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시이야기 ▒

선인들의 일상과 만나보는 [생활 속의 한시]

천하한량 2007. 5. 4. 00:31
記夢  

                          이수광
 
紫宮의 한 밤, 群仙들 모여                    
낯빛도 기쁘게 날 맞아 절하며,                
궁 가운데 七寶床에 앉으라 하니            
아득히 이 몸 靑蓮界로 들어왔네.             
般若湯 한 잔을 따라 주면서                   
玉帝의 瓊漿이라 일러 주누나.                
마시자 정신이 맑고 상쾌해지며                
塵土에 찌든 속을 깨끗히 씻어주네.            
뜰 앞 화로에선 가는 연기 오르더니            
三生의 온갖 일들 환히 알게 되었도다.         
瑤臺 허공 笙 불던 학, 깨어보니 간 곳 없고     
만리 가득 안개 또한 꿈속의 일일래라.         
바다 위 봉래산엔 오래동안 주인 없고           
백락천은 인간의 괴로움을 실컷 겼었다오.       
돌아갈 지팡이를 급히 만들자.                  
봄 바람 삼화수 꽃잎 떨구기 전에.              
紫宮半夜群仙會  群仙色喜迎我拜
坐我堂中七寶床  황然身入靑蓮界
餉我一杯般若湯  云是玉帝之瓊漿
철罷精神頓淸爽  洗盡十年塵土腸  (마칠 철)
庭前有爐烟細起  令我了悟三生事
瑤空笙鶴覺來失  萬里烟霞造夢裏
海上蓬萊久無主  樂天偶餉人間苦
唯須作急理歸공  東風吹老三花樹  (지팡이 공)
 
전생의 기억을 더듬어 왔던가? 깊은 밤 신선의 잔치에 불쑥 찾아 들었다. 칠보상 앞에 앉아 반야탕을 마시니 정신이 맑게 돌아 들어 티끌 세상에 찌든 장을 깨끗이 씻어 낸다. 그 뿐만이 아니다. 아마득히 잊었던 삼생의 지난 기억들도 다시 또렷하게 떠오른다. 그러나 꿈인걸. 문득 선듯한 기운에 정신을 차려 보니 좀전 춤추던 학은 사라져 버리고, 떠들썩 흥겹던 잔치 자리도 다 파하고 말았다. 눈앞에 기다리고 있는 것은 인간 세상의 괴로움 뿐이다. 왜 내 꿈 속에 신선의 잔치가 펼쳐졌던가? 혹 내가 이 세상 귀양살이를 다 마치고 선계로 돌아갈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알려 주려 했던 것일까? 그렇다면 나는 준비를 해야겠다. 선계로 돌아갈 때 짚고 갈 지팡이도 다듬어 놓고, 이 봄바람이 저 선계의 삼화수 꽃잎을 다 불어 떨구기 전에, 아름다운 선계의 봄동산에서 거룩하게 한번 놀아 보아야겠다.
〈夢遊廣桑山序〉
 
                                                                                                                   許蘭雪軒
 
 
을유년에 내가 상을 입어 외삼촌 댁에 묵고 있을 때, 밤 꿈에 바다 위 산으로 둥실 날아 오르니, 산은 모두 구슬과 옥이었고, 뭇 봉우리는 온통 첩첩이 쌓여 있는데, 흰 옥과 푸른 구슬이 밝게 빛나 현란하여 똑바로 쳐다 볼 수가 없었다. 무지개 구름이 그 위를 에워싸니 오색 빛깔은 곱고도 선명하였다. 옥 샘물 몇 줄기가 벼랑 사이에서 쏟아지는데, 콸콸 쏟아내리는 소리는 옥을 굴리는 것 같았다.
두 여인이 있어 나이는 스믈 남짓한데, 얼굴빛은 모두 빼어나게 고왔다. 하나는 자주빛 노을 옷을 걸쳤고, 하나는 푸른 무지개 옷을 입었다. 손에는 모두 금색 호로병을 들고 사뿐사뿐 걸어와 내게 절을 하는 것이었다. 시내물을 따라 구비구비 올라가니 기화이초가 곳곳에 피었는데 이루 이름할 수가 없고, 난새와 학과 공작과 비취새가 옆으로 날며 춤을 추고, 숲 저편에선 온갖 향기가 진동하였다. 
마침내 산 꼭대기에 오르니 동남편은 큰 바다라 하늘과 맞닿아 온통 파아랗고, 붉은 해가 막 돋아오르니 물결은 햇살을 목욕시켰다. 봉우리 위에는 큰 연못이 있는데 아주 맑았다. 연꽃은 빛깔이 푸르고 잎이 큰데 서리를 맞아 반나마 시들었다. 두 여인이 말하기를, "이곳은 광상산이랍니다. 十洲 중에서도 으뜸이지요. 그대가 신선의 인연이 있는 까닭에 감히 이곳에 이르렀으니 어찌 시를 지어 이를 기념치 않으리오." 하므로, 나는 사양하였으나 한사코 청하는 것이었다.  이에 절구 한 수를 읊조리니, 두 여인은 박수를 치고 크게 웃으며 말하기를, "완연한 신선의 말씀이로군요." 하였다. 조금 있으려니까 한떨기 붉은 구름이 하늘 가운데로부터 내려와 봉우리 꼭대기에 걸리더니, 둥둥 북소리에 정신이 들어 깨어났다. 잠자리엔 아직도 烟霞의 기운이 남아 있었다.     

그녀는 무슨 이런 꿈을 꾸었을까?  광상산은 어디에 있나. 둥둥 북소리에 잠을 깨고 나면, 잠자리에 상기도 남아 있었다던 연하의 기운. 난새와 학이 너울너울 춤을 추고, 공작새와 비취새가 옆으로 날아 가는 곳. 산 꼭대기 큰 연못에는 연꽃이 피어 있고, 선녀들이 나를 반겨 주는 곳. 그녀는 무슨 이런 꿈을 꾸었을까?


서언
 
 
 
남도 답사를 돌이켜 보자면 아지 못할 상념에 빠져들 때가 많다. 옥봉의 시집을 처음 펼쳐 읽었을 때도 그랬다. 언젠가 시험 감독을 들어갔다가 지니고 들어간 옥봉시집에 흠뻑 빠져 학생들이 답안을 다 제출하고 나간 빈 강의실에서 넋놓고 앉아 있던 기억. 옥봉은 나와 그렇게 만났다. 가끔씩 사는 꼴이 한심스럽고, 무언가 안타깝고, 어딘가 떠나고 싶을 때, 나는 그때마다 옥봉시집을 읽었다. 그의 여린 시심이 내 마음을 적셔 주고, 그의 아픈 가슴이 내 마음에 위로를 주었다. 이상하지 않은가 시의 힘은! 그의 시는 애상에 젖어 들면서도 구차하지는 않다. 언젠가 땅끝에서 일몰과 함께 어두워 지던 장엄한 바다. 그 바닷가 횟집에서 듣던 타악기 삼중주처럼, 애잔하면서도 슬프지는 않고 따뜻하면서도 폭 앵기지는 않는 그런 느낌이 옥봉시의 정서다. 이것을 남도의 가락이라고 해도 괜찮지 않을까. 나는 그의 시에서 남도창의 구성진 가락을 문득 문득 듣곤 한다. 세상은 너무나 다 잘나 버려서, 옹이도 백이고 가슴 한 구석에 서느러운 한도 지우고 가는 그런 사람들의 파란 가슴이 그립다. 어딘가 떠나고 싶을 때, 무엇엔가 기대고 싶을 때 나는 옥봉시를 읽었다.  
홍경사
 
 
弘慶寺
 
 
가을 풀 욱어진 고려 적 옛 절    
남은 비에 써 있는 학사의 문장.    
천년을 흐르는 물이 있어서    
저물녘 돌아가는 구름을 보네.    
秋草前朝寺  殘碑學士文
千年有流水  落日見歸雲
 
 
 
가을 풀 쇠잔한 해묵은 옛 절. 뜨락엔 비석이 동강 나 구른다. 슬프고 쓸쓸한 풍경이다. 지난 날의 위용은 어디 가 찾을까? 천년을 하루 같이 흘러가는 저 강물은 보았을게다. 융성하던 지난 날을 시든 풀에 묻고, 동강 난 기억들만 뒹구는 옛 절. 해는 져서 처량한데, 무심한 구름만이 갈 길을 서두른다.
 
 
능소대 아래서 피리 소리를 듣고
 
                           陵소臺下聞笛(하늘 소)
 
 
 
저물녘 강물 위엔 피리의 소리    
보슬비 맞고서 강 건너는 이.    
남은 소리 아득히 찾을 길 없네    
나무마다 봄 맞아 강 꽃이 폈다.    
夕陽江上笛  細雨渡江人
餘響杳無處  江花樹樹春
 
 
 
저물녘 피리 소리엔 그리움이 묻어 있다. 보슬비에 그리움을 묻혀 강을 건너 가는 사람. 어디서 들려오는 피리 소릴까? 허공은 그 소리를 삼켜 버린다. 陵 臺 위인가 올려다 보니 피리 부는 사람은 보이질 않고, 나무마다 강 꽃이 활짝 폈구나.
 
 
 
새 집의 돌 우물 
新居得石井
 
 
묵은 돌엔 이끼가 짙게 깔렸고    
찬 샘은 우물이 깊기도 하다.    
해맑기 제 절로 이와 같구나    
십년을 먹은 마음 비춰 주누나.    
古石苔成縫  寒泉一臼深
淸明自如許  照我十年心
 
 
새 집을 얻어 이사를 했다. 이끼가 파르라니 오른 해묵은 돌우물이 있는 집이다. 깊게 파서 가뭄에도 마르지 않는 우물. 맑고도 시원하다. 집 보다도 우물이 더 보배롭구나. 우물 속에 내 얼굴을 비추어 보면, 그 위로 내 마음이 훤히 비친다.

 
 
양응우의 푸른 시내 그림 족자에 쓰다
題楊通判應遇靑溪障 名士奇
 
 
벼슬 길 터럭 세라 재촉하는데    
시내 산을 그림에다 그려 담았네.   
모래톱 펑퍼짐한 옛 언덕일세    
밝은 달빛 고깃배만 외로이 떳네.   
簿領催年   溪山入畵圖
沙平舊岸是  月白釣船孤
 
 
벗이 족자를 꺼내 내게 보여준다. 맑은 시내와 산을 그려 놓았다. 쓰디 쓴 벼슬길은 공연히 백발을 재촉하니, 푸르름을 간직하려 이 그림을 그렸구나. 백사장 펼쳐진 옛 노닐던 언덕, 밝은 달은 휘헝한데 고깃배 한 척이 외로이 떠있구나. 몸은 티끌 세상에 매여 있어도, 마음은 언제나 푸른 시내 같구나.
 
사준 스님에게
贈思峻上人
 
 
지리산엔 쌍계사가 으뜸이 되고    
금강산엔 만폭동이 빼어나다네.    
좋은 산 이내 몸은 가질 못하고    
스님께 시나 적어 부쳐 보내오
.    
智異雙溪勝  金剛萬瀑奇
名山身未到  每賦送僧詩
 
 
운수의 바랑이 가벼운 思峻 스님. 한 여름을 지리산 쌍계사서 지내더니, 가을 바람 훌훌 떨쳐 금강산으로 떠나시는가. 티끌 세상 그물은 질기기만 해, 부러워 노자 삼아 시를 보낸다.

 
벗에게 두 수
寄友
 
 
하나
 
강물은 흘러 흘러 어디로 가나    
잠시도 쉬지 않고 흘러가누나.    
그대를 생각하는 가 없는 마음    
밤낮 없이 海西 땅을 헤매돈다오.   
江水東流去  東流無歇時
綿綿憶君思  日夜海西涯

강물은 흘러 간다. 쉴 새가 없다. 그와 같이 그대 향한 가 없는 그리움. 저 강물의 흐름이 쉬임이 없듯, 보고픈 내 마음도 끊일 뉘 없다. 海西 땅 그대 있는 곳까지 저 강물 따라 흘러가고저.
 
 
나그네 길 가깝고도 멀다 하지만   
가는 길 곳곳마다 청산이 있네.    
저물녘 강남 땅 바라보면서    
제비가 돌아올 날 손꼽아 보네.    
客行知近遠  處處有靑山
日晩江南望  相思燕子還
 
그리운 마음이야 당장이라도 달려가고 싶다. 마음만 먹으면 먼 길도 아니다. 하지만 이리저리 벌려 놓은 인연들은 또 어찌 한단 말이냐. 도처에 청산처럼 막아서는 인연들. 훌훌 떨쳐 벗에게로 달려가지 못하는 마음은 넋을 놓고 海西 아닌 江南을 본다. 어서 봄이 와야 강남 갔던 제비가 돌아오듯 벗도 돌아 올테니까.

 
정원 형에게 부침
寄鄭兄景綏 名遠
 
 
수양버들 아직은 안 늘어졌고    
못가 집도 남은 추위 잠기어 있다.   
날 새자 꽃 사이서 우짖는 새들    
그리는 맘 맑은 꿈은 한창이런만.   
綠楊未成線  池閣鎖餘寒
日出花間鳥  相思淸夢 
 
 
버들개지엔 아직 물이 채 오르지 않았다. 연못 가 누각엔 싸늘한 겨울 추위가 한끝 남았다. 그러나 보라. 날 새면 꽃 사이서 우짖는 새들. 봄이 왔다고, 어서 일어나라고. 하지만 야속타. 그립던 그댈 만나 만단정회를 나누던 꿈이 그 소리에 그만 깨고 말았으니. 봄은 고양이처럼 살금살금 다가온다.

 
  昨夜
 
 
어제 밤 西園서 술에 취하여
돌아와 달 보며 잠이 들었네.
새벽 바람 이리 저리 심란한 생각
매화 꽃 핀 고향 꿈을 꾸었네.
昨夜西園醉  歸來對月眠   
曉風多意緖  吹夢到梅邊   
 
 
친구들과 마주 앉아 나눈 술자리. 기분 좋게 취해 돌아와 창으로 들어오는 달빛을 바라보다 잠이 들었다. 새벽녘 달빛 들어오라고 열어둔 창으로 찬 새벽 바람이 들어온다. 취한 술은 깨지 않고, 추워 이리저리 뒤척이다 보니 꿈자리가 심란했던 모양인가. 매화 꽃 핀 고향 꿈을 꾸었다.

 이 글은 2000년 7월 7일 국문과 대학원 학생들과 강화도 고려산 아래 있는 석주초당을 답사하면서, 현장 강의용으로 작성한 글이다. 그날 답사는 운영 손종섭 선생님을 모시고, 석주 초당과 석주가 답답할 때마다 즐겨 찾곤 했던 백련사, 이건창의 명미당, 그리고 이규보의 묘소를 참배하는 순서로 진행되었다. 명미당에서는 운영선생께서 이건창의 <한구편>을 강의해 주셨다.

 
 
석주 권필의 강화도 생활과 초당 주변의 모습
 
 
마포 서강에서 태어난 석주가 강화도에 정착하는 것은 29세 나던 정유년(1597) 겨울이었다. 경위는 분명치 않으나 큰 누님이 강화에서 남편도 없이 어렵고 살고 있었으므로 곁에서 함께 의지하며 지내려 했던 것이 아닌가 짐작된다. 어머니는 그때 해주에서 지내고 있었고, 마포 현석강의 집은 다른 형님이 살고 있었으므로, 서른 가까운 나이에 늦은 결혼한 그로서는 분가하여 독립하지 않을 수 없었던 형편이기도 했다.
 
그의 살림집은 강화 三海面(지금의 松海面) 紅海村에 있었고, 이곳에서 10리쯤 떨어진 고려산 기슭 오류천 위에 초당을 지어 후진을 훈학하였다. 1599년 9월에 강화에서 梁澤이란 자가 아비를 죽인 사건이 일어나자 주민들이 연명으로 告官하여 그 죄상이 백일하에 드러났는데, 양택에게서 뇌물을 받은 관리가 오히려 고관한 사람들을 모함하였다고 벌주려 하자, 석주는 분연히 상소를 올려 그 죄를 바로 잡고 강화를 일시 떠난다. 더러운 현실을 피해 들어갔던 강화가 속물적 모습을 보여준데 대한 실망 때문이었듯 하다. 그러나 이듬해인 1600년 4월에 다시 강화로 돌아왔다. 이후 석주는 호남 여행과 1601년 명나라 사신 원접 행차에 백의의 제술관으로 뽑혀 의주에 다녀오기도 했다. 그리고 1603년에는 벗들의 천거로 동몽교관에 제수되어 미관의 벼슬길에 나갔으나, 술 외상값 갚기에도 부족한 작록 때문에 명예를 팔아버린 듯한 낭패감을 못이겨 이내 사직하고 강화도로 다시 돌아오고 만다.
 
이때 이후 석주는 근 5,6년간 오류천 위 초당에 서당을 열고 생도를 받아 가르치며 그것으로 생계를 꾸려 나갔다. 교재는 주로 사서삼경과 《한서》, 《태극도설》, 《西銘》 등 성리학과 문장학에 관계된 것들이었고, 이 시기 그는 성리학의 연원과 도통의 전개를 程朱 중심으로 살핀 《도학정맥》을 편술하기도 하였다.
 
석주는 고려산 아래 초당 주변에 소박한 형태로나마 자연 공간을 십분 활용한 園林을 조성하려고 세심한 관심을 기울였다. 초당 주위에는 소나무와 밤나무를 심었고, 샘을 파서 차를 끓여 마시며, 둘레를 조경하여 못을 만드는 등 깊은 애정을 갖고 주위를 가꾸었다.
 
38세 나던 1606년 봄에 석주는 전염병에 걸려 근 사십여 일간이나 사경을 헤매다가 제자 宋希甲의 헌신적인 간병으로 겨우 회복한 일이 있었다. 이후 1610년(광해 2), 그의 나이 42세 나던 해 봄에 가솔들을 이끌고 마포 현석촌으로 돌아오기까지 10년 가까운 기간 동안 이어진 그의 강화도 생활은 이 초당이란 공간을 중심으로 영위되었다. 그의 문집에는 이곳 강화도 초당에서의 생활을 노래한 작품들이 적지 않다. 그중에서도 〈病中聞夜雨有懷草堂因敍平生二十四首〉나 〈幽居漫興〉 4수, 〈林居十詠〉 같은 작품들은 그곳에서의 생활과 초당 주변의 경관을 헤아려 볼 수 있게 해준다. 이제 그 시와 시에 딸린 주를 통해 그 주변 경관을 살펴, 4백년전 이곳의 풍경을 가늠해보기로 하자.
 
먼저 유허비가 있는 자리에 세워졌을 초당은 그 규모가 커보아야 세칸 남짓 띠로 지붕을 얽은 소박한 형태였을 것으로 보인다. 제자 송희갑이 목공을 도와 며칠만에 뚝딱 지었다고 했으니 기와를 얹을 규모도 아니었을 것은 분명하다. 남향으로 집을 앉히고, 북쪽에는 창을 내었는데, 북쪽 창을 열면 정면으로 天磨山이 눈에 들어왔다. 초당 아래에는 작은 시내가 있고, 석주는 그 물가를 따라 산석류나무를 심었다. 바위 아래에는 제법 몇 그루의 대나무도 있어 바람이 불면 대숲을 지나는 바람소리가 운치를 더해주었던 모양이다.
 
초당에서 시내를 따라 남쪽으로 백보쯤 되는 곳에 작은 석문과 雙瀑이 있었다. 높이는 몇 자 남짓 하였지만 돌 무더기 사이를 지나 떨어진 폭포가 작은 못을 이루었고, 山勢가 이를 빙 둘러싸서 별도의 一區를 만들었다. 석주는 두보의 "萬古仇池穴, 潛通小有天"에서 따와 이곳의 이름을 小有洞이라고 명명하였다. 소유동의 작은 못에는 쟁글쟁글 물소리가 듣기 좋았고, 비라도 내려 물이 불은 때에는 제법 폭포의 물줄기가 기세 좋게 쏟아졌던 모양이다. 시내 남쪽 산 기슭에는 옛날 논농사를 지었던 터가 있었는데, 석주는 이곳에 지형을 이용해서 上下池를 조성하였다. 方塘은 상하가 서로 연결되어 있었고, 진흙뻘을 밟으면서 석주는 손수 이곳에 陸地蓮을 심었다. 연잎이 푸르게 수면을 덮게 되자 그 아래로 송사리떼가 무리를 지어 다녔다. 지리한 장마철에는 밤마다 이곳에서 청개구리가 울어 취한 잠을 깨우곤 했다.
물가에 초당을 짓고 석주는 이웃집이 훤히 내다 보이는 것이 싫어 이곳에 버들을 심었다. 또 초당의 서쪽 언덕에는 앵도나무를 심고, 이름을 櫻桃坡라 지었다. 그리고 그 아래에 작은 우물을 파서, 하루에도 여러 차례 이곳에서 물을 길어와 차를 끓여 마셨다. 우물의 물맛은 차고 달아 꽤 괜찮았다. 
 
뜨락에는 오동나무를 심어 그 시원한 그늘을 마당에 드리웠고, 이따금 흥이 나면 오동잎을 따다가 그위에 시를 썼다. 또 뜨락 동편에는 포도나무를 심었는데 그 넝쿨이 뻗어나가 그늘을 드리워, 종내는 아침 해마저 가리고 만 것을 애석해 하는 시를 짓기도 했다. 물가 쪽에는 桃花를 심었다. 봄날 복사꽃잎이 시냇물에 떨어져 흘러 내려가면 혹 무릉도원을 찾아 올라오는 어부가 있지도 않겠느냐고 했다.
 
月出峰의 한 자락이 구불구불 이어져 초당의 남쪽 수십보 앞에 와서 멈추었는데, 그 위는 평평하고 넓어서 앉아 있을만 하였다. 답답할 때는 이곳에 올라 바람을 쏘이곤 하였는데, 둘레의 풀을 베어내고 그 자리에 소나무 한 그루를 심어 놓고는 盤桓亭이라고 이름을 붙였다.
 
또 집의 난간 밖에는 큰 소나무 한 그루가 있어 시원한 그늘과 맑은 바람소리를 선사해 주었고, 가을을 위해 수십 그루의 국화를 淡黃·微白·深紅의 색깔별로 나누어 심어두고, 도연명의 귀거래에 뜻을 부쳤다. 또 섬돌 둘레에는 紅葵와 白葵를 심어 임금 향한 붉은 뜻을 보였다.
그러나 후미진 곳에 자리잡은 그의 거처는 특별히 찾는 이도 없이 매일이 똑같은 한갖진 나날이었다. 적막한 숲속에 작은 소롯길이 나있었다. 동쪽 이웃에 살던 尹而性이란 이가 간혹 그 소롯길을 따라 술을 들고 사립문을 두드리곤 하여 적막한 생활에 활기를 얻곤 했다. 문집에는 윤이성을 기다리며 지은 시가 여러 수 남아 있다.
 
석주는 맑은 새벽이면 초당을 나서 시냇가로 나가 바위에 앉곤 했고, 저물녁에는 方塘가에 앉아 수면 위로 떨어진 산봉우리의 그림자를 보았다. 〈林居十詠〉 중의 세 수를 살펴 당시 석주의 생활을 떠올려 본다.
 
 
세속 피해 올들어 시내도 건너잖코  
작은 집을 나누어 흰구름과 함께 사네.  
맑은 창 한낮까지 찾는 이 아예 없고  
이따금 산새만이 나무가지 위서 운다.  
避俗年來不過溪  小堂分與白雲棲
晴窓日午無人到  唯有山禽樹上啼
 
 
숲 아랜 맑은 시내, 시내 위엔 정자 있고  
정자 가엔 수도 없이 봉우리들 푸르도다.  
幽人은 취해 눕고 해는 뉘엿 지려는데  
골짝마다 솔바람에 술기운이 절로 깨네.  
林下淸溪溪上亭  亭邊無數亂峰靑
幽人醉臥日西夕  萬壑松風醉自醒
 
 
이내 신세 산 기슭에 부치어 사니  
속객은 일년 내내 오지를 않네.   
사방 벽엔 책들과 등잔 하나 뿐   
이 가운데 참된 뜻을 말할 길 없네.   
已將身世寄山樊  俗客年來不到門
四壁圖書燈一盞  此間眞意欲忘言
 
 
흰구름과 반반씩 나누어 거처하는 집에 찾아주는 손님은 산새 뿐이다. 얼마나 적막하고 쓸쓸했을까? 이따금 맑은 시내가를 배회하다가 산기슭 위 반환정까지 올라가 술잔을 기울이기도 했던 모양이다. 취기가 거나하게 올라 소나무 그늘에 누워 있노라면 골짜기 마다 솔바람들이 몰려나와서 술기운을 걷어갔다고 했다. 세 번째 시에도 역시 아무도 찾지 않는다는 말이 나온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그 역시 사람이 그리웠던 게다. 세간이라곤 없이 사방 벽에 책을 쌓아 두고, 가운데 책상 위에 오두마니 등잔 하나 놓인 방. 이 조촐한 거처에서 느끼는 眞意를 말로 설명한다 한들 알아들을 사람이 그 누구겠느냐고 했다.
 
앵도나무 언덕을 넘어 가면 白蓮寺가 있다. 이따금 답답할 때는 산길을 따라 절까지 놀러가기도 했던 듯 백련사와 관련된 시도 여러 수 남아 있다. 


대동강변의 사랑

            
-〈送人〉.〈서경별곡〉에서 〈강이 풀리면〉까지-

                            
 
                                   
남포의 비밀
 
 
비 개인 긴 둑에 풀빛 고운데            
남포에서 님 보내며 슬픈 노래 부르네.           
대동강 물이야 언제 마르리                    
해마다 이별 눈물 푸른 물을 보태나니.           
雨歇長堤草色多   送君南浦動悲歌
大同江水何時盡 別淚年年添綠波
 
너무나도 유명한 정지상의 〈송인(送人)〉이란 작품이다. 대동강 가에는 연광정(練光亭)이란 정자가 있었는데, 경치가 너무나 아름다워 이곳을 찾은 유명한 시인묵객들이 지은 시가 어지럽게 많이 걸려 있었다. 그런데, 중국 사신이 오면 모두 떼어 내고 정지상의 이 작품만을 남겨 두었다고 한다. 다른 것은 중국사람에게는 보이기가 마땅치 않았지만, 이 작품만은 중국 사람 앞에 내 놔도 손색이 없겠다는 자신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과연 이 시를 본 중국 사신들은 하나 같이 귀신 같은 솜씨라고 찬탄을 아끼지 않았다 한다.
 
정지상의 〈송인〉은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 보내는 안타까운 심정을 절묘하게 포착하고 있는 작품이다. 떠난 이를 그리며 흘리는 눈물로 대동강 물이 마를 날 없다는 엄살은 허풍스럽기는 커녕 그 곡진한 마음새가 콧날을 찡하게 한다. 이 섬세한 시심(詩心)만으로도 과연 중국사신의 감탄은 있음직 하다. 그러나 중국 사신들이 결정적으로 무릎을 치며 감탄치 않을 수 없었던 것은 바로 2구의 `송군남포(送君南浦)`라는 표현에 있었다. 이 구절은 흔히 님을 남포로 떠나 보내며 슬픈 노래를 부른다고 해석하여, 남포를 대동강이 황해와 서로 만나는 진남포 쯤으로 생각하기도 하나, 그런 것이 아니라 남포는 현재 두 사람이 헤어지는 장소이다.
 
남포란 단어에는 유장한 연원이 있다. 중국의 유명한 시인 굴원(屈原)이 일찍이 〈구가(九歌)〉라는 작품 속에서 "그대의 손을 잡고 동으로 가서, 사랑하는 님을 남포에서 보내네.(子交手兮東行, 送美人兮南浦)"라고 노래한 바 있다. 이 뒤로 많은 시인들이 실제 헤어지는 포구가 동포이든 서포이든 북포이든 간에 남포라고 말하곤 했으므로, 굴원의 이 노래가 있은 뒤로 `남포`란 말은 중국 시인들에게 으레 `이별`이란 단어를 떠올리는 뉘앙스가 담긴 말이 되었다.
 
이렇게 하나의 단어가 특별한 뉘앙스를 담게 될 때, 한시에서는 그것을 정운의(情韻義)라고 말한다. 이후로 많은 시인들이 실제로 남포라는 단어 위에 이별의 정운을 담아 노래하였다. 강엄(江淹)은 〈이별의 노래(別賦)〉에서 "봄 풀은 푸른 빛, 봄 물은 초록 물결, 남포에서 그대 보내니, 슬픔을 어이 하나.(春草碧色, 春水綠波, 送君南浦, 傷如之何)"라고 노래한 바 있고, 무원형(武元衡)이란 시인도 〈악수 물가에서 벗을 보내며(鄂渚送友)〉란 시에서 "강 위 매화는 무수히 떠지는데, 남포서 그대 보내니 안타까워라.(江上梅花無數落, 送君南浦不勝情)"라고 노래하였다. 두 작품 모두에서 `송군남포`라는 넉 자를 찾아 볼 수 있다. 이로 보면 정지상의 `송군남포`라는 표현이 중국 사신들에게 일으켰을 정서적 환기를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시성 두보는 일찍이 〈고상시에게 올림(奉寄高常侍)〉이란 작품에서, "하늘 가 봄 빛은 저물기를 재촉는데, 이별 눈물 아득히 비단 물결에 보태지네.(天涯春色催遲暮, 別淚遙添錦水波)"라고 노래하였으니, 그러고 보면 `이별 눈물 해마다 푸른 물결에 보태지네.(別淚年年添綠波)`라고 한 〈송인〉의 4구도 또한 두보의 구절을 환골탈태한 것이다.  
 
다시 시로 돌아가 보자. 1구에서는 비가 개이자 긴 둑에 풀빛이 곱다고 했다. 겨우내 먼지를 뒤집어 쓰고 있던 긴 둑에 봄비가 내리자, 그 아래 어느 새 파릇파릇 돋아난 봄 풀이 마치 갑자기 땅을 헤집고 나온 것처럼 제 빛을 찾았던 것이다. 지루했던 겨울의 묵은 때를 말끔히 씻어내리는 봄비를 맞는 마음은 설레이는 흥분이 아닐 수 없다. 그런데 그 춥고 길었던 겨울이 끝나고 이제 막 생명이 약동하는 봄을 맞이하면서 나는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 보내고 있으니, 그 서글픈 심정이야 어찌 말로 다 할 수 있으랴.
 
대동강 물이 어느 때 마르겠느냐는 3구는 좀 엉뚱하다. 슬픈 노래를 부르다 말고 왜 갑자기 강물 마르는 이야기냐 말이다. 한시의 기승전결 구성이 갖는 묘미가 바로 이 대목에서 한껏 드러난다. `기(起)`는 글자 그대로 대상을 보면서 생각을 일으키는 것이고, `승(承)`은 이를 이어 받아 보충하는 것이다. `전(轉)`에서는 시상을 틀어 전환해야 한다. 그렇게 되면 1.2구와 3구 사이에는 단절이 온다. 그 단절에 독자들이 의아해 할 때, 4구 `결(結)`에 가서 그 단절을 메워 묶어줌으로써 하나의 완결된 구조를 이루게 된다.
 
3구에서 강물 타령으로 화제를 돌려 놓고, 4구에 가서 설사 강물이 자연적 조건의 변화로 다 마를지라도, 강가에서 이별하며 흘리는 눈물이 마르기 전에는 강물은 결코 바닥을 드러내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한 것이다. 눈물을 제 아무리 많이 흘린다 한들 도대체 그것이 대동강의 유량에 무슨 영향을 줄 수 있단 말인가. 비록 그렇기는 하나, 이를 두고 허풍 좀 그만 떨라고 타박할 독자는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 엄청난 과장은 시인의 슬픔이 그만큼 엄청난 것임을 표현하기 위한 것일 뿐이니 말이다.  
 
보통 한시에는 운자라는 것이 있는데, 7언절구의 경우에는 1구와 2구, 그리고 4구의 끝에 같은 운자를 써야만 한다. 이 시는 하평성(下平聲)인 가운(歌韻)을 쓰고 있다. 이 운목(韻目)에는 `가(歌) 다(多) 라(羅) 하(河) 과(戈) 파(波) 하(荷) 과(過)` 등 시에서 자주 쓰이는 운자가 많이 포진하고 있어, 고금의 시인 치고 이 운으로 시를 짓지 않은 이가 거의 없으니, 이를 가지고 새로운 표현을 얻어 내기란 매우 어려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실제 이 작품 뒤로도 아예 `다(多) 가(歌) 파(波)`의 운을 1.2.4구의 끝에 그대로 달아 차운한 시가 적지 않으나, 어깨를 나란히 할 만한 작품은 눈을 씻고 찾아 보아도 얻기 어렵다. 이제 와서 운자는 한시 감상에 있어 고려의 대상이 안되게 되었지만, 중국 사신의 찬탄 속에는 앞서 남포가 주는 정운의 위에, 이러한 운자 사용의 산뜻함도 용해되어 있는 것이다.
 
 
천년을 홀로 살아 간데도
 
 
고려가요 가운데도 대동강을 무대로 한 이별의 노래가 있다. 〈서경별곡〉이 바로 그것이다. 시를 보면, 길 떠날 채비를 차리는 남자가 있고, 눈물로 이를 부여 잡는 여인이 있다.
 
 
西京이 셔울히 마르는
닷곤데 쇼셩경 고외마른
여희므론 질삼뵈 바리시고
괴시란데 우러곰 좃니노이다.
 
 
그녀가 나고 자란 고장인 서경, 새로 닦아 중수한 이곳을 사랑하지만은, 님을 여의기 보다는 여자의 길인 질삼베 마저도 다 버리고, 님이 나를 사랑해 주시기만 한다면 울며 울며 따르겠다는 하소연이다. `괴시란 `, 즉 `사랑해 주시기만 한다면`이란 말에서 그녀는 그만 목이 메인다. 님이 나를 버리지만 않으신다면 내 모든 것을 다 버리고서라도 님만을 따르겠다는 열렬한 사랑의 고백이다.
 
 
구스리 바회예 디신달 
긴힛딴
그츠리잇가 나난 
즈믄해랄 외오곰 녀신달 
信잇딴 그츠리잇가 나난 
 
 
다시 이어지는 사연이다. 끈에 꿰어진 구슬을 바위 위에 떨어뜨리면 그 구슬은 깨지고 말 것이다. 그래도 그 구슬을 꿰었던 끈이야 끊어질 까닭이 없다. 이와 마찬가지로 천년을 혼자서 살아간다고 한들 님을 향한 나의 믿음이야 그칠 날이 있겠느냐는 서늘한 다짐이다. 구슬이 끈에 꿰어져 있는 것은 님과 내가 사랑으로 맺어진 상태를 의미한다. 그 구슬이 바위에 떨어져 깨졌으니, 나를 향한 님의 사랑이 깨져 버린 것이다. 님은 구슬이고 나는 끈이다. 님의 마음이 변하여 깨진 구슬의 파편만을 남기고 떠난다 해도, 나의 마음은 끝내 변하지 않으리라는 것이다. 앞에서는 `사랑해 주시기만 한다면` 따르겠다 했는데, 이제는 설사 나를 버린다 하더라도 변치 않겠다고 한다. 움직일 수 없는 이별 앞에서 그 사랑이 변함 없기를 바라는 애틋한 마음이 잘 나타나 있다.
 
 
大同江 너븐디 몰라셔
배내여 노한다 샤공아
네가시 럼난디 몰라셔
녈배예 연즌다 샤공아
 
 
안으로 서러움을 다잡던 그녀는 무심히 님을 태우려고 강변에 배를 갖다 대는 뱃사공을 향해 애꿎은 푸념을 늘어 놓는다. 대동강이 얼마나 넓은지 몰라서 배를 꺼내 놓았느냐. 이 사공아! 그 다음 구절은 해석 상의 쟁점이 있으나 그 대의는 "네 마누라 간수나 잘하지, 왜 애꿎은 우리 님을 가는 배에 얹었느냐. 이 사공아!" 정도의 의미가 된다. 그녀는 야속한 님을 향해 직접 원망을 퍼붓지는 못하고, 공연히 사공에게 심술을 부려 볼 따름이다. 그러나 그 숨김 없는 감정의 표현은 얼마나 진솔하고 핍진한가.
 
 
大同江 건넌편 고즐여
배타들면 것고리이다 나난 
 
 
끝에 가서 여인은 가슴 속에 담아둔 일말의 불안감을 마침내 드러내고 만다. 그 뜻이 님이 나를 떠나 배를 타고 강 건너에 들어가기만 하면 강 건너에 있는 꽃, 즉 다른 여인을 꺾을 것이라는 지레 짐작이고 보면, 당시 강가의 여인들이 얼마나 속고 속이는 사랑 놀음에 익숙해져 있는지를 알 수 있을 법 하다. 그러고 보면 `남자는 배, 여자는 항구`라는 오늘날의 푸념은, 기다리는 여인의 마음과 무정한 남정네의 마음이 고금에 다를 바 없음을 보여준다. 
 

대동강변의 버들가지
 
 
복사꽃 오얏꽃은 말이 없어도             
나비는 제 스스로 기웃거리고                  
오동은 고요히 깨끗한데도                     
봉황은 와서 춤을 춘다네.                       
무정한 물건도 유정함을 끌어 당기는데         
하물며 사람이 서로 친하지 않으랴.              
그대가 멀리서 이 고장까지 와서               
기약 없이 만나니 좋은 인연이로다.              
칠월이라 팔월엔 날씨도 찬데                  
잠자리를 같이 한 지 열흘도 못되었네.           
나는 교칠(膠漆)같은 진뢰(陳雷)의 믿음 있건만   
그대는 이제 나를 헌 자리처럼 버리네요.         
부모님이 계시니 멀리 좇을순 없지요           
따르려 해도 할 수 없어 마음만 애가 타요.       
처마 밑 둥지엔 제비도 짝이 있고                
연못 위 원앙새도 짝을 이뤄 떠다니네.           
누가 저 새들을 다 몰아내어서                 
내 이별의 근심 풀어 주어요.                    
桃李無言兮   蝶自徘徊
梧桐蕭쇄兮   鳳凰來儀
無情物引有情物  況是人不交相親
君自遠方來此邑  不期相會是良因
七月八月天氣凉  同衾共枕未盈旬
我若陳雷膠漆信  君今棄我如敗茵
父母在兮不遠遊  欲從不得心悠悠
前巢燕有雌雄    池上鴛鴦成雙浮
何人驅此鳥  使我解離愁
 
 
앞서 본 〈서경별곡〉을 한시로 옮겨 놓는다면 아마 위 시 쯤 될 것이다. 이 시를 지은 사람이 누군가 하면 바로 정지상이다. 이로 보면, 앞서 정지상의 〈송인〉이 그저 돌출적으로 이루어진 작품이 아니라, 그의 섬세하고 아름다운 취향에서 비롯된 것임을 짐작할 수 있다.
 
봄을 맞아 흐드러지게 피어난 복사꽃 오얏꽃은 말 없이 가만히 있어도 시절을 느끼는 나비의 방문을 맞게 되고, 오동나무는 다른 나무와 함께 서 있건만 유독 봉황만은 이를 알아 보고 깃들어 춤을 춘다. 이렇듯 무정한 초목도 유정한 새 나비를 유혹하거늘, 하물며 유정한 남자와 여자가 서로 만나 사랑하는 일이야 너무나 자연스러운 일이 아닌가. 마치 꽃을 찾는 나비처럼 먼 곳에서 내게로 온 그대를 만나 서늘한 가을 밤에 달콤한 사랑의 자리를 만들었다. 그러나 꿈 같은 시간은 열흘도 채 못되어 이제 그대는 나를 떠나고 있다. 떠나는 님을 앞에 두고 그녀는, 나는 후한(後漢) 때 사람 진중(陳重)과 뇌의(雷義)의 교칠(膠漆)과도 같은 끈끈한 믿음을 지녀 있는데, 그대는 마치 닳아 헤진 방석처럼 나를 버린다는 탄식과 원망을 금할 수 없었다. 함께 가고 싶어도 부모님이 계시니 그럴 처지도 못된다.
 
끝에 가서 다시 처마 밑의 제비와 연못 위 원앙새에게로 시선을 돌려, 미물인 새들도 저렇듯 짝을 지어 행복한 사랑의 보금자리를 가꾸는데, 나는 이게 무엇인가 하는 마음을 토로하였다. 마치 〈서경별곡〉에서 여인이 떠나는 님은 못 붙잡고 애꿎은 뱃사공에게 심술을 부리듯, 괜시리 단꿈에 젖어 있는 새들에게 분풀이를 하고 있는 것이다. 남녀가 만나 사랑하고 헤어지는 기쁨과 아픔은 예나 지금이나, 양(洋)의 동서를 막론하고 한결 같은 모양이다.  
 
이별하는 사람들 날마다 버들 꺾어              
천 가지 다 꺾어도 가시는 님 못 잡았네.         
어여쁜 아가씨들 눈물 탓이런가                
부연 물결 지는 해도 수심에 겨워 있네.          
離人日日折楊柳  折盡千枝人莫留
紅袖翠娥多少淚  烟波落日古今愁
 
 
대동강변의 이별 노래는 조선조에 와서도 계속해서 불리워 졌다. 위 작품은 조선시대의 멋쟁이 시인이었던 백호(白湖) 임제(林悌)의 〈패강곡(浿江曲)〉이란 작품이다. 패강은 대동강의 옛 이름이니, 이 시 또한 `대동강 노래`가 된다. 10수의 연작 중의 한 수이다.
 
이별하는 사람들은 재회에의 염원 때문에 날마다 대동강변에 나와서 떠나는 님에게 버들가지를 꺾어 보낸다.  버들가지는 왜 꺾을까? 옛날부터 중국과 우리나라에서는 벗과 헤어질 때 버들가지를 꺾어 이별의 정표로 주는 풍습이 있었다. 그래서 `절류(折柳)`, 즉 `버들 가지를 꺾는다`는 말에는 앞서 본 `남포`와 마찬가지로 `이별`이란 의미가 함축되어 있다. 버들가지가 이별의 신표가 된 사정은 이러하다. 버드나무는 꺾꽂이가 가능하므로, 신표로 받은 버들가지를 가져다 심어 두면 뿌리를 내려 새 잎을 돋운다. 보내는 사람은 `님은 갔지만 나는 님을 보내지 아니하였습니다`하는 심정으로 버들가지를 꺾어 주었던 것이고, 또 꺾이어 가지에서 떨어졌어도 다시 뿌리를 내려 생명을 구가하는 버들가지처럼, 우리의 우정도 사랑도 그와 같이 시들지 말자는 다짐의 의미도 있었던 것이다.
 
우리 나라 홍랑의 시조에, "멧버들 가려 꺾어 보내노라 님의 손대. 계시는 창 밖에 심어 두고 보소서. 봄비에 새잎곳 나거든 날인가도 여기소서."라 한 것이 바로 이 뜻이다. 당나라 때 시인 저사종(儲嗣宗)은 〈헤어지며(贈別)〉란 시에서, "동성엔 봄 풀이 푸르다지만, 남포의 버들은 가지가 없네. (東城草雖綠, 南浦柳無枝)"라고 하였는데, 여기에는 `남포`와 `버들`이 모두 이별을 상징하는 어휘로 동시에 쓰이고 있다. 봄이 와서 풀은 푸른데, 떠나는 님에게 버들가지를 꺾어 주려 해도 이미 하많은 사람들이 죄다 꺾어 버려 남은 가지가 없다는 말이다.  
 
지난 해에 신문에서 어느 조경학자가 우리나라 한시에 자주 나오는 초목의 빈도수를 조사하여 통계낸 결과를 발표한 것을 본 기억이 있다. 당당히 1위를 차지한 것은 소나무도 국화도 아닌, 바로 버드나무였다. 그분은 이 결과를 놓고 결국 버드나무가 우리 생활 공간 가까이에 많이 있었으므로 시인들이 친근하게 여겨 빈번하게 시의 제재로 쓰인 것이 아니겠느냐는, 지극히 상식적이고 비전문가적인 결론을 내리고 말았다. 그는 버드나무가 봄날의 서정을 촉진시키는 환기물인 동시에 `이별과 재회에의 염원`을 상징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던 것이다. 다시 말해 한시에서 버드나무가 빈도수에서 1위를 차지했다면, 그것은 봄날의 서정이나 이별을 주제로 한 작품이 제일 많았다는 것과 거의 같은 의미가 된다.
 
다시 임제의 시로 돌아가자. 허구 헌 날 꺾다 보니 대동강 버드나무는 아예 대머리가 될 지경이다. 그래 보았자 떠나려는 님을 붙잡지도 못하고, 떠나신 님이 돌아오는 것도 못 보았다. 보내는 사람은 이별이 서러워 눈물을 흘리고, 기다리는 사람은 님이 오지 않아서 눈물을 떨군다. 그러고 보면 앞서 대동강 물이 마를 날 없다던 정지상의 말은 빈 말이 아닐 터이다. 그녀들의 하염 없는 기다림이 안스러워, 강물 위엔 한숨인 양 안개가 짙어 있고 눈물인 듯 강물은 넘실거린다. 강물을 붉게 물들이며 지는 해마저도 수심을 보태고 있다.
 
 
강이 풀리면
 
강이 풀리면 배가 오겠지
배가 오면은 님도 탔겠지
님은 안 타도 편지야 탔겠지
오늘도 강가서 기다리다 가노라
강이 풀리면 이 설움도 풀리지
동지섣달에 얼었던 강물도
제 멋에 녹는데 왜 아니 오실까
오늘도 강가서 기다리다 가노라
 
 
이제 현대시로 넘어와 보자. 위 시는 파인 김동환의 〈강이 풀리면〉이란 작품이다. 단언키 어려우나 작품의 배경이 되는 강은 역시 대동강인듯 하다. 추운 겨울에 강물이 꽁꽁 얼어 붙었다. 그래도 강 가운데는 얼음이 두껍지가 않아 걸어서 건널 수는 없다. 배도 강가에 얼어 붙어 버려 강 저편의 소식은 가마득히 알 길이 없다. 사랑하는 사람의 소식을 이제나 저제나 기다리고 있는 아가씨는 오늘도 강가에 나와 강물이 언제나 풀릴까 하는 막막한 기다림 속에 하루를 보냈다. 강이 풀리기만 하면 님이 저 배를 타고 강물을 건너와 뚜벅뚜벅 내게로 걸어 오시겠지. 설령 님이 못 오시면 내게 보낸 편지라도 오겠지. 그러나 강물은 종내 녹을 줄 모르고, 하루 종일 추위 속에 나루가를 서성이던 그녀는 또 그렇게 하루가 가 버리는 것이 안타깝기만 하다.
 
2연에서 꽁꽁 얼었던 강물은 마침내 봄기운에 슬며시 녹고, 배도 다시 사람을 실어 나르고 있다. 강물 위에 얼음이 녹듯 내 마음 속의 시름도 녹아야 할 터인데, 님은 끝끝내 돌아오실 줄 모른다. 오늘은, 내일은 하고 기다려 보아도 무정한 님은 편지 한장 없다. 그녀는 다시금 힘없이 터덜터덜 해 저문 나루가에서 발길을 돌린다. 이 대목은 흡사 고려가요 〈동동〉의 제 2연을 떠올린다. "정월ㅅ 나릿 므른 아으 어져 녹져 ?搭立?, 누릿 가운  나곤 몸하 ?殆첨? 녈셔. 아으 동동다리." 정월의 강물은 녹으려 하는데, 그와 같이 내 시름을 녹여줄 님은 오실 줄 모르고 나는 어이해 한 세상을 홀로 살아가느냐는 탄식이다.
 
 
이 비 그치면
내 마음 강나루 긴 언덕에
서러운 풀빛이 짙어오것다.
푸르른 보리밭길 맑은 하늘엔
종달새만 무어라고 지껄이것다.
이 비 그치면
시새워 벙그러질 고운 꽃밭 속
처녀애들 짝하여 새로이 서고
님 앞에 타오르는 향연(香烟)과 같이
땅에선 또 아지랑이 타오르것다.
 
 
이 시는 이수복 시인의 〈이 비 그치면〉이란 작품이다.  "이 비 그치면, 내 마음 강나루 긴 언덕에 서러운 풀빛이 짙어오것다."는 이 시의 첫 부분은, 정지상의 "비 개인 긴 둑에 풀빛 고운데(雨歇長堤草色多)"를 그대로 연상시킨다.
 
시인은 왜 파릇파릇 돋아나는 새 풀잎의 싱그러움을 `서러운 풀빛`이라고 표현했을까? `내 마음`의 강나루라고 했으니, 아마도 그는 아련한 회상 속으로 떠오르는 영상을 포착하고 있는 듯 하다. 시인의 서러움은 아랑곳 하지 않고 경쾌한 날개짓으로 허공에 노래를 쏟아내는 종달새의 노래소리, 뒤이어 앞을 다투어 꽃들이 피고, 그 꽃밭엔 새로이 아름다운 처녀아이들이 봄날의 설레임으로 노닐고 있다. 나른한 아지랑이는 또 나른하게 꼬물꼬물 피어오를 것이다. 유년의 기억은 누구에게나 너무 아름다워서 오히려 조금은 `서럽게` 느껴지는 법이다. 그러고 보면 정작 서러운 것은 유년이 아니라, 그러한 유년으로부터 훌쩍 떠나와 버린 지금의 나를 확인하는 데서부터 비롯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지금까지 우리는 대동강을 배경으로 이별과 사랑을 노래한 시를 몇 수 살펴 보았다. 한시에서 고려가요와 현대시에 이르기까지 대동강은 아름다운 이별의 사연으로 우리의 시정(詩情)어린 마음을 뭉클하게 한다. 대동강에서 왜 이렇게 많은 안타까운 사랑의 노래가 불리워졌을까? 평양은 예로부터 풍광이 수려했던 풍류의 고장이었다. 이같이 아름다운 고장에서 선남선녀가 만나 사랑을 나누고 또 헤어지는 안타까움을 되풀이 하는 것은 너무나 자연스런 일이다. 더욱이 남녀간의 사랑과 애절한 이별의 사연이야 말로 영원한 문학의 주제가 아니겠는가.
 
대동강 가 연광정을 배회하며, 수양버들 휘휘 늘어진 능라도로 뱃놀이 가는 벗님들의 모습을 볼 날은 과연 언제가 될 것인가? 통일의 그날은 진정으로 얼었던 강물이 풀리듯 겨레의 마음 속에 맺힌 시름도 상쾌하게 풀어줄 것이다. 정월의 얼어 붙은 강물을 바라보며 그러한 소망을 함께 얹어 빌어본다.

한시 속의 納凉法
 
 
 

옛날 청나라의 김성탄이 벗과 함께 여름철 여행을 나섰다가 장마비에 발이 묶여 며칠 여관 신세를 진 일이 있었다. 심심한 궁리 끝에 두 사람은 지금까지 살아온 인생에서 가장 통쾌한 장면을 연상하여, 문장의 맨 마지막을 `不亦快哉` 즉 `또한 통쾌하지 아니한가?`란 말로 맺는 글짓기 시합을 했다. 그때 나온 것이 유명한 〈快說〉이란 문장인데, 그 가운데 이런 것이 있다.
 
 
여름 칠월이었다. 붉은 해는 중천에 떠 있고 바람도 없고 구름 한 점 없었다. 앞뜰 뒤뜰 할 것 없이 시뻘건 화로처럼 달아 있었고, 새 한 마리 날지 않았다. 전신으로 땀이 줄줄 흘러 내렸다. 밥상을 앞에 두고서도 도무지 먹을 수가 없었다. 대자리를 가져오게 하여 맨 땅 위에 누우려 하였지만 땅조차 고약처럼 끈적끈적하였다. 쉬파리란 놈은 또 달려들어 목에도 붙고 코에도 붙어 쫓아도 도망가지 않았다. 정말이지 어찌해 볼 도리가 없었다. 그런데 갑자기 캄캄해지더니 굵은 빗방울이 쏟아졌다. 콸콸 넘치는 소리는 마치 수백만의 나팔과 북이 일제히 둥둥 울리는 것 같았다. 처마의 낙숫물도 흡사 폭포와 같이 쏟아졌다. 전신에 흐르던 땀은 금세 사라지고 달아올랐던 대지도 씻은 듯 시원해졌다. 쉬파리도 간데 없었다. 밥도 다시 먹을 수 있었다. 또한 통쾌하지 아니한가!
 
 
조선 후기 다산 정약용이 이 글을 패러디해서 또 〈不亦快哉行〉 20수를 지었다. 그 가운데 역시 더위를 노래한 것이 있다.
 
 
지리한 긴 여름날 폭염에 시달려서  
등줄기 땀에 젖어 베적삼이 척척한데   
상쾌한 바람 건듯 불어 산비를 쏟더니만   
한꺼번에 벼랑 위에 얼음발이 걸렸구나.   
또한 통쾌하지 아니한가!
支離長夏困朱炎  읍읍蕉衫背汗沾
쇄落風來山雨急  一時巖壑掛氷簾
不亦快哉
 
 
아! 시원하다. 고인의 싯귀에 `束帶發狂欲大叫`란 구절이 있다. 더운 여름날 지붕 위로 땡볕은 하염없이 쏟아져 급기야 방안은 한증막인데, 그 속에 버선 신고 띠를 두르고 정좌하고 앉았자니 그만 미쳐버릴 것만 같아 있는대로 소리를 지르고 싶더라는 말이다. 이럴 때 한 떼의 먹장구름이 사방에서 몰려들고 마른 번개가 우르릉 꽝꽝대다가 마침내 한바탕 폭포수 같은 소낙비를 쏟아내릴 때, 그 상쾌함이란 이루 말할 수 없는 것이었겠다.
 
옛 시인의 문집을 뒤적이다 보면 유난히 `苦熱`이란 제목의 시가 많이 보인다. `苦熱`이란 말 그대로 `괴로운 무더위`란 뜻이다. 얼마나 못견딜 더위였으면 이것으로 시 지을 궁리를 다 했을까 생각하며 苦笑를 금치 못한다. 다음은 고려 때 문인 이규보의 시 〈苦熱〉이다. 
 
 
혹독한 더위와 근심의 불덩이가   
가슴 속 가운데서 서로  졸이네.   
온 몸에 빨갛게 땀띠 나길래    
바람 쐬며 마루서 곤해 누웠지.    
바람이 불어와도 화염과 같아   
부채로 불기운을 부쳐대는 듯.   
목 말라 물 한잔을 마시려 하니   
물도 뜨겁기가 탕국물 같네.   
삼키어 못 내리고 토하고 마니   
목구멍이 콱 막혀 콜록거렸지.   
잠이나 청하여 잊을까 해도   
모기와 등에가 또 물어대네.   
어이해 쫓겨온 귀양지에서   
이같은 온갖 흉험 만난단 말가.   
죽는 것 또한 두렵잖으나   
하늘은 어이해 날 궁하게 하는가?  
酷熱與愁火  相煎心腑中
渾身起赤류 
困臥一軒風
風來亦炎然  如扇火충충  
渴飮一杯水  水亦與湯同
嘔出不敢吸  喘氣塡喉롱 
欲寐暫忘却  又被蚊맹攻
如何流謫地  遭此百端凶
死亦非所懼  天胡令我窮 
 
가슴 속에 불덩이가 든 것처럼 얼굴이 발갛게 상기되고, 입김을 내불면 그대로 불기둥이 쏟아질 것만 같다. 온몸엔 땀띠가 돋고 바람조차 뜨끈뜨끈하다. 물을 마셔도 뜨거운 국물 같아서 숨을 턱 막고, 잠자려 누우면 이번엔 모기와 등에가 피를 빨고 물어대니 따갑고 근지러워 견딜 수가 없다. 참다 못해 차라리 죽는게 낫겠다는 푸념이 저절로 나왔다.
 
그러나 선풍기 에어컨이야 없었을망정, 선인들의 여름 속에서 시원한 나무 그늘 아래 평상에 누워 살랑살랑 불어오는 선들바람에 책읽다 차 마시다 잠자다 일어나는 태고적의 정취마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창을 열면 오히려 아래 윗집에서 틀어대는 냉방기의 후끈한 열기만 밀려드는 성냥갑 같은 아파트 생활에서는 결코 느끼지 못할 풍취다. 내친 김에 다시 이규보의 〈夏日卽事〉 두 수를 읽어 본다.  
 
 
주렴 장막 깊은 곳 나무 그늘 돌아들고  
幽人은 잠이 깊어 우레같이 코를 곤다.  
날 저문 뜨락엔 찾아오는 이 없는데  
바람에 사립문만 열렸다간 닫히네.  
簾幕深深樹影廻  幽人睡熟한聲雷
日斜庭院無人到  唯有風扉自闔開
 
 
홑적삼에 대자리 깔고 격자창에 누웠더니 
꾀꼬리 두세 소리 곤한 꿈을 깨운다.  
짙은 잎에 가린 꽃은 봄 뒤에도 남아 있고 
엷은 구름 새는 햇발 빗속에도 밝도다.  
輕衫小점臥風령 夢斷啼鶯三兩聲
密葉예花春後在  薄雲漏日雨中明
 
 
깊은 숲속의 고즈녁한 산집. 여름날 오후의 무료한 햇살 따라 나무 그림자가 자꾸 자리를 옮긴다. 이따금씩 규칙적으로 주인의 우레같이 코고는 소리가 그 적막을 깨운다. 첫 수 넷째구에 이 시의 묘미가 있다. 이제 해도 어느덧 뉘엿해 졌는데, 하루 종일 아무도 찾아오지 않았다. 나갈 일이 없어 열릴 일도 없었던 사립문이 제풀에 열렸다 닫혔다 한다. "손님 왔다! 그만 자고 일어나라"는 바람의 장난이다. 그런데 이 시를 읽는 내게는 이 바람의 장난이 주인의 코고는 소리와 자꾸 간섭 현상을 일으킨다. `드르렁` 하고 코를 골면 그 서슬에 사립문이 끼익 하며 쿵 닫히고, 잠시 후 `푸우` 하고 숨을 내 쉬자 사립문도 `어이쿠` 하며 저만치 밀려난다. 요걸 그림으로 그리면 어떻게 될까? 미상불 근사한 高士隱逸圖의 한 장면이 되지 싶다.
 
홑적삼에 대자리를 깔고 바람이 솔솔 드는 격자창에 누었으니 잠이 절로 왔겠지. 꾀꼬리도 심심해서 이제는 일어나 보시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꿈 길 속으로 슬쩍 끼어 들었다. 시든 꽃 이야기가 있는 것으로 보아, 초여름의 풍경이었던 모양이다. 늘어진 잠을 깨어 한껏 기지개를 켜고 일어나니, 꾸다만 꿈이 그만 아쉽다. 하루 종일 나무 그늘 위로 햇볕만 따갑다가 이윽고 후두둑 소나기가 지나가는 모양이다. 빗소리는 들리는데 구름 사이로 햇살이 빠져나와 빗발과 햇발이 마당에서 나란히 놀고 있다.
 
 
산창서 하루 내내 책 안고 잠을 자니  
돌 솥엔 상기도 차 달인 내 남았구나.   
주렴 밖 보슬보슬 빗소리 들리더니  
못 가득 연잎은 둥글둥글 푸르도다.   
山窓盡日抱書眠  石鼎猶留煮茗烟
簾外忽聽微雨響  滿塘荷葉碧田田
 
 
조선 후기 서헌순의 〈偶詠〉이란 작품이다. 하루 종일 드러누워 책을 읽었다. 읽다가 졸리면 그냥 가슴에 책을 얹고 잠이 든다. 정신이 들면 샘물을 떠와 돌솥에 차를 달여 마신다. 돌솥엔 아직도 더운 기운이 남았는지 김이 모락모락 오르고, 주렴 밖에선 보슬비 소리가 보슬보슬 들린다. 비가 오시나보다. 고개를 빼어 뜨락을 내어다 보면, 마당 연못엔 비에 젖은 연잎들이 둥글둥글 이들이들 하나 가득이다. 개운하고 상쾌하다.
 
 
숲 아랜 맑은 시내, 시내 위엔 정자 있고  
정자 가엔 수도 없이 봉우리들 푸르도다.  
幽人은 취해 눕고 해는 뉘엿 지려는데  
골짝마다 솔바람에 술기운이 절로 깨네.  
林下淸溪溪上亭  亭邊無數亂峰靑
幽人醉臥日西夕  萬壑松風醉自醒
 
 
조선 중기 권필의 〈林居十詠〉 가운데 한 수이다. 그가 은거해 있던 강화도 五柳川 위 草堂의 풍경을 노래한 연작이다. 초당 아래엔 맑은 시내가 흐르고, 시내를 건너 산기슭으로 올라가면 소나무 한 그루가 있었다. 정자는 없었지만 그 나무 그늘을 그는 盤桓亭이라고 이름 지었다. `撫孤松而盤桓`하던 도연명이 그리웠던 모양이다. 더운 여름, 그는 맑은 시내가를 배회하다가 반환정까지 올라가 술잔을 기울이곤 했다. 취기가 거나하게 올라 솔 그늘에 누웠자니 골짜기마다 솔바람들이 일제히 몰려나와서 거나하던 술 기운이 절로 깨더라고 했다.
 
날씨가 참 덥다. 더운 날씨에 선인들의 한시를 읽고 있으면 시간도 공간도 딱 멈춰서는 느낌이다. 그 시원한 나무 그늘 하며, 드르렁드르렁 코고는 소리에 열렸다 닫혔다 하는 사립문, 돌솥에서 모락모락 피어오르던 차 향기, 여기저기서 몰려나오던 솔바람 소리가 나를 에워싸 어느덧 내가 그 속에 누워 있는 듯한 착각에 빠진다. 그러다가 새 학기에는 학생들에게 "또한 통쾌하지 아니한가?" 시리즈를 과제로 받아볼 궁리를 하며 혼자 씩 웃기도 한다.
 
 
한시 속에 담긴 옛 선비들의 사랑론
 
 
 
너도 네 마누라를 때리니?
 
철종 때 정수동(鄭壽銅)의 아내가 난산으로 목숨이 위태로웠다. 다급해진 그가 불수산을 조제해 오마고 집을 나섰다. 약방 가는 길에 친구를 만났는데, 금강산을 구경가는 길이라고 했다. 아내가 사경을 헤매고 있는 것도 까맣게 잊고 덜렁 금강산 구경을 따라나섰다가 돌아오니, 그때 낳은 아이가 백일이 지났더라고 했다.
 
가정에 무심한 옛 남정네들의 이런 종류 이야기들이 무슨 무용담이나 되는 듯이 전해진다. 그래서였는지 한 여자 대학원생의 페미니즘 관련 논문을 보니, 이렇게 씌여 있다. "조선 시대는 남성 중심의 가부장제 사회이다. 가부장제란 남성에 의한 여성 지배를 의미한다. 조선조 사회에서 여성은 중심권 밖에서 살아가는 미미한 존재로서 여성은 단지 남성의 부속물로 여겨졌을 뿐이다. 여성은 아기를 낳아 기르는 생산 기능을 담당한 인물일 뿐 사회 참여가 처음부터 철저하게 구속되었다."
 
지난 해 대만에 교환교수로 머물 때 가장 많이 들었던 말이 있다. 그들 말로 `따난런주의(大男人主義)`, 즉 남성우월주의가 한국은 왜 그렇게 심하냐? 너도 네 마누라를 때리느냐는 물음이었다. 심지어 국제학술회의장에서도 이 문제는 이야기 거리였다. 앞서 대학원생이 가졌던 조선 사회에 대한 단순한 이분법적 사고나, 대만 사람들이 가졌던 한국 사람에 대한 왜곡된 편견은 내가 보기에 크게 다르지 않아 보인다.
 
조선시대 여자들은 사람 취급도 못 받고 살았다. 지금도 한국 남자들은 여자들을 심심하면 때린다. 그렇다면 조선시대 야담 속에서 공처가 이야기는 왜 그렇게 자주 보이는 걸까? 오늘날 남성들은 정말 아내를 때리며 폭군처럼 군림하며 사는가? 그 학술회의장에서 자신은 애처가이며 한국 남자들은 요즘 마누라 앞에서 기도 못 펴고 산다며, 마누라를 때리는 그런 야만적이고 간 부은(?) 남자는 없다고 해명하느라 진땀을 빼던 한국인 교수의 표정이 지금도 생생하다.
 
우리가 아무리 그렇지 않다고 해도 대만 사람들은 한국 남자들이 자기 아내를 때리며 산다고 믿는다. 또 지금 우리들은 조선시대 여성들은 핍박받고 학대받고 인간 이하의 삶을 살았다고 무작정 그렇게 믿는다. 유산 상속 문서나 노비 문서를 통해 여성의 사회적 지위가 그렇듯이 낮지는 않았다는 연구 성과를 접하고 나서는 오히려 고개를 갸웃한다. 그런데 내가 오늘 써야 할 글의 주제는 그 폭력의 주체였던 조선조 선비들의 사랑이다. 과연 그 시절의 여성들은 인간 이하의 대접을 받으며 철저하게 남성의 부속물, 또는 성적 노리개로만 살았던 것일까? 그 대학원생의 말처럼 여성을 남성의 부속물 쯤으로 여겼던 선비들에게 과연 사랑이란 것이 있었을까? 있다면 어떤 모습이었을까?
 
 

언문 책을 베껴 주며
 
제 아무리 세상이 변해도 사람 사는 이치는 별반 달라진 것이 없다. 생로병사하는 삶의 사이클이 변할 리 없고, 만나고 헤어지고 그리워 하는 남녀의 사랑에 때의 고금이나 양(洋)의 동서가 있을 리 없다. 조선시대 선비 하면 으레 사서삼경이나 떠올리고 찔러도 피 한 방울 안나올 것 같은 딱딱한 군자상을 떠올리는 것은 우리의 고약한 편견이다. 그들도 피가 돌고 살이 따뜻한 사람이었을진대, 어이 안타까운 젊은 날의 로맨스인들 없었겠으며, 갈피갈피에 숨겨둔 눈물겨운 사랑인들 왜 없었으랴.
 
 
묻노니 그대는 무얼 생각하는가   
내가 그리는 건 북쪽 바닷가.   
높은 가을 이슬 희고 부용꽃 지면   
연희네 집 단풍나무 붉게 물들지.    
그 많은 가지마다 붉은 등불 밝히니  
비단 휘장 열고 보면 빛깔도 영롱해라.  
단풍나무 그늘에서 달 떠오길 기다리다  
달은 연희 비추며 오동나무 어루만졌지.  
이 때 나는 차가운 강 길 따라 가   
쌓인 낙엽 함께 앉아 얘길 나눴네.   
말 끝나면 연희의 손을 잡고서   
단풍나무 붉은 뜰을 함께 오갔지.   
問汝何所思  所思北海湄
高秋露白芙蓉落  蓮姬園裏楓樹赤
千條萬條燭天紅  錦步障開光玲瓏
蓮姬待月楓樹下  月照蓮姬撫孤桐
是時我從寒江渚 
坐著葉堆相與語
語罷却携蓮姬手  紅樹園中共來去
 
김려(金 , 1766-1821)가 32세 때 유언비어 사건에 연루되어 함경도 부령 땅에 유배 가 10년 가까운 세월을 이곳에서 보낸 일이 있었다. 한양으로 돌아온 그는 그곳의 그리운 얼굴들을 떠올리며 연작시를 지었는데, 그것이 바로 《사유악부(思 樂府)》 290수이다. 위시는 그곳에서 만나 깊은 사랑을 나누었던 여인 연희에게 바친 그리움의 노래이다. 말이 그리운 얼굴들이지 이 연작시 290수 가운데 수십 수가 오로지 연희에게 바쳐진, 전편에 걸쳐 연희를 향한 가슴 메이는 그리움이 구절마다 메아리치고 있는 작품이다. 위시를 짓다가 그는 분명히 울었을 것이다.
 
여울지며 흘러가는 찬 강물을 따라 사랑하는 여인의 집을 찾아가면, 그리움처럼 온통 붉게 물든 단풍 숲 아래에선 그녀가 오동나무를 어루만지며 달 떠오길 기다리며 서 있었다. 지천으로 깔린 낙엽 위에 둘이 앉아 소곤소곤 사랑의 밀어를 나누다 달빛이 너무 고와 할 말이 없어지면 가만히 일어나 그녀의 손을 잡고서 불붙은 단풍 동산을 밤새 왔다 갔다 했었다.
 
묻노니 그대는 무얼 생각하는가   
내가 그리는 건 북쪽 바닷가.   
괴상해라 오늘 밤 꿈도 이상해   
연희가 내 손잡고 눈물 줄줄 흘리며,  
한 차례 목이 메다 겨우 하는 말   
"서방님 묶인 채로 성문 나선 뒤   
우물가 앵두나무 살구나무는   
벌레가 뿌리 먹어 함께 죽었죠.   
올 가을 접어들자 홀연 잎이 나더니  
손바닥만한 잎이 가지마다 가득해요.  
서방님도 나무처럼 어서어서 돌아와  
이생에서 다시 만나 함께 지내요.   
問汝何所思  所思北海湄
怪底今宵夢兆異  蓮姬握手橫涕泗
一回嗚咽一回言  阿郞被逮出城門
井上櫻桃與丹杏  一時竝강충齧根(죽을 강, 벌레 충)
彊到今秋忽生葉  葉葉如掌枝枝疊
願郞如樹早回還  此生重逢共歡협(기쁠 협) 
 
이번엔 연희가 꿈길로 그를 찾아왔다. "서방님이 떠나신 뒤 우물가에 심었던 앵두나무와 살구나무는 그만 벌레가 뿌리를 갉아먹어 죽고 말았답니다. 그런데 웬 일이랍니까? 올 가을에 다 죽었던 나무에서 손바닥만한 잎이 가지 가득 돋아나 되살아났지 뭐예요. 서방님! 저 나무처럼 다시 제 곁에 돌아오셔서 그때처럼 다정하게 함께 살아요." 그 목소리가 하도 안타까워 그만 잠이 깨고 말았다. 어느새 베갯잇은 푹 젖어 있었다. 얼마나 보고 싶었으면 그녀는 그 먼 꿈길을 달려 나를 찾아 왔을까? 얼마나 보고 싶었길래 그는 이런 꿈을 다 꾸었을까?
 
역시 가슴 메이는 사연이다. 체통을 따지기로 한다면 젊잖은 처지에 차마 붓을 들 수 있는 내용이 아니다. 그러나 그는 그 사랑을 노래로 남겼다. 부끄러움이나 체모 따위는 따지지 않았다. 그만큼 그 사랑이 소중하고 안타까웠던 까닭이다. 조선시대 선비의 시속에서 이런 진솔한 사랑의 토로를 만나게 되는 것은 그리 낯선 일이 아니다.
 
다음은 기준(奇遵, 1492-1521)이 귀양지에서 고향집의 아내를 그리며 지은 시 〈회처(懷妻)〉다.
 
슬하의 어린애는 말을 갓 배웠겠고  
부엌의 늙은 종은 양식이 없다겠지.   
뜨락엔 황량하게 가을 풀이 돋았겠고  
날로 여윌 그 얼굴이 보일 듯 삼삼해라.  
膝下孩兒新學語  조門老婢舊懸瓢(부엌 조)
林園廖落生秋草  想見容華日日凋
 
시의 주제는 말할 것도 없이 "여보! 미안하오"이다. 귀양올 때 뱃속에 있던 아이는 지금쯤 엉금엉금 기어다니며 말을 배우기 시작했을 것이다. 제 자식 얼굴도 모르는 아비도 있다던가. 남정네 없는 집안 살림은 또 얼마나 궁색할 것인가. 안 봐도 그 정경이 훤히 눈 앞에 보이는 것만 같다. 마당엔 잡초가 돋아 있겠고, 늙은 계집종은 빈 뒤주를 박박 긁으며 끼니 걱정을 하고 있겠지. 멀리 나 있는 하늘을 바라보며 한숨 쉬고 있을 그 여윈 얼굴이 눈앞에 삼삼하게 떠오른다. 고개를 돌리고 만다. 아! 가족이 다시 만나 도란도란 오붓하게 옛날 이야기를 하며 살아볼 날이 오기는 올 것인가?
 
시월에 유마자는 다시 서울에 갔다가 동짓달에 집으로 올 때, 도중에 병이 들어 간신히 집에 와서 두 달을 고생하니, 부인이 주야로 잠을 자지 못하고 병간호를 하거늘, 유마자가 탄식하여 말했다. "부인이 병이 들었다 해도 나는 저렇게는 못할 것이니 그 은혜를 어떻게 갚을 수가 있으랴." 유마자는 생각했다. `언문 책을 베껴주면 부인이 심심할 때 소일하리라.`
 
한글 필사본 소설 『수호지』의 말미에 씌여진 필사기(筆寫記)이다. 겨울철에 서울로 볼일 보러 갔던 남편은 12월 엄동설한에 고향으로 돌아오다가 병이 들어, 집에 오자마자 두 달을 몸져누웠다. 밤낮 없이 잠 한 숨 못 자고 병간호를 해준 아내가 그는 너무 고마웠다. 아내의 극진한 간호 덕분에 자리를 털고 일어난 그는 아내가 그토록 좋아하는 소설책을 베껴주면 심심할 때 그것을 읽으며 소일 할 수 있겠다고 생각했고, 그래서 그 끝도 없이 긴 소설을 한 자 한 자 붓으로 베껴 아내에게 선물했다. 밤마다 사랑채에서 여러 날을 몰래 베껴 써서 마침내 필사가 끝났다. 그날 위의 필사기를 쓴 뒤 뒷춤에서 꺼내 아내 앞에 멋적게 쭈빗쭈빗 이 책을 내놓았을 그의 표정이 이 필사기 속에는 그대로 담겨 있다. 이 책을 받아든 그녀의 마음은 어땠을까? 그 책을 펼 때마다 그녀는 자신을 위해 한 글자 한 글자 정성을 기울였을 남편 생각에 소설의 이야기보다 더 큰 행복과 감동을 맛보았으리라.

 
나는 죽고 그댄 살아
 
심노숭(沈魯崇, 1762-1837)은 아내가 세상을 뜬 후 26편의 시와 24편의 문을 지어 죽은 아내를 향한 그리움을 토로했다. 아내는 연일 병구완 끝에 지쳐 잠든 남편을 공연히 깨우지 말라는 말을 마지막으로 세상을 떴다. 그는 〈누원(淚原)〉 즉 `눈물이란 무엇인가?`란 글을 지어 아내에게 바쳤다.
 
눈물은 눈에 있는 걸까 마음에 있는 걸까? 눈에 있다 하면 마치 물이 웅덩이에 고인 것 같단 말인가? 마음에 있다 하면 또한 피가 핏줄을 돌 듯 한단 말인가? 눈물이 눈에 있지 않다고 말하는데, 눈물이 나오는 것은 신체 다른 부위와는 무관하게 오직 눈이 홀로 이를 관장하니 눈에 있지 않다고 말할 수는 없다. 또 마음에 있지 않다고 하지만, 마음이 움직이지 않는데 눈이 홀로 눈물을 흘리는 경우는 없으니 또 마음에 있지 않다고 말할 수도 없다. 만약에 또 마음에서부터 눈으로 나오는 것이 마치 오줌이 방광에서 신(腎)으로 나오는 것과 같다고 말한다면, 저가 모두 물의 종류여서 아래로 흐르는 성질을 잃지 않을 터인데, 유독 눈물만 그렇지 않단 말인가. 마음은 아래에 있고 눈은 위에 있으니, 어찌 물이 아래로부터 위로 흐르는 이치가 있단 말인가?
 
이어지는 글에서 그는 아내가 죽고 나서 시도 때도 없이 주체 못하고 눈물을 흘리던 일을 말하며, 눈물이란 마음에 느꺼움이 있을 때 정신이 이에 감응하여 흐르게 되는 것이라고 하였다. 즐거운 잔치 자리에서 거문고 피리 소리가 낭자할 때나, 일이 바빠 처리해야 할 공문이 책상 위에 수북히 쌓여있을 때도, 문득 죽은 아내 생각이 나서 걷잡을 수 없는 눈물을 흘리고 나면, 아내의 영혼이 잠깐 내 곁에 왔었구나 하고 생각했었다는 이야기를 담담히 덧붙였다.
 
또 〈신산종수기(新山種樹記)〉란 글에서는 고향 파주에 새집을 조그맣게 짓게 되자 기뻐서 아내와 새 집의 모습을 상의하던 이야기가 나온다. 공사가 끝나면 꽃과 나무 심을 일도 같이 이야기했는데, 집이 채 지어지기도 전에 아내는 그만 세상을 뜨고 말았다. 병이 위독해 졌을 때 아내는 자기를 파주 새집 곁에 묻어달라고 했고, 그의 이사 길에 아내는 관에 실려서 왔다. 집 가까이 아내를 묻고, 그녀가 살아 그토록 좋아하던 꽃과 나무를 집 둘레에 빼곡이 심어 가꾸면서, 살아서는 파주의 집을 얻지 못했지만 자신이 죽어 흙으로 돌아간 뒤 부부 함께 영원히 파주의 산을 얻어 누리자고 축원하였다. 그러자 어떤 사람이 "그대는 장차 살 것은 도모하지 않고 죽은 뒤의 계책만 세우고 있는가? 죽으면 아무 것도 알 수 없는데 무슨 계획을 한단 말인가?"라고 말하자, 그는 "죽으면 아무 것도 알지 못한다는 말은 내가 참으로 참을 수 없는 말이다"라고 하며 목이 메어 글을 맺었다. 아내는 비록 죽었지만, 그에게 아내는 결코 죽어 아무 것도 모르는 그런 존재일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는 한 그루 한 그루 나무를 심고, 그 나무가 푸르러 동산을 이루어 가는 것을 죽은 아내에게 보여주고 있었던 것이다.
 
옛 문집을 보다 보면 도망문(悼亡文), 즉 죽은 아내를 생각하며 지은 시문이 의외로 많은 것에 놀라게 된다. 필자가 본 것만도 어림잡아 수백편이 넘는다. 그 글 마디마디 마다 평생 고생만 하다 죽은 아내를 향한 미안함과, 살아 잘해주지 못한데 대한 회한이 가슴 저미게 스며 있음을 본다. 다음은 심언광(沈彦光, 1487-1540)이 꿈에 죽은 아내를 만난 뒤 쓴 〈몽망처(夢亡妻)〉란 작품이다.
 
열 식구 두 뙈기 밭 의지해 사니  
가난한 집 살림살이 자네 어짐 덕이었네.  
간신히 먹고 산 지 서른 여섯 해  
공명을 누린 것은 겨우 몇 해 뿐.  
흰머리 되도록 함께 살자 했더니  
날 두고 어이 먼저 황천 가셨나.   
넋이 오매 저승길이 막힌 줄 몰랐더니  
꿈속에선 평소 모습 완연히 그대로라.  
十口常資二頃田  貧家生理賴妻賢
艱辛契活曾三紀  榮顯功名僅數年
自謂與君同白首  何先棄我落黃泉
魂來不覺冥途隔  夢裏기巾尙宛然(초록빛 기)

꿈을 꾸다 꿈길에서 죽은 아내를 만났다. 생시의 모습이 완연하여 죽은 사람인 것도 잊었더니 깨고 보니 허망한 꿈이다. 열 식구 큰 살림이 겨우 두 뙈기 밭에서 나는 소출만 보고 살아왔다. 평생 고생만 하다가 뒤늦게 열린 벼슬길에 이제 겨우 먹고 살만 하니까 아내가 훌쩍 세상을 떴다. 이젠 살만 해 졌으니 건강하게 흰머리로 백년해로 하자던 묵은 약속이 하도 허망해서 그는 자꾸만 눈물이 난다. 다시 한 수를 더 보기로 하자.
 
월하노인 통하여 저승에 하소연해  
내세에는 남편 아내 바꾸어 태어나리.  
천리 밖서 나는 죽고 그댄 살아서  
이 마음의 이 슬픔을 알게 하리라.  
聊將月老訴冥府  來世夫妻易地爲
我死君生千里外  使君知有此心悲
 
만년에 추사 김정희가 제주도에서 고단한 유배 생활을 하고 있을 때, 서울 집에서 아내의 부고가 날아들었다. 귀양살이에 지친 남편에게 편지와 옷가지를 보내며 집안 대소사를 알뜰살뜰 챙기던 아내, 평생 그늘에서 애만 태우던 그녀의 일생을 돌이키며 추사는 견딜 수 없는 자책감과 슬픔에 빠져들었다. 제목은 〈배소만처상(配所輓妻喪)〉이다. 정작 평생의 고락을 함께 했던 아내의 죽음 앞에, 가서 곡 한 번 할 수 없는 자신의 처지가 참으로 참담하였다. 그래서 그는 남녀의 인연을 맺어준다는 월하노인을 찾아가서, 내세에는 부부의 역할을 바꿔서 다시 한번 만나게 해줄 것을 하소연하겠다고 했다. 단지 내세에도 부부로 다시 만나자는 허망한 다짐을 두려 함이 아니다. 그때도 천리 밖 멀리 서로 떨어져 있다가 이번에는 반대로 내가 먼저 죽고 당신은 살아서 지금의 이 내 참혹한 슬픔을 느껴 보게 하겠다는 것이다. 그저 읽기만 해도 당시 추사의 처연한 슬픔이 감염되어 온다. 
 

 내 나이를 묻지 마오
 
눈썹 곱게 단장한 흰 모시 적삼   
마음 속 정스런 말 재잘재잘 얘기하네.  
님이여 내 나이를 묻지를 마오   
오십년 전에는 스물 셋이었다오.   
澹掃蛾眉白苧衫  訴衷情話燕니남(니: 口+尼, 남: 口+南)   
佳人莫問郞年歲  五十年前二十三
 
신위(申緯, 1769-1847)의 〈증변승애(贈卞僧愛)〉란 작품이다. 신위가 그의 풍류를 사모하여 곁에서 모시면서 필묵의 심부름이라고 하겠다는 변승애란 기생에게 써주었다고 전해지는 작품이다. 혹 조수삼(趙秀三)의 작품으로 알려져 있기도 하다. 해학스러우면서도 함축미가 뛰어난 작품이다. 눈썹을 단정하게 그리고 흰 모시 적삼을 청결하게 갖춰 입은 그녀가 마치 제비가 지지배배 거리듯 곁에 앉아 제 마음 속 품은 정을 쉴새 없이 소곤소곤 이야기한다. 머리가 이미 허연 나는 그녀의 애교 짙은 태도에 그만 애간장이 다 녹을 지경이다. 3구에서 내 나이를 묻지 말라고 해놓고, 4구에서 제 입으로 말하는 밀고 당기기가 재미있다. "내 나이가 몇이냐 하면, 음 그러니까 50년 전에는 스물 셋이었느니라"고 대답하고 있는 것이다.

이 시는 말하자면 자신이 이미 늙었음을 핑계로 그녀의 사랑을 완곡하게 거절한 내용으로 알려져 있다. 사랑스런 마음이야 왜 없었겠는가? 그러나 자신은 황혼의 늙은이요, 그녀는 한참 피어나는 꽃봉오리이니, 그녀를 위해 내 욕심을 잠깐 눌러 보는 것이다. 이런 유머와 은근함 속에는 읽는 이의 마음을 푸근하게 하는 따뜻함이 배어 있다.
 
개화기 때 이해조는 "춘향전은 음탕 교과서요, 심청전은 처량 교과서"라며, 커가는 청소년이 이런 소설을 읽으며 자란다면 나라 교육의 장래가 어찌 되겠느냐며, 읽어 하나도 재미 없는 신소설 〈옥중화〉 창작의 변을 소리 높인 일이 있다. 흔히 우리는 `그때 거기`는 `지금 여기`와 판연히 달랐으리라고 지레짐작한다. 우리의 착각은 여기서 시작된다. 옛적에도 저 고구려 유리왕의 노래로 전하는 〈황조가〉에서부터 고려가요의 그 농도 짙은 사랑, 시조에서의 농탕한 가락도 있었다. 판소리 속의 걸쭉한 육담이나 고전소설 속의 진진한 사랑은 여기서 일일이 다 말하지 못한다. 그때 거기나 지금 여기는 하나도 다를 것이 없다. 달라진 것은 표피의 겉모습 뿐이지, 삶을 구성하는 요소들은 언제나 한가지다.
 
이상 성글게 한시의 거울에 비친 옛 선인들의 사랑 이야기를 적어 보았다. 표현하는 방법은 달라도 사랑은 문학의 영원한 주제다. 옛 사랑의 표현은 지금처럼 직접 드러내놓고 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우리가 피상적으로 생각하는 것처럼 무미건조하고 근엄한 것만도 아니었다. 인간의 체취가 느껴지고, 따뜻한 마음이 오가는 그런 사랑이 있었다. 너무나 안타까워서 차마 다 말 못하고, 안으로 머금는 그런 사랑이 있었다. 가슴이 저미도록 그리워서 꿈길로 가서 만나는 그런 사랑이 있었다.


18세기 시단과 일상성의 시세계

       
1
 
 
혜환(惠 ) 이용휴(李用休, 1708-1782)는 18세기 한문학사에서 특이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이름이다. 이전에 보지 못한 새롭고도 독특한 작품 세계로 한 시대 문단을 이끌었다. 몰락한 기호남인(畿湖南人) 문학을 대표하면서, 연암 박지원과 함께 당대 문단의 두 축을 이루었다.
 
조선의 18세기는 우리 문학사상 참으로 난만한 꽃을 피웠다. 고려이래 3백년 간은 송시(宋詩)만 따라 배웠다. 과거 급제의 방이 붙으면, 으레 "금년에도 또 소동파 33명이 나왔구먼"하는 말이 뒤따랐다. 격률의 삼엄함과 용사의 꼼꼼함이 요구되었다. 선조 때부터는 당시(唐詩)를 배운다고 난리를 떨었다. 하루아침에 소동파·황산곡의 강서시풍은 씻은 듯이 없어졌다. 입만 열면 사랑을 말하고, 낭만을 말하고, 눈앞에 없는 아득한 옛날을 노래했다. 가보지도 못한 강남 땅을 동경하여 `연밥 따는 아가씨`를 그리고, 그곳 술집에 농탕하게 흘러넘치던 노랫가락을 환청으로 들었다.
 
오래 계속 하다보니 그것도 싫증이 났다. 누가 해도 한 소리고, 입만 열면 같은 곡조였다. 도무지 눈앞의 삶과는 따로 놀았다. 게다가 세상도 많이 달라졌다. 강고하던 의식의 각질도 깨어져 나갔다. 예전 같으면 도무지 있을 수 없던 일도 으레 그러려니 하게 되었다. 전 같으면 해괴망칙하다고 야단날 일이 참신하게 받아들여졌다. 도시 문화의 생동하는 분위기는 문학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었다.
 
18세기 시단은 이러한 환경 아래 삶의 다양한 국면들을 정겹게 포착했다. 시속에 인간의 체취가 스며들고, 그 시대의 풍경이 떠올랐다. 일그러지면 일그러진대로 진솔했고, 눈물겨우면 겨운대로 고마웠다. 분노를 굳이 감정의 체로 거르지도 않았다. 변치 않을 도(道)는 눈앞의 진(眞)으로 바뀌었다. 어린아이의 마음으로 돌아가자는 것이 무슨 구호처럼 유행했다. 비슷한 것은 가짜니, 남을 흉내내서는 안 된다고 했다. 두보나 소동파에 가까이 가지 못하는 것보다, 제 목소리를 내지 못하는 것이 부끄러웠다.
 
생각이 새롭고 보니, 실험도 자유로웠다. 듣도 보도 못한 6언시를 다투어 지었다. 7언율시의 삼엄한 형식미에 대한 집착도 사라졌다. 그 자리를 산문투에 가까운 5언절구가 차지했다. 시는 관념적 풍경을 복제하지 않았다. 눈앞의 광경, 살아 숨쉬는 인간들을 관찰했다. 사진사처럼 그 시대의 장면들을 찍어내고, 역사가처럼 꼼꼼한 필치로 재현했다. 추한 것 속에도 아름다움이 있음을 알았다. 겉꾸민 아름다움은 더럽다고 외면했다. 전통적인 형식에는 미련도 없었다. 꼭 해야 할 말이라면 틀을 깨고라도 했다. 주체할 수 없는 광기와 열정이 문단 위를 떠돌았다. 그리고 그 중심에 이용휴가 있었다.  
 
다산 정약용은 「정헌묘지명(貞軒墓誌銘)」에서, "영조 말년에는 이름이 한 시대에 으뜸이 되었다. 무릇 탁마하여 스스로 새로워지려 하는 자는 모두 그에게 나아가 잘못을 바로잡았다. 몸은 포의의 반열에 있었으되, 손으로 문원(文苑)의 저울대를 잡은 것이 30여 년이었으니 지금껏 없었던 일이다"고 이용휴의 문학을 높이 기렸다. 재야에서 30년간 문형을 잡았다 하여, 당대 문학이 온통 그의 자장(磁場) 안에 있었음을 특기하였다.
 
흔히 이용휴의 문학을 두고 기굴첨신(奇 尖新)을 말하곤 한다. 유만주(兪晩周)는 『흠영(欽英)』에서 "혜환의 시 백 여 편은 살펴볼 만 하다. 이 사람의 문장은 지극히 괴이한데, 산문에서는 지(之)나 이(而) 같은 어조사를 전혀 쓰지 않다가, 시에서는 지(之자)나 이(而)자를 거리낌없이 쓴다. 절대로 다른 사람과는 아주 다르게 하려 했으니, 이것은 진실로 하나의 병통이면서 또한 한가지 기이함이라 하겠다. 혜환은 장서가 아주 많은데, 지닌 것마다 기이한 글과 특이한 책이었다. 평범한 것은 한 질도 없었다. 대개 그 기이함은 실로 천성이었다"고 적고 있다.
 
과연 그의 시문을 살펴보면, 담긴 생각이 비범하여 어느 한편도 의표를 찌르지 않는 것이 없다. 산문을 시처럼 썼고, 시를 산문처럼 썼다. 일상의 일을 말하면서도, 그것을 뛰어넘었다. 이덕무가 『청비록(淸脾錄)』에서 "혜환의 시는 힘써 중국을 따랐다. 압록강 동쪽의 말로 짓기를 부끄러워 했다. 격률이 엄격하고, 수사가 화려하여 별도의 세계를 열었다. 빼어나 곁할 사람이 없었고, 경전을 널리 보아 자구에 근거가 있었다. 한갓되이 달빛·이슬·바람·꽃 따위 쓸모 없는 말은 짓지도 않았다"고 한 것은, 그의 기이함이 단순히 사람의 이목을 놀래키는 호기(好奇) 취미가 아니라, 학문의 깊은 온축에 바탕을 두고 나온 것임을 주목한 것이다. 또 이덕무는 「우상전(虞裳傳)」에서 "혜환은 평범하고 누추함을 깨끗이 씻어내고 별도로 신령스러움을 갖추었다. 고금을 꿰뚫었고, 안목은 달빛과 같았다"고 기렸다.
 
또 박제가는 「회인시(懷人詩)」에서 "혜환은 오묘하여 청신함을 보여주니, 연꽃이 진흙에 물들잖음 흡사해라. 사가(詞家)에 법안(法眼)이 한번 열리고부터, 동방엔 책 읽는 이 아예 없어졌다네.(惠 超妙出淸新, 譬似蓮花不染塵. 一自詞家開法眼, 東方無箇讀書人.)"라고 했다. 진흙탕 속에서 고결하게 솟은 연꽃의 봉오리처럼 맑고 새로운 풍격을 열어 보인 것을 찬탄한 것이다. 그가 법안(法眼)을 열어 보이자, 동방에 독서인이 자취도 찾을 수 없이 되었다고 했다.
 
18세기 문단에서 그가 끼친 자취는 참으로 혁혁한 것이었다. 당대 여러 문인들의 한결 같은 기림만으로도 헤아림에 부족함이 없다. 하지만 정작 그의 문학은 이후 까맣게 잊혀졌다. 구슬 같은 작품들은 출판의 기회조차 갖지 못하고, 산산히 흩어졌다. 풍문만 있고 실체는 없었다. 근근히 문중에 필사본으로 전해 왔으나 그나마 온전하지도 않았다. 여기에 조금, 저기에 조금 남아 그 전모를 알 수가 없었다.
 
아들 이가환(李家煥, 1742-1801)은 정조가 `진학사(眞學士)`라 부르며 특별한 총애를 내렸던 인물이다. 아버지의 뒤를 이어 `문장이 온 나라에서 으뜸(文章冠一國)`이란 기림을 입었던 그가, 당쟁의 와중에서 천주교의 와주(窩主)로 지목받아 처형당해 기시(棄市)된 후, 가뜩이나 기울었던 집안은 아예 풍비박산이 되었다. 필사본 『혜환집초』 속에는 이가환이 지은 「노한원묘지명(盧漢原墓誌銘)」 같은 글이 엉뚱하게 이용휴의 글로 잘못 끼어들고 있다. 이러한 착간 현상은 이들 부자의 글이 제대로 정리되지 못하고 뒤죽박죽 섞인 채 은밀히 회자되던 전후의 정황을 짐작하게 해준다.
 
이번 이 책은 이렇듯 여기 저기 흩어져 있던 혜환 이용휴의 시를 서말 구슬을 꿰듯 하나 하나 주워 한 자리에 모은 것이다. 이렇게 모아 놓고 보니 과연 그 기이하고 정채로운 광채가 눈을 찌르고 정신을 화들짝 깨어나게 한다.

 
2
 
이용휴의 시에는 송시(送詩)와 만시(輓詩)가 유난히 많다. 보통 7,8수에 달하는 연작으로 된 이들 작품들은 모두 벼슬을 받아 임지로 떠나는 벗에게 준 증송(贈送)이거나, 세상을 떠난 지인(知人)을 추모하여 지은 작품들이다. 읽다 보면 처음엔 이런 류의 시가 많은 것에 놀라고, 그 다음엔 그 많은 시들이 어느 하나도 비슷한 데가 없는데 놀란다. 송시는 대부분 목민관으로서 백성을 사랑하는 선정(善政)을 베풀라는 당부이고, 만시는 죽은 이를 애도하는 판에 박은 내용임에도 불구하고, 어느 한편도 같은 것이 없다.
 
그의 시 가운데 절반 이상을 차지하는 이러한 작품들은 한편으로 그의 시가 인간과의 관계 속에서 배태된 것임을 말해준다. 한편 그의 시는 앞서 유만주가 지적한대로, 통상적인 한시의 문법에 전혀 얽매이지 않는 활달함을 보여준다. 때로 그의 시는 시인지 산문인지조차 분간 못할 정도로 분방하다.
 
「주부 벼슬을 한 김명장(金命章)에 대한 만사」 첫 수는 이렇다.
 
 
음덕은 귀울음에 비할 수 있어
자기는 알아도 남은 모르네.
글에서 일찍이 이 말 듣다가
이제와 그대에게서 이를 보았지.
陰德譬耳鳴  己知人不知
於傳曾聞此  於君今見之
 
 
거의 산문에 가깝다. `지(知)`가 두 번 나오고, `어(於)`가 같은 자리에 나란히 서는 것은 시에서는 쓸 수 없는 구법이다. `증(曾)` 같은 부사어나 `지(之)` 따위의 어조사를 아무렇지도 않게 썼다. 하지만, 자기는 들어도 남은 들을 수 없는 이명(耳鳴)처럼, 오른손이 한 일을 왼 손이 모르게 했던 망자의 심덕을 지극히 일상적인 언어의 표현 속에 곡진하게 풀어냈다. 그런가 하면, 「이우상에 대한 만사(李虞裳挽)」제 8수에서는,
 
 
그 사람 간담은 박과 같았고
그 사람 눈빛은 달빛 같았지.
그 사람 팔뚝엔 신령이 있고
그 사람 붓끝엔 혀가 달렸네.
其人如瓠膽  其人如眼月
其人腕有靈  其人筆有舌
 
 
라 하여, 아예 4구 모두 `기인(其人)`을 나란히 놓는 파격도 서슴지 않았다. 정을 펴는데 필요하다면 격률을 허무는 것도 주저함이 없었다. 그러면서 망설임 없이 담대한 행동, 쏘는 듯 반짝이던 눈빛을 지녔던, 팔뚝에 신령이 붙고, 붓에 혀가 달린 것처럼 붓을 잡기만 하면 거침없는 생각을 쏟아내던 우상 이언진에 대한 기억을 눈앞에서 보는 듯이 되살려 냈다.
 
「직산현감 이만굉에 대한 만사(李稷山萬宏挽)」 첫 수는 또 이렇다.
 
 
발로는 고인의 자취를 쫓고
마음엔 고인의 가슴 부쳤네.
몸뚱인 고인의 가운데 두어
자연히 고인과 하나 되었지.
足追古人跡  心寄古人胸
身置古人中  自然古人同
 
 
매 구절 같은 위치에 `고인(古人)`을 놓고, 그 앞에 `족(足)`, `심(心)`, `신(身)`을 두었다. 또 `족(足)`은 `적(跡)`과, `심(心)`은 `흉(胸)`과 호응을 이루면서, 행동 뿐 아니라 마음 씀씀이까지 옛사람의 표양을 본받아 옛사람처럼 살다간 고인의 기억을 떠올리고 있다. 
 
이렇듯 이용휴의 시는 그 표현이 매우 일상적이고 또 파격적이다. 너무도 쉬운 일상어로 되어 있고, 산문에 가까운 구법을 보여준다. 하지만 표현은 산문처럼 설명적이지도, 늘어지지도 않고, 시적으로 단단히 응결되어 깊은 울림을 남긴다. 「강악흠에 대한 만사(挽姜君嶽欽)」의 제 4수는 이렇다.
 
 
상자 속에 남겨진 유고가 있어
손님이 찾아와서 보여 달랬지.
그 아비 손 흔들며 거절하기를
"이것이 내 자식을 일찍 죽게 했다오."
협中有遺草  客來求見之
其父搖手止  曰是夭吾兒
 
 
시만 생각하고 정을 소중히 하던 스물 세 살의 아까운 젊은이가 세상을 버렸다. 남긴 글이나 보자고 청했더니, 아버지는 보여주지 않겠단다. 시 쓰느라 심혈을 다 쏟아 결국 일찍 죽고 말았으니, 아들이 남긴 시고는 아버지에겐 가슴에 박힌 못과 한가지인 셈이다. 또 「진사 신사권에 대한 만사(申進士史權挽)」제 5수에서는 똑같은 상황을 이렇게 노래한다.
 
 
그 아비 자식이 놀랄까 보아
자식 시신 만지면서 곡을 못하고,
소리 삼켜 벽 향해 드러누우니
뱃속으로 눈물이 뚝뚝 흐른다.
其父恐兒驚  不撫兒屍哭
呑聲臥向壁  두裡淚속속  
 
 
아들이 죽어 꼼짝도 않고 누운 것이 아버지는 차마 믿기지가 않는다. 자식의 시신을 붙들고 곡을 하면, 죽은 자식이 놀라 눈을 감지 못할까 봐 벽을 향해 드러누워 울음을 삼키는 애끊는 부정을 눈물겹게 그려냈다.
 
 
3
 
이용휴의 한시는 의표를 찌르는 표현과 인정의 미묘한 곳을 꼬집어 내는 절묘한 포착으로 독자의 정서에 깊은 울림을 남긴다. 이는 일상의 묘사에서 특히 돋보인다.
 
 
며느린 앉아서 아이 머리 따는데
등 굽은 늙은인 외양간을 쓰누나.
마당엔 콩깍지가 잔뜩 쌓였고
부엌엔 마늘 접이 걸리어 있네.
婦坐엽兒頭  翁구掃牛圈
庭堆田螺殼  廚有野蒜本
 
 
「농가(田家)」란 작품이다. 햇살이 빗긴 마루에선 며느리가 딸의 머리를 땋고 있다. 등이 굽은 시아버지는 외양간을 청소한다. 마당에는 알맹이를 다 까먹고 버린 우렁 껍질이 소복히 쌓여 있다. 햇마늘을 말리려고 부엌 한켠엔 마늘 접이 주렁주렁 매달렸다. 한 폭의 나른한 풍경화다. 작품의 주제는 뭘까? 우렁 껍질이 어쨌다는 것이며, 마늘 접은 어떻다는 것인가? 엄마가 아이의 머리를 땋아주며 도란도란 주고받는 대화며, 그 곁에서 묵묵히 집안 일을 감당하는 할아버지, 넉넉하고 푸짐한 먹거리, 더 이상 부러울 것이 없는 삶. 제목대로, 시인은 길가다 흘깃 들여다 본 시골 농가의 행복한 풍경을 부러워 했다.
 
 
옥 같은 손끝으로 들어 보이니
동전 두 닢 푸른 실에 꿰어 있구나.
"엿 사먹든 떡 사먹든 맘대로 해라
자꾸 울어 네 어미 속 썩이지 말고."
玉指尖頭擧示之  銅錢兩 貫靑絲
買飴買餠隨兒願  更勿啼呼惱阿 
 
 
「미인이 아이를 어루는 그림에 제하여(題美人戱 圖)」의 첫 수다. 그림 속 장면을 말로 펼쳐냈다. 눈물이 마르지 않은 꼬맹이는 아예 퍼질러 앉아 발을 동동거리며 악을 쓰고 운다. 엄마는 아이를 달래느라 푸른 실에 꿴 동전 두 닢을 그 앞에 들어 보인다. "뚝 그치면 이걸 주지. 엿 사먹든 떡 사먹든 네맘대로 하렴. 뚝 그치면 이걸 주지." 신기하게 울음을 뚝 그치는 꼬맹이의 모습이 선하게 보이는 것만 같다. 또 이런 것은 어떤가?
 
 
시골 아낙 두 마리 개를 딸리고
광주리에 점심밥을 담아 내간다.
벌레가 국그릇에 뛰어들까봐
호박 잎 따다가 그 위를 덮네.
村婦從兩犬  정로盛午엽 
或恐충投羹  覆之以瓠葉
 
 
「신광수가 연천에 부임하는 것을 전송하며(送申使君光洙之任漣川)」의 제 5수다. 농번기에 온 식구는 일손이 바쁘다. 아낙은 점심밥을 한 광주리 머리에 이고, 시장할 식구들 생각이 걸음이 바쁘다. 영문 모르는 강아지들은 그저 나들이가 즐겁다. 시인의 시선이 엉뚱하게 국그릇 위에 덮인 커다란 호박잎에 가서 딱 멎었다. 물론 상상 속의 그림이다. 멀리 연천 땅으로 고을살이를 떠나는 벗에게, 이렇듯이 아름다운 풍경을 연출하는 선정(善政)을 베풀어 달라는 당부를 둔 것이다. 그 성동격서(聲東擊西)의 수법이 참으로 유연하다.
 
 
동전 쥔 계집종이 어부에게 묻는다
"생선 값 흥정하여 파는게 어떠하오?"
늙은 어부 삿갓 쓴 채 뱃 머리에 앉아서
다래끼에 펄펄 뛰는 잉어가 들었다네.
婢把銅錢問老漁  鮮魚論直賣何如
老漁 笠船頭坐  云有籃中活鯉魚
 
 
「서호 소은의 집 벽 위에 기제하다(寄題西湖小隱壁上)」의 제 4수다. 마포 서강의 떠들썩한 물가 풍경이 눈에 선하다. 계집종은 동전을 들어 보이며 늙수구레한 어부를 충동질 한다. 늙은 어부는 삿갓을 삐뚜름하게 쓴 채, 뱃머리에 오두마니 앉아 있다. "생선 좋은 거 있나요?" 어부는 시큰둥하게 "산 잉어 살테여?" 한다. 계집종은 해산한 주인 마님을 위해 잉어를 사러 나왔던 걸까?
 
한 시대의 표정이 이런 시들 속에서 되살아 난다. 음화(陰畵)가 인화지 위에서 서서히 제 모습을 드러내듯, 2백년도 더 된 옛 풍경이 그의 붓끝에서 이미 흙으로 돌아간 그때 사람들의 삶의 풍경을 끄집어 낸다. 
 

4

 
눈에는 두 가지가 있다. 외안(外眼) 즉 육체의 눈과, 내안(內眼) 곧 마음의 눈이 그것이다. 육체의 눈으로는 사물을 보고, 마음의 눈으로는 이치를 본다. 사물 치고 이치 없는 것은 없다. 장차 육체의 눈 때문에 현혹되는 것은 반드시 마음의 눈으로 바로 잡아야 한다. 그렇다면 그 쓰임새가 온전한 것은 마음의 눈에 있다 하겠다. 또 육체의 눈과 마음의 눈이 교차되는 지점을 가리워 옮기게 되면, 육체의 눈은 도리어 마음의 눈에 해가 된다. 그런 까닭에 옛 사람이 처음 장님이었던 상태로 나를 돌려달라고 원했던 것은 이러한 이유에서이다.
 
정재중(鄭在中)은 올해로 마흔 살이다. 40년 동안 본 것이 적지 않을 터이다. 비록 지금부터 80살이 될 때까지 본다하더라도 지금까지 보다 많이 보진 못할 것이니, 훗날의 재중이 지금의 재중과 같을 것임을 알 수 있겠다. 다행이 재중은 육체의 눈에 장애가 있어 사물 보는 것을 방해하므로, 오로지 마음의 눈으로만 보게 되었다. 이치를 살핌이 더욱 밝아질 터이니, 훗날의 재중은 반드시 지금의 재중과는 다를 것이다. 사정이 이러할진대, 눈동자를 찔러 흐릿함을 물리치는 처방은 말할 것도 없고, 비록 작은 쇠칼로 각막을 도려내 광명을 되찾아 준다고 해도 또한 원하지 않게 되리라.
 
 
이용휴의 「정재중에게(贈鄭在中)」란 글이다. 의표를 찌르는 글쓰기는 시나 산문 할 것 없이 그의 장기다. 나이 40에 갑자기 실명한 정재중을 위로차 해준 말이다. 눈 앞의 모든 것은 마음을 어지럽게 한다. 육체의 눈은 실수 투성이다. 사고만 친다. 마음의 눈이 있어 육체의 눈이 흔히 빠지는 잘못을 바로잡을 수 있다. 사고만 치는 육체의 눈이야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이다. 하지만 마음의 눈이 어둡게 되면, 보는 것이 많을수록 현혹됨도 커질 터이니 큰 일이라고 했다. 눈이 멀어 마음의 눈을 뜨게 되었으니 오히려 눈 먼 것을 축하하고픈 심정이라는 것이다.
 
문제는 현상의 어지러움 속에서 진실을 파악하는 능력이다. 그럴 수 있으려면 내가 내가 되어야만 한다. 내가 나의 주인이 될 때, 사물의 주인도 될 수 있다. 그렇지 않으면 늘 현혹되고, 끌려 다니고, 사고만 치게 된다. 「환아잠(還我箴)」은 바로 이 `나를 찾자!`는 주제를 선언처럼 밝힌 글이다. 그의 문학 정신이 이 한편 글에 다 녹아 있다.
 
 
옛날 내 어렸을 땐
천리(天理)가 순수했지.
지각(知覺)이 생기면서
해치는 것 일어났다.
식견이 해가 되고
재능도 해가 됐네.
마음 닦고 일 익히자
얽키설키 풀 길 없네.
다른 사람 떠받드는
아무 씨, 아무개 공
무겁게 추켜세워
멍청이들 놀래켰지.
옛 나를 잃고 나자
참 나도 숨었구나.
일 꾸밈 좋아하여
나를 타고 가 버렸네.
오래 떠나 가고픈 맘
꿈 깨나니 해가 떴다.
번드쳐 몸 돌리니
하마 집에 돌아왔네.
광경은 전과 같고
몸 기운도 편안하다.
잠금 풀고 굴레 벗자
오늘에 새로 난 듯.
눈도 밝기 전과 같고
귀도 밝기 전과 같아,
하늘이 준 총명함이
다만 전과 같아졌다.
많은 성인 그림자일뿐
나는 내게 돌아가리.
어린 아이 다 큰 어른
그 마음은 같은 것을.
신기한 것 없고 보면
딴 생각이 치달리리.
만약 다시 떠난다면
돌아올 기약 다시 없네.
향 살라 머리 숙여
천지신명께 맹세한다.
이 몸이 마치도록
나와 함께 주선하리.
昔我之初 純然天理
逮其有知 害者紛起
見識爲害 才能爲害
習心習事 輾轉難解
復奉別人 某氏某公
援引藉重 以驚群蒙
故我旣失 眞我又隱
有用事者 乘我未返
久離思歸 夢覺日出
飜然轉身 已還于室
光景依舊 體氣淸平
發錮脫機 今日如生
目不加明 耳不加聰
天明天聰 只與故同
千聖過影 我求還我
赤子大人 其心一也
還無新奇 別念易馳
若復離次 永無還期
焚香稽首 盟神誓天
庶幾終身 與我周旋
 
태어나 순연(純然)하던 하늘 이치가 앎이 생겨나면서부터 흩어져 버렸다. 아는 것이 많아질수록, 나는 나의 주인이 되지 못하고, 모모한 사람들이 추켜세우는 명성에 현혹되고, 달콤한 칭찬에 안주하여 참 나를 잃고 헤매게 되었다. 어느 날 문득 정신을 돌이켜 본래 자리로 돌아왔다. 세상은 그대로인데, 내 몸을 옭죄던 굴레를 벗어던지자 문득 다 달라졌다. 이제 나는 나를 떠나지 않겠다. 내가 주인되는 삶을 포기하지 않겠다. 한눈 팔거나 기웃거리지 않겠다.
 
그의 `나를 찾자`는 주장은 오늘에도 여전히 새롭게 읽힌다. 눈을 잃고 나서 마음의 눈이 떠진 정재중처럼, 지금의 나를 버림으로써 참 나를 되찾자는 그의 주장은 여전히 힘이 있다.
 
 
이 집은 이 사람이 사는 이곳이다. 이곳은 바로 이 나라 이 고을 이 마을이다. 이 사람은 나이는 젊고 식견은 높은, 고문을 좋아하는 기이한 선비다. 만나보고 싶거든 이 기문에서 찾으라. 그렇지 않으면 비록 쇠신이 다 닳도록 대지를 쏘다녀봐도 마침내 또한 얻지 못하리라. 
(此居, 此人居此所也. 此所卽此國此州此里. 此人年少識高, 耆古文奇士也. 如欲求之, 當於此記. 不然, 雖穿盡鐵鞋, 踏遍大地, 終亦不得也.)
 
 
「차거기(此居記)」란 글이다. 불과 53자뿐인 글에서 `차(此)`자가 무려 아홉 번이나 되풀이 된다. 그는 어디 있는가? 그의 글 속에 숨어 있다. 쇠신이 다 닳도록 돌아다닐 것 없이, 이 시집을 읽고 또 읽어 그와 만날 수 있다. 다른 곳에는 없고, 이 집 속에 숨어 있다.
 
그동안 흩어진 구슬처럼 좀체 전모를 드러내지 않던 이용휴의 시가 이렇게 한 자리에 오롯히 모였다. 자료를 찾는 노고와 그것을 정리하고 또 우리말로 옮겨내는 어려움은 이 시집을 읽으면서 독자들이 느낄 기쁨으로 충분히 상쇄될 수 있을 터이다. 그의 재기발랄한 산문까지 아울러 명실공히 이용휴 문학전집으로 속히 엮어지기를 기대한다.
 
백광훈의 사향시(思鄕詩)와 용호(龍湖)의 청영정(淸暎亭)
 
 
 

한시를 읽다가 문득 남도 소리의 유장한 가락을 느낀 것은 백광훈(1537-1582)에게서가 처음이었다. 그의 시는 애잔해도 슬프지는 않고, 따뜻해도 폭 앵기지는 않는다. 그의 시를 읽다가 나는 무시로 남도창의 구성진 가락을 듣곤 했다. 오래 동안 그를 숨겨놓고 짝사랑 해오는 동안, 나는 그가 고단한 서울 생활 속에서 늘 그리워 꿈꾸며 힘을 얻곤 하던 장흥 땅의 풍광을 많이 생각했다. 고향을 떠난 이의 고향에 대한 사무치는 정과 백광훈이 특별히 마음을 두었던 용호(龍湖), 그리고 그곳의 아름다운 정자 청영정(淸暎亭)에 관해 노래한 시를 산보하듯 함께 읽어 본다.
 
1
고향은 언젠가는 돌아가야 할 모태와 같다. 가고 싶어도 못갈 때 고향을 향한 그리움은 차라리 기갈(飢渴)에 가깝다. 고향을 떠나던 날의 광경이다.
 
 
뜬 인생 백년간 홀로 괴로워 하며 
서로 웃는 얼굴로 처자를 달랬었네.
금릉성 아래 와서 뒤돌아 바라보니
흰 구름은 여태도 구봉산에 걸렸구나.
浮生自苦百年間  說與妻兒各好顔
却到金陵城下望  白雲猶在九峯山 
   〈집 떠나며[別家]〉
 
 
“여보! 속히 다녀오리다. 아버지 서울 가서 예쁜 신 사다 주마.” 얼굴은 웃는데 눈에는 벌써 눈물이 그렁 맺힌다. 뜬 구름 같은 인생이 이다지도 버겁고 힘겹다. 마음이 약해질까 봐 차마 뒤돌아보지 못한다. 참고 참다 금릉성을 다 내려와서야 고개 돌려 바라보니, 올라올 때 걸려있던 흰 구름이 여전히 그대로 있다. 고향 쪽에 두고 온 내 마음처럼. 보이지 않을 때까지 서서 손 흔들며, 벼슬자리 알아보러 서울 가던 아버지를 전송하던 처자의 모습은 고향 생각 때마다 낡은 사진처럼 가슴 속에 붙박힌다.
 
 
해 넘겨 세상 일로 처자식과 떨어져
언제나 배를 타고 고향 갈 생각했지.
성 가득 눈보라 외론 등불 타는 밤
내 마음 아실 이 정녕 그대 뿐이리라.
年來世故隔妻兒  每憶舟從故里移
風雪滿城孤燭夜  寸心唯有道人知

   〈안경창에게[次思庵贈安四耐]〉
 
 
눈보라가 친다. 문풍지가 우는 밤, 낯선 땅 하숙집에서 등불을 밝히고 오두마니 앉아 있다. 처창한 이 마음을 그대는 아는가. 뜬금없이 떠오르는 아내 생각, 자식 생각. 고향 길 닻을 달아 배 띄울 날 그 언제랴. 잠들면 꿈속에나 가볼 수 있겠지만, 꿈길에도 안스런 모습, 가슴 아파 앉아 있다. 
 
 
호서 길 가고 나면 호남길인데
천리 산하에 병든 몸일세.
낡은 여관 등불 없이 비바람 치는 밤
지나온 반평생이 옛 사람에 부끄럽다.
湖西路盡湖南路  千里山河一病身
古店無燈風雨夜  半生形影愧前人
   〈고향 오는 길에[還鄕路中]〉
 
 
얼마나 손꼽았던 귀향길이냐. 막상 병든 몸으로 이룬 것 없는 귀향의 발길은 무겁기 짝이 없다. 세상길은 왜 이다지 길고 고달프기만 한가? 호롱불 하나 없는 낡은 여관 방, 창밖에선 비바람이 울부짖는다. 이런 인생도 있구나. 주마등 같이 스쳐가는 반평생을 떠올리니 부끄럽구나. 몸 둘 바를 모르겠구나.
 
 
서울 땅 나그네로 두 해 떠돌 땐
꿈에 뵈던 고향 산 각별 했었지.
오늘에 진면목을 만나고 보니
꿈일까 걱정되어 고개를 드네.
二年辛苦客秦城  夢見鄕山別有情
今日却逢眞面目  擧頭猶怕夢中行
  <여원에 이르러 월출산을 바라보며[到女院望月出山]>
 
 
천리 길, 고향을 두해 만에 돌아온다. 여원(女院) 땅에 이르니 먼눈에 자욱이 월출산이 보인다. 떠돌이 신세로 꿈에서만 자로 뵈던 산. 월출산 그 너머가 고향 집이다. 두근대는 설렘을 가눌 길 없다. 두 눈을 멀쩡히 뜨고 고향 산을 마주 하다니 이 진정 꿈은 아닐 것인가. 다시금 고개를 들어 거듭 확인하고서야 마음이 놓인다. 신산(辛酸) 속에 타관 땅을 떠돌아 본 자만이 먼눈에 짚이는 고향 산의 두근거림을 알 수가 있다.
 
 
바다와 강 아득해라 길은 또 몇 천리뇨
고향 마을 돌아오니 옛날과 다름없네.
내 얼굴 변한 것을 아이들 갸웃하나
타향 땅의 세월은 하루가 일년일세.
江海茫茫路幾千  歸來隣曲故依然
兒童怪我容顔改  異地光陰日抵年
   〈고향에 돌아와서[回鄕]〉
 
 
아득히 낯선 길을 얼마나 헤맸던가. 돌아와 안기고 보니 고향에는 세월이 빗겨 지나갔구나. 웃자란 아이들은 그새 낯이 설어 주춤거리며 긴가 민가 고개를 갸우뚱한다. 타향서 보낸 날이 손을 꼽아도, 몇 해가 지난 듯이 가마득하다. 세월이 할퀴고 간 주름이 아리다. 그래도 고향 품에 안긴 나그네는 비로소 꿈꾸지 않고 깊은 잠에 든다.

 
2
부산면 부춘리의 부춘정(富春亭)은 용호(龍湖)의 구불구불한 물줄기를 끼고 물가에 서있다. 강가 바위에는 백광훈이 그 멋진 초서로 휘갈겨 쓴 ‘용호(龍湖)’란 두 글자가 또렷히 새겨져 있다. 이곳은 그가 서울 생활 속에서도 늘 떠올리며 그리던 곳이었다. 시골 집에서 자신이 돌아올 날만을 기다리고 있을 아내를 생각하며, 미안한 마음을 담아 노래한 장시 <용강의 노래(龍江詞)〉도 이 강물을 배경으로 한다.
 
이곳 강가의 부춘정(富春亭)은 본래 이름이 청영정(淸暎亭)이었다. 정자의 주인은 문희개(文希凱)였고, 백광훈과는 가깝게 지내며 잦은 왕래가 있었다. 백광훈의 문집 속에는 문희개가 백광훈의 거처로 방문한 것을 반긴 시가 두 편 남아 있다. 백광훈은 서울에 있으면서도 이곳 풍광을 그리워했다. 현지에서는 1598년 문희개가 벼슬에서 물러나 지었을 것이라고 추정하고 있지만, 전혀 잘못이다. 1537년생인 백광훈이 젊은 시절에 이미 이 정자에 대해 여러 편의 시를 남긴 것이다. 정자의 건립은 1560년 어름이다.
 
부춘(富春)이란 이름은 한나라 때 고사(高士) 엄자릉(嚴子陵)과 관련이 있다. 그는 불의한 현실을 개탄하며, 광무제(光武帝)의 거듭된 부름도 아랑곳 않고, 부춘산(富春山) 칠리탄(七里灘)에 숨어살며 밭 갈고 낚시 하다 세상을 떴다. 그가 낚시하던 곳을 사람들은 엄릉뢰(嚴陵瀨)라 불렀다.
 
장흥의 부춘리에도 칠리탄이 있다. 대개 엄자릉의 높고 개결한 뜻을 본받아 지은 명칭이다. 칠리탄은 달리 동강(桐江)이라고도 하고, 정자 앞으로 에워도는 펑퍼짐한 물줄기를 따로 용호(龍湖), 용연(龍淵) 또는 용강(龍江)으로도 불렀다. 백광홍이 노래한 이곳의 풍광을 보자.
 
 
저물녘 호수 위 그림 같은 집
봄볕은 호수 가 풀 위에 있네.
밝은 달 비취는 산 앞의 정자
꽃 그늘 더더욱 보기 곱구나.
夕陽湖上亭  春光在湖草
明月山前榭  花陰看更好
  〈부춘의 별장[富春別墅]〉
 
 
붉게 물든 호수, 호수 가의 정자. 뉘엿한 봄볕은 새 풀옷을 간지른다. 이윽고 동산 위로 달이 떠올라 산 앞의 집을 비추이니, 따스한 봄볕이 마다한 꽃을 새초롬 달빛이 어루만진다. 달빛에 드러나는 꽃 그늘은 풀빛보다 더한층 아름답구나.
 
이곳에서의 흥겨운 한 나절 놀이를 마치고 이제 집으로 돌아간다.
 
 
말 머리 가지런한 백사장 저녁
구름 숲 푸르름을 몇 겹 둘렀다.
풍류를 다하기는 어렵다는데
헤어지자 어느새 마음 바쁘다.
並馬沙汀夕  雲林碧幾重
風流儘難竟  告別却怱怱
   <용연에서 취해 헤어지며[龍淵醉別]>
 
 
즐겁고 유쾌한 자리를 파하고, 거나해진 말고삐를 나란히 하여 갈길을 서두른다. 백사장에 박히는 말굽 소리가 둔탁하다. 몽롱한 눈을 들어 하늘을 보니 구름 둘린 숲에 푸르스름한 기운이 가득하다. 즐거움은 아쉬울 때 그쳐야 한다. 살펴 가게. 또 보세. 땅거미 더 몰려 들기 전에 길을 서둘러야지.
 
 
그대 실은 외로운 배 아득도 한데
거문고 가락 따라 강물도 깊다.
노 저어 돌아올 제 산 빛 어둡고
내 낀 나무 초록 속에 잠기어 있네.
送客孤舟遠  鳴琴一水深
棹廻山欲暝  烟樹綠沈沈
   <용호에서 입부와 헤어지며[龍湖別立夫]>
 
 
강물 위에 배를 띄어 그대를 전송한다. 그대 실은 배가 저만치 멀어지고, 이별의 가락 따라 강물이 출렁인다. 강물의 깊이만큼 내 그리움도 출렁인다. 왔던 자리로 돌아오는 동안 산 빛은 어둑해지고 숲은 자옥한 안개 속에 초록을 꿈꾸고 있다. 그대 가고 없는 빈 자리를 어디 가서 채울까.
 
서울 생활에서도 백광훈은 이곳의 풍광을 못내 그리워했다.
 
 
외론 성 오늘 밤엔 달빛이 어떠할까?   
남강엔 흰돌이 어찌 그리 많았던지.   
용촌의 빼어난 일 무어냐고 묻는 겐가   
눈 속에 어딜 가도 매화꽃 천지라오.   
孤城今夜月如何  記得南江白石多
君問龍村奇絶事  雪中無處不梅花
  <벗과 용호의 경치에 대해 얘기하다가[與金季義話龍湖之勝]>
 
 
달밤, 벗 김계의와 마주 앉아 이야기를 나누다 화제가 용호의 아름다운 경치에 미쳤다. “용호가 그리도 아름답습니까?” “아름답다 마다. 오늘 같이 달이 둥두렷이 밝은 밤, 남강엘 나가보게. 달빛 아래 흰 돌들이 더 희게 보인다네.” “또 뭐가 그리 좋답니까?” “이때 눈 속을 거닐어 보게. 사방 어딜 둘러봐도 눈처럼 흰 매화꽃 뿐이라네.”
 
청영정(지금의 부춘정)은 용호에서도 가장 아름다운 곳이었다. 청영정을 노래한 한 수를 보자.
 
 
천봉에 이는 구름 강물은 말쑥한데
바람이 연잎 치자 이슬이 덱데구르.
오늘 이 밤 어데선가 봉황의 피리 소리
누각 위 밝은 달은 그 님의 마음일세.
千峯雲作一江晴  風弄荷盤露有聲
何處鳳笙今夜裏  翠樓明月玉人情
   <청영정(淸暎亭)>
 
 
멀리 뵈는 천봉은 구름에 가렸는데, 강물은 어찌 이리 말쑥하게 개었던가. 바람은 연잎을 간지르고, 까르르 까르르 이슬이 굴러 떨어진다. 투명한 이 밤, 봉황새 끄는 수레 타고 신선이 내려 올 것만 같구나. 누각 위에 올라 밝은 달 보니 그 님의 그 사랑이 못내 애틋하구나.
 
백광훈은 다시 <청영정의 네 계절 노래[淸暎亭四時詞]> 네 수를 지어 철 따라 바뀌는 이곳의 아름다운 경치를 노래했다. 먼저 봄날의 풍경이다. 
 
 
비 걷힌 맑은 강에 강물은 넘실대고
강 꽃 욱은 곳에 백로가 목욕한다.
봄 바람에 왕손초는 초록으로 물들어
새 노래 접어들자 마음 가눌 길 없네.
雨霽淸江江水平  江花深處浴鵁鶄
東風綠盡王孫草  唱轉新詞無限情
 
 
비가 개였다. 물 불어난 봄 강물이 찰랑찰랑 넘실댄다. 저 건너 강 꽃이 뽀얗게 핀 곳에서 백로는 자멱질로 봄 단장이 한창이다. 그 사이 왕손초는 초록으로 물들었고, 새 노래를 부르는 목청에 흥취가 자못 거나하다. 다시 여름이다.
 
 
거나히 취해서는 창랑 물결 희롱하니
고목엔 꾀꼬리 울고 언덕은 길고 길다.
저물녘 삿대 소리 산 그림자 잠겼으니
부평초 넘실댄다 배가 온통 서늘하다.
相將載醉弄滄浪  古木黃鸝一岸長
日暮槳聲山影裏  綠蘋溶漾滿船凉
 
 
창랑에 배 띄워라 취한 흥이 도도하다. 꾀꼬리 우는 방죽 따라 뱃길이 아득쿠나. 산 그림자 물 위에 지니 집으로 돌아가자. 지국총 지국총 어사와. 서두르는 삿대질에 물 위에 뜬 부평초가 이리저리 쏠려가고, 취한 술이 깨라고 한기도 오싹하다. 그렇게 다시 가을이 왔다.
 
 
나루에 바람 급해 돛 내리고 지났는데
밤 들자 백사장은 외려 멀리 뵈는구나.
언덕 저편 몇몇 집엔 붉게 물든 단풍잎
푸른 산 끊긴 곳에 밝은 달만 곱구나.
渡頭風急落帆過  入夜雲沙望轉賖
隔岸幾家紅葉樹  靑山斷處月明多
 
 
나루 머리에 마파람이 불어오니 돛을 내리고도 배가 쏠릴 지경이다. 언제나 바라뵈는 백사장이건만 오늘 밤엔 갑자기 멀게만 뵌다. 아아 가을이 오고, 잎새들 붉게 물들었구나. 그 붉은 잎 더 선연하라고 달도 밝게 떴구나. 
 
 
아득한 밤하늘에 눈도 맑게 개이니
벽옥 피리 불면서 학 탄 신선 돌아오네.
노래하는 꿈 속에선 추운 줄도 모르고
매화 소식 찾다가 남쪽 다리 이르렀소.
一天晴雪夜迢迢  駕鶴人歸碧玉簫
吟夢不知寒意重  也尋梅信到南橋
 
 
소담스레 흩지던 눈발도 그치고, 아득한 밤하늘은 맑게 개었다. 옛 신선 왕자교가 벽옥 피리 빗겨 불며 학 타고 날아들 것만 같은 밤이다. 그 가락에 귀 기울이다 든 꿈은 추운 줄도 모르고, 혹시 봄이 왔나 싶어 꿈길에도 남쪽 다리 께를 서성거렸다. 봄은 아직 멀었는데.
다시 봄이 오고, 먼 길 갔던 나그네는 다시 돌아왔다. 그래서 반가워 다시 한수.
 
 
호수 정자 봄이 오고 나그네도 돌아오니
매화꽃 피어난 곳 버들도 예롭구나.
밤늦도록 술마시며 떠날 줄 모르는데
분주한 산바람이 춤추는 옷 너울대네.
春到湖亭客亦歸  梅花開處柳依依
主人有酒夜忘發  多事山風蕩舞衣
   <용호잡영(龍湖雜詠)> 제 3수
 
 
오랜만에 만난 벗들은 하나 둘 호수가 정자로 모여든다. 겨울 가고 봄이 오듯 흩졌던 벗들이 이리 다시 모였다. 매화꽃 피어난 곳에 버들은 실실이 연두빛 물이 올라 있다. 흥겨운 주인은 한 잔 두 잔 술에 밤이 깊어도 일어설 줄 모르고, 도도한 흥취는 가눌 길이 없다. 옷 소매 너울너울 흥에 겨운데, 산 바람도 제 멋에 어위겨워 자꾸만 춤추는 어깨를 들썩이게 만든다.

 
3
내가 지난 6월 부춘정을 찾았을 때, 백광훈의 ‘용호(龍湖)’란 휘호가 새겨진 옆의 바위에 또 ‘칠리평탄(七里平灘) 일사청풍(一絲淸風)’, 즉 ‘7리 펑퍼진 여울에 한 오리 맑은 바람’이라 쓴 글씨가 새겨져 있는 것을 보았다. 그 곁에도 각각 ‘고금(古今)’으로 시작되는 두 줄 글이 적혀있었지만, 그 아래 글자는 콘크리트로 무참히 발라 버려 알아 볼 길이 없었다. 다시 바위를 돌아 안쪽을 보니, 조선 말기의 문인 연재(淵齋) 송병선(宋秉璿, 1836-1905)이 이곳에 와서 친필로 쓴 ‘삼공불환차강산(三公不換此江山)’ 즉 ‘삼공의 벼슬과도 이 강산을 바꾸지는 않으리’라 쓴 7자가 새겨져 있다. 얼마나 장한 강산이면 정승 벼슬과도 이 강산을 바꾸지 않겠다 했을까?
 
사진을 보면 강 쪽의 바위 경사면에도 글씨가 새겨진 것이 보인다. 말하자면 이 바위는 옛 시인 묵객들의 묵적(墨跡)으로 둘러쳐진 문화재다. 그런데 이런 것에 대한 기록은 아무데도 없다. 강산은 예나 지금이나 그림 같은데 그때의 아름다운 사연들은 죄 잊혀져, 콘크리크 속에 파묻히거나 무심한 발길에 잊혀져 있다. 나그네는 그것이 못내 아쉬웠다.
이런 맛을 아는가?

 


그저 앉아만 있어도 땀이 줄줄 흐른다. 아스팔트는 고약처럼 끈적인다. 그래도 실내에는 에어컨이 있고 선풍기가 있다. 예전 더위는 어땠을까? 이덕무(李德懋, 1741-1793)는 〈괴로운 더위[苦熱行]〉라는 시에서 이렇게 노래했다.

자리 깔고 앉았다가 때로 안석 기대니
맨 다리로 층층 얼음 밟고 싶은 생각 뿐.
하물며 집안에는 파리 모기 들끓어
가슴 속 답답하여 근심만 가득쿠나.
或坐緗簟時几凭  赤脚惟思踏層氷
況復堂宇鬧蚊蠅  中心鬱鬱愁如繩

부채 하나 달랑 들고 물것들에게 실컷 물려가며 속수무책으로 견딜 수밖에 없었던 선인들의 여름나기의 광경이 눈에 선하다. 여기에 견주면 요즘 더위는 더위랄 것도 없다.
성호 이익(李瀷, 1681-1763)도 무더위를 견디다 못해 〈고열(苦熱)〉 두 수를 남겼다.

전에 없던 더위라고 해마다 말하는데
막상 닥쳐 생각하면 그렇겠다 여겨지네.
사람 생각 지난 일을 잘 잊기 때문이지
하늘마음 한결같아 치우침이 없다네. 
年年人道熱無前  卽事斟量也似然
自是凡情忘過去  天心均一豈容偏

해마다 무더위가 찾아오면 사람들은 전에 못 보던 폭염이라고 입을 모은다. 하지만 사람들이 지난 일을 잘 잊기 때문일 뿐, 하늘이 올 여름만 유난히 더 뜨겁게 할 리가 있겠느냐는 말씀이다. 투덜대기 보다 그러려니 하고 으긋이 견디겠다는 각오다. 다시 둘째 수.

온몸에 하루 종일 땀이 줄줄 흐르니
힘겨운 부채질을 잠시도 못 쉬누나.
밭일 하는 사람들 괴로울 것 생각하곤
초가집 좁지만은 근심을 접어두네.
渾身竟日汗漿流  揮扇功高不暫休
想到夏畦人正病  茅廬雖窄亦寬愁

전신에 흐르는 땀을 주체 못해 팔이 빠져라 부채질을 한다. 죽을 맛이다. 그러다 이 땡볕에 밭에 나가 들일을 하고 있을 농부들 생각하니, 미안해서 차마 괴롭단 말을 할 수 없더라고 했다. 좁긴 해도 땡볕에서 일하는 괴로움에야 견주겠는가?
이런 더위에는 그저 시원한 나무 그늘을 찾아 들어가 독서삼매에 빠져 들거나, 그도 시들하면 곤한 낮잠을 청하는 외에 달리 방법이 없다. 길재(吉再, 1353-1419)의 〈술지(述志)〉에서 보는 태고풍의 청복(淸福)을 누려보는 것도 나쁠 것이 없겠다.

시냇가 띳집에 한가롭게 홀로 살아
밝은 달 맑은 바람 흥취가 넉넉하다.
바깥손님 오지 않고 산새만 지저귀니
대숲으로 상을 옮겨 누워 책을 읽는다.
臨溪茅屋獨閒居  月白風淸興有餘
外客不來山鳥語  移床竹塢臥看書

달은 희고 바람은 맑아 내 몸에 찌꺼기가 가라앉을 날이 없다. 바깥소식 들고 오는 손님도 없다. 산새도 날 상관 않고 멋대로 논다. 무더운 한낮엔 대숲으로 평상을 옮겨놓고 팔꿈치 베고 누워 한가롭게 책장을 뒤적인다.
이럴 땐 어떤 글을 읽어야 좋을까? 옛글 하나를 뽑아 읽는다. 명종 때 임형수(林亨秀, 1504-1547)가 술에 취해 이황(李滉, 1501-1570)에게, “자네가 사나이의 장쾌한 취미를 아는가? 나는 아네.”라고 했다. 이황이 웃으며 대답했다. “말해보시게.” 임형수가 대답했다.
“산에 눈이 하얗게 쌓일 때, 검은 돈피 갖옷을 입고 흰 깃이 달린 기다란 화살을 허리에 차고, 팔뚝에는 백 근 짜리 센 활을 걸고, 철총마를 타고 채찍을 휘두르며 골짜기로 들어서면, 긴 바람이 일어나 초목이 진동하는데, 느닷없이 큰 멧돼지가 놀라서 길을 헤매고 있을 때, 활을 힘껏 잡아당겨 쏘아 죽이고, 말에서 내려 칼을 빼서 이놈을 잡고, 고목을 베어 불을 놓고 기다란 꼬챙이에다 그 고기를 꿰어서 구우면, 기름과 피가 지글지글 끓으면서 뚝뚝 떨어지는데, 걸상에 걸터앉아 저며 먹으며, 큰 은대접에 술을 가득히 부어 마시고, 얼큰히 취할 때에 하늘을 올려다보면 골짜기의 구름이 눈이 되어 취한 얼굴 위를 비단처럼 펄펄 스친다. 이런 맛을 자네가 아는가?”
더위에 찌든 가슴을 후련하게 적셔주는 통쾌한 글이다. 생각만 해도 시원하다. 찌는 듯 하던 더위는 어느새 간 곳이 없다. 유정한 여름날 긴 하루가 저만치 둥둥 떠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