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시이야기 ▒

청소년을 한시의 오솔길로 이끄는 [즐거운 한시읽기]

천하한량 2007. 5. 4. 00:14
시와 친구가 되지 않겠니?


 


별똥 떨어진 곳,
마음에 두었다
다음 날 가 보려
벼르다 벼르다
이젠 다 자랐소.

벼리야!
오늘은 아빠랑 함께 시를 읽어 보자꾸나. 정지용 시인이 쓴 〈별똥〉이란 작품이다. 별똥이 뭘까? 사전을 찾아보니 이렇게 나와 있구나. “태양계 내를 돌고 있는 바위 덩어리가 지구의 대기권으로 들어올 때 공기와 마찰하면서 열이 발생하여 빛을 내는데, 이것을 유성 또는 별똥별이라고 한다.”
시골에서 밤하늘을 바라보면 이따금씩 길게 꼬리를 끌며 별똥이 떨어지는 것을 볼 수가 있다. 지금도 사람들은 별똥별이 떨어질 때 소원을 빌면 그 소원이 꼭 이루어진다고 생각하곤 하지. 언젠가 아빠와 읽었던 이문구 선생님의 〈산 너머 저쪽〉이란 시를 기억하고 있니? 그 시에도 이렇게 적혀 있었다.

산 너머 저쪽엔
별똥이 많겠지
밤마다 서너 개씩
떨어졌으니

이상하게 두 작품은 같은 정서를 담고 있구나. 시 속의 소년은 별똥이 떨어진 산 너머 저쪽을 늘 마음에 두고 언젠가는 꼭 한번 가 볼 생각을 했었던 모양이다. 별똥 하나하나 마다에는 마음 깊이 묻어둔 소망들이 하나씩 담겨 있을 테니, 그곳에 가면 밤마다 빌고 또 빌었던 그 꿈들과 만날 수 있을 거라고 소년은 생각했다.
하지만 소년은 결국 그곳에 가보질 못했구나. 내일은 가봐야지 내일은 가봐야지 하고 벼르며 미루기만 하는 사이에 어느새 수염이 거뭇거뭇하게 자란 어른이 되고 말았던 거지. 그래서 아빠는 이 시를 읽을 때마다 늘 슬픈 생각이 들곤 한다.
너도 이런 경험이 있겠지? 어떤 물건이 갖고 싶어서 밤에 꿈도 꾸고 낮에도 온통 그 생각만 하다가, 막상 그 물건을 손에 넣으면 얼마 못 가서 시시해지고, 나중에는 거들떠보지도 않게 되는 경험 말이다. ‘이젠 다 자랐소’란 말은 ‘이젠 아무 소용없게 되었소’라는 말과 같다. 한때 그렇게 소중했는데, 마음으로 벼르고 별렀던 일인데, 이제 소용이 없다니 얼마나 슬픈 일이냐.
시란 이렇게 짧은 말 속에 깊은 뜻, 진한 울림을 담고 있다. 누구나 아는 이야기도 시인이 말하면 처음 듣는 신기한 이야기로 변한다. 소세키라는 일본 시인은 이런 시를 쓴 적이 있다.

홍시여, 이 사실을 잊지 말게
너도 젊었을 적엔
무척 떫었다는 걸

홍시 감은 무척 달고 맛있지만, 아직 익지 않은 땡감일 때는 입에 댈 수도 없을 만큼 떫다. 떫은 땡감의 시절을 지나 서리를 맞으며 찬 날씨를 견뎌낸 뒤에야 달고 맛있는 홍시가 된다. 시인은 무슨 말이 하고 싶었던 걸까? 땡감은 떫지만 홍시는 달다. 이런 하나마나 한 이야기를 하려고 이 시를 쓴 것은 아니겠지? 결국 시인은 홍시 감 하나를 앞에다 두고서 우리들 사람 사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 셈이다.
젋은이들은 일처리가 미숙하고 부족하게 마련이다. 어른들의 눈에는 늘 반도 안 차지. 하지만 그 어른들도 젊은 시절에는 지금 젊은이들과 다를 것이 없었다. 그러다가 힘든 시련을 겪고 많은 단련을 거치면서 지혜가 생겨나 슬기로운 어른이 된 것이지. 사람은 자신의 미숙한 젊은 시절을 돌아보며 남의 실수를 감싸 안을 수 있어야 한다는 뜻이 이 시 속에 담겨 있다.
어때 놀랍지 않니? 단 세 줄에 이렇게 깊은 뜻을 담을 수 있다는 것이. 시란 이렇게 말을 극도로 아끼면서 많은 말을 할 수 있는 마법의 언어다. 그래서 시를 많이 읽으면 저절로 생각하는 힘이 생겨나고, 사물을 깊이 바라보게 된다. 물론 행동도 의젓해지겠지. 또 시 속에는 우리말에서만 느낄 수 있는 가락이 있기 때문에 시를 소리 내서 읽다보면 우리말의 아름다움을 더 깊이 느낄 수가 있다.
다시 한편 더 읽어보자. 안도현 시인의 〈너에게 묻는다〉는 짧은 작품이다.

연탄재 함부로 발로 차지 마라
너는 누구에게 한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느냐

옛날 아빠가 어릴 적에는 모든 집에서 연탄으로 불을 때며 밥을 짓고 난방을 했다. 아빠도 겨울 새벽에 벌벌 떨면서 연탄불을 갈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겨울에는 집집마다 쓰레기통 옆에 연탄재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곤 했다. 겨울에 길이 얼면 그 연탄재를 부수어 미끄러지지 않게 하기도 했었지.
시인은 시 속에서 난데없이 연탄재를 발로 차지 말라고 하는구나. 그 이유가 뭘까? 그 대답은 누군가에게 한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느냐는 물음 속에 있다. 연탄은 제 몸의 열량을 다 태워서 사람들을 따뜻하게 해주고 이제는 쓸모없이 흰 재만 남았다. 그 흰 재가 하찮게 보여 사람들은 발로 차지만, 그것이 누군가를 따뜻하게 해주려고 제 가진 것을 다 나눠주고 남은 빈 몸이라고 한다면 그렇게 함부로 대할 수 있겠느냐는 말이다. 결국 아무 쓸모없는 연탄재 앞에서 시인은 더럽고 지저분하다는 생각대신에 나는 누군가에게 그렇게 내가 지닌 따뜻함을 아낌없이 나눠준 적이 있었던가 하는 반성을 하고 있는 셈이다. 어때 멋있지 않니?
이런 식으로 주변을 둘러보면 매일 지나치는 평범한 사물 속에도 우리가 미처 생각지 못한 의미들이 참 많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또 시는 홍시나 연탄재처럼 겉으로 하는 말과 속에 담긴 뜻이 비유를 통해 연결되기 때문에, 생각의 힘을 길러주고 사물을 꼼꼼히 살펴보는 습관을 길러 준다. 또 연탄재를 보지 못한 너는 이 시를 통해 지금과는 다른 예전의 생활에 대해서도 이해할 수가 있다.
이제 예전에 네 누나가 초등학교 시절에 썼던 일기장 이야기를 좀 해야겠다. 담임 선생님께서 일기를 쓸 때 날씨를 그냥 ‘맑음’, ‘흐림’이라고 하지 말고 재미있는 표현으로 설명해 보라고 했었지. 그때 누나의 일기장 속의 날씨 설명은 이렇게 적혀 있었다.
“노랗고 어여쁜 개나리같이 생긴 해가 허연 수염 난 구름과 둥실둥실 떠 있다.” “시원한 바람이 사뿐사뿐 뛰어다니고 하늘이 울적해 보인다.” “어두운 하늘에서 시커먼 구름들이 각자 심술을 내면서 귀엽고 아주 조그만 빗방울들을 하나하나씩 새나 강아지에게 먹이를 주듯이 떨어뜨린다.” “탱탱볼처럼 동그랗고, 오렌지처럼 상큼한 해님이 방글방글 벙글벙글 신나게 수영하듯 저리 빙글 요리 빙글거리며 파아란 하늘에 동동 떠 있다.” “구름이 서럽거나 우울한 일이 많았던 모양인지 얼굴이 어둑어둑하고, 마침내는 눈물을 엄청나게 흘리고 있다.”
아빠는 그 표현이 너무 재미있고 살아 있어서, 예전에 누나의 이 글들을 아빠의 책에 실었을 정도다. 그때 그 출판사의 편집장 아저씨도 놀라서 누나의 일기장을 출판하자고까지 했었지. 지금도 누나의 그때 일기를 읽어보면, 마치 살아있는 구름이나 햇님의 속마음을 잘 알아 대화를 나누고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어른들은 절대로 이런 표현을 쓸 수가 없지. 그런데 지금 너나 누나는 일기도 안 쓰고, 글 쓰는 것도 별로 좋아하지 않고, 시 읽기는 그만 둔 지 오래고, 매일 학교와 학원 숙제하기 바쁘고, 너는 특히 시간만 나면 게임이나 하려고 드니, 그야말로 ‘이젠 다 자랐소’가 아니고 뭐겠니?
해맑고 반짝이던 어린이가 자라면서 보석처럼 더 반짝거리지도 않고, 그저 학원 숙제 학교 숙제 따라하기 바빠, 책 한 줄 읽지 않고 시 한편 읽지 않는 사람이 되어가는 것은 참 슬픈 일이 아닐 수 없다. 사람들은 누구나 마음속에 보배로운 구슬을 하나씩 품고 있단다. 이 구슬은 늘 닦아 잘 간수해두지 않으면 금세 때가 덕지덕지 끼어, 빛나지도 않고 아무 것도 아닌 돌덩어리가 되고 만다. 이 구슬을 늘 반짝반짝 빛나게 하려면 생각하는 힘을 길러야 한다.
생각하는 힘은 어떻게 기를 수 있을까? 책을 많이 읽어야 한다. 그 중에서도 아빠는 좋은 시를 많이 읽어볼 것을 권하고 싶다. 좋은 시는 우리가 늘상 보는 사물을 새롭게 보게 해 준다. 누구나 알던 평범한 연탄재나 홍시 감 같은 사물이 시인의 눈을 거치면 아주 낯설고 새로운 사물로 변한다. 참으로 신기한 변화라고 할 수 있지.
벼리야! 매일 한편 씩 좋은 시를 소리 내서 읽고, 시인이 시속에서 말하려고 한 것이 무엇인지를 생각해보도록 해라. 나는 네가 공부만 잘하는 ‘든 사람’이나 남보다 똑똑한 ‘난 사람’보다, 마음이 따뜻한 ‘된 사람’이 되기를 바란다. 시를 통해서 세상을 이해하고 사람을 사랑하는 듬직한 젊은이가 되어 주었으면 좋겠구나. 시는 네게 좋은 길잡이 선생님이 되어 줄게다. 시와 친구가 되지 않겠니?   
말하지 않고 말하는 방법
 
 
 
사람들은 왜 시를 짓고 시를 읽을까? 그냥 우리가 생활 속에서 하는 말과 시에서 쓰는 표현은 어쩐지 조금 달라 보인다. 시를 읽으면 나도 모르게 머리 속에 어떤 풍경이나 느낌들이 아지랑이처럼 뭉게뭉게 피어 오른다. 우리가 그냥 주고 받는 표현 속에는 이런 느낌이 없는데 말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일상에서 쓰는 언어와 문학 작품 속에서 쓰는 언어는 어떻게 다를까?
 
옛날 중국의 유명한 철학자 노자(老子)의 스승은 상용(商容)이란 사람이었다. 스승은 늙고 병들어 이제 곧 숨을 거두려고 하였다. 노자는 마지막으로 스승에게 가르침을 청하였다.
 
"선생님! 돌아가시기 전에 제게 남기실 가르침이 없으신지요?"
스승은 이렇게 말했다.
"고향을 지나갈 때에는 수레에서 내려 걸어서 가거라. 알겠느냐?"
노자가 대답했다.
"네! 선생님. 어디에서 살더라도 고향을 잊지 말라는 말씀이시군요."
수레를 내려서 걸어 간다는 것은 자신을 낮추는 데서 나온 예의 바른 행동이다. 그래서 노자는 스승의 엉뚱해 보이는 말을 듣고 이렇게 알아 들었던 것이다.
 
스승이 다시 말했다.
"높은 나무 밑을 지날 때는 종종걸음으로 걸어가거라. 알겠느냐?"
노자가 바로 대답했다.
"네! 선생님. 어른을 공경하라는 말씀이시지요?"
높은 나무는 그 숲에서 가장 나이가 많은 나무다. 종종걸음은 걸음의 폭을 짧게 해서 어른이나 임금님 앞을 지날 적에 걷는 걸음걸이이다. 높은 나무 밑을 지나갈 때 종종걸음으로 가라는 스승의 말을 듣고 노자는 윗사람을 공경하라는 말씀으로 금세 바꾸어서 알아 들었다.
 
이번에는 스승이 입을 크게 벌렸다.
"내 입 속을 보거라. 내 혀가 있느냐?"
"네. 있습니다. 선생님!"
"그러면 내 이가 있느냐?"
상용은 나이가 너무 많았기 때문에 이빨이 다 빠지고 없었다.
"하나도 없습니다. 선생님!"
스승은 곧바로 제자에게 말했다.
"알겠느냐?"
노자는 바로 이렇게 대답했다.
"네! 선생님께서 말씀하신 뜻을 알겠습니다. 이빨처럼 딱딱하고 강한 것은 먼저 없어지고, 혀처럼 약하고 부드러운 것은 오래 남는다는 말씀이시군요."
그러자 스승은 돌아 누웠다.
"천하의 일을 다 말하였다. 더 이상 할 말이 없구나."
 
이빨은 딱딱하고 굳센 것인데 먼저 없어져 버렸다. 혀는 부드럽고 약한데 남아 있었다. 상용이 혀와 이빨을 차례로 보여준 것은 부드럽게 남을 감싸고, 약한 듯이 자신을 낮추는 사람은 오래 동안 복을 받고 잘 살 수가 있고 제 힘만 믿고 멋대로 행동하는 사람은 얼마 못 가서 망하고 만다는 뜻이었다.
 
자! 상용이 노자에게 한 말을 다시 한번 정리해 보자. 상용이 말한 것은 고향을 잊지 말고, 어른을 공경하며, 부드러움으로 강한 것을 이기라는 가르침이었다. 이렇게 직접 말하면 될 것을 가지고, 상용은 일부러 빙빙 돌려서 비유를 통해 설명했다. 왜 상용은 직접 쉽게 말하지 않고 일부러 어렵게 돌려서 이야기했을까?
사실 상용이 이 말을 직접 했다면 그것은 아무런 느낌도 주지 못하는 싱거운 말이 되고 말았을 것이다. 대신에 상용은 직접 입을 벌려서 혀를 보여주고 또 이빨을 보여준 후, "알겠느냐?"하고 물었다. 이렇게 해서 부드러움이 강함을 이긴다는 평범한 교훈을 늘 잊지 않고 기억할 수 있도록 인상 깊게 심어 줄 수가 있었다.
 
시도 마찬가지다. 시라는 것은 상용의 말처럼 직접 말하면 아무 것도 아닌 것을 돌려서 말하고 감춰서 말하는 것이다. 그렇게 돌려서 말하고 감춰서 말하는 가운데, 저도 모르게 느낌이 일어나고 깨달음이 생겨난다. 이렇게 해서 생겨난 느낌과 깨달음은 지워지지 않고 오래도록 내 마음에 남는다.
한시에서는 도대체 어떤 식으로 말하고 있을까? 이제 직접 한시를 한 수 감상해 보기로 하자.
 
 
흰둥 개가 앞서 가고 누렁이가 따라가는   
들밭 풀 가에는 무덤들이 늘어섰네.                      
제사 마친 할아버지는 밭 두둑 길에서                   
저물녁에 손주의 부축 받고 취해서 돌아온다.             
白犬前行黃犬隨  野田草際塚  
老翁祭罷田間道  日暮醉歸扶小兒
 
 
조선 중기에 이달이라는 시인의 작품이다. 이 시의 제목은 〈무덤에 제사 지내는 노래(祭塚謠)〉이다. 시 속의 광경을 먼저 살펴보자. 먼저 첫 번째 구절에는 흰 강아지와 누렁 강아지 두 마리가 나온다. 흰 강아지가 앞장서서 뛰어가고 누렁 강아지가 뒤질새라 멍멍 짖으며 그 뒤를 따라간다. 밭들이 옹기종기 펼쳐진 풀밭 가에는 무덤들이 굉장히 많다. 거기에 어떤 할아버지가 손주와 함께 개를 앞세우고 집으로 돌아오는 모습이다.
 
세 번째 구절에는 `제사를 마쳤다`는 표현이 나온다. 이것으로 보아 할아버지는 그 풀밭 가에 있는 많은 무덤들 가운데 어느 한 무덤에 제사를 지내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었던 모양이다. 시간은 땅거미가 밀려드는 저물녘이다. 할아버지는 술에 취하셨다. 술 취한 할아버지가 자꾸 비틀거리시니까 옆에 있던 손자가 걱정이 되는지 할아버지를 부축하고 있다.
 
자! 이제 조용히 눈을 감고, 이 시 속의 풍경을 그림으로 떠올려 보자. 강아지 두 마리와, 밭 두둑이 보인다. 무덤들도 있다. 그리고 할아버지와 손자. 지금 여러분의 머리 속에는 어떤 생각이 지나가는가? 우리는 지금도 추석 때나 한식일이 되면 조상의 산소에 성묘를 간다. 아! 지금 할아버지와 손자는 조상의 산소에 성묘를 갔던 모양이로구나. 혹시 여러분 가운데 부모님을 따라서 할아버지나 증조 할아버지의 산소에 성묘를 갔던 기억이 있는 사람들은 이 시 속의 광경이 더 친숙하게 여겨질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만 보기에는 위 시의 내용이 왠지 너무 심심하다. 할아버지가 손자와 강아지 두 마리를 데리고 성묘를 갔다가 저녁 무렵이 되어 돌아온다는 것이 시에서 말하고 있는 전부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쨌다는 걸까?
 
과연 위의 시에서 시인이 말하려고 한 것은 이것이 전부일까? 주의 깊게 살펴 보면 몇 가지 이상한 부분을 발견해낼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무얼까? 우선 왜 아버지는 없고 할아버지와 손자만 성묘를 갔을까 하는 점이 궁금하기 짝이 없다. 왜 산 위도 아니고, 밭 두둑 가에 있는 풀밭에 무덤이 많다고 했을까? 보통 풀밭에는 무덤을 쓰지 않는데 말이다. 또 할아버지는 왜 술에 취했을까? 저물녘이라고 했는데, 그렇다면 왜 할아버지는 하루 종일 그렇게 술을 마시면서 무덤 옆을 떠나지 못했던걸까?
 
이런 의문을 품고 이 시를 새로 읽어 보면, 앞서와는 다른 느낌이 일어난다. 이 시가 그냥 단순히 조상의 성묘를 갔다온 장면을 노래한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할아버지와 손자가 제사를 지낸 사람은 누구였을까? 증조 할아버지? 아니면 고조 할아버지? 그도 아니라면 할머니였을까? 그렇지가 않다. 두 사람이 제사를 지낸 주인공은 바로 시속에 나오는 할아버지의 아들이고, 손자의 아버지였다.
 
그렇다면 밭 두둑 옆 풀밭에는 왜 그렇게 무덤이 많았던 걸까? 아마도 전쟁이나 전염병 같은 것 때문에 한꺼번에 많은 사람들이 죽었던 모양이다. 너무 많은 사람이 한꺼번에 죽어서 사람들은 양지 바른 산 위에다 죽은 사람들을 묻을 겨를이 없었던 것이다. 소년의 아버지도 전쟁 같은 천재지변을 만나 돌아가신 것이 틀림 없다.
 
할아버지는 손주를 데리고 아들의 산소에 성묘하러 왔다. 무덤에 돋은 풀을 뽑고, 술을 부어 한 잔 따라 주고 나니까 죽은 아들이 너무 보고 싶어서 차마 그대로 돌아오지 못하고 하루 종일 무덤 옆에 앉아서 속이 상해 술을 마셨다. 강아지를 두 마리나 데리고 간 것으로 보아, 무덤이 동네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었던 사정도 알 수 있다.
 
이 시를 지은 이달은 조선시대 일본이 우리나라에 쳐들어와 일으킨 전쟁인 임진왜란을 직접 체험했던 시인이었다. 이런 정보를 가지고 시를 다시 읽어 보면, 좀더 깊이 있게 이 시를 이해할 수 있다. 할아버지의 아들은 임진왜란 때에 쳐들어온 왜적에게 죽음을 당했고, 이때 온 동네의 많은 사람들이 한꺼번에 억울한 희생을 당했다. 한식날 할아버지는 아들이 남긴 하나뿐인 혈육인 손자를 데리고 죽은 아들의 무덤을 찾아 왔다. 하루 종일 슬픔에 잠겨 있던 할아버지는 제사를 지내려고 가지고 간 술을 혼자 다 마셔서 취하고 말았던 것이다. 손자는 나이가 어려서 할아버지의 슬픔을 잘 알지 못한다. 돌아가신 아버지에 대한 기억도 별로 없다. 오늘 따라 할아버지가 왜 저러실까 싶어서 걱정스런 표정으로 고개를 들어 할아버지를 올려다 볼 뿐이다.
 
이렇게 한 편의 시를 곰곰히 따져서 읽어 보면, 처음 별 생각 없이 시를 읽었을 때와는 완전히 달라진다. 시인은 시 속에서 벌써 다 말하고 있지만, 겉으로는 이런 사실을 하나도 표현하지 않았다. 시인이 이 시 속에서 정말 하고 싶었던 이야기는 무얼까? 임진왜란이라는 참혹한 전쟁이 가져다 준 뜻하지 않은 죽음과, 그 죽음이 사람들의 마음 속에 남긴 깊은 상처였다.
 
그러나 시인이 말하려고 했던 이런 의미는 꼼꼼히 따져 보아야 이해할 수 있다. 이것은 좀전에 상용이 노자에게 입을 열어 보이던 것과 하나도 다르지 않다. 만약 스승이 "알겠느냐?"고 했을 때, 제자가 선생님께서 왜 저러실까 하며 고개를 갸웃하고만 있었다면 아무 소용이 없다. 만약 여러분이 위의 시를 읽고서 그냥 한식날 성묘 가던 일만 생각했다면 이 시를 제대로 읽은 것이 아니다.
 
물론 처음부터 이런 의미가 다 보이지는 않는다. 많은 훈련과 연습을 해야 한다. 한편의 시를 제대로 읽는 과정은  마치 숨은 그림 찾기나 소풍날 하곤 했던 보물찾기와 같다. 시인은 한편의 시 속에 여기저기 숨은 그림이나 보물을 감춰둔다. 독자들은 그 시를 읽으면서 그 속에 감춰진 그림이나 보물을 열심히 찾는다. 서툰 독자들은 한 두 개 밖에 찾지 못하고 말지만, 익숙한 독자들은 금세 숨은 그림을 다 찾아내고 만다.
 
일상 생활 속에서 쓰는 말은 금세 이해할 수 있고 또 다른 생각이 필요없다. 그러나 시에서 쓰는 말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한번 더 생각해 보아야 한다. 대충 겉만 보아서는 쉽게 이해할 수가 없다. 이것이 시를 읽는 재미이다. 좋은 시  속에는 감춰진 그림이 많다. 그래서 우리에게 생각하는 힘을 살찌워준다. 보통 때 같으면 그냥 지나치던 사물을 찬찬히 살피게 해준다.
이 책은 현재 진행 중인 어린이용 한시입문서의 초고를 올린 것이다. 초등학교 고학년에서 중학생 정도를 독자층으로 맞춘 것이다. 96년 솔출판사에서 <한시미학산책>이 간행되었을 때, 수염이 덥수룩한 어린이책 출판사 사장이 그간 자기가 만든 어린이 책을 잔뜩 싸들고 나를 찾은 일이 있었다. 물론 처음엔 교수가 무슨 어린이용 책이냐고 펄쩍 뛰었었다. 그의 태도나 열정은 아주 인상적이었는데, 그 후 몇 해동안 계속된 성의에 내가 항복하고 말았다. 그런데 막상 집필을 시작하니 눈높이를 맞추는 일 때문에 어른 글 쓰는 것보다 훨씬 어려움을 절감하게 된다. 문장 하나 하나 체크하며 넘어가는 글쓰기는 내게 참 새로운 경험을 하게 해주고 있다. 이제 올리는 이 글은 완성된 글이 아니라 초고다. 질정을 기대한다. 여기에 올린 첫글은 내가 내 아들에게 보내는 편지글 형식으로 썼는데, 이 책의 서설 쯤 될 것으로 생각한다.
 
 
머리글
 
 
 
벼리야!
요즘 네가 학교에서 한자를 배우고 나더니 제법 아는 글자가 많아 졌더구나. 며칠 전엔 `오산집(五山集)`이라고 써있는 한문 책을 뽑아 들고 와서 이렇게 말했었지?
"아빠! 다섯 오, 뫼 산, 모을 집, 그러니까 이건 산이 다섯 개 모였다는거야?"
아빠는 그때 깜짝 놀랐다. 원래 오산집은 오산이라는 호를 가졌던 조선시대 학자의 글을 모았다는 뜻이란다. 그렇지만 그냥 글자로만 해석한다면 너처럼 풀이할 수도 있지. 한자는 뜻 글자니까, 글자 몇 개가 모이면 금세 이런 뜻을 만들게 된단다.
 
길을 가다가도 아는 한자가 나오면 반가워하는 너를 보다가 아빠가 네게 작은 선물을 마련하기로 했다. 어때! 오늘은 아빠랑 한시에 대해 이야기해볼까?
 
옛날에는 유치원에 다닐 나이가 되면 서당에 가서 천자문을 배우는 것으로 학교 공부를 시작했었지. 그리고 나서 한자를 제법 익힌 뒤엔, 주로 여름방학을 이용해서 시냇가 정자 같은 곳에 나가 《당음(唐音)》이니 《추구(推句)》니 하는 한시 책을 외웠단다. 처음에는 물론 뜻도 모른 채 종아리를 맞아가며 노래를 부르듯이 외우기만 했지. 그러다 보면 어느 순간 그 한시의 리듬도 알게 되고, 표현하는 방법도 익히게 되었단다.
 
너도 학교에서 동시를 많이 지었지? 지난 번에 네가 지은 동시도 멋있더구나.  `동시`는 "아이 동(童), 시 시(詩)", 이 두 글자를 쓴다. 이게 무슨 뜻일까? 그렇지, 동시는 아이들이 지은 시란 뜻이다. 어른들이 지었더라도 어린이의 마음으로 지은 것은 모두 동시라고 할 수 있어. 교과서에도 어른들이 지은 동시가 많이 나와 있지? 아빠와 함께 동시를 한 편 읽어 보자.
 
 
산너머 저쪽엔
별똥이 많겠지
밤마다 서너 개씩
떨어졌으니.
산너머 저쪽엔
바다가 있겠지
여름내 은하수가
흘러갔으니
 
 
산골에 사는 어린이의 마음이 잘 담겨 있구나. 이문구 선생님의 〈산 너머 저쪽〉이라는 시란다. 소년은 여름 밤 마당에 멍석을 깔고 누워서 하늘을 보았겠지. 하늘에는 은하수가 걸려 있고, 이따금씩 별똥별이 산너머로 떨어진단다. 너 이런 말 들어 본 적 있니? 별똥별이 떨어질 때 소원을 빌면 그 소원이 꼭 이루어진다는 말 말이야. 소년은 생각했겠지. 산너머엔 밤마다 내가 소원을 빌었던 별똥별이 참 많이도 떨어져 있겠구나 하고 말이지.
 
하늘에 은하수도 여름 내내 그쪽으로 흘러갔으니, 산너머 저쪽엔 바다가 있을 거라고 소년은 생각했다. 산골에 사는 소년은 언제나 산너머 저쪽엔 무엇이 있을까 하고 궁금했을거야. 소년은 어서 자라 저 산너머에 있는 넓은 세상으로 나가 멋진 꿈을 마음껏 펼쳐보고 싶었을 거야.
 
이렇게 많은 생각들이 짧은 여덟 줄 속에 다 들어 있구나. 소리를 내어 읽어보렴. 리듬이 느껴지지? 시는 이렇게 말로는 다 표현할 수 없는 생각들을 짧은 글 속에 모두 담을 수가 있단다. 시에는 정말 이상한 힘이 있어. 말로 설명하거나 글로 풀어 쓰는 것보다 시로 말하면 읽는 동안에 이상한 울림도 생겨나고, 머리 속에는 아름다운 그림이 그려지잖니? 조금전 그 시만 해도 읽고 나면 시골집 마당에 누워 밤하늘을 올려다 보면서 산너머 저쪽을 꿈꾸던 산골 소년의 해맑은 눈동자가 떠오르는 것만 같지 않니?
 
그래서 지금이나 옛날이나 사람들은 시를 즐겨 지었단다. 세상에는 자세히 설명하지 않아도 충분히 알 수 있는 마음이 있지. 우리가 시를 사랑하는 것은 이런 마음과 마음으로 통하는 느낌을 좋아하기 때문이야. 그런데 옛날 사람들은 어떻게 시를 썼을까? 옛날에도 시조처럼 우리말로 된 시는 있었지만, 대부분의 지식인들은 모두 한자로 글을 짓고 썼단다. 그래서 시도 한자를 가지고 지었지. 한자를 가지고 지은 시라서 그것을 `한시(漢詩)`라고 부른단다.
 
너는 한자도 어려운데 한시는 얼마나 어려울까 생각하겠지. 그렇지만 그 안에 담고 있는 생각은 그때나 지금이나 조금도 다르지 않다고 아빠는 생각한다. 물론 한시는 네가 이해하기엔 너무 어렵다. 어른들도 대부분 한시를 보면 골치가 아프다고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거든. 그렇지만 지금 네게 영어로 된 책을 주었을 때 무슨 뜻인지 이해할 수 없는 것이나, 옛날 한문으로 된 책을 어떤 의미인지 알지 못하는 것이나 무슨 차이가 있겠니? 영어로 된 동화책을 우리말로 옮겨서 읽으면 아무 문제 없이 이해할 수가 있지? 이와 마찬가지로, 한자로 쓰여진 한시도 아빠가 한글로 옮겨서 설명해 줄게. 그러면 아주 옛날에 한자로 쓴 시인데도 오늘 네가 읽고 이해하는데 별 큰 문제가 없을 거야.
 
생각해보면 우리 옛 선조들은 참으로 훌륭한 분들이셨던 것 같다. 우리가 매일 보면서도 그냥 지나치고 마는 일들도 그분들은 그렇게 하지 않았어. 한번 더 생각하고, 조금 더 느끼려고 노력했지. 어떻게 하면 더 성실하게 살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자연을 좀더 느낄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사물을 통해 내 삶을 변화시킬 수 있을까? 이 책에는 좀더 느끼고 생각하며 변화할 줄 알았던 옛 선조들의 정신이 담겨 있단다.
 
한시 이야기를 재미있게 읽다 보면 한자 실력도 저절로 많이 늘어나겠지만, 그것보다 아빠는 네가 전에는 이해할 수 없었던 세상의 여러 가지 일들에 대해 알게 되었으면 좋겠다. 사물을 바라보는 방법과 자기의 생각을 남에게 요령있게 전달하는 방법도 배울 수 있을게다. 말을 많이 하지 않고도 웅변보다 더 큰 울림을 남길 수 있다는 것도 알 수 있을거야. 마음에도 무늬가 있고, 시 속에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따뜻한 정이 녹아 들어 있는 줄도 알게 되겠지.
 
그렇지만 이 책은 한번 읽어서는 담긴 뜻을 잘 알 수가 없을거야. 한번 읽고, 또 다시 읽고, 학년이 올라가서 다시 한번 읽으면 읽을 때마다 조금씩 다른 뜻을 알아 갈 수 있을 거야. 또 한시에 대한 이야기를 읽는 동안 아빠는 네가 시에 대해서도 아주 똑똑히 잘 이해 할 수 있게 될거라고 믿는다. 자! 이제 아빠랑 함께 슬슬 한시 여행을 떠나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