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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跋) 서 금남 우수전 후(書錦南迂?傳後) -이색(李穡) -

천하한량 2007. 5. 1. 02:35

발(跋)
 
 
서 금남 우수전 후(書錦南迂?傳後)
 

이색(李穡)

우수(迂?)가 소년 시절부터 시부(詩賦)를 잘하여 장옥(場屋 고시장) 사이에 출입하매, 같이 나간 사람들이 모두 능수로 추중하였으나 매양 합격하지 못하였다. 뒤에 책문(策問)으로 장옥에서 대결하여, 그 능난함이 전과 같으면서도 더 교묘하였는데도 주관하는 자가 역시 번번이 버리고 취하지 않으니, 그 합격함을 얻은 자라고 해서 어찌 다 우수보다 능했으랴. 참으로 그 운명임을 알겠도다. 이미 굴하고는 물러나 학문을 강론하고, 그 사는 집을 이름하여 중순(中順)이라 하니, 배우는 선비들이 날로 증가하고 그의 지도를 받아 작문하던 사람들이 왕왕 우수한 성적으로 합격하여 좋은 벼슬자리를 취하였다. 여기에서 우수도 또한 스스로 그 운명임을 알고 곧 우(迂)라고 스스로 이름하였고, 사람들도 역시 우라고 지목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그 수삼 년의 오활한 것이 도리어 하루아침에 영광스럽고 우대하는 까닭이 될줄이야 뉘 알았으리요. 지금 〈우수전〉을 보니, 임금이 고시에 응하는 자가 글을 잘 못지어 먹물을 마시는 벌을 받고, 답안을 백지로 제출하였던 일에 대해 하문하였는데, 우수가 인하여 말을 아뢰어 임금이 수긍하였다. 또 널리 다른 말을 인용하여 그 온축하였던 바를 다 기울여 말하고, 이에 이르러 시를 지어 붓대를 잡자 즉시 이루어 놓으니, 마치 신의 도움이 있는 것과도 같았다. 즉시 3품(三品)의 옷을 하사하였다. 전일에 같이 장옥에 출입하며 우수한 성적으로 급제하여 화려한 요직에 나간 자들을 돌아보니, 모두 그 아래 질(秩)에 있게 되었는데, 더구나 우수와 같이 임금 앞에 입대하여 시를 짓게 하더라도 반드시 모두 우수의 능함과 같지는 못했을 것이다. 또 그의 바른 말은 위문정(魏文貞)과 같고, 농담 잘 하기는 동방삭(東方朔 한나라 무제(武帝) 때 사람으로 회해와 별설을 잘하였고, 문장에 능하였으며, 3천갑자를 살았다 한다.)과 같았으며, 학식이 널리 통달하기는 장무선(張茂先) 과 같아서 그의 재능이 문장의 말기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었다 하니, 누가 우수를 오활하다 이르리요. 우수는 진실로 오활하지 않은 사람이다. 담암(淡菴) 백(白) 선생이 사행(事行)의 시말에 대한 전기를 지어 상세히 전하였다. 나는 다만 우수가 오활한 것으로 지우(知遇)를 입어 마침내는 오활하지 않았다는 것을 취하여 전기 뒤에 기록하여 돌려 보낸다.


[주D-001]답안을 백지로 제출하였던 일 : 고려의 송천봉(宋天逢)이 시관이 되어 선비를 뽑았는데, 왕이 가장 나이어린 다섯 사람을 불러 모란시를 짓게 하였다. 그러자 대부분 제대로 짓지 못하였고 한 사람은 백지를 제출하였으므로 왕이 노하여 그 방을 거두어 들였다. 《고려사》송천봉(宋天逢)전
[주D-002]위문정(魏文貞) : 당나라의 태종(太宗) 때에 바른말 잘 하기로 유명한 위징(魏徵)이란 그의 시호가 문정공(文貞公)이다.
[주D-003]장무선(張茂先) : 서진(西晉) 때의 정치가인 장화(張華). 그의 자가 무선인데, 그에게는 《박물지(博物誌)》라는 저술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