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선시모음집 ▒

"자기를 바로 봅시다." /성철스님 법어집

천하한량 2018. 1. 25. 05:57

1982년 1월 1일 "자기를 바로 봅시다." /성철스님 법어집 





법정스님 : 큰 스님 모시고 대담을 갖기 위해, 안거 중인데도 이렇게 찾아 뵙게 되었습니다. 흔히 밖에서 말하기를 큰스님 뵙기가 몹시 어렵다고들 합니다. 스님을 뵈려면 누구나 부처님께 3천 배를 해야 된다고 하는데, 일반인들의 궁금증을 풀어주기 위해서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어째서 3천 배를 하라고 하시는지, 그리고 언제, 어디 계실 때부터 그런 가르침을 시행하게 되셨습니까? 


성철스님 : 흔히 3천 배를 하라 하면 나를 보기 위해 3천 배를 하라는 줄로 아는 모양인데 그렇지 않습니다. 승려라면 부처님을 대행할 수 있는 사람을 말하는데, 어느 점으로 보든지 내가 무엇을 가지고 부처님을 대행할 수 있겠나 하는 생각입니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내가 남을 이익 되게 할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내가 늘 말합니다. 나를 찾아오지 말고 부처님을 찾아오시오. 나를 찾아와서는 아무 이익이 없습니다. 

그래도 사람들이 찾아오지요. 그러면 그 기회를 이용하여 부처님께 절하라, 하는 것이지요. 그래서 3천 배 기도를 시키는 것입니다. 그냥 절만 하는 것이 아니라 남을 위해서 절해라, 자신을 위해서 절하는 것은 거꾸로 하는 것이다, 라고 이야기 합니다. 그렇게 3천 배를 하고 나면 그 사람의 심중에 무엇인가 변화가 옵니다. 변화가 오고 나면 그 뒤부터는 자연히 스스로 절하게 됩니다. 처음에는 억지로 남을 위해서 절하는 것이 잘 안되어도, 나중에는 남을 위해 절하는 사람이 되고, 남을 위해 사는 사람이 되며, 그렇게 행동하게 되는 것입니다. 



법정스님: 요즘 세태를 보면 날이 갈수록 인간사회가 험악해지고 있는 느낌입니다. 어떻게 하면 인간다운 인간 노릇을 할 수 있겠습니까? 인간사회에서 존엄의 터전으로 내려온 기존의 가치체계나 규범이 크게 흔들리고 있습니다 


성철스님 : 그렇게 되는 그 근본 책임은 어디에 있느냐 할 때, 나는 정신적인 지도역할을 맡고 있는 종교인에게 있다고 봅니다. 살인, 강도 등 범죄가 있다면 범죄를 저지른 그 사람에게 책임이 있는 것이 아니고, 그 사람의 정신적인 지도 책임을 맡고 있는 종교인이라는 사람들이 참다운 지도를 하지 못하고 참다운 행동을 하지 못했기 때문이니, 근본 책임이 종교인에게 있다고 생각합니다. 



법정스님: 그렇습니다. 어떤 현상이나 독립된 현상만이 아니고 사회 구조적인 모순에서 그러한 현상이 일어나고 있는데, 저희들 자신이 종교인이기 때문에 종교인에게도 책임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성철스님 : "종교인에게도"가 아니지요. "에게도"가 아니고. 실제로 책임은 근본 책임자에게 있는 것입니다.  우리 종교인이란 정신을 지도하는 근본 책임을 맡았으니, 예전 스님들이 늘 하시던 말씀이 '극중한 죄인은 내가 아니고 누구냐'고 했습니다. 종교인 자체다, 그 말입니다. 그러니 여기 종교인이라는 사람, 성직자라는 사람부터 근본 자세를 바로 잡아서 참다운 정신적 지도자가 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위의 정신적 지도부터 잘못되었다고 하면 밑에서 지도 받은 사람이 잘못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니까. 그러니 근본 책임을 맡은 종교인, 성직자인 우리가 참회해야 한다고 봅니다. 


법정스님: 세계의 많은 학자들, 특히 토인비 같은 역사가는 현대 문명의 해독제로서 불교사상을 크게 평가하고 있습니다. 그 중에서도 대승불교의 보살사상이야말로 인류 구제의 길잡이라고 말합니다. 불교의 근본 사상은 무엇이며, 또 그것이 오늘의 인류에게 기여하기 위하여 불자들은 어떻게 살아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성철스님 : 그거 좋은 말씀입니다. 내가 무슨 불교를 잘 안다고 자처할 수는 없지만 내가 아는 한도에서 말하자면, 불교의 근본 사상은 중생이 본래 부처라는 데 있습니다 중생이 본래 부처다. 그리고 현실 이대로가 극락 세계다, 현실 이대로가 절대다, 여기에 우리 불교의 근본이 서 있습니다. 성불한다고 하여 중생을 부처로 만든다고 하는 것은 실은 방편설입니다. 중생을 부처로 만든다는 것은 부처 아닌 중생을 부처로 변하게 만든다는 것이 아닙니다. 

중생이 본래 부처고, 현실 이대로가 절대고, 현실 이대로가 극락 세계다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중생이 본래 부처인 이것을 바로 보고, 현실이 본래 절대 극락 세계인 이것을 바로 보자는 것입니다. 

부처님도 방편으로 서방의 극락 세계를 이야기한 것입니다. 사람들이 마음의 눈을 감고 잘 모르니, 어떠한 표준을 말하기 위해서 서방을 말씀하셨습니다. 육조 스님 말씀에 '동방 세계 사람이 염불해서 서방 세계에 간다면 서방 세계에 있는 사람은 염불해서 어디로 가느냐?' 고 했는데 그 말이 참 좋은 말씀입니다. 

마음의 눈만 뜨고 보면 모든 것이 본래 광명 속에 살고 있고 우리 자체가 본래 광명입니다. 전체가 본래 부처고 전체가 본래 극락 세계인줄 알게 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살아야 되겠느냐? '모든 존재를 부처님으로 섬기자' 이것입니다. 

부처님이니까 부처님으로 섬기는 것 아닙니까? 그래서 불교 믿는 처음 조건에 모든 존재를 부처님으로 모셔라, 모든 존재를 부모로 섬겨라, 모든 존재를 스승으로 섬겨라 하는 3대 조건이 있습니다. 

우리 불교에서는 근본 생활을 불공하는 데 두어야 합니다. 모든 존재, 모든 상대가 부처인 줄 알면서 부처님으로 섬기고 존경하고 봉양한다면 극락 세계를 따로 갈 필요가 없습니다. 이대로가 극락 세계가 아닐래야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니 모든 인간이 모든 생명이 본래 부처라는 이것부터 알아야 되겠습니다. 



법정스님: 스님께서 한창 정진하시던 것과, 요즈음 선원이나 강원에서 스님들이 처신하는 것을 견주어 보시면 생각이 많으실 줄 믿습니다 어린 후배들을 위해서 어떻게 하면 진실한 수행자가 될 수 있는지 말씀해 주십시오. 


성철스님 : 우리 젊을 때 한 것이 다 옳고 지금은 잘못한다고만 말할 수는 없겠지요. 그때 그때의 특기와 장점이 있습니다. 출가한 사람이란 무엇이 목적이냐 하면, 결국 대법을 성취하여 일체를 위해 사는 인격을 완성하는 것입니다. 스님네는 개인주의여서는 안됩니다. 출가의 목적에서 볼 때, 참으로 큰 활동을 하기 위해 세속을 버리는 것입니다.  일시적으로 수행하는 기간 동안에는 세속을 버리고 사는 것 같지만, 근본 목적은 성불해서 중생을 위해서, 남을 위해서 살고자 하는 것입니다. 

만약 자기를 위해서 수행하고 자기를 위해서 견성한다면 그것은 외도입니다. 수행도 남을 위해서 하고 나중 생활도 남을 위하는 것입니다. 

자초지종(自初至終).. 

이것이 불교의 출발이자 종점인데 요즘 가만히 보면 세속적으로도 정신 방면이 소외되고 물질 본위로 치중되고 있듯이 우리 불교도 그런 점이 많은 것 같습니다. 

흔히 공부하는 스님들이 와서 공부가 잘 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그러면 나는 공부하는 데 5계를 한번 지켜보라고 하지요. 

첫째, 잠을 적게 잔다. 세 시간 이상 더 자면 그건 수도인이 아니지요. 

둘째, 말하지 말라, 말할 때는 화두가 없으니 좋은 말이든 궂은 말이든 남과 말하지 말라, 공부하는 사람끼리는 싸움한 사람같이 하라고 합니다. 무슨 말이든 말하지 말라. 

셋째, 문자를 보지 말라. 부처님 경도 보지 말고 조사 어록도 보지 말고, 신문 잡지는 말할 것도 없습니다. 참으로 참선하여 자기를 복구시키면, 이 자아라는 것은 팔만대장경을 다해도 설명할 수 없고 소개할 수 없는 것입니다. 

세속적인 어떤 문장이나 부처님이라도 다 설명할 수 없는 것이지요, 자아를 완전히 깨치려면 불법도 버려야 합니다. 불교를 앞세우면 그것이 또 장애가 됩니다. 참으로 깨끗한 자아게 비춰보면 먼지요, 때다 그 말이지요. 오직 화두만 해야 합니다. 

넷째, 과식하지 말고 간식하지 말라. 음식은 건강이 유지될 정도만 먹지, 과식하면 잠이 자꾸 오고 혼침해서 안됩니다. 소식이 건강에도 좋고 장수비결입니다. 

다섯째, 돌아다니지 말라. 해재하면 모두 제트기같이 달아나는데 그러지 말란 말이지요. 

이 5계를 못 지킨다면, 그런 사람은 공부 안하는 사람입니다. 이 5계를 지키며 이렇게 10년을 공부하면 성불할 수 있습니다. 수백명에게도 더 일러주었는데, 그래도 지키는 사람 아직 못 봤어요. 아마 공부 열심히하는 사람이 없는 모양이야. 물론 숨어서하는 사람은 있겠지만.. 



법정스님: 스님의 생활 신조라고 할까, 좌우명 같은 것을 들려주십시오. 


성철스님 : 내가 늘 생각하는 쇠말뚝이 있습니다. 쇠말뚝을 박아 놓고 있는데, 그것이 아직도 꽂혀있습니다. 거기에 패가 하나 붙어있어요. '영원한 진리를 위해 일체를 희생한다.' 
'영원한 진리'하면 막연하지요. 내가 불교인이니 그것은 불교밖에 없는가 하고 혹 볼 수도 있겠지만,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내 견문이 그리 넓지는 않지만, 더러 책을 읽어보았는데 불교가 가장 우수한 것 같습니다 그래서 지금도 불교를 그대로 하고 있고 앞으로도 이렇게 살 것입니다. 

만약에 앞으로라도 불교 이상의 진리가 있다는 것이 확실하면 이 옷을 벗겠습니다. 나는 진리를 위해서 불교를 택한 것이지, 불교를 위해서 진리를 택한 것은 아닙니다. 그러면 내 기본 자세를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니 언제든지 진리를 위해서 산다는 이 근본 자세는 조금도 변동이 없다는 말씀입니다. 참으로 진리에 살려면 세속적인 일체 명리는 다 버려야 합니다. 

만약 그것이 앞서면 진리는 세속적인 영리를 추구하는 도구가 되어 버리니, 그것이 문제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처음 승려가 될 때는 신조가 있는데 여하한 일이든지, 세간 일이든지,출세간 일이든지, 절일이든지, 사회적인 문제든지, 일체 관여치 않는다는 것이지요. 무슨 회의든지 참여 안 한다. 그래서 절의 모임이나 사회의 모임에 참석해 본일이 없습니다. 



법정스님: 스님의 인격 형성에 영향을 준 서책이 있다면 어떤 것입니까? 


성철스님 : 내가 여러 가지 한 것처럼 보이지만, 주로 한 것은 선(禪)입니다. 내가 제일 크게 영향을 받았다고 생각되는 조사 스님네의 어록은 "조주록"과 "운문록"입니다. 



법정스님: 요새 젊은이들에게 권하고 싶은 책은 어떤 것이 있습니까? 


성철스님 : "보현행원품"입니다. 행원품이란 모든 존재의 실상 그대로 그 자체 모든 일체가 절대라는 것을 분명하고도 해박하게 설명해 놓은 동시에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한다는 것, 일체가 부처이니 자기라는 것을 완전히 잊어버리고 오직 남을 위해서 사는 거룩한 길이 거기 있습니다. 

"화엄경"하면 불교의 근본인데, 이 "행원품"은 바로 그 "화엄경"의 엑기스입니다 앞으로 우리가 불교 활동하는 데에도 행원품에 의지해서 살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법정스님: 스님께서는 어떤 인물을 존경하십니까? 


성철스님 : 인류 역사상 위대하고 훌륭한 인물도 참으로 많지만, 내가 볼 때는 참으로 자아 회복을 하여 그 문제를 우리에게 소개한 분은 부처님이시고, 그 뒤에 와서는 육조 스님이 계시지요. 그래서 중생이 본래 부처라는 것, 사바가 본래 극락이라는 것, 정토라는 것, 현실이 그대로 절대라는 그 소신을 가장 해박하고 분명하게 말씀해 주신 분이 부처님과 육조 스님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법정스님: 사람은 한 번은 죽습니다. 많은 생물 가운데서 유달리 인간만이 자기가 언젠가는 죽는다는 것을 알고 있는 존재입니다. 우리가 죽음에 어떻게 대처해야 할 것인가는 모든 종교의 중요한 과제입니다. 스님의 생사관을 듣고 싶습니다. 


성철스님 : 생사란 모를 때는 생사입니다. 눈을 감고 나면 캄캄하듯이. 하지만 알고 보면 눈을 뜨면 광명입니다. 생사라 하지만 본래 생사란 없습니다. 생사 이대로가 열반이고 이대로가 해탈입니다. 일체 만법이 해탈 아닌 것이 없습니다 윤회를 얘기하는데, 윤회라는 것도 눈감고 하는 소리입니다. 사실 눈을 뜨고 보면 자유만 있을 뿐이지 윤회는 없습니다. 물론 사람이 몸을 받고 또 받고 하여 이어지지만, 모르는 사람은 그것은 윤회라고 하는데 아는 사람이 볼 때는 그것은 모두 자유다, 그 말입니다. 

대 자유! 
눈을 뜨고 볼 때는 그래서 생사가 곧 해탈이고 생사 이대로가 열반입니다. '생사 곧 해탈'이라고 하겠지요. 생사란 본래 없습니다. 현실을 바로만 보면, 마음의 눈만 뜨면 지상이 극락입니다. 이 현실 그대로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