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근현대잡지자료 |
잡지명 | 삼천리 제8권 제12호 | |||
호수 | 제8권 제12호 | |||
발행년월일 | 1936-12-01 | |||
기사제목 | 安島山과의 問答 四個條 | |||
필자 | ||||
기사형태 | 대담·좌담 | |||
島山 安昌浩 先生의 소식이 한동안 막혓섯다. 간혹 신문지의 人事消息欄을 통하야 「平壤에서 某月 某日에 서울 올너와 中央호텔에 投宿」 그러치 안으면 「入城中의 安島山 某月 某日某時 京義線特急으로 平壤로 向하야 出發」이란 단편단편의 소식이 실렷슬 뿐이요 좀더 길다하여야 胃臟病治療하기 爲하야 또는 齒痛治療하기 爲하야 그러치 안으면 咸南洪原의 新羅眞興王碑建立式에 參列로서 入城」이란 역시 3,4 행에 불과한 보도가 전해질 뿐으로 선생의 周園를 싸고도는 李光洙, 鄭仁果, 李客卨, 朱耀翰 등 諸氏와 其外 平壤, 京城의 有志 몇몇 분을 논외로 하고는 최근의 島山先生의 去就와 심경에 대하여 일반 세인들은 잘 모르고 있는 터이다. 大田刑務所에서 假出獄한 것이 昭和 10년 2월이요 그 뒤에 가출옥 기간이 만료된 지도 去年 11월인즉 그 뒤 만 6,7개월 사이에 先生은 무얼하고 게섯든가 장차는 무얼 하려고 벌느고 게시는가 또 최근의 病狀은 엇더하며 北米에 있는 令夫人과 子孫들은 도라왔는가 더구나 지금도 平安道에 게신가. 이 모든 심경과 현재를 알고 십혀 하는 이 만흘 줄 알무로 전일 서울 오신 島山先生에게 대하야 나는 아래의 네 條目을 衆人에 대신하여 질문하여 그 「말슴」을 어덧기에 이에 전하는 바이다. 京城에 移住하시렴니까 問-서울에 오서 게실 의향이 업스심니까! 서울에〈34〉 오시기를 기대하는 人士들의 심리로는 첫재 先生은 病弱하신 터이라 여러 가지 宿患을 근본적으로 치료하시자면 평양보다는 서울이 數倍 월등하게 醫療機關이 완비되어 있고 고명한 學博士도 만흐니 「病을 爲해서」 하로 급히 올너오심이 조흘 것이고 둘재로는 現在와 가치 平壤서도 4,50리 거리에 있는 산중에 게시니까 入山杜門하시는 줄 알아 세인에 조치 못한 인상과 영향을 주심니다. 朝鮮 내의 모든 사정은 서울에 안즈서야 전폭적으로 관찰할 수 있고 또 세계 온갔 문명의 電波가 가장 먼저 부드치는 곳이 朝鮮서는 「서울 以外 다른 곳이 업는 터인즉 刻刻으로 움지기는 이 全朝鮮의 사회실정과 세계대세를 看取하시기 위하야서라도 하로 급히 서울에 오시는 것이 올를 줄 암니다. 先生이 가출옥 이후 오늘날까지 10분지 8,9의 대부분의 長歲月을 平壤 及 平安道에서 보내심에 대하야 일부 극단으로 논평하는 이는 이를 「平安道 몬로-主義」에 관련시는 것이라고 비난까지 함니다. 서울 移住에 대한 先生의 생각은 엇더하심니까. 答-卽知未知의 벗과 나를 사랑해 주시는 이와 또는 오해을 가지는 이들 여러분에게 대하야 이 기회에 한말슴하지요. 나는 太田 3년 동안에 소화불량증을 어더서 출옥 후 오늘까지 위장에서 「까스」가 작고 나오고 먹는 음식이 잘 내려가지 안어서 항상 괴름이 떠나지를 안어요. 또 이(齒)도 義齒를 하여 너헛든 것이 다시 압흐기 시작하여 근본적으로 치료하고 있는 터인데 그러나 출옥 당시보다는 훨신 差効있서서 요지음은 음식먹는 것도 비교적 잘 소화되고 이도 덜압허요. 1,2년만 이대로 지낸다면 완전히 녯날의 건강을 회복할 수 있슬 것 갔치 생각되오. 그런데 의료기관이나 전문의학자가 만흔 점으로 보아서 서울 있는 것이 병에는 만히 조흘 듯하나 그러나 내 병은 날마다 병원 문을 드나들어 진찰을 안 밧아도 되는 痼疾인지라 먼 곳에 있스면서도 한두 달에 한두 번식 가끔 서울 와서 치료밧어도 무방할 줄 아는 터이요. 그래서 平安道에 살면서 각금 서울 와서 「세부란스」병원에 이르러 치료를 밧고 도라가지요. 내 병은 내가 잘 아는 터이라 日光과 깨긋한 공기와 신선한 채소 등의 영양을 필요로 하느니만치 田園에 閑寂하게 있스면서 心神을 모다 치료하고 있는 것이 좃소. 그동안 平安道에 오래 있슨 것은 元來 출옥할 때에 가출옥이니만치 형무소〈35〉 당국과 경찰 당국 말이 도중에서 지체하지 말고 原籍地로 속히 도라가라는 것이엇스니까. 작년 2월 달에 나왔슬 때에도 더 머물고 십흔 것을 겨우 서울에 하로밤을 쉬고 곳 平壤으로 내러갔다가 내 고향에 가 있섯고 그러다가 병을 위하야 절깐 가튼 조용한 곳에 가 있는 것이 좋겠다는 의사의 勸으로 마츰 平壤서 한 50리되는 大寶山 속에 趙信誠女史의 소유되는 山家가 그곳에 슞�기에 그리로 옴긴 것이엇소. 그리고 그동안 나는 귀로 듯는 것도 중요하거니와 실지로 八道山水와 인물과 朝鮮의 지방지방의 실사회를 보고 십흔 생각으로 昨冬에 全羅道 등지로 周遊하였고 금년 가을에는 또 咸鏡道와 江原道로 가보려 했든 것이 그만 건강이 허락되지 안어 아직 못 떠낫는데 明春에나 가보려고 생각하고 있는 중이요. 내 소원은 동서남북 朝鮮 삼천리를 고루고루 다 도라다녀보고 십흔 것인데 아직 平北에도 못갔소구려. 平北에는 그곳 여러 친지들이 벌서부터 한번 단녀가라고 사람도 오고 勸이 만했지만 아직 못 가섯는데 무엇보다도 내가 먼저 平北을 차저야 할 이유는 京義線 宜川에 내 恩人이 지하에 누워 게시요. 30년 전 내가 平壤과 서울로 도라다니면서 大成學校와 新民會 등 교육과 정치 일로 단일 적에 나를 물질상으로나 정신상으로나 지극히 도와주든 吳致殷氏가 지금은 고인이 되어 지하에 누워계시요. 내가 해외에 그양 도라다니고 있는 몸이라면 몰라도 故土에 도라온 이상 이 은인의 省墓를 가장 먼저하여야 할 것이되 마음은 늘 묘지를 배회하건만 이때까지 뜻을 이루지 못하였소. 갔가운 장래에 긔어히 한번 단녀오려고 생각하오. 이제 金君은 날더러 서울 오라고 하지만 내 병을 위하여는 아직 도회지보다 大寬山 속 가튼 산중이 利로우니 옴길 생각이 업소. 그야 서울 있스면 동무도 만코 온갔 소식도 잘 드를 수 있겠지만 그러나 내가 서울 올나오면 갔득이나 말 만코 是非 만흔 朝鮮社會에서 공연히 이러저러한 말만 돌게 될 터이니 차라리 지금과 가치 먼곳에 있스라」고 勸하는 親舊도 있구려. 是非라야 朝鮮同胞의 일이라든지 우리 문화운동이라든지 사회방면일에 대하야 曰可曰否함이라면 몰라도 대개는 개인에 관한 근거업는 사실을 공연히 떠들어 치켜들고 이러니저러니 말성 삼는 일부 인사가 있스니 참으로 통탄할 〈36〉일이요. 얼마전에도 中央日報에 印貞植君이 내 비평을 썼더라는데 이것을 세상사람은 「에잇, 呂運亨이와 安昌浩가 또 싸우는군」하고 이말저말 하더라구요. 나는 진실로 바라거니와 우리 조선사람의 누구든지 모다 公事에 대하여는 어디까지든지 엄숙하고 熱烈하게 是非論難할 것이로되 개인감정을 가지고 云爲하는 일은 삼가주기를 바라오. 若 今後에 건강상 서울 오게 된다 할지라도 서울市內는 실코 京城서 좀 떠러저 있는 시골에 있슬가고나 생각하오. 事業을 안 하시렵니까 問-先生께서 옥에서 나오신 지 벌서 一半年, 이제는 假出獄 기한도 만기 되섯는데 그동안 朝鮮社會에는 사회적으로 문화적으로 여러 가지 현상이 起伏하였건만 이에 하야 선생은 一言의 공적 비평이라거나 大小事間 社會일에 관여하시지 안엇슴니다. 언제까지나 이러케 작고 沈黙且超然狀態를 繼續하는 것은 일부 민중으로부터 오해를 밧기고 쉬운 일이고 또 민중 及 사회와의 접촉을 멀니하는 결과가 저절로 되어질 우려가 있슴니다. 그러기에 爲先 그리 큰일이 아닌 卽 전체적, 정치적이 아니면서 부분적, 문화적, 방면의 일을 통하여서라도 사회의 대중과 악수하고 접촉하는 행위을 시작하는 것이 엇더하심니까. 손쉬운 예로 先生은 半島最初期에 入門洗禮을 밧은 基督敎人이신지라 爲先 基督敎 방면에 나서심이 엇더하리까. 지금 朝鮮基督敎社會는 30만 敎衆과 수천만원이란 敎財를 가진 크나큰 집단이언만 그 地方熱 그 派爭 등으로 四分五裂하고 있서 月南 李商在氏가 통제하고 있든 녯 황금시대를 모다 想望憧憬하고 있슴니다. 큰 인물이 나서서 이때에 이 국면을 바로잡아 노치 안으면 기독교의 前途는 暗憺한 바 있다고 생각됨니다. 答-나를 사랑하여주는 선배와 知己 속에는 「지금은 아모 할 일이 업스니 安昌浩는 아모 일도 말고 가만 있거라.」 하는 이도 있고 또 「어서 네가 나서라」 하고 勸하는 이도 있는데 파인은 「나서라.」라 하는 便이구려. 그러나 아직은 기독교에 나설 생각도 업고 다른 일에 나설 생각도 업소. 그 이유는 내 스사로 판단하는 바 있는데 아즉은 그 까닭을 말하지도 안켔소.〈37〉 演說文章을 버리섯는가 答-선생은 심중에 가진 經綸과 포부를 혹은 연설로 혹은 문장으로 발표하고 십흐지 안슴니까. 문장도 문장이려니와 先生의 연설을 願一聞之하려고 熱望하는 이 만흔 터인데요. 答-나는 형무소 문전을 나올 때에 아즉은 말치 안키로 작정하였소. 하고 십흔 말은 만흐나 모다 안키로 작정한 터이요. 그러기에 그 동안 신문사와 잡지사에서 이 문제 저 문제 가지고와서 의견을 구하는 일이 만핫스나 나는 모다 거절하였섯소. 이 태도는 당분간은 이대로 직혀 나가겠소. 演說은 30년만에 朝鮮 와서 처음으로 꼭- 한 번을 한 적이 있섰소. 금년 첫여름에 黃海道를 도라 다니다가 海州에서 하였소. 그곳 교회당에서 演說 내용은 청년들에게 부즈런히 일하라고 勸하였소. 나는 그동안 湖南嶺 등 南鮮 各地를 도라다니며 山水를 구경하였는데 그 아름다움에 놀나 讚歎不已하였소. 산과 물에선 五穀과 광물이 무진장으로 나오오. 그럼에 불구하고 우리들이 가난하게 사는 것은 진실로 그때 韓未과 李朝 5백년 동안에 백성은 백성대로 놀고 안일하기만 원했고 우으로 임군도 노시엇고 정부관리도 노라서 擧世 遊怠安逸하였든 데서 온 결과였소.-하고-演說의 일편을 드러 말하자면 이런 뜻이엇지요. 그 뒤 平壤서 사회단체로부터 또 演壇에 올나서 달나고 교섭을 밧엇스나 경찰의 금지로 그만두고 말엇소. 그 뒤 연단에도 안 서기로 작정했소. 海外에는 안 가시는지요 問-世人의 주목은 先生께서 滿期되시는 날 다시 北米 등지로 가시지 안을가-하는 의심이엇는데 先生의 의향은 영원히 조선을 떠나지 안으시렴니까. 答-낸들 알 수 있소. 래일 일을 누가 안다하리오. 그러나 나가재도 나가게 될는지도 의문이고 아즉은 나갈 생각은 업소. 금년 여름에 米國 있는 내 안해와 아해들이 朝鮮으로 나오겠다고 桑港을 떠나겠다고 전보온 것을 나와서 서로 맛나보는 것은 조켔지만 여러 가지로 생각한 바 있서 더 나오지 말고 米國 있스라고 回電을 처서 中止식힌 일이 있섰소. 〈38〉 〈34-3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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