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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跋) 서 상찰보 정설암 대자 권후(書上札補正雪菴大字卷後) -이색(李穡) -

천하한량 2007. 5. 1. 02:25

발(跋)
 
 
서 상찰보 정설암 대자 권후(書上札補正雪菴大字卷後)
 

이색(李穡)

원(元)나라가 일어난 지 백여 년에, 문치가 크게 화하여 사방의 학사들이 다 그의 재능을 정숙하게 다하니, 찬란하게도 일대의 성세를 이루었다. 그렇기 때문에 논평하는 자는 말하기를, “그 문(文)은 한(漢) 같고, 그 시(詩)는 당(唐)과 같으며, 그 자(字)는 진(晉)과 같다.” 하였는데, 대자(大字)에 이르러서는 유독 설암(雪菴)을 높이 받들어 으뜸으로 일컬었다. 설암이 누구를 법받았는지는 알 수 없으나, 당나라 안씨(顔氏 안진경) 이래로 이에 미치는 자가 드무니, 이름을 어찌 헛되이 얻었으리요. 삼가 생각하건대 주상 전하옵께서 하늘이 낳으신 자품으로 사수(師授)하지 않으시고도 깊이 대자의 법을 얻으셨으니, 마치 대화산(大華山)이 중천에 솟은 것을 거령(巨靈 신장)이 쪼개 열었고, 버티고 선 구정(九鼎)이 사수(泗水)에 빠졌는데, 만부(萬夫)도 취할 수 없는 것 같으면, 그 침중(沈重)하고도 엄준 경직(勁直)함이 이와 같았으니, 설암으로 하여금 다시 쓴다 하더라도, 능히 독보(獨步)하겠는가. 그러나 겸양하고 빈 것같이 하여 그 아름다움을 자랑하지 않으니 거룩하고 아름답도다. 지신사(知申事) 신(臣) 흥방(興邦)이 설암이 쓴 위응물(韋應物 당나라 시인)의 시 두 수를 얻었는데, 머리의 석 자가 결(缺)하였고, 또 점과 획이 결한 것이 몇 자가 있었다. 어느날 임금이 서연(書筵)에 납시었을 때에 이를 바치니, 임금이 이르기를, “내가 설암의 글씨를 열람한 바가 많았지만, 이것은 가장 득의의 작품이다. 그 운필의 법도 있음을 너는 알겠느냐.” 하고, 이미 해서로 결한 바 화극삼(畵戟森)의 석 자를 쓰시고, 아울러 그 점획의 결한 곳을 보완하신 뒤에 내 보내시어 흥방에게 하사하시고, 또 하유하여 말씀하시기를, “설암의 대자(大字)는 세상에서 법받는 터이므로, 내 굳이 해서로 써서 양보함을 보이는 것이니, 너는 마땅히 집에 간직할지니라.” 하였다. 흥방이 물러나와 이색에게 말하기를, “내가 문필의 조그마한 기능으로 임금에게 권장과 우대를 입었고, 이제 또 친히 어찰(御札)을 내리시어 영광을 입음이 이와 같으니, 어찌 이 사실을 기록하지 않으리요. 그대는 태사(太史 국사(國史)의 편수를 맡은 관직)이므로 감히 고하노라.” 하였다. 신(臣) 이색은 말하기를, “세상에서 소위 글씨를 잘 쓴다는 자를 신은 압니다. 그러나 옷깃을 먹에 더럽히며 세월을 두고 연마하여도, 능히 설암의 경지에 이른 자는 역시 드뭅니다. 만약 제왕에 이르러서는 밖으로는 만기(萬幾 정무)의 노고가 있고, 안으로는 백체(百體)가 안일하신데, 어찌하여 능히 이에 도달하셨단 말입니까. 삼가 이 권자(卷子)를 보오니, 여섯 가지 아름다움이 갖추어져 있습니다. 임금의 덕이 겸손하시니, 겸손하면 도(道)가 빛나는 것이 그 하나요, 임금의 마음이 비어 있으면 잘 모이는 것 그 둘이요, 양보하심을 보였으니, 백성이 다투지 않을 것이 그 셋이요, 문학을 숭상하시면 백성이 감화할 줄 안 것이니, 그 넷이요, 지신사는 왕명을 출납하니, 이른바 임금의 인후와 구설(口舌)같은 것이니 대하기를 후하게 함이 당연하지 않으리요. 이것이 그 다섯이요, 글자와 획을 반드시 바르게 하고, 반드시 곧게 하며, 크고 작은 것을 한결같이 하시니, 또 전일함을 보인 것입니다. 전일함은 성(誠)이니, 지성한 연후에 만물이 있는 법이니, 크도다 정성이여, 하늘과 사람이 어찌 이 밖에 있으리요. 이것이 여섯입니다. 이 여섯 가지 아름다움이 있으니 어찌 갖추어 기록하지 않으오리까. 신 이색은 손을 머리에 대고 머리를 땅에 대어 절하고 삼가 쓰나이다.” 하였다.


[주D-001]거령(巨靈) : 옛날 신화에 나오는 신장(神將)의 이름이다. 그는 큰 도끼를 가지고 대화산(大華山)과 용문(龍門)을 찍어서 열어 놓았다고 한다.
[주D-002]구정(九鼎)이 …… 빠졌는데 : 구 정은 중국 전설에 하우(夏禹)가 중국 본토 구 주(九州)의 홍수를 뿜어 빠지게 한 뒤에 주에서 철(鐵)을 모아들여 각기 그 주(州)마다 지리 물산 등을 기록한 솥을 만들었는데, 그 중량이 천균(5만 근)이라 한다. 그 솥이 하(夏), 은(殷)을 거쳐 주(周)나라에 이르기까지 나라를 전하는 상징으로 되었었다. 그런데 주나라가 멸망할 때에 진시황이 군민(軍民) 5만 명을 동원하여 진나라 서울인 함양(咸陽)으로 끌어가는 도중에 사수(泗水)에서 솥 하나가 물에 떨어졌다. 그것을 건지려고 물속에 들어가 보니, 신룡(神龍)이 막아서 건질 수 없었고 이내 여덟개 밖에 없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