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월남이상재 ▒

1927년 봄, 월남 서거시 조선일보 기사 (1927.3.30)

천하한량 2007. 4. 5. 17:41

<1927.3.30 조선일보 기사>


이상재 선생께서 세상을 떠나셨다.
선생께서 가시니 이 나라는 어디서 의로움을 찾으며 이 백성은 어디서 스승을 구하겠는가!


오직 덕스러움을 지니신 어른으로 선생을 생각하니
우리는 그의 업적을 들추려하지 않고 그의 사상을 따지려하지 않는다.


파란이 중첩했던 민족의 운명을 그대로 나타낸 기구한 일생을 통하여,
의로운 기상과 강직한 정신으로 일관한 그의 인격 그것이 곧 선생의 사업이요,
달리 그 유례를 찾을 길 없는 위대한 업적이 아니냐!


선생은 충남 한산에서 태어나 젊은 나이에 벼슬길에 올라 외교계에 투신,
일본과 미국 등지에 부임할 때부터 그 바른 말과 곧은 행실에 얽힌 많은 일화를 남기게 되었다.


정부가 부패하고 정치가 타락한 사실을 분개하여 선생은 분연히 관직을 박차고 물러나,
민중을 깨우치는 일이 시급함을 깨달았으므로 독립협회가 창설될 때에
부회장의 중책을 맡았다가 당국의 비위를 거슬려 옥에 갇힌 일도 있었다.


그러는 중에, 피상적으로 정치를 바로잡으려는 노력만으로는 조국을 건지지 못한다고 느낀 선생은
50이 넘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단연 기독교에 몸을 바쳐
우리 민족이 정신적으로 거듭나야 할 것을 강력히 주장하여 왔다.


종교계 전반을 위하여 또는 젊은이들의 훈련을 위하여 또는 민간의 여러 가지 사업을 위하여
10년이 하루같이 그 동안 나이를 무릅쓰고 동분서주하여 어엿이 우리 사회의 돌기둥을 이루었던 것이다.


최근에는 선생의 늠름한 얼굴에도 주름살이 잡히고,
위엄이 있으면서도 자애로워 광채가 떠돌던 그 두 눈도 흐려지기는 했지만,
나이 많은 젊은이로 자처하시던 어른다웁게,
정신만은 새파란 청년이셨으니,
그렇게 덧없이 가실 줄은 꿈에도 몰랐는데 뜻밖에도 오늘 이 슬픈 소식에 접하였구나!


선생께서는 가셔서 아니될 이 때에 어쩌면 우리를 두고 가셨나이까?


오늘,
이 땅에 용기와 신념있는 지도자가 꼭 있어야 할 이 때,
용기와 신념의 표본이신 선생이 가셨구나!


오늘,
우리의 조국이 의기와 희망을 찾아 목이 타는데,
의기와 희망의 화신이신 선생을 잃었구나!

아드님이 먼저 세상을 떠났을 때,
<이 놈, 너도 나를 두고 먼저 가느냐!>고 태연하게 말씀하시더니
이제 선생은 우리를 두고 먼저 가셨구나!

 

바른 말이면 무슨 말이나 또 누구 앞에서나 바른 대로 말하기를 사양치 아니하시더니,
이제 그 누가 우리를 위하여 바른말을 하여줄까?


옳다고 믿는 일이면 물불을 가리지 아니하시고 감행하시더니,
이제 그 누가 우리의 옳음을 드러내줄까?


봄빛이 옛터를 찾아들어 바야흐로 삼천리 강산에 새싹이 움트려는 이 때,
선생이 80평생을 두고 부르짖던 의기와 용기,
신앙과 소망이 이 겨레 가슴마다 꽃피려 하는 이 때,

선생께서 사랑하고 아끼던 이 나라의 젊은이들이 스스로의 힘을 자각하기 시작하는 이 때,
이제부터 선생의 날이 밝아오려는 이 때,
선생의 뜻이 꽃처럼 피어나는 이 때,
선생은 이 산과 강과 민족을 그대로 두고 가셨나이까?

 

때를 만나셨던들 그 큰 날개로 9만리 창공을 덮었을 것을,
때와 사람이 이토록 어긋날 수 있을까? 이제 서러워한들 무슨 소용 있으랴?


80평생에 집 한 칸도 남기신 것이 없다고 하나,
오직 선생의 인격 하나가 돈으로 사지 못할 큰 보화라 그 이상 무엇을 구하리오!
이 나라가 그런 의기를 가졌다는 것만으로,
이 백성에게 그런 의연한 기개가 있었다는 것만으로,
선생은 우리의 다시없는 스승이었고 둘도 없는 자랑이 아니겠는가!

 

선생이여 편히 가소서.
선생의 육신은 비록 가셨으나 선생의 의로운 기상은 가시지 아니하리니,
삼천리에 그 의기가 가득 차는 날,
<늙은 조선>이 선생의 뜻을 따라 <젊은 조선>으로 거듭하는 그 날,
우리는 선생의 영전에 고하여 오늘의 눈물을 씻으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