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지명 |
삼천리 제9권 제1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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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수 |
제9권 제1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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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년월일 |
1937-01-0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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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제목 |
著名人物 一代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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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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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형태 |
설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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丁丑新春 1, 先生의 春秋 얼마시며, 어듸서 무얼 하시면서 새해를 마젓사오며 또 新年에는 무얼 하시겠읍니까? 身老心不老의 嘆이나 其他 心境을 적어 주시압소서) 10年 前 1, 10年 前은 先生의 春秋 얼마섯는데 그 때 어듸서(京城 又는 東京) 무얼(職業) 하시면서 過歲하섰읍니까. 2, 그 해에는 朝鮮에 어떤 큰 일이 있었습니까. 20년 前 1, 그 때 선생의 춘추 얼마신데 어듸서 무얼하시며 지내섰읍니까. 2, 그 해에는 조선 사회에 어떤 큰 일이 있섰읍니까. 30年 前 1, 그 때 先生의 春秋 얼마신데 어듸서 무얼 하시며 지내섰읍니까. 2, 그 해에는 朝鮮社會에 어떤 큰 일이 있섰읍니까. 40年 前 1, 그 때 先生의 春秋 얼마신데 어듸서 무얼 하시며 지내섰읍니까. 2, 그 해에는 朝鮮社會에 어떤 큰 일이 있섰읍니까. 50年 前 1, 그 때 先生의 春秋 얼마신데 어듸서 무얼 하시며 지내섰읍니까. 2, 그 해에는 朝鮮社會에 어떤 큰 일이 있섰읍니까. 60年 前<28>
佐翁 尹致昊
丁丑新春= 新春에는 74歲가 됨니다. 이러케 나히가 만허지매 우리 社會의 高齡者 축에 한 해 두해 밀녀가는 寂寞을 늣겨지는 同時에 80平生 風浪 多하든 내 過去를 자조 回想하게 됨니다.
10년 전= 그 때 64歲 때인대 開城가서 松都高普校長으로 在職하고 있었으며 朝鮮 社會에는 東亞 朝鮮 各 新聞의 文盲打破運動이 이러나서 活氣를 띄고 있었음니다.
20년 전= 그 때 54歲엇는데 서울 있으면서 基督敎 總務로 일을 보고 있섯움니다. 月南 李商在氏도 함께 있었음니다. 世界에는 歐羅巴大戰이 方濃했고 東洋서도 靑島功衛戰이 시작되여 騷亂했음니다.
30년 전= 그 때 44歲엇는데 그 전 數年을 安島山과 더부터 平壤 大成學校長으로 있었고 松都 韓英書院일도 보았음니다. 그때의 半島政界에는 多事多端하야 人心에 衝激을 주는 여러 가지 政治的 事件이 疊出하엿고 西北學會 畿湖學會 등이 全盛했읍음니다.
40년 전= 그 때 34歲엇는데 海外 10年間의 亡命生活로써 귀국 后 議政府叅議 內閣祕書官歷, 다시 外部協辯으로 있섯고 또 元山서 元山 監理하든 때도 그 前後인가 합니다. 그러다가 高宗께서의 俄館播遷 日露의 風聞이 점점 告急했읍니다.
50년 전= 그 때 24歲 高宗께압서 親政하시든 때인데 나도 外部協辯으로 있었슴니다. 그 뒤 2年 만에 日本에 修信使를 韓國政府에서 보낼 때에 朴定陽氏를 따라 東京에 갔었오이다.
60년 전= 그 때 14歲 兪吉濬氏와 함께 修信使 魚允中의 從員이 되어 日本에 가다. 그래서 兪吉濬氏는 福澤諭吉의 慶應義塾에 나는 中村正直의 同人社에 入學修學.
70년 전= 4歲時, 忠淸道 白蓮庵에서 四書五經을 工夫, 10歲時, 漢文으로 三國誌, 水許誌를 通讀.
多山 朴榮喆
丁丑新春= 59歲가 되요. 新年에도 亦是 朝鮮商業銀行을 지키고 앉었쓸 뿐이요 다른 經營은 없소. 心境은 歲歲花相似, 年年人不同이요.
10년 전= 48歲 咸鏡北道 知事在任, 大正 15年 4月 李王殿下 薨去.
20년 전= 38歲 益山郡守在任, 朝鮮總督 寺內大將이 內閣總理大臣이 되고 長谷川大將이 總督任命되고 李王殿下가 東上參內하시다.<29>
30년 전= 28歲 陸軍參領在任, 統監府開廳 伊藤博文公 統監任命, 宮禁肅淸, 政治團體는 大韓協會 一進會, 共進會, 自强會가 있었고.
40년 전= 18歲 全州故鄕 私塾 讀書, 親露派 李範晉 등이 李太王 及 王世子를 俄國公使舘에 播遷하시게 하고 總理大臣 金弘集과 農大 鄭秉夏를 殺戮하고 度大 魚允中도 避亂途中 暴民에게 被殺되고 內大 兪吉濬 軍大 趙義淵 法大 張博은 日本에 亡命하였다.
島山 安昌浩
丁丑新春= 새해에 내 나이 於焉 60이외다. 平南 大寬山 산속에서 亞細亞의 하늘에 흐르는 구름 짱을 바라보면서 身病을 治療하고 있읍니다.
10년 전= 그 때 50이외다. 上海 佛租界에 있었읍니다. 54歲되는 해에, 故土의 땅을 20여년만에 처음 발버 보앗지요. 上海에서 지난 때의 心境과 그 當時 朝鮮事情은 더 말지 않기로 함니다.
20년 전= 그 때 40이외다. 米國 로샌젤스市에 根據를 두고 그 전해인가 墨西哥의 在留同胞을 차처 여러 달 遊說로 단녀왔고 그리고 42, 3세 되든 해에 上海에 있다가 比律賓과 濠洲 等地로 視察을 단녀 왔소이다.
30년 전= 그 때 30이외다. 28歲까지 平壤 大成學校 일을 보다가 李剛氏 등과 함께 北米로 건너가서 「協會」라는 團體도 만들고 新聞도 發行하는 한편 巴奈馬運河 파는 勞働에도 조곰 從事하였는대 아무튼 나의 30前後는 情熱에 타든 때외다.
40년 전= 그 때 20이외다. 18, 9歲때 상투 튼 이 몸이 獨立協會요 大X協會요 하는 政治團體를 조차다니며 서울과 平壤에서 演壇에 같금 올나섯고 더구나 그 때 平壤 浮碧樓에서 여러번 演說하다가 感이 極하야 울든 생각이 지금도 이저지지 않읍니다.
50년 전= 그 때 열살이외다. 舍伯으로 더부러 平壤 綾羅島까에 있는 조고마한 섬 속에서 農事짓고 있는 한편, 四書五經을 읽고 있었소이다.
權東鎭
丁丑新春= 77歲외다. 天道敎 大宗司長의 職任을 맛고 있읍니다. 世事에 대해선 차라리 沈黙을 지키기로 하지요.
計10년 전= 67歲때 외다. 서울 있으면서 新幹會 本部 副會長에 就任하였고 그 이듬해에는 또한 新幹會 本部 檢査委員長에 就任하여 前後 數年間 新幹運動에<30> 努力했읍니다. 그리고 그때에는 朝鮮 안에 新幹運動이 몹시 氣勢를 올리고 있었지요.
20년 전= 57歲때 외다. 그 해에는 天道敎에 있으면서 孫義庵를 모시고 敎勢擴張에 奔走했고 또 그때가 天道敎의 全盛時代었는데 그 이듬 이듬해에 入했읍니다.
30년 전= 47歲時. 舊韓國 中樞院 副贊議에 被任되였고 大韓協會 實業部長으로도 일하였지요.
40년 전= 37歲 저 有名한 閔妃事件으로 東京에 亡命하여 약 10年을 配所의 달을 처다보며 지냇소이다.
50년 전= 27歲時. 數年 前에 武科及第. 別軍職에 被任. 咸安郡守를 지나 咸鏡道 按撫中軍兼 討捕使로 있다가 다시 中樞府 內禁將으로 轉任했고 그리고 巨文島의 僉使兼守防將으로 있든 때외다.
60년 전= 17歲時, 舊韓國 陸軍士官學校에 다니든 때외다. 이러케 回顧함에 波爛만튼 내 一生이 여름날 구름조각같이 片片히 지나감을 깨달어짐니다.
春園 李光洙
丁丑新春= 나이는 새해되면 46, 浮生의 일이라 어디서 무었을 하며 過歲할는지 알 수 있읍니까. 센터럭이는 것같이 生覺되나 年令에 대해서는 아무 感想도 없읍니다.
10년 전= 10年 前에는 서울에 있었는데 아마 重病으로 알코 있었던 듯 합니다. 朝鮮에 어떤 일이 낳는지 記憶에 없으나 시인한 일이 없었던 것만 確實하겠지요. 記憶이 없으니까.
20년 전= 25歲, 東京早大에서 工夫. 無情을 쓰다. 學之光編輯, 基督靑年會 理事 등.
30년 전= 16歲. 東京서 中學에 다니다. 乙巳新條約 翌年.
40년 전= 5歲. 日淸戰爭 後 2年. 平北 定州에서 내<31> 劍과 초롱을 가지고 놀고 알암 줍고 千字文, 無題詩를 읽고 外祖母 이야기 책 보아 드리고 獨立協會가 한창이었을 것임니다.
50년 前= 나의 前生의 末端, 어디 가서 태어날 것을 準備하던 때다. 옛 朝鮮이 自滅의 一路를 걸고 있었다.
60년 前= 그 때에 나는 어디서 무었울 하고 있었는지 모른다. 大院君이 한창 들날릴 때일 것이다.
海岩 金麗植
丁丑新春= 「벌서 48歲로구나」하는 歎息을 하며 職責인 校務에 奔忙히 過歲準備를 하고 있읍니다. 新年에도 職務인 學校事業을 좀 擴張하려고 애쓰게 되겠지요. 그러나 歲不與我로 한해, 두해 지내는 동안 於公於私에 이렇다 할만한 成果가 없음을 愧歎하며 何如間 人生의 責任을 다하려고 스서로 猛省과 奮勉을 다함니다.
10년 전= 38歲이였는데 약 15年間 海外에 流浪하다가 還土 후 첫 번 작업으로 京城에서 協成學校長의 任에 在하었으나 약 半年間의 職員俸給未拂과 負債過多로 不得已 閉門케 된 學校에서 基金 鳩聚와 難局打開에 腐心盡力 중에 있었읍니다. 그 때 朝鮮 內에 어떤 큰 일은 없었으나 外來 新思潮에 基한 民衆運動이 依然 繼續되여 人心은 焦燥하었읍니다.
20년 전= 28歲 이었는데 米國 아이요와州 大學에 在籍 중으로 비록 苦學生活이었으나 希望에 싸이여 모든 苦勞를 잊고 오로지 學究에 熱中하고 있었음니다. 그 해에도 朝鮮 내에는 何等 特記할만한 큰 일은 없었으나 歐洲大戰亂의 影響을 받아 物價의 高貴와 人心의 興奮은 적지 않었읍니다.
30년 전= 18歲詩인데 時代의 變還에 따라 工夫하던 漢學書籍을 等閑視케 되고 同輩들과 朝夕追逐하며 密議가 紛紛하던 것은 捨舊取新으로 修學의 方向을 轉換하려고 當時 新學修業에 最重課目이던 數學을 演習하며 京城 留學을 꾀하고 있었읍니다.<32> 그때는 乙巳協約의 成立으로 韓國의 外交權을 日本에 讓渡한 後 初次의 重大事件으로 海牙密使事件이 發生되여 光武께서 禪位와 隆熙께서 登極이 있은 다움 丁未協約이 成立되여 韓國軍隊가 解散되고 等 韓末風雲이 緊張하였읍니다.
40년 전= 8歲이였는데 漢文書齋齊에서 童蒙先習등을 學習暗誦한 餘暇에는 동모들과 같이 紙鳶이나 날리고 石戰이나 하는 것 등으로 날뛰었을 뿐임니다. 그 때는 高宗께서 皇位에 올라 朝鮮을 王國으로부터 帝國으로 昇級하는 同時에 年號도 建陽을 光武로 改稱하고 內政 外交에 問題가 複雜하였으니 이에 따라 人心의 趨向도 얼마큼 달러가지만은 철모르는 兒孩 生活로 지내였읍니다.
呂運亨
丁丑新春= 52歲외다. 新聞社가 그러케 된 채로 過歲했슴니다. 世事에 대해서는 沈黙지키지요.
10년 전= 42歲 때인데 上海에 있었읍니다. 大正 8年에 東京 갔었고 내가 45歲 되든 해에 上海 遠東運動場에서 그리되어 朝鮮에 도라왔으며 朝鮮에는 아마 그 해에 第1次共産黨事件이 있었든 줄 記憶함니다.
20년 전= 32歲 때인데 南京大學에 在學中이었으며 歐洲大戰으로 靑島에선 日獨戰役이 있어 수선수선 하엿읍니다.
30년 전= 22歲 때인데 故鄕인 京畿道 楊平農村에서 農事짓고 있었읍니다. 그리다가 江原道를 도라 서울 올너왔지요.
碧初 洪命憙
丁丑新春= 나이 50입니다. 爲天下者도 못 되는 주제에 家人의 生産作業을 몰라서 逢變입니다. 避債臺 어듸 있는가. 過歲하러 가리라. 心境을 간단하게 쓸 재주 없으니 杜子美詩나 한 句 써서 대신 할까요. 「少壯幾時奈老何. 向來哀樂何其多」
10년 전= 2, 3年동안 골치알튼 紛雜한 新聞社生活을 淸算하고 이 해에 비로소 心身安靜하게 過歲하였읍니다.<33>
20년 전= 故鄕를 등지고 멀니 放浪길을 떠나서 6, 7年間 南船北馬로 돌아다닌 끄테 이러타 할 希望이 생긴 것은 아니로되 故土로 다시 들어오랴고 맘을 먹게 되엇섯슴니다. 馬來半島에 있다가 上海에 와서 睨觀과 같이 설을 쇠고 北京에 와서 丹齋와같이 달포 지내고 奉天으로 나왔었읍니다. 睨觀 丹齋 두 분과는 이 해 작별이 곧 千古死別이 되었읍니다.
30년 전= 東京서 所謂 四疊半生活을 하였읍니다, 우리 사람 心情의 憎惡이 必要한 것임은 이 때부터 잘 알게 되었읍니다.
40년 전= 曾祖母 귀염 속에 파무처 지냇슴니다. 이 세상을 내 세상으로만 알고 지냇슴니다. 넷 꿈입니다, 꿈은 벌서 연기같이 살아젓건만 살아진 자취가 지금도 내 맘을 아프게 할 때가 있읍니다.
凰山 李鐘麟
丁丑新春= 54歲외다. 점점 六旬이 갓가워지매 除夜詩 한 首에 이 心懷를 담어 보앗읍니다. 老妻惜夜盡 稚子待朝來 相看堪一笑 歲月爲難催 또 한 首 더 記錄하지요. 빠고다 公園에 갔다가 歲暮 雪景을 보고 心懷를 記하여 보앗지요. 手把雪中枝 春光翠上眉 移時終不捨 此意有誰知
10년 전= 44歲 時 그 때 서울 있었으며 朝鮮 物産獎勵會責任者되어 그 運動에 분주했고 또 그 해에 朝鮮에는 乙丑年 水災가 있어 飢饉救濟會를 組織하여 100,000圓 以上의 큰 돈을 거두어 能聚能散하였지요. 그리고 아마 全朝鮮記者大會도 그 當節에 京城에 열니어진 줄 암니다.
20년 전= 34歲 時 天道敎에 있으면서 孫義庵을 모시고 敎會 일에 분주하였지요. 그 때가 말하자면 天道敎의 全盛時代로서 敎徒도 300萬, 돈도 약 100萬圓을 가지고 있었지요. 지금 생각나는 것은 大正 7年 일인데 世上風雲을 바라보며
孫秉熙先生 게시든 鳳凰閣樓上에서 一首詩를 지어 心懷를 記하여 보앗지요. 黃葉西風吹更急 主人無語下書樓<34>
30년 전= 24歲. 그 때 서울 成均舘 博士가 되었고 그 當時 大韓協會 會報 編輯을 내가 하였고 그리하는 한 편 吳世昌氏 社長아래 大O民報主筆로 있으면서 政論을 일삼었읍니다.
40년 전= 14歲 李卨先生을 모시고 四書五經을 배웟슴니다.
梧村 薛泰熙
丁丑新春= 나는 只今 長沙町 224番에서 服藥療病 중임니다. 새해에도 아모 經營도 없읍니다. 그저 萬念如灰함니다. 惠間諸項의 所答은 客觀的 事狀뿐이라면 其時其時의 事件을 所知대로 對答할 수 있지마는 主觀을 말하라는데는 무었을 했느니 무었을 일으컷느니 하는 일이 모다 神通치 못할 뿐 外라 엇던 점으로는 남 부끄러운 일이어서 都是 開口하고 싶지 안슴니다. 잘 諒解해 주옵소서. 日後 무슨 機會있으면 回顧談 形式으로나 한다면 몰나도 今日의 이 形式으로는 開口할 廉恥가 없읍니다.
金活蘭
丁丑新春= 나는 己亥生이니 丁丑年에는 39歲가 될 것이외다. 여전히 京城에서 梨花專門과 保育의 將來를 꿈구면서 過歲할 豫定이외다. 身不老心不老이니 무슨 恨歎이 있으리이까.
10년 전= 10年 前에는 29歲었을 것이오. 亦 梨花專門과 保育에서 勤務하였나이다.
20년 전= 20年 前에는 19歲이였고 梨花大學 卒業班學生으로 지냇나이다.
30년 전= 30年 前에는 9歲의 小學生으로 仁川永化女子普通學校에 出入하며 지냇나이다.
40년 전= 40年 前 일은 알 길조차 없나이다.
兢人 許憲
丁丑新春= 올에 52歲, 벌서 이러케 되니 歲月이 如矢란 정말 實感으로 늣겨짐니다. 世上風雲을 바라보며<35> 이 한해에는 自體의 修養에나 努力코저 합니다.
10년 전= 42歲였소이다. 그 해에는 世界文化를 볼겸 歐米各國의 司法制度를 硏究코저 世界周遊의 길에 올라 米國 픽스킬에 滯在하면서 英語工夫를 하고 있었읍니다. 그 해에 朝鮮 社會는 活潑한 움지김을 보아서 新幹會가 이려나고 全鮮的으로 民衆運動의 氣勢가 크게 떨치었읍니다.
20년 전= 32歲 때외다. 그 때에는 서울에서 辯護士로 있었는데 그 當時의 社會現象으로 말하면 敎育熱이 크게 끌어서 各處에 中學校가 생기고 先導者들은 敎育을 시켜야 한다고 높이 부르짓든 때외다.
30년 전= 22歲 때외다. 그 전 해까지 宮內部의 奎章閣 主事로 있다가 그 해부터 法部主事로 轉職하여 있었읍니다. 法部大臣은 有名한 張博氏었지요. 밤에는 英語夜學을 단겻였읍니다. 그 當時는 合倂 전으로써 日韓兩國間에 여러 가지 政治的 交涉이 있어 人心이 몹시 緊張하고 있었읍니다.
40년 전= 12歲 때외다. 서울 齋洞 官立小學校 4年級에 다니든 小學生 時節이외다. 徐載弼, 李商在, 金玉均 尹致昊氏들 靑年政客들이 모여 獨立協會를 組織하고 文化更張運動을 이르키고 잇든 때외다.
悠堂 蘇完奎
丁丑新春= 36歲! 京城에서 별노 하는 일이 없이 新春을 마지 하였소이다. 그저 特別計劃없이 희미한 희망 속에서 牛步主義로 큰 樂觀도 큰 悲觀도 없이 나가보려는 중이외다.
20년 전= 26歲 때 東京에서 法學專攻 中 世事는 記憶 없소이다.
30년 전= 16歲 때 扶安 界火島에서 田良齋 선생을 모시고 있었읍니다. 世事는 記憶 없소이다.
金昶濟
丁丑新春= 年 57, 梨花女子高等普通學校 敎員으로 新年도 그저 일을 하겠지요. 별로 所感도 없고요.<36>
10년 전= 丙子부터 10년 前에는 47歲이며, 亦是 梨花高普와 梨門專門에서 교편을 잡고 있었고 日本內地에 學事視察團長으로 갔오. 東亞日報社 新築落成이 있어 民間敎育 15년 以上 功勞者 表彰式이 있었는데 本人도 그 中의 1人이였오.
20년 전= 37歲時 永生中學校(現高普) 敎師로 있었고 집은 亦是 京城에 있기 때문에 京城서 過歲하구요. 世界大戰亂이 한참이요. 日獨戰爭 中이었는데, 本人은 그 해 여름에 처음으로 東京에서 帝國大學講習會에 다니였소.
30년 전= 27歲 쩍인대 鏡城公立普通學校長으로 있으면서 一方으로 成一學校를 助力하였소. 日露戰爭이 막 끝나고 統監政治가 시작될 때인데 民間의 敎育熱은 非常히 昻騰하였지요.
40년 전= 17歲인데 忠南 保寧 態川에서 漢文을 읽으면 儒學者님도 相從하였지요. 甲午 乙未改革黨政府가 一敗倒地한 後 舊 완고당들이 발호하는 一種 恐怖時代 混亂狀態이엇지요. 民間에는 獨立協會가 있것슴니다.
50년 전= 7歲時에 亦是 故鄕인 保寧에서 漢學書堂에 入學하야 天地玄黃을 읽엇지요. 丙戌年 怪疾이 있었지요. 그리고 政界로는 甲申政變이 있는 後 매우 뒤숭숭 하엿지요.
60년 전= (出生) 前 4年인데 有名한 丙子年 凶年이엇지요.
春谷 元世勳
丁丑新春= 나는 至今 京城 東大門外 昌信町 140의 8에서 七旬老母를 모시고 지내는데 나는 금年에 滿 50세이며 나의 안해는 學生들에게 밥 지어주고 누릉지나 어더먹고 어린 딸년에게 날마다 菓子 갑에 졸이는 中이며 나는 最近에 中央時報社에 原稿 쓰는 것으로 日課를 삼ㅅ고 그날그날을 보내고 있소. 새해에 하고 싶은 일이 덜어 있겠지만 잘 될 것같지 아니한 일을 말한들 무었하겠소. 집안살님이 구차한 가운데라도 家族에게 疾病이나 없고 和平이나 하였으면 幸인가 하겠오. 「身老心不老」란 것은 거즛말이오. 늙은 놈에 젊은 마음이 도저히 있을 수가 없는<37> 것이오. 몸이 늙으면 靑年에게 辱 먹기 좋을 만한 마음만 생기는가 하오. 엇던 때는 모든 것이 貴치 않어서 深山幽谷이나 無人絶島를 차저가서 人間社會와 絶綠된 生活을 하다가 그만 둘 생각도 나니 이것이 最近 나의 心境의 一部分인가 하오.
10년 전= 의 나는 北京에서 한편으로는 學窓에 籍을 두고 露西亞 文學도 學究하는 한편으로는 또 무슨 運動에도 奔走하다가 結局은 新義州刑務所에 들어가서 몃해 설을 지내고 刑務所에서 나온 뒤로는 아시는 분들이 보시는 바와 갓치 이 생활을 6, 7年 繼續하는 중이지요.
20년 전= 의 나는 露領 沿海州에서 亦是 一種 放浪生活이라는 그 生活을 하다가 己未年 前後하야 中露兩國의 各地로 나딴은 그 무슨 運動에 쉬지 안코 분주하였지요.
30년 전= 나는 京城에서 大東法律專門學校에서 工夫하였고 校門을 나온 뒤로 곳 나는 나의 先輩와 同志들의 뒤를 따라서 海外로 나가게 되고 海外에 나간 뒤에 무엇무엇에 從事한 것은 낫낫치 말할 수 없오.
40년 전= 나는 書堂에서 小學 通鑑 論語 등의 漢學을 工夫하다가 18세 때에 머리 깍고서 올와서 工夫하게 된 것이 내가 鄕里를 떠난 첫거름이지요.
50년 전= 서 그 以後의 나의 經歷은 나의 어머니께서나 자세히 아시는 일이니 그만둡시다, 그때그때에 朝鮮에 무슨 큰 일 있었든 것은 朝鮮 近世史에 물어보시오.
李承晩
丁丑新春= 내 나히 올에 60이외다. 이미 海外에 나돈지 30餘年에 미첫스매 멀니 太平洋 건너의 靑山白雲 속으로 감금 꿈이 흘너감니다. 故土를 떠날 때에는 靑年이더니 이제 머리 우엔 白髮을 언게 되였소이다. 過歲는 北米 로샌절스市에서 하겠오이다.
10년 전= 그때 내 나이 50, 布哇 호놀루루에서 내 兄弟들과 함께 잇섯슴니다. 그리고 그 때는 布哇에 잇는 모든 勢力을 한데 묵느라고 微力을 다하느라 하였음니다. 布哇서는 新聞도 發行했슴니다.<38>
20년 전= 그 때 내 나이 40, 數年 동안 米國 各地로 遊說하고 도라다니다가 다시 布哇에 도라와서 그 때까지 西洋 사람 손에 있든 朝鮮人 敎會를 우리 사람 손으로 올마왓섯지요. 그래서 布哇에 朝鮮人 學校와 敎會를 세웟슴니다. 그리고 世上은 歐州大戰 中이 되야 여러 가지로 모다들 緊張되어 있었지요.
30년 전= 그 때 내 나이 30. 기억이 히미하야 잘 모르겟슴니다만은 아마 米國 푸린스톤大學을 마치고 다시 하-버드大學 政治經濟科에 다니든 때인 듯 함니다. 博士學位를 엇기가 1911年이엇스니까 그 때는 日露戰爭 후이고 尹致昊氏의 101人事件 卽後인 듯. 나는 故土를 떠나 太平洋을 건너 왓든 것이외다. *年十년 전= 스무살 나든 해인데 서울서 漢城外國語學校를 다녓고 그리고 李商在, 金貞植氏 등과 함께 아마 무슨 事件으로 獄中生活을 하고 그런 뒤 基督敎靑年會에서 일 보든 때인 줄 아옵니다. 世上은 무슨 協約이 締結된다 云云하든 때지요.
心崗 李肯鍾
丁丑新春= 인체 42世가 되였슴니다. 朝鮮商工新聞社를 經營하게 된 後 日常 奔走히 지내므로 今年도 過歲는 京城서 그럭저럭 할까 합니다. 新年에는 言論界를 위하야 一層더 努力하야 볼까 합니다. 有志事不成에 歲不與我留의 歎이 日常 간절합니다.
10년 전= 에는 京城에 있어지오. 京城 鐘路圖書舘에서 일을 보면서 過歲하였읍니다. 20년 전= 2에는 내 나이 22歲! 참 조흘 때였슴니다. 法專學窓을 나와 다시 더 工夫할 作定으로 京都에 가서 이 해는 지내였슴니다. 그때는 가슴 속이 모다 希望과 雄圖로써 타고 있섰읍니다. 華麗한 꿈도 잇고 壯快한 空想도 하고 悲憤한 決心하고 있을 때였슴니다. 그리다가 그 다음해 北米로 근너가 뱌렸읍니다.
丁七星
생각건대 나는= 至今으로부터 30年 前 當時 李朝 末葉, 우연한 期會로 當時 大邱 관찰사의 진체를 구경하게 되여 그 마마의 地位를 부리워하야 그 길로 이웃 妓生집에 차저다니면서 工夫라고 시작한 것이 天才란 말까지 듯게 되자 부득이 부모님이 그 길에 내노케 되였는대 <39> 그 때 8歲였다, 남들이 日就月將한다는 내 技藝는 차츰 영문(도청) 본관 (군청) 삿도 잔체 때마다 들니게 되였다. 한번은 先生되는 妓生을 따라가서 그 신발을 직키고 구경하는 것이 그 弟子로써 늘 하는 일이라 그럴 때마다 저 애가 時調를 잘 부른단 말이 上坐에 돌게 되자 삿도는 곳 부른다. 부름을 밧고는 서슴지 않코 신을 쥔 채로 올나가 날너갈 뜻이 안즈면 모다들 대소하였다. 너 시조 한마대 불너라 하는 분부가 떠러지기 무섭게 어린 소견에도 자기가 第一 잘 한다고 생각키우는 漢高祖 모신 名將이란 역금을 붓그럼 없이 불너 만흔 층찬도 밧고 우슴도 밧었다. 그러다가 그 다음 그 다음해 순종께서 南巡時大邱라 達城에 坐하섰는데 그 때 여러 大官과 여러 妓生과 함께 나도 參拜한 일이 있었다.
10년 전= 至今으로부터 20年前 當時 一流라고 부름 밧는 京城의 妓生으로 2, 3處 名門大家의 소실노 일홈을 날였다. (異常스터운 것은 大邱에 최감사 退任時 보든 그 삿도집 며나리가 된 일도 있었다)
20년 전= 至今으로부터 10年前 卽 21歲 時 當時는 3.1運動 卽後 朝鮮 안은 수선수선하든 판이라 기푼 뜻은 모르나 鐘路 네거리에 서서 바라보는 절문 가삼은 興분에 넘치는 뜨거운 눈물을 흘니면서 그 뒤를 따라 단닌 일도 있었다. 여러 가지 活動寫眞에서 본 것과 이 때에 밧든 충동은 마츰내 玄海를 건느게 되여 거기서 語學도 배호고 西洋 갈 準備로 英語도 배호고 타이푸라이다도 배웠으나 그러는 中 차차 社會에 눈 뜨게 되에 다시 朝鮮에 건너와 大邱에 女靑을 組織하고 京城에 女性同友會를 組織하며 全鮮靑年大會代表의 한 사람으로 活動하다가 다시 東京으로 건너간 때는 25歲였는대 東京에서 女學生學興會幹事로 活動을 하는 한便 3月會의 參例하야 로자룩젠붉크女性과 社會란 팜푸렛을 發刊 全力하였고 當時는 劉英俊 朴順天 金善氏 등 女流 雄辯家들이 隱退 기분을 가질 때어서 그 뒤를 이어 그 當時 女性으로써의 演壇에 每日같이 오르며 東京地方에까지 단니면서 演說을 한 者는 女性으로써는 나 뿐이였다. 그러는 中 1週日에 몃 번 가지 못하든 技藝學校을 맛치자 서울 도라와서 여러 동모와 함께 槿友會를 創立하고 當時 組織部 責任者로 全鮮 各地 순廻 다음 出版部 責任을 兼하야 기억에 사라지지 않는 歷史的 意味를 띈 女性團體 槿友會는 그의 (나) 결정이다. 다음 槿友會 中央執行委員長으로 新幹會 幹部로 新幹會 全鮮代表大會代表委員의 한 사람 등이였다. <40>
呂運弘
丁丑新春= 은 마흔 일곱이외다. 아직 歲月이 30年은 남어 있을 터이기 焦燥한 생각을 가지지 않고 있읍니다. 새해 計劃이라야 별 것 있아오리까. 世上 形便을 좀 더 두고 보지요.
10년 전= 그 때 37歲. 上海에서 도라와서 별 일없이 그대로 서울 있었읍니다. 그 當時 蔣介石의 손으로 北伐이 完成되여 統一되었읍니다.
20년 전= 그 때 27歲. 米國 우스도大學 哲學科에 在學하였는데 歐洲大戰이 한참 들끌튼 때외다. 가치 學窓에 있든 米國大學生들이 歐羅巴戰場으로 나가는 것을 朝夕으로 보고 있었읍니다.
30년 전= 그 때 17歲. 故鄕인 京畿道 楊平農村에서 兩親 도라가신 뒤 奉祭祀하며 兄님으로 더부러 농사 짓고 있든 때이며 서울서 오는 소식에 여러 가지 政治的 變*이 생기는 줄 짐작을 했읍니다.
一星 辛泰嶽
丁丑新春= 今年 내 나이 36歲외다. 現在 京城에서 辯護士로서 法律事務를 보고 있는데 朝鮮日報社에 關係를 가진 以外에는 엇던 會社나 엇던 團體에 關係를 가진 곳이 없읍니다. 지난 해는 아모 意味 없이 보내었으니 새해인들 별 일이 있겠읍니까. 當分間 謹愼하야 自身의 修養이나 힘쓰랴고 합니다.
10년 전= 26歲 時에는 東京에 있었읍니다. 말이 留學이었으나 學窓生活보다도 다른 方面의 活動이 그 때 나의 全 生活이었읍니다. 只今 생각하야도 그 때 生活이 가장 高潔活達한 生活이던 것 갔읍니다. 現在의 生活을 죽은 生活이라고 하면 그 때 生活은 산 生活이었읍니다. 朝鮮에 三一運動이 있은 直後 全鮮 각지에 우후의 죽순같이 이러나는 청년단체 그 總合體인 朝鮮靑年聯合會가 創立되자 나는 鄭魯湜, 金喆壽 諸氏와 함께 그 中央執行委員으로 있다가 그 뒤 靑年總同盟이 생기고 思想團體로는 서울派, 火曜派, 北風派 등의 不純한 暗雲이 社會運動線上에 배회함을 보고 나는 혼자서 이를 근심하고 이에 反對하야 各 派 領袖을 만나면 小異를 버리고 大同團結하여야 한다고 語재가 없는 나로서 正言直射하다가 各派에 疑惑만 사게<41> 되어 나를 가라처 서울派는 火曜派로 火曜派는 北風派로 北風派는 다시 서울派로 誤認하던 일까지 있었읍니다. 나의 미약한 힘. 이들 派爭을 調停식힐 수 없음을 알었고 따라서 이 鮮內의 派爭에 超然함을 主旨로 하는 東京의 一月會가 나의 心情에 合致되기에 그에 加擔하였읍니다. 이것이 나의 思想團體에 加入한 첫 일이외다. 그 때 東京에는 一月會 以外에 女子團體로 三月會가 있었고 靑年團體로 在東京 朝鮮無産靑年同盟이 있었는데 나는 이 靑年同盟의 執行委員長의 責任도 가지게 되어 그 會의 機關紙로 「靑年朝鮮」을 刊行하였는데 其後 一月會 內部에서 그 一部分子가 派爭에 超然하기를 目標로 한 一月會를 몰아서 鮮內의 鬪爭團體와 抗爭하는 團體, 卽 無言의 투쟁단체로 전환식힐 음모가 있게 되어 이것이 三月會 靑年同盟의 一部에 浸潤됨을 看破하고는 이에 猛烈히 反對한데서 드듸여 東京의 所謂 「流血의 慘劇」 까지 이러나게 된 것입니다. 생각하면 그때의 나의 行動에는 遺憾된 일도 많었겠지마는 그 때의 나의 主觀으로는 그것이 가장 正當한 일이고 그러케 하여야 朝鮮의 社會運動이 正道에 바로 잡힐 것갔고 이것이 바로 잡혀야 朝鮮 사람의 眞正한 活路가 열닐 것갔했고 이 모든 생각에 一毫의 허위나 手段이 없었고 나의 內定한 생각을 그대로 確信하야 疑心함이 없었고 따라서 每事에 勇氣가 나고 熱誠이 생겻습니다. 生活全體가 양심에 비치어 참말 高潔하고 活達하였었습니다. 나는 只今도 그 때 生活을 回顧하야 「어느 때에나 다시?」 하고 고요히 次機를 計劃하고 있읍니다.
20년 전= 以前의 일은 어린 때 일이니 그만두지요.
李大偉
丁丑新春= 43歲가 되겠읍니다. 基督靑年勉勵會에서 일하면서 南滿地方을 돌아볼가 합니다. 오는 해에는 海外에나 나가서 좀 있어볼가 합니다.
10년 전= 32歲이었는대 米國 예일대학에서 工夫하고 있었읍니다. 社會主義運動이 한창 소리치던 때입니다.
20년 전= 22歲였는대 中國北平 留學하다가, 中國勞工兵 通譯官으로까지 가기로 했읍니다. 靑島問題로 하야 日獨交戰에 日本이 捷勝하야 四方에서<42> 提燈行列 하든 때입니다.
30년 전= 12歲이였는대 平北 龍川에서 小學校 工夫, 新興運動 잇서 各處에서 學校를 設立하고 洋鼓喇叭 마음대로 물고 斷髮令이 나려서 나도 父母 承諾없이 單發을 하였다가 1週間이나 남의 집에서 밥을 얻어먹다싶이 하였는걸요.
徐載弼
所丁丑新春= 지금은 米國 빌라델피아市에 있읍니다. 요지음 하는 일이라고는 여러 大學을 도라다니며 講演을 하고 있읍니다. 올에 나이는 68歲외다.
10년崙 전= 은 58歲. 米國 華盛頓에 있으면서 英文雜誌를 내고 있었읍니다. 그리고 아마 各地로 遊說하고 있든 때인가 합니다.
20년 전= 48歲. 米國서 돈을 모아 朝鮮 사람 事業에 쓰느라 하였고 또 醫學搏士의 學位를 어든 뒤인지라 醫業에도 從事한 듯 하오며 世上事情은 歐洲大戰 때이기 世上이 한참 떠들석 하였읍니다.
30년 전= 川 18歲時. 米國에 亡命하여 있을 때외다. 그때 듯기에는 梁起鐸氏 등이 만히 活躍하고 있다는 消息을 故土로 오는 風便에 듯고 있었읍니다.
40년 전= 28歲時. 朝鮮에 나가서 獨立協會를 創立하고 여러 同志로 더부러 半島의 政治 文化 各方面에 改革運動을 이르킨 때이니 가장 내 自身으로도 熱이 끌튼 때로소이다. 그때 우리들은 皇城新聞도 發行하여 民權을 鼓吹하였읍니다. 아무튼 먼 故土에 이제 내가 지내온 過去 一片을 草하는 이 글을 쓰게 되매 감개가 무량하외다, 더욱 貴誌가 11月號가 아니 왔읍니다. 곧 보내주소서.<43> <28-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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