月  數行淸淚落伊州
  
운환雲환은 여인의 아름다운 머리칼/ 소梳는 빗질함/ 철적鐵笛은 쇠 피리/ 횡취橫吹는 빗겨 불다/ 관산월關山月은 악부시의 이름/ 이주伊州는 저도 몰래 흐르는 눈물.
 
 
역시 은대선을 노래한 둘째 수이다. <관산월> 구슬픈 한 가락에 얼음 같이 맑은 눈물이 떨어진다. 달빛 받아 더욱 영롱한 눈물. 가녀린 손가락도 아지못할 슬픔에 하릴 없이 곡조 속으로 잠겨만 간다. 윤기 나는 머리를 곱게 빗어 땋고서 누각에 기대 앉아 피리 부는 여인. 피리 소리는 달에까지 사무치고, 그 소리에 달빛 조차 느끼며 서쪽 나라로 떠내려 간다.
 
그녀는 이 밤 저 높은 누각에서 왜 피리를 불고 있을까? 누구를 그리워 하며 울고 있을까? 그녀는 필시 전생에 월궁의 항아 아씨였을 것이다. 월궁에서의 남 모르는 사랑 때문에 인간 세상에 귀양 온 선녀일 것이다. 하염 없이 우러러도 풀릴 길 없는 그리움, 손을 아무리 내밀어도 닿지 않는 막막함, 그 그리움과 막막함을 피리 소리에 얹어 천상의 님께로 띄우는 것일게다.
 
일반적으로 한시는 전구轉句에 묘처가 있다. 위 3구 `萬里關山一輪月`은 `만리 떨어진 관문과 산에 둥글고 밝은 달`의 의미이다. 그러나 이는 실제 `관산월`이라고 하는 이별을 상심하는 가락의 피리에 맞춰 부는 악곡 이름 위에 萬里와 一輪을 삽입하여 님과 내가 멀리 떨어져 있음을 상심하는 심층적 의미를 나타내고자 한 것이다.
 
낙이주落伊州는 고사가 있다. 4구를 직역하면 `몇 줄기 맑은 눈물 이주에 떨어지네`가 된다. 이주는 <이주령伊州令>이란 악곡의 가사를 말한다. 당나라 때 범중요范仲요 의 처가 멀리 벼슬살이 가서 오래도록 돌아오지 않는 남편에게 부친 시이다. 그 가사는 "가을 바람 어제 밤에 주렴 장막 뚫고 오니, 규방은 더욱더 을씨년스럽네. 西風昨夜穿簾幕, 閨院添蕭索"이라 하였다. 그러므로 위 네째 구는 여인의 님을 향한 쓸쓸하고 외로운 마음이 저도 모르게 눈물을 흐르게 하였다는 것을 `낙이주落伊州`라고 돌려서 표현한 것이다.
 
<이주령伊州令>에는 다시 다음과 같은 일화가 전한다. 처음 상주相州에 녹사錄事 벼슬을 살러 간 남편이 오래도록 돌아오지 않자 그녀는 위 시를 지어 보내면서 편지를 동봉해 보냈는데, 실수로 伊자에 사람 인을 빼고 尹으로 써서 보냈다. 이를 받아 본 남편은 그녀에게 보낸 답장에서  "생각컨데 그대에겐 남자가 필요 없나봐. 料想伊家不要人"라고 우스개로 대답하였다. 그러자 그녀는 "그대와 헤어진 뒤 몇 해가 되었는데, 제 옆엔 아직 어린 아이만 자고 있죠. 共伊間別幾多年, 身邊少個人兒睡"라고 재치있게 회답하였다. 비록 헤어질 때 배 속에 있던 아이가 벌써 자라 옆에서 자고 있지만 남자가 없는 것이나 다름 없고, 또 남자가 필요 없다는 말이 아니라 필요하다는 것이니 하루 빨리 돌아와 함께 지내기를 바란다는 마음을 넘치도록 가득 담아 보냈던 것이다.
 
한시에서 이러한 앞선 고사를 원용하는 시작법은 매우 일상적인 것이다. 이러한 전고어는 단순히 의미 전달을 간결하게 하는 외에, 그 고사를 함께 연상시킴으로써 독수공방의 외로움을 교묘히 묘사하여 그 시의 함축미를 더욱 깊고 유장한 것으로 만들어 준다. 허균은 이 시를 평하기를 "원한의 정이 한 웅큼 움켜진다. 恨情可국"이라 하였다.
 
후대에 와서 이주란 말은 멀리 떠난 남정을 그리워 하는 규정閨情의 의미로 굳어지게 되었다. 王維도 <이주가伊州歌>를 지었는데 참고로 보이면 다음과 같다.
 
 
가을 바람 부는 달밤 괴로이 그리노니                     
고향 떠나 종군한지 십년도 더 되었네.                    
떠나시던 그 날에 은근히 부탁했지                        
기러기 올 때마다 자주 편지 부치라고.                    
淸風明月苦相思  蕩子從戎十載餘
征人去日慇懃囑  歸雁來時數附書  

질삼하는 처녀 
 
黃城俚曲 / 金려 
 
 
규전의 아가씨 그 모습 꽃과 같네                           
돌 우물 남쪽 집이 태어난 곳이라죠.                        
탐스런 검은 머리 손질도 못하고서                          
달밤에 물을 길어 삼단을 축인다오.                         
葵田處女貌如花  石井南邊是파家
綠빈雲환渾不整  月中汲水曉구麻
 
 
규전葵田은 제주도의 지명/ 녹빈운환綠 雲 은 소녀의 윤기 나는 머리와 쪽/ 급수汲水는 물을 긷다/ 구마  구麻는 삼단을 축임.
 
 
규전 마을을 지나다가 길삼하는 처녀를 보았다. 그녀의 얼굴이 너무나 아름다워 꽃이 그녀인지 그녀가 꽃인지 분간할 길이 없다. 나그네는 그 얼굴에 반하여 물끄러미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집은 돌 우물가 나즈막한 초가집이었다. 바람에 흩날리는 구름 같은 귀밑머리.
자다가 일어난 것일까. 그러고 보니 그녀는 길삼에 열중하느라 머리 손질도 제대로 하지 못한 것이었다. 돌우물에는 때 마침 보름달이 둥실 떠올랐다. 우물에 뜬 달 빛, 그 달빛 마냥 함박진 소망을 동이 가득 길어 그녀가 삼단을 축이고 있다. 달빛 흥건한 물에 적신 삼단에서 삼실을 뽑아 그녀는 길삼을 하리라. 그 베로는 누굴 위해 옷을 지을까.
 
이 장면을 굳이 그림으로 그린대도 달밤 아가씨에게 넋을 잃은 나그네가 들어설 곳은 어디에도 없다. 나그네는 어디까지나 장면 밖에서 물끄러미 아가씨의 하는 양을 건네다 볼 뿐이다. 달밤에 남녀가 무슨 말을 건네느냐고. 그게 어디 될 법이나 할 소린가. 나그네가 본 것은 우물에서 물을 길어 삼단을 축이고는 졸린 눈을 비비며 집으로 들어가는 천진스럽도록 앙징맞은 그녀의 실루엣일 뿐이었겠다. 아름다운 아가씨가 머리 손질도 아니하고 남들이 고이 잠든 밤중에 질삼을 하려고 삼을 축이는 모습을 보며, 그녀에 대해 궁금해 하는 나그네의 설레임을 말 밖에 잘 담아낸 작품이다.
 
위 두 작품은 일반적인 한시의 미의식과는 자못 다른 풍격을 보여준다. 공자가 {예기}에서 `정욕신 사욕교 情欲信 辭欲巧` 즉 정감은 진실하고 문사는 교묘해야 한다는 이론을 제창한 이래 후대 여러 사람에 의해 이와 비슷한 논의가 제기되어 왔다. 그러나 명말 원굉도袁宏道는 이를 반대하여 `독서성령 불구격투 獨抒性靈 不拘格套`를 주창하였다. 이는 진부한 투식에 얽매이지 않고 진실한 감정을 선명한 개성에 담아 노래한 것이야 말로 진짜 시임을 주장한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도 조선 후기 영정 시대 이후에 이런 풍이 크게 성행하였다. 이 시기의 시학은 수사적인 미를 중시하는 당시의 분위기에서 벗어나 진솔함의 미를 추구하는 경향을 보여 주었다. 위 두 편의 시는 김려의 <황성리곡黃城俚曲> 239 수 가운데서 가려 뽑은 것이다. 원시엔 제목이 없으나 번역 상 제목을 붙였다. <황성리곡>은 전라도 지방 백성들의 토풍민속과 어려운 생활상을 노래한 연작시이다.    
 
 
 
점심 내가는 소녀
 
黃城俚曲  / 金려
 
 
청 삽살이 앞세우고 흰둥이 뛰따르고                        
밥 내가는 저 아가씨 열 여섯 살이라오.                     
땋아 나린 머리 위로 둥근 광주리 이고서                     
아버님 시장할까 발걸음 재촉하네.                          
靑엄前行白엄隨  小娘年紀破瓜時
아頭戴着圓점去  忙진阿다午엽飢
 
 
청엄靑엄은 푸른 삽살개/ 파과破瓜는 여자 나이 열 여섯 살. 외 과瓜자를 파자 하면 여덟 팔자가 두 개가 되므로 하는 말/ 아두아頭는 길게 땋은 머리/ 대착戴着은 머리에 이다/ 원점圓점은 대로 엮어 만든 밥을 담는 둥근 그릇/ 망진忙진은 바쁘게 걸음을 재촉함/ 아다阿다는 아버지/ 오엽午엽은 점심밥.
 
 
멍멍 짖는 삽살이 소리 따라 눈 길이 멎었다. 푸르고 흰 삽살이가 어여쁜 아가씨의 앞 뒤에서 장난치며 뛰놀고 있다. 눈두렁 밭두둑 사이로 새참 광주리를 이고 가는 아가씨. 헛디딜까 눈매를 곱게 내리 깔고서 이마에는 땀방울이 송글송글 맺혔겠다.
 
길 가던 나그네는 발 길을 잊고, 그 시선도 아랑곳 없이 그녀는 발길을 서두른다. 아버님이 얼마나 시장하실까? 이른 아침 들 일을 나오셨으니. 아니 그녀는 제 등 뒤로 쏟아지는 나그네의 눈길이 화끈거려 걸음을 재촉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삼단 같이 길게 땋아 내린 머리는 먼 눈길에도 앳띤 처녀임을 말해주고, 기울 듯 흔들리는 걸음을 보면 달려가 광주리를 들어도 주고 싶건만, 그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아가씨는 총총 걸음으로 가 버리고 말았다.
 
밥 광주리를 이고 잰 걸음으로 가는 아가씨의 옆으로 삽살이가 따라 가는 전원의 풍경은 너무나도 상징적이어서 아름답다. 건강하고 발랄한 청춘의 약동이 숨 쉬는 여름 날 한낮의 소묘다. 이 시의 표현은 예술성 보다는 진솔에 비중을 두었다.
 

절구질 하는 아가씨
 
杵女/ 柳永吉
 
 
 
오르락 내리락 절구 찧는 고운 팔목                         
윗 저고리 때로 들려 흰 살결 드러나네.                     
월궁에서 불사약을 많이 찧은 탓이리라                      
인간 세상 절구질도 그 수법 그만일세.                      
玉杵高低弱臂輕  羅衫時擧雪膚呈
蟾宮慣搗長生藥  謫下人間手法成
 
 
옥저玉杵는 옥절구/ 약비弱臂는 연약한 팔뚝/ 설부雪膚는 눈 같이 흰 살결/ 섬궁蟾宮은 달의 이칭/ 관慣는 손에 익어 능숙함/ 적하謫下는 귀양 내려 옴.
 
 
기계문명이 발달하기 이전 가난한 가정에서는 곡식의 도정을 대부분 여인네들이 직접 절구질로 해결하였다. 여리디 여린 섬섬옥수는 절구공이가 무겁기만 할텐데도 그녀의 절구질은 고저완급의 박자를 잘도 맞추고 있다. 그녀의 능숙한 절구질로 보아 그녀는 천한 신분의 여인임을 알 수 있겠다. 그러나 그 자태만은 선녀와도 같았다.
 
고운 그 자태를 넋놓고 바라보다가 상상은 나래를 달아, 시인은 그녀가 인간 세상에 귀양 온 월궁 항아가 아닌가 의심하였다. 예전 항아란 여인이 있었다. 그녀는 남편 후예가 서왕모에게 부탁하여 구해온 불사약을 훔쳐 먹고 월궁으로 달아나 선녀가 되었다. 그런데 혼자서만 장생불사 하겠다는 그 소망은 애초 부질 없는 짓이었다. 천추만년 긴 세월을 월궁 토끼와 계수나무 아래 마주 서서 절구에 장생약을 찧으며 보냈으니 말이다. 아가씨의 저 능숙한 절구질, 아 그녀는 필시 전생에 월궁의 항아 아씨였을 터이다. 그녀는 무슨 죄를 지어 다시 인간에 귀양을 오게 되었을까? 불사약을 훔쳐 먹은 죄는 아니였을지? 그러나 그 귀양은 오히려 설레이는 기쁨으로 맞이할 것은 아니었던가.
 
짖궃은 남정네의 눈길은 그녀의 가녀린 팔목에 머물지 않고, 공이를 치켜들 때마다 보일듯 아찔한 그녀의 희디 흰 살결에 붙박혀 있다. 공이가 솟구칠 때마다 괜스레 그렇게 두근대는 가슴 따라 심장의 고동 소리만 커져가고 있다. 시를 읊고 있노라면 절구소리와 함께 고동 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다. 그러나 이 시 역시 행간에 그녀의 근면성을 칭찬한 것이니, 맹자의 `충실지위미充實之爲美`의 아름다움을 포착한 것이다.
 
무름개 쓴 아가씨 
 
贈美人 / 趙徽
                                       
 
 
 
길 나들이 부끄러워 무름개를 쓴 아가씨                     
맑은 밤 구름 새로 달빛이 비취는듯.                        
꽉 동여맨 가는 허리 호리호리 한 줌이요                    
비단 치만 새로 지은 석류화 천이로세.                      
惹羞行露護氷紗  淸夜輕雲漏月華     
約束蜂腰纖一국  羅裙新전石榴花
 
 
행로行露는 길에 내린 이슬/ 빙사氷紗는 얼음 같이 깨끗하고 아름다운 흰 천/ 월화月華는 달빛/ 약속約束은 허리를 꽉 동여 맴/ 봉요蜂腰는 벌의 허리 같이 호리호리한 허리
 
 
오랜 만의 나들이가 수줍어 흰 깃으로 무름개를 하고 나온 아가씨. 그러나 한껏 맵씨를 부려 늘씬하게 동여 맨 허리는 바람에도 금새 꺾일 듯 가냘프기만 하다. 얼음 같이 깨끗하고 흰 천으로 된 무름개 사이로 은은히 비치는 아가씨의 얼굴은 선녀가 하강한듯 아름다웠다. 그 아름다움을 어떻게 말로 형용할 도리가 없어 밤 하늘에 밝은 달이 엺은 구름 사이로 비추이는 것에 비유하였다.
 
그러고 보니 그녀는 마냥 수줍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오랜 만의 나들이에 석류화 고운 천을 곱게 말라 지은 비단 치마를 입고 있질 않은가. 한껏 맵씨를 뽐내려 허리도 늘씬 동여매고서 말이다. 남정네의 짖궃은 눈길도 그녀에겐 두방망이질 하는 흥분이었을테니까. 바라보는 남정네나 수줍어 무름개를 더 가리우는 아가씨나, 어디에고 잡스런 마음이 끼어들 데 없는 청순한 한 폭의 그림이다. 
 
치밀하고 정치精緻한 표현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1구의 행로行露는 《해동시선》
에는 행로行路로 되어 있는데 역시 말이 통한다. 행로行露는 길에 내린 이슬로, 여자가 이슬이 내리는 시간에 이슬을 맞으며 다닌다는 것은 좋지 못한 행실을 뜻한다. 이를 부끄러워 한다는 것은 예로써 자수自守하는 여인임을 암시한 것이다. 이 말은 {시경} [행로]편에 보인다.  한국적인 미는 서구의 경우처럼 노출에 있지 않다. 망사나 한산 세모시 같이 은은하게 비치어 보일 듯 보이지 않고 잡힐 듯 잡히지 않는데에 있다. 빙사와 월화는 그런 의미에서 아주 절묘한 조응을 이루었다.
 
이 작품은 유몽인의 《어우야담》에 실려 전한다. 조휘趙徽란 사람이 서장관書狀官이 되어 북경에 갔을 때, 길에서 미인을 만났는데, 그녀는 엷은 망사로 얼굴을 가리고 있었다. 그 모습에 반한 그가 흰 부채에 적어 주었다는 바로 그 시이다. 언어예술면에서만 본다면 이 작품은 격이 그리 높다고 볼 수 없다. 그러나 유가의 미학사상에 바탕을 두어 인격미의 표현에 주안을 두고 있어 돈후한 맛이 있다. 이른 바 맹자가 말한 `충실지위미充實之爲美`가 바로 미의 기준이라 할 수 있다.
 

달을 바라보며  
 
                          待月有懷/ 李정                            
 
 
 
높다란 누각 위엔 달이 휘영청                                   
둥그런 옥창 가에 기대 섰으리.                                 
아리따운 그 미인 바로 내 사랑                                 
아득해라 가을 물이 가로 막혔네.                               
차고 있는 패란은 아니 보여도                                   
그윽한 난초 향내 품겨 오는듯.                                 
그리워서 어느 곳을 바라보아도                                 
애닯어라 그 역시 하늘 끝일 뿐.                                
염염高樓月  團團玉窓裏
娟娟一美人  渺渺隔秋水
인佩不可見  蘭香空在玆
思之望何處  腸斷亦天涯
 
 
 
염염염염은 달빛이 물결 위에 출렁거림/ 단단團團은 둥근 모양/ 연연娟娟은 아름다운 모양/ 묘묘渺渺는 아득함/ 인패인佩는 장식으로 두름 / 재자在玆는 여기에 있다.
 
 
처음 네 구절의 앞에 나란히 형용사를 얹어 시상을 점점 고조시켰다. 강물 위에 비치어 물결에 출렁이는 밝은 달이 있고, 달처럼 둥근 창이 있으며, 그 안엔 달덩이 같은 미인이 있다. 그러나 그녀와의 사이에는 손끝만 갖다 대어도 한기가 오싹한 가을 물이 가로 놓여 있어 먼 빛으로 그저 바라볼 뿐 안타까운 그 마음은 전할 길 바이 없다.
 
예전엔 난초를 허리에 차고 자신이 지닌 바 아름다운 바탕을 뽐내었었다. 깊은 가을 밤의 난초 향기 속에 그녀는 잠 못들고 옥창 가에 오두마니 앉아 있다. 먼 데서 바라보는 눈에 그녀가 차고 있는 난초가 보일 리 없건만 그 은은한 내음은 바람결에 날려 내게로 오는 것만 같다. 아무리 그렇키로 그녀야 가을 물 이 편에서 이렇게 그립고 가슴 조이는 안타까운 마음이 있는 줄 알 리 없으니 하릴 없이 하늘 저편을 바라 보며 한숨 지을 뿐이다.
 
봄날의 나른한 오후와 가을의 달 밝은 밤은 사랑에 겨운 남녀를 위해 마련된 설레임과 그리움의 시간들이다. 그 애틋한 마음의 그리매야 남녀의 구별이 있을 수 없고, 가슴 두근대는 긴장과 잔잔한 흥분이 있을 뿐이다.
 
이 시는 끝 구에 여운의 함축이 깊다. `말은 다하였어도 뜻은 다함이 없다. 言有盡而意無窮`는 말 그대로이다. 이곳 저곳 어디를 바라 보아도 하늘의 끝만 보일 뿐 님은 찾을 길이 없다는 의미이다. 휘영청 밝은 달의 경과 그윽한 난초 향내가 품겨오는 듯한 정이 교융되어, 어느 곳을 바라보아도 역시 하늘 끝일 뿐의 의경을 이루었다.
 
그러나 이 시는 만당晩唐 오대五代 서촉西蜀의 [화간사파花間詞派]의 기풍이 있다. 그는 왕족으로 생활의 어려움을 모르고 종일 가무와 연음宴飮으로 환락 속에 지냈다. 때문에 시의 표현은 매우 아름다우나 내용이 공허하고 염려艶麗한 맛이 없지 않다.

 
잠옷만 입고서 
                     
美人圖 / 魚無迹
                                     
 
 
규방에서 잠 깬 미인 날씨도 찬데                      
검은 머리 둘러 싸인 잠옷 차림에,                     
덧 없이 봄 다 갈까 근심스러워                        
매화가지 꺾어 들고 홀로 서 보네.                     
睡起重門심심寒  빈雲료繞練袍單
閑情只恐春將晩  折得梅花獨自看
 
심심(水+念)은 서늘한 기운이 끼쳐옴/ 빈운(살적 빈)雲은 미인의 머리털을 푸른 구름에 비유하여 이른 말/ 요요(에워쌀 요)繞는 둘러 쌈/ 한정閑情은 정을 가만히 억제함/ 연포단練袍單는 흰 명주로 만든 홑적삼. 여기서는 잠옷. 
 
 
 
깊은 규방의 아가씨는 일이 없어 늦도록 잠을 자다 깨었다. 그녀를 깨운 것은 선듯한 한기였다. 그러나 그 한기는 겨울의 추위와는 사뭇 다른, 약동하는 생기를 머금은 봄날의 내음이었다. 그녀는 귀밑머리를 날리우며 잠옷 바람으로 뜰에 나섰다. 잠도 채 덜 깬 그녀. 아무도 의식치 않고 약간은 흐트러진 매무새로 뜰에 나선 그녀. 그녀는 뜰에 매화가지를 보다가 어느새 봄이 깊어졌음을 알았다. 매화 가지를 꺾어들고 이를 가만히 바라보는 그녀. 매화꽃이 하마 시들듯 내 아름다운 청춘의 날도 이렇게 시들까 싶어 갸우뚱 속이 상해 바라보는 그녀.
 
시의 안자眼字는 3구의 `한정`이다. 여기서 `한閑`은 한가롭다는 의미가 아닌 `막는다`는 의미이고, `정情`은 남녀간의 애정을 뜻한다. 그러므로 `한정`이란 `한가로운 정서`로 새겨서는 안되고, `마음 깊이 솟아나는 애틋한 연정을 가만히 절제한다`는 뜻이다. 도연명의 [한정부閑情賦]가 바로 이런 의미이다.
 
그녀는 매화 가지를 꺾어들며 또 봄이 그대로 가버릴까 조바심을 하면서도 이를 가만히 마음 속으로 다잡아 절제하고 있는 것이다. 그녀에게 있어 다만 두려운 것은 봄이 덧 없이 그렇게 가버리는 것이다. 봄 날 깊은 규방 속 아가씨의 싱그런 아름다움과 이성을 향한 순진한 사랑의 마음을 무심한 한 폭의 화면으로 잘 잡아내었다.
 
허균은 《국조시산》에서 이 시에 대해 "속어와는 크게 달라 당시에 크게 핍진하다. 殊非俗語, 大逼唐人"이라 하였다. 이 시의 의경意境이 일품임을 높이 평가한 것이다. 의경의 기본 요소는 경과 정이 교융하는데서 비롯된다. 다시 말해 시인의 주관 정의와 객관적 경물 형상이 서로 만나 각자의 경계가 무너져 하나로 합일되는 경지가 바로 의경이다. 이 작품은 이런 의미에서 참으로 함축온자含蓄蘊藉의 미가 풍부하다.
 

어여쁜 여인     
              
             美人篇 / 申欽                   
 
 
 
어여쁜 얼굴에다 얌전한 맵시                                      
고운 살결 더더욱 어여쁘구나.                                  
화장한 그 자태는 초생달인듯                                   
얇은 옷은 매미의 날개 같구나.                                 
웃으며 칠향거에 오르더니만                                    
번화한 큰 거리로 수레를 모네.                                 
중매쟁이 요청이야 왜 없었으리                                 
하간의 돈 따윈 세지도 않았다오.                               
멋쟁이 오릉의 젊은 도련님                                     
여린 애만 공연히 졸이신다네.                                  
靡顔旣綽約  이理亦便娟 (윤기 흐를 이)
粧成效初月  衫薄擬輕蟬
笑上七香車  長驅官道邊
豈無媒者求  不數河間錢
翩翩五陵少  柔腸空自煎
 
 
미안靡顔은 아름다운 얼굴/ 작약綽約은 정숙하고 아름다운 모양/ 이리이理는 살결이 곱고 윤기가 흐름/ 경선輕蟬는 매미의 날개처럼 가볍고 하늘하늘한 옷/ 칠향거七香車는 일곱가지 향나무로 깎아 만든 화려한 수레/ 관도官道는 나라에서 길을 내고 수선한 거리/ 하간전河間錢은 오입장이들이 여인을 유혹하기 위해 내놓는 돈/ 오릉소五陵少는 오릉의 젊은이. 오릉은 장안에 있던 부유층들이 유락을 즐기던 곳/ 공자전空自煎은 공연히 마음을 졸임.
 
 
 
얌전한 맵시, 얼음같이 흰 살결의 아가씨가 초생달 같은 자태로 매미 날개처럼 얇은 옷을 입고 화려한 수레에 올라 번화한 거리를 지나고 있다. 그 모습에 거리의 시선이 함빡 모아졌던 것은 물론이다. 그러나 아가씨는 도도한 표정으로 자신에게 쏟아지는 시선은 본 체도 않고 간다.
 
오릉은 당나라의 화려한 거리 이름이다. 이곳을 출입하는 젊은이는 요새 말로 모두 쟁쟁한 문벌과 재산을 자랑하는 재벌 2세 들이다. 아름다운 그녀, 그러나 도도한 그녀를 오릉의 신출내기 오입쟁이들도 어찌해 볼 도리가 없다. 돈으로는 그녀의 뜻을 움직여 볼 길이 없고, 한다 하는 중매쟁이를 내 세워 보았자 저쪽에선 아무런 반응도 없다. 그녀는 어디로 가는 것일까. 왜 하필 번화한 거리를 나풀나풀 살결이 다 비치는 옷을 걸쳐 입고, 온 거리의 젊은이들을 다 설레게 해 놓고 자신은 정작 눈길 한 번 주지 않고 어디로 가는 것일까.
 
예전 사공도司空圖는 "깊은 맛을 갖춘 되에야 시를 말할 수 있다.辨於味而後可以言詩"고 하여 시의 감상은 단순한 예술 형상을 벗어나 그 시가 간직하고 있는 깊은 맛을 알아야 한다고 말한 바 있다. 결국 시는 미외미味外味가 중요하다는 것이다. 이 시에서는 지금 미인이 이렇듯 자신의 아름다움을 자신하여 교만을 부리지만 머지 않아 그녀의 아름다움도 스러져 버려 아무도 돌아보지 않을 날이 오게 될 것이라는 운미韻味를 담고 있다. 그렇다면 본 편의 주제는 안분지족安分知足의 평범한 진리를 환기하는데 있다.
 
《후한서》에 보면 "수레가 삐걱대며 하간으로 들어가니, 하간의 아가씨들 돈 셈에 능하여, 돈으로 집을 짓고 금으로 당을 꾸미네. 車班班, 入河間, 河間타女工數錢, 以錢爲室金爲堂"이라 하였다. 위 시에서 하간전河澗錢 운운한 것은 돈 많은 오입쟁이 도련님들이 그 아가씨를 어떻게 해보려 해도 전혀 거들떠 보지도 않는 도도한 자태를 말한 것임.  이백은 〈소년행〉에서 "오릉의 젊은이들 금시金市의 동쪽에서, 은안장 흰 말 타고 봄날을 보낸다네. 五陵年少金市東, 銀鞍白馬度春風"이라 노래하였다. 
 
목화밭 가는 아가씨
 
峽口所見/ 申光洙
 
 
              
푸른 치마 아가씨 목화 따러 나왔다가                      
길손과 마주치자 길 가로 돌아섰네.                        
흰 개는 누렁이의 뒤를 따라 달리더니                      
주인 아씨 앞으로 짝 지어 돌아오네.                       
靑裙女出木花田  見客回身立路邊
白犬遠隨黃犬去  雙還却走主人前
 
 
협구峽口는 산골 어귀/ 청군靑裙은 푸른 치마/ 회신回身은 수줍어 몸을 돌림/ 쌍환雙還은 짝 지어 돌아옴.
 
 
길을 가다 마주 오던 푸른 치마의 아가씨를 보았다. 목화 바구니를 들고 가다 낯선 남정을 보고 부끄러워 길 가로 돌려 선 그녀의 수줍은 모습을 보았다. 그때 아가씨 옆을 따라 가던 흰둥이가 저만치 있던 누렁이를 쫓아 짖어대며 달려가더니, 두 놈이 어우러져 뒹굴며 장난을 치다가는 깜빡 생각났다는 듯이 주인 아가씨 앞으로 달려 온다.
 
흰둥이와 누렁이가 컹컹대며 뒹굴고 장난 치고, 다시 한번 제 주인에게 돌아오는 짧은 시간 동안에도 길가던 나와 아가씨 사이엔 벌써 많은 이야기가 오가고 있다. 시인은 짐짓 엉뚱하게 흰둥이와 누렁이 얘기로 딴청을 부리고 있지만, 진정 하고픈 말은 그런 것이 아니다. 멀리 떨어져 있던 누렁이를 흰둥이가 쫓아가서는 어느새 어우러져 이 보란 듯이 제 주인에게 돌아오듯, 저 멀리서 조금씩 가까워지며 점점 궁금해지고 설레어버린 마음을, 그 아가씨와 다정히 앉아 정겨운 대화라도 나누고픈 마음을 그렇게 표현한 것이다.
 
그녀는 흰둥이의 하는 양을 보고 자신의 마음을 들켜 버린 것만 같아 부끄러워 얼굴이 더욱 붉어졌을 테고, 가슴은 두방망이질 쳤겠다. 그것 뿐이었다. 그리고는 말 한 마디 없이 조금은 머쓱해져서 가던 길을 갔을 뿐이다. 그런데도 가슴 속의 파문은 좀처럼 가라 앉질 않으니 무슨 까닭일까.
 
이 시에서 3구는 무미건조한 듯 하나 그 가운데 풍부한 언외지미言外之味를 담아 시의 맛을 한층 고조시키고 있다. 2구와 3구는 언뜻 보아 시상의 비약과 단절이 생기는듯 하다. 그러나 바로 이 의도적인 의미의 단절과 4구에서의 암시적 결합에 바로 이 시의 묘미가 있다. 옛 말에 "봉우리는 끊어져도 구름은 이어진다 峰斷雲連"이라 한 것이 바로 이를 말한다. 시인은 희고 누런 두 마리 개를 끌어와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대신하게 하고 있는 셈이다.
 
송의 엄우嚴羽는 시에서 `무적가구無迹可求`를 주장한 바 있다. 바꿔 말해 시인이 하고자 하는 말은 소금이 물 속에 녹아 있는 것과 같아서 소금의 성질은 비록 있으나 그 형체는 숨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시가 친절하게 설명하거나 남김 없이 다 말한다면 그것은 더 이상 예술 작품일 수가 없다. 남겨진 여백에 풍부한 함의를 담아야 한다. 시 감상에 있어서는 바로 이 점이 중요하다.
 
거리에서 미인을 보고 
      
路上所見 / 姜世晃
 
 
 
비단 버선 사뿐 사뿐 가더니만은                         
중문을 들어서곤 아득히 사라졌네.                        
다정할 사 그래도 잔설이 있어                            
그녀의 발자욱이 담장 가에 찍혀 있네.                     
凌波羅襪去翩翩  一入重門便杳然
惟有多情殘雪在  극痕留印短墻邊 (나막신 극)   
 
능파凌波는 미인의 가볍고 우아한 걸음걸이/ 나말羅襪은 비단 버선/ 편편翩翩은 자득自得한 모양/ 극흔 痕은 발자욱/ 유인留印은 자욱을 남기다.
 
 
길을 가다 앞서 가는 어여쁜 아가씨의 뒷 모습에 그만 넋을 놓고 만 연모의 노래다. 마치 물결 위 잎새인양 사뿐사뿐한 그녀의 걸음걸이. 저도 모르게 그녀의 뒤를 쫓아 왔지만 무정하게 그녀는 눈길 한 번 주는 일 없이 대문 안으로 사라져 버렸다. 뉘집의 아가씨일까. 어떻게 생겼는지 미쳐 보지도 못했는데 굳게 닫힌 대문 앞에 무연히 갈 길도 잊은 채 그는 서 있다.
 
혹시 다시 나오지는 않을까. 담장 너머로나마 그 모습을 한번 더 볼 수는 없을까. 두근대는 마음으로 서성이다가, 채 녹지 않은 담장 밑 그늘의 잔설 위로 너무나 또렷히 찍혀 있는 그녀의 발자욱을 보았다. 눈 위의 발자욱, 그녀가 남기고 간 발자욱. 그러나 그녀가 밟고 간 것은 눈 아닌 그의 철렁 내려 앉은 가슴은 아니었는지.
 
4구의 낮은 담장이란 표현 속에도 까치 발로 돋워 들여다 보고픈 설레임이 담겨 있다. 그런데 그녀는 바깥문 만이 아니라 중문까지 닫아 걸었으니. 잔설 위에 선명하게 남겨진 무심한 사랑의 모습 앞에, 연모의 불길이 조용히 타오르고 있다.
 
 
이 시는 "시 속에 그림이 있고, 그림 속에 시가 있다 詩中有畵 畵中有詩"는 말 그대로 시인의 감정은 극도로 절제되면서 한 폭의 그림과 같은 영상 속에 높은 미학적 형상화를 이룩하고 있다. 능파凌波와 중문重門으로 미인의 우아한 자태와 정숙한 몸가짐을 그려 보였고, 다정多情과 유인留印이 서로 호응하여 경과 정이 교융되면서 연모하는 마음을 말 밖에 잘 담았다.


序說 : 한시의 감상과 이해
 
 
 
                                  1
옛사람은 "시를 짓는 것보다 시를 선하는 것이 어렵고, 시를 선하는 것보다 시를 아는 것이 어렵다"고 말한 바 있다. 여러 비슷비슷한 것 가운데서 옥석을 가려 차례를 매기고 순서를 정하는 일은 기호가 엇갈리고 취미가 다르므로 모든 사람의 구미에 맞기는 어려운 일이다. 이제 선인들의 여러 문집과 역대의 시선집 가운데에서 애정을 주제로 한 작품들을 가려 뽑고 평설을 붙여 한 권의 책을 이루었다. 한시를 고리타분한 것이나 케케묵은 것으로만 생각하던 독자들에게 서정성이 풍부한 애정 한시와의 만남은 신선한 느낌을 줄 수 있으리라 믿는다.
 
한시는 언어 표현의 함축미나 정서 표출의 세련미에 있어 다른 어떤 시가 양식 보다 우수하다. 또한 한시 속에는 옛 사람들의 생활의 체취와 삶의 숨결이 맥맥히 살아 숨쉬고 있다. 이러한 한시의 풍부한 표현미와 그 안에 담긴 선인들의 숨결은 우리가 가꾸고 발전시켜 나가야 할 소중한 문학 유산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지금까지 한시는 먼지 쌓인 역사의 뒤켠에 그대로 방치되어 날로 그 빛을 바래가고 있다. 그것들에 생기를 불어 넣고 새롭게 이해하려는 노력과 인식이 안타까운 오늘이다.
 
그러나 문학 연구자들을 포함하여 일반의 독자들이 한시가 지닌 깊은 맛과 멋을 음미하고 감상하는 데는 많은 걸림돌이 존재한다. 우선 한문으로 된 원문 이해의 난점을 들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원문을 풀이했다 하더라도, 깊은 함축을 담은 비유의 언어로 정교하게 짜여진  한시를 문예적으로 감상하고 이해하는데 있어서는 매우 감성적이고 지적인 노력이 요구된다.
 
어떤 시가 좋은 시인가, 나아가 한시를 어떻게 이해하고 감상할 것인가, 한시의 예술성과 형상화의 원리는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 이제 간략하게나마 이 문제를 검토하여 독자의 이해를 돕고자 한다.
 
시는 감정이 응축되고 표현이 간결할수록 그 뜻은 더욱 풍부해진다. 시시콜콜히 다 말하고 자세히 묘사하고 설명하는 것은 친절한 맛은 있겠지만 시의 사고 방식과는 거리가 멀다. 시인이 모두 말해 버려 독자에게 어떠한 연상이나 여운을 일으키지 못한다면 시의 매력은 더 이상 찾아볼 수 없게 되고 말 것이다. 그것은 마치 우리가 사진과 터럭만큼의 차이도 없이 똑같이 그려진 영화관의 간판에서 예술적 감흥을 전혀 느끼지 못하는 것과 같다.
 
시는 일반 산문과는 달리 시인이 전달하려는 의미 이상으로 수사를 중요시한다. 물론 뜻도 중요하지만 표현의 미를 갖추지 못하고서는 시가 될 수 없는 것이다. 시가 의미 전달에 치중하게 되면 의론에 흐르기 쉽고, 반대로 수사의 기교에만 몰두하면 시 본래의 풍신風神은 어느새 달아나고 만다. 맹자는, 아무리 서시西施와 같은 미인이라도 더러운 것을 뒤집어쓰면 사람들이 모두 코를 막고 이를 지나친다고 말한 바 있다. 마찬가지로 아무리 훌륭하고 좋은 뜻을 담았다 하더라도 적절한 표현을 얻지 못한다면, 읽는 이들은 모두 이를 외면하여 돌아보지 않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시는 구호여서는 안 된다. 목청만 잔뜩 돋운 구호가 결코 시일 수는 없다. 시에 나타난 시인의 의식도 물론 중요하다. 그러나 그보다 중요한 것은, 그 의식이 얼마나 문학적으로 형상화되고 있느냐의 문제이다. 시대와 사회에 대한 의식이 아무리 치열하다 해도, 그것이 문학적으로 형상화되어 있지 못하다면 이는 시의 형식을 빈 대자보일 뿐이다. 그것은 사회나 역사 연구의 보조 자료가 될 수는 있을지언정 문학의 관심사는 아니다. 또, 시는 암호여서도 안 된다. 자신만 알고 남은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은 마치 허공에 대고 그린 그림이나, 안데르센의 동화에 나오는 벌거벗은 임금님의 옷과 같다.
 
지금까지 한시 연구나 이해에 있어 흔히 이러한 평범한 사실이 무시되거나 간과되어 왔음을 우리는 주목한다. 문학 작품의 연구나 감상은 반드시 문학성이 전제되지 않으면 안 된다. 읽는 이의 연상을 자극하고 체험을 계발하지 못하는 시는 시가 아니다. 형상화의 측면은 도외시한 채 작품의 내용만을 가지고 주제를 분류하고 의식을 논한 결과, 자신이 연구한 시인이 가장 우수한 시인이라는 결론에 이르게 되는 논문을 우리는 흔히 보아 왔다. 목청만 높인다고 해서 시가 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이는 오히려 예술적 형상화에 심각한 장애가 될 뿐이다.
 
한 편의 우수한 한시를 감상하는 일은, 마치 보물 찾기나 숨은 그림 찾기와도 같다. 문학성이 풍부한 한 편의 한시는 결코 시인의 감정을 직접 드러내는 법 없이 대상을 통해 간접적으로 전달한다. 그러므로 서툰 독자들은 시인이 행간에 숨겨 놓은 의미들을 놓쳐 버리기 일쑤이다. 때로 한 편의 시는 같은 감상자에 의해서도 볼 때마다 새로운 느낌을 준다. 그것은 마치 다면체의 보석과도 같아서 보는 각도에 따라 다채로운 빛을 반사하기도 하는 것이다.
 
과거 선인들에게는 한시의 창작이 생활의 일부분이었다. 밥을 먹고 잠을 자고 일기를 쓰듯이 그들은 일상 생활을 늘 시와 함께 하였다. 문집을 남긴 웬만한 문인치고 수천 수백수의 시를 남긴 사람은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이다. 그러나 단순히 다섯자나 일곱자로 늘어놓는다고 해서 시가 되는 것은 아니다. 여기에는 압운과 평측의 규칙이 정연해야 하고, 앞뒤의 조응과 대칭이 엄밀해야 한다. 뿐만 아니라 시는 이러한 격률格律 외에도 추상적 정이니 경이니 하는 시취詩趣나 화취畵趣를 요구하는데, 이는 대체로 평담平淡 중에 우러나는 맛이 있어 시의詩意를 무궁하게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시를 일상의 언어와 구분지어 주는 것은 무엇이며, 또 시의 언어는 어떠해야 하는가?
 
시는 어떤 사실이나 사물에 대한 정보를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언어 그 자체로 존재하는 생물이어야 한다. 외롭다는 말을 시인은 입에 담아서는 않된다. 외롭다는 말을 입에 담지 않았으면서 그 시를 읽는 독자들을 외롭게 만들어야 한다. 그립다는 말을 해서도 않된다. 그립다는 말은 한마디도 비치지 않았음에도 독자들로 하여금 사무치는 그리움에 젖어들도록 해야 한다. 한시에서 이러한 정서표출 상의 객관화 원리는 이미 오래 전부터 창작의 이론과 실제에서 강조되고 구현되어 왔다.
 
연암 박지원은 그의 〈종북소선서鍾北小選序〉에서 시문의 정情에 대해 "정이란 무엇인가? 새가 울고 꽃이 피며, 물이 푸르고 산이 푸른 것이다"라고 말했으니, 정이란 결국 감상자의 눈앞에 펼쳐진 형상을 뜻한다. 또 계속해서 그는 "경境이란 무엇인가? 먼 데 물은 물결이 일지 않고, 먼 데 산에는 나무가 없으며, 먼 데 사람은 눈이 보이지 않는 것이다"라고 했는데, 즉 경이란 정 밖에 존재하는 예술가가 창조한 공간을 뜻한다. 물상을 관찰하여 일어나는 감상적 상상력이 하나의 의중지경意中之境을 이루게 되는 것이니, 이를 분명하게는 드러낼 수 없다. 이때 오히려 자꾸 보태어 설명하는 대신, 구체적 설명을 과감히 생략한 채 신神으로 이를 느끼게끔 하여야 한다는 주문이다. 무어라 표현하기 어려운 미묘한 느낌을 자세히 설명하려 들면 들수록 그것은 멀리 달아나 버리고 말 뿐이다. 즉 그것은 먼 산을 그릴 때 나무를 그려서는 안되는 이치와 같다. 먼 산에 나무가 없는 것은 물론 아니다. 그러나 먼 산에 나무를 빼곡이 그려 놓는다면, 독자의 상상력을 자극하는 의경의 깊은 맛은 더 이상 찾아볼 수 없게 될 것이다. 때문에 연암은 계속되는 글에서 이별을 겪어 보지 못하거나, 그림으로 먼 곳을 나타내지 못하는 사람과는 더불어 문장의 정경을 논활 수 없다고 말하기에 이른 것이다.
 
이제 몇 개의 명제를 검토해 보는 것으로 논의를 시작해 보기로 한다. "영양이 뿔을 거는 것과 같아 자취를 찾을 수 없다. 羚羊掛角, 無迹可求"는 말이 있다. 영양은 뿔이 앞 쪽으로 둥글게 굽어 있다. 이 양은 잠을 잘 때 외적의 해에서 벗어나기 위해 뿔을 나뭇가지에 걸고 잠을 잔다고 한다. 어떤 사냥꾼이 영양의 발자국을 발견하고 발자국을 따라 영양을 잡으려고 쫓아갔다. 그러나 어느 순간 영양의 발자국은 끊어져 버리고 영양의 자취는 찾을 길이 없다. 고개를 들어보면 바로 거기에 영양이 매달려 있건만 서툰 사냥꾼은 영양을 바로 눈 앞에서 놓치고 만다. 시인이 독자에게 보여주는 것은 단지 영양의 발자국 뿐이다. 그러나 그 발자국에 현혹되거나 발자국만이 전부라고 속단해서는 안된다. 정작 시인이 전달하려는 의미는 글자의 위에 있지 않고 글자와 글자의 사이, 행과 행의 사이, 혹은 아예 그것을 벗어난 공중에 매달려 있다. 즉, 언어의 지시적 의미에만 매달려서는 안된다.
 
"고기를 얻으면 통발을 잊는다. 得魚忘筌"는 말이 있다. 고기를 잡기 위해 통발을 친다. 그러나 일단 고기를 잡고 나면 통발은 잊어버리라는 말이다. 이와 비슷한 말로, "뗏목을 버려야만 언덕에 오를 수 있다. 捨筏登岸"는 말이 있다. 통발이 없으면 고기를 잡을 수 없다. 또, 뗏목이 아니면 언덕에 다가갈 수 없다. 그러나 일단 고기를 잡고 나면, 또는 언덕에 오르기 위해서는 통발이나 뗏목에 집착해서는 안된다. 시인이 자신의 사상과 감정을 전달하려면 언어에 힘입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독자는 시인이 쳐 놓은 언어의 통발에 걸려들어서는 안된다. 언어라는 감옥에 갇혀서도 안된다.
 
"봉우리는 끊어져도 구름은 이어진다. 峰斷雲連"라는 말이 있다. 여기 구름에 잠겨 봉우리의 끝만 보이는 산들이 있다. 눈 앞에 보이는 것은 구름 위에 삐죽 솟은 봉우리의 끝 뿐이다. 그렇다고 해서 구름 아래 봉우리가 없는 것은 아니다. 다만 가려져 안 보일 뿐이다. 논자는 또 "말은 끊어져도 뜻은 이어진다. 辭斷意屬"는 말로 이를 보충한다. 시속에서 시인이 말하고 있는 것은 구름 위에 솟은 봉우리의 끝 뿐이다. 그러나 슬기로운 독자들은 그 구름 아래 감춰진 봉우리의 모습을 놓치지 않는다. 아니, 시인은 일부러 구름 속에 할 말을 많이 감춰 놓고 독자가 그것을 찾아낼 것을 요구한다.
 
"말은 다하였으나 뜻은 다함이 없다. 言有盡而意無窮"는 말이 있다. 시의 언어는 표층의 의미만으로 전달되는 것이 아님을 강조한 것이다. 비유컨대, 종을 치면 종을 치는 행위가 끝나는 순간부터 종소리는 긴 파장을 내면서 허공으로 퍼져 나간다.  시는 독자로 하여금 읽는 행위가 끝나는 순간부터 정말로 읽는 행위를 시작하게 만들어야 한다는 주문이다. 시의 언어는 범종의 소리와 같은 유장한 여운이 있어야 한다. 그 여운은 어디에서 생겨나는가? 그것은 직접 드러내어 말하지 않고 간접화되어 전달되는 가운데서 생겨난다.
 
이러한 명제들은 모두 좋은 시는 시인이 말하고 있는 것과 말하려는 것 사이에 일정한 간격이 있어, 이를 읽는 독자들이 시인의 진정한 의도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면밀한 독시讀詩 행위가 요청됨을 말해준다. 시는 말이 끝난 곳에서 시작되는 언어이며, 발자국이 끝난 곳에서 사라진 영양이며, 구름 아래 잠겨 있는 산이다. 그러므로 한편의 훌륭한 시는 독자에게 숨은 그림 찾기와도 같은 미적 쾌감을 선사해 준다. 한편의 같은 시가 독자의 지적 수준이나 혹은 그때 그때의 분위기에 따라 전혀 다르게 읽혀지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뛰어난 한편의 시는 절대로 다 묘사하거나 자세히 말하는 법이 없다. 적절히 여백을 남겨 놓고 할 말을 절제함으로써 거기에서 무한한 함축과 여운을 만들어 낸다.
 
이러한 시의 형상화 원리는 그림을 통해서도 설명될 수 있다. 예컨대 송나라의 휘종황제는 그림을 몹씨 좋아하는 임금이었다. 그는 곧잘 유명한 시 가운데 몇 줄을 골라 이를 그림으로 그리게 하곤 했었다. 한번은 `어지러운 산에 옛 절이 감추어져 있다.亂山藏古寺`란 제목이 화제로 출제되었다. 화가들의 관심은 빽빽한 나무로 둘러싸인 깊은 산의 계곡과 그 안에 자리 잡은 고색이 창연한 퇴락한 절의 모습을 그리는데 집중되었다. 어떤 사람은 금방 쓰러져 버릴 것만 같은 낡은 절을 그렸고, 어떤 사람은 숲 위로 삐죽 솟은 절의 탑을 그리거나, 아니면 절의 지붕이 숲 위로 솟아오른 모습을 화면에 담았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정작 일등으로 뽑힌 그림은 화면 어디를 둘러보아도 절의 모습은 찾아볼 수가 없었다. 그 대신 화면 가득한 숲 속에 조그만 길이 있고, 그 길로 한 중이 물동이에 물을 길어 올라가는 장면을 그렸다. 절은 왜 그리지 않았을까? 그것은 산이 하도 깊어 절이 보이지 않음을 나타내 보이려 한 것이었다. 산속에 절이 있다는 사실은 무엇으로 알 수 있는가? 중이 물을 길러 나왔으니, 이를 통해 그 속 어딘가에 절이 있음을 알 수 있다.
 
또 한 번은 `꽃을 밞으며 돌아가니 말발굽에서 향내가 난다. 踏花歸去馬蹄香`는 것이 화제로 제출되었다. 도대체 말발굽에 나는 향내를 어떻게 그림으로 표현할 수 있다는 말인가? 후각을 시각으로 옮기라는 요구이니, 화가들은 모두 고민에 빠지지 않을 수 없었다. 모두 손을 대지 못하고 끙끙대고 있을 때, 한 화가가 그림을 그려 제출하였다. 그 그림은 달리는 말의 꽁무니를 따라 나비가 뒤쫓아 날아가는 장면이었다. 말발굽에 향기가 나므로 나비가 꽃인 줄로 오인하여 말의 꽁무니를 따라간다고 표현했던 것이다.
 
이러한 예는 얼마든지 더 있다. 다시 한 가지 예를 더 들어 보면, "온통 푸른 빛 가운데 붉은 한 개의 점"이 화제로 제시되었다. 여러 화가들이 그림을 그려 제출하였는데, 어떤 사람은 푸른 바다 위로 붉은 해가 떨어지는 장면을 그렸고, 또 어떤 사람은 푸른 산과 푸른 강이 온통 화면을 메우고 있는 가운데, 그 산허리를 학 한 마리가 가르고 지나가는 장면을 그렸다. 그는 학의 이마 위에 붉은 점 하나를 찍어 놓음으로써 제목이 요구한 홍일점을 표현하였다. 그런데 정작 일등을 뽑힌 그림은 화면 전체에 붉은 색을 찾아볼 수 없고, 숲 속 저편 은은히 누각이 비치는데 그 누각의 난간을 붙잡고 한 소녀가 외롭게 서 있는 장면이었다. 중국 사람들은 흔히 여성을 `홍紅`으로 표현하곤 하였으니, 결국 그 소녀로써 홍일점을 표현했던 것이다.
 
유성兪成의 <형설총설螢雪叢說>이란 책에도 이와 비슷한 예화가 실려 있다. 일찍이 그가 사람들에게 `죽쇄교변매주가竹鎖橋邊賣酒家` 즉 대숲에 둘러 싸인 다리 가의 주막집을 그리게 한 일이 있었다. 그림 그릴 줄 아는 사람 치고 술집에 신경을 쓰지 않는 자가 없었다. 그러나 그 가운데 한 사람만이 대숲 위에 삐죽 솟은 깃발을 그려 거기에 `酒`라는 글자를 써서 그 아래 술집이 있음을 나타내 보였다.
 
구한말에 화가 許小癡가 高宗 앞에 불려 갔는데, 고종은 그를 골탕 먹이려고 春畵圖를 한 장 그려 바칠 것을 명하였다. 얼마 후 소치가 그려 바친 것은 깊은 산 속 외딴 집 섬돌 위에 남녀의 신발이 한 켤레 씩 놓여진 그림이었다. 환한 대낮에 닫혀진 방 안에서 남녀가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는 알아서 상상하시라는 재치였다.
 
위의 여러 예화는 모두 같은 원리를 전달한다. 즉 그리려는 대상을 직접 화면으로 제시하는 대신 숲 위로 살짝 보이는 번간, 말을 쫓아가는 나비, 대숲 위로 솟은 깃발, 그리고 남녀의 신발 한 켤레 씩으로 함축적으로 전달하고 있다는 점이 그것이다.
 
동양화의 화법 가운데 `홍운탁월법烘雲托月法`이란 것이 있다. 수묵화로 달을 그리려 할 때 달은 희므로 색채를 더할 수 없다. 달을 그리기 위해 화가는 달만 남겨둔 채 그 나머지 부분을 채색한다. 이것을 드러내기 위해 저것을 감추는 방법이다. 시에서 시인이 말하는 법도 이와 같다. `성동격서聲東擊西`라는 말처럼 소리는 이쪽에서 지르면서 정작은 저편을 치는 수법이다. 나타내려는 본질을 감춰두거나 비워 둠으로써 오히려 더 적극적으로 그 본질을 설명할 수 있다는 것이다. 화가가 달을 그리지 않고 달을 그리는 방법과, 시인이 말하지 않고 말하는 수법 사이에는 공통으로 관류하는 정신이 있다. 구름 속을 지나가는 신룡神龍은 머리만 보일 뿐 꼬리는 보이지 않는 법이다. 이는 앞서 본 몇몇 명제들이 제시하고 있는 의미와도 그대로 상통한다. 요약하면, `직접 말하지 말아라, 그리고 다 말하지도 말아라`라는 것이다.
 
"한 글자도 나타내지 않았으나 풍류를 다 얻었다. 不著一字 盡得風流"는 말이 있다. 한 마디도 직접 말하지 않았는데도 시인의 뜻은 십분 독자에게 전달되고 있음을 말한다. 또 "단지 경물을 묘사할 뿐이나 정의情意가 저절로 드러난다. 只須述景 情意自出"고도 한다. 시인이 그려보이는 것은 그의 눈앞에 펼쳐진 경치나 대상에 대한 묘사일 뿐이다. 그러나 시인이 그리고 있는 그 대상 안에는 이미 시인의 희노애락이 담겨져 있다.
 
요컨대,  훌륭한 한 편의 한시는 시인 자신의 독백으로서가 아니라 대상을 통한 객관적 상관물의 원리를 통해 독자에게 전달된다. 한시는 단어와 단어를 도약적으로 제시하여 둘 사이의 서술관계를 생략해 버림으로써 풍부한 함축을 포함한다. 그러므로 독자들은 시를 읽는 행위를 마치는 순간 다시금 대상 속에 녹아 들어 있는 시인의 情意를 읽는 과정으로 몰입하지 않으면 안된다.
 
흔히 시인이 시를 짓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 과정이 아니라, 하고 싶은 말 가운데 불필요한 것을 덜어내는 과정이라고 말을 한다. 즉 시인이 대상에 대해 200자의 할 말이 있었다면, 그는 이를 어떻게 20자로 말할 것인가로 고민하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180자를 걷어낼 것인가로 고민한다는 말이다. 반대로, 이러한 시를 감상하는 독자들은 시인이 하고 싶었어도 하지 않고 걷어 낸 말, 즉 행간에 감추어 둔 뜻을 어떻게 충분히 이해하고 깨닫느냐의 문제가 주요한 관심사가 된다. 사의전신寫意傳神이 예술의 목표이며, 득의망언得意忘言이 시가 감상의 법문法門인 것이다.

 
 
2

일반적으로 한시의 감상은 논리적이고 분석적이기 보다 인상적이며 직관적이다. 시를 평함에 있어서도 `혼후渾厚`하다든지 `청려전아淸麗典雅`하다든지 `호방豪放`하다는 식의 추상적이고 직관적인 표현과 흔히 만나게 된다. 예를 들어 이수광은 고려시대 시인들의 시를 평하여 "이규보는 웅장하고, 정지상과 진화는 고왔으며, 이인로와 이제현은 정밀하고, 이색은 부드러우며, 정몽주는 호매豪邁하고, 이숭인은 온자蘊藉하다"고 하였다. 각 시인들의 시의 풍격을 한 단어로 요약한 것인데, 대개 그 총체적인 느낌만을 전달하고 있을 뿐 어떤 것이 웅장하고 온자한 것인지에 대해서는 아무런 설명을 덧붙이지 않았다.
 
마음이 통하는 사람 사이에 있어 언어란 본디 불필요한 것이다. 종래 한시의 감상은 세밀한 분석보다는 총체적인 감상을 중시하여, 두 세 마디로 자신의 직관적인 느낌을 말하고 있을 뿐 논리적 분석을 덧붙이지는 않았다. 이는 마치 친구 간에 탁자를 마주 대하고 밤새 이야기 하는 것과 같다. 단지 마음이 통하는 것만을 추구하고 논리적 실증에는 뜻이 없으며 직관적인 느낌을 중시하고, 이론 체계를 세우는 데는 별로 마음을 기울이지 않았다.
 
매월당 김시습은 시를 논하기를, 
 
객은 시를 배울 수 있다고 말하나
시는 샘물과도 같은 것.                                   
돌에 부딪치면 흐느껴 울부짖지만                          
연못에 고이면 고요하여 시끄럽지 않다네.                   
客言詩可學  詩法似寒泉
觸石多嗚咽  盈潭靜不喧
 
 
라고 하였다. 물은 만나는 곳에 따라 흐름을 달리한다. 마찬가지로 시의 법은 일정한 법칙으로 설명할 수 없는, 능변 자재하여 무어라 한 마디로 규정할 수 없는 그 무엇이다. 이 말을 한 매월당에게 시가 왜 "돌에 부딪치면 흐느껴 울부짖고 연못에 고이면 고요하여 떠들지 않느냐"고 물어 보았다고 하자. 그도 역시 정확한 대답은 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그는 시의 끝에 가서 "보기에는 심상한 품격이지만, 그 묘리는 말하기 어렵다"고 말하고 말았던 것이다.
 
이러한 시 감상 태도는, 얼핏 보면 지나치게 주관적이고 비논리적인 것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한시를 이해하는 데 있어 이러한 태도는 많은 장점이 있다. 예술의 분석은 수학의 분석처럼 정확할 수도 없고 그럴 필요도 없다. 언뜻 비과학적이고 비논리적으로 보이는 이러한 비평 태도는, 고도의 함축과 내포로 이루어진 한시를 예술적으로 감상하는 데 있어 오히려 핵심에 접근하는 지름길이 될 수 있다. 결국 시인이 언어로 표현한 심미적 느낌을 이해하려면, 독자는 보다 높은 오성悟性을 지니지 않으면 안된다. 그래서 이계 홍양호는 <질뢰疾雷>란 글에서 다음과 같이 주장하였다.
 
 
"우레 소리에 산이 무너져도 귀머거리는 듣지 못하고 해가 중천에 솟아도 소경은 보지 못한다. 도덕과 문장의 아름다움을 어리석은 자는 알지 못하며 왕도와 패도, 의와 이의 구분을 속인은 변별하지 못한다. 아아! 세상의 남아들이여. 눈과 귀가 있다고 말하지 말라. 총명은 눈과 귀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한조각 영각靈覺에 있는 것이다."
 
 
영각靈覺, 즉 영묘한 깨달음은 논리 이전의 세계이다. 학문을 많이 했다고 해서 시를 잘 짓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채근담』에서는 "세상 사람들은 고작 유자서有字書나 읽을 줄 알았지 무자서無字書를 읽을 줄은 모르며, 유현금有絃琴이나 뜯을 줄 알았지 무현금은 뜯을 줄 모른다. 그 정신을 찾으려 하지 않고 껍데기만 쫓아다니는데 어찌 금서琴書의 참 맛을 알 도리가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결국 이러한 생각에서 시를 지었으므로 그 감상 역시 한조각 영각의 기초 위에 세우고 묘오妙悟에 기대어 내려야 할 것이다. 이러한 심미 판단은 이따금 어떤 이론의 도식으로 연역해 낸 이론보다 훨씬 우월하여 모든 사람의 흥미와 공감을 더 일으킬 수 있다.
 
그러나 세밀한 분석보다 총체적 느낌을 통해 한시를 감상해야 한다는 것은, 한시에 대한 기초적 이해가 부족한 오늘의 독자들에게는 무책임한 말로 들리기 쉽다. 때문에 오늘날 한시의 감상과 이해는 총체적 파악만으로는 안 되며, 다시 세밀한 분석으로 보충하여 사람들에게 생각해 볼 만한 핵심을 제시해야 한다.
 
한시의 예술적 분석은 무엇보다도 시어의 예술적 조합에서 찾지 않으면 안 된다. 문학이 언어의 예술이고 각종 문화의 갈래가 모두 언어와 떨어질 수 없는 것는 너무나 당연하다. 소설이나 희곡은 이야기와 인물이 있지만 한시는 이야기도 인물도 없으며 유일하게 독자에게 주는 것이 시어 뿐이다. 한시 분석의 첫걸음은 바로 시어의 분석에서 출발한다.
 
두보의 유명한 「춘망春望」의 몇 구절을 살펴보자.
 
 
나라는 망했어도 산하는 남아 있어
봄 성엔 잡초만이 우거졌구나.
시절을 느끼매 꽃 보아도 눈물 나고
이별을 한하니 새 소리에 마음 놀라네
.
國破山河在  城春草木深
感時花천淚  恨別鳥驚心
 
 
위 시에서 두보는 멀리로 보이는 산하의 모습과 새로이 돋은 풀, 그리고 꽃 피고 새 우는 봄날의 정경을 묘사한 뒤, 이를 마주하여 눈물짓고 마음 놀라는 정서를 표현하고 있다. 그러나 독자는 분석의 과정을 통하여 시인이 포착한 경물 속에 담긴 미묘한 감정 속으로 들어 갈 수 있다. 즉, 산하만 남았다고 했으니 그 나머지는 아무 것도 남은 것이 없음을 알 수 있고, 잡초가 우거졌다고 했으니 한 때 번화했던 성 안에 이제 더 이상 사람의 자취를 찾아볼 수 없게 되었음을 알 수 있다. 아름다운 꽃과 지저귀는 새들은 평소 같으면 즐길만한 것이었다. 그런데 그 꽃들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눈물이 흐르고, 새소리를 들으매 슬픈 마음을 금할 길 없다고 하였으니 그 시절이 어떠했는지 눈에 선하게 떠오르는 것이다. 시인의 가슴속에 남아 있던 태평성대에의 기억은 무참히 사라지고, 세상은 어느새 폐허로 변하여 시인으로 하여금 무한한 감개와 슬픔 속으로 젖어 들게 하고 있다.
 
시인이 말하고 있는 것은 `나라는 망했지만 산하만은 남아 있다`는 것인데, 시인이 말하려 한 것은 `나라가 망하고 보니 남은 것은 산하뿐이다`이며, 또 시인이 말하고 있는 것은 `봄날 성에는 풀과 나무가 우거졌다`는 것이지만, 시인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예전 붐비던 성에는 사람의 자취는 찾을 길 없고 잡초만이 우거져 있다`는 것이다. 만일 이러한 것들을 일일이 다 언어로 표현한다면 여기에 무슨 여운이 있겠는가.
 
이색은 그의 「부벽루」에서
 
 
성은 비었고 달만 한 조각
돌은 늙어도 구름은 천 년.                                     
城空月一片  石老雲千秋
 
 
이라 했는데, 이러한 구절들은 시어의 규범을 따르면서도 그 규범을 넘고자 하였다. 텅 빈 성과 조각달, 바위와 구름의 대비는 읽는 이로 하여금 참으로 많은 생각에 잠기게 한다. 예전 번성했던 성엔 이제 인적은 찾을 길 없고 조각달만 희미하게 떠 있을 뿐이다. 그나마 그 달은 얼마 안 있어 그믐의 암흑 속으로 사라지고 말 것이 아닌가. 바위에는 세월이 할퀴고 간 흔적이 남아 있다. 그 위로 또 무심한 구름은 천년 세월을 덧없이 흘러갔다. 그 세월 동안 인간 세상의 영고성쇠는 또 말하여 무엇하겠는가. 이렇듯 1구와 2구 사이에는 말하지 않고 남겨 둔 여운이 길고도 깊어 종소리의 파장과도 같은 긴 여운을 남긴다.
 
또 김종직은 그의 [불국사여세번화佛國寺與世蕃話]에서
 
 
푸른 산 반쪽에는 비가 내리고                                
해지는 상방에선 종이 울린다.
                                 
靑山半邊雨  落日上房鍾
 
 
고 하였다. 시인은 청산의 반쪽에 비가 온다고 말하여 다른 한쪽은 비가 내리지 않음을 보였다. 이편에는 비가 오는데 저편에서는 해가 진다. 떨어지는 해가 못내 아쉬운 듯 절에서는 종소리가 울려 퍼진다. 푸른 산과 붉은 해, 서늘한 비와 맑은 종소리, 이러한 이미지들은 서로 결합되자마자, 독립적으로 놓여져 있을 때와는 전혀 다른 특이한 분위기를 조성한다. 그래서 일상의 언어에서는 허용되지 않는 조어들이 시에서는 아름다운 구절이 된다.
 
시인은 자구를 조합하면서 단어의 성격을 고치고 순서를 뒤바꾸며 구절의 어떤 성분을 생략하기도 한다. 예컨대, 정지상의 「영두견詠杜鵑」 시는,
 
 
우는 소리 애 끊으니 산대나무 찢어지고                      
통곡하여 흘린 피 들꽃이 붉더라.                             
聲催山竹裂  血染野花紅
 
 
고 하여 두견새의 애끊는 울음소리를 묘사하고 있다. 산대나무는 솟구치던 기세를 못 이겨 제풀에 찢어지고 말았다. 온 산을 붉게 물들이며 진달래는 피어났다. 본래, 두견새의 울음과 대나무가 찢어지고 진달래가 피어난 사실과는 서로 아무런 연관이 없다. 그런데도 시인은 밤을 새워 우는 두견새의 울음에 감응하여 대나무가 찢어지고, 두견새가 토해 낸 피에 물들어 진달래가 붉은 것이라고 말함으로써, 단어들은 비로소 구조적 연관과 함께 새로운 조합을 이루어 내게 되는 것이다. 
 
차천로의 [영고안詠孤雁]에서는
 
 
산하엔 외로운 그림자 없어지고                              
천지에 한 소리만 비장하더라.                                
山河孤影沒  天地一聲悲
 
 
고 한 것도 비슷한 각도에서 이해할 수 있다. 날아가던 기러기의 외로운 그림자는 시야에서 사라져 버렸다. 그런데도 아직 시인의 귀에는 천지를 가득 메운 기러기의 구슬픈 울음소리가 떠나지 않고 있는 것이다. 기러기야 외로울 것도 슬플 것도 없겠지만, 깊은 밤 까닭 모를 수심에 겨워 뜨락을 서성이던 시인의 마음은 그렇지가 않아, 저도 모르는 사이에 기러기라는 대상에 자신의 감정을 얹어 노래하게 되었던 것이다.
 
표현이 서로 비슷한데도 시의 풍격은 전혀 달라지는 경우가 있다. 강희맹은 그의  「임풍루(臨風樓)」란 시의 일련에서
 
 
제비가 짝져 날아 버들가지 날리는데   
청개구리 개굴개굴 비 기운에 어둑한 산.    
紫燕交飛風拂柳  靑蛙亂叫雨昏山
 
 
이라 하였다. 봄날 비 올 무렵의 경물을 묘사한 작품이다. 제비가 나는 것과 바람이 부는 것 사이에는 본시 특별한 연관이 없다. 청개구리가 우는 것과 비가 오는 것도 그렇다. 그런데도 시를 읽으면서 마치 경쾌하게 나는 제비의 날갯짓이 바람을 일으켜 버들가지가 날리는 것처럼 여겨지고, 청개구리가 개굴개굴 울어대자 이에 응답이라도 하듯 먼 산이 비 기운을 머금어 어둑어둑해진 것처럼 느껴지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이 또한 단어와 단어가 결합되면서 의경에 변화를 가져왔기 때문이다. 이 시를 김류는 그의 「객중(客中)」시에서 다시 이렇게 변용하였다.
 
 
먼 산 비 기운 띠자 연못 개구리 어지럽고  
버드나무 바람 머금어 제비는 비스듬 나네.  
遙山帶雨池蛙亂  高柳含風海燕斜
 
 
위 강희맹 시에서 제비와 바람과 버드나무, 그리고 개구리와 비와 산을 그대로 가져와 각기 대응되는 위치에 배치시키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전후의 단락을 도치시키고 허사를 바꿈으로써 새로운 분위기를 만들어 냈다. 그러나 김류의 시는 강희맹의 그것에 비해 시적 긴장감이 현저하게 떨어진다. 즉, 어음語音 면에서는 음악미가 부족하고 조구造句면에서는 탄력성이 적어 참신하고 교묘한 표현의 효과를 얻지 못하였다. 홍만종은 『소화시평』에서 김류의 시가 강희맹의 시에 비해 호종豪縱함은 조금 미치지 못한다 했는데, 그는 바로 이러한 미묘한 차이까지 음미하면서 감상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각종 변형은 옛 시인들이 습관적인 언어 상규를 타파하고, 참신하며 교묘하고 색다르며 민첩한 언어 효과를 창출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래서 옛 사람은 말하기를, "시라는 것은 뜻을 주로 하고, 또 모름지기 한 작품 가운데서는 구句를 다듬어야 하고, 구 가운데서는 글자를 다듬어야 비로소 잘 지을 수 있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것은 이른바 "천 번을 다듬어 구가 되고 백 번을 다듬어 글자를 얻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고인의 시 가운데에는 "다섯 글자의 시귀를 읊조리기 위해, 일생의 심력을 다 바치었네. 吟成五字句 用破一生心"이라 하였고, 또 "安이란 한 글자를 읊기 위하여, 몇 개의 수염을 비벼 끊었던고. 吟安一箇字 撚斷幾莖자"라고도 하였다. 이수광의 {지봉유설}에 실려 있는 말이다. 서거정도 {동인시화}에서 "대체로 시의 기교는 어귀 하나를 묘하게 쓰는데 있다"고 했고, 이규보도 그의 [論詩中微旨略言]에서 "앞 귀절의 결함을 뒷 귀절에서 보충하고, 한 글자로 한 귀절의 결함을 타결할 수 있으니 깊이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고 하기에 이른 것이다.
 
두보도 "말이 사람을 놀래키지 못하면 죽어도 그만 두지 않으리. 語不驚人死不休"라 하였고, 송의 陳師道는 시를 짓다가 시상이 떠오르지 않으면 며칠이고 이불을 뒤집어 쓰고 생각날 때까지 방을 나오지 아니하였다 한다. 당의 시승 賈島가 "잘 새는 연못가 나무에서 잠들고, 스님은 달 빛 아래 문을 두드리네. 宿鳥池邊樹 僧敲月下門"란 시귀를 두고 `敲` 즉 `두드린다`로 할까, 아니면 `推` 즉 `민다`고 할까 고심하며 가다가 한퇴지의 수레와 부딪친 이야기는 이미 `推敲`의 고사로 널리 알려져 있다. 대개 이러한 일화들은 고인이 시를 지음에 있어 얼마나 조탁에 고심하며 힘을 쏟았는가 하는 것을 잘 말해 준다.
 
예전 시화에는 `일자사一字師`의 이야기가 많이 나온다. 한 글로 스승을 삼는다는 이 말은, 어떤 사람이 지은 시를 한 글자 고침으로써 그 작품의 광채가 더욱 돋보이게 되는 경우에 쓰여 왔다.
 
당나라의 시승 가운데 제기齊己란 이가 있었다. 그가 일찍이 「조매早梅」시를 지었는데
 
 
앞 마을 깊은 눈 속에
간밤 몇 가지 꽃을 피웠네.
前村深雪裏  昨夜幾枝開
 
 
라 하였다. 정곡鄭谷이란 사람이 둘째 구의 `기幾`자를 `일一`자로 고쳐야만 조매早梅 즉 일찍 피어난 매화가 될 수 있을 것이라고 하니, 마침내 그가 탄복하였다. 쌓인 눈 속에 갓 피어난 매화의 아름다운 모습을 표현하는 데는 확실히 여러 가지의 매화보다 단 한 가지의 매화가 훨씬 함축적이면서도 도약적인 장면을 형성하고 있다.
 
또 이규보의 《백운소설》에는 이런 일화가 실려 있다. 정지상의 재주를 시기한 김부식이 정지상을 죄로 얽어 죽였다. 하루는 김부식이
 
 
버들은 천 실이 푸른 빛이요
복사꽃은 만 점이나 붉게 피었네.
柳色千絲綠  桃花萬點紅
 
 
라 하였다. 그러자 공중에서 홀연 정지상의 귀신이 나타나, "천사千絲와 만점萬點은 누가 세어 보았더냐. 어찌 `버들빛은 실실이 푸르고, 복사꽃은 점점이 붉도다. 柳色絲絲綠, 桃花點點紅`라고 하지 않는가?"라고 하였다. 이 또한 한 글자씩을 고침으로써 시의 의경이 한층 생동감 있게 되었다. 실마다 푸른 빛을 머금고 하늘거리는 버들가지와, 온산을 점점이 찍어 붉게 물들인 봄 산의 흥취가 천과 만으로 구체화시켰을 때보다 한결 효과적으로 표현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또 매천 황현의 「압강도중 鴨江途中」 시의 3,4구는 원래,
 
 
바람이 건듯 부니 나귀 걸음 더 빨라지고
봄비를 맞고 나자 새는 모두 고웁구나.
微有天風驢更快  一經春雨鳥皆姸
 
 
라 하였는데, 김택영과 이건창이 이를 보고 `개皆`를 `증增`으로 고치게 하였다. `증`이라고 하면 `새가 더욱 고웁구나`가 되어 위 구의 `경更`과 잘 어울리는 대구가 된다. 나귀의 걸음이 산들바람에 더욱 경쾌해졌다면, 한번 봄비를 맞아 깨끗하게 씻겨진 새는 더욱 고울 것이 당연하다. 이 모두 봄날 상쾌한 바람과 대지를 적시는 봄비 속에서 새삼 느끼는 생명의 약동을 경쾌한 리듬으로 포착한 것이다.
 
이러한 `일자사`의 예는 모두 한시의 정제된 언어미의 전달 과정을 잘 보여 주고 있다. 이렇게 한 글자가 바뀌면서 발생되는 미묘한 뉘앙스의 차이까지 십분 고려한 바탕 위에서 한 편의 시는 창작되는 것이다.
 
이백은 「봉황대鳳凰臺」에서
 
 
삼산은 하늘 밖에 반쯤 떨어져 있고
이수는 백로주서 둘로 나뉘어졌네.
三山半落靑天外  二水中分白鷺洲
 
 
라고 하였는데, 위 구는 삼산이 아스라한 푸른 하늘 저편에 높이 솟아 있는 모습을 묘사한 것이다. 하늘 높이 솟아 있는 세 봉우리는 `높이 솟았다 高聳` 또는 `솟아올랐다 聳出` 등으로 표현되는 것이 상식인데, 시인은 이를 반대로 `반쯤 떨어졌다 半落`고 표현하였다. 바로 여기에 표현의 묘가 응축되어 있다. 이러한 참신한 발상은 이백이 아니고서는 불가능할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언어 형식을 묘하게 변화시키는 것은 어디까지나 추구하는 예술 목표 때문이지 문자의 유희와는 구분된다. 문자의 유희와 시는 조금도 관계가 없다. 그래서 이수광도 "대체로 글을 일러 조화라고 말한다. 마음속에서 이루어진 문장은 반드시 예술적이지만 손끝에서 이루어진 것은 결코 예술적이지 못하다"고 하였다.
 
이상에서 살펴보았듯이, 한시의 시어는 일상의 언어와는 달리 특이한 형식의 언어로 구성되어 있다. 한시는 시가 왕국에 속하는 언어를 별도로 가지고 있다. 그것은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언어를 예술적으로 개조하고 다듬어 변형한 것이다. 그러므로 이를 감상하는 일은 시가 언어의 규율과 형식을 이해하는 데에서 출발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상에서 한시의 예술성과 형상화의 원리에 대해 간략하게나마 살펴 보았다. 보다 상세한 설명과 예는 애정 한시를 감상하는 과정에서 보다 충분히 전달 될 수 있으리라고 본다.
 
오늘날 한시는 더 이상 창작이 어렵게 되었지만, 그 미의식과 문학정신은 더욱 계승 발전시켜야 할 소중한 정신 유산이 아닐 수 없다. 물론 한시를 이해하는 데 장애가 되는 해독상의 어려움과 비평 용어의 추상성은, 연구자들의 지속적인 관심과 연구를 통하여 극복해야 할 과제이다. 서로 다른 토양에서 형성된 서구 비평에 대한 맹목적 추수나 대입만으로 우리의 문학 전통과 정신을 이해할 수는 없지 않은가. 한시가 지닌 높고 깊은 미학의 차원은 기교주의 형식주의에 찌든 오늘의 문학 인식에 새롭고 건강한 지평을 열 수 있으리라 본다. 아울러 이 책이 그러한 인식의 확대에 조그만 밑거름이 될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
 
한국의 애정한시는 김도련 정민이 함께 엮은 <꽃피자 어데선가 바람 불어와>(교학사, 1992)의 내용을 작품 별로 구분하여 수록한 것이다. 일부 내용은 원래의 내용을 손질하여 다듬었다.
 
 
 
머리말
 
 
 
이 책은 한국의 애정 한시를 가려 뽑아 주제별로 나누어 감상과 평설을 더한 것이다. 한국의 한시에서 사랑을 노래한 시들은 헤일 수 없이 많다. 이들 시에 드러나는 옛 선인들의 삶과 사랑의 철학은 오늘의 우리에게도 분명 음미할만한 가치가 있다.
 
사람이 살아가는 한 평생은 끊임 없는 만남의 연속이다. 이러한 만남 가운데 가장 애틋하고도 가슴 설레이는 것이 사랑하는 남녀간의 만남이다. 물론 남녀 관계라 해도 모두가 애정관계인 것만은 아니었고, 설사 애정관계라 하더라도 오늘날과 같이 결혼 전에 극치를 이루었다가 결혼 후에는 무덤이 되어 버리는 그런 만남의 관계는 아니었다. 그릇되고 일그러진, 그래서 무절제하고 무분별하기까지 한 오늘 날의 애정 양태는 도덕의 부재만이 아닌 인간 존재의 참된 가치에 대한 몰이해에서 비롯된 것이 아닌가 싶다.
 
한시에서 그려지는 남녀 간의 사랑에도 한 살이가 있다. 길에서 우연히 만난 여인의 아름다운 자태에 그만 마음을 앗겨 버린 설레임의 연정이 있는가 하면, 규방 깊은 곳에서 마음 속의 님을 그려보는 그리움의 정서도 있다. 결혼하여 신혼의 단꿈에 젖어 시집살이의 고됨도 힘든 줄 모르는 겨운 사랑의 독백이 있고, 한편으로 세월 속에 변해 버린 남정의 무정한 마음을 원망하는 안타까운 여심도 있다.
 
그런가 하면 예기치 않은 일로 님을 떠나 보내야만 하는 이별의 정서와, 하염 없는 기다림에 지친 아픔의 노래도 있다. 우리의 사랑은 사랑하던 사람의 죽음 앞에서도 그칠 줄을 모른다. 사랑하는 아내와 사별한 뒤 슬픔과 회한에 젖어 목이 메이는 남성의 노래와, 다시는 못 올 길을 가신 님을 기다리며 차라리 망부석으로 굳어 버린  여성의 노래도 있다.
 
이 책은 이러한 사랑의 한 살이를 주제별로 분류하여 엮었다. 작품의 선정은 표현미와 예술성의 면에서 뛰어난 것만을 가려 뽑았고, 감상과 평설은 작품 내용의 해설을 넘어, 한시의 문예미학적 이해와 분석에 중점을 두었다. 내용이 비록 좋더라도 문학성이 결여된 작품은 싣지 않았다. 또 작가는 시대와 계층, 남녀를 뛰어 넘어 한국 한시 전반을 포괄하고자 노력하였다.
 
이들 한시를 읽고 감상해 가는 동안, 독자들은 감동적인 사랑의 메아리를 선인들의 육성을 통해 직접 생생하게 듣게 될 수 있을 것이다. 절제된 표현 속에 깊은 함축을 담은 한시에서의 사랑의 모습은 때로 낮설기까지 할 것이다. 그러나 바로 여기에 까맣게 잊고 있던 우리의 참 모습이 있다.
 
한시는 언어 표현의 함축미나 정서 표출의 세련미에 있어 다른 어떤 시가 양식 보다 우수하다. 또한 한시 속에는 옛 사람들의 생활의 체취와 삶의 숨결이 맥맥히 살아 숨쉬고 있다. 이러한 한시의 풍부한 표현미와 그 안에 담긴 선인들의 숨결은 우리가 가꾸고 발전시켜 나가야 할 소중한 문학 유산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지금까지 한시는 먼지 쌓인 역사의 뒤켠에 그대로 방치되어 날로 그 빛을 바래가고 있다. 그것들에 생기를 불어 넣고 새롭게 이해하려는 노력과 인식이 안타까운 오늘이다.
 
이들 시를 읽고 음미하는 과정에서, 우리 옛 선인들이 생각했던 사랑의 진정한 의미와 모습들을 되새겨 보고, 동시에 한시가 지닌 풍부하고도 깊은 맛을 충분히 느낄 수 있게 되기를 기대한다.
 

                                                       1992. 11
      
                                                   金都鍊. 鄭  珉

 
 
 
범례
 
1. 이 책은 한국 역대 애정 한시를 주제별로 뽑아서 엮은 것이다. 모두 13장으로 구분하였다. 청춘 남녀의 설레임과 그리움의 연정에서 신혼의 사랑 싸움과 시집살이의 어려움, 이별과 기다림, 여성의 원망과 남성의 아내 생각, 사랑하는 아내와 사별한 남성과 남편과 사별한 여성의 사모곡을 각각 나누어 묶었다.
 
2. 작품의 선정은 시적 함축미가 높은 것에 한정하였다. 내용이 아무리 좋아도 문학적 형상화가 떨어지는 작품은 배제하였다. 각 장의 작품은 시대나 작가의 계층과는 관계 없이 서사 단락에 맞추어 배열하였다.
 
3. 평설은 문예적 분석과 감상에 비중을 두었고, 이해를 돕기 위해 관련이 있는 고사 및 중국의 시가나 고전 시가, 현대시를 아울러 소개하였다.
 
4. 작품의 제목은 원시의 제목에 구애되지 않고, 시구 가운데 적절한 표현을 가려 현대적 감각에 맞게 달았다. 원시의 제목은 뒤에 별도의 색인을 달아 놓았다. 원문은 번역문과 나란히 제시하였다.
 
5. 작품의 번역은 원문에 충실하되, 리듬을 살려 의미 전달의 효용성을 고려하였다. 작품 바로 아래 주를 달아 원문의 이해를 도왔다.
 
6. 여러 편 가운데 몇 수만을 간추린 경우에는, 각 편마다 따로 제목을 달지 않고 한 제목으로 처리하였다.
 
7. 이본에 따라 글자의 출입이 있을 때 작품 이해에 필요한 경우에만 본문에서 이를 밝혔고, 그밖의 경우는 별도로 대교하지 않았다.
 
8. 장편의 경우, 시 전편을 한꺼번에 제시하지 않고, 단락을 구분 서술하여 언어 표현상의 미묘한 감정 처리를 음미할 수 있도록 하였다.
 
9. 동일 작가가 여러 장에 걸쳐 나오는 경우가 많아, 작가 소개는 부록으로 실었다.
 
10. 각 작품의 출전은 따로 밝히지 않았다. 주로 각 시인의 문집과 그 밖에 《동문선》·《국조시산》·《대동시선》·《해동시선》 및 연변에서 간행된 《역대한시집》 등의 시선을 참조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