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월남이상재 ▒

忠南 韓山으로 유해가 운구되는 700리 길가에는 120여 단체 회원들이 나와 장례 행렬을 지켜봤다.(조선일보 80년사)

천하한량 2007. 4. 5. 17:43
신간회가 창립된 지 한 달쯤 지나서 李商在 사장이 老患으로 자리에 누웠다. 부득이 3월 25일에 사장직에서 물러났다. 후임 5대 사장은 신석우 부사장이 맡아 같은 날 취임했다. 이상재 전 사장은 사임 나흘 만인 1927년 3월 29일에 78세로 생애를 마감했다.
국내 민족주의 진영의 지도자로, 조선일보 사장으로, 신간회 회장으로 활약하던 이상재의 별세에 조선일보는 ‘月南 李商在 선생이 남긴 逸話’를 장기 연재했다. ‘李商在先生 逸話片片’의 제목으로 3월 30일자 석간부터 4월 6일자까지 8회를 연재했다. 그러나 삭제투성이로 겨우겨우 回를 거듭해 나가다 제7회 분에서 마침내 압수되고 말았다. 압수된 일화는 3·1운동 다음해에 우리나라에 온 日本 代議士 두서너 명과 나눈 대화의 내용이다.

“조선과 일본과는 夫婦 같은 사이라 떠나라 해도 떠날 수가 없다”고 대의사가 말하자, 이상재는 “누가 서방이고 누가 각시인가” 하고 묻더니 “굳이 부부간이라고 한다면 强姦하고 있는 것이겠지…” 하고 대답했다.
난처해진 대의사들이 “그렇다면 조선과 일본과의 장래를 어떻게 하면 행복하게 된다고 생각하느냐”고 물었다.
이상재는 이렇게 대답했다. “왼손과 오른손을 힘으로 결박해 놓고서야 일을 할 수 없는게 아니냐, 그러니 두 손을 풀어놓는 것이 선결문제이다.”

게재된 일화만 압수된 것이 아니다. 그 다음날(1927년 4월 6일자) 이상재를 두고 쓴 ‘社會葬의 意義’라는 논설도 압수됐다. 이상재를 중국의 孫文에 비유한 이 논설은 “우리는 선생을 社會葬으로 보내는 데 있어 사회적으로 특별한 의의를 파악하지 않으면 안된다”로 끝을 맺었다. 총독부는 ‘朝鮮出版警察槪要’에서 이상재의 별세를 다룬 조선일보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술했다.

以前 朝鮮日報 社長으로서 民族社會主義者인 月南 李商在에 대하여 社長 申錫雨는 자신이 붓을 잡고 ‘月南先生 追悼의 辭’라 題하고 ‘月南 李商在先生의 前半生은 피와 땀과의 歷史를 남기고 後半生에 있어서 民族主義는 社會主義의 根源이며 社會主義는 卽 民族主義 本流라는 眞理를 發見해 주셨다. 우리는 氏의 遺志를 받들어 忠誠을 다하고 心血을 기울여 그의 事業을 擴充함에 힘쓸 뿐이다. 朝鮮獨立의 두길의 어느 것도 한 根源이다’고 不穩한 辭句의 記事를 게재했다.

조선일보는 ‘月南先生 社會葬儀’라는 제목으로 3월 30일자 석간부터 장례날까지 9회를 연재했다. 장례식은 4월 7일에 거행됐다. 장례위원장을 尹致昊로 사회장이 치러졌는데 고향인 忠南 韓山으로 유해가 운구되는 700리 길가에는 120여 단체 회원들이 나와 장례 행렬을 지켜봤다. 이 때의 조객 수는 2만이라고 기록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