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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정의 선시는 조선 시문학의 백미2

천하한량 2007. 3. 9. 03:04

청허휴정 서산대사

 

3. 휴정 선시의 특성

서규태는 《한국근세 선가문학》에서 휴정의 산문문학과 시문학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평하고 있다.

청허는 수필장르를 통해서 문학사상을 심화시키고 그것을 실제로 작품화했다. 산문문학인 수상록이나 시가문학인 가사 장르를 통해서 이론을 심화시키고 실제로 그 가치를 펼쳤다. 아울러 그의 시문학에서는 그러한 사상성과 문학성이 공존하면서도 풍부한 시정을 노래했다. 산문문학이 사상성이 강한 장르라면 그의 시문학은 문학성이 강한 편이다.10) 10) 서규태, 《한국근세 선가문학》,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 1994, p.201.

 

노산 이은상도 휴정시의 특색을 “그 시를 사상으로 보기에는 말이 너무 문학적이요, 또 그것을 단순한 서정으로 보기에는 뜻이 너무 깊다.”고 하였다. 휴정의 선시 특징은 다음과 같다.

 

1. )이다. 선시의 특성은 불립문자를 표방하기 때문에 함축과 상징을 통해 말을 아껴야 한다.
 

2. 시를 짓기 위해 고심하여 퇴고하거나 성률(聲律)을 맞추기 위해 일부러 노력하지 않은 즉흥적인 시가 많다.
 

3. 시 속에 슬픔과 한의 정서가 깃든 시를 읊었다.
 

4. 삼교합일적(三敎合一的)인 원융(圓融)사상이 담긴 시가 많다. 숭유척불의 국가이념을 타파하여, 유불의 화합과 공존을 소망하는 마음을 시로 담았다.
 

5. 장자풍(莊子風)의 시를 구사하였고 인생은 대몽(大夢)에 비유하고, 대봉(大鵬)의 경지에서 차별이 없는 평등과 초월적인 마음을 시로 읊었다.
 

6. 무릉도원의 이상향을 동경하였다. 도가의 신선사상이 시에 나타나 있다.
 

7. 주체적인 민족의식과 역사의식이 뚜렷이 나타나 있으며, 대장부·영웅·주인공 의식이 시 속에 나타나 있다.
 

8. 운수 자연을 노래한 시가 많고, 음악성과 회화성이 조화를 이루고 있어 시의 문학적 성취가 대단하다.
 

9. 그의 선가시는 선의 깊은 사유와 선종의 전용적인 공안, 화두나 고사를 용사(用事)하여 뜻이 난해하나 깊은 철리가 함축되어 있다.
 

10. 시어 선택에 있어 산수자연을 나타내는 시어와 색채와 소리를 나타내는 시어를 많이 사용하였고, 특히 첩어를 많이 사용하였다.
 

11. 시체(詩體)는 다체(多體)의 시를 구사했고, 시뿐만 아니라 선가문학에 있어 전기문학, 수필문학, 가사문학(회심곡을 지음), 서간문학 등 다양하다휴정의 시는 선시의 특성을 잘 살리면서도 당송의 시문학을 수용하여 차원 높은 선시를 창작하였다.〈여조학사유청학동(與趙學士遊靑鶴洞)〉의 시에서 유교의 시관과 자신의 선시관을 비교하여 밝히고 있다.

 

山僧雲水偈 산승은 운수게를 읊고
學士性情詩 학사는 성정시를 읊네.
同吟題落葉 함께 읊어 낙엽에 쓰노니

風散沒人知 바람에 흩어 아는 사람이 없네
.

― 《청허당집》 권1, 〈여조학사유청학동〉

 

운수게(雲水偈)는 청산백운 속에서 노니는 산승이 읊는 시로 주로 산수자연을 노래한 것이다. 《한산시집》에서 습득은 “내 시는 본래 이러한데, 사람들이 내 시를 게()라고 하나, 시나 게는 원래 같은 것이네(我詩世是詩 有人喚作偈).”라고 하여 자신의 시를 게라고 하였다. 한산시는 선시의 원형이라 할 수 있으니, 운수게는 운수자연 속에서 아무 걸림이 없이 자유롭게 살면서 시의 형식에 구애되지 않고 생각과 감흥이 우러나온 대로 읊는 선시라고 보아도 된다. 휴정은 자신의 시를 운수게라고 선언하였다. 출가자의 시, 선시란 뜻이겠고, 아직 시법에 부족한 ‘게’라고 하는 겸양이라고 볼 수 있다. 조학사의 시는 성정시라고 하였다. 조학사는 유도를 공부하는 선비이며 유교의 시를 성정시라고 하였다.

 

조선 초기까지는 고려 말기에 들어와 크게 퍼지기 시작한 성리학으로 말미암아 이치를 따지는 송시(宋詩)가 유행했고 북송 소식(蘇軾)의 시가 주로 읽혔다. 당시(唐詩)의 학두풍(學杜風)이 불면서 조선 중기에는 성정(性情)을 즐기는 시풍이 생겨나 시문학이 크게 발전하였다. 성리(性理)란 본래의 이기(理氣)를 곰곰이 챙겨 시문을 꾸미고, 성정은 느껴진 감응을 그대로 읊는 것이니, 주정적(主情的)이다. 이황(15011570)은 다른 성리학자들과는 달리 시가 성정의 바람을 구하는 데 긴요하다는 문학관을 지녀 시작에도 상당히 힘을 기울였다.11) 성정시는 타고난 심성과 정서를 읊는 시이다. 그러나 운수의 노래나 성정을 읊은 시는 본질에 있어서는 같다. 자신의 시적 욕구에 의해서 마음과 생각을 쓰는 점에 있어서 그렇다. 11) 민병수, 《한국 한시사》, 태학사, 1996, p.261.

 

함께 일심(一心)으로 시를 읊어 낙엽에 썼는데 바람이 불어서 흩어져 버렸기 때문에 그 뜻을 아는 사람이 없다. 전구(轉句)과 결구(結句)는 멋진 구이다. 말 밖에 뜻을 부치는 언외지미(言外之味)를 나타내고 있다. 휴정은 〈새서산노인구회(賽西山老人求懷)〉란 시에서 자신의 시론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通經兼達道 경전을 통하고 도를 알았으니
寫字又吟詩 글씨를 쓰고, 또 시를 읊네.
寫字調眞性 글씨를 쓰는 것은 참 성품을 고르게 하고

吟詩記所思 시를 읊은 것은 생각하는 바를 적는 것이네.

― 《청허당집》 권1, 〈새서산노인구회〉

 

휴정의 시론은 유교의 재도론(載道論)에서 탈피하여, 시를 읊는 이유를 ‘생각하는 바를 읊는다(吟詩記所思)’라고 밝히고 있다.《우서(虞書)》에 보면 “시는 뜻을 말하는 것이고, 노래는 말을 읊은 것이다(詩言志, 歌詠言).”라고 시와 노래를 구분하여 정의하고 있다. 그리고 《시서(詩序)》에는 또 “시라는 것은 뜻이 가는 바이다. 마음에 있어서는 뜻이 되고, 말로 나타내어 시가 된다(詩者, 志之所之也, 在心爲志, 發言爲詩).”고12) 했다. 12) 이병한, 《한시비평의 체례연구》, 통문관, 1974, p.9.

 

휴정은 글씨를 쓰고, 시를 읊는 것을 자성 진심을 밝히는 구도의 방편으로 생각했다. 휴정은 《선가귀감》 서문에서 “오늘날 불교를 배우는 이들이 외우는 것은 세속 선비들의 글이요, 청하여 지니는 것은 벼슬아치들의 시 뿐이다.”라고 한탄하였다. 휴정은 이러한 세태를 아쉬워하며, 선의 경지가 불입문자의 격외도리이지만 불리문자(不離文字)에 의지할 수밖에 없는 중생들을 위해 나름대로 심오한 도의 경계를 시로써 나타내려고 하였던 것이다.〈가도(賈島)〉란 시를 통해 그의 시작 태도를 알아보자.

 

黑白投身處 출가는 사문이 몸둘 곳이요
推敲着字時 퇴()와 고()를 분명히 할 때라.
一生功與業 일생의 공과 업이

可笑苦吟詩 괴로이 시만 읊다니 가소롭구나.

― 《청허당집》 권1, 〈가도〉

 

출가승이었다가 환속한 시인 가도가 마상(馬上)에서 “조숙지변수(鳥宿池邊樹) 승고월하문(僧敲月下門)”의 시구를 얻어 ‘퇴()’로 할까, ‘고()’로 할까 골똘히 궁리하다가 문장가였던 한유(韓愈)를 만나 그의 권고로 ‘고’로 했다는13) 고사를 끌어대어 시를 짓는 데 있어서 성률(聲律)이나 찾는 가도와 같은 무리를 비웃는 시다. 휴정의 시는 시구를 우아하게 하기 위해 글자나 찾는 수고로움보다는 그의 탈속한 오도의 경계를 표현하는 데 있었기 때문에 즉흥적인 시작이면서도 뜻이 깊은 시가 많다. 13) 김학주·정범진, 《중국문학사》, 동화출판사, 1983, p.197.

 

〈석춘(惜春)〉이란 시와 아울러 〈영회(詠懷)〉라는 시에서 휴정의 시 성격을 엿볼 수 있다.

 

病在肉團心 모든 병은 마음에 있거니
何勞多集宇 어찌 힘들게 글자만 모을 것이랴.
五言絶句詩 오언절구 한 수면

可寫平生志 평생의 마음을 담을 수 있네.
 

― 《청허당집》 권1, 〈영회〉

 

용복사판 《청허당집》 권3은 오언절구만 편집되어 있는데 무려 315( 611)나 된다. 시 한 수에 천하의 이치를 담을 수 있다는 휴정의 기개다. 그래서 그의 시는 생명력이 있고 뜻도 깊다. 오언절구는 평생지(平生志) 5자로 표상해야 하기 때문에 무엇보다도 참신한 재치와 기발한 시상이 전제되기 않고서는 불가하다. 더구나 절구(絶句)는 운율적이기 때문에 재치만으로는 얽어질 수 없다휴정의 선시 가운데 최고의 절창은 정여립모역반사건 때 시화(詩禍)의 고초를 겪고 사대부 유생에게까지 알려져 유명했던 〈향로봉시(香爐峯詩)〉이다.

 

萬國都城如蟻? 만국의 도성은 개미집이요
千秋豪傑若醯鷄 천추의 호걸은 초파리이네.
一窓明月淸虛枕 청허의 베갯머리에 흐르는 달빛

無限松風韻不齊 끝없는 솔바람 소리 가이 없네.

― 이정구 찬, 청허당휴정대사비명, 〈향로봉시〉

 

〈향로봉시〉는 금강산 향로봉에 올라 대장부의 기개를 읊은 시이다. 두보(杜甫)의 〈망악(望嶽)〉에 “마땅히 산꼭대기에 올라가 보아야지, 뭇 산들이 얼마나 작은지를 볼 수 있다(會當凌絶頂 一覽衆山小).”의 시구가 있다. 모든 산이 작은 것을 보려면 태산에 올라가 보아야 한다고 말했다. 대붕(大鵬)의 눈으로 보면 인간세상이 작게 보이고, 어린아이의 손꼽장난으로 보일 것이다. 휴정은 세상을 구제해 보려고 승과에 응시하여 급제하였고, 승직의 최고 직위인 양종판사까지 하였다. 38, 한창 능력을 발휘해 볼 만한 나이에 판사직을 사임하고 금강산 미륵봉 아래서 홀로 지내면서 〈금강산미륵봉우음(金剛山彌勒峰偶吟)〉 시를 함께 지었다. 조정의 관리들은 나라의 평안과 백성들을 잘 살게 하는 일에는 관심이 없고 자신들의 부귀와 안전을 위해 패거리를 지어 서로 모함하고 싸웠다. 불교부흥에 대한 좌절과 패배의식으로 휴정은 깊은 산사로 몸을 숨겼다. 천하 명산 금강산에서 한가하게 어제의 일들을 생각하니 허망하고 부질없는 일임을 새삼 깨달았다. 동서고금에 어떤 시인이 임금이 계신 도성을 개미집 같고, 천추의 영웅호걸을 초파리와 같다고 시로 읊은 일이 있는가. 이것이 불씨가 되어 역모에 무고되어 선조의 국문을 받게 되었다. 서애(西涯) 유성룡(柳成龍, 15421607)은 휴정의 시가 훌륭하다고 평하면서 〈향로봉시〉를 다음과 같이 소개하였다.
 

요즘의 승려들 가운데 휴정이라는 사람이 있는데 선가의 학문을 매우 깊게 알므로 승려들 가운데서도 이름이 났다. 또한 시를 좋아하며, 스스로 청허자(淸虛子)라고 불렀다. 일찍이 향산(香山)에 있으면서 다음의 절구(絶句, 향로봉시)를 지었다.…… 사물세계 밖으로 높이 뛰어 올라가서 티끌 세상을 내려다보는 뜻이 있으므로, 또한 한때 뜻에 맞았던 작품이다.14) 14) 이가원, 《한국역대한시시화》, 연세대학교출판부, 1980, p.326.

 

서애는 시의 뜻을 이렇게 논하였다. “나는 시에는 능하지 않지만 대략 시의 뜻은 안다. 대개 시는 맑으며 멀고도 깊음으로써 말 밖에다 뜻을 부치는 것이 귀하게 여긴다. 그렇지 않으면 겨우 진부한 말이 될 뿐이다.15) 15) 이가원, 《한국역대한시시화》, 연세대학교출판부, 1980, p.1023.
 

서애는 시평만 잘한 것이 아니라, 그의 시가 힘이 있어서 세상에 그와 견줄 만한 사람이 없다고 평가받았다. 같은 시대에 활동했던 대가인 서애의 〈향로봉시〉 시평은 휴정의 시에 대한 선조 임금의 마음을 바꿔 놓게 되었고, 오히려 묵죽시(墨竹詩)를 하사하게 된 것이다. 1589년 정여립사건에 휴정이 연루되었을 때 서애 유성룡은 대제학에 대사헌을 거쳐 병조판서·지중추부사·예조와 이조판서에 있다가 1590년 우의정이 되었으니, 휴정의 〈향로봉시〉에 대한 선조의 하문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향로봉시〉는 함련(?)과 미련(尾聯)으로 이루어진 칠언절구로 운()도 잘 맞고, 대장(對仗)도 이루고 있는 당시(唐詩)에 비견해도 손색이 없는 명품이다. ‘만국’과 ‘천추’는 공간과 시간을 나타내며 대구를 이루고, ‘도성’과 ‘호걸’은 공간적 환경과 그곳에 사는 사람의 뜻으로 대구를 이루고, ‘여의질’과 ‘약초계’도 대구를 이루고 있다. ‘계’와 ‘제’로 압운하였다. ‘청허침(淸虛枕)’의 ‘청허’는 휴정의 자호이다. 바람 소리는 길게 불기도 하고, 짧게 불기도 한다. 가락이 같지 않다. 세상과 자연의 이치를 솔바람 소리로 깨달을 수 있음을 상징하여 읊고 있다.〈금강산미륵봉우음(金剛山彌勒峯偶吟)〉을 분석해 보면서 휴정이 시를 지을 때 시의 엄격한 율법에 맞추어 지었는지를 알아보자.

 

坐斷諸人不斷頂 만인이 못 끊는 분별심을 앉아서 끊으니
許多生滅竟安歸 하고 많은 생멸이 마침내 어디로 갔는가.
飛塵鎖隙安禪久 참선이 익으니 나는 티끌이 틈을 막았고

碧草連階出院稀 외출이 드무니 푸른 풀이 층계까지 이어졌네.
天地豈能籠大用 천지가 어찌 대용을 가두겠는가

鬼神無處覓玄機 귀신도 현기를 찾을 곳이 없네.
誰知一衲千瘡裏 뉘라서 알 거요, 헤진 누더기 속에

三足金烏半夜飛 세 발의 금까마귀가 밤중에 나는 줄을

― 《청허당집》 권1, 〈금강산미륵봉우음〉

 

〈금강산미륵봉우음〉은 칠언율시이다. ‘단(, 측성)’과 ‘다(, 평성)’가 대()를 이루고, ‘다()’와 ‘진()’은 모두 평성(平聲)으로 점을 이루고, ‘진(, 평성)’과 ‘초(, 측성)’는 대를 이루고, ‘초(, 측성)’와 ‘지(, 평성)’도 대를 이루고, ‘신()’과 ‘지()’는 모두 평성이므로 점을 이루고, ‘지(, 평성)’와 ‘족(, 측성)’이므로 대를 이룬다. ‘귀()’ ‘희()’ ‘기()’ ‘비()’는 모두 평성운으로 압운하였다. 함련(?)과 경련(頸聯)에서 앞뒤 시구가 대장(對仗)을 이루고 있다. 예를 들면 ‘비진(飛塵)’과 ‘벽초(碧草)’가 대구(對句)를 이루고, ‘선구(禪久)’와 ‘원희(院稀)’가 대장을 이루고 있다. ‘천지(天地)’와 ‘귀신(鬼神)’이, ‘기능(豈能)’과 ‘무처(無處)’가 대구를 이루고, ‘농()’와 ‘멱()’이 대구를 이루고, ‘대용(大用)’과 ‘현기(玄機)’가 대장을 이루고 있다.

 

〈금강산미륵봉우음〉은 시운(詩韻), 대구(對句), 대장(對仗), 점대(點對) 등 시의 율격을 엄격히 갖추고서도, 내용 또한 깊은 선지를 함축하고, 가슴 속에 해를 머금은 웅건한 기운이 잘 드러난 대단히 훌륭한 시이다. “출가 사문이 헤진 누더기 옷 속에 붉은 해를 한 밤중에 품고 다닌다(誰知一衲千瘡裏 三足金烏半夜飛).”는 대단한 도력과 호방한 기상을 나타낸다. 해가 임금을 비유할 때는 임금을 마음대로 좌지우지할 수 있다는 뜻이 되어 역모에 연루되어 시화(詩禍)을 당하게 된 시다. 이 시의 미련은 법륜상전(法輪常轉)하여 자혜광명(慈慧光明)으로 온 천하를 태양처럼 환하게 밝히겠다는 휴정의 홍원심(弘願心)이라고 봐야 하겠다. 휴정은 시론(詩論)이나 시율법(詩律法)에 대해서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일부러 시에서 성률(聲律)이나 대구(對句)를 이루기 위해서 고심하지 않았지만 그의 선시 대부분은 기본적인 시율을 지키고 있다. 이런 점에서 그가 조선의 선시를 한 차원 높인 시승임을 누구도 부인할 수 없다.

휴정의 선시 가운데 앞에서 살펴본 〈향로봉시〉 〈금강산미륵봉우음〉 외에도 대장부의 호연지기를 읊은 시로 〈망고대(望高臺)〉 〈상옥계(上玉溪)〉가 있다.

 

獨立高峯頂 높은 봉우리에 홀로 서니
長天鳥去來 장천에 새만 오락가락.
望中秋色遠 눈길 닿는 곳 아득한 가을 빛

滄海小於盃 잔()보다 작은 푸른 바다.

― 《청허당집》 권1, 〈망고대〉


逆族駒陰裏 빠른 세월 속에 나그네 되어

何人歸去來 누군들 돌아가지 않을 이 있나.
閑窓一睡覺 조용한 창가 한가로운 꿈을 깨니

可散萬封侯 만호를 거느리는 왕후가 부럽지 않네.

― 《청허당집》 권1, 〈상옥계〉

 

〈망고대〉는 휴정이 금강산 망고대에 올라가 절경을 읊은 시이다. 두보의 〈망악(望嶽)〉이 연상되는 시다. 산정상에 올라 산 아래를 내려다보니 끝없는 창해다. 시인은 창해를 잔보다도 작다고 읊고 있다. 휴정의 시 특성은 시 속에 대장부의 기개가 넘치고 탈속한 고고함이 있다. 〈상옥계〉는 정옥계(鄭玉溪)에게 올리는 시다. 정옥계는 사대부로 높은 관직에 있었던 휴정과 동갑 나이의 친구이다. 《청허당집》에 가장 많은 편지와 시를 주고받은 지우(知友)이다. 편지의 내용에 휴정을 물질적으로 많이 도와준 사람이다이백(李白)의 글에 ‘천지는 만물의 역려(逆旅)다’고 하였는데, 역려는 나그네가 잠시 쉬었다 가는 여관이다. ‘구음(駒陰)’은 광음의 뜻이다. 《사기》에 “사람이 한 세상 사는 것이 흰 망아지가 틈 사이를 지나가는 것처럼 빠르다(白駒過隙).”라 했는데, 이 흰 망아지는 햇빛을 뜻한다. 인생이 광음처럼 짧다는 뜻이다. 그러나 대몽(大夢)에서 깨어나, 깨달음을 얻고 나니 천자가 부럽지 않다고 친구 옥계자(玉溪子)에게 자신의 오도의 경계를 보인 시이다. 인생을 꿈으로 인식한 것은 불교뿐만 아니라 《장자》에서도 인생을 대몽에 비유하고 있다. 휴정의 시에 장자풍의 시가 많다. 인구회자하는 〈삼몽사(三夢詞)〉에 대하여 살펴보자.

 

主人夢說客 주인은 나그네에게 꿈 이야기하고
客夢說主人 나그네도 주인에게 꿈 이야기하네.
今說二夢客 지금 꿈 이야기하는 두 나그네

亦是夢中人 또한 꿈 속의 사람이네.

― 《청허당집》 권1, 〈삼몽사〉

 

〈삼몽사〉는 《청허당집》 권2 〈재답완산노부윤서(再答完山盧府尹書)〉의 끝부분에 나오는데, 휴정이 노수신(盧守愼)에게 자신의 일생의 행적을 적은 ‘삼몽록(三夢錄)’을 지어 바치면서 또 다시 이것을 시로 읊어 〈삼몽사〉를 바친다고 하였다. ‘삼몽록’이 대략 56세 이전의 기록이므로 〈삼몽사〉도 이때 지은 시라고 볼 수 있다. 노산(鷺山) 이은상(李殷相)은 〈서산의 문학〉에서 다음과 같이 평하였다. “인세를 꿈으로 본 시가가 고래로 얼마나 많은지 그 수를 헤아리기조차 어렵지마는 휴정의 20(三夢詞)를 넘어설 작품을 없을 것이다.” 〈삼몽사〉는 오언고시(五言古詩). 조선 후기 선사들의 시문집에 나타난 공통점은 대부분이 유생 사대부가 문집의 서문과 발문을 썼다는 점과 시를 통해서 석학고유(碩學高儒)와 선장고승(禪匠高僧)들이 교류를 하였다는 것이다. 휴정의 시에 대하여 사대부 시장(詩匠)들의 찬사는 대단하였다. 《청허당집》 서문에서 허균의 휴정시에 대한 평은 다음과 같다.

 

대사는 청소년 시절에 유가의 학술을 습득하여 이미 대의를 통달했고, 써 낸 문장은 내용과 형식면에서 훌륭하였다.…… 도는 앞의 기연(機緣)을 밝혔고, 사색은 초매(超邁)하여 본보기가 되었으며, 도리에 도달하여 간결하게 풀이할 줄 알았다. 이리하여 달마 대사(達磨大師)나 혜능(慧能)의 법맥을 직접 이어받아 불심과 불성을 풀이하였다. 훌륭하여 남악(南嶽), 영가(永嘉), 백장(百丈), 남전(南泉)과 비견할 수 있었다.

 

다음은 《청허당집》(龍復寺版本)의 서문에 나타난 이식(李植)의 평을 살펴보자. 내가 일찍이 이 책을 한 번 읽어 보고 느낀 바가 있었다. 그 언어는 심오하면서도 말없이 약속해 주는 듯했다. 성율(聲律)에 구애받지 않았고, 잡다한 나열이 없는 반면에 그 의취가 초연하고 법어의 기봉(機鋒)이 날카롭다. 흩뿌려 쓴 서법의 필치는 상등(上等)이어서 관휴(貫休)나 광선(廣宣)은 거기에 비길 수도 없다. 밤낮을 가리지 않고 읊은 시문을 시인묵객들에게 보여 추고(推敲)를 더 알뜰히 하였다. 옛 사람들은 꼭 먼저 쓸 내용이 있어야 후에 글을 썼다. 월사(月沙) 이정구(李廷龜)가 〈회양표훈사백화암휴정대사비문〉에서 휴정의 시를 평한 내용을 살펴보자.

 

스님의 유고(遺稿)에 대해서는 내가 이미 완미(玩味)하고 또한 읽어 보았다. 시를 읽어 보았으므로 족히 스님께서 자득한 취지를 알 수 있으며, 글을 읽어 보았으므로 넉넉히 스님의 조예 경지가 높음을 짐작할 수 있다. 비록 문장 중 어세가 간혹 아순(雅馴)치 않은 부분이 있으나 언언(言言)이 모두 살아 있으며, 구구(句句)가 날아 움직이고 있어, 마치 고검이 칼집에서 나온 것과 같고, 상풍이 불어오매 왕왕 살결을 오려 내는 듯 혹독한 추위와 같음을 느낀다.……제불제조 마음 달을 거듭 비추어 중생들의 번뇌망상 녹여 주셨네. 참선하는 여가시간 선시를 읊어 시의 명성 널리 퍼져 왕께 들렸네. 선조대왕 시를 보고 감탄하고서 내려 주신 그 은총은 길이 빛나다. 장유가 〈해남대흥사청허대사비문〉에서 휴정의 시에 대하여 평한 내용을 알아보자.

 

스님의 시와 게는 매우 상매(爽邁)하고 낭철하여 세상을 경책하는 말씀이 적지 않았다. 그리고 필적은 소략(푍略)하고 경직(勁直)하여 운치가 있었다.

 

장유는 〈운곡시고소서(雲谷詩稿小序)〉에서 “우리 해동에 전대 많은 시승이 있었으나 근래에 와서 모두 몰락하였고, 서산과 송운이 놀던 때가 있었다.”라고 하여 휴정과 사명을 동국의 최고 시승으로 꼽았다.
서애 유성룡(15421607)은 《서애별집》에서 휴정이 시명을 얻었음을 밝히고, 〈향로봉시〉 전문을 소개하며 간략하게 평하였다. 요즘의 승려들 가운데 휴정이 있는데 선가의 학문에 매우 깊게 통달하여 승려들 가운데서도 이름이 났다. 또한 시를 좋아하며, 스스로 청허자라고 불렀다. 향산에 있으면서 절구(등향노봉)를 지었다. 이수광(李쓱光)은 《지봉류설》에서 휴정의 시를 “스님의 시는 선승에 머물지 않고 사직을 생각하는 마음이 유달리 깊었다. 또 벗을 생각하는 마음이 마치 노부가 자식을 대하듯 자상한 바가 있었다.”고 평하였다.

 

이와 같이 휴정의 시에 대하여 찬사를 보낸 이정구, 허균, 장유, 유성룡, 이우신, 이은상 등은 당대 시단의 문병을 쥔 사람들이다. 또한 휴정과 교류를 하였던 허균, 이황, 조식, 노수신, 박순, 박계현, 양사언, 소세양 등 또한 문형이었거나 문장과 시문으로 이름이 난 사람들이다. 휴정은 이들과의 유불교류를 통해서 시 창작을 연마하고 시학을 상호 탁마했다. 뿐만 아니라 사대부들에게 금기시되었던 불교 선사상을 전해줌으로써 시선일여의 선시풍을 이해할 수 있도록 영향을 주었다.

 

휴정은 중국 당송시대의 대가들의 시풍을 수용하여 조선 선시의 시풍을 정립하였다. 휴정의 선시는 왕유의 시중유화(詩中有畵) 시풍에 영향을 받았는데, 이는 그의 산거운수시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특성이다. 그의 《청허당집》에 나타난 시어를 조사해 보면 ‘산()(226), ‘달()(180), ‘하늘()(215), ‘구름()(175), ‘물()(74), ‘비()(59), ‘바람()(71)의 산수 자연을 소재로 하여 시 속에 선의 묘오경지를 담았다.

 

휴정의 제자인 사명, 편양, 소요 등은 불교 교단의 지도자였을 뿐만 아니라 휴정의 선시를 수용하여 훌륭한 선시를 창작하였으며, 시문집을 발간하였다. 휴정의 선시는 조선 말기의 시승 초의에게도 영향을 주었고, 일제시대 때 3·1운동을 주도하고 시집 《님의 침묵》(한글로 쓴 선시이다)으로 한국 현대시의 선구자가 된 만해 한용운의 선시에도 영향을 주었다. 만해는 한시에서 현대시로 넘어오는 교량적 역할을 한 시승이다.

 

선의 돈오적 사유방식은 시 창작에 있어서 번득이는 영감을 제공해 준다. 휴정의 선시문학은 선이 시로써 문학이 되었고, 시가 선으로써 사상과 깊이를 더하여 지고한 시 세계를 펼쳐 내어 높이 평가받을 만하다. 그의 선시는 또한 여타의 시승과는 달리 시의 운율과 평측, 대구에 있어 유가시인들에게 뒤지지 않는 격조 높은 시가 많다.

 

앞에서 살펴 본 바와 같이 한국 한시사에서 휴정만큼 찬사를 받은 시승도 드물다. 휴정의 시에는 당시(唐詩)에 뒤지지 않는 명시가 많다. 선가뿐만 아니라, 한시단의 사대부들에까지도 아낌없는 찬사를 받았던 사실과, 일본에서도 《청허당집》과 《선가귀감》이 수차례 간행되어 유통되었던 점으로 보아 휴정의 시는 한국 한시사에서 높이 평가되어야 할 것이다.

김형중

문학박사. 전국교법사단장. 명성여고 교법사. 동국대학교 불교학과 졸업. 동대학원 석사. 중국연변대학교 문학박사. 저서로 《휴정의 선시연구》 《시로 읽는 서산대사》 《불교를 찾아가는 길》 《석가모니 생애와 가르침》 《한글세대를 위한 한자 공부》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