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근현대잡지자료 |
잡지명 | 삼천리 제8권 제11호 | |||
호수 | 제8권 제11호 | |||
발행년월일 | 1936-11-01 | |||
기사제목 | 三十年前의 靑年演說客들 | |||
필자 | ||||
기사형태 | 회고·수기 | |||
學徒에 말하든 젊은 李商在 兪鎭泰 月南 李商在氏, 저 세상에 간지 이미 아홉해라 세월의 빠름이 失石갓다. 이름이 이를 두고 한말인가 鍾路靑年會? 앞에서 運柩하든 光景이 아직 눈앞에 삼삼하건만 허허벌서 그 사이가 9년이란 말인가. 月南의 연설을 드른 이는 많을 것이다. 더구나 晩年에는 基督敎에 專心專力을 바치든 터이다. 禮拜堂이나 학교강당에서 후리후리 큰 키 烟烟한 눈빗을 둘려가며 熱辯을 토하기 무릇 수백 수천번이었스러니 한번 會場에 1,2백명식 잡는대도 그 수 數萬 數十萬을 헤이지 안을가. 그러나 지금부터 3,40년전인 녯날- 이땅에도 신문화운동이 일기시작하야 팔도강산에 연설객들이 몰려 다니며 激情的의 연설을 하든 때의 그 새파란 청년시대의 李商在氏 연설을 드른 이는 별로 많치 못하리라.<116> 「30年前의 演說客들」을 *憶식히는 이 자리에 자못 그때 감개을 말할 생각 豁然起를 막을 길이 없다. 생각하여 보면 벌서 34,5년 전 일이 될가. 나도 30客. 月南은 아마 40客은 되였을 떄 서울 청년회관(그때는 청년회관이 지금의 중앙예배당 자리에 목제로 지어 있었다) 너른 광장에서 「靑年學生에게 告하노라」 하는 제목으로 李商在氏 연설이 있었다. 지금은 벌서 故人이 된 동무 數三人과 어울너 나도 月南의 場外公開演說을 드르려고 예배당으로 몰려 갔였다. 마당에는 천막을 처서 日光의 瀑射를 막고 있었는데 아마 때는 秋 9월쯤 되든 듯 무더운 바람이 아직도 사람 두셋만 모여 안지면 무덥게 하였다. 里門안 큰길로 모여오는 군중의 대부분은 그 당시의 「學徒」떼가 대부분이다. 師範學校帽表 부친이 士官學校制服을 한 이 五星學校나 長安 안 各中學校의 학생들이 만히 몰려왔는데 이윽고 얼골 길고 眼光이 烟烟한 40청년 李商在氏가 元氣勃勃하게 壇에 올너 서더니 그때나 이때나 익살을 각금 연발하며 「靑年學徒諸君밖게 미들 것 없는데 酒肆靑樓도 가지 말고 熱心히 공부하여 기둥이 되여달나」하는 熱辯이였다. 그때의 연설 내용이야 었더케 기억하랴만 엇제든 壇에 나리자 학도들은 그의 주위에 몰려가서 다시 좀 더 연설을 하여 줍시사고 비는 것을 보앗다. 씨는 志慨가 80에 이르도록 조곰도 쇠함이 없었고 더구나 辨說에 이르러는 80평생 가장 큰 보배였다. 이렇한 근대식 연설을 氏가 누구에게서 修得하였는지 알 길이 없으나 내 생각에는 米國 가 있을 때 그때 만히 배운 것이 아닐가 생각된다. 壇上의 二十靑年 徐載弼 鄭仁果 30年前 徐載弼氏의 그 인물과 그 연설을 제목으로 청탁을 받고 보매 第一 먼저 생각나는 일은 지금으로부터 約 30년전 日露戰爭이 끝나든 卽後 漢城 西大門밖 모화관에 새로히 獨立門이 건립되였을 때의 일이다.<117> 바로 西大門밖 모화관에는 새로히 건립된 독립문 개통식이 있어 內外賓客 招請裡에 舊韓國政府에서는 성대한 式典이 있었든 때의 일이다. 그때 기념강연이 열니었을 때 演壇우에 오르는 20세 前後의 새파란 청년 한사람은 그곳에 모힌 수만군중들의 耳目을 놀내이게 하였으니 壇上에 올너 熱을 뿜고 血을 토하든 그 새파란 청년이 바로 이 자리에서 말하야는 徐載弼氏였다. 나는 그때에 비로서 처음 徐載弼氏를 인상 깁게 보앗섯다. 그때의 徐載弼氏는 미국 國籍에 入籍하여 있든 분으로 그 당시 여러 가지 고비를 지나 華盛頓으로부터 入京하였든 것이다. 그때 연령은 24,5세에 달하였을가 眉目이 퍽으나 수려하고 키가 후리후리 크고 콧날이 서고 眼光이 烟烟한 점 어대로 보나 滿身 都是 精氣로구나! 하고 부르지지리만치 精稈한 기상이 전신에 싸고 돌앗다. 책상을 두다리며 두발을 굴너가며 열변을 토하든 그 청년의 두 눈에서는 불꽃이 뛰는 듯 하였다. 연설하는 말소리는 그렇게 유창하지 못하야 靑山流水式은 아니나 理路整然한 누구든지 氏의 연설의 眞髓를 잘 捕捉하리만치 알기 쉬운 연설이였다. 「제스츄어」를 쓰는 연설은 아마 氏가 맨처음으로 朝鮮에 수입식힌 演說態가 아니었을는지? 그 날은 政府의 大官을 爲始하야 英, 米 등 各國 公使도 모다 4人橋를 타고 와서 式에 列席하였는데 외교정책을 論及하든 每日新聞社長 米國人裵說氏도 徐載弼氏의 後를 繼하야 一場의 연설을 하였다. 그때의 演說式은 누구든지 모다 격동적 언사뿐이였다. 徐載弼氏는 그때 駐京城各外國使臣과 또 外國人들과 友情이 두터운 양으로 각금 그네와 盃盤을 나누는 광경을 나는 볼 수 있었다. 그뒤 XX協會를 통하야 그가 민중에게 작용하려든 광경이나 金玉均, 朴泳孝氏 등으로 더부러 來往하였었으나 여긔에선 一切避하거니와 아무튼 徐載弼氏는 등장한 기간이 짤버스나 많은 인상을 後人에게 주고 간 사람 중의 한 분이다. 「XX新聞」을 그만 두고 다시 米洲로 건너간 이후 오늘까지 氏는 朝鮮을 버리고 米洲에서 閑暇로운 晩年을 보내고 있을 것이다. 내가 이 분과 相面하게 되든 때는 얼마전 米洲에 基督敎會合이 있어 건너갔었을 때의 일이다.<118> 젊은 說敎師 孫秉熙 李鍾麟 義奄 孫秉熙선생이 세상을 떠나신 날자로 말하면 壬戊年 5월 19일 夜半이었고 병으로 말하면 半身不逐病이었고 約1年有餘를 병석에서 呻吟하시다가 돌아가시였다. 선생이 칠순의 고령까지 생존해 게시는 동안 每日가치 선생의 앞에서 相促해 오다 싶이한 나로서 지금에 앉어 생전의 義奄선생을 말하라는 「三千里」의 부탁을 받고 보니 사라게실 동안 선생에게서 보고 듯고 눗겨지든 바 여러 가지 일이 끝없이 떠올너와 감개가 무량한 배 있다. 그러나 이 자리에서는 선생의 평소에 在한 활동의 에네루기인 甲午事變 甲辰風雲 등등에 통하야 있든 그의 활동시대의 風貌을 그려낼 수는 도저히 어려운 일임으로 나는 선생이 晩年에 이르러서 그 門弟와 여러 사람 앞에 던저주든 감격에 넘치는 몃마듸 말슴을 적어 생전의 선생의 풍모의 一端이나마 였보기로 하겠다. 정직히 말하면 나는 지금까지의 내 평생으로는 義奄 선생과 같은 보기 조흔 風身을 가진 이는 다시 본 적이 없다. 그 풍부한 體胴 그 풍만하고도 和氣潑剌한 얼골을 보는이 었찌 선생의 무릎 앞에 머리를 수그리지 않으랴. 그는 물론 나의 주관적 감정이 다소 첨부되여 있다하겠으나 선생의 평소의 一言一句 그 위엄있고 감명깊은 말슴은 지금도 귀???가에 울니는 듯 하다. 선생이 평소에 있어 死에 대한 관념은 별다른 견해를 가젔였다. 죽엄이라는 것은 공포로 대할 것이 아니고 초월로 대하여야 하고 굴복적으로 대할 것은 아니오 극복적 기분으로 대하여야 한다고 늘 말슴하여 왔었다. 선생은 언젠가 수십만의 교도들과 자리를 같이 하고 단상에 올너서서 우렁찬 열변을 토하실 적에 이런 말슴을 하시였다. 「...그대들은 관념으로라도 돌에 마저 죽어 보라 높은 벨양에서 떠러저보라. 큰바다에 빠저보라. 살아 있어서 종교적인 죽엄에 들어가 보라!」 이것은 물론 門弟들에게 心身의 訓練을 강청한 말슴으로 들니거니와 義奄선생의 「생」에 대한 진리의 일단을 알만한 말슴인 줄 안다.<119> 이러한 熱과 血에 넘치는 「生과 死」에 대한 태도는 선생의 일생을 통하야 가장 감명깁게 부르짓든 바이였다. 그럼으로 선생의 法說의 하나인 「死後觀」에 있어서는 생명적 활동적에 에네루기의 波傳說을 주장하였었다. 즉 사람의 생명적 활동의 에네루기 라는 것은 미래의 사람의 생명을 통하야 영구히 不滅한다는 것이라고 생각하였든 것이다. 좌우간 선생은 死하는 것 인생의 최종이라는 것을 공포와 굴복으로 대할 것이 아니라 超越과 극복으로 대하였든 것이다. 또한 선생이 세상을 떠나시기 멫즐전 도저히 회복될 가능성이 없음을 본 주위의 사람은 아주 낙망으로 지내였으나 그러나 病人인 선생 자신은 조곰도 실망의 태도가 없었으니 [그저 나는 죽지 않으니 걱정들 마러라!] 하는 말슴을 백번천번 거듭 하였었다. 가족들이나 門弟들을 보고도 「나는 죽지 안는다! 나는 죽지 안는다!」 는 말을 반복하다가 주위의 사람들이 믿지 안는 기색이 보히면 病中에도 弄談兼 우스시면서 「나는 99세는 살터이니 엇더냐?」 하고 和氣滿面한 적히 많었섯다. 死에 대한 태도가 그렇듯이 강한 어른인 故로 세상을 떠나시든 날까지도 일에 대한 생각은 조곰도 시지않었섯다. 그때로 말하면 교회가 한창 新, 舊, 兩派로 갈이기를 시작하든 때이였는데 선생은 병석에 누은 채로 혹 高弟들을 불너 친히 명령하고 또 유서와 같은 글로써 敎中에 선포하기도 하야 大小事를 물론하고 平生時와 같이 정신적 노력을 계속하였었다. 70평생 公私席을 막론하고 선생이 부르짓든 설법과 변론은 언제까지나 우리들의 가슴에 깁히깁히 백혀저 있을 줄 믿는다. 英語演說하든 李承晩 呂運弘 세계대전이 종국을 告한 뒤, 1919년 9월경의 일이였다. 당시 나는 미국 「필나텔피아」에서 여러 가지 일로 해서 퍽으나 복잡한<120> 생활을 하든 때이었는데 이때에 나는 李承晩氏와 약 1년 간을 한집에서 寢食을 함께 한 일이 있였다. 물론 그때 李承晩氏 외에도 金奎植氏 등 數三人이 함께 한집에 있으면서 매일같이 연설하러 各都市로 돌아단이든 때이였다. 나는 연설할 草稿를 써 가지고는 으레히 李承晩氏한테 뵈인 다음에야 단상으로 나아가게 되였었다. 이분은 오래동안 米國式 교육을 바더 英語에 능통할 뿐만 아니라 한 번 단상에 올으면 조리정연하고 성실한 獅子吼는 만인의 가슴을 쥐여 흔들고야 말었든 것이다. 이분의 나이가 그때에 50이 갓가웟스나 원체 미국식 교육에서 성장된 氏는 어떤 사람을 대할때나 늘 平民的 이였고 명랑한 우슴을 지워주는 것이 첫재 사람의 마음을 끄을게 되였다. 그러나 氏는 또 한편 一種威嚴있고 선배다운 위풍이 늘 그 말과 행동에 숨어 있었으나 氏를 대하는 사람으로 하여금 자연히 그의 앞에 머리를 수그리게 하였다. 氏는 맨 처음 米國에 건너와 대학에서 의과를 전공하다가 한번은 죽은 사람을 해부하고는 그만 의학을 지버치운 분이니 얼마나 인자스러운 마음이 강한 분인지를 짐작할 것이다. 그뒤에 그는 다시 문과를 전공하였다는 것이다. 甲申政變은 이르켯스나 開化黨一派의 謀事가 실패로 둘아가게 되매 急進的인 靑年政客들은 해외로 망명의 길에 오르지 안는 이면 官兵에게 체포되여 무참히 도피를 흘니게 되든 때의 일이였다. 어느 날 曉頭 새벽잠이 늦게까지 곤히 들어 있을 때인데 웬 백발노인 한분이 어데서인지 나타나드니 잠자리에 누은 李承晩氏를 잡아 일으키며 「당신의 생명이 경각에 딸였슨즉 이렇게 잠잘 때가 아닌가 하오! 얼는 자리를 거더차고 이러나 몸을 피하시오!」하는 한바듸 말을 남겨 놓고는 또한 어데로 인지 그 노인은 사라저 버리였다. 李承晩氏는 얼는 잠자리에서 소스라처 깨고 보니 꿈은 꿈이지만 하두 이상스러운 꿈이였다. 얼는 잠자리를 거더차고 맨보선 발로 뜰 아래에 내려가서 대문 밖을 내다보니 장안은 물끌트시 騷然함을 보고 氏는 자기의 생명도 위험함을 께닷고 그 길로 仁川까지 달여 내려가서 汽船을 잡어 타고 米國으로 건너갔였다. 이제 氏는 70의 고령에 이르러서 늘 고독한 생활 속에서 故士를 그리는 마음이 더 한층 늣겨진다는 것이 近者에 들여오는 소식이다. 이 분은 米國人 婦人과 膝下에 따님 두분이 있을 뿐으로 가정적으로 불행한 분이다. 이분은 나와 함깨 「필나델피아」에서 지낼 적에도 자주 조선을 그리는 마음이 간절하다고 하는 말을 늘 들었는데 이지음에 와서는 氏로서도 퍽 안탁가운 抱懷를 금치 못할 것으로 미더진다.<121> <116-12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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