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 황후, 운명을 열어간 여인.
1. 이름없는 여인
고려 말 권신 기철의 누이라고 알려져 있는 고려의 공녀로서 원나라 최후의 황제인 순제 (1320~1370)의 황후가 된 기황후의 몽골식 이름은 완자홀도(完者忽都)라고 알려져 있는 반면 고려식 이름은 물론 태어난 년도도... 죽은 년도도 알 수 없는 채로 단지 역사의 한 귀퉁이에 '기황후'라는 이름만 남겨놓고 있다.
기황후는 행주 기씨 소생으로 조선시대의 걸출한 학자였던 기대승의 선조가 된다. 뿌리깊은 명문가 사람이었고 고려의 여인으로 원나라에 잡혀 갔다가 원나라 순제의 황후로 책봉되어 고귀한 신분으로 변신한 그녀의 이름도 모르고 생몰년도도 모른다는 건 이상하지 않을 수 없다. 고조부는
문하시랑평장사를 지낸 윤숙(允肅)이며, 아버지는 총부산랑(摠部散郎)을 지낸 자오(子敖)이다.
이렇게 그녀의 아버지와 오라비인 기철에 대해서는 그 생몰과 벼슬 등이 대체로 자세히 기록되어 있는데 반하여 그녀의 기록이 어찌하여 그녀의 가족사에서 고스란히 빠져 있는 것인가?
고려 여인으로 유일하게 한 때 중국을 지배하고 중앙아시아를 거쳐 동유럽에까지 걸치는 대 제국을 다스리던 원나라 말엽 황제의 후궁이나 비빈이 아닌 황후가 된 기황후에 대해서 고려의 정부에서야 그렇다 치더라도 하다 못해 그녀의 친정 집안에서 자기네 가문의 영광스럽고 자랑스러운
사실로 기록을 남길 만 하건마는 그녀의 이름은 고사하고 출생이나 공녀로 바쳐진 연도나 나이
같은 자료가 하나도 남아있지 않은 사실은 도저히 이해가 안가는 일이다.
전쟁통에 제대로 기록을 남기지 못하게 되었거나 아니면 혹시.... 역사가 거부했던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여인까지 바쳐가며 지속시켜야 했던 고려 왕실의 나약함과 비참함을 감추기 위하여 일부러 공녀들에 대한 기록을 고의적으로 지워버렸을 수도 있다. 기황후가 우리 민족의 뇌리에 부정적으로 각인된 이유는 오빠 기철(奇轍) 등 친인척 관리에 실패했기 때문이다. 기철은 「고려사」반역조에 올라있을 정도로 평판이 나빴다. 기철은 동생 덕에 원나라로부터 정동행성 참지정사에 임명되고 고려로부터도 덕성부원군에 임명되면서 고려 임금을 우습게 알았다. 공민왕 2년(1353) 기황후의 모친 이씨를 위한 연회에서 공민왕이 조카인 태자에게 무릎꿇고 잔을 올리고 태자가 왕에 앞서 이씨에게 잔을 권하는 것을 본 기철은 기고만장했다. 그는 공민왕과 말을 나란히 하며 걸어가려다가 호위군사들에게 제지당하기도 하고, 공민왕에게 시를 보내면서 신하라는 말을 쓰지 않기도 했다. 여기에 조카 기삼만 등 친족들이 백성들의 전토를 함부로 빼앗는 전횡을 저지르면서 원성의 대상이 되었다. 그래도 그녀는 스스로의 길을 찾고 비록 그 결과가 고려인들에겐 악영향을 끼쳤을지라도 그녀 자신만의 입장에서 본다면 아주 크게 성공한 삶이 아닐 수 없다고 본다. 그녀는 공녀라는 참담한 현실에도 굴하지 않고 오히려 그 기회를 이용해 낯선 이국땅에서 그녀의 야망을 꽃피웠고 혼란한 시대의 틈을 잡아 차근차근 길을 밟아갔던 것을 보면 그녀는 나름대로 현실적이고 영리한 여성이었다.
훗날 세계 제국의 지배자로 군림한 기황후가 처음으로 넓고도 넓은 중원 천지에 내 던져 지듯 세상으로 끌려 나왔던 그 때에는 어린 소녀에게 있어서 인생의 첫 출발은 절망뿐이었으리라.
고려인 기자오(奇子敖)의 막내딸이 원나라에 바쳐지는 공녀(貢女)로 결정되었을 때, 많은 사람들은 그녀의 비참한 인생 길을 동정했다. 목은 이색이 “공녀로 선발되면 우물에 빠져 죽는 사람도
있고, 목을 매어 죽는 사람도 있다”고 말할 정도로 비참한 상황이었다
좌절에 빠진 사람들의 유형을 살펴보면 더더욱 좌절에 빠져 허우적 거리는 사람... 모든 것을 포기하고 목숨마저 정리하려는 사람... 남이라도 끌어 들여 치졸한 만족을 보려는 사람... 적당히 순응하고 살아가는 사람... 좌절에 포기하지 않고 이겨나가려는 사람... 차라리 그 현실을 이용하는 사람... 기타 등등...
남이라도 끌어들여 치졸한 만족을 보려는 여인으로 나는 김 X X 국회의원을 떠 올린다.
일본 형사로 만주에서 무수한 독립 애국지사들을 잡아 고문하고 죽인 일본주구 매국노를 애비로 가진 김 X X 국회의원이 뻔뻔스럽고 가증스런 거짓말로 항일독립운동가의 후손이라고 우기면서 아직도 그 자리에 버젓이 앉아있는 데는 정말 구역질이 나서 견딜 수 없다.
2. 운명을 내 것으로 만드는 여인
고려의 행주 사람 기자오의 막내딸이 원나라 대도(지금의 북경)에서 순제의 차를 올리는 궁녀가 된 것은 1333년으로 추정되는데 그녀의 나이와 대도에까지 오게 된 연유는 확실히 알 수는 없지만 휘정원의 원사였던 투만질아(透滿迭兒)의 주선으로 궁에 들어가게 된 것만은 확실한 것 같다.
고려 출신의 여인이 황실에 들어간 것은 그녀가 처음이 아니고, 또한 왕족에게서 총애를 받은 것 또한 그녀가 처음은 아니지만, 그녀를 황후로 책봉할 정도였으니 그녀에 대한 순제의 사랑이 각별했다고 볼 수 있다.
‘원사(元史) 후비열전’이 “순제를 모시면서 비(妃:기씨)의 천성이 총명해 갈수록 총애를 받았다”고 기록한 것처럼 그녀는 곧 순제를 사로잡았다. 여기에는 고려에 대한 순제의 남다른 추억도 작용했다. 명종의 장자로서 황태자였던 토곤 테무르(순제)는 1330년 7월 원 황실 내부의 싸움에 패배해 인천 서쪽 대청도에 유배된 적이 있었다. 1년 5개월을 대청도에서 보낸 그는 원나라로 돌아가 2년 후에 황제에 즉위한다. 동아시아에서 동유럽에 이르는 세계제국의 후계자에서 고려의 작은 섬에 유배되었던 기억은 어려운 시절에 대한 향수와 어우러져 그녀에 대한 호감으로 작용했던 것 같다.
당시 원 황실은 어찌 어찌하여 순제가 황위에 오르긴 했으나 연철목아(燕鐵木兒)의 손에 모든 일이 휘둘리는 상황이었다. 연철목아가 죽은 후에도 그 집안의 권세는 사그라들지 않아 연철목아의 딸인 답납실리 황후의 오만함도 극에 달하여. 그런 상황에서 차츰 황후에 대한 애정이 식고 멀어 지는 와중에 약삭빠르고 재치있는 기황후가 눈에 띈 것은 어쩌면 너무도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곧 큰 시련에 부딪쳤다. 다름 아닌 황후 답납실리의 질투 때문이었다. 답납실리는 채찍으로 그녀를 매질할 정도로 질투가 심했으나, 그녀는 결코 좌절하지 않았다.
답납실리 황후와 애정을 다투던 그녀의 운명이 갑자기 뒤바뀌게 된 것은 1335년 승상 바엔(伯顔) 과 손잡고 순제폐위의 황제역모사건에 답납실리 황후와 친정을 연루시켜 모반사건의 주모자인 숙부의 피를 뒤집어쓴 채 살려달라고 애원하는 황후를 순제는 아주 냉혹하게 외면하고 사약을
내리고 만다. 평소 순제의 성격을 생각해 본다면 이해할 수가 없는 일이다. 그러나 이제 순제에게는 사랑하는 고려 여인이 바로 곁에 있어서 애정이 식어버린 답납실리 왕후의 공연한 질투를
깨끗이 제거할 수 있는 기회로 삼아 사약 내리기를 주춤거리지 않았던 것으로 볼 수 있다.
답납실리 황후가 죽자 순제는 곧바로 기황후를 황후로 책봉하려 했으나 새로 권력을 잡은 권신 관직 이름만 246자에 달했던 바엔(伯顔)의 극렬한 반대로 그녀의 황후책봉을 단념하고 순제 5년(1337) 가법에 따라 옹기라트가의 바엔후두(伯顔忽都)를 황후로 맞이한다. 그러나 기황후에 대한 순제의 사랑은 깊어갔고 궁중에서 그녀의 지위를 확고히 해주는 일이 생겼으니, 바로 1339년에 기황후가 황자 아유시리다라(愛猶識理達臘)을 낳았다.
그녀의 조종을 받은 순제는 스승 샤라빤과 손잡고 바앤을 축출하는데 성공했다. 1340년 그녀는 드디어 세계를 지배하는 원제국의 제2황후가 되었다. 그녀의 성공에는 고려 출신들을 주축으로
철저하게 현지화 전략을 펼친 것이 주효했다. ‘원사(元史)’는 그녀가 맛있는 음식이 생기면 먼저
징기스칸을 모신 태묘(太廟)에 바친 후에야 자신이 먹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런 현지화 전략으로 명분을 축적하면서 원의 황실을 장악했던 것이다. 그러나 정후와는 달리 책봉의 의식이나 황후의 보(寶)도 가지지 못했기 때문에 흥성궁(興聖宮:현 베이징 중남해 자리)에 거주하면서 황후부속기관인 휘정원을 자정원(資政院)으로 개편해 심복인 고용보를 초대 자정원사(資政院使)로 삼았다. 자정원은 기황후를 추종하는 고려 출신 환관들은
물론 몽골 출신 고위관리들도 가담해 ‘자정원당’이라는 강력한 정치세력을 형성했다. 기황후는 1353년 14세의 아들 아유시리다라를 황태자로 책봉하는데 성공, 안정적인 세력을 구축했다.
또한 그녀는 고려 출신 환관 박불화를 군사 통솔의 최고책임자인 추밀원 동지추밀원사(同知樞密院事)로 만들어 군사권까지 장악했다.
그녀는 이렇게 장악한 권력을 누구를 위해 사용해야 하는지를 잘 알고 있었다. 공녀였던 그녀는 힘없는 백성들의 고초를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원사 후비열전’은 1358년 북경에 큰 기근이 들자 기황후가 관청에 명해 죽을 쑤어주고, 자정원에서는 금은 포백·곡식 등을 내어 십여 만 명에 달하는 아사자의 장례를 치러주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3. 광활한 초원으로 스러진 꿈이여
그러던 중 고려에서는 공민왕의 반원세력 숙청으로 인해 그녀의 오라비인 기철 일당이 죽음을
맞게 되자 피는 물보다 진하다고 격노한 기황후는 1364년 황자에게 보복을 호소했고, 결국 고려에 군사를 보냈으나 1만의 군사는 최영, 이성계에게 참패하고 겨우 17기만이 원으로 돌아갔다. 기황후의 지시를 받은 자정원사 박불화(朴不花)가 양위를 추진하자 순제는 거칠게 반발했다.
순제는 무능·태만해도 최고권력자 자리 즉 황위를 내놓을 생각은 없었다. 그는 대신 황태자에게
중서령추밀사(中書令樞密使)의 직책과 함께 군사권을 주는 것으로 타협했다. 이것이 기황후의
실수였다. 당시 과감한 구조조정은 원나라의 선택이 아니라 필수였다. 이런 위기의 시기에 순제라는 무능한 최고권력자를 둔 원나라는 급속히 약화됐다.
혼란한 원 말기, 쓰러져 가는 제국의 황위 자리를 놓고 아버지와 아들의 실랑이가 계속되는 와중에 정후였던 백안홀도가 급사한다. 이로 인해 기황후의 야망이 실현되는 듯 싶었으나 순제는 황태자를 앞세워 끊임없이 음모를 꾸몄던 그녀에게 정이 떨어져 머뭇거리기만 한다. 그러나 자정원 일파의 등쌀에 지친 순제는 결국 기황후의 정후 책봉에 동의를 하고 만다.
1368년 원제국은 주원장에게 대도 연경을 빼앗기고 북쪽 몽고초원으로 쫓겨가야 했다. 공녀 출신으로 황후까지 된 기씨 소녀의 ‘몽골리안 드림(Mongolian dream)’도 몽골 초원에 묻혀져 잊혀졌다. 한국 여성으로는 최초이자 마지막으로 중원의 국모가 되었건만 그녀의 영화는 그리 길지 않았다. 자신의 아들이 원의 소종이 되었지만 정후로 책봉된 지 2년 남짓이나 되었을까... 1368년 8월 원나라는 화려했던 대도의 생활을 접고 다시 저 광활한 초원으로 되돌아가야 했다. 그 이후의 일은 알 수가 없다. 어떻게 살았는지.. 그리고 어떻게 죽었는지... 단지 수완좋은 그녀이기에 그렇게 비참하게 생을 마감하지는 않았으리라 추측해 볼 뿐이다. 그녀는 공녀로 출발하여 거대한 중원 땅의 안주인이 되었던 여인이다. 원 제국의 대신들로 하여금 고려 여인을 처첩으로 얻지 않으면 안되도록 했던 수완 좋은 인물이기도 하며, 한때 원 황실에 들 불처럼 번졌던 고려양도 그녀의 영향 때문이다. 이래저래 중국사에 있어 적지 않은 흔적을 남긴
사람이지만 정치 사회적으로 혼란스럽고 권력다툼이 이미 막을 올린 고려 말의 상황하에서는
기 황후의 사연은 굳이 외면 당할 수 밖에 없었고 그리하여 우리 나라 역사에서는 거의 잊혀지고 말았다.
한갖 이국 여인으로서 35년 간 원나라 황실에서 그 꿈을 이루기 위하여 정말 치열하게 살아왔던
가냘픈 고려 여인의 운명을 열어가는 과정은 그런대로 더듬어 볼 수 있지만 이 35년의 세월을
그녀의 생애에서 떼어내고 나면 나머지 생애는 암흑 저 편으로 사라져 더듬어 볼 수가 없다.
주원장에게 쫓겨 광할한 초원의 언덕 저편으로 떠나간 뒤 그녀의 역사는 어디에도 흔적 한 점
남김이 없이 가을 들녘 초저녁 연기처럼 사라지고 만다.
기 황후, 그 이름없는 여인에게 문득 노천명의 이 시 한 수를 바치고 싶다는 충동에 사로잡힌다.
이름 없는 여인이 되어 < 노천명 >
어느 조그만 산골로 들어가
나는 이름없는 여인이 되고 싶소.
초가 지붕에 박넝쿨 올리고
삼밭엔 오이랑 호박을 놓고
들장미로 울타리를 엮어
마당엔 하늘을 욕심껏 들여 놓고
밤이면 실컷 볕을 안고
부엉이가 우는 밤도 내사 외롭지 않겠오.
기차가 지나가 버리는 마을
놋양푼의 수수엿을 녹여 먹으며
내 좋은 사람과 밤이 늦도록
여우 나는 산골 얘기를 하면
삽살개는 달을 짓고
나는 여왕보다 더 행복하겠오.
동아시아에서 동유럽에 걸친 대 제국의 마지막 황후로서 한 여름 밤의 짧은 꿈처럼 누린 그 잠깐의 영화를 위하여 그리도 긴 나날들을 운명과 다투었던가…
권력도 영화도 사랑도 모두 정말 부질 없는 것을…
이 모두 치마폭의 한줌 먼지처럼 어느새 떨쳐버리고 말 게 될 것을…
뭉게구름만 멀리 멀리로 흘러가는 곳,
저 초원을 가로지르는 말굽 소리만 아득히 들리는 그 곳.
아무도 찾아오는 이 없는 하늘아래에서 무리 지어 남쪽으로 날아가는 철새 떼를 쳐다보며
한 없이 반추되는 치열했던 삶의 회한으로 가득 눈물 고인 채 가슴으로 울고 있는가?
돌아 보려 해도 고국은 이미 없고, 점점 저물어 가는 고려 말, 반역죄로 몰락해버린 친정 쪽
그 누구 한 사람 그리운 이 남아 있지 않은 줄 번연히 알면서도 그렇지만 피 토하게 그리운
사연이야 어찌 떨쳐 버리랴!
아아! 떠 오르는 그리운 어머니의 그리도 곱디 곱던 얼굴이여…! !
나는 여왕보다 더 행복하겠오라는 한 귀절은 어쩌면 초원으로 돌아간 기황후를 향한 시인의
진심이련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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