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월남이상재 ▒

월남 이상재 선생의 사상과 일생

천하한량 2007. 4. 5. 18:58

교육구국사상


이상재는 미국견문 등을 통해 일찍 서구문명과 국제정세에 눈을 떴고, 열강이 한반도를 침략하는 가운데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 운동을 통한 자주독립의 길을 모색했다.

그의 인격과 사상은 기독교 신앙과 YMCA 운동을 전개하면서도 전통적인 선비의 윤리적 가치관을 그대로 견지해 유교의 전통적인 인애(仁愛)의 윤리를 본(本)으로 하고 개항 이후 서구물질문명의 수용을 용(用)으로 하는 동도서기적(東道西器的)인 논리의 틀 속에 머물렀다.

1920년대 민족운동에 나타난 좌·우익 대립과 사상적 대결 속에서도 동양의 정신과 문화를 기본으로 삼아야 한다는 양무론적(洋務論的) 논리를 유지했다. 1910년 이후 나라를 살리기 위해서는 신앙운동과 교육운동이 일치하는 근본적인 접근이 필요하고 그것은 YMCA 말고는 다른 길이 없다는 생각으로 청년회 일에 몰두했다.

YMCA의 기능은 청년회가 스스로의 교육을 기본으로 하는 청년·종교·사회운동체로서 자체사업을 해나가는 것이고, 청년회가 촉매공동체가 되어 언론·교육·사회·종교의 각 영역에 필요한 기초조직을 만드는 조직이 되어야 한다고 역설했다.

그는 항일의 방법으로 실력양성을 택하고, 이를 토대로 민족의 자주독립과 주체적 역량을 기르겠다는 의지를 가지고 있었다. 청년을 교육시켜 민족의 미래를 짊어질 청년을 만들기 위해 모든 기성세대가 청년을 뒷받침해야 한다고 호소하고 모든 기성세대가 노인의 노인으로 있지 말고 노년의 청년이 되어 진취적인 자세로 모든 정열을 쏟아 하루빨리 일제의 속박에서 벗어나 자주민족국가를 만들어야 한다고 보았다.

각 개인의 마음이 변하고 혁신되면 사회적 혁신이 가능해지며, 따라서 사회교육을 통하여 각자 마음의 혁신을 일으켜 제도적 개선을 추구하자는 것을 강조했다.

그리고 우리는 전통적으로 체(體)보다 덕(德)을 기르는 것을 중요시했고 지(智)도 그다지 중요시하지 않아왔으나, 민족의 수난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우선 지를 기름이 필수적이라며 농공상·의학·화학·천문학 및 제반 기술학 등을 길러야 학술을 발달시킬 수 있고, 학술이 발달해야 민족이 생활하는 데 필요한 지혜가 가능하게 된다고 보았다.

그가 생각한 교육은 단지 인간을 만드는 교육이 아니라 인간을 만들면서 사회를 재형성하는 것으로서, YMCA 회원뿐만 아니라 1910년부터 담배공장 직공과 상점 사환들을 대상으로 노동야학을 시작하는 등 사회교육적 성격을 띤 것이었다.

 

 

 

李商在

1850. 10. 26 충남 서천~1927. 3. 29.

정치가·민권운동가·청년운동가.

본관은 한산(韓山). 자는 계호(季皓), 호는 월남(月南).

생애

아버지는 희택(羲宅)이며, 어머니는 밀양박씨(密陽朴氏)이다. 어려서 한학을 공부하고 1867년(고종 4) 과거에 응시했으나 떨어졌다.

서울에서 박정양(朴定陽)을 만나 문객(門客)으로 있으면서 나라의 움직임과 세계대세, 제국주의 세력이 우리나라로 밀려들고 있음을 인식하게 되었다.

1881년 박정양이 신사유람단의 조사(朝士)로 일본을 시찰하게 되자 수원(隨員)으로 따라갔다. 이때 홍영식(洪英植)과 친교를 맺고, 1884년 홍영식이 우정국(郵政局) 총판(總辦)이 되자 인천에 파견되어 통신사무를 맡았다.

그해 12월 갑신정변이 실패로 돌아가자 그도 연루자로 몰렸으나 수색 책임자인 한규설(韓圭卨)을 만나 떳떳이 처신하고 고향으로 내려감으로써 처벌을 면했다.

1887년 박정양이 초대 주미공사로 갈 때 공사관 서기생(1등서기관)으로 동행했다. 워싱턴에서 청나라 공사가 국서(國書)의 봉정을 직접 하려 하자, 청나라 공사관 서기관과 담판하여 박정양이 단독으로 봉정하게 했다.

청의 압력으로 귀국한 뒤 관직에서 물러났으나 주한외교관들의 친목단체인 정동구락부(貞洞俱樂部)의 일원으로 활동했다. 1894년 갑오개혁으로 개화정책의 실천을 위해 군국기무처가 설치되고 박정양이 내무독판이 되자 승정원 우부승지 겸 경연참찬에 임명되었다.

다시 박정양이 학부대신이 되자 학부아문참의로 학무국장을 겸하여 신교육령을 반포하고, 사범학교·중학교·소학교·외국어학교를 설립했다.

이때 일본공사 이노우에[井上馨]가 외국어학교 교사는 일본인만을 고용하라고 강요했으나 단호히 거절했으며, 외국어학교 교장으로 청년들을 지도했다.

1896년 2월 아관파천으로 친일정권이 무너지자 내각총서(內閣總書)가 되었다. 그해 7월 의정부 총무국장으로 있으면서 독립협회 위원이 되었다. 1898년 2월 러시아인 교련관과 탁지부고문의 철수를 주장하는 상소문을 작성했으며, 5월 17일 서재필(徐載弼)이 미국으로 돌아간 후 윤치호(尹致昊)와 함께 독립협회를 주도했다.

그해 10월 28일 독립협회 부회장으로 관민공동회(官民共同會)를 개최하여 전제군주권을 제한하고 내각책임 행정을 실시해야 한다는 헌의6조(獻議六條)를 결의하여 고종에게 건의하자 30일 고종이 이를 수락한 후 중추원을 개정하여 중추원 관제를 발표했으나, 조병식(趙秉式)·유기환(兪箕煥) 등의 반격으로 11월 4일 독립협회 해산령이 내리고 정교(鄭喬)·남궁억(南宮檍) 등 16명과 함께 구속되었다.

독립협회가 만민공동회를 열어 시위항의를 함으로써 11월 10일 태(笞) 40대를 맞고 풀려났다. 이후 만민공동회를 지도하여 헌의6조의 실시를 요구하면서 황국협회에 맞섰으나 12월 25일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가 강제 해산당하자, 이듬해 1월 관직에서 쫓겨났다.

1902년 6월 정부의 무능을 규탄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국체개혁의 음모를 꾸몄다는 죄목으로 아들 승인(承仁)과 함께 체포되어 심한 고문을 당했다.

옥중에서 기독교를 접하게 되어 1903년 기독교도가 되었다.

1904년 러일전쟁이 일어나자 국사범들의 석방과 함께 풀려났다.

연동교회에 입교하고 황성 기독교청년회(YMCA)에 가입했다.

1905년 을사조약이 강제 체결된 뒤 고종의 부탁으로 의정부참찬이 되었으며, YMCA 교육부위원장이 되었다.

1907년 6월 만국평회회의 밀사 파견준비를 위하여 한규설과 이상설(李相卨)의 집을 왕래하던 중 통감부에 의해 구속되었으나 증거불충분으로 2개월 뒤 풀려났다.

헤이그 밀사사건으로 고종이 강제 퇴위당하자 일본의 만행을 규탄하는 민중시위를 전개했다.

1908년 황성 YMCA 종교부 총무가 되었다. 1910년 전국기독학생회 하령회를 조직하여 새로운 학생운동을 일으켰다.

1913년 105인사건으로 YMCA 총무 질렛트가 국외추방을 당하자 총무에 취임하여 총독부의 매수공작과 유신회 등 YMCA를 일제에 예속시키려는 계획을 저지했다.

이후 조선중앙 YMCA를 비롯하여 재일조선 YMCA, 경신·배재·전주·신흥·광주·숭일 등 10개 YMCA를 규합하여 조선기독교청년회연합회를 조직하고 명예총무로서 청년들에게 민족정신을 고취했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배후인물로 활약하다가 검거되어 3개월간 옥고를 치렀다. 1920년 조선기독교청년회연합회 회장, 조선중앙기독교청년회 고문으로 추대되었다.

그해 6월 최규동(崔奎東)·김병로(金炳魯) 등과 함께 한국인의 민족적인 자각을 촉구하고, 교육을 통해서 착실한 민족적인 역량을 배양함으로써 장차의 국권회복을 목적으로 하는 조선교육협회를 창립하고 회장이 되었다.

1922년 3월 민립대학기성회를 발기하여 중앙집행위원에 선임되었다. 베이징[北京]에서 열린 세계학생기독교청년연맹대회(WSCF)에 신흥우(申興雨)·이대위(李大偉)·김활란(金活蘭) 등 YMCA 대표단을 이끌고 참석하여 일본 YMCA 대표단과 담판하여 한국YMCA가 단독으로 세계 YMCA 연맹에 가입할 수 있는 길을 터놓았다.

임시정부 요인들이 귀국하지 말고 상하이[上海]로 가 임시정부의 수반이 되어줄 것을 요청했으나 국내에 있는 동포들과 청년들을 위하여 민족과 함께 고난을 겪어야 한다는 뜻에서 해외망명을 거절했다.

귀국 후 김활란·김필례(金弼禮) 등이 대한여자기독교청년회연합회(YWCA)를 만드는 것을 후원했다. 1924년 연합 소년척후단(少年斥候團)의 초대총재가 되었고, 물산장려운동·절제운동·지방전도운동·창문사운동 등을 지도했다.

그해 9월 조선일보사 사장으로 취임한 뒤 11월 1일부터 지방판 부록을 발행하고, 11월 23일부터는 조석간(朝夕刊) 6면체제를 확립했다. 1925년 4월 15일 제1회 전국기자대회가 열리자 의장을 지냈다.

1927년 2월 15일 기회주의를 부정하고 사상·이념을 초월해 민족적 단결을 목표로 하는 민족단일전선 신간회가 결성되자 회장으로 추대되었다. 이때 병석에 있었으나 이를 수락했다.

그해 3월 죽은 뒤 4월 7일 최초의 사회장이 치러졌고, 한산 선영(先塋)에 안장되었다. 1957년 이승만 대통령의 지시로 경기도 양주군 장흥명 삼하리로 이장되었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