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근현대잡지자료 |
잡지명 | 삼천리 제10권 제11호 | |||
호수 | 제10권 제11호 | |||
발행년월일 | 1938-11-01 | |||
기사제목 | 秋月夜故人생각 | |||
필자 | ||||
기사형태 | 회고·수기 | |||
先生去不歸-10여 년 전에 가신 李商在 尹致昊 月南 선생이 가신 지 어허 벌서 10여 년이런가. 그 때 청년 회관에서 운구하든 광경이 어제 갔겄만 어허 벌서 그 사이 십 수년이 흘넜든가. 寂寞韓山月 先生去不歸 八十風浪息 芳名與日輝 라고 나는 輓詞를 써 드렸더니, 그 동안이 벌서 10여 년이든가. 이제 月南 선생의 일을 생각함애 추연한 심회를 금할 길이 없다. 내가 선생으로 더부러 사괴기 시작하기는 辛巳年이라. 그 때 일본 정부에 修信使를 보내게 되니 朴定陽씨가 사절이 되고, 月南 선생과 나는 그 隨員이 되었다. 거기에서 우리는 甲申 개혁 운동의 주요 인재이든 洪英植씨를 만났든 것이다. 그 뒤 月南은 갑신개혁이 실패되고 또한 洪英植씨 마저 관군에게 죽으매 일시 忠南故里에 가 게시다가 丁亥年에 다시 주미 전권의 서기관이<65> 되어 米國에 가 있었고 그러기를 몇 해 하다가 다시 서울에 도라와 統衛營의 文案 노릇도 하고 혹 典園局 위원으로도 있다가 갑오경장 때에 右 부승지로 임명되었고 그 뒤 학부의 학무국장으로 게섰는데, 이 여러 해 동안을 늘 갔가히 대하며 지내왔었다. 더구나 이처지지 않은 일은 乙未年 겨을 일이다. 미국에서 도라온 신진 徐載弼씨가 協成會를 모으니, 그 때 月南 선생은 孔孟의 유학의 士요, 徐씨는 기독교 신자었으나 서로 의기 상합하야 필경 독립협회를 창설하고 서대문 밧 慕華館에 모히여 상하 협력, 신문화 운동을 이르키기 시작한 것이니, 그때 月南은 거지 반 매일이다십히 연단에 올나 警世의 소리를 전하였다. 그 뒤 기독교 세례를 受하고 이어 기독교청년회 총무로 반도 기독교 운동에 다년 헌신하엿음은 세인이 다 아는 바와 如하다. 생각건대 우리 사회의 모든 방면에 선생의 발차최 아니간 데 별로 없었으니 만년에는 기독교 일을 보시는 한편 조선체육협회장, 소년척후연맹 총재, 朝鮮日報 사장으로 게섰다. 선생이 별세함에 일세 깊은 애도의 뜻을 표했음이 어찌써 떳덧하지 않으랴. 이제 時世는 더욱 복잡 다단하매 선생을 추모하는 감회, 새삼스러히 절실함을 늣기노라. 餞春 (선생의 詩 이하 同) 於斯春己暮代謝悵由天惜別鶯啼樹含情花舞筵番風來有信一夜去無邊借問何時至再逢只隔年 所感 長夜無眠坐悠悠倍所思家書千里隔友夢一年遲窮達元非我炎火自有時秋虫何喞喞爾亦見秋悲 除夕 去年此日又今年生寄這間我自然七十二年何所得鏡中霜髮白盈顚歲新人猶舊去舊方就新惟天能再造新歲見新人 朴淵 朴淵爆布大興城到此行人喫一驚銀河直下三十尺石字分明第一名長天忽掛長天呼勢地上聞霹靂聲下有老龍藏變化而非潛毒愛偏淸 噫, 李灌鎔 博士 洪起文 一星 선생이 허무하게 세상을 떠나신 지 이제 멫 해인고. 여섰 해인가.<66> 다섰 해인가. 선생이 작고하시든 그 이듬해 생긴 선생의 외손녀가 지금 별서 다섯 살이라고 한다. 그렇게 따저서 내가 선생을 못 뵈온 것도 어느듯 여섰 해를 지내온 모양이다. 선생이 돌아가신 햇수를 내가 잘 기억지 못하다니 나는 참으로 정이 야튼 인간이다. 올 녀름에 여러 친구와 같이 광나루를 나가서 한 종일 놀다 들어오는데 선생의 산소 바로 앞을 보고 가면서도 무심하게 지나만 다녔다. 내 스스로 생각해도 나는 분명히 몰인정한 편이다. 그러나 一星 선생이 생존해 게실 때는 나는 넘어나 격정적이라고 늘 책망하시지 않했든가. 한껏 냉정한 체 하는 나에게 그런 책망을 하도 자조하시고 또 지나치게 하시기 때문에 어느 때는 얼골을 붉히고 말대답까지 한 일이 있지 않한가. 설마하니 선생이 나를 잘못 보섰을 리는 없으렀다. 6년 세파에 내라는 위인이 통으로 변해 버렸다고나 칠까. 학교 교육을 못바든 나로 하야금 오늘날 글짜나마 끄적어리게 해 주선데는 물론 우리 아버지의 심혈이 기울어저 있지만은 이외 두 분 은사의 적지 않한 공도 이즐수는 없다. 쉬운 한문책이나마 문리를 터보는 것은 爲堂 선생의 덕이요 심리학이니 철학이니 남의 말ㅅ귀라도 알아 듯는 것은 一星 선생의 수고다. 나는 지금도 그러치만 어려서는 더 한 층 괴팍하고 팩한 성질을 부리었다. 그 두 분이 모도 나를 아들같이 사랑하고 친구같이 어루많젔기에 망정이지 그러치 않했든들 그 밑에 내가 부터 있었을 리가 없었을 것이다. 사실로 보통의 스승만이 아니다. 일생에 못이즐 은사다. 一星 선생이 돌아가신 뒤에야 나는 爲堂 선생의 은혜를 비로소 깨달았다. 깨달았다고 별로 갚을 길은 없더라고 깨닷기 전에 一星 선생은 돌아가섰으니 내 한과 후회 많이 길다. 一星 선생이 喪配하신 뒤 그것은 바로 선생조차 영원히 떠나시기 멫 달 전이다. 선생이 외로워 그러섰든지 또는 부인네 말 맛다나 짤은 앞길에 마음이 키워서 그러섰든지 잠시도 나를 노치 않으섰다. 그래서 駱山 밋 선생 宅에서 공연한 이야기로 밤을 새운 것이 멫 날인지 모른다. 지금도 나에게 가장 아프게 기억되는 것은 그 임시의 초췌한 선생의 신관과 차마 나를 못 보내시든 선생의<67> 표정이다. 남의 것으로 가장 받기 어려운 것은 은혜와 정이다. 가프려야 계산도 서지 않거니와 준 이가 한 번 딴 세상으로 가는 때는 갚을 데조차 남지 않는다. 선생의 산소도 선생은 아니다. 선생의 아들딸은 더구나 선생이 아니다. 나와 선생의 깊은 인연은 6년 전 오즉 선생 한 편의 익사로 이미 끝을 막았다. 선생이 막으신 그 끝장을 가지고 내 슬때없이 한하며 내 슬때없이 후회할 뿐인 것이다. 그러나 말려야 말지 못하는 약한 사람의 마음이다. 내 일생이 앞으로 얼마나 길찌 짜를찌 그 한과 그 후회를 되푸리 하더라도 그 또한 할 수 없는 노릇이다. 부녀자처럼 잘 울지 못하고 무당처럼 넉두리를 못하는 나인지라 혹 모르는 자 - 나를 냉혈이라고 비난할 듯도 하다. 그러치만 구구한 말이나 눈물로써 다른 사람에게 나의 심회를 팔고 십지는 않다. 선생의 유고도 내가 멫 친구와 함께 그 발간을 책임고 있는 채 그럭저럭 6년을 묵색여 두고 있다. 이렇게 하다가는 영영 발간을 못하지 않겠느냐고 선생의 따님과 사위에게서 독촉을 바든 일도 없지 않다. 그들부터도 나를 무성의하게 보는지 모른다. 사실로 거트로만은 무성의하지 않다고 변명할 도리도 없다. 그러나 내가 선생께 무성의 할 리야 있는가. 내가 살아있는 한 어찌 내 손을 그 책임을 이행치 안할 것인가. 선생의 露魂은 이제 겨오 편안히 쉬고 게시다. 내 행여나 고만의 편안함조차 깨트러 드릴가. 아주 좀 더 앞날을 긔약할 뿐이다. 秋松의 靈 金明植 생각건대 저는 28세, 나는 29세의 여름이였다. 이 때의 東亞日報는 민중의 사랑을 만이 바다 사회적 지위가 磅磚한 것이었었다. 그러므로 저도 긴장하고 나도 긴장하야 날마다 일하는 자미가 있었는데<68> 뜻박게 그야말로 청천의 벽력이 떠러젔다. 無期停刊! 그리하야 저도 일이 없고 나도 일이 없게 되였다. 이 때 다른 신문들은 尼港 출병 문제로 全 지면을 채워노았다. 그리고 일반의 흥분도 수월치 아니한 것이 있었다. 그가 북으로 출발한 뒤 나도 서운 있는 것보다 시골 가 있는 것이 좋을 뜻하야 그 형을 보낸 후 수일을 지나서 하향하였다. 수 朔 후 다시 상경하야 다녀온 그 형도 맞나고 또 이곳 있는 弟도 맞났으나 저들도 말이 없고 나도 말이 없다. 저를 처음 맞나기는 동경 유학생 시대이다. 나는 그 令弟 德秀군과 동창 관계로 자조 同君의 하숙에 놀러 갓는데 어느 때인지 그곳에서 저를 맞났다. 물론 일면 如舊한 것이 서로 다르지 아니하였다. 저는 평양(?)에서 신문을 맨드러 보았는데 잘 아니되더라고 말한다. 이 때 나는 그가 그 뒤에 東亞日報를 일으킬 것은 생각할 수 없고 다못 현상만 가지고 여보 이제 조선에서 신문이 되겠소 하고 우서버렸다. 저는 이어 조선의 상공업이 너무 유치하니 그를 진흥시키지 아니하면 아니될 것을 통론한다. 靜聽하였다. 그리고 일즉 유학생이 만이 왔다 갓스나 자본 문명의 내용을 이해하고 간 자는 지금까지 1인도 없었다는 말을 저에게 비로소 듯고 點頭치 아니치 못하였다. 물론 조선인이 자본 문명에 대한 이해가 생기기는 우리들의 동경 유학생 시대로 비롯하였다. 당시는 구미 대전 관계로 정치 밋 경제 사정이 조선인으로 하야금 자본 문명의 내용을 이해케 한 것이 있었고 또 저들의 지식 정도도 그의 전 기구를 극명할 수 있을만콤 진보하였다. 그러나 이 때 오히려 이 방면의 造諧 깊은 학생은 극소수였다. 그 후 저를 자조 맞나 우리는 저와 함께 조선의 상공업 문제로 학생계의 여론을 환기하였고 또 그 효과도 우연한 것이 있어 도라오는 사람은 대개 상공업 방면으로 나갔다. 나도 도라오는 길로 장사를 시작하였다. 그러나 歐洲 대전이 끌이고 불경기가 襲來하자 다른 일도 있어 그 후 新人의 상공업은 여지었이 몰락되였다. 그런데 東京 있을 때 어느 날 저는 8왕자 製絲 공장에 조선 노동자가 많이 와 있다하니 가 보지 안켓느냐고 유인하야 동행하였는데 그들에게 대한 저의 친절한 어조와 행동은 감격치 아니할 수 없었다. 그리고 그것이 유학생계의 처음 일일넌지든 알 수 없으나 그 후 내의 생활에 어떠한 영향이 없지 아니하였다.<69> 저는 원래 몸이 약한데 과로한 영양 부족으로 병을 지어 노상 신음하고 있었다. 그럼으로 지병(폐결핵)이 때때로 악화하는데 그 까닭에 茅崎南湖院에 입원한 일이 있었다. 東京에서 500리 좀 되는 결백하고 한적한 해안이라 입원 환자에게 무슨 일이 있을가 꿈에도 생각지 못하였다. 그러나 「유유상종」이라는 말은 아마 그곳에서 진리를 발견할 수 있지 아니할는지? 어느 날 저를 병원에 찾어 갓다가 나종 저의 소식을 듯고 목먹킬 저의 류가 있게 된을 알고 여보 이게 무슨 짓이요 하고 우섯다. 그러나 그야말로 정신적인 것을 확실히 알고 안심하였다. 己未年 겨울이다. 나는 서울에서 장사에 실패하고 유랑하였는데 오래동안 소식이 막혔든 저를 어느 여관에 찾어갓다. 서로 叙懷한 뒤 저는 당국의 정책이 밖구어질 兆徵이 있는 것을 말하고 그에 응하야 국면을 타개할 필요가 있는 것을 역설하기에 한갓 心力만 허비하지 아니할가 하야 나는 시골 가서 장사할 것을 말하고 갈렸다. 그리하야 저는 그 방면으로 활동하고 나는 木浦 가서 商事 회사를 하나 맨드러 보았으나 나의 일이야말로 心力만 허비하고 저의 활동은 상당한 효과가 있었다. 그 翌年 겨울에 나는 수원에서 사람을 일어바렸는데 木浦에서 올라와서 그를 파뭇고 京城을 들렸더니 다시 저를 만나 신문 경영에 대한 대강 이약기를 듯고 같이 하게 되였다. 그리하야 신문은 그 翌年 4월부터 발행하였는데 저는 평소에 신문 경영에 대한 약간의 연구도 있었지마는 우리 사회의 우리 생활에서 처음 생기는 그와 같이 거창한 일을 무난히 조처하는 것을 보고 또 한번 경복하였다. 그리고 그 때 저도 이론을 조와하고 나도 이론을 조와하였는데 때때로 둘이서 이론이 어우러지면 시간이 가는 줄을 알지 못하였다. 그리하야 남은 이론은 흔히 舍舘에까지 도라와서 계속하는데 이런줄을 아는 社友는 舍舘에까지 쫓아와서 論戰에 참정하는 일도 있었다. 이 때 우리 두 사람은 같은 집 같은 방에 같이 있었으니 論戰을 재개할 편의도 있었고 또 쫓아와서 그에 참정하는 동무의 편의도 있었다. 그리고 저는 청년의 조직을 喚發할 필요를 역설하야 數 三 동지와 함께 먼저 京城에서 청년회를 발기하였는데 그 후 그 일에는 저의 참석이 있을 수 없게 되였거니와 사내에서 어떠한 문제로 사장과의 간에 의견이 조화되지 못한 때 저는<70> 책상을 치면서 사장에게 말 전하는 사람을 나무래고 또 어느 선배에 대한 간곡한 정서를 솔직하게 토하는 것을 보고는 모다 저에게 미칠 듯한 사랑을 주었다. 또 저는 사상 문제에 관한 연구 단체를 하나 맨드러 보자하야 가치 안저 人選해 보았는데 과연 이 때에는 우리의 아는 범위에서는 사람이 없었다. 그리하야 무례한 짓이지마는 그들도 모르게 S, R, P, K 등의 諸氏를 가지고 서로 꼬노아 보았는데 결론에 이르러 S군은 너무 로만틱하고 R군은 너무 령리하고 P군은 아즉도 風이 좀 남아있고 K군은 발서 직원 생활하고 있으니 될 수 없겠다 하야 그만두었다. 그 翌年에 이르러서 노동 共濟會와 연합청년회가 생겼다. 그러나 저는 이런 줄도 알 수가 없게 되였다. 저를 일어바린 지 발서 19년이 되였다. 고대의 蘇武는 19년 만에 도라왔다. 그러나 저는 19년이 지나도 소식이 없다. 아니 茅草는 해마다 푸린다. 그러나 저는 영원히 도라오지 아니할 것이다. 牛步, 閔泰瑗 柳光烈 故 牛步 閔泰瑗씨에 대한 인상은 한 말로 하면 점잔은 사람이다. 서양에 「젠틀맨 쉽」이 잇다면 그는 한 「젠틀맨」이요, 동양에 君子道가 있다면 그는 君子道를 배호려고 애쓰든 사람이었다. 그와 나는 같은 신문사 생활을 하는 동안에 수년의 교분이 있었다. 신문 기자로서의 그는 만날 날카로운 신경을 쓰고 「스마트」한 행동을 하며 일은바 심장으로 살려하지 아니하고 「너브」로 살려하는 敏腕 기자로는 不合한 듯 하였다. 그의 아호가 牛步라는 것도 그가 외근 당시에 모 학교의 졸업식에를 갓다가 너무 늦게 와서 편집 시간에 不及하였기 때문에 당시 편집의 주간으로 있든 모씨가 「其步가 遲遲如牛步」 라고 탄식한 데서 나왔다 한다. 필자는 영국 사람의 성격이 「슬로우, 뻣, 슈어」라는 말을 들었다. 牛步의 성격은 이 종류에 속한다고 할는지? 그러므로 신문 기자로서도 敏腕 기자라느니 보다도 교양 있는<71> 기자이였다. 牛步의 가정을 자세 모르겠으되 상당히 聞見이 있고 범절이 있는 집 가정에서 자라난 사람 같었다. 그는 다방면에 섭렵하여 그 남의 눈에 잘 띄이지 안는 隱才로써 상당한 성적을 내었다. 소설에도 붓을 대이고 만화도 그리고 사군자도 배웠다. 물론 모다 「아마츄어」정도이나 道를 전수치 안은 간으로는 상당하였다. 그가 노력하고도 여의지 못한 것은 어학, 圍碁 등이다. 어쩐일인지 그는 기억력으로 하는 학문에는 부적한 듯 하였다. 점잔은 사람 교양있는 사람 「識古誼, 善辭令, 務存大體」 등이 수양있는 선비의 특색이라 하면 牛步는 비록 완전하다고 할 수는 없으나 이것을 위하야 노력한 사람이라고는 할 수 있다. 그는 이미 옛 사람이 되었다. 그는 42세라는 壽로 夭 세상을 떠났다. 그는 폐병으로 오래 병상에 있으며 죽든 날까지 뱀장어 집을 내어 먹었다는 것은 그가 죽은 후에야 들었다. 나는 그 때 경남 지방 여행 중에 陜川서 그의 長逝를 신문지를 통하여 알고 撫然自失 하였었다. 紅樹洞 시냇물 수리를 들으며 終夜 잠들지 못하였었다. 그가 죽든 날 뼈만 남은 몸에서 눈물도 나올 수 없이 종일 울다가 최후 단장의 淚 一滴이 모으로 누은 그 얼골의 이 눈에서 저 눈으로 가로질여 흘넜다는 말을 듯고 애상에 잠기기는 그 후 귀성 후이다. 40 여세를 서양서는 「밋들 에이지」라 하야 중년으로 잡고 동양에서는 혹 幼老라고 쓴다. 幼老라도 老字가 들었으니 혹 夭가 아니라 할가. 하여간 살아 있으면 조선 문화 운동의 한 역군이 될 수 있는 인물이였는데 痛惜한 일이다. 그 온화하고 다재하고 점잔으면서 우정에 篤하든 그를 영영 이제는 차질 길이 없다. 金玉均 先生의 墓 金東煥 牙山 舊邑, 토성낭이 길게 줄버든 곳에 樂民樓란 2층 다락이 노여 있다. 예전 무슨 衙問이 섰든 자리인 듯 충청도 치고는 자랑할 만한 高樓였다. 내가 이 樂民樓를 찾기는 7, 8년 전<72> 어느 힌 눈 날니는 아츰 철이었다. 牙山灣까지 길가든 차에 金玉均 선생의 묘소가 여기 있단 말을 듯고 일부러 차에 내렷다. 樓는 바로 옛 宣化堂 앞 신작로 끝다은 데에 정면으로 노여 있어 중세기의 풍정을 그윽히 보여주었다. 그러나 다락이라 하여도 그것은 晋州의 矗石樓라거나 密陽, 嶺南樓의 比는 못되고 더구나 서울의 사대문에 비할 나위도 없지만은 북악을 끼고 慶會樓가 서 있듯 바로 뒤에 큰 산을 끼고 이 高樓가 노여있기 까닭에 훨신 더 정채가 있고 커도 보이었다. 이 다락의 인상이 오늘날까지 이처지지 안는 것은 첫재 그 이름이 좋은 점이라. 樂民이란 만백성을 안락하게 한다는 뜻이 되고, 이 城下 인민은 모다 즐거운 세월을 보내고 있단 標도 되야 그 뜻이 끝없이 마음을 끄은다. 迎月樓라거나 觀楓樓라거나 모다 花柳風月의 정취를 딸어 지은 옛 일홈이 만키는 하되 겨우 두자 박이 일홈을 가지고 對人世事를 말하야 이렇게 단적으로 잘 지은 일홈이 드물 것이다. 둘재는 金玉均 선생의 뜻이 결국은 이 두 자에 표현되어 있지 않을가. 선생뿐 아니라 동서 고금의 정치가들 꿈이 모다 이렇게 백성을 안락케 함에 있잔었을가. 성인 孔子가 世道 재상이 되었음도 일로정권을 제 손에 잡아 그 백성을 행복케 하여 보자는 데에 있었겟고 徐載弼, 朴泳孝, 金玉均 등 청년 政客이 내각을 조직하고 廟政을 좌우하려 함도 오직 민중의 행복을 위하여 그리함이 아니엇을가? 이리하야 金玉均더러 제 고향 다락 일홈을 지으라해도 樂民樓란 글자를 택하엿슬 것이리라. 이 樂民樓를 동으로 처다보는 서편 쪽 산비탈 우에 萬古의 遺恨을 품고 멀니 객사하신 金玉均선생의 유해가 누어 게시다. 나는 초립 쓴 行客이 가르치는 대로 묘소를 찾었다. 묘의 周回에는 蒼鬱한 松*이 백백히 드러섯는데 남향한 양지에 널다라케 봉분을 썼다. 봄이면 잔디도 보이련만 한갓 바람에 몰니는 싸락눈이 두어 치를 덮어, 그저 둥그러한 半月丘를 지였고 봉분 앞에 石馬 두어 대가 우득허니 서 있섯다. 먼 - 후손이 먼 - 후년에야 세워 논 石馬라 한다. 이 백설로 다진 지하에서 甲辰 정변의 주인공이오 우리의 선각자가 눈을 감고 누어게시거니 함에 이 마음마저 이러든다.<73> 그 뒤 재작년이든가, 나는 동대문 밧 朴泳孝 후작을 찾엇다. 이미 70 당년으로 노쇠하섰으나 이 老 政客에게서 나는 청년 시대의 金玉均 선생 이약기를 一夕 조용히 드렀다. 老 후작의 말에 그 당시 동지이든 金玉均은 총명하고 지략 있고 선견의 明이 있어 았가운 인재었다고 한다. 그 때나 이 때나 정권을 잡자면 병마의 權부터 잡어야 할 것을 안 개화당 영수들은 策을 고처 朴泳孝는 남한 산성에 드러가서 양병하기로 하고, 그 군사비와 정치 자금을 조달코저 金玉均은 동경에 이르러 澁澤榮一, 犬養毅 등과 追逐하였다 한다. 그러든 당년 의기는 모다 어디 가고 金玉均 선생만이 가장 불우한 최후를 마처 지곰 牙山邊土에 一杯土로 누어 게시다. 창망한 世事 - 석양 過客을 눈물짓고 도라가게 함이 엇지 이러틋 深切한가. 薄倖 詩人, 素月 岸曙 이제 素月이는 돌아가고 말었으니 여기에 이야기가 있다 하면 그것은 모다 돌아볼 길 없는 지나간 그 옛날의 추억에 지내지 않을 것이외다. 한참 젊은 몸으로 발휘할 수 있는 모든 재능을 보여줄 수가 있었거늘 그만 그대로 검은 운명의 손은 아닌 밤의 돌개바람 모양으로 우리의 기대많은 시인 金廷湜 군을 꺾어 버리고 말었으니 우리의 설음은 이곳에 있는 것이외다. 生을 조와하고 死를 시려하는 것은 누누나 다 금할 수 없는 인정이외다. 그러하거늘 하믈며 재능있는 사람이 그 재능을 발휘치 못하고 그대로 돌아갓슴에 겟읍니까. 이 우리들이 素月이의 요절을 맘 기피 안타까워하는 所以외다. 그러나 생사는 사람의 할 수 없는 운명이외다. 어떠한 힘으로든지 면할 수가 없는지라 우리는 엄정한 이 사실에 대하야 한갓 머리를 숙이고 가장 엄정하고 진실하게 자기와 모든 주위을 삺여 보는 것이외다. 그러면 나는 무엇을 생각할 것이런가, 사랑하는 기대만튼 시인이 돌아간 이 날에 나는 과연 무엇을 생각할<74> 것이런가, 나는 저 「아일랜드」의 시인 「웰렴, 벗틀러, 이예츠」와 함께 내 세상의 아름다운 모든 것은 물처럼 자최 없이 하나하나 슬어지이니. 하면서 혼자 한숨이나 쉬일 것인가. 그러치 아니하면 어스럼 저녁에 어두어지는 무덤까를 혼자 휘돌면서 설은 노래나 맘껏 불을 것인가 또는 그것도 아니라 하면 돌아오지 못할 그 옛날의 귀엽은 기억을 고요히 가슴에 안고 언제든지 쓸아린 회고의 정에 왼 세상을 잊을 것인가. 아니외다. 한 때는 그러한 심정으로 지낼 수도 있을망정, 우리는 언제든지 그러한 심정을 가질 수는 없는 것이외다. 저 무심한 세월은 혼자로서 기록을 지어 노흐며 밤낮 없이 흘너갑니다. 사람의 맘도 흘러가는 물이외다. 저 맑은 하늘을 떠도는 구름이외다. 물이요 구름인지라 이 아츰에는 이 기슭을 돌고 이 저녁에는 북녁 하늘을 헤매지 않을 수가 없고 보니 곳에 따라 때에 따라 우리의 맘은 변하는 것이외다. 이리하야 아모리 우리의 안타까워하는 심정이 깊고 간절하여도 언제까지든지 우리는 같은 그 심정을 가질 수가 없는 것이외다. 설은 일이언만은 이 또한 사람의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일이외다. 한 것 취하야 무어라고 노상 떠들든 심정도 언제 한 번은 반드시 깨는 법이외다. 깨고 나면 지내간 일은 모도 다 자최 없는 뜬구름이외다. 누구라서 밝은 月色 아래서 깊이 깊이 맺은 언약이 변치 아니하리라고 굿이 밋고 그것을 단언할 수가 있겠읍니까. 素月이의 요절을 가장 설께 흐득이는 우리의 맘도 하로 이틀 지내가는 동안에는 자기도 몰으게 니저버릴 것이외다. 素月이를 잃어버린 이날에 나의 설어하는 점은 이곳에 있는 것이외다. 사람들은 어찌하야 있지 말자든 맘이 언제든지 사랑스러운 기억을 그대로 가슴에 지니자든 맘이 언제든 한번은 무심한 세월에 딸아 그것조차 잃어버리게 되는가 - 이것이 나의 가장 설어하는 바외다. 미들 수 없는 사람의 이 맘을 참을 수 없이 설어하는지라 지금 나는 나의 지내간 맘속을 더듬어 보면서 지내간 날의 素月이를 추억하는 바외다. 지내가는 세월은 물이라. 어름어름 하다가는 그 기억조차 잃어버리기 쉽기 때문이외다. 더구나 중앙 문단에 知己가 적은 素月이외다. 비록 작품에 나타난 이 불행한 시인의 사랑스러운 자최는 있을망정 知己로외 기억이나 사람으로의 素月이의 자최는 그야말로 차자볼 길이 듬을 것이외다. 일즉이<75> 素月이가 노래한 「못이저」의 한 편을 나는 이날 와서 생각 아니할 수가 없는 일이외다. 그것은 아모리 아니 이즈랴고 하야도 결국 세월이 지내가면 이저버린다는 것이외다. 못이저 생각이 나겠지요 그런대로 한 세상 지내시구려 사노라면 이칠날 있으리다 못이저 생각이 나겠지요 그런대로 세월만 가라시구려 못이저도 더러는 이치우리다 그러나 또 한편 이르겠지요 「그리워 살뜯이 못있는데 어쩌면 생각이 떠지릿가?」 素月이 자신도 이렇게 노래했든 것이외다. 들고 나는 세월에 사람은 자기도 몰으게 하나식 하나식 기억까지 잃어버리는 것이외다. 生別도 설거든 하물며 사별이외다. 사별의 불행을 들을 때에 나는 참을 수 없는 안타가운 愛惜을 素月이에게 가지게 되니 이것은 素月이의 을픈 바 설은 심정이외다. 봄가을 없이 밤마다 돗는 달은 「예전엔 미처 몰랏서요」 이럿케 사뭇치게 그리울 줄도 「예전엔 미처 몰랏서요」 달이 암만 밝아도 처다볼 줄을 「예전엔 미처 몰랏서요」 이제금 저 달이 서름일 줄을 「예전엔 미처 몰랏서요」 이것이외다. 이 시의 작자인 素月이를 잃은 이 날에 이 시의 작자를 생각하는 나의 맘은 앗득한 옛 전 날로 도라가서 이 작자의 이 시에서 나는 안타까운 심정을 하소하게 되니, 이것도 무슨 素月이와의 뜻하지 아니한 숙연인가 보외다. 더구나 생각하면 이 시는 素月이의 열 8, 9세 전후의 작으로 이 시에 대하야 토론도 하였을 뿐 아니라, 그 때에는 하로같이 만나서 동서의 시인들의 시가에 대하야 서로 이야기하는 것으로써 일과를 삼다 싶었으니 이 시의 작자가 불행하게도 요절해 버린 이 날에 나의 심정이 어떻게 어두어지지 아니할 수가 있을 것입니까. 생각하면 모도가 지내간 꿈이외다. 그런지라 나는 나의 나날이 희미해가는 기억을 더듬으면서 素月이를 이야기하고저 하는 바이외다. 시가에 대한 이 시인의 태도라든가 그 사람이라든가 그 생활이라든가 하는 것을 하나식 하나식 적어 보고저 하거니와 이것이 살아있는 내가 불행한<76>이 시인의 요절을 설어하는 고요한 소리외다. 만일 그 사람의 人也와 취미와 사상을 사생활에서 가장 잘 알 수 있다하면 그 사람의 私信을 보는 것이 제일 가까운 길일 것이외다. 더구나 그 私信이 서로 우의를 허한 사람에게 보낸 것이라면 그 속에서 우리는 전체로의 그 사람의 人也를 넉넉이 였볼 수가 있는 것이외다. 이리하야 나는 素月이의 人也를 좀 더 나타내이기 위하야 이 불행한 시인이 내게 보낸 私信를 하나 공개하겠읍니다. 이것이 비록 素月이에게 예가 아닐지 몰으나마 필요상 어찌할 수가 없게 되였으니 지하의 시인도 용서할 것이외다. 나는 작년 나의 譯詩集 「忘憂草」를 素月이에게 한 권 보냈든 것이외다. 그것에 대한 회답이외다. 실로 나와는 서로 길이 달라지면서부터 최근 3년 동안 별로 서신 왕복조차 잣지 못하야 한 해에 하나 이태에 한 장 된 적도 없지 아니하외다. 그리고 나와 이 시인과는 어찌어찌되야 소위 사제의 分誼가 있든 것이외다. 「멫 해 만에 선생님의 手跡을 뵈오니 감개 무량하옵니다. 그 우에 보내주신 책 忘憂草는 再披閱 하올 때에 바로 있어 모시든 그 옛날이 眼前에 방불하옴을 깨닷지 못하였읍니다. 題 忘憂草는 근심을 이저버린 忘憂草입니까. 이저버리는 忘憂草입니까. 닛자하는 忘憂草입니까. 저의 생각 가터서는 이마 둘 데 없어 닛자하니 이리 불너 忘憂草라 하였으면 좋겠다 하옵니다」하였으니 이곳에서도 나는 그 때의 素月의 심정의 대강을 짐작할 수가 있었든 것이외다. 잊으랴도 잊을 수 없는 하다 많은 시름을 닞자하는 설음을 비록 이러한 이야기에서마나 나는 발견하였든 것이외다. 그의 심정에는 원망스러운 시름이 있었든 것이외다. 그러고 다시 나아가 이 불행한 시인은 자기의 신세를 이야기하였으니 「저가 龜城 와서 明年이면 10년이옵니다. 10년도 이럭저럭 짤븐 세월이 아닌 모양이옵니다. 산촌 와서 10년 있는 동안에 산천은 별로 변함이 없이 보여도 人事는 아주 글러진 듯 하옵니다. 世紀는 저를 버리고 혼자 앞서서 다라간 것 갔아옵니다. 독서도 아니하고 습작도 아니하고 사업도 아니하고 그저 다시 잡기 힘드는 돈만 좀 놓아보낸 모양이옵니다. 인제는 또 돈이 없으니 무었을 하여야 좋겠느냐 하옵니다」 이것이외다. 이 시인이 여러 가지로 일이라고 하여 보다가 모도 다 敗를 보고 무참한 현실을 쓸쓸이 들여다보든 것이외다. 나로서는 금할 수 없는 깊은 暗愁를 갖었든 것이외다.<77> 한 마되로 말하면 모든 것에 실망을 하고 스스로 자기 그림자를 돌아보면서 한탄하든 것이외다. 그러고는 다시 말을 이어요. 전 호 「三千里」에 이러한 絶句가 있었읍니다. 生也一片浮雲起, 死也一片浮雲滅, 浮雲自體本無質, 生死去如亦如是라 하였사옵니다. 저는 지금 이렇게 생각하옵니다. 초조하지 말자고 초조하지 말자고 그러하옵는데 이 글을 인용하신 그 분이 생사 운명 좌담회 좌석에서는 운명을 부정하였으니 역시 사람의 심리란 「몰으겠다」하였사옵니다. 저는 술이나 한 3, 5배 마신 후이면 말을 아니하면 말지 어쨌든 제 맘 나는 양으로 하겠다 생각이옵니다 하였으니 이곳에서 시인의 맘이 어떠한 것을 우리는 짐작할 수가 있는 것이외다. 또다시 素月이는 붓을 나리여 자기의 신세를 말하였으니 이것은 때가 중추 명월절이기 때문에 여러 가지로 회고의 정이 있었든 것이외다. 「자고 이래로 중추 명월을 일커러 왔아옵니다. 오늘 밤 창 밧게 달빛, 月色, 옛날 소설에는 여자 다리 난간에 기대어 서서 흐득흐득 울며 死의 유혹에 박덕한 신세를 구슲으게도 울든 그 달빛 그 月色 月色이 백서와 지지앓게 밝사옵니다. 오늘이 열 사흣 날 저는 한 10년 만에 선조의 무덤을 찾어 명일 고향 郭山으로 뵈오려 가려 하옵니다. 하고 나서는 다시 「志士는 悲秋라」고 저는 志士야 되겠아옵니까 만은 근일 멫 멫칠 부는 바람에 베옷을 버서 놓고 무명 것을 입고 마른 풀대 욱스러진 들까에 섰을 때에 마음이 어쩐지 먼먼 거츨은 마음이 먼 멀은 어느 시절 옛 나라에 살를하다. 지금은 넘어도 소원하여진 그 나라에 있는 것 같이 좀 설이워지옵니다」라 하였으니 비록 詩筆은 놓아버렸을망정 지내간 詩作에 열중하든 그 시절을 설게 돌아보든 것이외다. 그러고 그 뒤 서신에다 다시 시작을 하겠노라고도 하였으니 여하간 素月이의 심경은 차차 시작으로 옴겨오든 것이외다. 그러나 그 기대되든 시작을 보여주지 못하고 그대로 요절해 버렸으니 생각하면 생각할사록 한스러운 愛惜에 가슴을 뚜다리지 아니할 수 없는 일이외다. 그러고 끝으로 素月이는 「닞자하시는 선생님이 닞지 아니하시고 주신 忘憂草 책은 譯文이라든가 원작이라든가는 拙 혹 佳는 막론하옵고 孤枕에 꿈이루기 힘들 때마다 囊空에 酒朋없이 무료하올 때마다 읽겠아옵니다. 나종으로 글 한 수를 쓰겠아옵니다. 題는 次 岸曙선생 三水甲山 韻이옵니다」하고는 素月이는 맞으막으로 나에게 詩 한 首를 보냈든<78> 것이외다. 素月이도 무심이 쓴 것이요 바다 본 나도 무심이 바다 본 것이언만은 지금으로 보면 그것이 素月이의 유작이었으니 이 또한 이 편지를 볼 때마다 나로서는 개인으로의 다시없는 愛惜에 망연 자실하는 바외다. 三水甲山 내 웨 왔노. 三水甲山이 어듸메냐 오고 나니 奇險타 아하 물도 많고 산 첩첩이라 내 고향을 돌우가자 내 고향을 내 못 가네 三水甲山 멀드라 아하 蜀道之難이 예로구나 三水甲山 어듸메냐 내가 오고 내 못 가네 不歸로다 내 고향 아하 새드라면 떠가리라 님 게신 곳 내 고향을 내 못 가네 내 못 가네 오다가다 야족타 아하 三水甲山이 날 가둡네 내 고향을 가고지고 三水甲山 날 가둡네 不歸로다 내 몸이야 아하 三水甲山 못 버서난다 이날 와서 편지와 함께 노래를 공개하는 나의 맘은 실로 쏠아리외다. 그러나 이것도 하로 이툴 지내 가노라면 다 잊어버릴 때가 있을 것이니, 돌아간 薄倖의 시인에게 예는 아니나마 지금 발표치 아니하면 이것이나마 먼 후일에는 잃어버릴 것이외다. 이곳에서 생각나는 것은 素月이의 제일 초기작에 「먼 후일」이라 題한 시가 있으니, 그 亦 닞으랴니 닞을 것이 아니요, 하도 세월이 오래 지내가는 동안에 그만 자기로도 몰으게 무심히 닞었다는 것이외다. 먼 후일 당신이 찾으시면 그 때에 내 말이 「닞었노라」 당신이 속으로 나무러면 「뭇척 그리다가 닞었노라」 그래도 당신이 나무러면 「믿기지 안아서 닞었노라」 오늘도 어제도 아니 닞다 먼 후일 그 때엔 「닞었노라」 이것이 사람의 맘이외다. 아모리 아니 닞고 이 묵숨이 있는 동안에는 사랑스러운 기억을 고요이 가슴에 붓안고 언제든지 생각하자고 하나, 하늘같은 心頭에 끈치 아니하고 바람이 불고 구름이 일어나니, 어떻게 그 하눌이 언제든지<79> 같은 빛을 갖일 수가 있겠습니까. 素月이는 殉情의 사람은 아니외다. 어듸까지든지 理智가 감정보다 勝한 총명한 사람이외다. 그러고 소위 心毒한 사람의 하나였옵니다. 그러니 자연이 사물에 대하야 이해의 주판질을 닞어버릴 수가 없었든 것이외다. 달은 사정도 없는 바는 아니었거니와 이 시인의 시작을 중지하고 달리 생활의 길을 찿든 것도 그 실은 시로서는 생활을 할 수가 없다는 理智에서외다. 동경 가서 문과에 들지 아니하고 상과를 택한 것도 또한 그것의 하나외다. 그러고 아모리 감정이 쏠닌다 하더라고 理智에 빛외여 보아서 아니라는 판단을 어들 때에는 이 시인은 언제든지 고개를 흔들며 단념하든 것이외다. 강직하였옵니다. 강직하였는지라 남의 잘못을 발견할 때에는 容怒하지 아니하였옵니다. 한 마듸로 말하면 그는 어듸까지든지 모난 편이요 이편으로 저편으로 둥굴게는 있을 수 없든 사람이외다. 그리하야 그는 같은 설음에도 보드라운 설음은 갖일 수가 없고 원망스러운 설음을 갖이든 것이외다. 20세를 지낸 뒤의 그의 시작에 낱아나는 설음같은 것이 그것이외다. 이러한 사람이 있으니 그에게는 극기의 힘이 있었고 자제의 과단이 있었든 것이외다. 소위 재래식으로 말한다하면 그는 시인으로의 풍류미가 적었든 것이외다. 그러나 한창 꽃같은 그의 20세 때에는 이 한 때의 감정에 움직여진 일도 적지 아니하였으니 이것은 아직 사상이 고정되지 아니하였고 체험같은 것이 적었기 때문이외다. 돌이어 이 시인의 시작에는 한 장 감정이든 20세 전의 것이 순정으로의 포근 포근한 보드러운 시가 많었든 것이외다. 저 「님의 노래」같은 것이 그것이외다. 그리운 우리 님의 맑은 노래는 언제나 제 가슴에 저저있어요. 긴 날을 문 밧게서 서서 들어도 그리운 우리 님의 고흔 노래는 해지고 저므도록 귀에 들려요 밤들고 잠 드도록 귀에 들려요 고이도 흔들니는 노래 가락에 내 잠은 저만이나 깊이 들어요 고적한 잠자리에 홀로 누어도 내 잠은 포스근이 깊이 들어요 그러나 자다 깨면 님의 노래는 하나도 남김 없이 잃어버려요 들으면 듣는 대로 님의 노래는<80> 하나도 남김없이 닞고 말아요. 이 얼마나 보드럽고 신비로운 노래입니까. 순정을 고이고이 자아내인 시외다. 본시 素月이의 시단에 대한 움직일 수 없는 큰 공적은 그 표현 수법의 하나로의 언어외다. 그 당시로 말하면 모도 다 외국어식 언어 사용에 열중하야 조선 말다운 조선 말을 사용치 못하든 때에 素月이는 순수한 조선 말을 붙들어다가 생명 있는 그대로 자기의 詩想 표현에 사용하였든 것이외다. 아마 이 점에서는 그 때의 어떠한 시인이든지 素月이에게 훨신 믿지 못하든 것인 줄 압니다. 여하간 그 당시에 이러한 조선 말을 사용하였다는 것은 한 개의 경이가 아닐 수 없었든 것이외다. 그리고 詩稿의 수정에 대하야 여간 고심치 아니하든 것이외다. 그야말로 흭덕 써버리지 아니하고 어듸끼지든지 세심의 주의를 다하여 고첫다 지엇다. 지엇다 고첫다 하기를 여러 번 하고 하고 곱하든 것이외다. 그러고 될 수 있는 대로 음조 그것에다 새롭오 생명을 주기 위하야 가령 같은 7, 5 조라도 그것을 그대로 쓰지 아니하고 행을 이렇게도 나노고 저렇게도 찍어서 그것에다 움직일 수 없는 音調美를 주든 것이외다. 그립다 말을 할가 하니 그리워 그냥 갈가 그래도 다시 더 한번... 이것은 素月이의 「가는 길」의 두 절이거니와 이 시구가 이렇게 되기까지에는 상당한 고심이 있었으니, 시구의 수정이 다 꿀난 뒤에도 이 시구의 行別은 지금의 그것과는 자못 달나든 것이외다. 그립다 말을 할까 하니 그리워 그냥 갈까 그래도 다시 더 한번... 이렇든 7, 5 조를 素月이는 音調美를 돕기 위하야 두 절로 난호아 지금의 것과 같이 만들어 놓았으니 이 시 같은 것은 누구가 읽는다 하드래도 작자의 行別에 따라 구별해 놓은 音調美래도 읽지 아니할 수 없는 일이외다. 그는 그만치 세심의 주의를 호흡에다 관련시겨 그 음조를 생각하든 것이외다. 그러고 그 다음 두 절을 들어 놓으면 저 산에도 가마귀, 들에 가마귀 서산에는 해 진다고 저저깁니다 앞 강물 뒷 강물<81> 흐르는 물은 어서 따라 오라고 따라 가자고 흘러도 연달아 흐릅되다려. 이거니와 같은 7, 5 조의 시구라도 이렇게 行別을 달니하는 곳에 그 音調美는 사뭇 달너지는 것이외다. 지금은 몰으거니와 그 당시에 더누나 소위 新詩라는 것이 들어온 지 멧 해 아니 되였을 뿐 아니랴, 그 용어니 어조니 하는 것을 거의 돌아보지 아니하든 그 당시에 이렇게 주밀한 생각을 갖었든 시인이 멫 사람이나 되였을 것입니까. 나의 생각 같어서는 素月이를 제하고는 별로 생각도 한 시인이 없었을 뜻하외다. 그러고 이 시인이 어떻게 그 용어를 고대로 붙잡아다가 살려서 사용하였는지 지금의 우리로도 실로 欽服지 아니할 수 없는 일이외다. 만일 이 시인이 중년에 시작을 단념하지 아니혀고 그대로 나아갓드란들 우리의 시단은 좀 더 많은 유산을 바닷슬 것이어늘, 생각할사록 앗까운 일이외다. 만일 같은 시가라도 그것을 난호아 민요니 시가니 하는 형식적 구별을 할 수가 있다 하면 素月의 시가에 대한 솜씨는 민요에 있었든 것이외다. 그러나 그렇타고 素月이에게 민요 이외에 歌가 없다는 것은 아니외다. 있어도 상당히 편수가 많습니다. 그리고 좋은 作이 없는 것도 아니외다. 그러나 그것들이 민요형의 시에 비하야 닦닦스러워 理智를 거처 나온 것은 금할 수가 없는 것이 유감이외다. 들까에 떠러저 나가앉은 뫼 기슭의 넓은 바다의 물 때 뒤에 나는 지으리 나의 집을 다시금 큰길을 앞에다 두고 길로 지내 가는 그 사람들은 제각큼 떠러저서 혼자 가는 길 하이한 여울턱에 날이 점을 때 나는 문깐에 서서 기다리리 새벽새가 울며 지내는 그늘로 세상은 희게 또는 고요하게 번쩍이며 오는 아츰부터 지내 가는 길손을 눈녁여 보며 그대인가고 그대인가고 이것은 「나의 집」의 시거니와 이것을 만일 이 시인의 민요에 비겨 본다 하면 그 얼마나 순정의 빛이 적은지 손쉽게 불 수 있는 것이외다. 素月이 자신은 어떤 이유인지 몰으거니와 민요 시인과 자기 불으는 것을 그는 싫어하야 시인이면 시인이라 불너주기를 바래든 것이외다. 그러나 사실은 역시 그는 어대까지든지 민요형에 남보다 類 다른 솜씨를 보여주든 것이외다. 그것이 가장 자연스러웠읍니다.<82> 이것은 이 시인의 남겨놓은 시집 「진달내 꽃」을 들여다보면 누구나 容易하게 알 일이거니와 일즉이 「접동새」라 題하고 노래한 것을 나는 이 곳에 인용하겠읍니다. 접동 접동 누나 접동 津頭江가 남까에 살든 누나는 津頭江 압마을에 와서 웁니다 옛날 우리나라 먼 뒷쭉에 津頭江 가람까에 살든 누나는 어붓어미 식샘에 죽었습니다 누나라 불러보랴 오 불설워 싀샘에 몸이 죽은 우리 누나는 죽어서 접동새가 되였읍니다 아홉이나 남아 되는 오랍 동생은 죽어서도 못 닞어 참아 못 닞어 夜三更 남 다자는 아닌 밤중에 이 산 저 산 올마가며 슲이 웁니다 말할 것도 없이 이것은 詩材를 전설에서 갖어다가 詩作 시킨 것이외다. 이 시인의 용어에 대한 관심이 컸든 것임을 우리는 알 수가 있는 동시에 또한 같은 말을 반복하면서 音調美를 어듸까지든지 날아내인데는 실로 탄복할바 이외다. 이만한 별치 아니한 想을 갖어다가 이만큼 자연스럽게 詩化시킴에는 무엇보다도 작자의 시적 소질이 보여지지 아니할 수가 없는 일이외다. 나는 이것을 무슨 가장 좋은 작자의 하나로 인용한 것이 아니요 이 시인이 얼마나 민요에 대하야 소질이 있었든 것과 아울러 이 시인이 표현 수단으로 용어와 음조에 대하야 이떻게 유의하였든지 그것을 보이자 함이외다. 누구나 다 알다싶이 저 유명한 「진달내 꽃」이라든가 「朔州龜城」 같은 것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실로 素月의 민요에는 두고두고 애송할 만한 作이 적지 아니하외다. 이것으로써 이것을 보면 우리 시단은 분명히 높이 평가할 만한 시인 하나를 잃어버렸읍니다. 그런지라 일즉이 畏友 月灘이 여러 해 전 開闢紙에다 「무색한 시단에 素月의 시가 있다」고 하면서 이 시인의 노래를 가장 높이 평가하였든 것이외라. 그 당시로 보면 月灘의 그 말이 결코 한갓 되인 찬사가 아니든 것이외다. 그러나 이미 素月이 돌아간 이 날에는 이것도 다 지내간 옛 일이외다. 한갓 되이 자최도<83> 없어질 기억이 있을 뿐이외다. 첫날에 길동무 맞나기 쉬운가 가다가 맞나서 길동무 되지요. 이것은 薄倖한 이 시인이 노래한 「팔벼개 노래」의 첫 절이거니와 이 시를 만일 月灘이 보았드면 그 무어라고 하였을는지 생각키에 어렵지 아니한 일이외다. 이 시는 넘우도 길어서 인용하지 아니하거니와 그 想을 紅淚에서 취하야 한탄스러운 신세와 함께 短夜의 꿈을 노래한 것이외다. 素月이 몸소 이러한 체험을 갖었든지 그것은 나의 알 배가 아니거니와 여하간 그 애절한 실감은 실로 눈물겨운 것이외다. 오늘은 하로 밤 단잠의 팔벼개 내일은 想思의 거문고 벼개라. 이라든지 또는 집 뒷산 솔밭에 버섯 따든 동무야 어느 집 가문에 싀집가서 사느냐 라 한 것이라든지 한갓 되인 문자의 作亂이 아니요 전체로의 이 노래를 다 읽고 나면 그야말로 원망스러운 애절이 그윽하게 다시금 손을 가슴에 대이고 무엇을 생각케 하든 것이외다. 그러고 素月의 시에 날아나는 원망스러운 한과 孤寂은 역시 素月이 그 자신의 성격이외다. 각금 가다가 自飽라 할 만한 것이 있는 것도 또한 素月의 생활로는 어찌할 수 없는 일면이외다. 불우한 속에서 뜻을 얻지 못하였는지라 이 시인의 心毒한 성격은 원망스럽게도 그것올 단념해 버린 것이외다. 사업에는 敗를 보고 생활이 안정을 잃게 되니 그의 孤寂은 컷든 것이외다. 그러고 복 밪어 올으는 울분에 각금 素月은 총명한 理智의 판단을 잃어버렸든 것이외다. 대체로 보아서 20세 전후의 作에 좋은 것이 많았고 그 이후의 作에는 딴딴한 理智가 보이는 것은 결국 素月이 그 자신의 성격이든 것이외다. 도 그리고 조숙한 결과라고 할만도 한 것이외다. 여하간 이 시인의 짤븐 33세의 일생은 대단히 불행하였읍니다. 불행하였는지라 이 시인에게 대한 우리의 愛惜은 그곳을 몰으는 바외다. 그러고 언제든지 素月이 생사에 대하야 이야기하든 것을 생각하면 그의 요절은 緖病이 그것이라기 보다도 요절을 의미하는 무슨 전조가 아니였든가 하는 생각도 없지 아니하외다. 死生에 대하야는 素月로서 자기다운<84> 무슨 확신이 있는드시 조곰도 두려워 할 것이 아니라는 듯한 태도로 이야기하든 것을 나는 이 날 와서는 도로혀 혼자로서 이상히 생각지 아니할 수가 없는 일이외다. 이 薄倖한 시인에 대안 더듬길 될 만한 나의 추억은 상당히 많습니다. 그러나 때가 정초외다. 정초부터 돌아간 素月의 불행한 이야기를 하는 것은 자미가 없는 일이매 위선 이만한 것으로 끗을 맺고 다른 기회에 다시 적어보려 하거니와 다시금 금할 수 없는 愛惜한 생각과 함께 나는 머리 숙여 이 薄倖한 시인 金素月의 평화로운 瞑目을 고요히 비는 바외다. 그리고 이 시인이 우리에게 남겨준 작품 유산을 나는 언제든지 설은 심정으로 대한 것을 설어하는 바외다. 城北洞서 <65-85> |
'▒ 월남이상재 ▒' 카테고리의 다른 글
월남 이상재 선생의 사상과 일생 (0) | 2007.04.05 |
---|---|
월남 이상재선생 참고 자료 (0) | 2007.04.05 |
李商在 先生 十年祭 (0) | 2007.04.05 |
著名人物 一代記 (0) | 2007.04.05 |
安島山과의 問答 四個條 (0) | 2007.04.0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