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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시(禪詩), 깨달음의 표정

천하한량 2007. 5. 3. 23:52
 선시(禪詩), 깨달음의 표정


 

1

언어란 본래 부질없는 도구다. 말로 무언가를 설명하고 남을 이해시키려는 노력은 번번이 수포로 돌아간다. 툭하면 오해를 낳고, 곁길로 샌다. 옛 시인이 “말로써 말이 많으니 말 말을까 하노라”고 노래한 것은 진실로 까닭이 있다. 
언불진의(言不盡意), 말은 뜻을 다 전달할 수 없다. 이 생각은 옛 사람들을 늘 절망케 했다. 말로는 어찌해 볼 수 없는 뜻, 말의 범위를 넘어서는 의미는 어떻게 전달되는가? 오묘한 깨달음의 세계는 늘 언어를 저만치 벗어나 있다. 수레 깎던 윤편은 제 자식에게조차 그 기술을 설명할 수 없었다.
이에 대한 《주역》의 대답은 ‘입상진의(立象盡意)’다. 말로 하려들지 말고, 이미지를 둘러리로 세워서 설명하면 그 뜻을 온전히 전달할 수 있다는 말이다. 말은 말을 낳고, 불필요한 오해를 낳는다. 하지만 사물들은 그렇지가 않다. 그저 사물을 시켜서 보여주기만 해도 된다. 그렇게 하면 못 알아들을 말이 하나도 없게 된다. 애시당초 말귀를 못 알아듣는 사람은 아무리 친절하게 일러줘도 소용이 없다. 알아들을 사람은 명료하게 찔러주는 이 이미지의 길을 따라 단도직입(單刀直入)으로 깨닫는다. 이른바 직절근원(直截根源)이다. 
수도(修道)의 길에서 문득 만난 한소식을 언어로 옮겨 놓기란 불가능에 가깝다. 삶의 자리마다 홀연 다가서는 깨달음을 말로 설명하기도 난감하다. 하지만 그 황홀한 찰나의 소식을, 격정적으로 튀어나오는 환희의 법열을 혼자만 알고 있기는 더 벅차다. 그래서 선시(禪詩)가 나오고 오도송(悟道頌)이 나왔다. 무언가 말로 표현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어 나온 말씀이다. 그러니 처음부터 시시콜콜한 설명이나 조분조분한 길 안내의 겨를은 없다.
언어도단(言語道斷), 말의 길이 끊어지고, 생각도 끊어지고, 나도 없고 남도 없고, 세계도 없고, 없는 것도 없는 끝의 자리에서 나온 언어가 깨달음의 언어다. 천사만려(千思萬慮)가 마음을 떠나자, 허령불매(虛靈不眛)의 여여(如如)한 본성이 드러난다. 이언절려(離言絶慮), 말을 떠나고 생각이 끊긴 자리에 새로운 세계가 펼쳐진다. 이때 터져 나오는 언어는 말하고 싶어서 하는 말이 아니라, 말하지 않을 수 없어서 하는 말이다.
조선 후기의 문인 이옥(李鈺, 1760-1815)은 〈이언(俚諺)〉이란 글에서 이렇게 말한다.

내 작품은 내가 지은 것이 아니다. 주인이 있어 시킨 것이다. 이를 지은 자가 어찌 감히 지었겠는가? 이를 지은 자에게 이를 짓게끔 만든 사람이 지은 것이다. 그 사람은 누구인가? 천지만물이다. 천지만물은 작가에게 있어, 꿈에 의탁하여 현상으로 드러났다가 다른 형상으로 변화하여 정을 통하는 것에 불과하다. 그래서 천지만물이 사람의 힘을 빌어 시를 지으려 할 때는 귓구멍과 눈구멍으로 쏙 들어와 단전 위를 배회하다가, 입과 손을 통해 술술 나오는 것이니, 본래 시인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이는 마치 석가모니가 어쩌다 공작의 입을 통해 배 속으로 들어갔다가 금세 공작의 뒷 꽁무니를 통해 다시 나온 것과 마찬가지다. 나는 이것을 석가모니의 석가모니라 해야 할지, 공작의 석가모니라 해야 할 지 잘 모르겠다. 이런 까닭에 시인은 천지만물의 통역관이라 하고, 또 천지만물을 그려내는 화가라고 하는 것이다.     

시를 쓴 것은 시인이지만, 그가 한 일이라곤 천지만물의 이야기를 대신 통역해준 구실 뿐이다. 그는 입 없는 천지만물을 대신해 그 말을 전달하고, 눈으로 보여주는 자다. 똥을 눈 것은 공작이지만, 그 똥은 공작새의 똥이 아니라 석가모니의 똥이라는 말이다. 
선사(禪師)들이 벽력같은 깨달음의 순간에 설명의 언어를 버리고 입상진의의 시를 선택하는 것은 어찌 보면 불가피하다. 언어의 길, 생각의 길은 백척간두의 절벽 앞에서 이미 끊어졌다. 생각이 끊기고 보니 내가 없다. 이때 잠시 천지만물이 내 텅 빈 단전 사이로 스며들어 맴돌다가, 내 손을 빌리고 내 입을 빌려 언어의 외양으로 형상화 된 것이 선시(禪詩)다.
불법의 대의를 묻는 제자에게 30방의 몽둥이 찜질을 날리던 덕산(德山)이나, 간이 콩알 만해 지도록 할(喝)을 내지르던 임제(臨濟)도 속으로는 무척 답답했을 것이다. 무언가 설명해주고 싶은데 언어의 길은 막혔고, 속 시원히 뚫어주고 싶은데 문종이만 계속 들이박고 있으니, 어쩔 수 없어 뚱딴지같은 선문답(禪問答) 놀이를 했다. 불립문자(不立文字), 교외별전(敎外別傳)은 하도 안타까워 나온 소리지, 이안에 무슨 심오한 뜻이 담긴 것이 아니다. 말로 일러주면 언전(言筌) 즉 언어의 그물에 걸려들고, 이치로 설명하면 이로(理路)에서 길 잃고 헤맨다. 그러니 언어로 설명하기를 포기하겠다는 것이 불립문자요, 알아들을 놈만 알아들으래서 교외별전(敎外別傳)이다. 하기야 시론 책 읽고 시인 되는 법도 있던가?


2

시가 선과 만나 선시(禪詩)가 된다. 시가 선의 경지에 이르면 시선(詩禪)이다. 시와 선은 어떤 공통점이 있기에 자주 한 자리에서 거론되는가?
송나라 때 엄우(嚴羽)가 《창랑시화(滄浪詩話)》에서 “선도(禪道)는 오직 묘오(妙悟)에 달려 있고, 시도(詩道) 또한 묘오에 달려 있다”고 하여, 시와 선을 나란히 보는 견해를 밝혔다. 그는 시와 선의 공통점을 ‘묘오(妙悟)’로 들었다. 묘오란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깨달음이다. 시를 잘 쓰는데 필요한 것은 이론에 대한 해박한 지식이 아니라 떨리듯 다가오는 묘오라는 것이다. 그는 다시 이렇게 말한다.

무릇 시에는 별도의 재주가 있다. 책을 얼마만큼 읽었는지는 상관이 없다. 시에는 별도의 지취(旨趣)가 있다. 이치로 따져서 되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책을 많이 읽고 이치를 많이 궁구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지극한 경지에는 도달할 수 없다. 이른바 이치의 길에 빠지지 않고, 언어의 그물에 걸려들지 않는 것이 윗길이 된다. 시라는 것은 성정을 노래하는 것이다. 성당(盛唐)의 여러 시인들은 오직 흥취(興趣)에 주안을 두어, 영양이 뿔을 거는 것과 같아 자취를 찾을 수 없다. 그런 까닭에 묘한 곳은 투철하고 영롱하여 뭐라 꼬집어 말할 수가 없다. 마치 허공의 소리와 형상 속의 빛깔, 물 속에 비친 달, 거울 속의 형상과 같아서, 말은 다함이 있어도 뜻은 다함이 없다.

좋은 시는 사변적 지식이나 논리적 이치만 따져 되는 것이 아니다. 상승의 시인들은 시에서 흥취를 추구한다. 흥취는 영양괘각(羚羊掛角)과 같다고 했다. 뿔이 둥글게 굽은 영양은 잠 잘 때 외적의 해를 피하려고 점프를 해서 뿔을 나무에 걸고 매달려 잔다. 영양의 발자국만 보고 쫓아온 사냥꾼은 영양의 발자국이 끝난 곳에서 영양을 놓친다. 영양은 어디에 있는가? 발자국이 끝난 지점에 있다. 허공에 걸려 있다. 한편의 시가 독자에게 의미를 전달하는 것도 이와 같다. 시인의 말이 끝난 지점에 의미는 걸려 있다.
옛 선사들의 선문답도 이와 다를 게 없다. 큰 깨달음은 자취가 없다. 허공의 소리는 내 귀에 또렷히 들리지만, 보이지는 않는다. 물 위에 뜬 달은 분명히 있지만 실체는 아니다. 그렇다고  달이 없다고 할 수도 없다. 분명히 있으면서 없고, 보이지 않으면서 보인다. 이것이 엄우가 말하는 흥취요 묘오다.  
이후 중국 비평론에서 시와 선을 나란히 놓고 설명하는 논의가 쏟아져 나왔다. 원호문(元好問)은 이렇게 말했다.

시는 선객(禪客)에게 비단 위 꽃이 되고               
선(禪)은 시가(詩家)의 옥 자르는 칼이라네.            

詩爲禪客添錦花  禪是詩家切玉刀

선객은 참선 중에 깨달은 미묘한 소식을 시의 형식을 빌어 쓴다. 금상첨화(錦上添花)다. 시인은 선의 사고방식을 배워 자신의 생각을 이미지로 전달한다. 절옥도(切玉刀)가 따로 없다. 명나라 보하(普荷)는 〈시선편(詩禪篇)〉에서 또 이렇게 설명했다.

선이면서 선 없어야 그제서 시가 되고
시 속에 시 없을 때 선이 또한 엄연하다.

禪而無禪便是詩  詩而無詩禪儼然

참 알쏭달쏭한 말이다. 선과 시는 애초에 길이 다르다. 선이 시가 아니고, 시도 선은 아니다. 하지만 그 속에 닮은 점이 있다. 표현하는 세계나 도달하는 궁극은 달라도, 방법은 흡사하다. 선이면서 선이 없어야 시라는 말은, 선의 방법을 빌어오되 선에 함몰되지 말라는 말이다. 시이되 시를 벗어나야 선이란 말은, 어쩔 수 없이 시를 빌어 선을 말하지만, 시가 곧 선일 수는 없음을 명백히 깨달으라는 주문이다.
이 둘은 왜 넘나드는가? 시와 선을 하나로 보는 시선일여(詩禪一如)의 사고는 선학(禪學)이 일어난 송나라 이후에 활발해지지만, 일찍이 당나라 두보도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시 지을 때 용사(用事)는 선가(禪家)의 말과 같아야 한다. 물 속에 소금이 녹은 것은  물을 마셔보아야 짠 맛을 안다.

《서청시화(西淸詩話)》에 나온다. 물 속에 녹은 소금은 눈에는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마셔 보면 금방 알 수 있다. 눈에는 안 보이지만 분명히 있다. 꼭 꼬집어 말하지는 않았어도 너무도 또렷하다. 시와 선은 이 지점에서 만난다. 
당나라 때 시승 제기(齊己)도 〈정곡에게[寄鄭谷郞中]〉란 작품에서 이렇게 노래했다. 

시심(詩心)을 무엇으로 전할 수 있나                  
증명함이 절로 선과 같구나.                  

詩心何以傳  所證自同禪

시인이 제 마음에 뭉게뭉게 일어난 생각을 언어로 전달하는 과정은 선사가 참선 중의 깨달음을 선문답으로 전달하는 과정과 아주 흡사하다.
당나라 천주숭혜선사(天柱崇慧禪師)는 《경덕전등록(景德傳燈錄)》에서 시구를 가지고 선문답을 진행해 보인다. 문답은 이렇다.

“천주(天柱)의 가풍은 어떠합니까?”

흰 구름 때로 일어 와서 문을 닫으니,
풍월(風月)도 다시 없고 사방 산만 흘러가네.

時有白雲來閉戶  更無風月四山流

“제가 죽은 뒤에는 어떤 거처로 향해 갑니까?”

잠긴 뫼 높은 봉은 노상 푸름 쌓여있고
강에 퍼진 밝은 달은 그 빛깔 휘황하다.

潛岳峯高長積翠  舒江明月色光輝

“도란 과연 무엇입니까?”

흰 구름 푸른 뫼를 덮어 감싸고
벌과 새 뜨락 꽃을 돌아다닌다. 

白雲覆靑嶂  蜂鳥步庭華

요령부득의 동문서답이다. 깨달음의 모습을 묻는데, 푸른 산을 덮은 흰 구름과 꽃을 찾아다니는 벌과 새를 말한다. 죽은 뒤에 어찌 되느냐고 묻자, 산은 푸르고 달빛은 밝다고 대답한다. 가풍을 묻는 말에는 흰 구름이 와서 문을 닫으면, 바람도 달도 없이 사방 산만 흘러간다고 한다. 알 듯 말 듯 묘한 말씀이다.
선의 어떤 경지를 설명하기 위해 시를 끌어들이는 방식은 이후로 여러 문헌에 자주 등장했다. 고려 때 선승 경한(景閑)도 그의 어록에서 시와 선이 만나는 지점을 이렇게 설명했다.

만약 어떤 중이 내게 달마가 서쪽에서 온 까닭은 무엇이냐고 물으면 나는 “아득히 강남 땅 2,3월을 생각하니, 자고새 우는 곳에 온갖 꽃 향기롭네. 遙憶江南三二月, 鷓鴣啼處百花香”라고 대답하겠다. 또 어떤 중이 내게 조사(祖師)께서 동쪽으로 온 뜻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나는 “더딘 해에 강과 산은 곱기도 한데, 봄바람에 꽃과 풀은 향기롭구나. 遲日江山麗, 春風花草香”라고 대답하거나, “산꽃이 활짝 피니 비단 같은데, 시냇물은 쪽빛도곤 더욱 푸르다. 山花開似錦, 澗水碧於藍”라고 하겠다. 이같은 싯귀들은 모두 조사선(祖師禪)으로 빛깔과 소리와 언어를 갖춘 것이다.

달마가 서쪽에서 온 뜻을 묻는데, 꽃이 피고 새가 운다고 대답한다. 시냇물은 푸르고 꽃과 풀은 향기롭다고 딴청 한다. 따져서 알려들지 말라. 그냥 그대로 숨쉬듯 느껴라. 무슨 말이냐고 묻지 말라. 몽둥이와 할이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그래서 송나라 때 이지의(李之儀)는 〈이거언에게 주는 편지[與李去言]〉에서 “선(禪)을 말하는 것과 시를 짓는 것은 아무런 차별이 없다. 說禪作詩, 本無差別”고까지 말했다. 북송의 시인 오가(吳可)는 이런 관점에서 시를 배우는 방법을 참선에 견준 〈시를 배우는 법[學詩詩]〉이란 제목의 시 세 수를 남겼다.

시 배움은 마치도 참선 배움 같거니                       
대 걸상 부들자리 햇수를 따지잖네.                 
스스로 온전히 깨침 얻기 기다려                          
멋대로 읊조려도 문득 우뚝 하리라.                      

學詩渾似學參禪  竹榻蒲團不計年
直待自家都了得  等閑拈出便超然

요컨대 학시(學詩)와 학선(學禪)은 한 가지 원리라는 것이다. 누가 오래 시를 썼고, 누가 더 도를 닦았느냐 하는 것은 깨달음 앞에서는 아무 힘이 없다. 시쳇말로 짬밥수를 따지지 말라는 뜻이다. 중요한 것은 자가(自家)의 요득(了得), 즉 한 소식을 깨쳤느냐 깨치지 못했느냐에 달렸다. 깨닫고 나면 그 다음부터는 거칠 것이 없다. 그냥 되는 대로 읊조려도 절창 아닌 것이 없고, 눈앞에 보이는 모든 것이 부처님의 설법 아닌 것이 없다. 
둘째 수는 이렇다.

시 배움은 마치도 참선 배움 같거니
머리 위에 머리 얹음 전할 것 족히 없네.
두보의 굴레 밖을 뛰쳐서 나와야만
대장부의 뜻과 기운 하늘에 솟구치리.

學詩渾似學參禪  頭上安頭不足傳
跳出少陵窠臼外  丈夫志氣本冲天

2구의 ‘두상안두(頭上安頭)’는 옥상가옥(屋上加屋)과 같은 말이다. 남의 집 위에 집 짓지 말고, 있는 머리 위에 머리 얹지 말라.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조사를 만나면 조사를 죽여라. 두보의 시가 제 아무리 훌륭해도, 두보의 꽁무니만 따라가다 보면 죽도록 시를 써도 두보 비슷한 시만 있지 내 시는 없다. 권위에 기대지 말고 장부의 충천하는 지기(志氣)를 떨쳐라. 백 날 천 날 화두를 들고 앉아 있는다 해서 선기(禪機)가 절로 열리는 법은 없다.
다시 이어지는 셋째 수.

시 배움은 마치도 참선 배움 같거니
자재롭고 원성(圓成)함 몇 연이나 있었던고?
사령운(謝靈運)의 지당춘초(池塘春草) 한 구절이 나오자
천지가 놀라 떨며 지금껏 전하누나.

學詩渾似學參禪  自在圓成有幾聯
春草池塘一句子  驚天動地至今傳

수많은 학구(學究)들이 참선으로 득도의 길을 찾아 나서지만, 활연대오(豁然大悟)의 소식을 통통쾌쾌(痛痛快快)하게 깨치는 자는 몇 되지 않는다. 대부분 깨친 척 하는 가짜들과 깨달음 근처에도 가 보지 못한 엉터리들이 뜻 모를 공안(公案) 몇 개 들고 앉아 대중을 우롱하고 있을 뿐이다.
진짜 앞에 서면 가짜는 오금도 펴지 못한다. 깨달음이란 무엇인가? 자재원성(自在圓成)이다. 저 하고 싶은 대로 해도 행주좌와(行住坐臥) 어느 것 하나 걸림 없이 원만하다. 숨쉬고 밥 먹듯 자연스럽다. 이것이 선의 극치다. 시도 다를 것이 없다. 스스로를 괴롭혀 쥐어짜는 시, 안 알아준다고 닦달하는 시, 알맹이 없이 허세만 남은 시는 가짜다.
사령운은 〈연못 위 누각에 올라[登池上樓]〉란 시에서 “연못에 봄풀이 돋아나오고, 정원버들 우는 새 바뀌었구나. 池塘生春草, 園柳變鳴禽”란 천고의 명구를 남겼다. 봄이 되니 봄풀이 돋아나고, 버들개지에 물 오르니 꾀꼬리의 목청이 변한다. 마치 밥 먹으니 배 부르다는 말과 다를 바 없는 이 무덤덤한 구절을 두고, 역대로 칭찬이 마르지 않았다. 송나라 때 섭몽득(葉夢得)은 《석림시화(石林詩話)》에서 이 구절에 대해, “세상 사람들은 이 구절이 기막힌 줄을 대부분 잘 알지 못한다. 대개 기이한 것만 가지고 구하려 들기 때문이다. 이 구절의 교묘한 점은 바로 아무 의도 없이 느닷없이 경물과 서로 만나, 이를 빌어 글을 이루고, 갈고 다듬을 겨를조차 없었던 데 있다.  보통의 정으로는 능히 이를 수 있는 바가 아니다. 시가(詩家)의 묘처는 모름지기 이것을 가지고 근본으로 삼아야 한다. 괴롭게 끙끙대고 어려운 것만 말하는 자들은 대체로 깨닫지 못한 자들이다.”라고 했다.   
이렇게 오가(吳可)는 〈시를 배우는 법[學詩詩]〉 세 수에서, 참선의 비유를 들어 시학의 근본 원리를 설파했다. 그 핵심은 ‘자가료득(自家了得)’과 ‘도출과구(跳出窠臼)’, 그리고 ‘자재원성(自在圓成)에 있다. 즉 스스로 깨달아야 하고, 전범(典範)에 붙들리지 말며, 툭 터져 자재로워야 한다는 것이다. 선도 그렇고 시도 그렇다. 
그러자 이번에는 송나라 공성임(龔聖任)이 이 시에 화답하는 시를 지었다.

시 배움은 마치도 참선 배움 같거니
말이야 안배해도 뜻은 못 전한다네.
깨우치면 그 즉시 성률 따윈 내던져서
달군 돌로 하늘 구멍 막아서는 안 되지.

學詩渾似學參禪  語可安排意非傳
會意卽超聲律界  不須煉石補蒼天

말을 매만져 표현을 가다듬는 것이 시가 아니다. 포단(蒲團) 위에 앉아 독경 소리 가다듬는 것이 참선이 아닌 것과 같다. 마음에 문득 와 닿는 것이 있으면 거침없이 토해내야 한다. 성률(聲律)이니 계율(戒律)이니에 얽매이지 마라. 뜻이 없이는 성률도 없다. 깨달음이 없이는 시도 선도 없다. 하늘에 큰 구멍이 뻥 뚫렸다고 돌멩이 가져다가 막을 생각은 말아라. 교언영색(巧言令色)으로 구차미봉(苟且彌縫) 하느니 붓을 꺾고 종이를 찢어, 혀를 물고 죽는 것이 낫다. 시와 선은 이렇게 해서 한 자리에서 만난다. 
 
 
3

이제 선시에 대해 살펴보겠다. 선은 분별지를 마음에서 걷어내는 것이다. 명상(瞑想) 즉 생각을 잠재우고, 묵상(黙想) 곧 생각을 침묵시키는 것이다. 그때 남는 것은 마음뿐이다. 선은 마음을 텅 비워 본래의 나와 만나는 순간이다. 명상이란 뜻을 지닌 범어의 Dhyana를 선(禪)으로 옮겼다. 정려(靜慮) 또는 사유수(思惟修)로도 옮긴다. 다시 말해 선은 생각을 걷어내는 마음 공부다. ‘근심과 기쁨을 마음에서 걷어내는 것이 바로 선’(喜憂心忘便是禪)이다. 달마는 제자와의 문답에서 선을 이렇게 설명한다.

선(禪)은 어지러운 마음이 일어나지 않음을 말한다. 생각도 없고 움직임도 없는 것이 선정(禪定)이다. 마음을 단정히 하고 생각을 바로 하여, 생(生)도 없고 멸(滅)도 없으며 감도 없고 옴도 없이 고요히 움직이지 않는 것을 일러 선정이라 한다. 말을 비우고 생각을 깨끗이 하여 마음으로 깨달아 고요 속에 침잠하여, 갈 때나 머물 때나 앉았거나 누웠거나 언제나 고요하여 흐트러짐이 없는 까닭에 선정이라 한다.

선시는 이 순간의 느낌을 언어로 표현한다. 선의 경지는 사변의 길로는 다다를 수가 없다. 말을 떠나고 생각이 끊긴 곳에서 새로운 세상이 열린다. 그 세상을 어찌 말로 설명할 수 있을까? 그래도 인간은 언어를 떠나서는 살 수가 없으니, 이언절려(離言絶慮)를 말하고 불립문자를 말하면서도 언어에 기댈 수밖에 없다. 말의 길로는 다다를 수 없는 언어도단(言語道斷)의 세계를 말로 설명하려 드니, 선시에는 자다가 봉창 뜯는 소리가 자주 보인다. 유명한 회양선사(懷讓禪師)의 시처럼, 회주 땅의 소가 풀을 뜯는데, 정작 익주의 말이 배가 터진다. 그래서 의원을 찾아가 살려 달라 하니 천연덕스럽게 돼지 어깨에 뜸을 놓는 식이다. 말이 럭비공처럼 튀어 갈피를 잡을 수 없다. 깨달음의 소식은 언어로 설명하려 들면 이렇듯 헛김이 샌다.
조선시대 허백당(虛白堂)의 시 한 수를 읽어 보자.

불꽃 속에 찬 서리 엉기어 맺혀있고
무쇠 나무 꽃이 피어 환하게 비치누나.
진흙 소가 포효하며 바다 속을 달려가고
나무 말이 힝힝대자 길에 소리 가득해라. 

焰裏寒霜凝結滯  花開鐵樹暎輝明
泥牛哮吼海中走  木馬嘶風滿道聲

말도 되지 않는 말만 모아놓았다. 뜨거운 불꽃 속에 서리가 엉기는 이치나, 무쇠로 만든 나무에 산 꽃이 피는 이치가 있는가? 진흙 소가 어찌 포효하며, 바다 속은 어이 달리는가? 목마는 힝힝대며 거리를 메우고 달려간다.
내친 김에 한 수 더 읽어 보자. 근대의 선객 효봉선사(曉峯禪師)가 남긴 <오도송(悟道頌)〉이다.

바다 밑 제비 둥지 사슴이 알을 품고               
불 속의 거미집선 고기가 차 달이네.                   
이 집안 소식을 뉘 능히 알겠는가                        
흰 구름 서편으로 달은 동쪽 달려간다.                      

海底燕巢鹿胞卵  火中蛛室魚煎茶
此家消息誰能識  白雲西飛月東走

말이 한참 꼬였다. 날짐승인 제비가 바다 밑바닥에 둥지를 틀고, 둥지 안에는 엉뚱하게 사슴이 알을 품는다. 날름대는 불꽃 속에 거미가 집을 짓고, 그 속에선 물고기가 차를 달인다. 서편으로 흐를 달은 동쪽으로 달려간다. 이것이 이 집안 소식이다. 그것을 알겠는가?
시인이 이렇듯 말 같지 않은 소리만 골라서 늘어놓는 까닭은 단 하나다. 따지지 말라는 것이다. 머리로 따져 알려 들지 말고 가슴으로 느껴 직지인심(直指人心) 견성성불(見性成佛) 하라는 말이다. 굳이 말로 하자면 이렇게 밖에 설명할 수 없는 세계를 일러주고 있는 중이니 섣불리 사변의 잣대를 들이댈 생각일랑 아예 하지 말라는 우격다짐이다.
의미는 도처에서 단절되고, 따라 읽으려는 순간 벼랑 끝에 선 나를 본다. 선은 자기 자신과 맞대면해서 자신을 한칼에 베겠다는 것이다. 남을 다 속여도 자신을 속이지 못하면 아무 소용이 없다. 만 사람이 다 인정해도 내 스스로 수긍하지 못하면 도로(徒勞)에 그칠 뿐이다. 
이런 것은 현대시 속에도 있다. 이승훈의 〈너〉를 읽는다.

캄캄한 밤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너를 만났을 때도 캄캄했다 캄캄한 밤에 너를 만났고 캄캄한 밤 허공에 글을 쓰며 살았다 오늘도 캄캄한 대낮 마당에 글을 쓰며 산다 아마 돌들이 읽으리라

아무 것도 안 보이는 캄캄한 밤에 너를 만나, 아무 것도 안 보이는 허공에 글을 써왔다. 오늘은 캄캄한 대낮 마당에 글을 쓴다. 내 글은 돌들이 읽을 것이다. 역시 요령부득이다. 시인은 ‘그리고’라고 말해야 할 때 ‘그러나’를 말하고, ‘오늘은’ 하지 않고 ‘오늘도’라고 말한다. ‘캄캄한 밤 허공’은 아무렇지도 않게 ‘캄캄한 대낮 마당’으로 미끌어진다.
아무 것도 안 보이는 허공에 쓴 글은 쓰나마나 한 글이다.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캄캄한 밤에 만난 너는 만나나 마나한 존재다. 만나나 마나 한 존재를 위해 쓰나마나한 글을 쓰며 살았다. 무슨 말인가? 너는 누구인가? 왜 내가 쓴 글을 ‘너’가 읽지 않고 돌들이 읽는가? 이런 언어 앞에 의미화의 노력은 대부분 수포로 돌아간다. 하지만 그 너머에 무언가 있다. 그것이 무엇인가?
다음은 이성선의 〈뿔을 물어뜯다〉이다.

진흙 묻은 소가
빗줄기 몇 가닥에 목을 씻고 지나간다

번개 짐승이
달려들어 소의 뿔을 물어뜯는다

깜깜한 지상
연꽃 피는 소리 들린다

진흙 묻은 소가 빗속을 지나가자 짐승 같은 번개가 소뿔을 물어뜯고, 그 서슬에 깜깜한 지상에선 연꽃이 핀다. 참 희한한 말이다. 동사만 연결해서, 지나가는데 물어뜯더니 소리 들린다로 읽으면, 각각의 이미지들이 얼마나 뚱딴지같이 결합되어 있는지 알 수 있다. 시인이 세상이 이렇듯 보이지 않는 유기체적 질서 속에 배열되어 있음을 말하고 싶었던 것 같지는 않다. 하지만 깜깜한 세상에 등불을 밝히는 연꽃이 피어나는 그 소리만큼은 번개가 소뿔을 물어뜯듯이 장엄하기 그지없다. 이런 것이 선시다.
그렇다고 선시가 늘 이렇게 반상합도(反常合道)의 넌센스만을 말한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큰 오산이다. 실제로 위와 같은 말 안되는 내용을 담은 시만을 선시로 이해하는 오해가 널리 퍼져 있다. 그래서 종종 초현실주의 시에 선시를 견주기도 하는데, 둘 사이에 존재하는 공통점은 언어의 일상 궤도를 이탈했다는 점뿐이다. 진짜 선시는 말장난에 머물지 않는다. 때로 선시가 말장난의 외양을 취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방편일 뿐이다. 
깨달음의 길로 인도하는 선시를 몇 수 보자. 김시습(金時習)의 〈증준상인(贈峻上人)〉20수 연작 중 제 8이다. 

종일 짚신 신고 발길 따라 가노라니                    
한 산을 가고 나면 또 한 산이 푸르도다.               
마음에 생각 없으니 어찌 형상 부리며           
도는 본시 무명(無名)한데 어찌 거짓 이룰까.                 
간 밤 이슬 마르잖아 산새는 지저귀고              
봄 바람 그치잖아 들꽃은 피었구나.            
지팡이로 돌아갈 때 천봉이 고요터니                
푸른 절벽 짙은 안개 저녁 햇살 비쳐드네.             

終日芒鞋信脚行  一山行盡一山靑
心非有想奚形役  道本無名豈假成
宿露未晞山鳥語  春風不盡野花明
短笻歸去千峯靜  翠壁亂烟生晩晴

“저 들판 끝난 곳이 그 바로 청산인데, 행인은 다시금 청산 밖에 있구나. 平蕪盡處是靑山, 行人更在靑山外”의 탄식을 떠올리게 하는 구절로 시상을 열었다. 멀리 뵈는 청산을 목표 삼아 부지런히 걸었다. 발바닥이 부르트고 물집이 잡혀도 쉬지 않고 걸었다. 그리하여 막상 그 청산에 이르고 보니, 다시 저 멀리 지평선 끝에 또 다른 청산이 나를 기다리고 있다. 허망하기 그지 없다.
인간 도처에 유청산(有靑山)인데, 청산의 끝은 찾아 무엇하겠는가? 3,4구에서 시인은 슬며시 속내를 드러낸다. 마음에 둔 집착 때문에 나는 내 몸을 괴롭혔다. 그 집착은 무엇이었던가? 도를 이루고 말겠다는, 성불하고 말겠다는 욕심이었다. 도는 원래 무어라 이름 지을 수 없는 것이니, 이루고 말고 할 수 있는 물건이 아니다. 그러니 내가 저 청산의 끝에 설 때 내 마음 속에 품었던 도도 이루어지리라 믿은 내 집착은 헛된 미망(迷妄)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끝은 본래부터 있지 않았다.
그리고 다시 바라본 세상이 5,6구다. 저 허공을 나는 새를 보아라. 누가 아침이 온 것을 일러주지 않아도 먼동이 트기 전에 먼저 깨어 새벽을 노래한다. 들판에 피는 꽃은 어떠한가? 봄바람이 끝나기도 전에 제가 먼저 알아 꽃망울을 터뜨린다. 자연의 이법은 모두 이와 같은데, 인간은 반대로 하고, 억지로 한다. 그래서 발만 부르트고 몸만 괴롭다.
이제 그는 다시 본래 왔던 곳으로 돌아온다. 시인은 산이 고요하다 했지만, 고요한 것은 사실 시인의 내면이다. 푸른 절벽은 예전 이 길을 거쳐 올 때 절망처럼 내 길을 막았었다. 짙은 안개는 한치 앞을 내다 볼 수 없게 방향을 잃고 헤매게 했었다. 하지만 이제 욕심을 내려놓고 돌아가는 길, 늦은 햇살이 비쳐들며 나를 괴롭히던 망집(妄執)의 실체를 극명하게 비쳐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일종의 오도시(悟道詩)다.
다시 한 수 더 읽어 보기로 하자. 같은 제목의 시 제 10이다.

공(空)과 색(色) 살펴보면 색이 곧 공이거니
다시금 한 물건도 서로 용납함이 없네.
소나무 별 뜻 없이 집 앞에 푸르르고
꽃은 절로 무심하게 해를 향해 붉게 폈다.
다름을 같다 하고 같음을 다르다 하니 같고 다름 같지 않고
같음을 다르다 하고 다름을 같다 하니 다르고 같음이 같도다.
같고 다른 진짜 소식 찾고자 한다면은
높고 높은 최정상서 살피어 보시게나.

空色觀來色卽空  更無一物可相容
松非有意當軒翠  花自無心向日紅
同異異同同異異  異同同異異同同
欲尋同異眞消息  看取高高最上峯

공즉시색(空卽是色), 색즉시공(色卽是空)이라 했다. 사람들은 허실(虛實)을 따지고 득실(得失)을 헤아리느라 바쁘지만, 그 사이에는 조금의 틈도 없다. 무엇이 색이고 무엇이 또 공인가? 집 앞에 서서 사시장철 푸름을 뽐내는 소나무는 색인가? 잠시 피었다 금세 스러질 저 꽃은 공인가? 소나무와 꽃은 같으면서 다르고, 다르지만 같다. 이것은 나무요 저것은 꽃이니 다르다면 다르고, 이것은 오래 가고 저것은 잠깐 뿐이니 다르다면 다르다. 하지만 종당에는 다 시들고 베어지니 막상 다를 것도 없다.
5,6구는 공(空)과 색(色)의 자리에 동(同)과 이(異)를 넣어 장광설의 말장난을 늘어놓았다. 시비는 어디서 생기는가? 다른 것을 굳이 같다고 하고, 같은 것을 다르다 하는데서 생긴다. 같을 것도 다를 것도 없는데, 분별하여 편 가르니 세상이 시끄럽다. 자연은 뜻 없이 무심한데, 유의(有意)한 인간들이 공연히 해석하느라 바쁘다. 같고 다름의 분별에 대해 알고 싶은가? 가장 높은 꼭대기로 가서 보라. 세상 만물이 한 눈에 들어오는 지점, 같고 다름이 대번에 판가름 나는 장소로 찾아가라.
이렇듯 선시의 세계는 칼끝 같은 깨달음을 노래한다. 언어가 무력화되고 의미가 힘을 잃는다. 다시 정진규의 〈모기 친구〉를 읽어 본다.

진종일 뛰어 놀고서도 씻지 않으려 하기에 얼굴엔 온통 암괭이를 그리고서도 말을 듣지 않기에 지난 밤 모기에 물린 자리가 발갛게 부어 올랐기에 모기는 깨끗한 것보다는 더러운 걸 더 맛있어 한다고 겁을 주었더니, 그럼 모기에겐 깨끗한 것이 더러운 거고 더러운 것이 깨끗한 거네, 모기가 목욕을 해주었잖아! 더러운 걸 먹어버렸잖아! 난 모기 친구가 될 거야 그러곤 여섯 살짜리 내 상욱이는 깔깔깔 달아나버렸다.

깨끗하고 더럽다는 말의 의미가 한 순간에 증발해버리는 상쾌함이 있다. 내게 깨끗한 것이 남에겐 더럽고, 내가 더러워 못 견딜 것도 남에겐 아무렇지 않을 수 있다. 이렇게 생각을 한번 바꾸면 모든 것이 시원스럽게 된다. 깔깔깔 웃게 된다.
그러고 보면 선시는 선승(禪僧)들의 전유물이란 생각은 큰 잘못이다. 선시는 하나의 사고방식일 뿐이다. 불교가 있기 전에도 선시는 있었고, 불교를 믿지 않아도 선시를 쓸 수 있다. 도연명(陶淵明)의 〈음주(飮酒)〉 제 5를 읽어 본다.

사람 사는 마을에 집을 엮어도
수레와 말 떠들썩함 찾을 길 없네.
묻노라 그대 어이 그럴 수 있나
마음 멀면 땅은 절로 구석져지리.
울타리 아래에서 국화를 캐다
유연히 남산을 바라보노라.
산 기운 저물녘 더욱더 곱고
나는 새 짝지어 돌아가누나.
이 가운데 참다운 뜻이 있으나
따지려다 어느새 말을 잊었네.

結廬在人境  而無車馬喧
問君何能爾  心遠地自偏
採菊東籬下  悠然見南山
山氣日夕佳  飛鳥相與還
此中有眞意  欲辨已忘言

깊은 산속 인적 없는 곳이 아니라, 사람들 부대끼며 사는 마을에 집을 지었다. 고관대작들의 수레소리 말소리의 시끄러움은 찾을 수가 없다. 누가 묻는다. 사람 사는 세상에 살면서 어찌 세상일에 그리 초연할 수 있느냐고. 나는 대답한다. 마음을 멀리 하면 시정(市井) 속에 살아도 산림에 든 것이나 다를 바 없다고. 문제는 늘 마음에 있는데, 해법을 장소에서 찾으려 드니, 어딜 가나 지옥이요, 무얼 해도 감옥 속이 아니냐고.
동쪽 울타리 아래 심어둔 국화꽃을 캐다가 무심히 뒷짐 지고 남산을 바라본다. 석양빛을 받은 산 기운이 더욱 곱고, 저물녘의 잔영 속으로 새들은 둥지를 찾아 돌아간다. 걸릴 것이 없고 거칠 것이 없다. 순간 마음속에 아! 저거다 싶은 깨달음 하나가 불쑥 들어선다. 나는 따지려는 생각을 접고 말을 잊고 서 있다. 시인은 장자(莊子)가 말한 득의망언(得意忘言)의 경계를 맛본 것이다.
다음은 고려 때 최유청(崔惟淸)의 〈잡흥(雜興)〉이다.  

봄풀이 어느덧 저리 푸르러                             
동산 가득 나비가 날아다닌다.                        
봄바람 잠든 나를 속여 깨우려                        
침상 위 옷깃을 불어 흔드네.                         
깨고 보면 고요히 아무 일 없고                       
숲 밖엔 저녁 해만 비치고 있다.                      
난간에 기대어 탄식하려다                            
고요히 어느새 기심(機心) 잊었네. 

春草忽已綠  滿園蝴蝶飛
東風欺人垂  吹起床上衣
覺來寂無事  林外射落暉
依檻欲歎息  靜然已忘機                          

봄볕이 따스해 혼곤한 낮잠에 빠졌다. 자는데 누가 자꾸 일어나라고 옷깃을 흔들어 깨운다. 무슨 일인가 싶어 부스스 일어난다. 일은 무슨 일, 봄바람의 공연한 장난이다. 밖을 내다보니 그게 아니다. 숲밖에는 저물녘 햇살이 빗겨있고, 봄 동산엔 풀빛이 벌써 짙었다. 꽃 찾는 나비는 햇살을 등에 안고 훨훨 날아다닌다. 봄바람이 나를 골렸던가? 그렇지 않다. 저걸 좀 보라고, 저 아름다운 광경을 곁에 두고 어찌 잠만 쿨쿨 자느냐고 날 깨운 것이다. 아! 아름답다. 나도 몰래 감탄사가 내 입을 빠져 나오려는 순간, 갑자기 사위(四圍)가 고요해지며 내가 누군지, 왜 여기 있는지조차 잊어버리고 말았다는 것이다.
도연명이 ‘득의망언(得意忘言) 한 것을, 최유청은 ‘정연망기(靜然忘機)’했다. 고요히 서서 사물을 바라보다가, 내가 사물이 되고, 사물이 내가 되는, 나비가 장주가 되고, 장주가 나비가 되는 물아일체의 황홀경을 맛보았다. 이런 점에서 두 시가 보여주는 세계는 같다. 선시는 이렇듯 언어가 끊긴 자리의 흔적들을 보여준다.
유재영의 〈오월〉에서도 그런 흔적을 본다.

상추꽃 핀
아침

자벌레가
기어가는
지구 안쪽이
자꾸만
간지럽다

마당에 핀 상추꽃을 보는 5월의 아침은 싱그럽다. 자벌레 한 마리가 활처럼 제 몸을 굽혔다가 쭉 펴고, 굽혔다가 쭉 펴며 지구의 중심을 향해 나아간다. 시인은 자꾸만 간지럽다고 말하는데, 정작 간지러운 것은 지구의 안쪽인가? 아니면 시인 자신인가? 조그만 자벌레가 지구를 간지럽힌다. 이 놀라운 깨달음 앞에 세계는 한순간 어안이 벙벙해진다.
다시 이런 시는 어떤가? 고려 때 혜심(慧諶)의 〈대영(對影)〉이란 작품이다.

  연못 가 홀로 앉아
연못 속 중 만났지.
묵묵히 보며 웃네
대답 않을 줄을 알고.
池邊獨自坐  池底偶逢僧
黙黙笑相視  知君語不應

못가에 혼자 앉아 있는데, 못 속에서 웬 중 하나가 나를 물끄러미 보고 있다. 아무런 표정이 없다. 싱거워 내가 씩 웃자, 그도 따라 웃는다. 누구신가? 물으려다 입을 다문다. 내가 나를 모르는데, 그인들 그를 알겠는가? 두 사람은 그저 바라만 본다. 내가 그를 본다. 그도 나를 본다. 내가 나를 본다. 그가 그를 본다. 독자상시(獨自相視), 혼자 앉아 마주 본 이야기다. 물에 비친 자기 그림자를 보고 쓴 시다.
선이란 때로 이렇듯 무심한 자기 응시이기도 하다. 일체의 이런 저런 분별을 걷고, 하루에도 밑도 끝도 없이 떠오르는 생각들을 걷어내면 그 안에 텅빈 물건이 하나 남는다. 이것이 무엇인가? 선시는 그 텅빈 물건 하나를 앞에 두고 부지런히 닦기도 하고, 본래무일물(本來無一物)인데 닦을 먼지가 있기나 하겠느냐고 말하기도 한다.


4

이 글은 두 가지를 말했다. 시와 선이 만나는 지점을 살폈고, 선시의 세계를 조금 맛보았다. 이 두 가지는 조금 층위가 다른 이야기다. 하지만 선의 방식으로 말하자면 굳이 다를 것도 없다. 시의 생각과 선의 사고는 무던히도 닮았다. 시인과 선객은 자주 가깝게 왕래한다. 서로 말귀가 통하고 배짱이 맞기 때문이다. 선방에 가짜 선객이 많듯이 시단에 가짜 시인이 많은 것도 같다. 대충 비슷하게 흉내 내도 사람들이 잘 모르는 점에서도 둘은 비슷하다. 하지만 진짜 앞에서는 둘 다 꼼짝도 못한다. 숨도 쉴 수 없다.
시와 선이 하나로 만나 선시가 된다. 절묘한 결합인 셈이다. 선시의 언어는 직관의 언어다. 의미를 해체하고, 사물로 말한다. 풍경으로 보여주고 설명하려 들지 않는다. 직관의 언어는 무책임하다. 친절하기는커녕 때로는 소통 자체를 거부하기까지 한다. 
선시는 종종 오해되고 있다. 그저 말 안 되는 뚱딴지 소리만 선시로 말해서는 안 된다. 승려가 지은 시를 모두 선시라 할 수도 없다. 《벽암록》과 《전등록》이 선시를 읽는 전가(傳家)의 보도(寶刀)가 아니다. 구름을 잡는 소리를 해야만 선시라고 착각하지 말라. 선시도 일상성을 벗어나지 않는다. 우수마발(牛溲馬勃)이 다 선이다. 마삼근(麻三斤)이 부처이고, 야반 삼경의 문고리가 스승의 유체(遺體)다. 선시는 깨달음 없는 삶, 생존의 나날을 혐오한다.     
송나라 시덕조(施德操)는 《북창영과록(北窓炙顆錄)》에서 앞서 본 도연명의 〈음주〉시를 읽고 난 소감을 이렇게 말했다. “이때는 달마가 아직 중국에 오지도 않았는데, 도연명은 이미 선(禪)을 알고 있었다.” 이 말을 듣고 나는 너무도 통쾌해서 덩실 춤을 추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