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 선생(河先生)의 묘갈명(墓碣銘)
선생은 휘가 위지(緯地)이고 자가 천장(天章)이다. 하씨는 진양(晉陽)을 관향으로 하였는데, 선대로부터 선산(善山)에 와서 거주하였다. 선고(先考)의 휘는 담(澹)인데 청송 군사(靑松郡事)이며 왕고(王考 조고를 가리킴) 이상은 기억하지 못한다.
선생은 영봉리(迎鳳里)에서 생장하였다. 어렸을 때에 한 작은 서재(書齋)를 마련하고 형제와 함께 거처하며 문을 닫고 책을 읽으니, 사람들이 그 얼굴을 보지 못하였다.
세종조(世宗朝) 무오년(1438,세종20)에 선생은 문과에 장원 급제하여 집현전(集賢殿)에 있으면서 항상 경악(經幄)에서 세종을 보필하였다. 문종(文宗) 때에 선생은 그대로 집현전에 있으면서 명령을 받들어 여러 유신(儒臣)들과 《역대병요(歷代兵要)》를 편찬하였다.
노산군(魯山君 단종(端宗)을 가리킴) 초년에 선생은 사헌부 집의(司憲府執義)로 있었는데 《역대병요》가 완성되었다. 세조(世祖)는 이 때 수양대군(首陽大君)으로 있으면서 《역대병요》를 편찬한 신하들에게 직책과 품계를 올려줄 것을 청하여, 선생은 중훈대부(中訓大夫)로 있다가 중직(中直)으로 승진하였다. 선생은 홀로 아뢰기를, “품계를 올려주자는 요청이 아래에서 나왔으니 이제 그 농락(籠絡)을 받을 수 없다.” 하고는 굳이 사양하기를 그만두지 않았다. 그리하여 집의에서 체직되어 직제학(直提學)이 되었으며, 마침내 병으로 온천에 목욕할 것을 청하는 글을 올리고 고향으로 내려왔다.
그 후 김종서(金宗瑞)와 황보인(皇甫仁) 등이 죽임을 당하자, 선생은 조정으로 돌아갈 뜻이 없었다. 좌사간으로 불렀으나 겨우 길에 올랐다가 병으로 부임하지 않고 인하여 글을 올려 소회를 진술하였다. 그리하여 서리를 밟으면 단단한 얼음이 이른다[履霜堅?至]는 경계와 국사를 미리 대비하여야 나라가 편안하다는 말과 내치(內治)를 엄격히 하고 권문 세가를 막아야 한다는 등의 말씀으로 은근함을 다하였으니, 바람이 간절하고 염려함이 깊었다.
을해년(1455,세조1) 세조가 선위(禪位)를 받을 적에 선생은 부름을 받고 예조 참판이 되었는데 그 뜻은 진실로 다른 데 있었다. 그리하여 하사받은 녹봉을 따로 저축해 두고 먹지 않았다. 다음 해인 병자년에 김질(金?)의 고변(告變)으로 즉시 박팽년(朴彭年), 성삼문(成三問), 이개(李塏), 유성원(柳誠源), 유응부(兪應孚) 등과 같은 날에 죽임을 당하니, 아! 이것이 선생의 처음과 끝이다.
선생의 묘소는 선산부(善山府)의 서쪽 고방산(古方山)의 언덕에 있으니, 부인 김씨와 유택(幽宅)을 함께하였다. 옛날에 작은 비갈(碑碣)이 있었는데, 지난해 왜구가 부(府)를 점거했을 때에 쓰러져 파손됨을 면치 못하였다. 이제 선생의 외 5대손인 김곤(金崑)이 옛 비갈을 다시 세우려 하였으나 옛날에 새긴 글을 잃었으므로 새 글을 얻어 비석을 세우기를 원하였다.
아! 선생의 사업은 해와 달과 같아 광채가 스스로 빛나니 그 어찌 말할 필요가 있겠는가. 천지가 알고 있으니, 또 어찌 문장으로 사람들에게 보일 것이 있겠는가. 또 심상(尋常)한 문장력으로 어찌 그 만분의 일을 발양(發揚)할 수 있겠는가. 나는 감히 짓지 못한다고 사양하자, 김군은 말하기를, “전인(前人)이 이미 비석을 세워 비석의 댓돌이 아직 남아 있으니 결코 복구하지 않을 수 없다.” 하고 마침내 여러 번 와서 그만두지 않으며 더욱 굳게 요청하였다. 그러므로 나는 비로소 감히 그 전하여 들은 바를 대략 서술하는 바이다.
선생의 아름다운 말씀과 훌륭한 행실로 세상의 가르침이 될 만한 것에 이르러서는 어찌 한두 가지일 뿐이겠는가. 그러나 집이 적몰되어 전하는 것이 없고 오직 추강(秋江) 남효온(南孝溫)의 육신전(六臣傳)만이 세상에 전한다. 여기에 선생을 일컫기를, “사람됨이 침착하고 고요하며 과묵하여 입에 버릴 말이 없었다.” 하였고, 또 이르기를, “세종이 인재를 길러 당시에 인재가 가장 많았는데 당시의 의논이 선생을 으뜸으로 추존했다.” 하였으니, 이 또한 선생을 대략 알 수 있는 것이다. 어찌 평소 수양할 때에 수립한 것이 근본이 있었기 때문에 필경에 나온 것이 마침내 이처럼 큰 절의가 있었던 것이 아니겠는가.
선생의 형 강지(綱地)는 선생보다 먼저 급제하였고 아우 기지(紀地)는 선생과 함께 동방 급제(同榜及第)하였으며 막내아우인 소지(紹地)는 생원이었다. 선생은 아들 연(漣)이 있었는데 또한 생원이었으나 함께 화를 당하였다. 이유의(李惟義)에게 시집간 딸이 있었으며 이씨의 사위는 현감 김중경(金仲卿)이니, 김곤(金崑)은 바로 그 증손이다.
김곤이 이 비석을 만들 적에 홍공 서익(洪公瑞翼)은 이 고을의 수령으로 많이 찬조하여 완성되도록 하였으며 묘를 지키는 종 약간 명을 내어 대대로 지키게 하고 또 김곤의 서자와 조카 네 명을 복호(復戶 모든 부역과 세금을 면제함)하여 향화(香火)를 맡게 하니, 윤리를 붙들어 세움에 유념함이 또한 정성스럽다. 비를 세운 것은 만력 44년(1616) 여름 4월이었다. 다음과 같이 명(銘)한다.
군자가 변에 처하는 사업이 있으니 / 君子有處變事業
이 또한 하나의 의를 성취하는 것이네 / 蓋亦成就一箇義
하고자 하는 바가 사는 것보다 심함이 있으면 / 所欲有甚於生
사는 것도 버리며 / 生可捐棄
싫어하는 바가 죽는 것보다 심함이 있으면 / 所惡有甚於死
죽는 것도 회피하지 않네 / 死不違避
몸은 도끼에 기름칠이 되었으나 / 身膏?鉞
공로가 강상에 남아 있네 / 功在綱常
넉 자의 황폐한 무덤은 / 四尺荒封
사람들로 하여금 머리털이 꼿꼿이 서고 뼛골이 시리게 하니 / 令人髮竪而骨?
이곳이 바로 선생의 의관을 보관한 곳이라오 / 是先生衣冠之藏
[주D-001]서리를 밟으면……얼음이 이른다 : 가을에 날씨가 추워지면 기온이 점점 하강하여 단단한 얼음이 얼게 된다는 뜻으로, 악이 점점 쌓여감을 의미한다. 《周易 坤卦 初六 爻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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