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선시모음집 ▒

영원한 자유를 찾아서

천하한량 2007. 3. 27. 05:06

영원한 자유를 찾아서


 

나는 요즘 다산 정약용의 글을 읽고 있다.

다산이 유배지에서 두 아들에게 보낸 편지를 읽노라면 그 속에 오늘의 지식인들에게

주는 메시지가 담겨 있음을 알 수 있다.

편지 글을 통해 다산은 학문을 하는 사람들이

어떤 자세를 가져야 하는가를 역설하고 있다.

오늘날 학생들한테서는 학문의 진정한 의미나 지식인의 사명 같은 것은

거의 사라져 버렸다. 모두가 세속적인 일에 영합하고 있다.

유배지에 살면서도 다산은 고고한 기상과 기개가 조금도 꺾이지 않았다.

 

다산이 두 아들에게 보낸 편지 가운데 이런 구절이 있다.

‘남자는 모름지기 사나운 새나 짐승처럼 사납고 전투적인 기상이 있고 나서,

그것을 부드럽게 안으로 다스려 법도에 알맞게 행하면 유용한 인재가 될 수 있다.‘

먼저 사납고 전투적인 기상이 있고 나서,

그 다음에 그것을 안으로 부드럽게 다스리라고 충고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다산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사나이의 가슴 속에는 가을 매가 하늘 높이 치솟아오르는 듯한 기상을 품고,

천지를 조그맣게 보고, 우주를 가볍게 손으로 요리할 수 있다는 생각을 지녀야 한다.‘

무릇 이런 기상을 지니고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고전을 배우는 것은 단순히 지적 호기심을 채우기 위해서가 아니다.

옛 거울에 오늘의 우리를 비춰 봄으로써, 현재의 새로운 나늘 만들기 위해 고전을 읽는다.

따라서 생명력을 지닌 고전은 세월이 흐를수록 빛을 발한다.

예전에 학문을 한 사람들은 그 나름의 기상이 있었다. 이른바 선비 정신이 그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이런 것들은 사라지고 없다. 컴퓨터를 갖고,

많은 자료와 정보를 갖고 그것을 처리하느라 고심하고 있을 뿐이다.

거의 모두가 기계화된 인간이다.  

어떤 사무실에 갔더니 일류대학을 나온 사람들이 모두 컴퓨터만 들여다 보고 있었다.

그걸 보고 나는 깜짝 놀랐다. 이게 현대인들의 업무인가.

옛날에는 흙을 만지고, 나무 밑에서 서성거리고,

하늘도 보고, 이러면서 일들을 했다.

현재는 사각 컴퓨터 안에서 그것만 들여다 보고 있다.

이런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다.

이것이 이른바 첨단의 학문 방법이다.

우리는 많은 정보와 지식을 통해서 이 세상을 살아야 하는 것으로 착각하고 있다.

따라서 이런 시대에는 사나이로서, 학자로서, 진실을 탐구하는 사람으로서

드높은 기상을 갖기가 어렵다.

 

임제 의현 선사의 어록을 통해서도 구도자의 살아 있는 기상을 엿볼 수 있다.

임제는 9세기 사람으로, 이 시대는 당 왕조가 내리막길에 들어선 시대이다.

환관들의 정권 쟁탈과 관리들의 파벌 싸움으로 나라가 극도로 어지럽던 때이다.

임제 선사의 성격을 잘 말해 주는 일화가 있다.

그는 소나무를 즐겨 심었다.

그의 스승인 황벽 희운이 물었다.

‘그대는 깊은 산골에 소나무를 심어서 무엇하려는가?’

임제는 대답했다.

‘첫째 산문을 장식하기 위해서이고,

둘째 뒷사람에게 표본이 되기 위해서입니다.‘

그러자 황벽이 말했다.

‘나의 종 宗이 너에게 이르러 세상에 크게 떨치리라.’

 

구도자의 기상이 어떠해야 하는가를 일깨워 주는 임제 선사의 대표적인 일화가 있다.

그가 교화의 길을 나서고 싶어 고향인 하북 지방으로 가려 할 때의 일이다.

스승 황벽이 그를 불러 물었다.

‘어디로 가려 하는가?’

임제가 대답했다.

‘하북으로 돌아갈까 합니다.’

그러자 황벽이 불러 그들의 대스승인 백장 선사의 선판 禪板과 궤안 机案을

가져 오라고 일렀다. 선판과 궤안은 일종의 깨달음의 증표다.

이때 임제가 소리쳤다.

‘시자야, 불을 가져 오너라!’

그 깨달음의 증표를 불태워 버리겠다는 것이다. 증표가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진정으로 깨달음을 얻었다면 증명서가 필요할 리 없다.

문제는 깨달음 자체에 있는 것이지 형식이 아니다.

임제의 이러한 드높은 기상을 알고 황벽은 이렇게 말했다.

‘그대는 훗날 천하 사람들의 혀 끝에 자리 잡고 앉게 되리라.’

 

임제는 전통적인 인습을 거부했다.

스승에 대한 불만에서가 아니라 수행에 자기 확신이 섰기 때문에

다른 소도구가 필요 없었다.

뒷날의 대혜 종고 역시 임제 선사와 기질이 비슷했다.

대혜는 스승인 원오의 저서인 <벽암록>을 사람들을 현혹시킨다 하여 불태워 버렸다.

스승에 대한 배반이 아니라 어떤 의미에서는 이것이 스승을 살리는 길이다.

 

선가에는 이런 말이 전해져 온다.

‘장부자유충천지 丈夫自有衝天志 불향여래행처행 不向如來行處行.’

대장부는 하늘을 찌르는 기상이 있기에 부처와 여래가 가는 길이라 해서

따라가지 않겠다는 것이다. 내 길을 내가 가겠다는 것이다.

부처의 복제품이 되지 않겠다는 뜻이다.

조선 시대의 사명 스님이 스승 서산 스님을 찾아 묘향산으로 갔을 때의 일이다.  

스승이 제자에게 물었다.

‘어디서 오는가?’

사명이 대답했다.

‘옛길을 따라서 옵니다.’

그러자 서산이 크게 꾸짓으며 말했다.

‘옛길을 따르지 말라. 오직 너의 길을 가라.’

현재에 사는 사람이 왜 옛길을 따르냐는 것이다.

진리를 탐구하는 사람에게는 이런 기상이 있어야 한다.  

이것은 저절로 되는 일이 아니다. 밤잠을 안자고 탐구할 때,

그러한 기백과 기상이 저절로 몸에 배게 된다.

오늘날 학문하는 사람에게는 그러한 기상이 없다.

생각 자체가 삶의 기쁨이 되어야 하는데, 이 다음에 써먹기 위한 수단으로, 과정으로,

출세길을 위한 방편으로 학문을 하기 때문에 기상이나 기백이 돋아날 리 없다.

사회적 신분이나 좋은 자리를 얻기 위해 학문을 한다면 그는 졸장부에 불과하다.

 

선가에는 흔히 ‘임제할 덕산방 臨濟喝 德山棒’ 이란 말이 있다.

‘할’은 고함이고, ‘방’은 몽둥이이다.

할은 거부의 강력한 의사 표시이고, 방은 그 직접적인 행동이다. 

이렇듯 임제는 틀에 박힌 형식과 전통적인 인식을 강력히 부정했다.

임제의 어록에 보면 곳곳에 그런 정신이 여실히 표현되고 있다.

‘그대가 바른 견해를 얻고 싶거든 타인으로부터 미혹을 받지 말라.

안으로나 밖으로나 만나는 것은 무조건 죽여라.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조사를 만나면 조사를 죽이고,

아라한(성인)을 만나면 아라한을 죽여라.

부모를 만나면 부모를 죽이고, 친척이나 권속을 만나면 친척이나 권속을 죽여라.

그래야 비로소 해탈하여 그 무엇에도 구애 받지 않으리라.‘

부처를 죽이라고 하면 타종교에서는 이해하지 못한다.

화형감이고 신성모독이다. 그러나 불교에서는 그것을 당연시 한다.

제자가 자신의 스승을 죽여야 한다는 것은 일반적인 사회윤리로 보면 패륜아의 짓이다.

하지만 임제 선사는 정신적인 굴레를 벗어 던지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부처와 조사, 전통이나 스승을 최고의 가치로 삼는다면 그것은 자승자박이 된다.

왜냐하면 사람을 얽어매는 인혹 人惑 이기 때문이다.

타인에게 붙들리고, 외부의 권위에 사로잡히면 본래의 자기를 잃어 버린다.


 임제는 무위진인 無位眞人 또는 무의도인 無依道人을 이야기했다.

어디에도 의존함이 없는, 누구에게도 기대지 않는 당당한 참사람이라는 뜻이다.

무위진인은 범부도, 성인도, 중생도, 부처도 아닌 절대자유의 주체를 말한다.


 선사들의 표현이 거칠고 과격한 것은

산 체험을 죽은 언어와 문자를 빌어 표현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파격적인 표현을 쓰지 않을 수 없다.

거죽의 표현보다 그 속뜻을 알아차리면 정신이 번쩍 난다.

임제 선사는 어록에서 말하고 있다.

‘함께 도를 닦는 여러 벗들이여,

부처로써 최고의 목표를 삼지 말라.

내가 보기에는 부처도 한낱 똥단지와 같고,

보살과 아라한은 목에 거는 형틀이요,

이 모두가 사람을 구속하는 물건이다.‘

우리를 부자유하게 만드는 모든 것들로부터 단호히 벗어나라고 임제는 요구하고 있다.

다시 말해 탈종교이다. 종교의 틀에서 벗어나라는 것이다. 그러면 무엇이 남는가.

그 남는 것이 바로 진정한 종교의 세계이다.

이런 의미에서 임제는 가장 종교적인 사람이었다.

거죽의 세계에서, 껍데기에서 다 벗어나라.

왜 남에게 의지하고, 타인의 졸개가 되려 하는가. 

부처라 하더라도, 성인이라 하더라도 그는 타인일 뿐이다.

그 가르침을 통해서, 그 자취를 통해서 오직 내 길을 갈 수 있어야 한다.  

불교는 부처를 믿는 종교가 아니다.

스스로 부처가 되는 길이다.

 

새로운 부처, 새로운 예수가 필요한 것이지 이 인류에게 똑같은 존재는 필요없다.

따라서 뛰어난 종교가나 사상가는 일인 일파 一人一派일 수 밖에 없다.

임제는 우리에게 말하고 있다.

‘수처작주 입처개진 隨處作主 入處皆眞’

언제 어디서나 주체적일 수 있다면, 그 서 있는 곳이 모두 참된 곳이다.‘

어디서나 주인 노릇을 하라는 것이다.

소도구로서, 부속품으로서 처신하지 말라는 것이다.

어디서든지 주체적일 수 있다면 그곳이 곧 진리의 세계라는 뜻이다. 


나를 필요로 하는 내 삶의 주인공이 되어야 한다.

내가 몸 담고 있고 그 공간에 살아 있기 때문에 내 자신이 주인이 되어야 한다.

그곳이 극락이고 천당이다.

어디서든 당당하게 주인 노릇을 할 수 있어야 한다.

타인이 아닌 바로 내 자신이 내 삶의 주인이 되어야 한다.


 모든 가르침은 약의 처방에 불과하다.

약의 처방은 진정한 약이 아니다.

약의 처방은 병을 낫게 하는 임시 방편일 뿐이다.

약중의 약은 본래의 건강에 눈 뜨는 일이다.

생활 습관과 음식 조절, 적절한 침묵 등을 통해서만이 근원적인 치료가 가능하다.

그렇듯 스스로 자기의 삶을 되돌아보면 스스로 알게 된다.

불교에서 말하는 본래 청정, 본래 성불이란 말이 그 뜻이다.

본래의 자기 의식으로 돌아가면 이미 완전한 존재라는 뜻이다.
 

임제 선사는 또 말한다.

‘바로 지금이지 다시 시절은 없다. 卽時現今 更無時節’

지금이 바로 그때이지 다른 시절이 있는 것은 아니다. 

우리들의 삶과 죽음이 지금 이 자리에서 이렇게 전개되고 있다.

어떤 사람이 불안과 슬픔에 빠져 있다면,

그는 이미 지나가 버린 과거의 시간에 아직도 매달려 있는 것이다. 

또 누가 미래를 두려워하면서 잠 못 이룬다면,

그는 아직 오지도 않은 시간을 가불해서 쓰고 있는 것이다. 

과거는 강물처럼 지나가 버렸고, 미래는 아직 오지 않았다.

과거나 미래 쪽에 한눈을 팔면 현재의 삶이 소멸해 버린다.

보다 직설적으로 표현하면, 과거도 없고 미래도 없다.  항상 현재일 뿐이다.

지금 이 자리에서 최선을 다해 최대한으로 살 수 있다면,

여기에는 삶과 죽음의 두려움도 발 붙일 수 없다.

저마다 서있는 그 자리에서 자기 자신답게 살라!

 

임제는 마지막 눈 감을 때까지 자유인의 기상을 가르쳤다.

임제 어록에 가장 많이 등장하는 단어 중 하나가 ‘자유’이다.

9세기에 이미 그는 ‘자유’라는 말을 사람들의 마음 속에 심어 놓았다.  

임제 선사가 임종에 이르러 훗날 임제록을 편찬한 제자 삼성을 불러 말했다.

‘내가 죽은 후 내 정법안장 正法眼藏(가풍,가르침)을 잃어버려서는 안된다.’

삼성이 말했다.

‘저희가 어떻게 스님의 정법안장을 잃어 버릴 수 있겠습니까?’

임제 선사가 물었다.

‘뒷날 누가 나의 정법안장을 물을 때 너는 어떻게 대답하겠는가?’

이때 삼성이 ‘할(고함)’을 했다. 스승이 지금까지 해온 그 ‘할’을 그대로 모방한 것이다.

이것을 듣고 임제 선사는 한탄을 한다.

‘대체 누가 생각이나 했겠는가. 이 눈 먼 나귀한테서 내 정법안장이 소멸될 것을.’

임제 선사는 이 말을 끝내고 바로 그 자리에서 눈을 감았다.

누구든 자신의 길을 가야 한다.

좋은 제자란 스승을 뛰어넘어야 한다.

그래야 스승에 대한 은혜 갚음이 된다.

 

여기 한 가지 일화가 더 있다.

배휴 裵休라는 이름의 지방 장관이 새로 부임해 절을 찾아갔다.

배휴가 절을 안내하던 원주에게 어느 영정을 가리키며 물었다.

‘이 분은 누구십니까?’

원주가 대답했다.

‘이 절에서 살다간 큰스님입니다.’

배휴가 말했다.

‘얼굴은 그럴 듯 하군. 그럼 이 큰스님은 지금 어디 계십니까?’

원주는 대답을 못하고 그 절의 노승인 황벽 선사를 소개했다.

조금 전의 이야기를 듣고 나서 황벽 선사는 배휴에게 처음부터 다시 물으라고 말했다.

그래서 배휴가 다시 물었다.  

‘얼굴이 그럴 듯한 이 큰스님은 지금 어디 계십니까?’

이때 황벽 선사가 큰소리로 ‘배장관!’ 하고 부르자,

배휴는 깜짝 놀라 ‘예!’하고 대답했다.

황벽은 다그쳐 물었다.

‘어디 있는가?’

과거 사람의 자취를 찾아 물을 것 없이 현재의 너는 지금 어디 있느냐는 것이다.

이 말끝에 배휴는 눈이 번쩍 뜨였다.

배휴는 이 인연으로 제자가 되어,

훗날 황벽 선사의 어록인 <전심법요 傳心法要>를 편찬하고 서문을 지었다.


                                                        - 법정 스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