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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 반대편에 섰던 두 사람의 애국자 - 김상헌(金尙憲)과 최명길(崔明吉) "

천하한량 2007. 3. 29. 17:07
 서로 반대편에 섰던 두 사람의 애국자 - 김상헌(金尙憲)과 최명길(崔明吉) "  
 
 
이씨조선 인조 대왕 시절.
 
병자호란(1637년)을 맞아 나라가 위기에 처하여 남한산성으로 피신한 인조임금을 모신 충신 김상헌과 최명길은 죽기를 결하고 서로 반대 의견을 주장한다.
 
즉 수도를 점령하고 남한산성 코밑에 들이닥친 청나라 군사와 화의(和議)를 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최명길이 청 태종 앞으로 보내는 화의국서를 작성하자 최후의 일인까지 싸우다 죽을지언정 오랑캐 따위에게 항복할 수 없다며 최명길이 쓰고 있는 화의 국서를 찢어버린 김상헌. 결국 최명길의 의견대로 화의가 이루어지고 전쟁은 인조 임금이 오랑캐 추장 앞에 세 번 조아리고 아홉번 머리를 쳐박는 삼배구고두례를 행하는 항복으로 끝났다.
 
최명길이 어명에 의해 무조건 항복하는 치욕적인 글을 썼다.  
"조선 국왕은 삼가 대청 황제 폐하께 글을 올립니다. 엎드려 생각컨대, 대국의 위엄과 덕이 멀리 퍼져 있으나, 소국은 이를 모르고 이었습니다. 원한옵건대 대국의 명을 받아 그 번국(藩國)이 되고자 합니다......."

옆에서 이 글을 지켜보던 김상헌이 서한을 찢고 최명길에게 이르되,
"대감은 어찌 항복하는 글만 쓰시오. 선대부께서는 명성이 있던 분이었소. 부끄럽지 않으시오?"

최명길은 찢긴 서한을 붙이면서,
"글을 찢는 사람도 없어서는 안 되고, 다시 붙이는 사람도 없어서는 안 되리라. 대감으로서는 당연한 말씀이오. 대감은 과연 의사요. 그러나 종사를 위해서는 다시 붙이지 않을 수 없으니 어찌 하리요."

이들은 모두 절박한 국난을 극복하기 위해 자신의 소신을 토로하였던 것이다.
 
항복문서를 찢고 통곡하였던 김상헌은 항복 이후 식음을 전폐하고 자결을 기도하다가 실패한 뒤 안동의 학가산(鶴駕山)에 들어가, 와신상담해서 치욕을 씻고 명나라와의 의리를 유지해야 한다는 내용의 상소를 올린 뒤 두문불출하였다.

가노라 삼각산 (三角山)아 다시보자 한강수(漢江水)야
고국산천(故國山川)을 떠나고자 하랴마는
시절(時節)이 하 수상(殊常)하니 올동 말동 하여라
김상헌(金尙憲)
 
청 나라에 잡혀가면서 지어 남긴 김상헌의 유명한 시조 한 수이다.
 
김상헌은 청 나라 심양 (1641년-1645년)에 끌려가 4년 동안 수감생활을 하였다.
 
청 나라 심양의 감옥에 갇힌 김상헌이 어느 날 보니 옆방에 최명길(1643년-1645년 2년간 수감생활)이 갇혀 있는 것이 아닌가? 김상헌은 최명길을 송나라 진회(秦檜)와 같이 화의함으로서 나라를 망칠 뿐만 아니라 일신의 영화와 부귀만을 노리는 매국노라고 생각하여 원수처럼 미워하였으나 그것이 아니고 최명길이 진심으로 임금을 구하고 도탄에 빠진 백성을 사랑하고 나라를 보전하고자 항복하기를 주장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 것이다. 지천 최명길은 청음 김상헌이 이름을 후세에 날리기 위하여 척화를 고집한 것으로 오해했으나 지금 잡혀 와서도 여전히 굳굳하게 저항하며 항복하지 않는 것을 보니 참으로 충의의 선비인 것을 알았다.
그리고 다같이 배청숭명 (背淸崇明) 즉 오랑캐 나라인 청나라를 배척하고 비록 국력이 쇠락해가고 있지만 명 나라와의 외교관계를 유지해야 한다는 명분을 지니고 있음을 그 감옥에서 확인하게 된 것이었다.   
 
두 사람의 길은 한 곳이었으나 다만 그 가는 길이 다를 뿐이고 만나는 곳은 하나였던 것이다
 
자기의 뜨거운 애국심만이 옳은 것이 아니라고 깨닫고 서로 상대방 앞에 머리 숙여 화해를 자청했던 것이다.
 
청인들의 굴복 요구에 굴하지 않고 강직한 성격과 기개로써 끝까지 저항하였던 김상헌은  1645년 소현세자와 더불어 최명길과 함께 귀국하게 된다. 한편 먼저 잡혀갔던 삼학사(三學士 홍익한 윤집 오달제)는 굴복하지 아니하여 중원(中原)에서 고혼이 되고 말았다.

김상헌은 죽인다고 해도 응하지 않았고 삼학사는 살려준다고 해도 대답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