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월남이상재 ▒

이 시대에 그리워지는 월남 이상재 선생

천하한량 2007. 4. 5. 18:59
이 시대에 그리워지는 월남 이상재 선생 ■  
 월남 이상재(李商在).
 그의 동상은 종로 4가 종묘 공원의 서북쪽에 우뚝 서있다. 오른쪽으로 그가 평생을 몸담아온 YMCA가 멀지 않고 남서쪽으로 그가 또 평생을 통해 싸워야 했던 일본인들이 무리지어 살았던 진고개쯤이 있고 북쪽으로 그가 폐하로 섬겼던 고종과 순종의 위패를 비롯하여 역대 조선 국왕들의 혼백을 안치한 종묘가 있고.
 이런 이유들만으로 해서도 그의 동상은 서울시내에 산재한 그 어느 동상보다도 좋은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월남 선생의 동상을 보고 있노라면 한가지 눈에 띄는 것이 있다. 의도적인 삼가함 때문으로 여겨지지만 이력이 한줄도 없다는 것. 그리고 다만 검은 돌위에 새긴 자필한 시 한수와 몇 사람의 헌시와 민주당 시절의 대통령 윤보선씨의 짧은 글이 전부. 살펴보면 자필시 임이 분명한
 萬事無求源理外 / 一心自在不言中
 온갖 일 원리 밖에서 찾지마라 / 한마음 말없는 속에 절로 있나니

 어질고 굳센 기상 조찰코 깨끗한 정기/부귀도 임의 마음 흔들지 못했고/총칼도 임의 뜻을 빼앗지 못했네/中略/해지고 어두운 거리/우리들 청년의 길은 험악도 하였어라/모두다 헤맸네. 호걸은 망명하고 지도자는 없었네/이중에 선생은 우리들의 등불/나라의 청년들 의지하던 곳(소설가 박종화)
 우국의 한서린 풍자 천생의 야인이여/흰터럭 푸른 마음 구원의 청년이여/한팔로 기우는 나라 목숨껏 떠받치고/또 한팔로 젊은 일꾼 벗삼아 이끄셨네(언론인 이관구)
 부분적으로나마 고인의 숨결과 고뇌가 느껴진다. 멀고 아득한 개국이래 단 한차례 겪어야 했던 민족의 완전 망국. 그리고 이때의 가장 어둡고 절망적인 시대를 살아야 했던 선비였고 지사였고 교육자였고 독립운동가였고 언론인이었고 그런가 하면 철저한 기독신앙인이기도 했던 그래서 보탬도 뺌도 없이 말 그대로 파란만장의 일생.
 그러니 그 숱한 인생역정. 그 깊은 숨은 뜻들은 어찌 몇줄의 말로 기록할 수 있을 것인가. 월남은 1850년. 충남 서천 한산에서 태어나 1927년 3월 27일 78세로 서울 재동 자택에서 하세한다. 18세때 과거에 낙방했지만 32세때는 신사유람단의 일원이 되어 일본을 시찰했고 조선왕국 말기의 외교관이 되기도 했다.
 민비시해 사건과 더불어 고종이 러시아 공관으로 몸을 피하면서는 국왕을 지근 거리에서 모시면서 탐관오리들과 맞서기도 하고, 서재필, 윤치호, 남궁억 등과 함께 독립협회를 조직하기도 한다. 1903년. 54세때 월남은 감옥에서 선교사들이 차입해준 성경을 읽고 나서 기독인으로 다시 태어나고 2년 후에는 지금 YMCA의 전신인 황성(皇城)YMCA의 교육부장이 되어 평생을 YMCA맨(man)으로 재직하는 계기를 맞기도 한다.
 3·1운동 당시 기독교 대표로 독립선언서에 서명을 하려고 했다가 일선에 섰던 사람들이 감옥에 간 뒤의 일을 맡아 달라는 권유를 받고 전면에 나서는 일을 삼가한 적도 있고 상해 임시정부의 대통령 취임을 강력히 권유받으면서도 나같은 늙은이 하나라도 국내에 남아 있어야 하지 않겠느냐며 국내 잔류를 고집하기도 했다고 한다. 그리고 죽기 며칠전 YMCA의 청년 몇이 문병을 가자 힘없는 목소리로 “이 녀석들 나 죽었나 살았나 보러 왔지?” 하며 청년들을 어이없게 만들기도. 그러나 이렇게 유머러스했던 월남은 망국(亡國)말고도 개인적으로 많은 아픔을 겪기도 했다. 승윤, 승인, 승간이라는 이름의 세 아들을 자기 생전에 다 여의여야 했고 첫부인과 재혼했던 다음 부인마저 먼저 보내야 하는 불운을 겪기도 했다.
 하지만 그의 삶을 추적하다 보면 한가지 두드러지게 눈에 띄는 것이 있다. 국가패망, 이민족 지배, 가난, 일본의 끈질긴 회유, 가정적 불행, 그리고 계속 승승장구의 기세로 뻗어 나가는 일본 세력의 확장과 함께 민족 독립의 가능성이 점점 희미해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패배주의에 빠지지 않았다는 점. 믿는 우국지사들이 뜻을 굽히고 해외로 몸을 피하던 와중에도 국내에 남아 폭력이 아닌 말과 글과 청년 교육과 신앙으로 일제와 맞서 불패(不敗)의 독립의지를 지켜왔다는 점.
 시대적 고난과 통분을 눈물과 웃음속에 담으며 불패의 정신, 불패의 인간상으로 우뚝 서주었다는 점.
 그가 충남 한산 땅에 묻힐때 전주 군산에서 모여든 흰옷 입은 수백명의 여학생들이 흰 상여끈을 잡았고, 그 호곡행렬이 십리에 이르렀으며 검은 옷의 남학생들은 영구가 움직이는 기차역마다 도립하여 영별의 트럼펫을 불었다고 그 일을 회상하는 사람들은 말한다. 그리고 “배우라, 믿으라, 낙심하지 말라”는 세 가지 유언을 남긴 그는 지금 청동(靑銅)의 인간으로 서울 땅을 지킨다.
나명렬(작가/본지 편집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